
프릴루츠키 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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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lutskyn Прилуцкого 프릴루츠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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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
원산지 | |
20세기 초, 세계 유수의 군대들은 최초의 자동 장전 권총들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군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고, 무장은 여전히 신뢰할 수 있지만 구식 7발 권총 시스템 리볼버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강 M1895는 수십 년 동안 러시아군에 머물렀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1905년에 세르게이 프릴루츠키가 자신이 개발한 자동 권총을 군에 제출했는데, 이는 이 종류의 소형 화기 중 최초의 러시아형 시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수년 동안 국내 최초의 자동 권총은 TK 권총으로 여겨졌다. 세르게이 코로빈이 만든 이 권총은 1926년 가을에 개발되었다. TK 권총은 .25 ACP를 사용했으며, 1926년 말 툴라에서 신형 자동 권총의 생산이 시작되어 소련 최초의 양산형 자동 권총이 되었다. 한편 프릴루츠키 또한 그런 권총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수년 동안 국내 최초의 자동 권총은 TK 권총으로 여겨졌다. 세르게이 코로빈이 만든 이 권총은 1926년 가을에 개발되었다. TK 권총은 .25 ACP를 사용했으며, 1926년 말 툴라에서 신형 자동 권총의 생산이 시작되어 소련 최초의 양산형 자동 권총이 되었다. 한편 프릴루츠키 또한 그런 권총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반자동 권총의 등장은 19세기 말에 이루어졌다. 화기 역사에서 이 시기는 기관총과 탄창식 소총의 출현으로 특징지어진다. 각국의 설계자들은 소형 화기의 중요한 기술 지표인 발사 속도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 결과 탄창으로 공급되는 최초의 자동 권총 모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전문가들은 자동 권총의 보급이 그리 빠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근접전에서 적극적인 방어 수단으로서의 이러한 권총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고, 군대 내에는 리볼버를 당장 자동 권총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많았다.
탄창에서 탄약을 꺼내 약실로 장전하는 방식의 자동 권총은 화약가스의 에너지를 이용했다. 약실 내에서 화약 연소로 발생한 에너지가 자동 작동 메커니즘을 움직이는 추진력을 제공했다. 발사를 위해서는 사수가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 20세기 초에 이러한 짧은 총열의 화기 제작에서는 잘 알려진 미국의 설계자 존 브라우닝이 큰 진전을 이루었는데, 그는 전설적인 M1911 자동 권총의 설계자로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되는 모델을 남겼다. 많은 설계자들이 미국인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각자 자신의 반자동 권총을 설계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는 외국 설계자의 작품만을 주로 사용했으며, 자체적으로 양산형 권총을 개발·연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나강 M1895 리볼버는 러시아 군대를 위해 벨기에의 에밀 · 레옹 나강 형제가 설계한 것이었다. 한편 전쟁장관 알렉세이 쿠로팟킨은 여러 차례 자국산 권총 개발 착수를 문제로 제기했다. 러일전쟁이전인 1903년, 포병관리국 정기회의에서 쿠로팟킨은 새 권총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고, 발명 포상금으로 5천 루블을 책정했다. 아마도 쿠로팟킨의 이 결정이 러시아의 무기제작자들로 하여금 권총과 이 분야의 새로운 연구에 주목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1905년, 학생 신분의 세르게이 프릴루츠키가 러시아 최초의 자동 권총 초안을 제시했다. 그는 브라우닝 권총의 원리를 참고해 7.65mm 브라우닝 탄을 사용하는 권총을 설계했으며, 이 구상은 훗날 저명한 무기 설계자 블라디미르 페도로프의 손에 전달되었다. 페도로프는 권총의 무게를 900g 이하, 구경은 9mm, 탄창은 최소 8발 이상이라는 조건을 제시하며 개선 방향을 알려주었다.
학업을 이어가던 프릴루츠키는 1911년, 권고 사항을 반영한 개량형 권총을 완성했다. 9×20mm 브라우닝 롱 탄을 사용하는 이 권총은 포병관리국에 제출되었고, 툴라 무기 공장에서 양산 가능성이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총포국은 그에게 200루블을 지급하기도 했다. 이 권총은 브라우닝 1903 권총 구조를 바탕으로 하되, 탄창 걸쇠를 측면에 배치하고 탄약을 단열 총열로 넣는 등 독창적인 설계를 도입했다. 전장은 189mm, 총열은 123mm, 탄창 용량은 8발이었으며, 오늘날 그 시제품은 툴라 무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총포국은 이 권총이 야심차고 흥미로운 설계라고 평가하면서도, 분해 과정이 복잡하고 빈 탄피가 사수 쪽으로 튀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추가 개선이 계획되었으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이어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프로젝트는 중단되고 말았다.
탄창에서 탄약을 꺼내 약실로 장전하는 방식의 자동 권총은 화약가스의 에너지를 이용했다. 약실 내에서 화약 연소로 발생한 에너지가 자동 작동 메커니즘을 움직이는 추진력을 제공했다. 발사를 위해서는 사수가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 20세기 초에 이러한 짧은 총열의 화기 제작에서는 잘 알려진 미국의 설계자 존 브라우닝이 큰 진전을 이루었는데, 그는 전설적인 M1911 자동 권총의 설계자로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되는 모델을 남겼다. 많은 설계자들이 미국인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각자 자신의 반자동 권총을 설계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는 외국 설계자의 작품만을 주로 사용했으며, 자체적으로 양산형 권총을 개발·연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나강 M1895 리볼버는 러시아 군대를 위해 벨기에의 에밀 · 레옹 나강 형제가 설계한 것이었다. 한편 전쟁장관 알렉세이 쿠로팟킨은 여러 차례 자국산 권총 개발 착수를 문제로 제기했다. 러일전쟁이전인 1903년, 포병관리국 정기회의에서 쿠로팟킨은 새 권총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고, 발명 포상금으로 5천 루블을 책정했다. 아마도 쿠로팟킨의 이 결정이 러시아의 무기제작자들로 하여금 권총과 이 분야의 새로운 연구에 주목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1905년, 학생 신분의 세르게이 프릴루츠키가 러시아 최초의 자동 권총 초안을 제시했다. 그는 브라우닝 권총의 원리를 참고해 7.65mm 브라우닝 탄을 사용하는 권총을 설계했으며, 이 구상은 훗날 저명한 무기 설계자 블라디미르 페도로프의 손에 전달되었다. 페도로프는 권총의 무게를 900g 이하, 구경은 9mm, 탄창은 최소 8발 이상이라는 조건을 제시하며 개선 방향을 알려주었다.
학업을 이어가던 프릴루츠키는 1911년, 권고 사항을 반영한 개량형 권총을 완성했다. 9×20mm 브라우닝 롱 탄을 사용하는 이 권총은 포병관리국에 제출되었고, 툴라 무기 공장에서 양산 가능성이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총포국은 그에게 200루블을 지급하기도 했다. 이 권총은 브라우닝 1903 권총 구조를 바탕으로 하되, 탄창 걸쇠를 측면에 배치하고 탄약을 단열 총열로 넣는 등 독창적인 설계를 도입했다. 전장은 189mm, 총열은 123mm, 탄창 용량은 8발이었으며, 오늘날 그 시제품은 툴라 무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총포국은 이 권총이 야심차고 흥미로운 설계라고 평가하면서도, 분해 과정이 복잡하고 빈 탄피가 사수 쪽으로 튀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추가 개선이 계획되었으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이어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프로젝트는 중단되고 말았다.
프릴루츠키는 소련 시대인 1924년에 자신의 권총에 대한 특허 출원서를 제출하고, 1927년 특허가 발급될 때까지 설계를 계속 손질했다. 초기에는 7.65mm 브라우닝 탄약을 염두에 둔 모델이었으나 개량을 거쳐 조작감이 개선되고 더 컴팩트해져 전장은 175mm, 총열은 113mm, 탄창은 7.65×17mm 탄 9발을 수납하도록 되었다.
주요 경쟁상대는 TK 권총이었다. 1928년 4월에는 프릴루츠키의 권총 10정이 적군 부대로 보내져 야전시험을 받았고, 시험 결과 프릴루츠키 권총은 코로빈과 발터 모델에 비해 구조와 분해가 단순한 장점[2]과 양호한 신뢰성을 보였다. 270회 사격 중 고장은 8회였고, 비교 대상인 발터는 17회, 코로빈은 9회를 기록했다. 명중도는 코로빈과 프릴루츠키가 비슷했고 두 모델 모두 발터보다 우수했다.
포병관리국은 프릴루츠키 권총을 시험 우승으로 인정했지만, 몇몇 결함[3]때문에 대량생산·채용은 권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약 500정이 제작되어 부대에 배치된 것으로 보이며, 설계자는 지적된 문제들을 보완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1929년 군은 새로운 탄약 7.63×25mm 마우저, 이후 7.62×25mm 토카레프로 변형에 맞춰 프릴루츠키와 코로빈에게 소총 규격 탄약에 적응시키도록 요구했고, 이번 경주에는 토카레프도 참여했다. 프릴루츠키의 개량형은 무게가 1.3kg까지 늘어나고 반동이 커지는 등의 문제를 보였고, 다른 시제품들도 유사한 결점을 드러내 수정이 요구되었다. 1930년 여름 재시험에서 토카레프의 설계가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아 결국 TT-30이 1930년 8월 말 제식으로 채용되었다.
그 결과 프릴루츠키의 권총은 인체공학 · 무게 · 신뢰성 면에서 경쟁자보다 뒤쳐졌고, 이후 프릴루츠키 자신은 권총 개발을 그만 두고 툴라 조병창에서 기관총이나 대공용 쌍열포 등 다른 무기 개발에 참여하게 된다.
주요 경쟁상대는 TK 권총이었다. 1928년 4월에는 프릴루츠키의 권총 10정이 적군 부대로 보내져 야전시험을 받았고, 시험 결과 프릴루츠키 권총은 코로빈과 발터 모델에 비해 구조와 분해가 단순한 장점[2]과 양호한 신뢰성을 보였다. 270회 사격 중 고장은 8회였고, 비교 대상인 발터는 17회, 코로빈은 9회를 기록했다. 명중도는 코로빈과 프릴루츠키가 비슷했고 두 모델 모두 발터보다 우수했다.
포병관리국은 프릴루츠키 권총을 시험 우승으로 인정했지만, 몇몇 결함[3]때문에 대량생산·채용은 권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약 500정이 제작되어 부대에 배치된 것으로 보이며, 설계자는 지적된 문제들을 보완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1929년 군은 새로운 탄약 7.63×25mm 마우저, 이후 7.62×25mm 토카레프로 변형에 맞춰 프릴루츠키와 코로빈에게 소총 규격 탄약에 적응시키도록 요구했고, 이번 경주에는 토카레프도 참여했다. 프릴루츠키의 개량형은 무게가 1.3kg까지 늘어나고 반동이 커지는 등의 문제를 보였고, 다른 시제품들도 유사한 결점을 드러내 수정이 요구되었다. 1930년 여름 재시험에서 토카레프의 설계가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아 결국 TT-30이 1930년 8월 말 제식으로 채용되었다.
그 결과 프릴루츠키의 권총은 인체공학 · 무게 · 신뢰성 면에서 경쟁자보다 뒤쳐졌고, 이후 프릴루츠키 자신은 권총 개발을 그만 두고 툴라 조병창에서 기관총이나 대공용 쌍열포 등 다른 무기 개발에 참여하게 된다.
https://reyfman.wordpress.com/2014/02/27/%D0%BE%D0%BF%D1%8B%D1%82%D0%BD%D1%8B%D0%B9-%D0%BF%D0%B8%D1%81%D1%82%D0%BE%D0%BB%D0%B5%D1%82-%D0%BF%D1%80%D0%B8%D0%BB%D1%83%D1%86%D0%BA%D0%BE%D0%B3%D0%BE-%D1%80%D0%BE%D1%81%D1%81%D0%B8%D1%8F-1914/
https://weaponews.com/weapons/65350372-the-first-russian-semi-automatic-pisto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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