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식 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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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e 81 Carbine 八一式马步枪 81식 마보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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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
원산지 | |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에 맞서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협력하기로 한 중국공산당은 산간닝 변구라는 합법적인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었고, 무기 및 탄약도 중국국민당을 통해 공식으로 지원받았다. 이외에도 게릴라 활동 도중 적군으로부터 노획하는 등의 방식으로 무기를 조달할 수 있었으나, 국민당에 의한 무기 공급이던 적군으로부터의 무기 탈취건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수급 방법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산당 내에서 자체적으로 무기를 생산하는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1938년부터 산간닝 변구 변경에 있던 기계 공장을 차팡(현재 옌안시 안사이구 옌허완진 차팡촌)으로 이전하고 본격적인 자체 무기 생산 준비를 거쳤으며 산하 무기 개발 부서에서도 신규 무기의 개발을 시작했다. 류귀푸(刘贵福)도 총기 개발 부서에 속해 있던 인원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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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식 카빈 (无名式马步枪) |
류귀푸와 그의 동료들은 독자 소총 개발에 몰두하여 1939년 4월 25일에 시제품을 제작했으며, 전시회에 출품할 임시 명칭으로 "무명식 카빈(无名式马步枪, 무명식마보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체코슬로바키아제 Vz.24 소총을 개량한 무명식 카빈은 당시 일본군의 주력 무기인 38식 소총보다 짧고 38식 기병총보다는 길었기 때문에 카빈으로 분류되었으며, 팔로군의 전투 특성에 맞춰 일부 부품을 간소화하고 접이식 총검을 부착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전시회에 출품된 무명식 카빈은 1등상을 수상했으며, 류귀푸는 마오쩌둥으로부터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무명식 카빈은 당시 열악한 공장의 설비의 한계로 인해 소총 부품 간 호환성이 심하게 떨어졌으며, 고장이 잦고 수명이 짧다는 문제가 있었다.
1940년에 팔로군이 그간 진행해 온 게릴라 및 교전을 통해 수집한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무명식 카빈에 추가 개량이 더해졌다. 이 "신형 79식 소총(新七九步枪, 신79보창)"은 동년 8월 1일에 공산당 지도부에 보고되었으며, 펑더화이는 칭찬과 격려를 보내고 공개된 당일에서 이름을 따와 "81식 카빈"으로 명명했다.[1] 즉시 병기부에 81식 카빈의 대량생산 명령이 떨어졌으며, 당해 8~9월부터 중일전쟁이 종전된 1945년까지 약 9,000정이 생산되었다. 부품이 중구난방이었던 무명식 카빈과 달리 81식 카빈의 경우에는 설계도 및 기술자료가 각 병기창에 배포되고 품질 기준 및 치수 체계를 통일시키는 등의 조치로 소총의 표준화가 이루어졌다.
81식 카빈은 중국공산당에서 자체 개발 및 생산에 성공한 최초의 소총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중국 전체로 넓혀 봐도 20세기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이전에 중국이 독자적으로 만든 몇 안 되는 개인화기라는 의의도 있다. 이 이전에도 중국에서 소총의 독자 개발 또는 대량 생산 사례는 있긴 하지만 대부분 외국제 무기를 면허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이밖에도 류장군 소총이라는 물건이 북양정부 시절 개발되긴 했지만 생산량이 극히 미미하다.[2] 다만 81식 카빈은 생산수도 9,000정에 불과해 모든 군인을 무장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서, 여전히 팔로군 등 공산군의 주무장은 중정식 소총이나 체코제 Vz.24 등이었다. 열악한 공업 능력으로 인해 그 품질도 좋지 않았으며, 원자재가 부족해서 81식 카빈에 사용되는 모든 금속 부품들은 일본이 중국 대륙에 깔아 놓은 철도 레일을 뜯어서 조달할 정도였다. 위 문단에서 언급된 부품 간소화도 엄밀히 말하면 "개악"에 가깝다. 그럼에도 어찌되었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대륙의 지배자가 된 중국공산당에서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소총인데, 현재 중국 정부에서는 81식 카빈을 "혁명군에 지급된 최초의 국산 표준 소총으로서 항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건국 이후 양탄일성까지 이어지는 군수산업 발전사의 상징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으로 치면 대한식 소총이 갖는 위상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1940년에 팔로군이 그간 진행해 온 게릴라 및 교전을 통해 수집한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무명식 카빈에 추가 개량이 더해졌다. 이 "신형 79식 소총(新七九步枪, 신79보창)"은 동년 8월 1일에 공산당 지도부에 보고되었으며, 펑더화이는 칭찬과 격려를 보내고 공개된 당일에서 이름을 따와 "81식 카빈"으로 명명했다.[1] 즉시 병기부에 81식 카빈의 대량생산 명령이 떨어졌으며, 당해 8~9월부터 중일전쟁이 종전된 1945년까지 약 9,000정이 생산되었다. 부품이 중구난방이었던 무명식 카빈과 달리 81식 카빈의 경우에는 설계도 및 기술자료가 각 병기창에 배포되고 품질 기준 및 치수 체계를 통일시키는 등의 조치로 소총의 표준화가 이루어졌다.
81식 카빈은 중국공산당에서 자체 개발 및 생산에 성공한 최초의 소총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중국 전체로 넓혀 봐도 20세기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이전에 중국이 독자적으로 만든 몇 안 되는 개인화기라는 의의도 있다. 이 이전에도 중국에서 소총의 독자 개발 또는 대량 생산 사례는 있긴 하지만 대부분 외국제 무기를 면허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이밖에도 류장군 소총이라는 물건이 북양정부 시절 개발되긴 했지만 생산량이 극히 미미하다.[2] 다만 81식 카빈은 생산수도 9,000정에 불과해 모든 군인을 무장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서, 여전히 팔로군 등 공산군의 주무장은 중정식 소총이나 체코제 Vz.24 등이었다. 열악한 공업 능력으로 인해 그 품질도 좋지 않았으며, 원자재가 부족해서 81식 카빈에 사용되는 모든 금속 부품들은 일본이 중국 대륙에 깔아 놓은 철도 레일을 뜯어서 조달할 정도였다. 위 문단에서 언급된 부품 간소화도 엄밀히 말하면 "개악"에 가깝다. 그럼에도 어찌되었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대륙의 지배자가 된 중국공산당에서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소총인데, 현재 중국 정부에서는 81식 카빈을 "혁명군에 지급된 최초의 국산 표준 소총으로서 항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건국 이후 양탄일성까지 이어지는 군수산업 발전사의 상징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으로 치면 대한식 소총이 갖는 위상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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