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야 비상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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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멍
말라야 민족해방군기
라우 리
병력
말라야 민족해방군기
말라야 공산당
소속 말라야 민족 해방군 7,000명
말라야 민족해방군기
동조자 1,000,000명
피해 규모
말라야 연방 국기
영국 국기
말레이시아군 & 영연방군
전사 1,865명
부상 2,406명
말라야 민족해방군기
말라야 민족 해방군 & 동조자
전사 6,710명
부상 1,289명
포로 1,287명
투항 2,702명
 
 
 
 
1. 개요2. 배경3. 전개4. 사건 사고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48년부터 1960년동안 영국령 말라야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중국 공산화에 자극받은 현지 화교 반군이 영국 세력 타도를 위해 일으킨 독립 전쟁이자 식민지 전쟁이다.
 
 
 
 

2. 배경[편집]

 
 
 
 
말라야 공산당에서는 이른바 "민족해방전쟁" (Anti–British National Liberation War)이라고 불리지만 영국과 말레이시아인 다수에게는 "비상사태" 라고 불린다. 일본 제국의 침공 이후 영국령 말라야는 식량 가격이 폭등하고 주민 다수의 삶의 질이 급격히 하락하는 등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다. 전후 경제 상황은 매우 악화되어 1939년 대비 임금은 약 3배 올랐지만 생활비는 4배 상승해 실질임금은 약 75% 수준으로 떨어졌고 쌀 배급도 크게 줄어 성인 남성의 주당 배급량이 1946년 4파운드에서 3파운드, 다시 1과 2/3파운드까지 감소했으며 식량 부족으로 영아 사망과 아동 영양실조가 심각했다. 영국 군정(BMA)도 파업의 주된 원인이 정치가 아니라 경제적 문제와 식량 부족임을 인정했지만 질서 유지를 위해 파업 참가자 체포와 총격 같은 강경 대응을 실시했고 “경제적 착취”라는 표현을 사용한 중국어 신문도 폐간시키며 언론을 탄압했다.

일본 제국이 격퇴되고 나서는 쿨리로서 유입된 중국인 광부와 중국인 플랜테이션 농부들과 고무 생산에 종사하던 무슬림 말라야인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고 경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말레이시아 공산당이 폭동과 파업을 선동하며 반영 선전을 일삼는 등 정쟁 불안이 심화된다. 1946년에는 항만·철도·플랜테이션 등에서 파업이 잇따라 평균 주당 27건의 파업이 보고되었고 1946~1947년 사이 말라야에서 약 71만 노동일, 싱가포르에서 약 117만 노동일이 파업으로 손실되었다. 정부는 노동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법을 활용해 플랜테이션에서 노조 조직 활동을 금지하고 경찰을 동원해 체포와 발포를 실시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사실상 농장을 장악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1947년에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이유로 해고되는 것을 막아주던 관행이 법원 판결로 무력화되어 파업이 계약 위반으로 간주되었고, 노동조합 지도자들 역시 협박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받는 등 노동운동은 점차 법적·정치적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48년 초에는 여러 전국 노동조직의 등록 신청도 거부되었고 한동안 잠잠하던 파업은 1948년 4월 싱가포르와 말라야 여러 지역에서 다시 발생했으나 사용자들은 대체 노동자 투입, 강제 퇴거, 경찰 폭력 등으로 대응했고 일부 농장에서는 경찰이 노동자들을 공격해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948년 5월에는 노조를 사실상 해체시키는 무역노조법 개정이 통과되어 노조 간부는 해당 산업에서 최소 3년 경력이 있어야 하고 특정 범죄 전력이 있는 사람은 노조 간부가 될 수 없으며 노조 연맹은 하나의 산업 노동자만 포함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전국적 노동연맹 조직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1948년 6월 말라야 노동조합연맹(PMFTU)과 각 지역 노조연맹은 등록이 거부되고 불법화되었다. 계속 파업과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자 1948년 5월 31일 입법회의에서는 강한 반공 연설들이 이루어졌고 이후 6월 4일부터 12일 사이에 비상사태 관련 결정이 추가로 내려졌다. 6월 12일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고등판무관 에드워드 젠트는 비상사태 규정 법안과 선동죄 법안 등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영국이 1948년 6월 17일 말라야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공산주의자들과 동조자들이 밀림 속으로 도망가 "말라야 민족 해방군"(MNLA)을 결성했고 MNLA는 영국의 군사기지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영국은 제초제 공중 살포를 통해 MNLA를 굶겨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 협약 위반이었다.

MNLA는 게릴라 전술로 교통 시설을 주로 파괴했다. MNLA는 당시 말라야에 거주하던 가난한 중국인 이민자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는데, 그만큼 MNLA의 게릴라 대원들 중 90%가 중국인이었고 나머지 10%가 말레이인, 인도네시아인, 인도인이었다. 여기에 화교 공산반군 수뇌부들은 직접 베이징으로 가 마오쩌둥을 알현하기도 했다.
 
 
 
 

3. 전개[편집]

 
 
 
 
말라야 민족해방군은 군과 경찰 초소 공격, 고무 농장과 주석 광산 파괴, 교통·통신 시설 파괴 같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으며 주요 지지는 약 312만 명의 화교 인구에게서 나왔다. 이들은 초기에는 정부군이 철수한 해방구를 만들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 영국과 영연방군은 강압적 대테러 전략을 사용했는데 경찰 부패와 농지 파괴, 공산주의 협력자로 의심된 마을의 가옥 소각 등은 오히려 많은 민간인이 MNLA에 합류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이런 정책은 공산군이 해방구를 형성하는 것을 막고 게릴라 부대를 분산시키며 전략을 영토 확보에서 파괴 활동 중심으로 바꾸게 했다. 또한 1950년 해럴드 브릭스 중장이 브릭스 계획을 시행하면서 게릴라와 민간 지지자를 분리하는 전략이 핵심이 되었고 이를 위해 식량 공급 차단과 함께 약 백만 명의 농촌 주민을 철조망과 경찰 초소로 둘러싸인 ‘신촌(new villages)’이라는 수용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한편 영국은 게릴라의 식량과 은폐 수단을 제거하기 위해 제초제와 고엽제를 군사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으며 도로 주변 식생과 농작물을 제거하기 위해 트리옥손이라는 화학물질을 항공기로 살포하기도 했다.[1]

중국의 공산화로 현지 공산주의 세력에 직접적으로 무기와 식량, 물자 등을 공급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겨 진압하려던 프랑스도 극심히 고전하고 결국 패퇴한 인도차이나 전쟁에 비해 말레이시아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지원이 지리적 여건 등의 이유로 미비했다. 여기에 이슬람교를 신앙하는 말레이인 다수가 가진 비무슬림인 화교에 대한 반감 때문에 반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와 달리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 역시 세계대전 후에도 식민제국을 유지하고 싶어했던 윈스턴 처칠 내각이나 네덜란드,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식민지들의 자치 확대, 종국적으로는 독립은 불가항력으로 보고 있었기에 말레이시아 비상사태는 인도차이나 전쟁이나 알제리 전쟁,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등에 비해 지저분한 식민지 전쟁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결국 영국과 말레이군은 화교 공산반군을 축출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말라야 연방 정부와 영국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사면을 선언했으며 당시 수석장관 툰쿠 압둘 라흐만은 협상은 거부하면서도 항복하는 공산주의자들은 긴급사태와 관련된 범죄로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정부는 대대적인 선전 캠페인을 벌여 시민들에게 공산 게릴라가 무기를 내려놓고 사면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지만 실제로 항복한 게릴라는 많지 않았다. 결국 1956년 2월 8일 툰쿠 압둘 라흐만은 공산 게릴라가 완전 항복 의사를 먼저 밝히지 않는 한 더 이상 협상하지 않겠다며 사면 제안을 철회했다.

1957년 7월 말라야 독립을 앞두고 MCP는 평화협상을 제안하며 구성원에게 시민권과 같은 권리를 보장하고 정치 활동가와 무장 대원 모두 처벌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응답하지 않았다. 협상 실패와 함께 MNLA와 지원조직 민위엔의 규모는 크게 감소해 1957년 8월에는 약 1830명만 남았고 많은 대원들이 정글에서 사망하거나 해외로 도피했다. 1957년 8월 말라야가 독립하면서 MNLA는 식민지 해방군이라는 명분을 잃었고 1958년 텔록 안손 습지대에서 마지막 대규모 저항이 항복으로 끝났다. 그리고 친펑 등의 공산반군 수뇌부는 국외로 망명하게 된다.
 
 
 
 

4. 사건 사고[편집]

 
 
 
 
 
 
 
 

5. 관련 문서[편집]

 
 
 
 
 
 
 
 
[1] 베트남전고엽제 사용과 유사한 방식이었으며 약 1만 명 이상의 민간인과 게릴라가 건강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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