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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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의 국가 및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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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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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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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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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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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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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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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1 세우타, 멜리야는 스페인령이다. 그 외 카나리아 제도, 포르투갈령 아조레스 제도마데이라 제도가 북아프리카로 분류되기도 한다.

튀니지 공화국
الجمهورية التونسية
Republic of Tunisia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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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파일:튀니지 국장.png

공식명칭

한국어 : 튀니지 공화국
아랍어 : الجمهورية التونسية (al-Jumhūriyyah at-Tūnisiyyah)
프랑스어 : République tunisienne (레퓌블리크 튀니지엔)[1]

면적

163,610km²

인구

11,627,427명(2018)

공용어

아랍어

민족 구성

아랍인 98%[2]

종교

이슬람교

수도

튀니스(Tunis, تونس)

정치 체제

이원집정부제 공화국

대통령

베지 카이드 에셉시 (الباجي قائد السبس)

임기

2014년 12월 31일~

총리

유세프 차헤드

통화

튀니지 디나르

HDI

0.721(2014)

시간대

CET (UTC +1)

국제 전화

+216

도메인

.tn

GDP

423억 8800만$(2016), PPP 1308억 3100만$(2016)

1인당 GDP

명목 3,777$(2016), PPP 11,657$(2016)

국가

조국의 수호자(حماة الحمى)

독립

프랑스로부터 독립 (1956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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حرية، عدالة، نظام
(자유, 정의, 질서)

파일:external/www.didaweb.net/tunisia.gif

1. 개요2. 역사
2.1. 고대2.2. 로마 시대2.3. 중세2.4. 오스만 제국 시대2.5. 근대2.6. 현대
3. 군사4. 문화5. 언어6. 기타7. 스포츠8. 외교 관계9. 창작물에서의 튀니지10. 행정 구역

1. 개요[편집]

아프리카 북부, 서쪽의 알제리와 동쪽의 리비아 사이에 위치한 아랍 국가. 정식국명은 '튀니지 공화국(الجمهورية التونسية)'. 프랑스어 발음인 튀니지(Tunisie)로 알려져 있는 국가이다. 수도는 튀니스(تونس, ‎투니스). 북쪽, 동북쪽에는 지중해에 접해있으며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몰타, 이탈리아남유럽 국가들과 마주보고 있다.

아랍권에서 민주주의 정치가 정착된 몇 안 되는 나라이다. 물론 아랍의 봄으로 시민혁명을 일으켜 민주화를 이룩하고도 문제가 아예 없진 않지만 민주주의를 참칭한 독재정권이 집권하거나 아예 절대왕정이 다스리거나 튀니지와 비슷하게 아랍의 봄을 겪고도 민주주의는 커녕 분열과 내란에 시달리고 있는 다른 중동 아랍 국가에 비하면 훨씬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헌법에 양성 평등을 명시하고 여성 장관까지 있을 정도로 여성 인권 또한 다른 이슬람권 나라들보다 열악하지 않은 편이다.[3] 물론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갈길은 멀다는 평이 많다. [4]

2. 역사[편집]

2.1. 고대[편집]

튀니지의 역사 시대는 기원전 10세기경에 이르면 페니키아인들이 이베리아와 페니키아를 오가는 무역선이 들릴 중간 기점으로 북아프리카 연안에 우티카 같은 조그만 항구 도시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중간 기착지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항구적인 정착지로 진화해 번영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카르타고가 지배적인 세력으로 떠올랐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전까지 카르타고는 서쪽으로는 마우레타니아에서 동쪽으로는 리비아에 이르는 아프리카 해안 지역과 이베리아 남부, 발레아레스 제도, 시칠리아, 사르데냐 섬을 지배권에 넣으며 번영했다. 이베리아 광산에서 나오는 금, 은, 구리, 제해권을 통해 독점한 브리튼 섬의 주석, 티리언 퍼플은 카르타고의 중요한 수출품이었고 그 외에 직물업을 비롯한 각종 제조업, 농업도 발달했다. 카르타고의 해상 무역은 지중해 전역 뿐만 아니라 대서양 동안을 따라 브리튼 섬 및 모로코, 카나리아 제도까지를 범위에 두었다.

북아프리카의 페니키아계 도시는 지중해의 무역 주도권과 제해권을 놓고 그리스인과 불가피하게 경쟁하였다. 기원전 480년에는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시칠리아 및 그리스 본토의 그리스인과와 세 차례의 시칠리아 전쟁, 에페이로스 왕국과의 전쟁을 비롯한 지속적인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는 이후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는 배경이 된다.

한편 해안가의 페니키아계 도시국가 외에도 내륙에는 오늘날 베르베르인의 선조뻘이 되는 누미디아인, 가이툴리아인이 각각 중북부 아틀라스 산맥과 남부 사하라 지역에 거주했다. 누미디아인은 대부분 정주민, 가이툴리아인은 대부분 유목민이었다. 누미디아인은 해안의 페니키아계 도시와는 경제적으로는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카르타고를 비롯한 페니키아계 도시가 성장하기 전에는 정치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이런 관계는 페니키아계 도시의 경제력과 인구가 성장함에 따라 자연히 역전되었고 누미디아인은 카르타고 및 페니키아계 도시에서 용병, 소작농으로 일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베르베르인의 선조는 카르타고의 정치적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내륙에서 문화적,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했으며 그리스나 로마와의 전쟁으로 카르타고가 약화되면 그 틈을 타서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노력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3세기 중반에서 2세기 중반까지 카르타고로마와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을 치뤄 세 번 다 패배해 멸망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그리스와 오랫동안 다퉈왔던 시칠리아를 중간에 개입한 로마에게 넘겨주었으며 이후 그 여파로 사르데냐 역시 로마의 영토가 되는 등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다만 그 사이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영역을 상당히 확장하기도 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의 아프리카 본토를 침공한 로마 및 로마와 동맹한 누미디아 왕국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하였고 카르타고의 영토는 카르타고시 주변으로 크게 축소된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는 물론 카르타고의 멸망 및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의 성립이었다.

1, 2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카르타고의 북아프리카의 다른 페니키아계 도시에 대한 영향력은 점차 축소되었으며 원래 카르타고와 라이벌 관계였던 우티카나 하드루메툼 같은 일부 페니키아계 도시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거나 로마 편을 들기도 했다. 카르타고와는 정반대로 이런 도시는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에서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 번영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는 오늘날 안나바에서 수사에 이르는 튀니지의 북부 및 동부만을 포함했고 튀니지 일대의 카르타고의 나머지 영토는 로마의 동맹국이었던 누미디아에 넘어갔다. 누미디아는 원래 동부와 서부의 두 왕국으로 나뉘어 있다가 제2차 포에니 전쟁 후반에 하나로 통일되었고 제3차 포에니 전쟁 무렵에는 오늘날 튀니지 내륙 지역은 물론 동쪽으로 트리폴리타니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로마는 한동안 누미디아를 동맹국으로 삼아 마우레타니아, 가이툴리아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에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로마의 내전에서 누미디아는 폼페이우스와 동맹했다가 탑수스 회전에서 카이사르에게 패배하여 멸망했으며 오늘날의 튀니지 대부분은 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속주에 병합되었다.

2.2. 로마 시대[편집]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는 오늘날 튀니지의 북쪽 절반과 알제리 동부, 트리폴리타니아 해안 지방을 포함하는 행정구역이었다. 물론 아프리카 속주에 인접한 지역에서는 페잔 일대의 가라만테스 등 여전히 독립적인 베르베르인이 거주하였다. 처음에는 우티카를 수도로 했으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카르타고 시가 재건된 이후에는 카르타고가 수도가 되었다.

로마 시대 아프리카 속주는 수백 년간 팍스 로마나 아래에서 다시금 제국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로마식 도시로 재건된 카르타고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등과 함께 로마 최대의 도시 중 하나였으며 화려하고 정교한 모자이크와 도기 공업으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제국 여러 지역에서 퇴역 군인을 포함한 이주민이 유입되면서 카르타고와 아프리카 속주의 로마화가 진행되었으며 카르타고는 국제적인 분위기를 띠는 도시가 되었다. 아프리카 속주에서는 행정 언어이자 제국 공용어인 라틴어 외에도 페니키아어, 베르베르어가 계속 사용되어 언어적으로도 다채로운 양상을 보였다.

지방 역시 관개 시설의 발달 덕분에 로마 제국의 곡창이 되었다. 은 이 당시 올리브와 함께 아프리카 속주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며 튀니지 북부를 흐르는 바그라다스 강 유역은 특히 비옥하기로 유명했다. 이런 농업은 주로 라티푼디움이라고 부르는 대농장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농지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베르베르인 유목민과의 충돌도 발생했으나 이들 유목민은 곧 튀니지 남서부의 반사막 지대로 밀려났다.

아프리카 속주 영내에 로마화가 진행되면서 도시 지역에는 아풀레이우스와 같이 완전히 로마화한 베르베르인도 있었지만 내륙에는 로마 문명의 영향을 제한적으로만 받은 베르베르인 집단이 점처럼 흩어져 분포하였다. 이는 로마가 이민족의 문화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2~3세기에는 아프리카 속주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초기 로마 제국 기독교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훌륭한 신학자도 배출되었다.

아프리카 속주는 특이하게도 도나투스 파 기독교가 널리 전파된 지역이기도 했다. 3세기 말 마지막 기독교 탄압에서 발생한 형식적 배교자를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다시 받아들일지의 문제에서 일부 기독교도가 이를 반대하면서 도나투스 파로 갈라져 나왔다. 특히 내륙의 덜 로마화되고 가난한 베르베르인 중에서 도나투스 파가 많았고 카르타고는 카톨릭 교회가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도나투스 파와 카톨릭 간의 충돌을 민족, 계층 간의 투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도나투스 파는 아프리카 속주가 반달족에게 넘어갈 때까지도 존재했으며 4세기 말 연이어 베르베르인 유력자가 반란을 일으킬 때 세력 기반이 되었다.

4세기 말에는 피르무스가 로마 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형제인 길도에 의해 진압당했다. 길도 역시 곧 반란을 일으켰다 또다른 형제인 마스케젤과 서로마 군대에게 패배했다. 이 사건에서 반란 또는 진압에 가담한 사람들이 베르베르인 유력자이자 동시에 로마의 장군이나 귀족이었다는 점에서 로마의 아프리카 통치 과정에서 현지 지배층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서로마가 급속히 멸망의 길을 걷던 무렵, 라인강과 남프랑스, 피레네 산맥을 거쳐 이베리아 반도 남부까지 들어온 반달족은 같이 들어온 수에비족과 서고트족, 서로마의 군사적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에 429년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는 휘하의 반달족과 알란족을 데리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아프리카를 침공했으며 불과 10년만에 카르타고를 공략하며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 전역을 손에 넣고 반달족과 알란족의 왕국, 또는 반달 왕국을 세웠다. 이때 도나투스 파도 반달족을 도왔으며 많은 로마인, 특히 도시 주민과 카톨릭 사제는 지중해를 건너 피난을 가야 했다. 해적이 되어 지중해 일대를 바이킹마냥 휘젓고 로마까지 침공하는 반달족을 쫓아내고 아프리카를 되찾기 위해 서로마 제국이 단독으로, 그 다음에는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공동으로 군사 작전을 펴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했고[5]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파견해 534년 멸망시킬 때까지 반달 왕국은 거의 한 세기를 존속했다. 그러나 언어적, 문화적 영향은 제한적이었고 행정, 대다수 주민의 생활은 반달족의 정복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로마 제국은 반달 왕국의 영토에 카르타고를 수도로 하는 아프리카 총독령(Exarchate)을 세웠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해안 도시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만한 역량이 없었고 때문에 내륙은 독립적인 베르베르인 정치 집단의 영역이 되었다. 610년, 아프리카 총독이었던 헤라클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하며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위기에 놓여있던 제국을 구원하고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공격하는 등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을 크게 약화시켰다. 역설적으로 이 전쟁으로 페르시아가 약화되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이 발흥하여 곧 시리아, 이집트를 점령하였다. 이슬람 군대는 670년경에 아프리카 총독령 및 북아프리카에 대규모 침공을 가하여 동로마 제국 및 현지 베르베르인 왕국과 부족 세력을 패배시키고 정복하였으며 698년에는 카르타고를 함락하고 북아프리카 정복을 마무리지었다. 언어적으로는 7세기 초까지는 라틴어가 제국의 실질적인 행정 언어였으므로 그리스어의 영향은 크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2.3. 중세[편집]

중세 이슬람 시대에는 튀니지를 비롯한 로마 시절 아프리카 속주 지역을 그대로 이프리키야(إفريقية)라고 불렀다. 이프리키야의 중심 도시는 670년경 이슬람 군대가 침공할 때 세워진 카이라완이었다. 군사적 거점을 만들기 위해 세워진 도시라 이름도 아랍어로 '요새' 라는 뜻이다. 이 도시는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슬람 제국에서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오늘날 튀니지의 수도인 튀니스는 이때까지만 해도 작은 어촌이었으나 이 시기에 군항이 세워졌다. 반면 카르타고, 우티카 같이 로마 시대에 번영했던 도시는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우마이야 조의 북아프리카 지배도 8세기 중반 모로코에서 이슬람의 한 분파인 하리지 파를 믿는 베르베르인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아바스 조가 성립되고 나서도 북아프리카에 대한 중앙 정부의 영향력은 약해서 800년경 형식적으로만 아바스 조의 신하이고 사실상 독립 왕조인 아글라브 조가 성립되었다. 백여년 간 튀니지를 중심으로 한 마그레브 지역에 정치적, 군사적 안정이 되돌아오면서 농업과 무역, 문화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으며 이슬람 법률의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마그레브 지역에 말리키 학파가 자리 잡은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아글라브 조는 한때 시칠리아를 정복하기도 했으며 시칠리아는 12세기에 노르만인에게 정복 당할 때까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한편 알제리 내륙에서 리비아에 이르는 건조 지대에는 하리지 파의 베르베르족이 아글라브 조와 공존했으나 이후 파티마 조에 의해 함께 멸망당한다.

900년대 시아파 베르베르인이 반란을 일으켜 909년 카이라완을 점령하고 파티마 왕조를 세웠다. 파티마 조는 마그레브 전역을 정복해 배후의 위험이 없어지자 969년 이집트를 침공하고 카이로를 세워 수도로 삼았다. 자연히 서쪽 마그레브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약해져서 오늘날의 튀니지인 이프리키야는 파티마 조의 섭정인 지리 조가 실질적으로 독립적으로 통치했다. 처음에는 잠깐 번영하는 것 같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사하라 사막을 통한 무역이 쇠퇴하고 그 대안으로 선택한 해상 무역도 이탈리아 도시와의 경쟁으로 쉽지 않아 경제가 기울기 시작했다. 1048년 지리 조가 수니파로 전향하며 파티마 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파티마 조는 1058년 바누 힐랄 등 아라비아 반도 출신의 베두인족을 보내 지리 조의 영토를 해안가 일부로 축소시켜버렸다.[6] 약체가 된 지리 조는 노르만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다.

이후 약 백여년 간 이프리키야는 베두인과 노르만족의 공격으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그러다 서쪽 멀리 모로코 서남부에서 발흥한 베르베르 계의 알모하드 조가 1150년대 이프리키야를 정복하여 이러한 무정부 상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편 바누 힐랄 등 아랍계 베두인족의 침공과 이주는 이 지역의 아랍화를 가속시켰으며 이슬람화가 더뎠던 내륙의 베르베르인 거주지에서도 인구가 아랍계로 교체되거나 하여 아랍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13세기 초에 알모하드 조가 결정적인 타격[7]을 입으면서 휘청거리자 알모하드 조에 의해 이프리키야를 지배하던 베르베르계의 하프스 가문은 1229년 독립을 선언하고 하프스 조를 세운다. 하프스 조는 비교적 수명이 긴 편이어서 14세기 중엽에 잠시 경제적, 군사적 위기를 맞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프리키야가 다시금 이슬람 세계의 중심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사하라를 통한 육로 무역과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이 발달했으며 무역의 발달에 따른 법과 제도도 정비되었다. 문화적으로는 교육과 시, 건축이 발달하고 이븐 할둔과 같은 학자도 배출되었다. 또 베르베르인의 아랍화가 진행되어 아랍어가 더욱 널리 퍼지고 베르베르인과 아랍인 간의 구분이 약화되었다. 레콘키스타 운동을 피해 건너온 이베리아 출신 무슬림과 유대인도 이 지역 문화와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는 한편 이프리키야를 중심으로 국가의 후원을 받는 해적이 활발히 활동해서 유럽 국가가 군대를 보내 침공하기도 하였다. 하프스 조는 15세기 중후만 우스만 칼리프 때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16세기에는 각기 전성기를 맞은 스페인오스만 제국이 세력 대결을 벌이는 지역이 된다. 1534년에 오스만 제국이 튀니스를 1년간 점령하자 오스만의 위협을 피해 스페인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1574년 오스만이 스페인을 물리치고 튀니스를 점령하여 멸망하고 튀니지는 오스만의 튀니스 에야레트(현대 대한민국의 도(道)에 해당하는 최상위 지방행정조직)이 된다.

2.4. 오스만 제국 시대[편집]

오스만 제국의 북아프리카 진출은 바르바리 해적 두목 가운데 하나로 바르바로사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하이르 앗 딘과 그 형 우르지가 1516년 알제를 정복하고 1518년 스스로 오스만 제국의 신하가 되어 베일레르베이[8]라는 칭호를 수여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참고로 16세기 중엽은 바르바리 해적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여 지중해를 오가는 기독교 무역선과 해안 도시, 마을을 휩쓸고 다니던 시기로 북아프리카 해안은 이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당시 북아프리카의 현지 이슬람 정치세력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북쪽의 기독교 국가, 특히 에스파냐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발칸 반도와 지중해에서 기독교 국가를 견제할 오스만 제국의 존재는 이들의 생존에 중요했으며 오스만 제국 덕분에 튀니지가 아직도 이슬람 문명권에 남아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프스 조에게는 오스만 튀르크가 에스파냐보다 왕조의 존속에 더 큰 위협이었고 1574년 울루지 알리가 튀니스를 최종적으로 알제의 베일레르베이령에 포함시킴으로서 하프스 조는 멸망하고 이프리키야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다.

1587년 울루지 알리가 사망한 후 베일레르베이는 폐지되었고 오스만 중앙 정부에 의해 임명된 파샤가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지역을 각각 다스리게 되었다. 파샤 아래에는 세금 징수 등을 맡은 베이, 튀르크 장군과 현지 유력자로 이루어진 협의체이자 중앙 행정 기구인 디완, 예니체리 부대의 지휘관인 아가, 백인대장과 같은 존재였던 데이, 그리고 정부의 주요 수입을 제공했던 해적 등이 있었다. 지배 계층은 대부분 튀르크인이어서 튀르크인 지배자와 튀니지인 피지배자의 분리가 존재했다. 또 튀르크어의 유입으로 베르베르어는 더욱 위축되게 되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은 1591년에 예니체리 부대가 반란을 일으켜 그들의 하급 지휘관인 데이(dey) 중 한 명을 데이(Dey)로 선출하였다. 데이는 수도에 대한 통치와 군권을 행사하고 파샤를 형식적인 지위로 격하시키고 디완을 해산함으로써 튀니지의 실질적인 통치차가 되었다. 데이에 의한 통치는 짧지만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정치적, 사회적 안정이 회복되었으며 특히 우스만 데이(1598-1610)와 유수프 데이(1610-1637) 하에서 튀니지는 경제적으로도 회복하고 여러 공공사업이 진행되었다. 또 이 시기는 16세기 중반에 이어 해적 활동이 다시금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1640년에 데이가 사망하자, 당시 파샤 직을 겸하고 있던 (무라드 쿠르소의 아들) 하무다 베이는 디완이 해산으로 인해 불만을 갖고 있었던 유력자들과 지방의 부족들, 파샤라는 직위가 주는 이름값 등을 통해 데이가 되는 데 성공하고 이로서 파샤와 데이에 이어 베이가 튀니지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다. 하무다의 아들 무라드 2세는 디완을 복원하고 예니체리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1675년 그의 사후 무라드 가문에 내분이 일어나 인접한 알제리에서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등 혼란한 상황이 발생하고 1702년 무라드 가문의 마지막 베이가 암살됨으로서 무라드 시대는 끝나게 된다. 한편 무라드 시대에는 또한 해적 활동이 감소하고 대신 유럽 국가와의 지중해 무역이 증가하였다. 튀니지 정부는 이 무역을 독점하여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었으나 민간 상업의 성장은 지체되었다.

무라드 2세 사후의 혼란은 1705년 후세인 이븐 알리가 베이에 오름으로서 마무리된다. 이후 튀니지는 후세인 왕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확보하였으며 1715년 오스만 중앙 정부에서 후세인을 대신할 파샤를 내려보냈으나 후세인 베이를 지지하는 현지 유력자들에 의해 거부당해 오스만 제국이 후세인을 암묵적으로 인정해야 했을 정도이다. 후세인 조는 오스만의 간섭을 우려해 오스만과의 관계는 최대한 형식적으로만 유지했으며 예니체리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오스만 제국이 인정한 하나피 학파가 아니라 튀니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말리키 학파의 이슬람 법학자를 관료로 임명하고 튀니지/튀르크 혼혈 및 튀니지인의 관직 진출을 확대하는 등 독립적인 면모를 강화하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때까지 튀니지는 유럽으로의 수출이 증가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된다. 또 이 시기는 바르바리 해적의 마지막 전성기에 해당한다.

1820년대 이후 크게 악화한 무역수지는 독점 무역으로부터 얻는 이익이 주요 수입원이었던 튀니지 정부가 큰 부채를 지는 원인이 된다. 더불어 산업화에서 뒤쳐졌던 튀니지는 값싼 수입상품의 유통으로 전통적인 제조업이 쇠퇴하며 경제적으로 위기 상황에 놓이고 만다.

2.5. 근대[편집]

아흐메드 베이(1837-1855)에 의해 튀니지의 근대화 노력이 시작되게 된다. 튀니지는 종주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2세, 이집트의 무하마드 알리를 본받아 개혁에 나서며 근대적인 통신, 교통, 군대, 교육기관을 도입하거나 도입할 계획을 세우고 1863년에는 (물론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 체제였지만) 헌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그레브의 고질병인 미약한 중앙 정부와 그로 인해 잘 걷히지 않는 세금, 유럽의 산업 혁명으로 생산된 값싼 수입 상품의 범람으로 인한 무역 적자, 가뭄과 전염병 등 자연 재해, 이상의 원인으로 인한 심각한 경제난과 재정 적자, 거기에 부패(e.g. 중앙은행장이 자본금을 통채로 들고 프랑스로 튐)까지 더해지며 1867년에 튀니지 정부는 파산을 선언하고 만다. 2년 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채권단을 구성하여 튀니지 경제를 정상화해보려고 했으나 이 또한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실패하게 된다.

한편 19세기에는 이탈리아, 주로 시칠리아에서 많은 수에 이탈리아인 이민자가 유입되어[9] 당시 인구가 백만 명 정도에 불과하던 튀니지 사회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프랑스는 이를 좋지 않게 여겨서 프랑스 식민지가 된 이후 프랑스는 튀니지 내 이탈리아인을 탄압하여 이탈리아인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무솔리니가 프랑스의 튀니지에서의 이탈리아인에 대한 대우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다니까 차별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튀니지를 노리는 나라는 바로 옆의 알제리로는 모자라 튀니지로 진출하려던 프랑스와 당시 막 통일을 마치고 식민지 쟁탈전에 합류한 이탈리아로 압축된다. 이탈리아는 이미 튀니지에 정착한 수십만 명의 이탈리아인을 근거로, 튀니지를 자국의 식민지의 첫 케이스로 삼기 위해 튀니지 쟁탈전에 열심이었으나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진 오스만 튀르크의 발칸 반도 영토 처분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튀니지를 프랑스의 영향권에 넣기로 하고 이탈리아에게는 대신 트리폴리타니아 지역[10]의 지배권이 주어진다.

프랑스는 튀니지를 평화적으로 점령하고자 후세인 조와 협상을 시도하지만 당연히 될 리가 없고 침략할 구실을 찾던 와중에 1881년 튀니지와 알제리 변경의 한 부족이 알제리를 약탈한 것을 빌미로 군대를 튀니지로 진격시켜 바르도 조약을 맺어 군사권과 외교권을 뺏고 튀니지를 보호령으로 만든다. 뒤이어 재정에 관한 권한 역시 프랑스가 갖게 되면서 후세인 조는 이름만 존재할 뿐 튀니지는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식민지가 된다. 경쟁국 이탈리아는 즉각 항의했으나 주요 열강들이 프랑스 편을 들자 마지못해 1893년 프랑스의 튀니지 지배를 인정한다.[11] 각설하고 1882년에 베이가 사망하자 프랑스는 알리 베이를 즉위시키면서 튀니지와 오스만 제국과의 형식적인 유대도 끊어지게 된다.

프랑스는 알제리의 경우처럼 프랑스인 이주자(콜롱)에게 많은 경제적 특권을 주어 튀니지에 최대한 많은 이주자를 유치하려 노력하였으며 1891년에는 만 명에 불과하던 프랑스인 이주자는 1945년에는 14만 4천명으로 증가한다. 프랑스는 철도와 도로, 병원, 수도, 관개 시설, 교육 기관 등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농장과 광산을 개발하여 튀니지의 경제 수준, 인구와 튀니지인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다. 하지만 숙련 노동은 전부 프랑스에서 공급받았고 급격하게 프랑스인의 농지를 확대하여 프랑스의 정책이 프랑스 본국만을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며 튀니지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1880년대 이후 아랍 세계에 아프가니, 압두 등의 개혁가가 출현하면서 튀니지도 이들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을 유지하되 서양의 합리주의와 과학 기술로 사회를 점진적으로 근대화하려는 운동이 발생하고 이런 사상을 담은 언론 매체가 출현한다. 이러한 운동은 점차 튀니지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여 1920년 데스투르 당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데스투르는 아랍어로 '헌법' 이란 뜻으로 1863년 제정된 헌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탄압과 내부 갈등에도 불구하고 데스투르 당(그리고 거기서 갈라져나온 신 데스투르 당)은 노동자 세력과 연대하여 독립 운동을 이어나갔다.

1940년에 프랑스 본국이 독일에게 점령당하면서 튀니지는 비시 프랑스에 귀속되었으나[12] 동쪽에서는 엘 알라메인 전투의 패배로 독일군이 후퇴하고 서쪽에서는 횃불 작전에서 영미 연합군이 수적으로 불리한 비시 프랑스군을 제압한 데다 연합군의 공중 폭격으로 보급이 불가능해지면서 결국 1943년 5월 13일 추축국 군대가 항복하여 튀니지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2차대전 후 하비브 부르기바가 이끄는 신 데스투르 당 및 그와 연대한 튀니지 노동자 총연맹(UGTT)(참고로 공산주의와는 상관 없음)은 법아랍주의 계열과의 내부 갈등을 이기고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실패하고 알제리 독립을 저지하는 데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프랑스는 1955년 튀니지의 독립을 약속하고 1956년 튀니지는 베이였던 무하마드 8세 알 아민을 국왕으로 하는 튀니지 왕국으로 독립한다.

2.6. 현대[편집]

1956년 3월 20일에 독립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입헌군주국에서 공화국이 되었다. 초대 대통령으로 하비브 부르기바가 당선되었으나 헌법까지 바꿔가면서 30년간 장기집권을 하다 1987년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에게 쫓겨났다. 하지만 세속주의 정책이나 여권신장 정책,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 운동 후원 등 대내외적으로 꽤 괜찮은 정책도 수행해서인지 독재자 치고는 아직까지도 국민들의 평가가 좋은 편. 재스민 혁명 이후에도 웬만한 도시의 큰 길에는 하비브 부르기바의 이름이 붙어있으며 어쩌다 정치 이야기에서 이 사람이 나와도 그다지 까이지 않는다.

2011년 23년간 독재를 해온 벤 알리 정권에 대항해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자세한 사항은 재스민 혁명 참조. 하지만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2013년 와서도 혼란을 겪고 있다. 살라피즘이란 극단주의를 숭배하는 자들의 난립과 이에 맞서는 세속주의자들의 반대로 국가 비상 사태를 연이어 선언할 지경.

2014년 1월 26일 신헌법이 통과되었다. 광신적인 아랍 국가들 사이에선 이례적으로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근거로 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와 여성의 인권 보장을 강조한 서구적인 헌법이라고 한다. 국내외에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중. 이후 2014년 말 치러진 총선과 대선에서 세속주의 성향의 "튀니지의 외침"이 승리하면서 정권이 교체되었다. 튀니지의 민주화 이행을 주도해 온 시민단체 연합체 '국민4자대화기구'는 다원적 민주주의 구축에 이바지한 점을 인정받아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실업률이 높아서 2017년 1월 14일에 튀니지 전역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심각한 실업으로 인해 분신자살이 급증하고 있어 큰 골칫거리다.# 그리고 튀니지에서는 2018년 1월 8일에 정부의 긴축정책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되었고, 경찰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 2018년 1월 9일에는 반정부시위로 200명이 체포되고 십여명이 부상당했다.#

2017년 7월 27일에 여성에 대해 모든 폭력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무슬림 여성이 비무슬림 남성과 결혼을 금지하는 이슬람 결혼법 폐지까지 추진하려 하고 있다.# 1979년 반왕정 혁명으로 팔레비 왕정 축출 이후 이슬람 신정 정부가 들어서면서 보수화된 이란이나 2011년 같은 아랍의 봄 시기 민주주의는 커녕 군사 쿠데타와 내전, 다에쉬와 무슬림 형제단 등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의 득세와 테러, 정치적 혼란으로 개판이 된 이집트리비아, 시리아, 이라크등과는 다르게 진보, 개혁적인 방향으로 사회 변혁이 이뤄지는 모양새이다. 그리고 2017년 9월 15일, 44년만에 튀니지는 무슬림여성이 비무슬림남성과 결혼을 금지하는 법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018년 1월 튀니지 정부가 여성 인권을 침해한다고 비판받아온 ‘결혼지참금’ 풍습을 금지하고, 딸과 아들이 유산을 공평하게 나눠 갖도록 하는 내용의 민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튀니지가 민주화 이후 최초로 첫 지방선거를 실시했다.

현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민주화 정부에 대한 청년 세대의 지지가 상당하다고 한다. 덕분에 사회 분위기도 활짝 피어서 자국 비판에도 관대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 시장으로 여성인 수나드 압데라힘이 튀니지 역사상 최초로 여성 시장에 당선되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001&aid=0010269827튀니지는 아랍권에서는 최초로 남녀동등상속을 추진하고 있다.

3. 군사[편집]

4. 문화[편집]

프랑스, 아프리카, 중동의 문화와 국민성이 자연스레 섞여 들어갔기에 상당히 독특하다. 국민들 대다수가 믿는 종교는 이슬람인데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는 상당히 세속주의 국가인데다가 종교의 권위도 그다지 강하지 않다. 주말도 토요일, 일요일일 정도. 물론 재스민 혁명 이후에 원리주의 운동이 부쩍 늘어났지만, 그래봐야 사우디아라비아이란 같은 중동의 보수적인 나라들에 비해서는 위세는 매우 약한 편. 그래서인지 이슬람에서 종교적으로 금기시하는 술과 돼지고기를 파는 개방된 국가이기도 하다. 술의 경우 벡스하이네켄 같은 유럽산 라거 맥주들을 수입하기도 하고 마공이나 셀티아, 베르베르 같은 자국산 와인이나 맥주도 생산, 판매하기도 한다. 게다가 웬만한 마트에는 주류 코너가 있고(주류 코너는 금요일, 라마단 기간을 제외한 주중에만 연다.) 그리고 술을 사는 데 딱히 눈치를 보지 않는 듯 하다. 판체타, 관찰레, 하몬, 베이컨 같은 돼지고기 가공품은 라 마르사나 감마르트에 위치한 까르푸같은 규모가 큰 마트에서 따로 대놓고 판다. 라 마르사 까르푸는 주류코너가 따로 동굴처럼 배치되어 있고 가드를 문 앞에 두어 지키는데 그 근처에 있는 돼지고기 가공품 코너에는 별다른 조치를 취해두지 않았다. 그러나 생 돼지고기를 구하는 것은 약간 힘들다. 구하는 과정이 밀거래를 연상시킨다 심지어 TV에서 코미디언이 돼지고기를 먹는 걸 소재로 개그를 하기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같이 원리주의가 강한 이슬람권 출신 종교 지도자들이 이집트, 터키, 모로코[13], 레바논 등과 더불어 "너흰 신앙심이 좀 부족한 듯" 이라며 맹렬히 깔 정도. 물론 해당 국가 사람들은 도리어 저쪽을 광신도라고 비웃는다. 그런가 하면 열정적이고 감정적이면서 예술을 사랑하는 풍토는 프랑스 사람들과 비슷하다. [14] 참고로 튀니지에서는 1973년부터 낙태가 합법이었다. http://blog.naver.com/centralwoman/220929896836

그러나 혁명 이후 나타난 살라피즘 신봉자들이 술 및 돼지고기를 파는 호텔 및 식당에 연이어 테러를 가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밑에도 언급된 관광지 시디 부 사이드 쪽에서까지 그 난리를 피우고 있다. 세계적인 관광지이기에 술, 돼지고기를 파는 식당이나 호텔이 많긴 하지만. 그래서인지 술과 돼지고기 등을 취급하는 식당이나 마트에는 규모가 작더라도 따로 가드가 배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5. 언어[편집]

공용어는 아랍어이지만 여타 마그레브 권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어도 일반적으로 쓰인다. 심지어 아랍어(표준 아랍어)보다 일상적이다. 젊은 도시 사람들은 아예 서로 프랑스어로 대화하기도 한다. 그리고 독일어이탈리아어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튀니지 아랍어는 기타 마그레브 아랍어와 비슷하다.

길거리의 사람들이나 관공서, 상점 등에 가서 표준 아랍어로 알려진 푸스하를 사용하려고 하면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많거나, 그냥 무시하고 방언으로 대답할 것이다. 이따금 튀니지인에게 "네가 나보다 푸스하를 더 잘 알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대화를 하다가 논리정연하게 말을 하려고 하면 방언에서 프랑스어로 말을 바꾸는 튀니지인을 일부 발견할 수도 있다. 아무래도 프랑스어가 아랍어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 듯.

6. 기타[편집]

파일:external/news.hankyung.com/2006102048991_2006102019731.jpg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가 중 하나인 시디 부 사이드가 이곳에 있다. 국내 광고에서도 몇 번 등장한 적이 있어 라라라라라라라라 사진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는 한국인들도 많다.

사막이 많은 북아프리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과거 로마 제국의 곡창이었던만큼 지금도 올리브의 세계적인 재배지로 유명하다. 올리브 나무가 6천만 그루가 넘게 심어져 있을 정도로 재배량이 많아서 수출도 많이 한다. 그 밖에 해산물도 풍족하고 밀이나 여러 곡물 재배도 풍부한 편이라 먹을거리는 큰 걱정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사진처럼 해안지대는 아프리카보다는 그리스 같은 남유럽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이 나라도 산유국이다. 하지만 시리아이집트처럼 나오는 석유 품질이 좋지 않아서 특수 정제해야 쓸 수 있다. 때문에 산유국이면서 소비 석유를 죄다 역수입해 오고 있다...

최근, 새로운 장어 수입 활로로 주목받고 있다. 장어는 나오는데 아랍 문화권이라 장어에 대한 수요가 없다시피하니 내다 팔 수밖에(...). 개이득 장어 자체가 완전양식이 안 되는데 일본에서 전 세계 장어를 빨아들이는 재료다. 국내에서도 시중에 유통되는 장어 중에서 튀니지산인 것이 꽤 된다.

아프리카 대륙의 최북단인 라스 안젤라를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최북단 국가가 모로코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라스 안젤라가 더 북쪽에 있다.

7. 스포츠[편집]

북아프리카축구 강호이다. 국대에 대한 것은 튀니지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조.

농구도 꽤 강호. 아프리카 선수권 대회(FIBA Africa Championship)에서 2011년 최다 우승을 자랑하는 강호 앙골라를 제치고 첫 우승을 거뒀으며 준우승 1번, 4강 6번을 거뒀다.

8. 외교 관계[편집]

이웃인 알제리와 달리 자신들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프랑스에 대한 반감은 적은 편이다. 이런 부분은 알제리보다 그 건너편 모로코의 행보와 비슷하다. 알제리에서 쫓겨난 피에 느와르(알제리에서 대대로 살아온 프랑스인)들도 받아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되레 튀니지에서 견디지 못하고 프랑스로 되돌아갔는데 프랑스로부터 베트남과 비슷한 역사로 지배당했음에도 좀처럼 프랑스 문화가 들어가지 않았기에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프랑스와의 관계 및 감정이 무조건 좋은것만은 아닌데 이웃나라인 알제리가 1950년대 말 프랑스와의 식민지 독립 전쟁을 벌였을 당시 알제리를 탄압하던 프랑스를 비난하고 알제리를 편들기도 했었고, 2011년 튀니지 혁명 이전 벤 알리 전 대통령의 독재 정치를 프랑스가 지원하는 등 프랑스에 대한 감정은 완전히 좋다고만은 볼 수 없다. 게다가 튀니지는 프랑스와 알제리가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가 저지른 식민지 학살 문제를 두고 두 나라간 갈등이 벌어질때면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알제리인들에게 저지른 식민지 학살 만행을 인정하며 국제 외교에서 알제리를 옹호하기도 한다.적의 적은 나의 친구

그러나 지금 튀니지에서 프랑스 문화는 거의 튀니지를 정ㅋ벅ㅋ할 기세다. 튀니지에서 홈스테이를 한 모 위키러에 의하면 식사 때마다 바게트가 항상 나오며 프랑스 음식은 아니지만 스파게티도 쉽게 접할 수 있다고(...). 쿠스쿠스보다 바게트를 더 많이 먹는 것이 함정

카페 문화도 대단히 발달해있다. 실업률이 높기에 할 일이 없어서 카페에서 시간 보내기 좋기에[15] 현지인들은 정말 많이 간다. 거의 한 모금 양 되는 커피로 3시간 동안 카페에서 앉아있다니 흠좀무. 게다가 커피 한 잔 마시면 또 한 잔 더 시켜서 몇 시간 더 앉아있는다. 커피외에도 카페에서 물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흔하게 볼수 있다. 주로 중년 아저씨들이 일거리도 없고 집에 있기는 심심하니 카페로 와서 커피 한 잔 시키고 비슷한 사정으로 나온 다른 아저씨들과 수다를 떨면서 논다. 특히 청년 실업률이 높다보니 청년들도 일자리를 찾지못하여 카페에 와서 시간 보내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게다가 토픽도 진지한 것에서부터 별 사소한 것까지 다 해댄다. 튀니지의 카페에 가보면 남자들도 여자들만큼 수다 떨기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튀니지뿐만 아니라 다른 아랍국가들과 이란, 터키의 카페들도 이와 비슷하다.

유럽, 특히 이탈리아와 정말 가깝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인 모로코와 같이 유럽연합에 가입하려고 은근히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 시도했지만 무시당했고 튀니지 안에서도 별로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무엇보다도 모로코와는 달리 아프리카 연합 회원국으로 잘 지내고 있다.

1985년까지 이탈리아와 전쟁 중이었다. 전쟁의 이름은 제3차 포에니 전쟁(...). 정확히 말하면 카르타고시와 로마시 사이의 전쟁으로 이는 양자간에 공식적으로 평화 협정이 맺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1985년에 카르타고 시장과 로마 시장이 만나 평화 협정에 사인해 2131년(...) 동안 이어진 전쟁을 끝냈다.

그런데 종전협정이 있어야 전쟁이 끝난다는 것은 현대 국제법이 확립된 이후에야 나온 시각이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전 세계에는 아직 수많은 역사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로 지속 중이다. 그냥 관계 개선을 위한 수사적 협정에 가까우며 역사적으로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가 멸망한 기원전 146년에 종전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양측이나 한쪽의 국민들이 아니라고 지독하게 물고 늘어진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한국과는 1969년에 외교관계를 맺었다. 북한과도 1975년에 수교하면서 현재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모로코와 함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한국인이 비자 없이 무비자로 여행 갈 수 있는 나라다. 다만 체류기간이 90일 동안 체류할수 있는 모로코와 달리 체류기간이 30일 정도뿐이라서 90일간 체류기간이 긴 모로코보다는 한국인들의 무비자 체류기간이 굉장히 짧다.

직항편은 없지만 루프트한자, 알리탈리아, 플라이 에미레이트, 터키 항공 등에서 항공사의 허브 격이 되는 공항에서 환승하는 형식으로 튀니지에 갈 수 있다.

아랍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유학 행선지로 선호받는다. 당장 저 위에 노란 틀과 빨간 틀이 하나씩 붙어있지만 외교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자. 중동 카테고리는 22개국 중 나라를 제외하면 다 알록달록한 색깔이다.[16] 일단 저 세 나라는 물가가 비싸서 걸프 암미야를 배우고자 하는게 아니라면 유학을 가는 일은 거의 없다. 적당히 안전하면서도 유학생들을 위한 아랍어 교육과정을 잘 갖춘 나라들에는 요르단, 이집트, 튀니지 등이 있는데 요르단 또한 물가가 싼 편은 아니고 이집트는 물가가 엄청나게 싼 대신 치안이 튀니지보다 안정적이지 않다. 튀니지는 1디나르에 5-600원 선을 유지하는 환율과 아랍 국가들 중에 가장 싼 집세, 괜찮은 커리큘럼 덕분에 유학하기 그나마 괜찮은 나라로 꼽힌다. 상술한 비교적 세속적이고 진보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에 아랍/이슬람권에서 적응하기 힘든 음주와 돼지 고기 같은 문제에 대해서 한결 편하다는 점도 큰 매력이다. 한국에서 아랍어를 가르치는 대학교는 총 6개교[17]인데 이중 다수가 튀니지의 어학원과 제휴를 맺고 있기도 하다. 대신 학생 비자를 잘 안내주므로 무비자 체류 한정 기간인 90일마다 근처의 유럽 국가나 이집트 등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소위 "비자 트립"이 필요하다. 그리고 항공사, 특히 유럽계 루프트한자, 알리탈리아, 에어 프랑스 등의 항공사들은 90일 이내로 돌아오는 티켓이 없는 유학생의 탑승을 거부하는 사례도 있다. 실제로 비자 트립을 위해 유럽의 모 도시에 입국한 한 유학생이 입국심사에서 튀니지 티켓을 왕복으로 끊지 않아서 튀니지에 불법체류할 가능성이 있다고 입국을 거부당해 바로 한국으로 귀국당한 사례도 있다.[18] 아니 GDP도 우리보다 반 낮은 나라에 뭐하러 불법체류를 하냐 아, 물론 군대 시급보다 최저시급이 높긴 한데...

9. 창작물에서의 튀니지[편집]

스타워즈타투인 행성을 이 나라에서 촬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명 마트마타라 불리는 지하마을. 1967년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대항해시대를 한 사람들에게는 꽤나 익숙한 지명일 것이다. 대항해시대의 데이터에 따르면 튀니지에서 생산되는 마(옷감)의 품질이 꽤 좋은 듯하다.

엑스파일의 첫번째 극장판 마지막 부분에서 등장하는 곳이다.

건슬링거 걸트리엘라가 이 곳 출신이다.

10. 행정 구역[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Tunisia_governorates_cropped.png

튀니지는 24개 주(아랍어: wilayat, 단수형 wilayah)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주는 다시 264개 구로 나뉜다.

1 아리아나 주
2 베자 주
3 벤아루스 주
4 비제르테 주
5 가베스 주
6 가프사 주
7 젠두바 주
8 카이르완 주
9 카세린 주
10 케빌리 주
11 케프 주
12 마디아 주
13 마누바 주
14 메드닌 주
15 모나스티르 주
16 나뵐 주
17 스팍스 주
18 시디부지드 주
19 실리아나 주
20 수스 주
21 타타우인 주
22 토죄르 주
23 튀니스 주
24 자구완 주

[1] 프랑스어가 널리 쓰이긴 하지만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다.[2] 더 정확히 말하면 아랍인에 동화된 베르베르인이 대다수이다.[3] 북아프리카 전반이 대체적으로 서아시아 등지보다는 대체적으로 종교색이 옅은데, 튀니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으로 민주주의와 결합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맥주돼지고기가 허용되고 여성부도 있는 등 종교색은 옅으나 독재정이 문제가 되고 모로코샤리아를 받아들이는 등 보수적인 일면이 남아 있으며 알제리는 남녀차별이 문제시되지 않지만 타 종교에 대한 억압이 좀 강하며, 리비아는 카다피 독재 정권 시절에 세속적인 면이 있긴 했었지만 정치적, 종교적으로는 이집트나 마그레브 3개국보다는 보수적인 국가이다.[4] 재스민 혁명 이후 발표된 튀니지 영화 미녀와 개자식들은 실제 강간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여전히 남아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5] 1차인 461년에는 서로마가 300척의 배를 준비해 무리해서 반달을 치려고 하지만 노련한 반달족의 왕 겐세리크의 화공 작전에 함선이 싹 다 불타버린다. 낙담한 황제 마요리아누스는 라벤나로 돌아가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궁정 관료들에게 목숨을 잃는다. 그러고 나서 궁정 관료의 좌장이었던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인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즉위하나, 4년 후 다시 리키메르에게 독살당한다. 그러자 동로마는 황제로 안테미우스를 보내 준다.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동, 서로마는 반달족을 치려 한다. 동로마의 주도 아래 10만이나 되는 군대가 편성되고 카르타고로 쳐들어가는데, 잘못된 인사 책정이 일을 그르친다. 동로마 황제의 처남이었던 바실리스쿠스가 총사령관이었는데 군사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근데 상대가 심히 언밸런스. 상대인 반달왕 겐세리크가 평화 협정을 핑계로 항구에 함대를 주둔할 걸 권했고, 그거에 낚여서 바실리쿠스는 또 그대로 한다. 그러자 겐세리크는 7년 전 경험을 되살려 다시 화공을 시전하고, 함대는 활활 잘도 타기 시작한다. 그렇게 허무하게 서로마 재생 작전은 망해버렸고 이때부터 동로마가 버린 서로마는 그냥 빈껍데기였다.[6] 이러한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히 힐랄 침공의 원인과 결과에 관해서는 연구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7] 원래 버전에서는 레콘키스타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보다는 알모하드 조의 내분이 보다 근본적이고도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기독교 군대에 의한 패배는 그 결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8] 이전 버전에서는 '총사령관' 이라 소개되어 있었지만 이건 이 단어의 본래 뜻이고, '대총독' 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9] 최대 13만 명까지 튀니지에 살았다. 그당시 튀니지의 인구를 생각하면 상당한 수.[10]리비아 북서부.[11] 그리고 이 사건으로 삐친 이탈리아는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을 체결, 삼국 동맹에 가담한다.[12] 1942년 11월부터는 이탈리아 왕국이 점령한다.[13] 근데 모로코는 샤리아를 시행하고 있어 보수적인 것으로 보일수 있다. 하지만 표면상일 뿐이며, 실제로는 이슬람권에서는 진취적으로 시행하는 편이다.[14] 사실 마그레브 문화권 자체가 이슬람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영향력이 절대적이진 않다. 여성 인권도 나쁘지 않은 수준.[15] 한국처럼 시간 보낼곳인 PC방이나 도서관, 대형마트, 대형서점이 많지 않은것도 있다.[16] 물론 저 안에는 페르시아어를 쓰는 이란히브리어를 쓰는 이스라엘이 있고 저기 없는 아랍어 사용 국가들도 많지만 상황은 더 안 좋거나 비슷비슷하다. 대표적으로 북수단.[17] 한국외대, 한국외대 글로벌캠퍼스 (통합되었지만 서울의 아랍어과와 용인의 아랍어통번역학과는 따로 분류.), 단국대, 명지대, 조선대, 부산외대. 매년 이 6개 학교의 아랍어 관련 학과들끼리 학교마다 돌아가면서 전아대라는 행사를 열기도 한다.그리고 유학생 동문회가 열린다[18] 이 사례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편도 티켓만으로 솅겐조약 가맹국에 입국하려 시도했다가 유럽연합 내 불법체류를 시도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추방된 사례에 해당한다. 영주권도 없는데 편도티켓만으로 입국하려는 사람의 입국을 거부하는건 많은 나라의 입국심사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