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병기제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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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병기제조소(平壤兵器製造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육군이 평안남도 평양부 평천리 일대에 설치한 조병창이다. 1917년 건설이 시작되어 1920년에 완공되었다. 일본이 한국에 지은 최초의 군수공장이었다.
조선주차군과 관동군을 위한 무기들을 생산하고 수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920년 완공 초에는 조선병기제조소라는 이름으로 도쿄포병공창이 관할했으나 그 직후부터 여러 차례 계속 소속이 변경되었고, 태평양 전쟁의 발발 직전인 1940년부터는 인천부 부평에 설치된 인천육군조병창으로 조직을 확대개편하여 독립했다. 제조소 자체는 그 예하 조직이 되었다. 최종적으로는 1945년 관동군 소속으로 이관되어 종전을 맞았다.
완공 당시만 하더라도 겸이포제철소, 진남포제련소, 오노다시멘트 등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몇 없는 중공업 공장으로서 한반도의 기계공업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일제의 주요 군수공장으로 기능하면서 주로 포탄들과 대포 부품들을 대량 생산해 전선에 공급했다. 당시 상당 수의 평양 주민들이 이곳에서 강제 노역을 당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 정부가 입수하였고 동구권의 지원을 받아 65호 공장으로 개편했다. 65호 공장은 전천 2.8 기계공장을 비롯한 여러 북한 군수산업체들의 모태공장이 되었다. 현재 북한은 본 공장을 "선군총대의 고향"으로 성역화했고, 일본군의 시설이었다는 역사는 감춘 채 김일성이 구상하고 지었다는 왜곡된 정보를 주민들에게 선전하고 있다. 오늘날 후신들은 대부분이 자강도에 있다.
조선주차군과 관동군을 위한 무기들을 생산하고 수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920년 완공 초에는 조선병기제조소라는 이름으로 도쿄포병공창이 관할했으나 그 직후부터 여러 차례 계속 소속이 변경되었고, 태평양 전쟁의 발발 직전인 1940년부터는 인천부 부평에 설치된 인천육군조병창으로 조직을 확대개편하여 독립했다. 제조소 자체는 그 예하 조직이 되었다. 최종적으로는 1945년 관동군 소속으로 이관되어 종전을 맞았다.
완공 당시만 하더라도 겸이포제철소, 진남포제련소, 오노다시멘트 등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몇 없는 중공업 공장으로서 한반도의 기계공업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일제의 주요 군수공장으로 기능하면서 주로 포탄들과 대포 부품들을 대량 생산해 전선에 공급했다. 당시 상당 수의 평양 주민들이 이곳에서 강제 노역을 당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 정부가 입수하였고 동구권의 지원을 받아 65호 공장으로 개편했다. 65호 공장은 전천 2.8 기계공장을 비롯한 여러 북한 군수산업체들의 모태공장이 되었다. 현재 북한은 본 공장을 "선군총대의 고향"으로 성역화했고, 일본군의 시설이었다는 역사는 감춘 채 김일성이 구상하고 지었다는 왜곡된 정보를 주민들에게 선전하고 있다. 오늘날 후신들은 대부분이 자강도에 있다.
개소 초기 도쿄포병공창 아래의 분공장 시절 공식 명칭은 조선병기제조소(朝鮮兵器製造所)였으나 1923년 육군조병창 직할로 편입되면서 평양병기제조소(平壤兵器製造所)라고 개칭되었다. 줄여서 평양제조소(平壤製造所)나 평양공창(平壤工廠)이라고도 자주 불렸는데 이는 비공식적인 명칭이다. 한편 젊은 시절 이 시설에서 일했던 대한민국 국방부 과학기술연구소 연구위원 최서국의 증언에 따르면 포병공장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는 오사카 포병공창의 예하조직이었던 시절 붙은 별명이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각종 언론기사 등지에서 평양제조소를 두고 인천육군조병창의 제2제조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해 이는 오류다. 인천조병창의 제2제조소는 대전 말기에 부평에 새로 신설될 예정이었던 곳이다. 평양병기제조소는 조병창 본창과 떨어져 있던 반독립적인 제조소였기에 명칭에 번호가 붙지 않고 소재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해방 이후 북한 시절에는 25호 공장을 거쳐 65호 공장으로 개칭되었다. 본 명칭은 현재도 직속후신인 전천 2.8 기계공장이 이어받아 계속 쓰고 있다. 그 외에 갈라져나온 공장들은 별도의 번호를 부여받았다. 한편 6.25 전쟁 당시 미군이 북한군 포로 이병찬 중위를 심문한 기록에서는 본 공장을 헤이키쇼(Heikisho)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조병창을 뜻하는 또 다른 단어인 병기창(兵器廠)을 뜻한다. 당시 이북 지역에서 본 공장을 두고 그냥 일반명사를 쓸 정도로 대표적인 군수공장으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각종 언론기사 등지에서 평양제조소를 두고 인천육군조병창의 제2제조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해 이는 오류다. 인천조병창의 제2제조소는 대전 말기에 부평에 새로 신설될 예정이었던 곳이다. 평양병기제조소는 조병창 본창과 떨어져 있던 반독립적인 제조소였기에 명칭에 번호가 붙지 않고 소재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해방 이후 북한 시절에는 25호 공장을 거쳐 65호 공장으로 개칭되었다. 본 명칭은 현재도 직속후신인 전천 2.8 기계공장이 이어받아 계속 쓰고 있다. 그 외에 갈라져나온 공장들은 별도의 번호를 부여받았다. 한편 6.25 전쟁 당시 미군이 북한군 포로 이병찬 중위를 심문한 기록에서는 본 공장을 헤이키쇼(Heikisho)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조병창을 뜻하는 또 다른 단어인 병기창(兵器廠)을 뜻한다. 당시 이북 지역에서 본 공장을 두고 그냥 일반명사를 쓸 정도로 대표적인 군수공장으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제조소(製造所)'라는 일반명사 자체는 물품을 제작하는 '공장(工場)'의 유의어다. 배성준에 따르면 19세기 말에 일본 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영단어 'Factory'를 번역한 것으로 처음 등장하여 근대기 일본과 한국에서 널리 쓰였다. 대한제국 역시 군기창 예하의 총포탄약제조소나 탁지부 예하의 벽돌공장인 관립연와제조소 등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히 일반적으로 사용했다. 다만 경술국치 이래로 한국어에서 본 단어는 '공장'에 서서히 대체되었다. 현재도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남아 있으나 실제로는 위험물제조소, 의약품제조소 등에 한정적으로 사용된다. 또 다른 유의어로는 '제작소(製作所)'가 있는데 이 단어는 현대에 일본 쪽에서 고유명사로 종종 쓰인다.
하지만 신주백의 2025년 논문에 따르면 제국 시절 일본 육군의 직영 군수공장 운영 체계에서의 쓰임새라는 보다 구체적인 의미로 한정한다면, '제조소'란 단어는 공장(工場)보다는 높고 공창(工廠) 또는 조병창(造兵廠)보다는 낮은 중간 규모의 조직을 뜻했다. 가령 1879년부터 1923년까지 일본 육군에는 2개의 포병공창 예하에 개별 제조소들이 있었다. 1923년부터 1940년까지는 포병공창들이 하나의 육군조병창으로 통합되었고, 그 예하에 각 지역별로 여러 공창들이 있고 그 아래에 제조소들이,[2] 다시 그 아래에 공장들이 분포했다. 1940년부터 패망 때까지는 병기행정본부 아래 8개 육군조병창들이, 그 아래에 개별 제조소가, 그리고 그 아래에 공장이 있는 구조였다.
즉 일본 육군의 '공창' 또는 '조병창'은 직속 제조소들의 운영 감독 외에도 군에 의해 군수공장으로 지정된 민간 하청업체들과의 계약이나 연구소의 기술개발, 기능공 양성 등 보다 높은 층위의 다양한 업무를 총괄하는 사령부 또는 대기업 본사에 해당한다. '공장'은 직접 물품을 만드는 곳이고, '제조소'는 공창이나 조병창의 지시를 받아 휘하 공장들의 생산을 지휘하는 하나의 병기행정조직을 뜻한다. 인천육군조병창의 구조를 예로 들자면, 조병창 본부가 도쿄의 육군병기행정본부로부터 명령을 받아 구체적인 생산계획을 수립해 하달하면 평양제조소와 제1제조소에서 그에 따라 예하공장들을 통해 군수품을 제작했다.
참고로 평양병기제조소는 독립적인 조병창이 아니라 일개 제조소에 불과했으므로 독자적인 로고는 없었으며 상급기관의 것을 그대로 썼다. 그러나 제품에 평양에서 만들었다는 의미로 가타카나 'へ(헤)'를 새겨 넣긴 했다. 이는 당시 평양의 일본식 표기인 '헤이조(ヘイジョウ. Heijō)'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95식 하사관도 같은 일본군 장비에 'へ'가 새겨져 있다면 그것은 평양제조소에서 제작한 것이라 보면 된다.
하지만 신주백의 2025년 논문에 따르면 제국 시절 일본 육군의 직영 군수공장 운영 체계에서의 쓰임새라는 보다 구체적인 의미로 한정한다면, '제조소'란 단어는 공장(工場)보다는 높고 공창(工廠) 또는 조병창(造兵廠)보다는 낮은 중간 규모의 조직을 뜻했다. 가령 1879년부터 1923년까지 일본 육군에는 2개의 포병공창 예하에 개별 제조소들이 있었다. 1923년부터 1940년까지는 포병공창들이 하나의 육군조병창으로 통합되었고, 그 예하에 각 지역별로 여러 공창들이 있고 그 아래에 제조소들이,[2] 다시 그 아래에 공장들이 분포했다. 1940년부터 패망 때까지는 병기행정본부 아래 8개 육군조병창들이, 그 아래에 개별 제조소가, 그리고 그 아래에 공장이 있는 구조였다.
즉 일본 육군의 '공창' 또는 '조병창'은 직속 제조소들의 운영 감독 외에도 군에 의해 군수공장으로 지정된 민간 하청업체들과의 계약이나 연구소의 기술개발, 기능공 양성 등 보다 높은 층위의 다양한 업무를 총괄하는 사령부 또는 대기업 본사에 해당한다. '공장'은 직접 물품을 만드는 곳이고, '제조소'는 공창이나 조병창의 지시를 받아 휘하 공장들의 생산을 지휘하는 하나의 병기행정조직을 뜻한다. 인천육군조병창의 구조를 예로 들자면, 조병창 본부가 도쿄의 육군병기행정본부로부터 명령을 받아 구체적인 생산계획을 수립해 하달하면 평양제조소와 제1제조소에서 그에 따라 예하공장들을 통해 군수품을 제작했다.
참고로 평양병기제조소는 독립적인 조병창이 아니라 일개 제조소에 불과했으므로 독자적인 로고는 없었으며 상급기관의 것을 그대로 썼다. 그러나 제품에 평양에서 만들었다는 의미로 가타카나 'へ(헤)'를 새겨 넣긴 했다. 이는 당시 평양의 일본식 표기인 '헤이조(ヘイジョウ. Heijō)'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95식 하사관도 같은 일본군 장비에 'へ'가 새겨져 있다면 그것은 평양제조소에서 제작한 것이라 보면 된다.
책임자의 직책명은 제조소장(製造所長)이었으며 육군 포병 병과의 현역 장교가 맡았다. 평양상업회의소가 1920년에 발간한《평양안내》에 따르면 오픈 당시 조선병기제조소장의 계급은 중좌였다. 최서국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 패망 직전에는 대좌가 소장직을 맡고 있었다고 하며, 예하 각 부서장 및 공장장들의 계급은 대위에서 중좌 사이였다.
직원 수는 수천 규모를 수용할 수 있었으나 평시에는 감편 운영되었다. 《평양안내》와 매일신보 1920년 4월 7일자 기사에 따르면 건설 당시 평시 직원 수는 수백 수준, 전시의 최대수용능력은 5천 명으로 계획되었다. 한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의 기무라 미츠히코(木村光彦) 교수는 평양제조소의 직공 수가 개소 직후인 1923년 당시에는 200명에 불과했으나 국가총동원법이 반포된 1938년에는 2천 명으로 늘어났으며, 다시 일본의 패망 직전인 1945년에는 6천 명으로 증가했다고 파악한다. 그중 5천 명이 한국인이었다. 최서국은 직원 수는 평시에는 300명에 불과했으나 전쟁이 발발하며 4천 명으로 급증했다고 증언했다. 총 110명의 간부가 있었는데 이들은 '얀반(やんばん)', 즉 양반이라 불렸다고 한다.
최서국은 평양제조소가 일단 행정적으로는 부평의 인천육군조병창의 감독을 받았지만 운영 자체는 독립채산제였다고 설명한다. 거기다 조선인 인건비 역시 일본 본토보다 낮았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생산단가는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그래도 당시 식민지 조선 내에서는 평양제조소가 제공하는 임금이 비교적 높은 편이었고, 이곳에 군속으로 채용되면 지원병으로 징용되어 전선에 끌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취업 선호도는 높았다고 한다.
최서국에 따르면 제조소장 예하에서 전반적인 운영을 관리하는 행정조직으로는 총 6개의 계를 두었다. 사고 발생 시 치료를 담당할 의무, 시설 보수를 담당할 영선, 금전 관련 업무를 총괄한 회계, 생산품의 품질과 기밀문서인 설계도를 관리하는 검사, 생산계획을 총괄하는 핵심조직인 공무, 그리고 기타 문서업무를 처리하는 서무계가 있었다. 실제로 병기를 생산하는 공장조직으로는 금속가공을 맡은 제1공장과 기타 목재, 섬유, 피혁제품 제작 공정인 제2공장이 있었다. 생산 설비의 그 운영방식과 기술수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전시 생산량' 문서에서 후술한다. 참고로 신무기 개발은 하지 않았고, 그저 상부에서 설계도를 받아 만드는 데 전념했다. 무기개발은 상급기관인 조병창이 할 일이었다.
면적은 식민지 조선 내의 다른 공장과 비교해도 꽤나 거대한 편이었지만, 당연하게도 일본 본토의 대공장들에 비해서는 소규모였다. 평양상업회의소의 《평양안내》에 따르면 건설 초기의 총 면적은 20만 평이었으며 예하에는 벽돌과 강철로 지어진 건물 150동이 있었다. 최서국 역시 종전 직전의 평양제조소가 총 25만 평 가량 되는 넓이었으며, 주요 건물들은 본관과 재료창고를 제외한 전부가 단층 건물이었다고 설명한다. 내부에는 매점, 심지어는 신사도 있었고 완성품의 성능을 검증하기 위한 사격 시험장도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근무환경에 대해서는, 최서국의 증언에 따르면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요일은 휴무였고 토요일은 반나절 근무 후 퇴근했으나 전쟁이 벌어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생산직은 주야간 3교대로 투입되었고 사무직은 주간 10시간을 근무했다. 이 와중에도 군사훈련은 받아야 했다.
직원 수는 수천 규모를 수용할 수 있었으나 평시에는 감편 운영되었다. 《평양안내》와 매일신보 1920년 4월 7일자 기사에 따르면 건설 당시 평시 직원 수는 수백 수준, 전시의 최대수용능력은 5천 명으로 계획되었다. 한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의 기무라 미츠히코(木村光彦) 교수는 평양제조소의 직공 수가 개소 직후인 1923년 당시에는 200명에 불과했으나 국가총동원법이 반포된 1938년에는 2천 명으로 늘어났으며, 다시 일본의 패망 직전인 1945년에는 6천 명으로 증가했다고 파악한다. 그중 5천 명이 한국인이었다. 최서국은 직원 수는 평시에는 300명에 불과했으나 전쟁이 발발하며 4천 명으로 급증했다고 증언했다. 총 110명의 간부가 있었는데 이들은 '얀반(やんばん)', 즉 양반이라 불렸다고 한다.
최서국은 평양제조소가 일단 행정적으로는 부평의 인천육군조병창의 감독을 받았지만 운영 자체는 독립채산제였다고 설명한다. 거기다 조선인 인건비 역시 일본 본토보다 낮았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생산단가는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그래도 당시 식민지 조선 내에서는 평양제조소가 제공하는 임금이 비교적 높은 편이었고, 이곳에 군속으로 채용되면 지원병으로 징용되어 전선에 끌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취업 선호도는 높았다고 한다.
최서국에 따르면 제조소장 예하에서 전반적인 운영을 관리하는 행정조직으로는 총 6개의 계를 두었다. 사고 발생 시 치료를 담당할 의무, 시설 보수를 담당할 영선, 금전 관련 업무를 총괄한 회계, 생산품의 품질과 기밀문서인 설계도를 관리하는 검사, 생산계획을 총괄하는 핵심조직인 공무, 그리고 기타 문서업무를 처리하는 서무계가 있었다. 실제로 병기를 생산하는 공장조직으로는 금속가공을 맡은 제1공장과 기타 목재, 섬유, 피혁제품 제작 공정인 제2공장이 있었다. 생산 설비의 그 운영방식과 기술수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전시 생산량' 문서에서 후술한다. 참고로 신무기 개발은 하지 않았고, 그저 상부에서 설계도를 받아 만드는 데 전념했다. 무기개발은 상급기관인 조병창이 할 일이었다.
면적은 식민지 조선 내의 다른 공장과 비교해도 꽤나 거대한 편이었지만, 당연하게도 일본 본토의 대공장들에 비해서는 소규모였다. 평양상업회의소의 《평양안내》에 따르면 건설 초기의 총 면적은 20만 평이었으며 예하에는 벽돌과 강철로 지어진 건물 150동이 있었다. 최서국 역시 종전 직전의 평양제조소가 총 25만 평 가량 되는 넓이었으며, 주요 건물들은 본관과 재료창고를 제외한 전부가 단층 건물이었다고 설명한다. 내부에는 매점, 심지어는 신사도 있었고 완성품의 성능을 검증하기 위한 사격 시험장도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근무환경에 대해서는, 최서국의 증언에 따르면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요일은 휴무였고 토요일은 반나절 근무 후 퇴근했으나 전쟁이 벌어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생산직은 주야간 3교대로 투입되었고 사무직은 주간 10시간을 근무했다. 이 와중에도 군사훈련은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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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육군지도국 제작 평양지도(1946)에 그려진 모습. 병기제조소 위 지도 중앙에 육군 창고들(Army Warehouses)라고 표기된 곳이다. 평양역에서부터 갈라져나온 선로가 부지 내로 이어져 있다. |
平壤兵器補給廠. 평양에 일본 육군이 세운 보급창이며 평양육군병기지창이라고도 불렸다. 부경대학교 김윤미의 논문 "일제시기 일본군의 대륙침략 전쟁과 부산의 군사기지화"에 따르면 1923년 고쿠라 육군병기지창(小倉陸軍兵器支廠)[4] 예하 평양출장소로 문을 열었다. 그러다 1940년부로 개별 보급창으로 승격되었고, 신설된 병기본부의 통제를 받기 시작했다. 최서국에 따르면 평양보급창장의 계급은 소장이었다.
위치는 마찬가지로 평천리였으며 병기제조소 바로 동북쪽에 붙어 있었다. 1942년 이후에는 부산, 부평, 겸이포, 나진 등지에 분창들을 설치했다. 똑같이 병기행정본부의 통제를 받던 인천육군조병창이 조선 내의 군수물자 생산을 총괄했다면 평양병기보급창은 조선군에서 사용할 여러 군수물자들을 보관하고 보급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평양제조소에서 만든 대부분의 물품은 인접한 보급창 본창으로, 부평의 인천조병창 제1제조소에서 생산한 무기들은 부평분창으로 인도되었다. 1945년 7월 인천조병창과 함께 육군 병기행정본부에서 조선군 직속으로 이관되었다가 종전을 맞았다.
- 아키야마 도요히라(秋山豐平)
평양상업회의소가 발간한 1920년판 《평양안내》에 언급되는 인물로, 당시 조선병기제조소장이다. 계급은 중좌, 병과는 포병이었다.
- 후루야 오타니노스케(古家小谷之助)
건설업자로,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중인 근대인물자료에 따르면 평양제조소 공사에 참여했다.
- 최서국
1910년생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태어난 공학자이다. 적어도 1930년대 초부터 평양제조소에서 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그의 회고에는 평양제조소 시절 본인의 직책을 명확하게 명시한 부분은 없다. 그러나 무려 육군 소장급인 일본인 병기보급창장의 딸과 이름을 터놓고 친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라던가 전후 임시 운영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대표로 조선군사령부를 찾아 전체 4천 직원들의 퇴직금을 인수해 돌아온 점, 그리고 제조소 운영현황이나 생산공정 전반 또는 병기 제조 기술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자면 고위 간부였을 가능성이 높다.
해방 직후 월남하여 대한민국 국방부 과학기술연구소 연구위원과 국제열관리연구소장 등을 지냈다. 70~80년대에는 주로 보일러 및 가스중독에 관해서 여러 글들을 남겼다.[5] 100세를 앞둔 2006년까지도 여러 잡지에 글을 기고했는데 당시에는 북한 문제와 새만금 개발 및 환경파괴 문제 등에 관심을 보였다. 2004년경 북한연구소의 학회지 《북한》에 대전기 평양제조소의 운영상황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한 <일제하 평양지역에 건설된 군수산업의 실체>라는 회고록을 특별 연재했다. 본 문서의 많은 부분이 그의 증언을 출처로 한다. 언제 작고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 정영도(鄭永燾)
직공.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중인 근대인물자료에 따르면 1921년부터 1925년까지 근무했다. 사회주의자였기에 감시가 붙어 있었다.
- 오쿠보 토시나리(大久保利成)
직공. 1925년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16세 때 평양제조소가 급료를 많이 준다는 4살 터울의 형 구니오(国雄)의[6] 설명을 듣고 취직했다. 대전 말인 1944년 평양에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인천에서 종전을 맞았고, 소련군에 억류되어 시베리아 굴라그에서 통나무를 세다 간신히 귀국했다. 2026년 현재도 생존해 있으며 가고시마 현지에서는 101세의 나이에도 등산을 계속하는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毎日登山続ける100歳男性「1日1日の積み重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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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조선 만주의 국경에 접근하여 있어, 이른바 국방제일선의 요관을 쥐고 있기 때문에 우리 제국 군비상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중략) 현재 군사시설로서는 여단,[8] 연대,[9] 헌병대, 헌병분대 위수병원, 육군창고, 군경리부 출장소 등이 있고 그밖에 동경포병공창 조선병기제조소가 있다. 이 병기제조소는 전시의 경우 전진병기공창으로서의 위대한 사명을 띠고 있기 때문에 공장의 규모가 매우 웅대하여 곧 평양의 이채로움이 될 뿐 아니라, 실로 조선 만주에 있어서 군사 국방상의 일대 강점이다.— 평양상업회의소(1920), 《평양안내》 80~82p
1910년대 일본은 평양부를 군사적 전진기지로 삼아 식민지 조선과 남만주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주차군 및 관동군 예하의 3~4개 사단들의 보급 및 정비 수요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일본 육군은 1917년부터 평양역 근처 평천리(현 평천구역. 평양성 외성 내부) 일대에 조병창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외성 일대는 1905년 러일전쟁 시기 일본군이 한일의정서를 명목으로 강제몰수한 곳이었다. 당시 한국주차군은 평양 외성 5방인 외천방(外川坊), 평천방(平川坊), 내천방(內川坊), 용천방(龍川坊), 고순화방(古順和坊) 지역에 군용지와 철도 시설을 건설했다. 이 중 평천방을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개편한 게 바로 평천리다.
1918년 조선병기제조소(朝鮮兵器製造所)라는 명칭을 부여받은 이 공장은 1920년 중순 경 완공되었다. 다만 육군성 직할 조직은 아니었다. 1879년부터 1923년까지 일본에는 공식적으로 도쿄와 오사카 총 두 개의 포병공창만이 있었으며, 나머지 조병창들은 행정적으로 두 기관에 나뉘어 속한 분공장들이었다. 조선병기제조소 역시 화약을 만들던 이타바시화약제조소(板橋火藥製造所)나 총포 및 기폭장치들을 만들던 주조제조소(十条製造所) 등과 마찬가지로 고이시카와의 도쿄포병공창을 상급기관으로 두고 있었다.
부지로 평양이 낙점된 이유는 당시 일본이 평양의 공업 발전 잠재력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평양상공업회의소에서는 평양을 '조선의 기타큐슈' 내지는[10] '조선의 오사카'라고[11] 평했다. 평양은 대동강이 흘러 공업용수를 쉽게 댈 수 있었던 데다 평남남부탄전에 풍부한 양질의 무연탄을 바탕으로 대규모 화력발전소를 가동함으로써 값싸게 전기를 조달할 수 있었다. 동시에 평양은 중국으로 향하는 경의선 등의 육상교통로와 대동강 수로의 교차점으로 많은 물산이 집산되어 금융자본도 꽤나 축적되었다.[12] 외항인 진남포에는 한반도 최초의 일관제철소인 겸이포제철소가[13] 들어섰으며 진남포제련소에서는[14] 인근의 금광에서 산출되는 금 등의 비철금속을 제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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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당대 조선 유일의 공업지대인 평양에 병기공창을 둠으로써 만에 하나 대한해협이 단절되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대륙부에 주둔한 일본군이 무기를 자급할 수 있도록 하려 했다. 그렇기에 조선병기제조소는 단조 공장과 목공장부터 해서 소총 공장과 포탄 공장, 심지어는 차량 공장까지 여러 군수품들을 생산할 수 있는 라인들을 두었다. 건설에 투입된 자금은 1917년 당시 400만 엔이었으나 갈수록 늘어나 완공 직전인 1920년 초에는 1천만 엔을 훌쩍 넘겼다. 철재는 미쓰비시에서 제공받았고 석탄은 평양탄을 사용했다.
조선병기제조소는 완공까지 대략 10% 가량이 남은 시점인 1920년 5월에 벌써 가동을 시작했으며 평양상업회의소에 의해 '평양 5대 공장'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15] 민간과의 산업적 연계도 추진되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은 중공업화가 거의 진전되지 못한 상태였기에, 조선 주둔 일본군은 만에 하나 안보적으로 위급한 상황이 되어도 일본 본토에서처럼 민간 군수산업체들을 통해 무기나 각종 기계 및 그 부품들을 수급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일본은 조선병기제조소에 일대의 산업체들에 대한 지도 업무를 부여함과 동시에 민간산업계의 성장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민간 주문을 받는 것을 허용하였다.
가장 기대되었던 민간용품은 철도였다. 1920년 4월 7일자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이미 당시부터 조선병기제조소를 통하여 일본 본토에 의존하지 않고 철도용품을 수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1910년 말부터 식민지 조선 곳곳에 관설과 사설을 막론하고 본격적으로 철도가 깔림에 따라 강재 수요가 늘었는데, 조선병기제조소 완공 이후부터는 레일을 일본뿐만 아니라 본 공장에 의뢰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평양안내"에 따르면 병기제조소는 그 외에도 나사나 톱니바퀴 등의 금속제 기계부품 생산이나 주물 및 단조 작업, 금속 재료 시험 등의 주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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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병기공업
(가) 평양병기제작소
평양병기제작소는 일본군이 만주에서 작전할 경우 일본군의 탄피(打殼藥莢)를[16] 일본 본토로 보내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전장 가까이에서 이를 복제할 목적으로 간단한 설비를 평양에 개설한 것이다. 이 때문에 민간에 외주할 부품은 드물어 하청공장 배양의 기간(基幹)이라 할 수는 없었다. (후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번역판 《조선군개요사(朝鮮軍概要史)》 제4장 '자원 동원', 141p.
다만 평양상업회의소의 소개글처럼 조선병기제조소가 오픈 초기부터 오사카 포병공창과 같은 일본 본토의 조병창들만큼 민간공장들과 적극적으로 연계하여 지역의 공업발전을 견인하였는지는 불명확하다. 실제로 2차 대전 패전 후 연합군 점령하 일본에서 편찬된 조선군 공식 역사서인 《조선군개요사(朝鮮軍概要史)》[17]에 따르면, 완공 초기의 평양제조소는 '간단한 설비'를 갖추고 포탄을 재생하는 전방 생산기지로 건설된 것이었으므로 딱히 민간 공업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고 서술한다.
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배성준의 《한국 근대 공업사》에 따르면 1920년대 초 조선의 공업은 대형 관영공장 몇 군데를 빼면 태반이 그저 가내수공업이었다. 게다가 1920년대 말부터 1936년까지도 조선의 공업구조는 '식민지적 이중구조'에 해당하였기에 일본 본토와 달리 대공장과 주변 중소기업들의 연관성이 매우 약했다. 일본 본토에 뿌리를 둔 거대 자본이 운영하는 대공장들이 시장을 독점적으로 장악하며 원료와 노동력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이 와중에 조선 내의 수많은 중소공장들은 살아남기 위해 과잉 경쟁하며 나머지 파이를 나눠 먹어야 했다. 중소공장 대부분은 그저 마치코바(町工場)[18] 수준이었기에 기술적으로 낙후되었고 대부분의 원료를 대공장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하청을 받는다 한들 기본적인 수리나 가공 정도만을 전담했다. 영세공장들이 조선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22년이나 1937년이나 동일한 97%였다.
1920년대 당시 조선 공업을 견인하던 대표적인 도시인 평양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1914년 이래 평양의 소공업은 타 지역과 달리 대부분 조선인 실업가들이 주도하고 있었다.[19] 반면 대공업은 1918년 이후로 들어선 조선병기제조소를 비롯한 몇 개의 일본 공장들이 차지했다. 이 이중구조 하에서 조선인 공업가들은 주로 정미업, 양말 제조, 고무 제조 등에 종사했으며 기계류는 그리 취급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 대공장들은 대자본을 투입해야 하는 제당, 전기, 연탄 및 시멘트 제조, 병기 제조 등에 종사했다.
다시 말해 평양 내에서 양적 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인 공업가들과 양적 소수이지만 매출액의 다수를 차지하는 일본 대공장들은 업종부터 분포 지역까지 상당히 유리되었다. 게다가 조선인 실업가들은 총독부의 정책으로 공식 금융권의 자금 지원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의 시설인 조선병기제조소가 민간공업 발전에 끼친 영향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오선실의 논문 "평양의 기독교 공동체와 숭실전문학교의 과학기술 교육"에 따르면 1920년대 평양에서 민간 소공장들과의 기술협력에 적극적이었던 곳으로 확인되는 시설은 숭실학당(현 숭실대학교) 부속 화학실험실과[20] 그 부속공장인 기계창(The Anna Davis Industrial Shop)이다.
따라서 조선병기제조소가 건설 직후부터 민간공업과 만접한 연관을 맺으며 그 지도장려를 맡았다는 평양상업회의소의 설명은, 실제로 그랬다기보다는 공장 가동 당시에 평양 거주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그런 강한 기대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반대로 당시 조선인 민족주의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은 병기제조소의 민간 대상 영업을 그닥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2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병기제조소가 민간 대상 영업을 실시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도 '듣기에는 누구를 생각해 주는 것 같지만 기실 민간의 돈을 좀 긁어보려는 책략이 아닌지'라며 비꼬듯이 논평하기도 했다.
그래도 1930년대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일제가 점차 총력전 체제로 돌입하여 군수공업이 발전하고 전쟁경제가 민간경제를 잠식함에 따라, 평양병기제조소 역시 민간 공장들과 보다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칙령 제83호 육군조병창령
제1조: 육군조병창은 육군 소요의 무기를 고안 설계하고 육군 소요의 무기 기타의 군수품 및 일반화약류를 제조 수리하며, 또한 이들 제품의 검사를 함과 동시에 해군 소요의 화약을 제조 수리하는 것으로 한다.
제2조: 육군조병창에 총무부, 작업부, 기술부, 회계부, 공창 및 장관 직할의 제조소를 둔다. 공창은 도쿄, 오지(王子),[21] 나고야(名古屋) 및 오사카에 두고 직할 제조소는 고쿠라 및 평양에 둔다.(후략)— 육군조병창령. 1923년 4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조선군사령부의 '조선군역사(朝鮮軍歷史)' 제4권을 인용한 신주백의 2025년 논문에 따르면, 조선병기제조소는 개소 직후인 1921년 4월에 도쿄포병공창에서 오사카 포병공창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일반적으로 도쿄공창이 소총과 소총탄 및 화약 생산을, 오사카공창이 대포와 포탄을 전담했음을 생각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포탄 생산 및 약협 재생에 주력하던 조선병기제조소가 오사카공창의 휘하로 이속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직후부터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일본 조병창 조직의 개편이 이어지면서 조선병기제조소 역시 다시 이리저리 소속이 바뀌었다. 오사카 포병공창 산하로 들어간 지 고작 2년 후인 1923년 4월 1일, 도쿄와 오사카 두 개로 나뉘어 있던 일본 육군의 조병창 행정조직이 한데 합쳐져 육군조병창으로 개편되었다. 야마나시 군축의 일환이었던 이 개편계획은 포병공창이 분리되어 발생하는 재정적이고 행정적인 낭비를 막기 위해 추진되었다.[22] 이때 조선병기제조소는 고쿠라 병기제조소와[23] 함께 육군조병창의 직할 제조소가 되었다. 이때부터 이름도 평양병기제조소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직후부터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일본 조병창 조직의 개편이 이어지면서 조선병기제조소 역시 다시 이리저리 소속이 바뀌었다. 오사카 포병공창 산하로 들어간 지 고작 2년 후인 1923년 4월 1일, 도쿄와 오사카 두 개로 나뉘어 있던 일본 육군의 조병창 행정조직이 한데 합쳐져 육군조병창으로 개편되었다. 야마나시 군축의 일환이었던 이 개편계획은 포병공창이 분리되어 발생하는 재정적이고 행정적인 낭비를 막기 위해 추진되었다.[22] 이때 조선병기제조소는 고쿠라 병기제조소와[23] 함께 육군조병창의 직할 제조소가 되었다. 이때부터 이름도 평양병기제조소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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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당시 일본제국통계연감에는 이 당시 평양병기제조소의 규모를 유추 가능한 자료가 하나 남아 있다. 위 표에 따르면 평양제조소에는 증기기관과 발전기는 없었고, 대신 전동기 10대를 보유했다. 실마력은 총합 190마력이다. 근무자들은 직원이 24명, 직공들은 남성이 243명, 여성이 21명에 불과했다. 연인원으로 환산하면 남성 직공 71,283명, 여성 직공 6,646명이었다. 이 수치는 당대 육군의 주요 조병창들, 즉 오사카와 도쿄, 화공창, 나고야의 수준에 한참 미달한다. 고쿠라 병기제조소에 비하자면 인원 수는 조금 더 많지만 설비는 고쿠라가 좀 더 충실히 갖추고 있다. 물론 공창급 시설과 일개 제조소급 시설을 1대 1 비교할 수는 없으나, 평양을 '조선의 기타큐슈'라 부르던 평양상업회의소의 자찬이 무색해질 정도로 극심했던 당시 일본 본토와 식민지 조선 사이의 공업 인프라 차이가 잘 드러난다.
그러던 1923년 9월에는 육군조병창 도쿄 공창(구 도쿄포병공창)이 관동 대지진을 직격으로 얻어맞고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완파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23년 11월 22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이때 일본은 도쿄 공창의 파괴로 감소한 무기 생산 능력을 보완하고자 평양병기제조소의 시설을 크게 증강하고자 하였으나 예산이 없어 포기했다. 이후 도쿄공창은 기타큐슈 일대에 신설된 육군조병창 고쿠라 공창으로 1935년까지 설비를 이전하고 문을 닫았다. 비슷한 시기인 1936년 8월, 평양병기제조소는 다시 소속이 변경되어 고쿠라 공창이 관할하는 제조소로 편입되었다. 이는 고쿠라 공창이 거리상 한반도와 훨씬 가까운 규슈 북부를 소재지로 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1920년대 평양제조소와 그 부속시설들은 평양부의 도시계획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10년대 이래로 평양의 인구가 갈수록 불어나면서 인구를 분산할 필요가 있었는데, 막상 본평양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평천리는 여전히 대부분 군용지로 묶여 있어 이 방향으로의 시가지 확장은 불가능했다. 평양제조소 바로 옆에는 육군병기지창과 연병장이 들어섰고 경의선 선로 동쪽 창광산 일대에는 조선주차군 제39여단사령부와 보병 제77연대가 존재했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1929년 4월 대동강 너머의 동평양 일대를 평양부에 편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행정구역을 점차 넓히기 시작했다. 이 중 대동강철교를 통해 평천리와 이어지는 선교리는 동평양의 대표적인 공업지역이 되었다.
또한 1929년 판 《조선군인 및 조선보병대에 관해서》에[24] 따르면, 평양제조소는 이왕가 호위를 위하여 잔존한 대한제국군 부대인 조선보병대의 무기도 취급하였다. 무기를 새로 만들거나 수리할 경우 조선병기제조소에 주문하여 배당된 예산 내에서 제공받았다고. 무기의 종류는 일본군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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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내 제조소 증설의 설명 개요 1939.8.10.(병기국)
만선(滿鮮) 북지(北支)에 대한 수송의 신속 안전 및 조선 내 병기 공업 능력의 비약적 발전을 기하기 위해 경성 근방에 총기류의 생산을 주 임무로 하는 제조소 한 곳을 설치한다.
본 제조소는 우선 고쿠라공창장의 예하에 두는데 1940년도에는 평양병기제조소와 함께 새로 설립할 조선공창에 예속토록 한다.
1. 설비 능력
1) 제조소 설비 목표는 다음과 같다.
소총 월 생산 2만 정, 경기관총 월 생산 100정, 중기관총 월 생산 100정
총검 월 생산 2만 진, 군도 월 생산 1천 진
2) 부지는 약 100만 평
단, 장래 공창 본부 및 실포류[27] 생산을 주임무로 하는 1개의 제조소를 본 부지 내에 설치할 수 있도록 여지를 둘 것.
한편, 이즈음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일본 군국주의가 고삐가 풀려 폭주하기 시작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하면서 일본은 준비되지 않은 장기 총력전에 돌입해야 했다. 1938년 전시 국가총동원 체제가 발효됨에 일본 육군의 조병창들 역시 따라 하나 둘 시설이 증설되고 가동률이 늘어났다. 핵심적인 식민지였던 일본령 조선 역시 전선에 보낼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후방기지의 역할을 부여받으면서 중공업화가 진전되었다. 대표적으로 1934년부터는 총독부가 총포화약류취체령을 개정함으로써 그간 금지되었던 조선 내에서의 화약제조를 허가하며 관련 산업이 급격히 성장했다.
이에 경성부와 경기도가 적극적으로 군수공업 육성에 의욕을 보이면서 기계공업이 점차 한반도 중부로도 확장되었다. 하지만 1937년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의 기계공업 발전상은 미약했기에 경기도에서는 1937년 12월 경 지역 내의 주요 철공업자와 고무가공업자들을 불러모아 평양제조소와 평양항공창에 견학을 보냈다. 경성부 역시 마찬가지로 평양에 50명의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군수물자 제조 노하우를 배워 오도록 하였다. 이후 두 지역은 통제공업조합과 공동작업장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군수물자 하청을 시작한다. 특히 남경성공업지대라 불리던 영등포 일대와 새로이 공업지대로 낙점된 부평 일대에 기계 제작을 주로 하는 군수공장들이 밀집했다.[28]
1939년부터는 인천 부평의 조선군 제20사단 육군연습장 부지에 새로운 군수공장인 가칭 '조선공창' 건설이 시작되었다. 신주백에 따르면 이는 평양제조소 조직을 독립 공창으로 승격시킨 것이었다. 건설에는 평양제조소의 상급기관인 육군조병창 고쿠라 공창이 관여하였다. 그러나 부평 공장을 한창 짓는 도중인 1940년 3월에 개별 병기공창들을 통할하던 육군조병창 조직이 해체되고 그 예하 공창들이 개별적인 육군조병창의 지위를 부여받아 각 지역의 군수물자 조달 및 생산 감독 업무를 맡게 되었다. 부평의 가칭 '조선공창' 역시 1940년 12월 1일에 인천육군조병창으로 완성됨과 동시에 고쿠라 조병창으로부터 독립한다. 일본 육군의 8번째이자 마지막 조병창이었다. 인천조병창의 개편 기반이 되었던 평양제조소 시설은 부평의 제1제조소와 함께 인천공창에 속한 분공장이 되었다. 제1제조소는 예하에 총 4개의 공장을 두기로 계획했으나 실제로는 1945년까지 3개 공장만이[29] 가동되었다. 평양제조소는 이보다 규모가 작아 2개의 공장을 예하에 두었다.
1941년 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 정보당국은 평양제조소에 폭격 목표물 번호 84.3-61을 부여하고는[30] 항공 사진을 찍어다 102동의 건물에 일일이 전부 번호를 붙여가며 분석했다. 하지만 평양제조소는 일본의 영역 깊숙한 곳에 있었으므로 전쟁 후반부에 이르기 전까지 미국의 주요 폭격기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게다가 평양제조소가 아무리 조선 내의 핵심적인 조병시설이었다 해도 일본 전체로 보면 병기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비교적 낮았기 때문에, 평양제조소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폭격을 당하지 않았다. 다만 최서국에 따르면 1945년 7월 경 미군 폭격기가 상공에 출현하여 공장에 공습경보가 울린 적은 있다고 한다. 직원들은 전부 벙커로 대피했으나 결국 폭격은 벌어지지 않았다.
1944년부터 전황이 악화되어 B-29 폭격기 편대의 일본 본토 공습이 본격화되면서, 일본 육군은 핵심적인 조병창 중 하나인 도쿄 제1육군조병창의 소화기 탄약 생산설비를 조선으로 이전하여 인천조병창 예하에 제2제조소를 신설할 세웠다. 우선적인 이유는 폭격을 피하기 위함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부평과 평양 제조소의 생산량이 생각보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겸사겸사 설비를 증원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이 벌어지고 그 뒤로도 폭격이 이어져 제1조병창이 대파당하면서 이 계획은 백지화된다. 대신 인천조병창의 지하화 계획은 계속 추진되었고 평양제조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미군의 폭격을 피해 생산설비를 이전하고자 평양에서 약 10km가량 떨어진 한 바위산에 지하공장을 건설하였다. 이 공사에는 평양형무소[31] 재소자들이 노역에 강제 동원되었다.
한편 대본영은 1945년 6월 9일부로 인천육군조병창의 소속을 병기행정본부에서 조선군 직속으로 이관했다. 이는 미국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일본 열도와 식민지 조선을 비롯한 대륙부 영토 및 점령지가 점차 유리되어 가면서 본토에서의 보급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군수공장들을 감독할 권한을 현지 주둔 일본군 사령부에 넘겨주어 필요한 물품을 자급자족하게 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이때 최서국에 따르면 45년 여름 38선 이북 지역의 관할권이 관동군으로 넘어가자 평양제조소는 인천공창 예하에서 다시 떨어져나와 그 밑으로 재배치될 준비를 했다고 한다. 1945년 5월 경 병기행정본부에서 관동군에 통제권을 넘겨주었던 만주 봉천 소재 남만육군조병창의 관할하에 들어가려던 것인지, 아니면 전처럼 직할 제조소로 환원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1억 총옥쇄는 일어나지 않았고,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인천조병창 본창과 제1제조소는 미군정에게, 그리고 평양제조소는 소련군정에 입수된다. 평양제조소의 지하공장 역시 종전 직전 대략 90%의 완공률을 보였으나 결국 공장이 이곳으로 이전하는 일은 없었다.
이에 경성부와 경기도가 적극적으로 군수공업 육성에 의욕을 보이면서 기계공업이 점차 한반도 중부로도 확장되었다. 하지만 1937년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의 기계공업 발전상은 미약했기에 경기도에서는 1937년 12월 경 지역 내의 주요 철공업자와 고무가공업자들을 불러모아 평양제조소와 평양항공창에 견학을 보냈다. 경성부 역시 마찬가지로 평양에 50명의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군수물자 제조 노하우를 배워 오도록 하였다. 이후 두 지역은 통제공업조합과 공동작업장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군수물자 하청을 시작한다. 특히 남경성공업지대라 불리던 영등포 일대와 새로이 공업지대로 낙점된 부평 일대에 기계 제작을 주로 하는 군수공장들이 밀집했다.[28]
1939년부터는 인천 부평의 조선군 제20사단 육군연습장 부지에 새로운 군수공장인 가칭 '조선공창' 건설이 시작되었다. 신주백에 따르면 이는 평양제조소 조직을 독립 공창으로 승격시킨 것이었다. 건설에는 평양제조소의 상급기관인 육군조병창 고쿠라 공창이 관여하였다. 그러나 부평 공장을 한창 짓는 도중인 1940년 3월에 개별 병기공창들을 통할하던 육군조병창 조직이 해체되고 그 예하 공창들이 개별적인 육군조병창의 지위를 부여받아 각 지역의 군수물자 조달 및 생산 감독 업무를 맡게 되었다. 부평의 가칭 '조선공창' 역시 1940년 12월 1일에 인천육군조병창으로 완성됨과 동시에 고쿠라 조병창으로부터 독립한다. 일본 육군의 8번째이자 마지막 조병창이었다. 인천조병창의 개편 기반이 되었던 평양제조소 시설은 부평의 제1제조소와 함께 인천공창에 속한 분공장이 되었다. 제1제조소는 예하에 총 4개의 공장을 두기로 계획했으나 실제로는 1945년까지 3개 공장만이[29] 가동되었다. 평양제조소는 이보다 규모가 작아 2개의 공장을 예하에 두었다.
1941년 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 정보당국은 평양제조소에 폭격 목표물 번호 84.3-61을 부여하고는[30] 항공 사진을 찍어다 102동의 건물에 일일이 전부 번호를 붙여가며 분석했다. 하지만 평양제조소는 일본의 영역 깊숙한 곳에 있었으므로 전쟁 후반부에 이르기 전까지 미국의 주요 폭격기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게다가 평양제조소가 아무리 조선 내의 핵심적인 조병시설이었다 해도 일본 전체로 보면 병기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비교적 낮았기 때문에, 평양제조소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폭격을 당하지 않았다. 다만 최서국에 따르면 1945년 7월 경 미군 폭격기가 상공에 출현하여 공장에 공습경보가 울린 적은 있다고 한다. 직원들은 전부 벙커로 대피했으나 결국 폭격은 벌어지지 않았다.
1944년부터 전황이 악화되어 B-29 폭격기 편대의 일본 본토 공습이 본격화되면서, 일본 육군은 핵심적인 조병창 중 하나인 도쿄 제1육군조병창의 소화기 탄약 생산설비를 조선으로 이전하여 인천조병창 예하에 제2제조소를 신설할 세웠다. 우선적인 이유는 폭격을 피하기 위함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부평과 평양 제조소의 생산량이 생각보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겸사겸사 설비를 증원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이 벌어지고 그 뒤로도 폭격이 이어져 제1조병창이 대파당하면서 이 계획은 백지화된다. 대신 인천조병창의 지하화 계획은 계속 추진되었고 평양제조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미군의 폭격을 피해 생산설비를 이전하고자 평양에서 약 10km가량 떨어진 한 바위산에 지하공장을 건설하였다. 이 공사에는 평양형무소[31] 재소자들이 노역에 강제 동원되었다.
한편 대본영은 1945년 6월 9일부로 인천육군조병창의 소속을 병기행정본부에서 조선군 직속으로 이관했다. 이는 미국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일본 열도와 식민지 조선을 비롯한 대륙부 영토 및 점령지가 점차 유리되어 가면서 본토에서의 보급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군수공장들을 감독할 권한을 현지 주둔 일본군 사령부에 넘겨주어 필요한 물품을 자급자족하게 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이때 최서국에 따르면 45년 여름 38선 이북 지역의 관할권이 관동군으로 넘어가자 평양제조소는 인천공창 예하에서 다시 떨어져나와 그 밑으로 재배치될 준비를 했다고 한다. 1945년 5월 경 병기행정본부에서 관동군에 통제권을 넘겨주었던 만주 봉천 소재 남만육군조병창의 관할하에 들어가려던 것인지, 아니면 전처럼 직할 제조소로 환원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1억 총옥쇄는 일어나지 않았고,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인천조병창 본창과 제1제조소는 미군정에게, 그리고 평양제조소는 소련군정에 입수된다. 평양제조소의 지하공장 역시 종전 직전 대략 90%의 완공률을 보였으나 결국 공장이 이곳으로 이전하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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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평양제조소에서 제작한 가죽제 아리사카 소총 탄입대. 2022년 11월 인천광역시 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인천 조병창 관련 유물 일괄" 10점 중 하나이다. 현재 부평역사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사진 출처는 국가유산포털. |
태평양 전쟁 당시 평양제조소의 생산량과 생산 품목, 운영현황 등에 대해서는 다양한 자료들이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평양제조소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바로 포탄 생산이다. 또한 자료마다 세부적으로 차이는 있으나 마구와 포차도 중요하게 언급되며, 부차적으로는 항공기 부품 생산도 계획했다. 본 제조소의 생산량과 설비 및 그 중요성은 조선 내에서는 최고로 꼽히지만, 객관적으로는 그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부표 제7> 인천조병창 주요 생산품 종류 및 수량 | ||
생산품 | 수량 | 비고 |
소총 | 4,000정 | (1개월) |
총검 | 20,000진 | (월) |
소총 실탄 | 700,000발 | (월) |
대포용 탄환 | 30,000발 | (월) |
군도 | 2,000진 | (월) |
차량 | 200량 | (월) |
피혁마제품 | 200,000엔 | (월) |
병기의 수리 | 10,000엔 | (월) |
소형배 | 250[32] | (1944년 및 1945년도분으로 함) |
무전기 | 200조 | (1945년도분) |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번역판 《조선군개요사(朝鮮軍概要史)》 제4장 '자원 동원', 143p | ||
1944년 인천육군조병창 주요 정비품 생산현황 | |||
품목 | 단위 | 계획량 | 실 생산량 |
30년식 총검 4식 단검 | 진(振) | 219,000 (162,000) | 30년식: 177,000 4식: 40,000 |
정(挺) | 65,000 (60,000) | 60,000 | |
개(箇) | 603,000 (543,000) | 550,000 | |
89식 중척탄통 유탄 탄환 | 개(箇) | 266,000 | 192,599 |
97식 곡사 보병포 100식 유탄 탄환 | 개(箇) | 255,000 (135,000) | 200,000 |
92식 보병포 유탄 탄환 | 개(箇) | 65,000 | 109,500 |
94식 37밀리포 유탄 탄환 | 개(箇) | 150,000 | 154,217 |
1식 37밀리 전차포 시제 1식 유탄 탄환 | 개(箇) | 52,500 | 36,000 |
1식 기동 47밀리포 98식 유탄 탄환 | 개(箇) | 42,000 (30,000) | 40,000 |
41식 산포 94식 유탄 탄환 | 개(箇) | 80,000 | 66,749 |
94식 경박격포 시제 2식 유탄 탄환 | 개(箇) | 15,000 | 15,000 |
개(箇) | 39,500 | 50,000 | |
88식 7cm 야전고사포[34] 90식 고사 첨예탄 탄환 | 개(箇) | 101,500 | 134,000 |
91식 10센티 유탄포 91식 첨예탄 탄환 | 개(箇) | 8,000 (6,500) | 12,000 |
기부부주(機附艀舟) 외 기관 | 척(隻) | 240 | 250 |
척(隻) | (9) | (7) | |
15마력 소옥기관(燒玉機關)[35] | 기(基) | 435 (415) | 500 |
75마력 소옥기관 | 기(基) | 100 (30) | 0 |
115마력 소옥기관 단조품 | 개(箇) | 260 (240) | 0 |
선정(船艇) 수리용 기계기구 | 만 엔(滿圓) | 20 | 0 |
94식 2호 을(乙) 무선기 | 기(基) | 100 | 40 |
차량 무선기 갑 | 기(基) | 60 | 0 |
경철조 철 | 개(箇) | -- | 3,000 |
분해식 축두 | 조(組) | -- | 45 |
야전삽(円匙) | 개(箇) | 180,000 | 200,000 |
십자 괭이(十字鍬) | 개(箇) | 75,000 | 120,000 |
곡괭이(鶴嘴) | 개(箇) | 8,000 | 8,500 |
소석공구(小石工具) | 개(箇) | 930 | 1,100 |
29식 경중차 갑 | 량(輛) | 6,294 | 5,200 |
38식 경중차 만마(輓馬)용구 | 조(組) | 2,000 | 3,000 |
경중용 97식 태마(駄馬)용구 | 조(組) | 3,000 | 5,000 |
41식 산포 격마구(擊馬具) | 조(組) | 75 | 200 |
96식 포병 만마구 전마용(前馬用) | 조(組) | 600 | 3,000 |
96식 포병 만마구 후마용(後馬用) | 조(組) | 450 | 0 |
14년식 승마구 | 조(組) | 950 | 1,000 |
95식 장교 승마구 | 조(組) | -- | 2000 |
경중용 15년식 태마구 | 조(組) | -- | 0 |
Ho-203[36] 유탄대용탄 탄환 가신관공(假信管共) | 개(箇) | 130,000 | 140,000 |
항공기 관련 공구 | 천 엔(千圓) | 4,500 | 0 |
항공기 부품 생산 | 천 엔(千圓) | 10 | 100 |
※ 괄호 안의 숫자는 최저 생산 목표치이다. ※ 출처: 昭和20年3月 隸下部隊長會同時狀況報告 仁川陸軍造兵廠 | |||
- 부평문화원 《부평사(2021)》
인천광역시 부평구의 향토문화 연구시설인 부평문화원에서는 지난 2021년 편찬한 《부평사》 제4권 "인천육군조병창과 애스컴 시티"에서 1944년 당시 인천육군조병창의 생산 품목과 생산량 총액을 소개했다. 이는 1945년 초 당시 인천조병창장 와케 다다후미가 본국에 송신한 <쇼와 20년 3월 예하 부대장 회동시 상황보고 인천육군조병창(昭和20年3月 隸下部隊長會同時狀況報告 仁川陸軍造兵廠)> 문서를[37] 인용한 것이다. 본 도표 역시 위 조선군개요사와 마찬가지로 부평의 제1제조소와 다른 민간 지정공장들까지 전부 포함하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평양제조소의 생산량만을 따로 떼어 집계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자료들이나 증언과 비교해 보면 이 중 포탄과 수류탄, 각종 마구들과 항공기 부품 등이 평양에서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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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3월 작성된 "쇼와 20년(1945년) 인천육군조병창 작업 계획(昭和20年度仁川陸軍造兵廠作業計画)" 문서의 6쪽. 각 품목마다 담당공장과 월별 생산 할당량이 정해져 있다. 평양제조소 생산분은 대분류 '자대(自隊)'에 '평양(平壤)'으로 적혀 있다. 그 외 '제1(第一)'로 표기된 것은 부평의 제1제조소, '제2(第二)'로 표기된 것은 대전 말기에 신설될 계획되었던 부평 제2제조소다. 민간 생산분은 대분류 '민간(民間)' 아래에 각 회사에 따라 나뉘어 있다. 출처는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소장 昭和20年度仁川陸軍造兵廠作業計画 昭和20年3月. 청구번호는 中央-軍事行政軍需動員-641 |
-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전문연구원
일본군 내부 문건을 분석하며 인천육군조병창의 전반적인 운영실태를 조사했던 신주백의 2025년 논문에 따르면 평양제조소의 생산량은 일본 제국의 전체 병기생산 총량에 비교해 보았을 때 매우 적었다. 1917년 창설 이래로 평양제조소의 주 업무 중 하나는 바로 소총 수리였는데, 일본 육군의 주요 조병창 중 수리 같은 부수적인 작업을 주업무로 배정받은 공장은 평양제조소뿐이다. 또한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과 1943년 3월의 1달 소구경탄[38] 생산량은 46,000통(筒),[39] 중구경탄 생산량은 고작 4천 통이었다.[40] 그 외에 수류탄, 엔진, 그리고 일반기기 등 인천조병창 내에서 평양제조소가 생산을 담당한 품목들 역시 민간 군수공장들의 생산량이 더 많았다.
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신주백은 1945년 4월 이후 인천조병창의 생산계획을 정리한 문서인 <쇼와 20년 인천육군조병창 작업계획(昭和20年度仁川陸軍造兵廠作業計画 昭和20年3月)>을 인용하였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제조소는 1945년 당시에도 주로 탄약을 만드려 했지만 직접 생산을 담당한 비중은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99식 수류탄 갑탄은 전부 민간공장이 담당했고 89식 중척탄통 탄 및 97식 곡사 보병포 100식 유탄 역시 민간에서 상당량을 만들 것이었다. 99식 88mm 고사포용 100식 고사포탄도 마찬가지였다.
평양제조소가 전담하려던 품목들도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우선 95식 하사관도를 4월부터 100진씩 만들기 시작하여 7월부터는 매달 1,500진씩 생산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89식 중척탄통과 4식 100kg 도비폭탄(四式 一〇〇瓩跳飛爆彈) 탄환을 5월부터 생산할 예정이었고, 7월부터는 순차적으로 4식 전투기 Ki-84 하야테와 4식 기본연습기 Ki-86[41] 및 2식 고등연습기 Ki-79용[42] 특수기구를 제작하려 했다.
포탄류 제조에 역점
평양포병공장에서는 포탄, 수류탄, 포차, 안장, 탄약함 등을 제조하였다. 그리고 각종 공구와 검사용 게이지를 자작, 자급하였다. 또한 각 현지 부대로부터의 총포류의 수리요구에 신속히 대응했었다. 그중 포탄류의 제조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다.
포탄의 재료인 탄환강(彈丸鋼)은 일본 큐슈에 있는 야하다(八幡)제철소에서 가져왔다. 재질은 대략 공구용 탄소강(炭素鋼)에 가까운 것으로서 당금질경화(Quench hardning)가 보장되어 있었으며, 일반 JIS와는 별도로 육군지금가규격 (陸軍地金假規格)이 제정되어 있었다. 철도화차에서 내린 강재는 ⑬에서 기계톱으로 절단 가열하여 ⑥의 착출기(搾出機)로 성형한다. 착출기는 수압식으로 되어 있었으며 수압은 대동강물을 끌어들여 축력기(Accumulator)에 펌핑함으로써 항시 충분한 고압을 유지하였다. 포탄의 종류는 75㎜유탄(榴彈)이 주제품이었으며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 105㎜포탄도 일부 생산하였다. (후략)— 최서국. (2004). 일제하 평양지역에 건설된 군수산업의 실체 <2>. 북한, , 192-197
- 전 국방부 과학기술연구소 연구위원 최서국
실제로 근무했던 최서국 연구위원에 따르면 예하의 제1공장은 철강제품 담당으로서 무기를 수리하고 공구와 포탄을 만들었으며, 제2공장은 목제를 가공할 제재소와 탄약함, 안장 및 포차 생산라인을 두었다. 이 중 핵심은 소좌급이 공장장으로 있던 제1공장으로, 포탄을 생산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주된 생산품목은 일본군의 주력 야포에 사용될 75mm 고폭탄이었지만[43] 105mm 포탄도[44] 일부 만들었다. 다만 이곳에서 직접 탄체에 작약을 충전하지는 않았고 탄체만 만들어 바로 옆의 평양육군병기지창으로 보냈다고 한다. 75mm 포탄의 일일 생산량은 1천 발이었다. 그 외에는 수류탄을 대량 생산했고, 50mm 고사포탄과 지름 200mm 항공 폭탄[45] 역시 적지만 만들었다. 다만 지뢰는 전혀 생산하지 않았다.
병기 수리의 경우에는 손상되거나 마모된 부품을 교체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다만 대포의 포신은 고치지 못했다. 한편 제2공장의 제재소에서는 여타 생산라인에 필요한 목재들을 건조하고 가공했다. 안장공장에서는 마구 외에도 탄약주머니도 생산하였다. 또한 계측기실과 실험실에서는 미터법에 기반한 도량형 원기를 기준 삼아 각 재료들의 성분과 물성을 테스트하기 위한 유럽제 정밀실험장비들을 동원하여 제품의 품질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마지막으로 공구공장에서는 나치 독일에서 수입한 고급 정밀공작기계와 최고급 숙련공들을 두고 병기제조에 필요한 공구들을 직접 생산했다. 인천조병창이 관할하던 다른 민간 지정공장에도 공구를 공급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조선 내의 공구 수급처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생산에 필요한 재료들도 다양하게 사용했다. 포탄 생산용 강재는 원래 일본 본토 기타규슈의 야하타 제철소에서 가져온 탄환강을 성형해 사용했다. 하지만 전쟁 말기로 갈수록 보급로가 교란되고 공급이 부족해짐에 따라, 이 대신 잇몸이라고 인근 미쓰비시 겸이포제철소에서 공급받은 선철을 이용해 포탄을 만들었다. 이 방식은 주물 생산이었기에 공구용 탄소강급 탄환강으로 만든 기존 포탄에 비해 성능은 떨어졌지만 생산량은 나름대로 꽤 늘릴 수 있었다. 포가 및 마구 생산용 목재로는 주로 상수리나무와 떡갈나무 등의 참나무류와 느티나무 등의 견고한 활엽수를 주로 썼지만 전쟁 말기에는 적송 등 별의별 잡목까지 다 사용했다. 이는 대부분 한국의 산야에서 남벌한 것이었다. 또한 유지류 부족에도 불구하고 담금질용으로 귀한 면실유를 대량으로 썼다.
북조선에서 기계제작공업은 발달이 더뎠다. 이전에 공업 장비와 예비 부품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공급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과 전쟁 말기 군사적인 이유로 일본의 공업은 차례대로 소개(疏開)되었지만, 북조선에 일본인들이 건설한 것은 2곳의 항공기 제작공장을 비롯하여 영세한 기계제작기업 몇 개 뿐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현재 북조선 영토 내 주요 공장은 채광장비공장 셋, 조선소 셋, 주물기계공장 둘, 항공기 제작공장 둘, 무기 및 탄약 생산 공장 하나로 총 11개였다.
이외에도 북조선에는 각각 3명-1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가내수공업 형식의 소규모 기계정비, 조립 공장이 있다. 그러나 이런 공장들에서 생산한 생산품의 양은 충분치 않기에 북조선 경제에 본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앞서 언급된 11개 공장에는 금속 절단 기계 1,721대, 프레스와 해머 146대, 각종 공작기계 414대(주로 목재가공용, 실험용 및 기타 특수 장비), 용광로 38개, 전기로 15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금속의 절단, 용해, 주조 장비 및 기타 장비의 대부분은 평양 무기 공장인 ‘조병창’과[46] 항공기 제작공장 두 곳-“코쿠세”와[47] “미쓰이(三井) 비행기”에[48] 집중되어 있었다.
기계제작공장에 설치된 총 2,334대의 장비 가운데 그 57%인 1,338대가 군수공장 세 곳에 할당되어 있다.
기계제작공장의 장비들 간에는 개별적으로 커다란 기술적 불균형성이 존재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큰 결함은 축융기와 연발기와 함께 특히 연삭기에서 나타났다.— 한국사 총설 DB 해외사료총서, "한반도 북부 공업 상황에 대한 소련 민정청의 조사 보고", Д. 43 - Ⅸ. 기계제작공업
3/ 평양시 ‘조병창’ 무기 공장
이 공장은 1924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928년에 완공되었다.[49]
이 공장의 각 조직은 오로지 군사 목적의 생산 설비만을 갖추고 있다. 37-120mm 구경탄, 80-120mm 지뢰,[주의] (신관 없는) 대전차 지뢰, 대전차 로켓소총, 80mm 박격포, 포가(砲架), 탄약상자, 공병 장비, 기병 장구 등을 제조했다.(중략)
‘조병창’ 공장에는 20개의 생산 담당 및 그 보조 쩨흐가[51] 배치되어 있으며, 사무 및 저장시설 전체의 크기는 120,000㎡에 달했다. 주요 생산 쩨흐들의 외벽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트러스와 기둥의 결합은 리벳으로 접합된 철골구조였다.(후략)— 한국사 총설 DB 해외사료총서, "한반도 북부 공업 상황에 대한 소련 민정청의 조사 보고", Д. 43 - Ⅸ. 기계제작공업
- 소련군정
전후 평양제조소를 접수한 소련군정의 조사기록에 따르면 본 공장은 중구경 포탄 제조라인과 대구경탄 라인, 열처리장, 주강 공장, 주조 공장, 피혁공장 등 약 20곳의 주요 작업장에서 밥콕 & 윌콕스 보일러 4대로 돌아가는 발전장비와 2톤 전기로 1개, 3톤 용광로 2개, 각종 선반과 여러 종류의 유압프레스 및 공압해머 등을 보유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연간 37 ~ 120mm 구경 포탄 1백만 발과 포가(砲架) 5천대씩을 생산했다. 1945년에는 원자재 공급망이 붕괴한 바람에 생산량이 확연히 줄어 고작 포탄 25만 발, 포가 2천대만을 만들었다. 그 외에도 1945년에는 지뢰 6만 개와 대전차 무기[52] 30정, 그리고 100문의 81mm 박격포를 생산했다.
그 외에도 소련군정은 본 공장을 평양항공창, 쇼와비행기 평양공장과 함께 북한 지역의 3대 기계공장이라 평가하였다. 상대적으로 기계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북한 지역 기계제작공장들이 보유한 2,334기의 금속절단, 용해, 주조 및 기타 장비 중 약 57%가량인 1,338기가 이 세 공장에 있었다. 다만 기계들은 대부분 구식이었으며 상태도 매우 좋지 못했다고 한다.[53] 기초적 기술장비들은 구조 자체가 낡았고 현대적 천공기와 축융기는 한두대뿐이었다. 포드식 대량생산[54] 공정이 없어 분업화 정도도 낮았으며 노동 및 생산조직 역시 세련되지 못했던 데다 단순 육체노동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제1제조소에서도 생산라인을 따라 제품을 옮기는 데 기계를 전혀 쓰지 않고 인력만 썼음을 감안하면 평양제조소 역시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평양제조소는 다른 공장들에 비해 생산조직이 상대적으로 꽤 양호한 편이었고, 기계 및 화학 실험동은 현대적이었다.
D. 병기 생산
조선의 군수물자 제조 산업은 영세한 것으로 보인다. 인천조병창의 지창인 평안남도 평양의 육군 조병창은 최근 몇 년간 크게 확장했다. 이곳이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병기 제조 시설일 것이다. 이 공장은 소화기와 탄약을 생산하며, 핵심적인 포탄 적재 시설이기도 하다.
D. Ordnance.
The munitions industry Korea apparently is small. The army arsenal at P'yongyang (Heijō), P'yongan-namdo, a branch of the Inch'on (Jinsen) Arsenal, has been greatly expanded in recent years, and is probably the most important ordnance plant in the country. It produces small arms and ammunition, and also serves as a central depot for loading shells.
- 미국
한편 대전기 미국 정보당국은 인천조병창 본창이 아닌 평양제조소를 식민지 조선 내의 가장 중요한 군수공장으로 꼽았다. 하지만 1945년 4월자 JANIS 75번 문서에서 조선의 군수공업을 영세하다고 평가한 점이나 1945년 6월 26일자 합동목표지정국(Joint Target Group)의[55] 문서에서[56] 평양제조소를 두고 '중간 규모 소화기 공장(Medium size small arms plant)'이라고 칭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오사카 육군조병창이나 미쓰비시 중공업 등 일본 본토의 핵심적인 군수공장들에 비해서는 그 중요도를 확연히 낮게 보았다.
미국 자료의 유의할 점은 평양제조소를 직접 보고 조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 공장 분석에 항공 촬영 및 정보전을 통해 얻은 간접적인 정보만을 활용할 수 있었다. 때문에 대전 당시 미국의 평양제조소 분석결과를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 대표적으로 1945년 2월 정보문서에 따르면 미국이 당시만 하더라도 이곳을 탄약 생산 공장이 아닌 소총과 경기관총 등의 소화기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945년 4월 JANIS 75문서의 IX장에서는 소화기 외에도 탄약 역시 생산하는 공장이라고 정정했다. 그러나 일본과 소련 등을 출처로 하는 보다 신뢰성 높은 자료들과 최서국의 증언에 따르면 평양제조소는 소화기를 제조하지 않았다. 부평의 인천조병창 제1제조소마저도 99식 소총만 제조했지 기관총류는 만들지 못했다.
평양병기제조소
평양병기제조소는 육군병기창 소속의 병기 공장이었다. 포용 탄환, 피구(가죽 도구들 ㅡ 옮긴이), 마제 병기, 항공기탄을 제조했다. 소재지는 평양 중심부에서 가까운 대동강 왼쪽 기슭이었다. 1918년 9월어 도쿄포병공창 소속의 조선병기제조소로 설립되었으나, 이 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종전 당시에는 인천육군조병창에 소속되어 있었다.
1935년 당시 제조소의 부지 면적은 약 20만 평이었다. 근접지에는 제품을 보관하는 육군병기창 평양출장소(1940년 이후는 평양병기보급창)가 있었다. 직공 수는 1923 ~1938년 사이에 약 200명에서 2,000명으로 늘어났다. 전시 중에 육군은 미군의 공격에 대비해 이 제조소를 지하로 이동시킬 계획을 추진했다.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이용해 평양에서 약 10km 떨어진 암산속에 지하 공장을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작업은 종전까지 90% 정도 완성되었다. 평양제조소의 종전 직전 주요 생산 품목은 탄환과 폭탄으로 탄환 제조 능력은 월간 18만 발(연간 200만 발 이상)이었다. 종전 당시에는 6천 명(그중 조선인 5천 명)이 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기무라 미쓰히코, 《전쟁이 만든 나라, 북한의 군사 공업화》 109~1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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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육군의 병기 구매 및 시세이가공 업무 절차(兵器購買並市井加工に関する業務手続)를 시각화한 일본군 내부 문서. 기술 및 검사 부서에서 민간 시세이공장을 통제하고 제조소 측에서 제품을 검사하며, 회계 부서에서 예산을 책정하고 대금을 지불한다. 지도 출처는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청구번호 中央-軍事行政軍需動員-427 |
(평양병기제조소에서는) 조선산 박달나무(檀木)를 일본산 떡갈나무(樫)의 대용으로 치중 차량을 만드는 것 외에 야포탄환의 제작, 전실(填實)[58] 작업을 1937년 개시했지만, 점차 외주가 많아지고 민간공업 배양의 기운이 활발해지자(釀成) 조선의 금속가공공업을 좌지우지하기에 이르렀다. 인천공창 설치 후에는 이에 포함(包轄)되어 더욱 그 기능을 발휘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번역판 《조선군개요사(朝鮮軍概要史)》 제4장 '자원 동원', 141p.
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배성준의 《한국 근대 공업사》에 따르면 인천의 본창이 조선기계제작소 등의 민간 기업들을 관할하였듯이 평양제조소 역시 전시체제 하에서 민간 업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에 따르면 평양제조소는 부산부 철공업자들의 협동조합인 부산기계철공업조합을[59] 하청업체로 두고 포탄 가공을 맡겼다. 조선군개요사에 따르면 이 철공조합들은 "고가지야(小鍛冶屋)[60] 조합"이라 불렸다. 부산 외에도 평양, 경성, 신의주, 목포, 대구 등 여러 지역의 15개~16개에 달하는 철공조합들이 평양제조소, 인천조병창 본창, 진해 해군공작부 등 다양한 일본군 공장들과 계약을 맺고 포탄 절삭가공 하청을 담당했다. 1935년 370기에 지나지 않던 선반 수는 1942년 6,500기로 증가했다.
실제로도 상술한 인천조병창 1945년 작업계획안에 언급되는 포탄 생산 부문에 경성철공, 평양철공, 부산철공 등의 민간 철공조합들이 상당수 언급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서국 역시 대전 말기가 갈수록 통제경제체제가 극대화되며 많은 민간공장들이 사실상 군 직할공장처럼 예속되어 갔다고 회고한다. 그에 따르면 평양제조소에서는 군수할당증명서(軍需割當證明書)를 발급하여 휘하 지정공장과 하청공장들의 생산에 필요한 각종 부품과 자재[61] 거래를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또한 평양제조소는 인천에서 삼식잠항수송정을 건조하던 지정공장인 조선기계제작소에 강재 공급도 담당했다. 조선기계에서는 잠수정 건조에 필요한 주요 강재들을 미쓰비시 겸이포제철소에서 제공받았는데 그 운송을 담당한 게 평양제조소였다고. 그리하여 《조선군개요사》는 아예 평양제조소가 "조선의 금속가공공업을 좌지우지하기에 이르렀다."고 평가한다.
이는 일본 본토에서 먼저 나타났던 현상이다. 가령 일본 육군의 핵심적인 대포 생산공장이자 가장 큰 조병창이었던 오사카 육군조병창의 경우, 이미 20세기 초부터 자체 생산분보다 민간 생산분 군수품의 비중이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마츠시타 타카시(松下隆)의 논문 "오사카 포병공창과 오사카 산업 집적과의 관계성(大阪砲兵工廠と大阪産業集積との関係性)"에 따르면 오사카 공창은 대전말에 근로자 수가 총 6만 명 규모로 늘어나는 등 본창 시설 자체도 확충되었으나 막상 생산량의 70%는 휘하의 584개 민간 하청공장과 지정공장들이 차지했다. 즉 당시 일본군 직할 공창들은 그 자체로 생산공장이라기보다는 이중구조적 경제체제 하에서 민간공업을 이끄는 국가주도의 상위 선행공장으로서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띄게 된다. 인천조병창과 평양제조소 역시 유사했던 것이다. 신주백에 따르면 이를 시세이가공(市井加工)이라 하며, 일본 조병창들의 주된 업무 중 하나였다.
다만 배성준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며 일본 제국 전역이 전시경제로 돌입한 후에도, 일본 본토와 달리 식민지 조선 내에서는 대공장들과 중소공장들이 자본적/기술적으로 연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각 업종의 공장들을 한데 묶어 공업조합으로 재편해 통제하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규모부터 원료 수급과 생산 방식, 금융 방식까지 수많은 차이가 있던 공장들을 하나로 엮어버렸기 때문에 일괄적인 품질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전시상황에서 민간용품 생산이 통제당하는 바람에 도산하는 영세업자들마저 속출했다. 식민지적 이중구조는 여전했다.
일단 1930년대 이래로 북한 지역은 화학공업 플랜트 및 금속 제련소, 발전소 등 절대다수의 중공업 공장들과 기반시설들을 보유했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1940년을 전후로 경인지역의 기계공업이 급격히 성장한 것과 달리, 막상 북한 지역은 평양제조소와 평양항공창, (주)쇼와비행기 평양공장을 제외하고는 발전이 미진했다. 이마저도 달리 말하자면 중간 규모 군수공장과 비행기 정비창, 소규모 비행기 공장이 가장 큰 공장이라 평가받을 정도로 기계공업이 일천했다는 소리다. 실제로 해방 이후 약 15년가량 지난 1959년에도 주소 북한대사 리신팔은 소련 외무성 부상 푸슈킨과의 대담에서 기계공업을 두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낙후한 부문이었다'고 칭했다.
그리고 기계공업이 발전했다는 경성부만 해도,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약 88%의 공장들이 직원 30명 미만의 소공장과 영세소공장들었다. 그나마 기계제조업은 5인 이하보다는 5~30인 규모 사업장 비중이 조금 더 높기는 했다. 소련군정 문서에 따르면 평양부의 상황은 훨씬 열악하여 대부분 3~10명 규모의 소규모 기계정비 및 조립 공장들이 가내수공업 형식으로 운영했다. 이들은 보통선반이나 보통밀링 1~2개 정도만 갖추었기에 포탄 절삭가공 이상의 복잡한 금속가공은 거의 불가능했으며 생산량도 충분하지 않았다. 비교하자면 오사카공창 휘하의 584개 민간공장들이라 함은 적어도 직원 수 100명 이상인 경우가 50%는 넘었으니,[62] 일본과 조선의 차이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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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남북분단이라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평양제조소에서 벌어진 일제의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생존자 증언 채록 등의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다만 적어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부터는 이곳에서도 식민지 조선인들을 동원한 강제노동이 벌어졌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점쳐진다. 당장 부평에 있던 인천육군조병창 본창부터가 노역이 이루어진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부평에서는 이미 1939년 인천공창 건설 때부터 근로보국대라는 명칭으로 지역 주민들이 공장 건설에 동원되었다. 본격적인 징용 시작은 1944년이었는데, 3월부터 학생들이 동원되었고 8월부터는 징용공 투입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숙련되지 못한 이들을 마구잡이로 투입하였기에 인천의 본창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들은 절단 등의 산업재해에 자주 시달렸다. 또한 군속이건 징용공이건 이구동성으로 월급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으며 때때로 주더라도 용돈 수준에 불과했다고 증언한다. 1999년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식민지 및 점령지 주민 징용 정책이 1932년 5월 1일 발효된 ILO 협약 제29호 '강제 또는 의무 노동에 관한 협약'을 위반한 것이며,[63] '강제 노동(forced labor)'에 해당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때문에 그 지창인 평양제조소 역시 부평의 본창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실제로 일본은 상술한 바와 같이 평양제조소의 지하공장 건설에 평양형무소 재소자들을 동원했고, "쇼와20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시 병기생산 상황보고(仁川陸軍造兵廠)"에는 1945년 4월부터 대략 1년간 4분기에 걸쳐 평양제조소에 300명의 학도징용공들을 비롯한 1,750명의 직공들을[64] 추가로 증원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미 1945년 3월부터 일본은 조선인 노무요원 동원이 한계에 이르러 학생 동원이 불가피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또한 1919년생 노동자 양윤석(梁允錫)의 사례는 평양제조소에서의 노동환경 역시 못지않게 가혹하였음을 보여 준다. 1942년 경 평양제조소 근로자로 일하던 양윤석은 일본인 공장 감독관들의 극심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비밀결사인 동문회(同文會)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꾀하다가 1943년 초에 발각,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는 대략 1년 후인 1944년 1월 7일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2015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한편 최서국의 회고에는 국가총동원체제 하에서의 극심한 자원 공출이나 전시경제가 극단화되어 민간경제를 완전히 잠식하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있어도, 제조소 내의 가혹한 근로 환경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딱히 없다. 오히려 그에 따르면 징용이나 징병을 피해 평양제조소의 군속 모집공고에 응하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65] 기술도 배우고 돈도 벌 수 있었기에 제조소 직원이 되는 것을 '출세'로 여기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이 때문에 대전 말까지 제조소 측에서는 인력 보충에 딱히 어려움이 없었다고 전한다.
다만 최서국의 이 증언은 제조소 내에서 비교적 높은 직책이었을 그가 하급 노무자들의 근무환경을 직접 체감하지는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66] 부평 제1제조소 근로자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이쪽도 징병을 피해 군속으로 지원하거나 기술을 배우겠다며 기술자양성소에 등록한 이들이 꽤나 있었지만, 막상 이들 역시 기대한 것과 다른 근무환경과 대전말로 갈수록 가혹해지는 노동강도에 시달려 대부분 조병창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최서국 역시 제조소 내에서 노동조합 결성이 절대 금지되었고 대전 말기로 갈수록 근무시간이 늘어난 데다 추가로 훈련까지 받아야 했으며, 사소한 사건만으로도 헌병대가 직접 출동하였다고 증언했다.[67] 따라서 평양제조소의 실제 근무 환경이 근로자들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았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부평에서는 이미 1939년 인천공창 건설 때부터 근로보국대라는 명칭으로 지역 주민들이 공장 건설에 동원되었다. 본격적인 징용 시작은 1944년이었는데, 3월부터 학생들이 동원되었고 8월부터는 징용공 투입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숙련되지 못한 이들을 마구잡이로 투입하였기에 인천의 본창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들은 절단 등의 산업재해에 자주 시달렸다. 또한 군속이건 징용공이건 이구동성으로 월급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으며 때때로 주더라도 용돈 수준에 불과했다고 증언한다. 1999년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식민지 및 점령지 주민 징용 정책이 1932년 5월 1일 발효된 ILO 협약 제29호 '강제 또는 의무 노동에 관한 협약'을 위반한 것이며,[63] '강제 노동(forced labor)'에 해당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때문에 그 지창인 평양제조소 역시 부평의 본창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실제로 일본은 상술한 바와 같이 평양제조소의 지하공장 건설에 평양형무소 재소자들을 동원했고, "쇼와20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시 병기생산 상황보고(仁川陸軍造兵廠)"에는 1945년 4월부터 대략 1년간 4분기에 걸쳐 평양제조소에 300명의 학도징용공들을 비롯한 1,750명의 직공들을[64] 추가로 증원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미 1945년 3월부터 일본은 조선인 노무요원 동원이 한계에 이르러 학생 동원이 불가피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또한 1919년생 노동자 양윤석(梁允錫)의 사례는 평양제조소에서의 노동환경 역시 못지않게 가혹하였음을 보여 준다. 1942년 경 평양제조소 근로자로 일하던 양윤석은 일본인 공장 감독관들의 극심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비밀결사인 동문회(同文會)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꾀하다가 1943년 초에 발각,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는 대략 1년 후인 1944년 1월 7일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2015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한편 최서국의 회고에는 국가총동원체제 하에서의 극심한 자원 공출이나 전시경제가 극단화되어 민간경제를 완전히 잠식하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있어도, 제조소 내의 가혹한 근로 환경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딱히 없다. 오히려 그에 따르면 징용이나 징병을 피해 평양제조소의 군속 모집공고에 응하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65] 기술도 배우고 돈도 벌 수 있었기에 제조소 직원이 되는 것을 '출세'로 여기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이 때문에 대전 말까지 제조소 측에서는 인력 보충에 딱히 어려움이 없었다고 전한다.
다만 최서국의 이 증언은 제조소 내에서 비교적 높은 직책이었을 그가 하급 노무자들의 근무환경을 직접 체감하지는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66] 부평 제1제조소 근로자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이쪽도 징병을 피해 군속으로 지원하거나 기술을 배우겠다며 기술자양성소에 등록한 이들이 꽤나 있었지만, 막상 이들 역시 기대한 것과 다른 근무환경과 대전말로 갈수록 가혹해지는 노동강도에 시달려 대부분 조병창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최서국 역시 제조소 내에서 노동조합 결성이 절대 금지되었고 대전 말기로 갈수록 근무시간이 늘어난 데다 추가로 훈련까지 받아야 했으며, 사소한 사건만으로도 헌병대가 직접 출동하였다고 증언했다.[67] 따라서 평양제조소의 실제 근무 환경이 근로자들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았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65호 공장 Factory No.6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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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기관 | 산업성(1948 ~ 1952) 중공업성(1952 ~ ?) 제2기계공업성(? ~ ?) 제2경제위원회 제1총국(1972? ~ ) |
위치 | |
...위의 표에서 언급한 쩨흐 이외에도, 무기 공장에는 [판독불가] 생산 쩨흐 2개, 목공 및 목재공급 쩨흐 2개 및 증기 건조기, 배선 작업장, 가죽깔창과 가죽재단 쩨흐가 배치되었다. 현대적 설비를 잘 갖춘 기계 실험동과 화학 실험동도 있었다. 이러한 모든 쩨흐와 실험동은 일본인들이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 전야에 벌인 사보타주 폭파 행위로 파괴되었다.
이 사보타주 폭파 행위는 13개의 다른 생산 쩨흐에도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일본이 항복하게 되자 항공기 제작공장과 무기공장 ‘조병창’에 비치된 기술장비들은 해체되고 도난되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들 공장에 보존된 쩨흐와 남은 설비는 나중에 새로이 자동차 수리 공장 및 공작기계 기구 공장 건설의 기반이 되었다.— 한국사 총설 DB 해외사료총서, "한반도 북부 공업 상황에 대한 소련 민정청의 조사 보고", Д. 43 - Ⅸ. 기계제작공업
평양제조소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즈음 모종의 이유로 파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일단 소련군정의 북한 지역 공업 상황 전수조사 보고서에서는 항복 문서 조인 직전에 일본인들이 평양제조소의 시설을 폭탄으로 사보타주했다고 설명한다. 이때 전체 20개의 작업장 중 절반 이상인 13개동, 그리고 실험동이 파괴되었다. 이후로도 행정공백에 따른 대규모 혼란이 이어지면서 많은 설비들이 도난당했다.
그러나 막상 광복부터 소련군 진주 전까지 임시 운영위원장을 맡아 평양제조소를 관리했던 최서국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항복 일주일 후에 딱히 시설을 부수지 않고 조용히 떠났다고 한다.[68] 그의 표현을 직접 빌리자면 공장은 "스위치만 넣으면 곧 가동할 수 있는" 상태였다. 또한 잔류 직원들은 일본군이 떠난 후 자체적으로 경비대를 조직하여 소련군에 의해 쫒겨나기 전까지 약탈을 막았다. 점령 초의 소련군정이 한반도 북부 내의 일본 군수공업 및 중공업 시설을 정당한 전리품으로 간주하여 상당수의 설비를 반출해갔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파괴 주체가 소련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또는 대전 말기에 평양제조소가 관동군으로 소속이 변경되고 생산설비를 인근 바위산에 판 지하갱도로 이전하려던 계획이 한창 추진 중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공장 분위기가 상당히 어수선했으리라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전후에 들어온 소련인들이 이 광경을 보고 '사보타주 당했다'고 오해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한편 《조선군개요사》에 따르면 군의 남은 채권채무를 처리하던 조선군관구사령부에서 소련군이 평양에 들어오기 전에 사람을 보내 병기제조소와 보급창의 채무도 청산하고 돌아갔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최서국의 회고서에도 교차 검증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군사령부를 찾아 직원들의 퇴직금을 받아다 돌아온 장본인이 바로 그 자신이었다.
어쨌건 이렇게 적산(敵産)으로 분류된 평양제조소는 소련군에게 압류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무분별한 압류정책은 북한 지식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데다 해방자라는 소련군의 명분에 손상을 입히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1946년 7월 27일 소련은 구 일제의 시설을 북한 인민들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평양병기제조소 역시 이 즈음 북한의 전신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로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본 아시아경제연구소 지역연구센터의 상근 촉탁 나카가와 마사히코(中川雅彦)의 2024년의 논문에 따르면, 평양제조소는 1945년 10월 2일부터 김일성의 명령으로 재건되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그는 1950년 판 《조선중앙년감》과[69] 평양향토사편집위원회의 1957년 판 《평양지》를 인용했다.[70]
우리는 65호공장을 기초로 하여 우리 나라의 군수산업을 발전시키려고 합니다. 앞으로 65호공장은 우리 나라 군수산업의 모체공장으로, 간부공장으로 되어야 합니다. 지금 개별적인 부속품을 만드는 직장들을 앞으로는 독립적인 하나의 공장으로 발전시켜야 하며 그에 기초하여 더 많은 공장들을 내오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65호공장에서는 무기를 많이 생산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확대발전될 우리 나라 군수산업을 조직지도할수 있는 기술간부들과 숙련공들을 많이 키워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65호공장에서는 지금부터 좋은 로동자들을 많이 받아 그들을 모두다 훌륭한 숙련공으로 키워야 하며 더 많은 기술자들과 관리간부들을 키워내야 하겠습니다.— 김일성, "우리는 자체의 힘으로 무기를 만들어 무장하여야 한다(1949.10.31)," 김일성저작집 5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p. 299.
(검열됨비고: 1945년 3월 생산된 JANIS 75번 문서의 IX-95(D)장에 따르면, 평양(125-44, 39-01)의 조병창은 한국 내의 가장 중요한 군수공장으로 소화기 및 탄약을 생산하는 곳일 가능성이 있었다.)
북한인들은 현재 평양 사동구역(?)의 구 일본군 병기창 #1이던 군수공장을 가동중이다.[71]
(검열됨비고: 평양으로부터 대략 3마일 동쪽에 사동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마을이 있다.)
이곳에서는 수류탄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탄약들을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권총을 생산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은 그닥 성공적이지 않은데, (평양 내의?) 원료와 기술자들의 부족 때문이다. 공장에는검열됨일곱 명의 기술자들이 (감독관으로?) 고용되어 있다.
북한인들은 평양의 구 일본군 병기창 #2에서도 무기를 생산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공장은 아직 가동되지 않았다.[ 영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 ] Note: According to Janis 75, Chapter IX-95 (D), in March 1945 the arsenal at Pyongyang (Heijo) (125-44, 39-01) was probably the most important ordnance plant in Korea, producing small arms and ammunition.)
The North Koreans are now operating an ordnance plant in what was formerly the Japanese Ordnance Depot #1 in the Sadong (Jido) District (?) of Pyongyang.
[ ] Note: There is a village known as Sadong (Jido) approximately three miles east of Pyongyang.)
Grenades and various kinds of ammnition are now being produced in this factory but all attempts to manufacture pistols have been unsuccessfuI because of the shortage of materials and technicians (? in the Pyongyang area?). There are [ ] seven Korean technicians employed (? as supervisors?) at this factory.
The North Koreans are also making preparations to produce weapons in a factory which was formerly the Japanese Ordnance Depot #2 in Pyongyang. However, this factory is not yet in operation.
평양제조소는 25호 공장이라는 이름을 새로이 부여받았고, 1947년부터는 김책이 주도하여 이곳에서 PPSh-41의 라이센스 생산을 시도하였으며 이듬해 연말에 성공한다. 북한은 복제한 PPSh-41에 49식 기관단총이라는 제식명을 부여한다. 나카가와에 따르면 1946년부터는 군복 생산라인이 옛 평양제조소 창고에 설치되었고 1947년 6월 22일에는 김일성이 25호 공장에 공구들을 공급할 평양기계제작소[72] 건설을 명령한다.
소련군정 문서에 따르면 이때 인근의 민간 기계공장들과 평양육군항공지창에서 상태가 괜찮은 공작기계들을 가져오고 소련으로 추정되는 해외국가에서 금속가공기계들을 수입하여 옛 평양제조소의 설비를 재건했다고 한다. 1948년 새해 첫날에 1단계 공사를 마무리짓고 공구 제작, 기계제작, 단조, 성형 및 주철 주조 라인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평양기계제작소는 1948년 7월 5일부터 본격적으로 업무를 개시했으며 곧 25호 공장과 합병되어 65호 공장이 되었다.
6.25 전쟁 도중 미군이 북한군 포로들을 심문한 기록 중 조성천의 증언에 따르면 이곳에서 모신나강 M1891/30용 소총탄도 생산했다고 한다. 한편 리성국과 김종낙은 전쟁 발발 직전 공장 경비는 제571경비연대가 맡았다고 증언했다. 리성국에 따르면 연대장은 리동호 대좌였고 규모는 1500명 정도로 휘하에 3개 대대가 있었다. 사실 65호 공장만 경비한 것은 아니었고 보위성과 최용건도 지키던 부대였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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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역 내의 18개 주요 목표물에 대한 공격은 폭격사령부의 B-29 중폭격기들이 주로 동원되었으며, 제5공군은 이를 지원하는 형태를 띠었다. 이 때 북한의 핵심 시설인 평양의 병기창과 조차장, 해주의 군수품 저장지역, 원산의 조선정유소 등이 집중적으로 폭격을 받았다.— 해외사료총서, 《미국소재 한국사 자료 조사보고 Ⅳ권》에서 발췌.[74]
이처럼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65호 공장은 북한의 핵심적인 군수공장으로 기능했다. 그랬기에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극동공군의 목표물로 지정되어 무자비한 폭격을 얻어맞게 되었다. 공장에 대한 폭격은 개전 2주차인 7월 4일부터 시작되었으며 가장 집중적인 폭격이 벌어진 것은 8월 7일이었다. 30대의 B-29가 65호 공장과 평양역 및 철도공장을 노리고 평천리 일대에 460톤의 폭탄을 쏟아부었다. 따라서 북한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65호 공장의 생산시설들을 곳곳에 분산하고 지하화하였다. 이들은 오늘날 북한 군수공장들의 모태가 되었다.
65호 공창의 본창은 1950년 7월 평양으로부터 약 80km 떨어진 평안남도 성천군 통선면 군자리 일대의 일제시대 갱도로 이동했다. 소련군정의 보고서 "해방 직후 한반도 북부 공업 상황에 대한 소련 민정청의 조사 보고, Д. 43 - Ⅸ. 기계제작공업"을 통해 미루어 보자면 이곳은 본래 주석 광산이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은 해당 광산에 평양육군항공지창의 시설들을 1946년까지 옮겨 설치하려 했고, 이를 한창 준비하던 도중 패전을 맞았다. 즉 군자리 광산은 지하공장으로의 전환이 어느 정도 완료된 곳이었기에 북한이 65호 공장의 시설을 손쉽게 옮겨올 수 있었을 것이다.
기무라 교수의 《북한의 군사 공업화》 부록에 첨부된, 주북한 소련 대사관의 고문단이 1950년 9월 17일부터 19일 사이에 공장을 둘러보고 남긴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65호 공장은 북한의 유일한 대규모 종합공장으로 탄약통과 대전차 수류탄, 슈파긴 기관단총(49식 기관단총) 및 82mm 박격포를 생산했다. 생산량은 전쟁 발발 이전에 비해 180%가량 증대되었으나 그럼에도 전선의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일본제와 소련제 장비들을 갖추고 있었으나 수리요원과 부품 부족으로 일부 장비들은 기능을 정지했다. 총 직원 수는 3,600명가량이나 그 중 숙련 기능공은 거의 없었다. 원료와 완성품을 옮길 운송수단의 부족도 문제였고 식사와 직원들의 거주 환경은 열악했으나 전반적으로 직원들은 열정적으로 일한다고 평가받았다.
조수룡에 따르면 65호 공장은 1950년 10월 18일 새벽 3시까지 성천군에서 생산을 계속하다가 임시수도 강계시와 인접한 자강도 장강군으로 철수한다. 시간이 상당히 촉박했는데, 당장 바로 다음 날인 10월 19일에 김종오 준장이 이끄는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이 성천군을 점령했기 때문이다.[75] 한편 나카가와 마사히코에 따르면 기계제작소는 1951년 10월부로 자강도 희천시로 이동했고, 포탄 제조라인은 자강도 장강군 문암리로 이전했다.
65호 공장의 소개과정은 매우 성공적인 편이었기에 오늘날까지 북한에서 '영웅적인 투쟁'으로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부 예외를 제외한 다른 대부분의 공장들은 제대로 철수하지 못하고 유기되거나 유엔군 손에 파괴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38선 이남으로 밀려나 북한이 개전 전의 영토를 대부분 수복한 이후에도 북한의 산업 생산능력은 전쟁 전에 비해 10%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 상황은 전쟁 내내 지속되어 북한은 대부분의 장비를 소련과 중국의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전쟁이 북한에게 일제의 유산을 무로 돌린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은 노인, 부인, 어린이를 포함한 노동력을 동원해서 공장을 소개시켰다. 기계 설비를 산 속에 숨긴다든지, 중국령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피난할 때에는 설계도를 가지고 가도록 했다. 일찍이 일본의 기업과 육군이 지하에 구축했던 갱도와 시설은 김일성에게 이용 가치가 높았다. 예를 들면, 65공장(구 평양병기제조소)은 평안남도 성천군의 광산 속으로 이전되어 중요한 병기 공장으로 기능했다(자료 5). 통상적으로 김일성이 1960년대에 "전국토의 요새화" 노선을 제출하고 지하 시설의 건설을 추진했다고 얘기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 전쟁 중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애초에 일본제국이 수행한 조선 정책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기무라 미츠히코 외 1인, 《북한의 군사 공업화》 310p
소련이 제공한 군사차관의 규모를 통해 65호공장의 생산이 북한의 전쟁준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소련은 북한에 대해 1949년 6월부터 1952년 6월까지 3년간 총 2억 1,200만 루블, 매년 약 7,070만 루블의 군사차관을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1950년 2월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1951년도에 제공받기로 한 7,070만 루블의 차관을 1950년에 앞당겨 제공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개전에 관한 스탈린과 김일성의 교감이 사실상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소련은 1950년 6월 이전까지 약 1억 4,000만 루블 이상의 금액에 상당하는 군수품을 북한에 제공하였다. 한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65호공장의 생산이 그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가정할 때, 북한에서의 무기 및 탄약 생산은 약 100만 루블을 약간 상회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소련이 제공한 군사차관과 65호공장의 생산액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65호공장이 고가의 장비와 중화기를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금액으로 단순 평가한다면 65호공장의 생산은 전쟁준비에 거의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조수룡, <한국전쟁 시기 북한의 전시생산과 중·소의 지원> 67~68p
일단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북한 경제사 연구에 관하여 상당한 권위자로 평가받던 기무라 미츠히코 교수는 저서 《북한의 군사 공업화》에서 김일성이 옛 일제가 남긴 중공업 시설들을 이용해 6.25 전쟁을 준비했고, 휴전 후에도 이를 기반으로 중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65호 공장을 꼽는다. 한편으로는 그 외에도 억류된 일본인 기술자들을 통해[76] 북한 곳곳의 적산 공장들이 속속 복구되면서 무기생산을 위한 원료 수급도 원활해졌다고 설명한다. 대표적으로 함흥의 옛 노구치 조선질소 흥남공장 및 본궁공장, 그리고 해주의 옛 조선화약 공장에서는 피크르산과 TNT를 생산해냈다.[77] 그의 이러한 주장은 2000년대 초반 한국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다만 경희대학교의 조수룡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학술지인 "군사" 제88호에 게재한 논문에서 기무라 교수의 주장은 심증에 기반한 가설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65호 공장을 비롯한 적산기업들의 생산력과 북한의 기술력은 남침을 준비하던 북한군을 무장시키기에 충분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의 남침 준비에 실질적으로 주된 역할을 한 것은 일제의 산업유산이 아니라 김일성이 직접 스탈린에게 읍소하여 지원받은 T-34 전차 등의 소련제 무기들이었다고 지적한다. 소련이 제공한 군수품이 전쟁 발발 직전까지 도합 약 1억 4,000만 루블에 달한 반면, 같은 시기 북한이 자체적으로 생산한 양은 그것의 140분의 1 수준인 고작 100만 루블 어치에 불과했다.
게다가 김일성은 원래 50일 단기전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총력전 대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북한의 경제와 산업이 전시체제로 전환한 것은 전쟁 전이 아니라 유엔군이 참전을 결정하며 장기전이 가시화되고 나서야 급하게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 미군이 북한 지역의 주요 인프라를 노리고 집중적인 폭격을 가하는 바람에 북한은 대부분의 산업설비를 전쟁 초기에 망실하고 만다. 그리하여 북한은 전쟁 내내 소련과 중국의 무기 및 경제 원조, 심지어는 중국인민지원군으로 대표되는 직접적인 군사력 지원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 실제로 전쟁 내내 유엔군의 숫적 주력을 맡았던 대한민국 국군과 달리, 조선인민군은 1951년부터 사실상 공산군의 보조 전력으로 전락한다.
또한 65호 공장의 운영에는 일본인 기술자들보다 소련의 영향이 더 컸다. 기무라 교수마저도 소련 고문단이 65호 공장 가동을 지원했음을 긍정했을 정도다. 그는 저서에서 미군 문서를 인용해 1948년 11월 당시 65호 공장에서 소련 고문관 3명과 북한군 군관 1명의 지도 하에 1,500명의 기술자들이 일했다고 설명했다. 공장에서는 노동자들 중 일부를 1950년 6월까지 소련에 유학보내어 탄약 생산을 실습하고 돌아오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영은 녹록치 않았다. 조수룡에 따르면, 1949년 6월 당시 주북소련대사였던 테렌티 시티코프(Тере́нтий Фоми́ч Шты́ков) 상장은 소련인 기술자의 파견이 늦어지는 바람에 그때까지도 65호 공장이 실질적으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 이후에도 65호 공장은 일부 박격포를 제외한 중화기는 아예 생산하지 못했다.
나카가와 마사히코 역시 2024년의 논문에서 기무라 교수의 주장을 일축한다. 해방 후 북한이 평양제조소를 비롯한 일제 군수공장의 재건에 나선 것은 맞으나, 건물 및 작업장 건설과 각종 공작기계의 설치 등을 완전히 새로 해야 했다. 따라서 흥남비료공장 등과 달리[78] 북한의 군수공장들과 옛 일제의 군수공장 간의 연속성은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예대열 역시 지난 2015년에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를 통해 발표한 논문 "해방이후(1945~1950) 북한 경제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에서 광복 이후 북한의 공업은 그 이전 일제강점기와는 연속성보다 단절성이 더 크다며, 기무라 교수와 그의 주장을 그대로 이어받은 일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을 지적했다.[79][80]
종합하자면 해방정국에 북한이 옛 일본군의 평양병기제조소를 65호 공장으로 재편하여 자국 군수공업의 기틀을 마련한 것 자체는 명백한 사실이다. 65호 공장은 해방 직후 북한 기계공업 생산액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6.25 전쟁 당시에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피난하며 북한군을 위한 군수물자를 생산해냈고 그 계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김일성의 전쟁 준비에 있어 본 공장이 실질적으로 기여한 바는 미미했다. 북한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 대부분은 소련과 중국의 직접적인 지원에서 나왔다. 특히 소련의 군수물자 지원은 북한이 65호 공장을 통해 자체적으로 생산한 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절대적인 격차가 있었다.
일본이 남긴 인프라 자체가 온전히 계승되었는지도 불확실하다. 전신인 평양병기제조소의 일본제 설비는 기술적으로 낙후되었던 데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노후화가 심각했다. 이마저도 해방 직후에는 아예 사보타주라는 표현이 언급되거나 재편이 필요했을 정도로 시설 상태가 엉망이었다. 일제강점기 민족 차별의 여파로 인해 기술인력 역시 부족하여 65호 공장은 소련 고문단의 기술지도를 받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6.25 전쟁 당시 65호 공장이 성공적으로 피난하여 생산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외적인 사례다. 총력전 체제로의 전환이 늦었던 북한은 65호 공장을 비롯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생산설비들을 전쟁 초기에 망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65호 공장의 사례를 북한 지역 적산공장 전체에 적용하여 일제의 유산을 재평가하려는 것은 비약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김일성의 전쟁 준비에 있어 본 공장이 실질적으로 기여한 바는 미미했다. 북한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 대부분은 소련과 중국의 직접적인 지원에서 나왔다. 특히 소련의 군수물자 지원은 북한이 65호 공장을 통해 자체적으로 생산한 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절대적인 격차가 있었다.
일본이 남긴 인프라 자체가 온전히 계승되었는지도 불확실하다. 전신인 평양병기제조소의 일본제 설비는 기술적으로 낙후되었던 데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노후화가 심각했다. 이마저도 해방 직후에는 아예 사보타주라는 표현이 언급되거나 재편이 필요했을 정도로 시설 상태가 엉망이었다. 일제강점기 민족 차별의 여파로 인해 기술인력 역시 부족하여 65호 공장은 소련 고문단의 기술지도를 받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6.25 전쟁 당시 65호 공장이 성공적으로 피난하여 생산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외적인 사례다. 총력전 체제로의 전환이 늦었던 북한은 65호 공장을 비롯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생산설비들을 전쟁 초기에 망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65호 공장의 사례를 북한 지역 적산공장 전체에 적용하여 일제의 유산을 재평가하려는 것은 비약에 가깝다.
수령님(김일성)의 불면불휴의 노고 속에서 만들어진 한 자루 한 자루의 총이 오늘은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을 수호하는 총대숲으로 무성해졌으며 우리 수령님께서 이곳에서 울리신 역사의 총성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 조국은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을 굳건히 지킬 자위의 핵탄, 수소탄의 거대한 폭음을 울릴 수 있는 강대한 핵보유국으로 될 수 있었다.— 김정은, 2015년 12월 9일 평천혁명사적지를 현지지도하며. 2016년 1월 12일자 통일뉴스 기사 "조선신보, 김정은이 수소탄 시험 암시한 평천혁명사적지 소개"에서 재인용
65호 공장이 자강도로 옮겨간 후 비어버린 평천구역의 공장 유구에는 현재 평천혁명사적지라는 이름의 군사 박물관이 들어서서 관련 유물들과 기록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65호 공장은 '주체적'인 북한 군수공업의 시작점이므로, 선군정치를 표방하는 조선노동당과 북한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성역화하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65호 공장을 "선군총대의 고향"이라는 선동적인 표현으로 수식한다.
2015년에는 김정은이 직접 찾아 현지지도를 하였으며, 2023년에는 군수공업사를 조망한 조선중앙통신의 특집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방송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본 박물관의 초점은 김일성의 '선견지명'을 우상화하는 데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65호 공장이 원래 일본군의 시설이었던 것을 인수하여 개편한 것이라는 사실 및 운영에 소련의 지원을 크게 받았다는 것은 전시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대신 김일성이 1930년대부터 공장 건설을 구상했으며 1945년 말에 평천리에 직접 터를 잡고 건설을 지시했다는 식의 왜곡된 프로파간다성 정보가 소개되고 있다.
한편 자유아시아방송의 2017년 보도에 따르면 전쟁 당시 65호 공장이 폭격을 피해 옮겨갔던 성천군 군자리에도 또 다른 혁명사적지가 있다. 김정은은 전쟁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곳에서 무기를 생산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군자리 정신'을 주민들에게 강조했다. 군자혁명사적지로 불리는 이 시설의 남쪽 구역은 2015년까지만 해도 그저 논밭이었으나 1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2015년에는 김정은이 직접 찾아 현지지도를 하였으며, 2023년에는 군수공업사를 조망한 조선중앙통신의 특집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방송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본 박물관의 초점은 김일성의 '선견지명'을 우상화하는 데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65호 공장이 원래 일본군의 시설이었던 것을 인수하여 개편한 것이라는 사실 및 운영에 소련의 지원을 크게 받았다는 것은 전시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대신 김일성이 1930년대부터 공장 건설을 구상했으며 1945년 말에 평천리에 직접 터를 잡고 건설을 지시했다는 식의 왜곡된 프로파간다성 정보가 소개되고 있다.
한편 자유아시아방송의 2017년 보도에 따르면 전쟁 당시 65호 공장이 폭격을 피해 옮겨갔던 성천군 군자리에도 또 다른 혁명사적지가 있다. 김정은은 전쟁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곳에서 무기를 생산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군자리 정신'을 주민들에게 강조했다. 군자혁명사적지로 불리는 이 시설의 남쪽 구역은 2015년까지만 해도 그저 논밭이었으나 1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평양병기제조소에서 갈라져 나온 후신 공장들은 6.25 전쟁 도중 피난한 이래 강계시를 중심으로 자강도에 밀집하게 되었다. 이들은 북한 유수의 군수공업지대인 강계공업지구를 이루고 있다. 통일연구원의 <북한 군사경제 비대화의 원인과 실태>에 따르면 자강도 지역은 오늘날까지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와 함께 군수공업이 밀집해 있으며, 집중도로 따지면 북한 최고이다.
3월 19일.
아침에 공장관리부에서 65호 공장지배인, 공장당위원회 위원장, 군인민위원회 위원장, 군당위원회 위원장들과 대담을 하였다. 대담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소련 전문가들이 참석하였다.
공장에서는 3,000명이 일하고 있는데, 기사는 27명, 기수는 51명이다. 노동자들의 평균연령은 27살이고, 기술자들은 평균 32살이다. 공장에서는 AK 자동보총의 생산을 익히고 있다. 공장에서 생산한 부품으로 800정의 자동보총을 조립하였다. 공장의 모든 설비와 생산기술은 소련에서 제공받았다.(후략)— 알렉산드르 푸자노프의 1958년 4월 2일자 일지. 출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현대사료 DB 북한관계사료집.
- 전천 2.8 기계공장(65호 공장)
65호 공장의 본부 및 총기 생산 라인은 1958년 경 자강도 전천군에 판 지하 땅굴로 옮겨 들어간 후 공산권의 지원을 받아 생산설비를 복구했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 북한의 가장 핵심적인 소화기 생산 공장인 전천 2.8 기계공장이다. 2.8이라는 숫자는 북한 정부의 전신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된 1946년 2월 8일과 북한군이 창설된 1948년 2월 8일에서 따왔다.[81] 전천착암기공장이라고도 부른다.
주북한 소련 대사 알렉산드르 푸자노프(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Пузанов)가 공장을 둘러보고 남긴 1958년 4월 2일자 일지에 따르면 당시 65호 공장에는 대략 3천 명의 직원들이[82] 소련 이젭스크에 위치한 이즈마쉬 조병창에서 1년간 실습하고 돌아온 70명의 기술자들의 지도 하에 AK-47을 라이센스한 58식 보총을 생산하고 있었다. 푸자노프 대사는 공장의 전반적인 인상을 좋게 평가하였으나 지하화되어 여름이면 누수가 종종 발생하였고 많은 노동자들이 숙련되지 못하였으며,[83] 소련에서 들여온 기계들은 도입한 지 3~4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10~15년은 족히 사용한 것 같다면서 전반적인 관리 부실을 김일성에게 지적하였다.
현재도 2.8 기계공장은 전천군의 지하갱도에서 운영 중이다. 북한의 핵심적인 소화기 생산 공장으로 88식 보총과 73식 대대기관총, 백두산 권총 등의 보병화기를 제조한다. 북한의 군수공업을 총괄하는 제2경제위원회의 소화기 및 탄약 생산과 군사시설 운용 담당 부서인 제1총국 예하에 있다.
26호 공장을 방문하여 공장지배인 김상철(Ким Сан Чер), 공장당위원회 위원장 윤홍순(Юн Хон Сун), 부기사장 하성영(Ха Сон Ун)과 대담하였다.
공장은 1953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공장의 건설과 설비는 수개의 단계로 진행되었다. 현재 42호 공장의[84] 새로운 생산건물들로 이전하기 위한 건설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26호 공장은 120㎜와 72㎜ 파편지뢰와 직접작용지뢰,[85] 그리고 120㎜ 포탄을 생산하고 있다.
현재 공장 가동역량의 30%는 민수품을 생산하고 있다. 공장에서는 방직기, 난방용 방열기, 증기보일러 등을 생산하고 있다.
공장지배인은 노동자들의 기술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소련 전문가들이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소련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상 최초로 지하 주물직장이 만들어졌다.(후략)— 알렉산드르 푸자노프의 1958년 4월 2일자 일지. 출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현대사료 DB 북한관계사료집.
- 강계뜨락또르종합공장(26호 공장)
나카가와 마사히코에 따르면 65호 공장의 포탄 생산 공정은 26호 공장이라는 이름으로 갈라져나와 휴전 후 자강도 장강군에서 다시 강계시로 이전했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강계뜨락또르종합공장이다. 대외적으로는 트랙터 제조사라 표방하지만 이는 위장용 명칭이다. 실제로는 북한군의 핵심적인 곡사포탄 및 방사포탄 생산공장이며 로동 미사일과 화성 미사일도 생산한다. 푸자노프 소련 대사의 일지에 따르면 이미 1958년 당시부터 소련 기술진의 도움을 받아 120mm 포탄을 포함한 각종 탄약류를 생산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연구원 오경석에 따르면 강계트랙터공장은 포 생산을 감독하는 제2경제위원회 제3총국과 미사일 생산을 감독하는 제4총국에 동시에 속한다. 북한 무력의 45%가량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불릴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한편 북한이탈주민 고청송은[86] 저서 "김정일의 비밀살상무기공장"을 통해 공장의 구조도와 생산 체계를 알린 바 있다. 지하화된 5개 분공장 예하 80개 작업장에서 탄약류를 만들며, 남는 재료로는 다리미와 도시락 등 민간용 일용품들을 만들기도 한다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상술한 2.8 기계공장과 함께 러우전쟁에 참전한 북한군과 러시아군에 제공할 무기를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1월 2일
외교단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의 원조 하에 공작기계공장이 완공된 것을 축하하는 경축집회가 개최되는 희천에 갔다. 집회에는 김일성, 정일룡, 기계제작공업상 최재우와 중국 대사를 제외한 대사들 모두가 참가하였다.
공장은 1951년에 착공되었고, 지하에 건설되었다. 공장부지는 약 3만 2,000㎡인데, 그중에서 2만 ㎡는 지하에 있다. 설비는 대부분이 체코슬로바키아제이다. 일부 공작기계는 소련, 독일[87] 및 다른 나라에서 제작한 것이다. 공장은 2교대 작업 하에 연 1,000대의 중형공작기계를 제작한다. 금년에 700~750대의 공작기계를 제작할 것이다. 내년에는 대부분이 소형인 공작기계 2,700~3,000대를 제작할 예정이다.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공작기계들은 수리를 필요로 하는 각 도의 절실한 수요를 신속하게 충족시키는 데 필요하다. 공장에서 약 2,000명이 일하는 데, 주로 청년들이다. 노동자들의 평균연령은 23살이고, 선반작업자들 중 상당수가 여성이다. 공장은 좋은 인상을 불러일으켰다.(후략)— 알렉산드르 푸자노프의 1958년 11월 4일자 일지. 출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현대사료 DB 북한관계사료집.
-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
나카가와 마사히코에 따르면 25호 공장과 함께 65호 공장을 구성했던 평양기계제작소는 1951년에 따로 떨어져 자강도 희천시로 이동하였다. 휴전 후에는 소련 외에도 특히 공산 체코슬로바키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88]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이 되었다. 이곳은 북한 기계공업의 모태 공장으로 평가받는다. 푸자노프 대사의 1958년 당시 일지에 따르면 이곳 역시 마찬가지로 지하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희천기계공장은 북한의 최대이자 핵심적인 공작기계 제조시설로 남아 있으며 특급기업소로 분류된다. 통일부 북한정보포털에 따르면 직원 수는 7천 명이며 생산설비 2,238대를 포함한 약 4,500대의 기계를 두고 연 1만 대의 범용선반, 수직선반, 연삭기 등의 다양한 공작기계를 생산한다. 특히 이곳은 김정일 시대 말기에 북한 최초의 국산 CNC를 개발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제2경제위원회 소속은 아니지만 여타 군수공장들에서 미사일과 포탄을 가공할 때 쓸 정밀기계들을 만들고 있으므로 군사적 중요도는 절대 낮지 않다.
3월 20일
93호 공장을 방문하여 지배인 리유영(Ли Ю Ен), 기사장 윤진화(Юн Дин Хва), 공장당위원회 위원장 김광순(Ким Кван Сун)과 대담하였다. 대담에는 도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도당위원회 부위원장도 참석하였다.
대담 과정에서 공장 기사장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93호 공장은 1954년 7월 2일에 가동을 시작하였다. 애초에 공장에서는 보총탄알과 TT(권총)탄알을 생산하였다. 1955년에는 1943년식 중간탄알을 생산하기 위해 공장을 재설비하기 시작하였다. 재설비 과정에 소련으로부터 장비들이 보충적으로 공급되었다. 1/4분기 계획은 탄알 900만 발을 생산하는 것이다. 1958년 1월에 공장은 계획을 116%, 2월에는 109% 달성했으며, 1958년 3월에는 계획을 115% 달성할 예정이다. 근간에 공장에서는 신제품인 예광탄을 생산할 것이다. 현재 이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 중이다.
1958년도에 공장의 탄알 생산계획은 5,600만 발이다. 계획의 초과달성이 예상되며, 공장은 6,000만 발의 탄알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공장이 완전가동, 즉 3교대 작업이 이루어질 경우 (현재는 2교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매년 탄알을 1억~1억 2,000만 발 생산하게 될 것이다.(후략)— 알렉산드르 푸자노프의 1958년 4월 2일자 일지. 출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현대사료 DB 북한관계사료집.
- 기타 공장들
그 외에도 많은 공장들이 65호 공장과 그 분공장들에서 갈라져나왔다. 가령 나카가와 마사히코에 따르면 북한의 대부분의 소화기 및 대포 탄약을 만드는 93호 공장, 일명 강계정밀기계련합기업소가 26호 공장에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한다. 강계시 석조동에 있으며 제2경제위 제1총국 소속이다. 또한 소화기 탄약을 만드는 42호 공장과 군복을 만드는 145호 공장 역시 65호 공장의 생산라인이었다가 독립해 나왔다.
- 평양병기제조소는 일제가 한반도에 세운 최초의 근대적 군수공장이지만, 한국사 최초는 아니다. 이미 일찍이 1887년에 조선 정부가 기기창(機器廠)을 설치한 바 있다. 기기창에서는 양무운동 중이던 청나라에서 근대 기술을 배워온 송경화 등의 기술자들을 통해 탄약을 생산했다. 16년 후인 1903년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사업을 더욱 확대해 30년식 소총을 라이센스 생산할 총기공장인 군기창(軍器廠)을 건설했다. 다만 두 시설은 1907년의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일제에 의해 조병창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각각 세균연구소와 탄약고로 전환되었다.
- 광복 후 평양제조소의 설비를 그대로 인수해 자신들의 군수공업을 탄생시킨 북한과 달리, 대한민국은 인천육군조병창의 부평 제1제조소를 사용하지 못했다. 일단 일제 패망 직전에 제1제조소 예하 제3공장장이었던 채병덕 소좌는 해방 이후에도 인천공창을 쓸 수 있도록 설비를 나름 신경써서 보존하였다. 그러나 막상 1945년 9월 인천에 상륙한 미국 제24군단 산하 제24군수지원사령부가 인천공창의 병기제조 설비를 완전히 철거해버리곤[89] 눌러앉아 ASCOM 시티라는 이름의[90] 보급기지로 사용했다.
때문에 1948년 창군 당시 국군 조병시설의 창설을 담당했던 김창규 중장은 영등포와 용산 및 인천 일대의 민간 적산 기업 공장 3곳을 인수하고 직접 인재들을 긁어모으고 나서야 간신히 육군병기공창들을 설립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방위산업은 그로부터 약 25년 후 제3공화국 시기인 197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국방부 조병창이 부산에 건설되고 창원국가산업단지가 세워지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다.
- 평양제조소 생산분 95식 하사관도들은 1945년 4월부터 제작이 시작되었기에 양이 매우 적다. 하지만 오히려 그 희소함 때문에 다른 공장 생산분 95식에 비해 비교적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다만 기본적으로 95식 하사관도 자체가 예술적 가치는 거의 전무한 양산형이기에 딱히 값어치를 인정받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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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제조소가 위치한 평천구역은 약 2천 년 전에는 한사군 중 하나였던 낙랑군의 중심지였고, 1500년 전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의 외성 일대였다. 이 때문에 평양제조소와 그 부속시설들을 건설하고 확장하는 도중에 많은 고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낙랑군 초두(鐎斗)다.[91] 이 초두는 평양제조소에서 소유했는데 해방 이후 행방은 불명이다. 1925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촬영한 유리건판만이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
한편 인접한 평양역에서는 공사 도중 동리묘라 불리는 낙랑군 고분이 발견되었고, 1944년에는 평양제조소와 바로 붙어 있는 평양병기창 공사 도중에 고구려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반가사유상 1점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 반가사유상은 1964년에 국보 제11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병기제조소가 위치한 평천동 일대에는 고려 시대의 유적인 흥복사도 있었다. 당시 흥복사는 고려 왕실이 서경을 방문하면 반드시 들르는 사찰이었으나 16세기 이후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윗 문단의 '평양성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 흥복사의 칠층석탑은 남았다. 해당 석탑은 오늘날에는 중구역 모란봉으로 이전되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유물들이 근처에서 출토되어, 평양제조소와 평양역 일대가 전근대에도 번성한 곳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인접한 평양역에서는 공사 도중 동리묘라 불리는 낙랑군 고분이 발견되었고, 1944년에는 평양제조소와 바로 붙어 있는 평양병기창 공사 도중에 고구려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반가사유상 1점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 반가사유상은 1964년에 국보 제11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병기제조소가 위치한 평천동 일대에는 고려 시대의 유적인 흥복사도 있었다. 당시 흥복사는 고려 왕실이 서경을 방문하면 반드시 들르는 사찰이었으나 16세기 이후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윗 문단의 '평양성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 흥복사의 칠층석탑은 남았다. 해당 석탑은 오늘날에는 중구역 모란봉으로 이전되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유물들이 근처에서 출토되어, 평양제조소와 평양역 일대가 전근대에도 번성한 곳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박흥식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자료
- 북한관계사료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의 일지 3
- "해방 직후 한반도 북부 공업 상황에 대한 소련 민정청의 조사 보고", Д. 43 - Ⅸ. 기계제작공업
- ATIS INTERROGATION REPORT NO. 964 11 September 1950
- ATIS INTERROGATION REPORT NO. 3135 2 February 1951
- ATIS INTERROGATION REPORT NO. 2518 4 December 1950
- 일본제국통계연감 제44회(日本帝国統計年鑑 第四十四回)
- 「昭和20年度仁川陸軍造兵廠作業計画 昭和20年3月」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120849900、各造兵廠作業計画表綴 昭和20年度(防衛省防衛研究所)
- 「昭和20年3月隷下部隊長会同の際状況報告 昭和20年3月1日 仁川陸軍造兵廠(1)」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4010849100、隷下部隊長会同の際の兵器生産状況報告 昭和20.3(防衛省防衛研究所)
- 「臨時軍事費支弁建造物設備拡張実施の件(3)」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4121315200、陸支受大日記(密)第55号 昭和14年自8月22日至8月24日(防衛省防衛研究所)
- 미국 정보문서
- 1945년 2월, 항공사진 분석 문서
- 1947년, 경제 정보: 평양의 탄약 공장
- 부평문화원(2022), 《한권으로 읽는 부평사》
- 부평문화원(2021), 《부평사》 제4권 "인천육군조병창과 애스컴시티"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조선군개요사(朝鮮軍概要史)》
- 육군박물관, 《조선군인 및 조선보병대에 관해서》
- 배성준, 《한국 근대 공업사 1876~1945》
- 기무라 미츠히코(木村光彦), 《전쟁이 만든 나라, 북한의 군사 공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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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가와 마사히코(中川雅彦)(2012),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の軍需工業(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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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서국. (2004). 일제하 평양지역에 건설된 군수산업의 실체 <2>. 북한, , 192-197
- 최서국. (2005). [특별기획] 일제하 평양지역에 건설된 군수산업의 실체<3>-끝. 북한, 397, 187-192.
[1] 1945년 당시 미국의 JANIS(JOINT ARMY-NAVY INTELLIGENCE STUDY) 문서철 중 조선에 대해 다룬 75번 문서에 언급되는 표기.[2] 다만 이 시기 평양과 고쿠라 병기제조소는 예외적으로 개별 공창이 아닌 중앙 육군조병창 직할이었다.[3] 이외에는 1911년부터 평양역 부지 내에 용산 철도공작창 평양공장이 설치되어 열차 정비 업무 역시 수행했다.[4] 1899년에 고쿠라성 아래 무라사키 강변에 건설되었다. 바로 옆에 고쿠라 육군조병창이 있었다.[5] 이는 현재 국회도서관에서 보관 중이다.[6] 먼저 평양제조소에 와서 일하고 있었다. 동생 토시나리와는 같은 기숙사를 썼다고 한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징집되어 전사했다.[7] 흥복사 칠층석탑이다. 일제강점기에 평양역 앞으로 옮겼다가 현재는 모란봉 일대로 이전하였다.[8] 조선주차군 제20사단 예하 보병 제39여단 본부를 의미.[9] 보병 제39여단 예하 제77연대를 의미. 다만 같은 여단 소속의 78연대는 따로 떨어져 경성부 용산기지에 20사단 및 조선주차군 본대와 함께 있었다.[10] 기타큐슈는 일본 4대 공업지대인 기타큐슈 공업지대의 중심이다. 1901년 관영 야하타 제철소의 설립 이래 크게 발전했다. 다만 최근에는 생산성 악화로 4대 공업지대에서 제외되는 추세다.[11] 일본 4대 공업지대 중 하나인 한신공업지대의 중심지. 에도 시대 이래 전통적인 상업 중심지이기도 하며 특히 섬유공업과 금속가공 및 기계공업이 발달했다.[12] 참고로 평양은 총독부의 한국 민족자본 파괴 시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사업가들이 상당수 세력을 보전하던 곳이기도 했다. 이들은 총독부의 일본인 거주지 위주 평양 개발 계획에도 딴지를 걸어 정책 변경을 성사시키는 등 일정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안창호와 조만식의 영향을 받아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 위주의 평양 개발을 꿈꾼 이들도 다수 존재했으나 2차 대전이 터지고 일제의 통치가 가혹해지면서 이 논의는 더 진행되지 못하였다. 출처: 윤정란. (2022). 일제의 근대 식민지 도시 ‘대평양’ 건설과 평양 조선인들의 대응. 현대유럽철학연구, 66, 129-169.[13] 현 북한 황해제철련합기업소.[14] 현 북한 남포제련종합기업소.[15] 다른 공장들은 상술한 해군용 무연탄과 연탄을 생산하던 조선총독부 평양광업소, 전력업체인 조선전기흥업주식회사, 사탕무로 설탕을 제조하던 대일본제당 평양사업소, 그리고 시멘트 및 카바이드를 생산하던 오노다시멘트 평양공장이다. 다만 막대한 수익을 남기던 시멘트 및 석탄 가공 산업과 달리 제당 사업은 평양상업회의소의 자찬만큼 성공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실패에 가까웠다. 아무리 조선인 농부들을 강압적으로 플랜테이션에 투입하여 사탕무를 생산해 봤자 해외, 특히 가까운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자바 섬에서 사탕수수로 만든 원당을 사와 가공하는 게 훨씬 쌌기 때문.[16] 정확히는 타각약협(打殼藥莢), 즉 뇌관을 쳐서(打殼) 격발되고 남은 약협(藥莢)을 의미한다. 약협은 포탄의 탄피를 지칭한다.[17] 다만 정확한 발간일자와 집필자는 불명이다. 일반적으로는 마지막 조선군참모장 이하라 준지로(井原潤次郎)가 1951년 경 저술했다고 본다.[18] 직역하면 '마을 공장'이란 뜻이다. 가내수공업 영세소공장들을 의미하는 일본어 단어다.[19] 오미일의 논문 "평양지역 조선인자본가들의 조합 조직과 공업 발달"[20] 고무공장들에 제품 성분 분석 서비스를 제공했다.[21] 현 도쿄도 키타구 오지역 일대. 인근에 있는 도쿄포병공창의 분공장인 이타바시화약제조소를 별도의 공창인 육군조병창 화공창으로 승격시켰음을 의미한다. 당시 화공창은 이타바시의 본창 외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주조제조소도 관할했다.[22] 1920년 3월부터 전후 경제공황이 불어닥치면서 일본은 과도하게 확장한 군의 크기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서구 열강에 비해 대두된 군의 기술적 낙후성을 개선하기 위해 군축 후 남는 자금으로 현대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923년, 일본은 야마나시 한조 육군대신 주도로 군축을 추진하면서 여러 부대들을 통폐합하거나 폐지하였다.[23] 본래 오사카 공창 소속이었다. 1933년에 독자적인 조병창으로 승격되었다.[24] 대한민국 육군박물관에서 번역.[25] 청구번호 陸軍省-陸支密大日記-S14-80-169[26] 1939년에 건설되어 99식 소총 생산을 주력으로 하던 제조소다. 가스가이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현재는 해당 부지에 오지제지 가스가이 공장이 들어서 있으나 유구도 일부 남아 있다.[27] 実包. 총탄을 의미한다.[28] 주로 농업과 경공업에 종사하던 38선 이남 지역이 이북 지역보다 발전한 중공업 부문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기계 제조업이다. 1940년 인천육군조병창 본창을 시작으로 각종 대공장들이 설립된 이후 부평과 영등포, 용산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식민지 조선의 기계공업 중심지로 떠올랐다. 다만 경성 일대 역시 실제로는 대공장 수가 다른 지역보다 몇 개 더 많았을 뿐, 그들 역시 핵심기술과 부품, 공작기계는 일본 본토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나머지 업체들은 그보다도 열악한 소규모 마치코바들이 대다수였다.[29] 이 중 제3공장의 마지막 공장장이 채병덕이었다.[30] 평양철도창은 84.3-73, 대동강철교는 84.3-91이었다.[31] 1908년 '평양감옥'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되었다. 서대문형무소, 대구형무소와 함께 식민지 조선 3대 형무소로 불렸으며 이곳에서 서북 지역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 정부가 인수해 반동으로 분류된 이들을 수용하고 학살했다. 현 중앙당촌 일대, 정확히는 현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청사 자리에 있었다.[32] 원문에 단위 없음.[33] 부평사에서는 92cm 박격포로 오역하였음.[34] 부평사에서는 88식 10센티 야전 고사포라고 오역하였음.[35] Hot-bulb engine. 과거 소형 선박들에 주로 쓰이던 엔진의 일종이다. 일명 '통통배 엔진'. 소구(燒球)엔진, 소구기관, 또는 소옥(燒玉)을 일본어 발음 그대로 읽어 야끼다마 엔진이라고도 한다. 연료로는 경유나 중유 등을 쓰지만, 현대의 디젤 엔진처럼 압축착화식이 아니라 가열된 열구에 연료를 직접 뿌려 폭발시켜 시동을 거는 단순한 방법을 쓴다. 1886년에 최초로 개발된 매우 오래된 형태의 엔진이며 현대 한국에서는 대부분 퇴출되었다. 이 엔진들은 인천조병창의 선박 및 선박부품 생산을 담당하던 민간 지정공장인 조선기계제작소가 생산했다.[36] 37mm 11식 직사보병포를 자동화한 항공기관포이다. Ki-45 토류가 사용했다.[37] 청구번호 中央-軍事行政兵器-41[38] 소총탄이 아닌 소구경 포탄을 의미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일본어에는 소총탄을 지칭하는 실포(実包)라는 단어가 따로 있다.[39] 여기서 통(筒)은 탄약통(彈藥筒, cartridge)을 의미한다.[40] 비교하자면 일본 본토의 조병창들의 소구경탄 1달 생산량은 이보다 최소 9배는 많았고 인천조병창 내에서도 민간공장들의 생산량은 17만 2천 통으로 평양제조소의 거의 네 배였다.[41] 대전 말기부터 동평양의 조선비행기제작소에서 생산했다.[42] 친일파 기업인 박흥식이 세운 조선비행기공업에서 생산하려 했었다. 다만 이쪽은 공장을 짓던 도중에 전쟁이 끝났다.[43] 상술한 일본군 보고서에 따르면 이는 41식 산포의 94식 유탄일 가능성이 높다.[44] 이 역시 일본군 문서에 따르면 91식 10센티 유탄포 91식 첨예탄 탄환일 가능성이 높다.[45] 다만 이 50mm 고사포탄과 지름 200mm 항공폭탄은 일본군 문서에서 딱히 확인 불가능하다.[46] 평양병기제조소를 의미한다.[47] 평양육군항공지창을 의미한다. 원문은 Кокусе이다. '항공창(航空廠)'을 일본어로 발음하면 코쿠쇼(こうくうしょう)가 되는데 이를 소련군이 러시아어로 그대로 음차한 것이다.[48] 쇼와비행기 평양공장을 의미한다. 전쟁 중반 미쓰이 그룹에 소유권이 넘어갔다. 현 미림비행장.[49] 실제로는 1917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920년에 완공되었으므로 이는 오류이다.[주의] 오역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지뢰'라고 번역한 러시아어 원문은 'Мина'인데, 이 단어에는 지뢰 외에도 박격포 포탄 및 무반동총탄이란 뜻도 있다. 일본군 문서에는 생산품으로 지뢰가 언급되지 않고 최서국은 아예 지뢰 생산을 부정했음을 고려하면, 이는 박격포탄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51] Цех. 러시아어로 공장, 작업장, 동업조합 등을 의미한다.[52] 원 번역본에는 대전차 로켓 소총이라 표기했다.[53] 이는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독일과 미국 등으로부터 고급 공작기기를 수급하지 못하고, 그보다 저급인 일본산 공작기계들의 보충량도 줄어들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54] 원문은 '흐름생산'. 공정순으로 생산의 흐름이 연속된 형태의 생산을 의미한다.[55] 전략 폭격 작전을 기획하고 목표물에 대한 정보를 분석하던 부서이다. 1944년 8월 2일에 미국 합동참모본부 예하에 설치되었다. 워싱턴 D.C.에 소재했으며 줄여서 JTG라 한다.[56] Joint Target Group, "General Analysis: End Products Industry — Armament", 1945.6.26[57] 삼베와 아마 섬유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수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군용으로는 주로 로프 및 천막과 깔개, 비행기 덮개 등을 제조하는 데 쓰였다. 한반도 북부는 조선시대부터 질 좋은 대마가 많이 생산되었으며 1930년대부터 이를 이용한 근대적 섬유 공업이 성했다.[58] 포탄에 충전물을 채움.[59] 현재 운영 중인 부산시기계공업협동조합과는 별개의 조합이다. 현대 부산기계공업조합은 1962년에 설립되었다.[60] 그대로 읽으면 소단야옥. 작은 대장간이라는 뜻이다.[61] 1종에서 4종까지로 분류되었다.[62] 100명에서 1,000명 사이인 업체들이 제일 많았다.[63] 일본은 이미 1932년 당시 이 협약에 서명했다.[64] 남성 1,500명, 여성 250명이었다.[65] 조선인들이 다수인 식민지 조선 내의 시설에 징용된 이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일본 본토로 끌려간 사람들은 다수의 일본인들 틈바구니에서 정말로 극심한 인종차별과 학대, 심지어는 학살에도 종종 노출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전선 또는 일본 본토의 공장이나 광산에 끌려가는 것보단 어떻게든 조선 내에 머무르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실제로도 이는 어느 정도 정확한 판단이었다.[66] 인천조병창 본창의 경우 대부분의 노무자들은 최서국과 달리 본인이 담당하는 작업을 넘어서는 전체 공정에 대해서 알 기회도 없었고,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만큼 심리적이거나 육체적인 여유가 남아있지도 않았다.[67] 인천대학교의 이상의가 조사하여 2019년 논문에 실었던 부평 제1제조소 징용공들의 회고에 따르면, 헌병들이 직접 생산라인을 돌아다니며 태업을 하거나 실수를 하는 노동자들을 갈궈대거나 처벌했다고 한다. 평양제조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68] 최서국은 이에 대해 현재 상태를 유지하라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일본인들이 이행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만 이는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자료들에 따르면 연합군 및 소련군의 진주 직전 조선 주차 일본군이 곳곳의 설비와 문서를 파괴하려 시도했다는 기록이 꾸준히 등장한다.[69] 북한 정부가 1949년부터 매년 간행하는 연감이다. 1950년판은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영인본을 볼 수 있다.[70] 다만 1945년 10월 2일 김일성이 내린 교시를 통해 평양제조소가 재건되었다는 설명은 그를 우상화하는 북한의 공식 사관에 기반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검토가 필요하다. 김일성이 평양 인민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공개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5년 10월 14일이나 되어서였기 때문이다.[71] 본 문서에서 평양제조소 본창이 있는 평천리가 아니라 동부의 사동을 지목하고 있는 이유는 불명이다. 평양육군항공지창 또는 쇼와비행기 평양공장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 않다.[72] 곧 중앙기계제작소로 개칭된다.[73] 김종낙 대위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결국 평양 탈환작전 당시 승호리 일대에서 분쇄되었다. 잔존부대는 제26해안방위여단에 흡수되었다.[74] 제2부 미 국립기록관리청 소장 한국관련 자료 해제, RG342 한국전쟁기 미 제5공군의 조직과 활동에 관한 문서 해제, Ⅲ. 문서상에 나타난 제5공군의 주요 활동, 2. 대량폭격[75] 동시에 1950년 10월 19일은 국군 제1보병사단이 평양에 진입한 날이자 중국 인민지원군의 30만 본대가 압록강을 건넌 날이기도 하다.[76] 점령 초 소련군정은 압수한 주요 사업체들의 일본인들을 쫒아내곤 조선인들에게 운영을 맡겼다. 그러자 공장과 광산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이는 해방 전 일본인들이 주요 기술과 노하우를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련군정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곧 정책을 바꾸어 억류한 일본인 기술자들의 업무 복귀를 승인하곤 조선인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도록 명령했다. 이들의 귀국은 1947년부터 허가되어 1948년까지 대부분 일본으로 돌아갔다. 다만 범죄 혐의가 있는 이들은 시베리아의 굴라크로 끌려가기도 했다.[77] 흥남공장 생산분 피크르산은 국공내전 중이던 중국공산당군에도 지원되었다.[78] 다만 흥남비료공장 역시 6.25 전쟁 당시 설비가 대부분 파괴되어 휴전 후 소련과 동독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복구했다. 따라서 이쪽도 일제가 남긴 물적 유산은 적은 편이다.[79] 이러한 비판이 제기된 근본적 원인은 일제 산업유산 재평가의 시작점인 기무라 교수의 저서가 내재한 문제 때문이다. 그 스스로도 일본인의 입장에서 저술했다고 인정했듯이, 기무라 교수의 저서는 철저히 일본을 중심으로 놓고 나머지를 주변부화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식민지 조선과 전후 북한에서 일본인들이 끼친 영향을 지나치게 고평가하거나 히키아게샤들의 운명에 감정적으로 이입하는 경향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북한의 군사 공업화》 말미에서 그는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중 차별적인 태도를 보인 이들이 분명히 있더라도 대다수는 성실하게 살아가던 일반적인 사람들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소련과 북한의 잔혹한 처사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일단 소련군정의 지나치게 가혹한 전후 처리 방식이 심각한 인권 침해를 수반한 것은 사실이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일본인으로써 이를 비판하는 것 자체는 당연히 문제가 없다. 그러나 기무라 교수의 저서에는 재조선 일본인들이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 권력에 얌전히 편승하여 그 땅의 원래 주인인 조선인들의 자리를 빼앗았던 존재들이라는 인식은 딱히 드러나지 않는다. 재조선 일본인들은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가 부당하게 고초를 겪은 불쌍한 해외 동포들이며, 남북한의 민족주의 논리로 그들이 한반도의 근대화에 끼친 공로가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는 일본 중심의 전형적인 식민지 근대화론적 시각뿐이다. "북한 정부가 일본인들의 공헌을 주시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80] 또한 그는 해방 이후 한반도의 산업시설들이 파괴된 책임을 거의 조선인들의 태업 탓으로 돌리는 반면, 일본인들은 공장 파괴에 거부감을 드러냈다는 투로 설명한다. 하지만 예대열에 따르면 기무라 교수가 조명한 예외적인 일부 사례들보다는 상부에서 하달한 파괴 명령을 군말없이 수행한 일본인 관료들과 군인들, 직원들의 수가 더 많았다. 따라서 기무라 교수의 연구를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지나치게 일본 중심적인 시각 자체는 일정 부분 비판적으로 걸러보아야 한다. 실제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연구하던 많은 한국 경제사학자들이 뉴라이트로 전락하게 된 데에는 기무라 교수의 연구를 인용하다 그의 시각이 가진 문제를 간과하고 말았던 것이 매우 크다.[81] 오늘날 북한은 2월 8일을 '건군절'로 지정해 매년마다 성대한 열병식을 연다.[82] 이 중 1,500명가량이 조선노동당 당원이었다. 1,300명가량은 공장당조직 소속, 170명은 노동자구 소속이었다.[83] 다만 공장 내에 설치된 양성소에서 의무적으로 기술 교육을 시행하고 있긴 했다.[84] 제1총국 휘하의 소화기 탄약 및 지뢰, 수류탄 생산공장이다. 자강도 장강군에 있다.[85] 이 역시 'Мина'를 잘못 번역했을 가능성이 있다.[86] 남파 간첩일 가능성이 제기된 인물이다. 93년 탈북하여 활발히 활동하다 2003년경 북으로 되돌아갔다.[87] 동독을 의미한다.[88] 휴전 이후 북한은 소련과 중국 외에도 많은 '사회주의 형제'들의 지원을 받아 경제와 시설들을 재건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외에도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기술을 지도할 고문단과 설비를 보내 북한의 철도차량공장과 탄광들을 복구해 주었고 헝가리 인민공화국은 1억 루블의 신용차관을 제공함과 동시에 구성공작기계공장 등을 지어주었다. 동독은 함흥시의 화학공업플랜트와 겸이포의 황해제철소 복구 사업을 지원했다.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은 통조림 등 식료품 생산공장 건설을 도와주었다.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병원과 시멘트공장을 건설했으며 농업용 트랙터 사용법을 가르쳤다. 다만 이들이 맨입에 복구해 준 것은 아니었고 광물자원 등을 대가로 받아갔다. 출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 중인 북한관계사료집이다.[89] 주둔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상급부대인 24군단은 공장을 장악하라고만 했지 파괴하라는 지시까지는 내리지 않았기에, 24군수지원사령부의 독단적인 조병설비 파괴에 상당히 당황한 기색을 내보였다. 다만 군정장관으로 임명된 24군단장 존 리드 하지 중장은 이를 문제삼지 않고 넘어갔다.[90] ASCOM은 육군지원사령부(Army Service Command)의 약자다.[91] 초두란 고대 중국에서 술이나 음식, 약 등을 끓이는데 쓰던 용기를 의미한다. 다리가 달려 있는 게 특징. 나중에는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92] 국역한 이들이다. 원저자는 1920년 당시 평양상업회의소 서기장이었던 일본인 사업가 마시로 마스지(間城益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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