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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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제2차 세계 대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영어 : The Pacific War, Asia-Pacific War

  • 일본어 : 太平洋戦争, 大東亜戦争

태평양 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파일:attachment/Second_world_war_asia_1937-1942_map_00001.png
일본 제국의 최대 판도
파일:external/3a.img.v4.skyrock.net/3036517535_1_3_4gLLLFsx.jpg 파일:external/www.westpoint.edu/ww2%20asia%20map%2052.jpg
종전 직전의 판도

날짜

1941년 12월 7일[1] ~ 1945년 9월 2일[2]

장소

태평양, 동남아 일대

이유

일본 제국의 침탈 야욕

교전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US_flag_48_stars.svg.png 미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the_Philippines.svg.png 필리핀 자치령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the_Republic_of_China.svg.png 중화민국(국민정부)

파일:external/445280293c2bfed865cfe52a227034ff75d1da46f609bcd94f5de259556db201.png 영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the_Netherlands.svg.png 네덜란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Flag_of_the_Soviet_Union_%281923-1955%29.svg.png 소련(1945.8.8~)

지원국
파일:external/www.flaggen-server.de/kongog1.gif 벨기에령 콩고[3]
파일:Flag_of_the_Provisional_Government_of_the_Republic_of_Korea.png 대한민국 임시정부[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North_Vietnam_%281945-1955%29.svg.png 비엣민[5]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일본 제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Manchukuo.svg.png 만주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62px-Flag_of_the_Republic_of_China-Nanjing_%28Peace%2C_Anti-Communism%2C_National_Construction%29.svg.png 중화민국(왕징웨이 정권)ㅤ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Thailand.svg.png 태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0px-Flag_of_the_Mengjiang.svg.png 몽강자치연합정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the_Philippines_%281943-1945%29.svg.png 필리핀 제2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Flag_of_the_Empire_of_Vietnam_%281945%29.svg.png 베트남 제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Flag_of_Laos_%281952-1975%29.svg.png 라오스 왕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Burma_1943.svg.png 버마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1931_Flag_of_India.svg.png 자유 인도 임시정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Cambodia_under_Japanese_occupation.svg.png 캄보디아 왕국

해군 지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lag_of_Philippe_P%C3%A9tain%2C_Chief_of_State_of_Vichy_France.gif 비시 프랑스[6]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나치 독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Flag_of_Italy_%281861-1946%29.svg.png 이탈리아 왕국(~1943)

지휘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US_flag_48_stars.svg.png 프랭클린 루스벨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US_flag_48_stars.svg.png 해리 S. 트루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US_flag_48_stars.svg.png 더글라스 맥아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US_flag_48_stars.svg.png 체스터 니미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US_flag_48_stars.svg.png 조지 마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US_flag_48_stars.svg.png 어니스트 킹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US_flag_48_stars.svg.png 윌리엄 홀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US_flag_48_stars.svg.png 헨리 아놀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US_flag_48_stars.svg.png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US_flag_48_stars.svg.png 프랭크 플레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US_flag_48_stars.svg.png 커티스 르메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US_flag_48_stars.svg.png 조지프 스틸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the_Republic_of_China.svg.png 장제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the_Republic_of_China.svg.png 허잉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the_Republic_of_China.svg.png 리쭝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the_Republic_of_China.svg.png 쑨리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the_Republic_of_China.svg.png 바이충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Flag_of_the_Chinese_Communist_Party.svg.png 마오쩌둥
파일:external/445280293c2bfed865cfe52a227034ff75d1da46f609bcd94f5de259556db201.png 조지 6세
파일:external/445280293c2bfed865cfe52a227034ff75d1da46f609bcd94f5de259556db201.png 윈스턴 처칠
파일:external/445280293c2bfed865cfe52a227034ff75d1da46f609bcd94f5de259556db201.png 클레멘트 애틀리
파일:external/445280293c2bfed865cfe52a227034ff75d1da46f609bcd94f5de259556db201.png 루이스 마운트배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Flag_of_Australia.svg.png 존 커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0px-Canadian_Red_Ensign_1921-1957.svg.png 윌리엄 매켄지 킹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00px-Flag_of_New_Zealand.svg.png 피터 프레이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the_Netherlands.svg.png 헤인 터르 포르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Flag_of_the_Soviet_Union_%281923-1955%29.svg.png 이오시프 스탈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Flag_of_the_Soviet_Union_%281923-1955%29.svg.png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Flag_of_the_Soviet_Union_%281923-1955%29.svg.png 로디온 말리놉스키
파일:Flag_of_the_Provisional_Government_of_the_Republic_of_Korea.png 김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0px-Flag_of_North_Vietnam_%281945-1955%29.svg.png 호찌민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히로히토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고노에 후미마로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도조 히데키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고이소 구니아키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스즈키 간타로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스기야마 하지메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야마모토 이소로쿠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나구모 주이치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오자와 지사부로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야마시타 도모유키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무타구치 렌야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도미나가 교지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오카무라 야스지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우메즈 요시지로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나가노 오사미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시마다 시게타로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오이카와 고시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Manchukuo.svg.png 아이신기오로 푸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0px-Flag_of_the_Mengjiang.svg.png 데므치그돈로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1931_Flag_of_India.svg.png 찬드라 보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Thailand.svg.png 쁠랙 피분송크람

결과

미군의 승리

영향

일본제국 패망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병력

10,000,000명 이상

4,800,000명

피해 규모

미국
106,207명 전사
248,316명 부상 및 실종
중화민국
103만 전사, 218만 부상
1700만 명가량 민간인 사망
소련
20,031명 전사 및 실종
24,425명 부상
영국
86,838명 전사
오스트레일리아
17,501명 전사

1,740,955명 전사
393,000명가량 민간인 사망


1. 개요
1.1.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
2. 배경3. 전개4. 미국과 일본의 전력차
4.1. 일본군의 한계
5. 인명 피해
5.1.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
5.1.1. 미군이 겪은 참상
6. 관련 인용구7. 참고 자료8. 관련 문서
8.1. 교리8.2. 사건, 사고8.3. 전쟁 범죄

1. 개요[편집]


태평양 전쟁의 개전을 알리는 NHK 라디오 임시뉴스 방송 [7]

본격적으로 미국이 힘을 펼치기 시작한 전쟁이자, 일본제국의 막장행보로 인해 벌어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 중 하나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일본 제국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앙 태평양 전선과, 중국군이 주도한 중국 전선 및 버마 전선[8], 호주군이 주공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역을 포함한다. 일본 극우들은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중국, 동남아시아 내륙 전선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여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제국 해군이 하와이 진주만에 위치한 미 해군 태평양함대 기지를 전격 기습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일대를 석권하고 인도, 호주까지 위협하였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를 기점으로 점차 하락세를 타며 필리핀 해 해전에서 그나마 복구한 전력이 전멸당하고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하고 본토 앞까지 내몰리게 된다. 항복을 거부하고 자살돌격, 카미카제의 정신나간 만행을 거듭한 결과 원자폭탄 실전투입 대상이 되어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한다.

태평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육상전이 주로 일어난 다른 전선과 달리 이 지역의 전투는 해전과 상륙전이 대부분이였으며 전후 미 육군, 미 공군, 미 해군미 해병대[9]는 세계 최강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미국의 쇼미더머니를 보여주는 대표적 전쟁이다.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배경으로 한 전쟁인 만큼 유럽의 전장에 비해 해전의 비중이 컸으며 일본 주도하에 시작된 거함거포주의의 몰락과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하는 기동전 나아가 상륙전, 대규모 합동작전의 경험은 변화를 준다.

1.1.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편집]

전후 GHQ는 "신도 지령"을 통해 당시 일본이 사용한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을 금지하였다. 미군정 당시 일본 매체들은 GHQ의 엄격한 검열로 대부분 "이전 전쟁" 이라던가 "제2차 세계대전" 등의 표현을 사용했지만 GHQ가 물러나고 해당 지령이 폐지됨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을 옹호하는 입장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일본이 싸운 것은 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라는 흔해빠진 주장부터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이 전쟁을 긍정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 정부가 오래전에 공식적으로 사용한 단어일 뿐이며 해당 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이다. 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다만 여기에서도 일본이 동남아와 인도의 독립 운동에 적극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대동아 공영권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라는 의미도 있다.라는 주장을 덧붙였다.[10] 이 외에도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이 사상적인 의미가 아닌 단순히 전쟁이 일어난 지역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GHQ가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을 폐지한 것은 단순히 위처럼 사상적인 의미로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입장인 이들중 일부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현 일본 정부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타내는 법령적 근거가 없다라는 다소 애매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동아 전쟁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 상황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일본 식민통치를 겪은 70세 이상의 어르신들은 대동아 전쟁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경우가 많은 듯하다. 당시에는 신나게 선전해댔을테니 당연한 일이다. 군함행진곡같은 유명 군가를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분들도 있다. 일단 현재 한자 문화권이든 어디든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고있는 국가는 일본 뿐이며 당연하게도 한국과 중국은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일본의 전쟁 목적을 미화하는 것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2. 배경[편집]

3. 전개[편집]


4. 미국과 일본의 전력차[편집]

미국과 일본의 무기 생산력 비교 (1939-1945)

미합중국

일본 제국

전차자주포

88,410

2,515

야포

257,390

13,350

박격포

105,054

미공개

기관총

2,679,840

380,000

트럭

2,382,311

165,945

전투기

99,950

76,320

폭격기

97,810

15,117

수송기

23,929

2,110

항공모함[11]

141

18

전함[12]

8

2

순양함

48

9

구축함

349

63

잠수함

203

167

출처: John Ellis, World War II: A Statistical Survey (New York: Facts on File, 1993), 277-80.
#

그나마 일본측의 무기생산량이 미국과 조금이라도 비교라도 해볼 여지가 있는 것은 전투기로 미국 생산량의 76.36%에 달한다. (잠수함은 82.27%) 물론, 이는 폭격기와 수송기 등으로 항공기 생산능력을 배분한 미국과 사실상 전투기 하나에 몰빵한 일본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의 76% 수준밖에 안된다. 더구나 미국 전투기는 P-51 머스탱, F4U 콜세어, F6F 헬캣, P-38 라이트닝같은 명전투기들이었고, 일본은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한 날 거의 제로센[13].

이처럼 일본이 그나마 몰빵을 하는 분야에서조차 양적 생산량에서 미국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으며 그 질적 차이는 더더욱 컸다. 전투기의 질적 차이는 그나마 약과고, 미국이 9만대 가까이 생산한 전차 및 자주포 상당수는 M4 셔먼이지만 겨우 2,500대 생산한 일본의 전차라는 물건은 치하가 대부분이었다.Aㅏ...

이러한 생산량의 격차는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더욱 커졌다. 일본의 무책임한 징병정책으로 숙련기술공이 대부분 징집되면서 일본의 생산능력은 떨어져만 갔고 미국의 무제한 잠수함전으로 남방에서 들어오는 원자재도 충분치 못했으며 그나마 1944년 이후로 끊겼다. 1945년부터는 일본 본토 공습으로 그냥 공장들이 초토화되었다. 반면 미국은 본토가 안전하여 전시산업시설이 충분히 가동될 수 있었고 숙련공도 넉넉했고 이들을 징병하는 뻘짓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여기에 더해 일본이 상대하는 적은 미국만이 아니었다는 것. 일본은 동남아에서 영국군, 중국 전선에서 중국군, 남태평양에서 호주군을 상대했다. 이들 나라들이 생산한 물자는 아예 저 위의 수치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전쟁 종료 1주일 전 참전한 소련을 제외해도 이렇다. 이러한 점을 총합하여 보면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자폭 전쟁이었다는 본문의 묘사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물론 미국이 일본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유례없는 양면전쟁을 진행 중이었기에 위의 물자가 모두 태평양에 집중되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생산물자 상당수를 영국, 프랑스, 소련 등 동맹국에게 랜드리스로 퍼줬다는 것은 분명 감안해야 한다. 실제 전차 및 자주포 생산량의 대부분은 유럽전선과 그 동맹국에게 집중되었고 태평양에 할당된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그 얼마 되지 않는 셔먼으로도 충분하긴 했지 이는 트럭이나 야포같은 지상장비 전반에 공통되는 문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의 주전장은 바다였고, 해군 전력의 90%는 태평양에 투입된 게 맞다! 그리고 그 10%도 절대다수가 U-Boat로부터 대서양 항로를 지키기 위한 구축함이고 주력함들은 레인저 정도를 제외하면 잠깐 얼굴을 비춘게 전부다.

그리고 이 장비들을 생산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석유, 석탄, 철강[14]과 같은 연료 및 원자재의 생산량, 수송 능력의 격차는 아주 안드로메다 행으로 봐도 될 지경이다. 이들 원자재 대부분을 식민지와 남방 점령지에서 조달하던 일본은 해상교통로가 차단되자마자 바로 산업능력 격감과 전투력 유지 불능에 직면했다. 본토 방위를 위한 전투기들이 소나무에서 긁어낸 송근유로 출격을 하는 형편이었고 팔렘방과 브루나이, 쿠칭의 유전은 본토에 원유를 보내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그것마저도 용납 못해서 전쟁 막바지에 브루나이, 쿠칭 유전 지대에 상륙한다.

그 밖에도 당시 일본은 세계 최대의 텅스텐 산출국-식민지 조선의 상동광산-이었으나 텅스텐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는 기술력을 갖고 있었으니 설사 자원이 넉넉했더라도 제대로 써먹을 지는 의문이다. 텅스텐은 포탄용으로 널리 쓰이는 전략자원인데 일본은 텅스텐 가공기술이 부족해서 조선의 텅스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동맹국 나치 독일은 고철더미를 뒤져가며 텅스텐 재활용을 하고 있었다.[15]

반대로, 미국은 자원의 부족을 우월한 산업능력으로 해결했다. 개전 초 동남아시아가 일본에게 넘어가면서 미국도 여러가지 천연자원들 특히 천연고무의 부족에 시달렸다. 이는 바퀴달린 모든 것들의 생산에 지장을 초래했기에 개전 초에는 미국도 전 민간에서 안쓰는 폐타이어 등을 회수하거나 하는 식으로 고무를 충당했는데, 나중에는 그냥 합성고무를 만들어서 천연고무를 완전히 대체시켜 버렸다. 나머지 자원인 석유, 석탄, 철 등이야 미국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맹국 캐나다에서도 쏟아지는 것들이었고. 이런 전략자원 레벨은 아니지만 DDT 역시 동남아시아에서 수출하는 살충제 원료인 제충국을 입수하지 못하게 되자 미국이 그냥 산업능력으로 찍어낸 화학 살충제였다.

4.1. 일본군의 한계[편집]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일본군의 온갖 병크삽질들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헛웃음과 대한독립에 기여했음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16]. 대표적인 예로 일본 해군과 일본 육군은 서로 다른 국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본적인 협력조차 안 되었다. 참고로 독일도 비슷했던지 히틀러의 수기에도 나온다. 독일도 국방군(Wehrmacht)과 SS 간의 갈등도 엄청나게 심각했고[17] 공군 야전사단 같은 편제가 존재하는 등 엉망이었으며 미군도 육군과 해군의 경쟁과 자존심 싸움이 치열했지만, 그 정도(?)는 애교에 가까울 정도로 일본 육군성과 해군성의 반목/대립은 상상을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서로 교전까지 벌이려 한 적도 있을 정도로. 뿐만 아니라, 해군 조직 중 하나에 불과하던 연합함대조차 해군 본대와는 따로 놀았을 정도니... 단적인 예로, 일본 육군은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해 해전(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의 그 중대한 결과조차 뒤늦게 해군으로부터 통보받거나, 심지어 스스로(…) 알아내야 했을 정도. 나중엔 육군이 자체적인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운용하는 비범함도 보여주었다. 이런 것은 영상매체에도 반영돼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도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18]이 나중에야 연합함대의 전멸을 소문(…)으로 듣고 허탈해 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일본의 대본영은 미국과의 큰 국력 차이를 정신론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전투에서 져도 진 것은 아니며, 근성으로 버티면 언젠가는 나약한 귀축영미가 지쳐 나가떨어지리라는 믿음이었다.[19] 물론 일본군은 통상적인 방식으로는 미군에게 대타격을 줄 수 있는 자원도, 기술력도 없었으므로 병사 개개인에게 자폭과 희생을 강요했고, 전쟁 중 일본이 보인 반자이 어택, 인명경시의 극치인 카미카제 전술, 유인어뢰 가이텐, 유인유도미사일 MXY-7 오카, 무식한 전쟁수행, 집단자살, 인육 섭취의 막장행태는 말도 안 되는 정신론의 말로로 설명이 가능하다.

게다가 일본 군부와 정치계는 전쟁터에서 무의미하게 물자와 병력을 반자이 어택으로 낭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개념도 없었다. 미국을 상대로 아껴서 싸워도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마당인데 말이다.[20] 이놈들은 그저 반자이만 외치면 그만이라는 마인드로 전쟁에 임했다. 당장 중일전쟁에서 5년째 들이붓고 있는 주제에 미국과의 전쟁을 선택하면서 양면전선을 만드는 패기를 보이더니 이후 식민지를 두고 있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호주에 싸움을 걸어서 싸울 상대를 하염없이 늘렸다. 무다구치 렌야가 활약한 전선도 영국과의 전선이었다.[21] 사방에 적을 두고 전쟁하는 것도 문제인데 여기에 더해서 미국 상대로 뒤통수를 치고 자기들이 유리한 국면을 취할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 종국에는 개전초기 유리한 점조차도 알아서 까먹고 항복한게 어찌보면 당연하다.

사실 일본군이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미국 상대로 유리하게 전장을 끌고 갈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당장 진주만의 피해도 과소평가되는 감이 있긴 해도 심각했던 것은 사실[22]이었고 43~44년 이전에는 미국도 결정적으로 전시경제체제가 돌아서 쇼미더머니를 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 이전 개전 초기에는 미 해군도 상당히 전력이 핍진하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거하게 선빵을 얻어맞은 탓에 함대 전력이 일본군에 비해 결코 나은 상황이 아니었다.[23] 당장의 전력차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전장의 주도권은 일본이 쥐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알아서 나서주지 않는 이상 니미츠가 일본의 항모기동부대를 잡을 기회는 없었다. 당장 종이 비행기 취급받는 제로센도 이 당시까진 그렇게 나쁜 비행기가 아니었다.나중에 핼캣 전투기 이후로 망하지만하여간 '내가 맛깔나게 싸대기를 때리면 미국이 협상하겠지?'라는 일본의 방침은 오늘날에는 그저 비웃음거리 정도로 여겨지지만 당시 그 개념 자체는 '미국이 정신차리고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병력을 증강시키기 전에 한번의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줌으로써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을 우리가 선점하면 미국 역시 협상에 나설수 밖에 없을 것이다'는, 꽤나 합리적인 수준의 대전략이었다. 당장 하와이 먹히고 미 서부 해안까지 위협받았다면 미국 입장에서도 갑갑한 일이었을 것이다.[24]

5. 인명 피해[편집]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입은 인명피해(사망자)는 총 42만여 명이다. 이중 유럽전선에서의 피해가 30만 명에 육박하고 태평양 전선에서의 죽은 미군은 12만 여명이다. 전투행위에 의한 직접 전사자의 경우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106,207명의 병력손실을 입었고 포로로 잡힌 병력 중 일본군의 전쟁범죄 및 기아, 질병, 아군 폭격 등을 합해 12,935명이 추가로 죽었다.[25] 일본으로선 참담하게도, 미국이 이 전쟁에서 잃은 총병력피해는 일본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잃은 병력과 비슷하다.

전투 환경 자체는 유럽에 비해 훨씬 열악했음에도, 중국 전선을 제외한 태평양 전쟁 미군 전사자 10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는 유럽 서부전선 미군 전사자 28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적은 편이었다. 이는 유럽에 비해 태평양 전쟁이 주로 섬들을 빼앗는 국지전으로 진행된 것도 있고 미군이 징검다리 작전으로 일본군의 방어 거점을 우회하며 공격했기 때문이다. 미군이 승기를 잡은 1943년 이후 내내 태평양 전쟁은 제해권을 장악한 미군이 고립된 섬에서 방어로 일관하는 일본군을 소탕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고, 유럽 전선의 개활지에서처럼 대규모 회전은 볼 수 없었다. 물론 그 때문에 일본군도 해군 함대를 제외한 전투병력 중 사상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일본군, 특히 지상군이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한 건 필리핀 탈환전과 오키나와 전투 등 전쟁 말기의 일. 그래서 태평양 전쟁 말기를 묘사한 지도를 보면, 분명히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임에도 겉보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 말레이, 인도네시아, 중국 등에서 여전히 점령지가 상당히 넓어 보이게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지역을 일본군이 실질적으로 점령, 경영하는 능력이 있었는지는 둘째치고, 이 시점에서 일본군 점령지의 넓이 따위는 전략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26]

일본의 경우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42년까지 누적 사상자가 6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때까지의 피해 대부분은 중일전쟁의 수렁 속에서 입은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쇼미더머니를 치고 반격에 나선 1942년 중반 이후부터 종전까지 3년 동안 태평양과 중국 전선을 합하여 240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그 전까지는 총력전 체제하에서 어떻게든 감내할만한 피해였다면, 본격적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그냥 병력이 투입하는 족족 녹아났다는 소리. 거기다 본토가 안전했던 미국과 달리 일본의 본토는 1945년 3월 이후 커티스 르메이가 지휘한 폭격으로 후방의 민간인들까지 엄청나게 죽어갔다.

이는 안그래도 동원능력에서 차이나는 양국 상황을 감안하면 더더욱 크게 작용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을 합쳐 1억 운운했지만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본국의 인구는 7,000만 명. 반대로 미국의 경우 본국의 인구가 1억 3,000만 명으로 거의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났고 질적으로도 그 차이가 엄청났다. 일본이 병력 동원 측면에서 반란의 우려때문에 조선과 대만 출신 병사를 매우 꺼려하며 받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며 태평양전쟁의 전역이 점점 넓어져가던 1943년까지도 식민지 조선과 대만출신의 일본군 입대 자원자 중에 실제로 선발된 인원의 비율은 채 5%가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선발한 식민지출신 병사들도 전투병과에는 철저히 배제시키고 비전투병과 위주로 배속시켰다. 내선일체, 일선동조론 운운하면서 창씨개명을 시키는 식으로 적극적인 동화정책까지 펴놓고도 반란을 우려해서 입대를 불허하는 모순의 극치였던 것이다. 물론 대전말기가 되어 일본 본토에 대한 위협이 턱밑까지 다가오고 나서는 부랴부랴 식민지에도 강제 징집을 서두르게 되지만 이미 완전히 기울어진 전황을 극복할순 없었다.

전쟁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나라는 역시 중국. 중국은 1937년 개전 이래 무려 8년동안 일본과 혈전을 펼쳤고, 그 와중에 일본의 전쟁범죄와 무차별폭격 등으로 최소 1,200만 명에서 최대 3,50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그중 90% 이상이 민간인이었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에서도 일본의 가혹한 징발정책에 의한 기아와 질병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3~4백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1~2백만, 필리핀에서 50~100만, 영국령 버마에서 25만, 포르투갈령 티모르에서 5~7만, 영국령 인도에서 150~250만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영국령 싱가포르에서도 학살 및 기아로 5만 명이 죽었다.

유럽 전쟁의 참혹함에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과 인명피해는 유럽의 전쟁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피해 대부분이 유럽 강대국이 아닌 중국이나 동남아 식민지에서 발생한 것, 홀로코스트처럼 체계적인 약탈과 학살을 저지른 게 아니라 전근대의 전쟁처럼 점령지에서 약탈/살해/강간하고 잊어버리는 식으로 일본 자신조차 전쟁 범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 점. 그리고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국공내전한국전쟁베트남 전쟁 등 동아시아에 새로운 전쟁이 계속 터지면서 정확한 피해집계나 통계가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이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을 무디게 만들었다.

반면에 태평양이 차라리 양호한 모습도 있는데 그건 포로 사망률. 소련군 포로는 30~57.5%이상이 사망했고[27] 미군 포로는 27%가 사망했다. 단, 중국군 포로가 들어가면 최대 40%까지 올라가므로 나치가 죽인 포로보다 많아질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일본군에게 다소 묻힌 감은 있으나 나치 독일도 위안소 설치와 강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확인된 건수만 1942년 한해의 수치만 1,000만에 달한다고 한다.[28]

5.1.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편집]

태평양 전쟁은 잔혹함으로는 독소전쟁과 동급인데 독소전과 비슷하게 추축국인 일본이 각종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치치지마 식인 사건같은 식인 사건인데 이는 극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 아니라 사기를 고양한다는 명목으로 한 거라 다른 식인과 비교할 수 없다. 치치지마 사건의 내막은 술자리에서 안주가 떨어지자 특별한 술안주라며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인육을 먹은 것이다. 치치지마 이외에는 '재미로' 식인을 한 사례는 없기는 하다. 그러나 저 사건을 일으킨 다치바나 요시오의 행태는 동시기 일본군조차 경악할 수준이었다.[29]

또한 자국 민간인까지 거짓 선전으로 집단자살하게 만들고, 정신대/강제노동에 끌려가 인간성을 유린당한 조선인 등 식민지 주민들, 식량이 떨어진 일본군에게 잡아먹히는 등(…) 살해당하고 착취당한 원주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장 일본군과 원주민이 우호적으로 지냈던 섬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남태평양 군도에서 나이 지긋한 원주민들은 JAP의 J자만 나와도 이를 부득부득 갈며 욕을 하기 바쁘다. 오죽하면 식민지배하던 백인들이 압도적으로 낫다며 백인, 미국, 영국, 호주 같은 군대를 솔선수범으로 도왔다. 예를 들어서 과달카날에서 해안 감시원을 하다 일본군 이치키 부대에 잡혀서 고문 당하고 목을 총검으로 찔린 뒤에도 놀라운 투혼으로 탈출에 성공해서 미군에 일본군의 공격을 알리고 은성 무공훈장을 비롯해 영국 기사작위까지 받은 자콥 C. 보우자(Jacob Charles Vouza)라는 원주민도 있을 정도다.관보링크 일본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면 기미가요를 잘 부르는 원주민 노인들이 나온 바 있는데 못 부르면 죽여서 살기 위해서 불렀다고 했다.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대해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가장 큰 이유.

게다가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 중에는, 당시 일본의 우방국 시민도 있었다. 1945년 필리핀 탈환전 당시 마닐라의 일본군은 마닐라 주재 스페인 영사관에 쳐들어가서 민간인 50여명을 학살하고 건물에 방화했다. 당시 프랑코 정권 하의 스페인은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측을 지원한 독일, 이탈리아 등 추축국과 매우 사이가 좋았고, 당연히 같은 추축국인 일본과도 관계가 좋았다.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1945년 4월 스페인은 일본과 단교해버렸다. 이에 앞서 1944년 3월에는 카비앵 항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인과 독일인 목사들을 학살했다. 당시 일본과 독일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한 관계였는지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미쳐서 아군도 못알아본 모양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성하기는 고사하고 당시의 일본의 위세에 취한 인물들은 이 전쟁을 '대동아 전쟁', '백인 압제-착취로부터 아시아 해방을 위해 일본이 총대를 맨 성전'이라 부르며 온갖 미화를 일삼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한 대 남은 가이텐은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 중. 그리고, 이 때의 전범들을 일본에서는 영령이나 신으로 모시고 있다는 웃기지도 않을 사실 역시 문제다. 이런 신사나 사묘 같은 시설들은 일본 열도 내 각지에 퍼져 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참배를 하면서도 참배를 받는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곳도 많다는 게 더 문제이며 한 독일인 기자가 참배를 한다는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자 참배를 하던 일본인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그 독일인 기자에게 욕을 했다.

전쟁 중반 이후 보급선이 씨가 마르다시피한 일본군은, 그저 미군이 손실을 줄이기 위해 지나친 섬에 남겨진,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끊긴 일본군들은 실제로 둔전(…)과 사냥, 낚시가 중요한 일과였다. 그나마 라바울(Rabaul)처럼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한 곳도 있긴 있었다. 개구리 뜀뛰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곳이 이 곳이다. 일본의 최정예 비행대였던 '타이난 항공대'도 이곳에 본거지를 오래 두었으며, 최대 20만 명 이상의 육/해군 정예 병력을 배치했을 정도로 일본군의 남태평양 최대 전략거점. 병력이 워낙 많아 우회를 결정했으며, 종전 후 이는 대단히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라바울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물며, 부겐빌(Bougainville) 섬처럼[30] 전 병력의 1/3이상이 굶어 죽어버린 곳이 대부분이다.

전쟁 후반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일본군은 섬을 철저하게 요새화했고,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한 채 옥쇄하거나 아예 카미카제 같은 야만스러운 전술까지 구사하면서 끝까지 버티려 했다. 그리고 미군은 이런 일본군을 제압하기 위해 출혈을 각오하고 더 높은 강도의 무력을 행사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니 병사들이 더욱 심하게 소모될 수 밖에 없었다.

5.1.1. 미군이 겪은 참상[편집]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인간성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고 얼마나 참혹한지를 잘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개발도 잘 되어 있고 평탄한 지역이 많았고 문화권도 비슷했던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빡빡한 정글과 험악한 산악 등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반적인 서구문명에서 산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낙오지에서 전투했다는 이야기다. 유럽 서부전선에서는 독일군을 몰아내고 도시들을 해방시키면 현지 주민들의 호의를 받던 거래를 하던 해서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벌이며 승리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겠지만, 태평양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한 병사들에게 돌아오는건 진흙과 말라리아 뿐이었다.[31]

그리고 현지 장기거주자나 원주민이 아닌 이상 인간이 견디기 힘든 끔찍한 극한의 기후에서 싸워야 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당장 시간당 100mm 정도의 폭우(스콜)는 일상에 가까우며, 어딜 가나 축축한 진흙탕, 그리고 모기, 거머리 등의 독충 뿐. 더 퍼시픽에서는 이런 극한의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권총자살해 버리는 병사가 나오며, 실제로도 유럽에 비해 대단히 높은 비율로 전투피로증 환자가 속출하였다. 게다가 1942, 43년 등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에 비해 지원 규모상으로 크게 나을 게 없었고 특히 과달카날의 해병대는 외부 화력 지원까지도 일본군 우세였으니, 결국 감투정신으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싸움 상대인 일본군, 협력 상대인 원주민은 문화권도 완전히 달랐다. 그나마 일본군이 워낙 막장이라 원주민들이 연합국을 적극적으로 돕긴 했다. 그나마 전쟁 초에는 동남아 일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쪽 섬들이 주요 전장이라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의 도움을 받았는데도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게다가 인종주의에 찌들었기는 하지만 일단 영국과 미국 사람은 열등인종으로 분류하지 않았으며(유대계는 당연히 제외) 그래도 비슷한 문화권이니 비슷한 상식이라도 통하는 서부전선 독일군과 달리 일본군은 지도부의 무능에다가 16세기식 전쟁 문화가 자리잡아 하라는 전쟁은 안하고 이상한 짓만 하는 별종이었다. 또 오랜 전쟁으로 사기가 떨어져 있던데다 애시당초 서부 전선에서는 가급적 정상적인 전쟁을 치르려 해서 SS를 제외하면 싸워도 어차피 개죽음에다 적이 항복을 정식으로 권고[32]하면 손을 들고 자비를 청하는 독일군과 달리 일본군은 죽을 때까지 무조건 항복하지 않고 싸우도록 세뇌되어 있어서 대화도 통하지 않았다.[33] 게다가 포로 문서에 보다시피 미군이 서부전선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유대인이 아닌 이상 힘들지언정 최소한 포로로서 대우는 받았겠지만, 일본군에게 잡히면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소련군처럼 뭔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당장 정식절차를 밟아 항복한 미군 병사들에게 죽음의 행진을 시켜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고의로 양산해낸 작자들이 일본군이다. 아니면 아예 술자리에서 안주가 부족하다며 특별한 술안주라는 명목으로 잡아먹은 사례도 있다.

게다가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보급도 어려워 장병들의 생활마저 매우 열악하였다. 휴지 한 통이라도 일일이 배로 실어 날라야 하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다. 과달카날 전투가 양군이 모두 극도로 열악한 보급상황에서 싸워야 했던 대표적인 전장. 유럽이었다면 점령한 도시에서 징발이라도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태평양 한가운데 외딴 섬에 그런 곳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원주민을 약탈했다가는 협조를 받을 수 없었기에[34] 결국 모든 걸 스스로 해결했다. 그랬기 때문에 태평양 전구에서 미군이 체험한 보급 난이도는 아주 헬게이트였다. 유럽 전구와는 다르게 장기간 지속적인 보급계획수립이 필수적이었고 보급부대의 규모도 유럽전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방대하고 컸다. 말 그대로 보급이 곧 생명줄이었다. 보통의 문명사회에서 쉽게 징발가능했을 가장 기초적인 소모품 물자도 여기에 포함되어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조달한 물품들도 있었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진 못했다.

이렇게 미군 장병들도 보급품 부족으로 심한 고생을 하고 때때로 진짜 정신력에 의존해야 했는데[35], 이런 전장이다 보니 장병들에게 '이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전투는 언제나 독소전쟁 못지 않게 참혹하게 진행되었고, 고대의 전쟁터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마경이 펼쳐졌다. 미군 중일부는 일본군 시신의 두개골을 따로 떼어내서 차량의 장식품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는 엄연한 전시 국제법 위반이다. 심지어 이걸 몰래 집까지 갖고 와 창고 따위에 처박아놓기도 했다고.[36] 물론 포로학대나 조직적인 포로학살 같은 행위를 당연한 듯이 자행하고, 심지어 포로를 잡아먹거나 산 채로 해부하는 등의 생체실험 행위까지 저지르고 이걸 미화하거나 은폐하려던 일본군에 비하면 충분히 양반이다. 일본군은 군대 자체가 미쳐돌아가고 일부 개개인이 그나마 정상이었다면 미군은 군대는 정상이고 일부 개개인이 미쳐서 일을 저지르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참혹함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서유럽 전선의 미군을 다루는 매체는 주로 승리의 영광을 다루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 반면 태평양 전선의 미군을 다루는 매체에서는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다루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더 퍼시픽>을,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씬 레드 라인>을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6. 관련 인용구[편집]

1억의 일본인들[37]은 이제 조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희생해야 한다. 세계의 평화라는 제국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우국충절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미국도 영국도 두렵지 않다.
도조 히데키, 진주만 공습 후 미국,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 중

우리의 근성은 대단하고, 적의 정신력은 나약하므로, 우리는 백전백승이다.

"우리 황국의 운명은 이 일전에 달려 있다."
나구모 주이치

"나구모 제독,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 황국의 운명은 이미 결정난 같은데?"
노부히토

만약 미국과 전쟁을 하라고 하신다면 처음 6개월정도는 승산이 있겠습니다만, 전쟁이 2~3년 이상으로 길어진다면 어떻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일본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그 근거! 그것이 듣고 싶습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기름 때문에 전쟁하는 병신들도 있냐?" 그런 병신들이 있었습니다. 유럽에도 있었습니다.
이시와라 간지

"이제 일본은 망할 것이다. 너희들은 다다미 위에서 죽지 못한다. 그 각오를 해둬라."
사이온지 긴모치

"어제, 1941년 12월 7일 - 이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미합중국은 일본제국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진주만 공습 직후 의회에서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하며 한 연설, 이른바 치욕의 날 연설 서두

"그래, 난 이리 될 줄 알았어!"
어니스트 킹이 부관에게서 진주만 공습 보고를 듣고 한 말

"이 전쟁이 끝나면, 일본어라는 언어는 이제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윌리엄 홀시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초토화된 해군 기지를 보고.[38]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쪽발이들을 죽이고, 쪽발이들을 죽이고, 쪽발이들을 더 많이 죽이는 것입니다."
윌리엄 홀시가 과달카날 시찰에서 앞으로의 전략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말.

"46년에는 오지에서 벗어나기, 47년에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48년에는 골든 게이트로. "[39]

태평양 전쟁 당시 미 해병대슬로건

"태양에서 나오는 힘이, 이제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옥좌가 있는 땅 일본 전체를 일식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해리 트루먼

"나와 함께있었던 해병대원들은 18~22살이었다. 그렇게 침착한 사람들은 처음보았다. 나는 깨달았다. 승리가 우리것임을."

― 존 포드. 미드웨이 해전의 영화를 촬영하는 중 미드웨이 섬에서.

7. 참고 자료[편집]

태평양전쟁의 지상/해상/공중전의 공간전사를 연재하는 개인 블로그. 미국 등 외국의 전문웹문서/서적을 번역하여[40] 전투/전역 별로 연재한다.

각 전투에서 의미있는 움직임이라면 소대분대, 나아가 일개 기관총, 박격포반 단위까지(!) 서술하는 디테일이 돋보인다. 더욱이 함대구성/군수보급/야전건설/민사전 등 군사행정과 전투를 전후한 배경 설명(장군들의 정치적 갈등 등)까지 대단히 꼼꼼하게 서술되어 있다.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서는[41] 2009년경부터 꾸준히(주 2~3회) 이런 연재를 해 온 터라 나이도 적지 않고 내공이 풍부한 밀덕 단골이웃들이 달아대는 부연설명 등 많은 댓글들도 볼 거리 한국어 웹문서 중 이 정도 퀄리티의 태평양전쟁사 포스팅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옛 글이라도 의문이나 오류를 지적하면 바로바로 수정 하거나 대답을 해준다

블로그 주인장인 대사(PW)는 밀덕후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 듯, 오래 전부터 대구광역시에서 개인의원을 운영해 온 내과 의사(!)이다.아버지는 해군 참모차장이었다고 한다. 성골 밀덕후 다만 공중보건의로 복무한 관계로 덕업일치는 실패하였다

미해군과 해병대 공식간행물을 중심으로 사진, 전문, 지도 등 많은 1차사료를 찾아볼 수 있다. 홀랜드 스미스 해병중장[42] 의 자서전 "산호와 장성(Coral and Brass)" 등 일부 단행본도 전재되어 있다. 태평양 전쟁사 밀덕이라면 꼭 둘러봐야 할 곳. 더불어 대부분 자료가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되어 있으므로 능력있는 위키니트들은 각 문서를 살찌우는데 잘 활용하도록 하자

8. 관련 문서[편집]

8.1. 교리[편집]

8.2. 사건, 사고[편집]

8.3. 전쟁 범죄[편집]

[1] 진주만 공습이 일어난 날. 미국은 다음날인 12월 8일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이른바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을 통해 대일 선전포고를 행했다.[2] 시게미츠 마모루 대사가 미주리 호에서 항복 문서에 조인한 날. 일본 제국의 공식적 항복 선언은 1945년 8월 15일의 히로히토옥음방송이다.[3] 의료지원국[4] 임팔 작전에서 한국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가 영국 육군에 배속되어 참전했다.[5] 베트남 독립 동맹회. 베트콩과는 다른 조직이다. 보통 베트민, 월맹으로도 부른다.[6] 당시 동남아시아에 있던 프랑스의 식민지들.[7] 전문 : 임시 뉴스를 알립니다. 대본영 육해군부 12월 8일 오전 6시 발표. 제국 육해군은 8일 새벽, 서태평양에서 미국·영국군과 전투태세에 돌입. 임시 뉴스를 알립니다. 제국해군은 하와이 방면에서 미국 함대와 항공병력에 대해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했으며, 싱가포르 등지에도 대폭격을 실시했습니다. 대본영 해군부 오늘 오후 1시 발표. 하나. 제국해군은 8일 새벽, 하와이 방면의 미국 함대와 항공병력에 대해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했다. 둘. 제국해군은 8일 새벽, 상하이에서 영국 군함 테페르호를 격침했으며, 동시각 미국 군함 웨이크호는 아군에 항복했다. 셋. 제국해군은 8일 새벽, 싱가포르를 폭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넷. 제국해군은 8일 아침, 다바오, 웨이크, 괌의 적 군사시설을 폭격했다.[8] 당시 버마에 파견된 중국군은 10만이 넘었으며 버마 탈환작전 역시 주공은 중국군이었다.[9] 미국 육군 또한 엄연한 태평양 전쟁의 주역이고 이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역시 십분활용했다. 상륙전이 지상군의 메인 전장양상이었고 전쟁특수로 미 해병대가 팽창했지만 6개 사단 규모에 불과했고 대부분 니미츠 제독의 구역에서 활동했다. 이에 반해 미국 육군은 태평양 전쟁에 20개 사단을 파병했고 이들은 주로 맥아더 장군의 구역에서 일선 병력으로 활용되나 니미츠 제독의 구역에서도 해병대의 가용병력이 부족할때 대타로 흔히 활용되었고 오키나와 전투 시점에선 육군 4개사단(제7,27,77,96보병사단)과 해병 2.25개 사단(제1,6해병사단,해병2사단 제8해병연대)의 투입으로 육군이 주력이 된다. 유럽 전선의 미군과는 다르게 이들은 해병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현지 전장에 특화되었고 해병대의 장비를 대거 채용해서 싸웠고 전쟁 말기엔 육군과 해병대의 차이가 거의 없을정도로 서로가 닮아간다.[10] 솔직히 일본이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을 주장하는 건 소위 말하는 대동아 공영권과 연관된 것이다.[11] 호위항모 포함. 그러나 호위항모를 빼도 정규 항공모함만 20척이 기본적으로 넘어간다. 심지어 일본은 여객선으로 건조 중이던 배를 항모로 개조한 것도 있다. 물론 저 둘은 애초에 항모로 개조할것을 전제로 건조된 배이기는 하지만.[12] 당연히 이 수치에는 진주만 공습 때 파괴되었다가 수리해 복귀시킨 전함들은 제외되어 있다.[13] 그나마 이것 역시 초반에나 우세였지 막바지로 들어갈수록 더 개량되고 우수한 성능의 미군기들이 등장하면서 부터는 종이비행기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한것으로도 모자라 카미카제같은 병크짓으로 숫적인 우세마저 잃었다. 게다가 파일럿의 생존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야하는 상황에 에이스건 초보자건 죄다 카미카제로 꼴아박았다는 것도 한 몫, 여기에 형편없는 공업력과 인력부족으로 인해 보수, 수리뿐 아니라 개량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었다. 물론 종전까지 제로센만 굴린것은 아니라 시덴카이와 같은 신예기가 훌륭한 전과를 세우기도 했다. 다만 안습한 생산량 때문에 대규모로 편성하지도 못했고 대량으로 생산했어도 파일럿을 죄다 날려먹어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겠지만 말이다.[14] 워낙에 철이 모자라서 경북선 등 한반도에서 장사 안 되는 철도를 죄다 뜯어가버리지를 않나, 통영대전고속도로의 모체가 된 대전-삼천포 철도 노선 공사를 중단시키지를 않나, 이런 막장스런 모습도 보여주었다. 전쟁을 벌이면서 무기 등을 제작하기 위한 철이 모자라는 것 자체가 패전확률 90%에 수렴하는, 사람으로 따지면 항암치료 포기하고 모르핀만 계속 공급하는 형상이다.[15] 이베리아 반도의 두 중립국에게서 수입을 해오긴 했는데 독소전쟁에서 소모하는 포탄의 양이 워낙 대규모다 보니 수입물량으로는 도저히 요구량을 맞출 수 없었다.[16] 일부 몰상식한 군 인사들에게만 해당되었다면 괜찮았겠지만 문제는 군 수뇌부가 전부 이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의식있는 몇몇 장성들이나 장교들만이 이를보고 한심하다며 혀를 차는 모양새였고 군 수뇌부의 모든 인물들이 하나같이 두뇌들이 집단가출한 듯한 병신짓을 연거푸 해댔고 그런만큼 일본군의 피해는 엄청나게 커지고 있었다.[17] 여기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배경에서도 드러난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도 언급된다.[18] 배우 와타나베 켄이 연기히였다.[19] 삼대오물 중 하나인 츠지 마사노부의 명언이다.[20] 예를 들어 이오지마 전투의 경우 일본측 지휘관 쿠라야바시 중장이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고 참호전, 지연전을 펼치면서 방어전을 펼친 결과 미군이 일본군과 맞먹을 정도로 병력손상을 입었다. 이런 전투가 계속되었다면 미국이라도 손해를 묵과할 순 없었겠지만 문제는 그나마 이 정도의 상식적인 전술을 가진 지휘관이 일본에 얼마 없었다는 것이다.게다가 전쟁이 승세를 타고 있을때면 모를까 패색이 완연하지던 시기라서 그냥 버티기였다.[21] 이때 무다구치 렌야가 이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지만 않았어도 버마-동남아 전선이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을거라는게 중론이다.[22] 전함의 반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23] 이후 엔터프라이즈가 대활약을 하면서 태평양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전설의 배가 된 화려한 이면에는 진주만 공습 이후 여러 격전을 거치며 손상을 입은 미국의 항공모함들이 수리를 위해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믿을만한 항공모함이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해서 얼마 되질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 그 정도로 미국에서도 격전을 치룬 전역이다.[24] 물론 당시 일본이 하와이를 점령할 능력이 있었냐면 사실 그럴 능력 없었다(...). 당시 요새화된 하와이를 점령하기에 일본군의 능력은 모자랐고 애초에 그럴만한 구체적인 계획도 안 세웠다. 당시 일본 제국은 태평양의 주요 섬들을 점령하고 공격해오는 미군을 격퇴하여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추축국이 다 같이 달려들어도 하와이 점령은 불가능하다[25] 참고로 더 많은 포로가 잡혔던 유럽전선에서 미군 포로 사망자는 1,124명에 불과하다. 이는 독일이 서방측 포로에 한정해서 국제법을 준수하는 합당한 포로대우를 해준 덕분으로 사망자 대부분은 부상 악화, 질병, 아군 폭격에 의한 것으로 전쟁범죄에 의한 사망은 극히 드물다. 대신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를 인간 취급도 안했다.[26] 태평양전쟁내내 미군이 쓰던 징검다리 작전은 꼭 필요한 섬이 아니면 우회해 버리고, 대신 남겨진 섬들을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이 전략이다. 그래서 개구리 뜀뛰기라 불렸다. 맥아더를 위시한 미육군은 이건 미해군만의 창의적인 작전이 아니야!라고 까고 미육군전사에는 개구리 뜀뛰기가 아닌 우회작전이라고 써 놨지만 어쨋든 전후에 대단히 현명한 전략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 많은 요새화된 섬들을 일일이 점령하려고 했다면 손실이 엄청나게 늘어났을 것이기에…그리고 일본군이 단단히 방어하고 있는 섬주위의 섬을 미군이 점령하고 보급로를 끊어버리니 일본군의 요새작전은 자기들이 알아서 몰락했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단점도 존재한다. 우회한 지점은 충분한 전력을 남겨 지속적인 타격을 해야 하는 것. 이는 대량의 물자가 소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전략의 기초마저 씹어 먹는 이 짓은 보급로가 바다였고 강력한 해군으로 제해권을 먹은 미군이니까 할 수 있었던 작전이다.[27] 70%까지 잡는 견해도 소수 있으나 러시아측 학자들도 대부분 57%이하로 본다. 70%까지 잡는 경우는 포로로 잡혔던 사람중 독일의 항복 이후 소련 수용소로 갔다가 죽은 사람도 상당수가 포함되어서 나온 수치라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그것을 감안해도 일본보다 높은 수치인건 맞다.[28] 참고로 이건 독일측 보고서에서 나온 수치인데 이런 범죄행위를 가해자가 고의로 부풀릴 가능성이 없다는걸 생각하면 실제로도 저정도가 벌여졌다고 보는게 맞다.범죄로 인식을 했다면 말이지만[29] 어느 정도 충격이었는지 하면, 치치지마에서 저지른 일 때문에 교도관을 맡고 있던 미 육군 헌병들에게는 물론, 같이 수감된 다른 일본군 장군들한테도 얻어터졌을 정도다.[30] 이 섬은 호주군이 섬의 중앙 부분만 차지한 채 대치 상태에서 종전을 맞았다.[31] 독일 국방군은 서부전선에서는 예상 외로 '신사적으로' 전쟁에 임했다.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는 독일군과 연합군이 서로 신사협정을 맺고 전투를 중지하기도 했다.실제로 당시 많은 미군 부상병이 독일군 의무병 덕에 목숨을 건졌다. 이러한 독일군 의외의 신사성(?)은 자신들이 믿고 숭배하는 우생학에 기인한다. 당시 독일은 중부유럽의 게르만인이 가장 위대한 인종이라고 여겼고, 그 피가 섞인 북유럽 노르만계열역시 우수한 인종으로 여겼으며, 상당한 번영을 누리고 자신들과 어느정도 연관성이있는 프랑스의 갈리아+게르만 인종도 상당히 우수한 인종으로 여겼으나, 척박한 극동유럽의 슬라브인은 열등하고 미개한 인종으로서 인간 이하의 그 무언가로 여겼다. 나치의 동유럽 학살은 이에 기인한다. 하지만 미국은 뿌리를 찾으면 영국의 게르만에서 왔고, 오지인 신대륙의 나라임에도 상당히 발전한 나라였기에 나름 신사적으로 대한 것이다.[32] 이렇게 하면 중대장, 대대장 등 상급 지휘관이 해당 적군의 항복을 직접 확인하기 때문에 개별 병사들이 "밥 먹으려고 손 씻었대"라면서 포로를 쏴죽이는 짓을 할 수가 없다.[33] 일본군 군부의 입장에서는 이래서 야스쿠니 신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더 자세히는 싸우다 죽으면 야스쿠니에 가서 영령이 되지만, 항복하면 그는 죽고 가족은 검열삭제 당한다는 식으로 세뇌를 지속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일본군 군가중 하나인 동기의 벚꽃(同期の桜: 도키노 사쿠라)만 봐도 알 수 있다.[34] 이런 동네에서 원주민과 척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일본군이 워낙 멍청했기에 미군이 적당한 원조+일본군으로부터 보호만 약속해도 원주민의 마음을 살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35] 과달카날 전투 초기 미해병대는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비행장을 짓고 일본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는 등 정신력으로 버텼다.[36] 이는 전후에 참전용사가 사망한 이후 유산 정리를 하던 자손들이 우연히 이 '기념품'을 발견하고선 기절초풍해서 경찰을 부르는 촌극을 유발하기도 했다.[37] 순수 일본인 약 7천만과 나머지 조선인, 대만인, 만주, 류큐인 합쳐서 나왔다. 웃긴 건 식민지인들은 같은 일본인 취급도 안해주고 온갖 차별과 약탈을 일삼았으면서 필요한 때만 일본인으로 끼워버려서 같이 죽자고 호소하는 꼴이다.[38] 이 때 홀시 제독 휘하의 항공모함 중 하나가 후에 한 척의 배가 역사를 바꾸는 기적을 만들어낸 USS 엔터프라이즈다.[39] 그것도 그럴게 미군은 일본본토로의 진격을 사실상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48년까지 내다본것 같다.[40] 대체로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 제독의 태평양 전쟁사 및 육군/해군/해병대 각군의 공식 공간전사가 기본 역본이 되고, 여기에 이후 학계의 최신 연구를 반영하여 기술한다. 2005년 출간된 "Shattered Sword"의 내용이 대거 반영된 미드웨이 해전 연재가 대표적인 예.[41] 그 이전부터 각종 밀덕 사이트에 기고되기는 했다.[42] 5상륙군단장, 태평양함대해병단장(FMFPAC)을 역임한 현대 상륙작전의 아버지. 사이판 전투에서 27보병사단장 랄프 스미스 육군소장을 보직해임한 소위 Smith vs Smith 사건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