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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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북한의 국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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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이름

직책

임기

비고

1대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1948년 9월 9일 ~ 1957년 9월 20일

2대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1957년 9월 20일 ~ 1972년 12월 28일

1962년 재선
1967년 3선

3대

김일성

국가주석

1972년 12월 28일 ~ 1994년 7월 8일

1977년 재선
1982년 3선
1986년 4선
1990년 5선

권한대행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

1994년 7월 8일 ~ 1998년 9월 5일

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 권한대행

4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1998년 9월 5일 ~ 2009년 4월 9일

상임위원회 위원장직은 현직

5대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

2009년 4월 9일 ~ 2011년 12월 17일

권한대행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2011년 12월 18일 ~ 2012년 4월 12일

상임위원회 위원장직은 현직

6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2012년 4월 13일 ~ 2016년 6월 29일

직책 폐지

국무위원회 위원장

2016년 6월 29일 ~ 현직

파일:Kim Il-Sung 1950.png

파일:Kim Il-Sung 1994.png

1950년

1983년[1]

김일성
金日成, Kim Il-Sung

본명

김성주(金成柱 또는 金聖柱)

출생

1912년 4월 15일, 일본령 조선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동 칠골[2]

사망

1994년 7월 8일, 북한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특각

국적

일제강점기 조선 파일:일본 국기.png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소련 파일:소련 국기.png북한 파일:북한 국기.png

신체

175cm|체중 90kg | AB형[3]

직업

군인, 정치인

정당

중국공산당 (1931년 ~ 1946년)
조선로동당 (1946년 ~ 1994년)

경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
(1948년 9월 9일 ~ 1972년 12월 28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49년 6월 30일 ~ 1966년 10월 12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50년 7월 ~ 1991년 12월 24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6년 10월 12일 ~ 1994년 7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
(1972년 12월 28일 ~ 1994년 7월 8일)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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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종교

개신교무종교(무신론)[4]

학력

지린 육문중학교 (중퇴)

소속

동북항일연군 (1936년 ~ 1941년)
소련군 (1942년 ~ 1945년)
조선인민군 (1950년 ~ 1994년)

계급

대위 (소련군)
대원수 (조선인민군)

가족

부모

김형직 (1894년 - 1926년), 강반석 (1892년 - 1932년)

형제

남동생 김철주 (1916년 - 1935년), 남동생 김영주 (1920년)

배우자

일처 한성희 (1914년 - 미상), 이처 김정숙 (1917년 - 1949년), 삼처 김성애 (1924년 - 2014년?)

자녀

장남 김정일 (1941년 - 2011년), 차남 김만일 (1944년 - 1947년), 장녀 김경희 (1946년), 삼남 김평일 (1954년), 사남 김영일 (1955년 - 2000년), 오남/사생아 김현 (1971년), 차녀/사생아 김백연 (1987년)


1. 개요2. 생애3. 능력
3.1. 고학력 무식쟁이3.2. 무능한 전쟁광3.3. 무자비한 숙청광
4. 음란성5. 외모6. 김일성 가짜설7. 1986년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8. 김일성 암살설9. 족보 집착10. 이야깃거리11. 가족 관계12. 어록13. 창작물1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북한군인, 그리고 독재자이자 학살자, 전쟁범죄인(전범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 국가주석, 조선인민군 공화국 대원수를 지냈고, 사후에는 정권 주도 하에 '영생불멸의 위대한 영도자'로 숭배되고 있다.

1912년 평양 출생. 평양과 중국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내다, 중학교 재학 중이던 1920년대 말부터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했다. 1930년대에는 만주 지역 무장항일투쟁에 참여하였다가 1940년 소련으로 월경해 소련군에 소속되었고, 1945년 소련군과 함께 국내에 진입하였다. 광복 이후 열렬한 지지 속에 북한의 최고권력자로 등극했으나, 6.25 전쟁을 일으켜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고 다수의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등 전쟁범죄를 일으켰으며 8월 종파사건, 갑산파 숙청 등을 통해서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여 1972년에 마침내 유일집권 체제를 완성했다.

전후 중화학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통해 1950~60년대에는 남한보다 빠른 경제성장을 거두며 성공적인 전후복구를 이루었지만, 애초 계획경제의 한계, 허접한 경공업 기반, 과도한 국방비 등등의 요소가 맞물려 차츰 남한에 비해 경제성장이 밀리게 되었고, 소련중국대립 와중에 독자노선병영국가화를 추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 동떨어진 길로 빠져들면서 자연스레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란 목표도 허울좋은 집권 명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198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과 동구권 국가들의 연쇄 붕괴에도 꿋꿋이 정권을 유지했으나, 차츰 정권 유지가 쉽지 않다는 현실 인식 하에 미국대한민국 등 국가들과 대화 통로를 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던 1994년 7월 7일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사용될 묘향산 특각을 둘러보다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사망 직후 김씨일가 신격화 차원에서 그의 시체는 방부처리되어 금수산태양궁전박제되고 그의 장남 김정일은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 등으로 떠받들며 국가주석직을 영구결번 시켰다. 쥐꼬리만한 양심은 있었는지 "인민들에게 고깃국이팝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말을 40여년간의 집권기간 동안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 약속이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그의 사후 북한은 아예 대다수의 국민이 굶주림과 아사(餓死) 위기에 노출된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후반기에 목 뒤에 붙은 때문에 '혹부리 영감' 등으로 불렀으며,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둥과 더불어 6.25 전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만들어 분단 고착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장본인으로서 '악의 대마왕'급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2.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일성/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능력 [편집]

3.1. 고학력 무식쟁이[편집]

김일성은 그 당시로는 제법 고학력인 중졸 이었지만, 무식했으며 능력이 부족했다. 소련을 등에 업고 공산주의 국가를 이끌기는 했지만, 이런 그의 "무식함"은 비슷하게 나름대로 가방끈이 길었던 마오쩌둥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는 희대의 맑알못이었다고 본다. 북한이 괜히 공산주의 간판조차 포기한 세습 왕정 집단[5]이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오쩌둥은 김부자의 세습에 상당히 부정적이었으며 자신의 자녀들이 아버지 후광만으로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싫어해 자녀들에게 정치판이나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제약을 걸었고 마오의 자녀들은 정치와 전혀 상관없는 분약에서 직업을 가졌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펼친 수차례의 초공을 격퇴해냈으며 불가능할 것 같았던 대장정을 성공하고 끝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였다. 사실 집권 이후에 병크가 워낙 커서 그렇지, 지도자로서 가져야 할 사람 보는 눈은 가졌으며, 전략가·전술가로서도 김일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특히 게릴라전의 교리는 거의 마오쩌둥이 새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리고 중국은 농민의 나라이므로 혁명은 농민들의 지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마오이즘"을 기반으로 혁명을 성공시켰다. 실제로 대부분의 동양권의 공산 국가에서는 소련처럼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게 아니라, 농민들, 특히 소작농들의 지지로 공산혁명을 성공시켰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중국베트남이다.

김일성의 이 무식함을 증명하는 일례가 바로 한국전쟁이다. 김일성은 인천상륙작전으로 군세를 잃고 평양마저 함락 당한 끝에 강계까지 도망쳤는데 만약 펑더화이쑹스룬 등이 이끄는 중공군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완벽하게 망할 뻔했다.[6] 사실 낙동강까지 밀어붙였던 전쟁 초반에도 소련의 지원 병력과 전쟁을 예측하지 못하고 대비를 못한 한국의 병크 등이 겹친 덕에 운좋게 이겼을 뿐이다. 김일성은 점령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현지인의 민심을 얻는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 모르고 있었으며, 그 결과 북한군은 점령지 주민들이 버젓이 자신들을 환영해 마지않았는데도 점령 지역에서 학살과 전쟁 범죄를 자행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음으로써 있던 민심마저 잃어버렸다. 이에 스탈린은 "김일성 동무는 그런 멍청한 짓을 금지시키지 않고 뭐하고 있어?"라고 화를 냈고 마오쩌둥조차 어리석다고 김일성을 비판했다.[7] 그런 이유로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의 실체를 깨닫게 되자 죄다 김일성을 버리고 흥남으로 몰려들어서는 흥남철수를 통해 서로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발악했다.

게다가 김일성의 정책은 도무지 공산주의라고는 볼 수 없는 요소를 많이 포함하였다. 순수하고 고결한 민족혈통을 강조한다거나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 등으로 신분제 사회를 만들어 놓거나 지나친 반외세 경향, 족벌 세습의 당연시 등이 그것이다. 중국의 경우 군대마저도 공산주의의 평등이념에 극단적으로 충실하려고 군대에 계급을 없애고 직책으로 지휘하는 시스템을 운용해봤으나 이러니까 일반 병력들이 최상위 지휘관인 쑹스룬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일이 벌어졌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1955년이 되어서야 계급을 도입했다. 반면 북한은 김일성 1인 독재체제 수립 이래 신분제 국가였으며 오직 핵심계층만 평양에 들어갈 수 있다.

그의 부하들이 주체사상이라는, 마르크스레닌이 들었다가는 피가 거꾸로 솟을 만한 사이비 공산주의 사상,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과는 전혀 무관한 근본도 없는 동인 설정이자 사적 소유가 철폐되고 경제가 국유화된 노동자 국가[8]라는 정치 · 경제 체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히려 그런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통치 이념을 만든 것도 그가 공산주의에 워낙 무지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과거 1990년대 주사파가 불법월북을 통해 김일성을 만나 주체사상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했지만, 김일성 본인은 주체사상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남한의 주사파가 설파하는 주체사상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주체사상 자체가 (여느 설정이 그렇듯이)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끌어다 붙여서 만든 결과 모순과 왜곡으로 가득찬 설정인 데다, 애당초 김일성 본인이 공산주의 자체에 관심도 없었고 별다른 지식도 갖고 있지 못했던 것 때문이 크다.

다만 권모술수 하나만은 천재적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 덕분에 한국전쟁이 끝난 즉시 박헌영, 김무정, 최창익 등 수많은 경쟁자들을 숙청하고 최용건을 바지사장으로 만들어 온갖 권력을 휘둘러댈 수 있었다. 그러니까 군인으로서는 무능한 정치군인에 불과했어도 정치 면으로는 폐급 정치꾼일망정 권력다툼에 꽤 수완이 있었던 셈이다. 물론 그 수완을 주로 사리사욕 추구에 써먹긴 했지만...

사실 민족주의자이기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주 나쁜 의미로. 적어도 반미, 반일 등에 대해서는 일관된 개념이 있었고, 소련, 중국에 대해서도 등거리외교를 펼치며 나름 독자성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민족주의는 스킨헤드탈레반이 그랬던 것처럼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개념을 결여한 것이었기에 최악의 무식한 폭력으로 치달았고, 수많은 희생자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주체사상은 지적으로 조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전체주의+군국주의+파시즘 등등 인류 역사에서 등장한 모든 사상들 가운데 나쁜 것들만 다 뽑아내 섞어놓은 일개 개똥철학이자 그 자신과 후손들을 신으로 숭배하는 극악무도한 사이비 종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2. 무능한 전쟁광[편집]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사탕연필대신 총알과 총을 쥐어주어야 한다. - 김일성

위의 말은 김일성이 강계 군수산업공장을 방문하면서 직접 한 말이다. 이때 김일성은 간부들에게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어야 하냐? 아니면 총알을 주어야 하냐?" 라고 묻자 의견이 반반씩 갈렸는데 김일성은 위의 말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간부들을 모두 반동으로 숙청시켰다는 말이 있다.

반면, 대한민국은 사탕으로 비유 되는 안락한 생활환경과 연필로 비유 되는 국민 교육이 장기적으로 국력 신장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하였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전후부터 상당한 양의 국고를 투자해왔다[9] . 이는 6.25 전쟁 직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이 당대 비슷한 수준의 개발도상국들과는 달리, 지금의 위상을 얻게 된 비결로 국제 개발 전문가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김일성의 이런 발언은 대한민국이 추구한 정책의 안티테제로써 도대체 왜 대한민국과 북한이 현재의 양 극단에 이르게 된지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실제로 북한은 지금도 대한민국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때부터 아이들에게 전쟁교육을 시켜 유사시 소년병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맹활약한 전설적인 아프가니스탄 반군 게릴라 지도자로 조국을 구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 역시 어린이들까지 세뇌시켜 소위 자신들의 '성전'을 위한 도구로 써먹으려 하는 탈레반의 막장 행각을 비판하며 "여자와 아이를 죽이는 것이 어찌 지하드인가?"라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 전설적인 돌격소총 AK-47AK-74를 개발하며 유명해진 무기 개발자이자 소련의 군인이었던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역시 일본의 잡지사 Hobby Japan사의 <피크세루☆마리탄 - 소녀가 군인으로 묘사>의 홍보를 위해 그에게 사인을 받으러 온 일본인 편집자에게 '"아이에게 을 쥐어줄 참인가!"라고 일갈한 바 있다. 이만큼 소년병 제도는 그야말로 백해무익하고 되려 국가와 사회를 막장으로 만들 뿐이라는 것은 군사 분야에 대해 조금만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알 법한 부분인데도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김일성이 독재와 적화통일을 위해 얼마나 전쟁에 미쳐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단 교육제도를 통해 성장한 아이들은 평범한 단순 노동자에서 부터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들이 양성되고 실제로 한국도 그런 식으로 나라가 발전시켜왔기에 지나친 교육열로 인하여 부작용이 생겼고 교육제도에 대한 투자와 관심이 많다. 이에 반에 북한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으며 그나마 되고 있는 것도 국제적인 고립과 우상화교육으로 북한사람들은 기본적인 상식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작 김일성의 군사적 능력은 매우 형편없었다. 애초에 기본적인 군사적 식견이라도 있었다면 저 위의 발언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김일성이 직접 지휘해서 승리한 전투는 도저히 지려야 질 수 없는 압도적인 물량 차가 났던 전투인 보천보 전투[10] 한국전쟁 중의 오산 전투 정도였다.

그리고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으로 UN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북한군에게 총 후퇴 명령을 하달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 고 라디오 방송을 내보낸 뒤 평양을 떠나 덕천으로 피난했고 전쟁 시작할 때의 모 씨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건 기분탓이 아니다한국군과 UN군이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자, 피신 장소였던 덕천을 떠나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한다. 그런 뒤에 강계의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남조선 해방을 호언장담했던 그는 스탈린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림은이 당시 김일성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얘기를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일성은 완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으며 시베리아 유배형을 면치 못하리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다고 한다[출처].

이 때문에 6.25 전쟁 중 자꾸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김일성에게 펑더화이"당신은 요행만 믿고 전쟁을 일으켰나!"라고 비난하였고 그래도 정신 못 차린 김일성은 유엔군한국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중공군이 주도하던 전세가 다시 밀리게 되자 북한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 상의도 없이 멋대로 북한군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유엔군이 중공군을 기습하여 중공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고, 이 때문에 펑더화이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홍콩 유력지 "명보"에 따르면 분노한 펑더화이가 김일성의 뺨을 때렸고 나이스샷 그 탓에 김일성이 일주일 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펑더화이는 북한군이 벌이는 대대적인 양민학살과 조직적인 약탈, 그리고 그로 인한 한국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김일성을 불신하였다고 한다. 비록 삼대기율 팔항주의는 허구로 밝혀졌고 중공군도 잔혹하기는 매한가지였다지만 적어도 중공군북한군만큼 막나가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시비만 걸어놓고 정작 진짜 싸움은 펑더화이쑹스룬에게 죄다 떠넘겼을 뿐이었다. 즉,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한 것이 없다. 전쟁 초반의 선전은 6사단장 방호산 등의 활약과 전쟁 경험이 많았던 조선족 부대인 조선의용군의 도움으로 달성한 것이고, 후반의 반격은 펑더화이와 쑹스룬이 지휘한 중공군이 주도한 것이다.

3.3. 무자비한 숙청광[편집]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은 6.25 전쟁 도중에도 진행했다. 전쟁 초기 김일성은 잦은 전술적 실패와 자신의 오류를 부하에게 전가하면서 처형을 명령하거나 강등시키는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의 잘못을 상대에게 뒤집어 씌웠다. 1950년 6월 28일 인민군 제3, 4 사단은 남진하여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제1사단장 최광의 진군이 문제가 됐다. 전쟁이 시작되자 제1사단은 고랑포를 거쳐 임진강에 도착했으나 국군 제1사단의 조직적인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진군이 타 사단에 비해 지연됐다. 당시 고랑포임진강문산서울로 진군 경로를 하달한 이는 전쟁계획을 세우고 지침을 내렸던 최고사령관은 김일성이었다. 임진강에 도달한 제1사단장 최광은 예하 연대를 장악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김일성은 전선사령관 김책에게 최광을 체포하여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김일성은 제1사단의 부진한 진격에 대단히 신경질적이었으며 자신의 계획이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일절 반성이 없었다.

김일성의 작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던 사례는 북한군 제2군단의 수원 점령 실패에서도 나타났다. 북한군의 제1차 작전에서 6월 28일까지 서울을 점령한다는 작전임무는 제1군단에 의해 성공적으로 달성됐다. 그러나 제2군단이 같은 날까지 수원을 점령한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6월 28일까지 한국군의 주력을 수원에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김일성의 작전목표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김일성은 수원점령에 실패한 인민군 제2군단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문책의 칼날을 들이댔다. 제2군단장이던 소장 김광협을 제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켰고, 참모장이던 최인은 보직 해임시켰다. 예하의 제2사단장과 제12사단장도 보직 해임과 동시에 대좌로 강등시키는 치욕적인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소장이던 최현은 제2사단장으로 임명됐다.

김일성의 책임전가성 문책은 전쟁 후에 더 잔인하게 나타났다. 전 조선노동당 비서였던 림은(林隱)에 따르면, 6.25 전쟁에서의 무참한 패배는 김일성으로 하여금 '피의 숙청'을 단행케 한 계기가 됐다. 자신의 전략이 없음으로 인해 패배한 전쟁의 책임을 군사령관에게 전가하고 개인 독재의 길을 여는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김일성의 숙청은 그 잔인함에 있어 이오시프 스탈린을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림은 자신이 희생의 직전까지 갔다. 그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장군 중 95%에 해당하는 70여 명이 학살 내지 처형되고 당·정·군의 간부급 20만 명이 숙청됐다.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된 사람들을 합하면 희생자 수는 무려 수백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출처]

또한 김일성은 항상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무정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에 숙청해버렸다. 김일성이 김무정을 밀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였다. 김무정이 평양 방어는 무리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억지로 평양 방어를 떠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일성은 평양이 함락당하자 방어사령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서 김무정을 실각시켰다.

6.25 전쟁에 대한 피해와 책임을 자신이 지게 될까 두려웠던 김일성은 자신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상으로 떠오른게 박헌영남로당파였다. 김일성 정권은 한참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에 이미 박헌영을 체포하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남로당파 간부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결국 박헌영은 6.25 전쟁 책임론에 휩싸여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3월에 체포당한다. 당시 체포당한 이유는 '리승엽이 미군과 비밀리에 내통한 간첩의혹'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리승엽은 6.25 전쟁 때 인민군 서울점령 치하 때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휴전 직후 미국 스파이, 반당종파분자 등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당에서 제명당하고 직위에서 해임당했다. 1955년 12월 15일, 박헌영은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고 결국 사형 판결을 받았다. 재판 직후 증인으로 나와있던 리강국 등 주요 남로당계 간부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북한에서 고위직 지내다 김일성으로부터 신변위협을 느껴 소련으로 망명한 박길룡에 따르면, 박헌영은 7월 19일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세워진 꼭두각시 답게 김일성 역시 스탈린식 개인숭배를 자신에게도 적용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후원자였던 스탈린이 죽고, 흐루시쇼프에 의해 스탈린의 신격화가 중지되었다. 김일성이 동유럽 순방을 위하여 북한을 비운 사이 연안파소련파는 소련의 지지 아래 연합하여 김일성 실각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연합한다.

그 연합 전면에 나선 서휘, 윤공흠, 리필규는 출당 조치되고 최창익박창옥의 당직은 박탈되었다. 동시에 최창익과 박창옥은 내각부수상직 등의 정부 직위도 박탈되었다. 반대파의 완전한 제거를 위하여 '반종파투쟁'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김두봉, 오기섭, 류축운 등이 현직에서 해임되는 등 1957년 여름까지 200여 명의 반대파 인사들이 '종파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종파주의자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두봉을 국가 주석의 자리에서 내쫓는 등 실각시킨다. 김일성 반대파의 대표나 다름없었던 최창익은 완전히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어 일생을 마쳤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이 1956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연안파와 소련파가 숙청되었다.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도 8월 종파 사건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 한다. 8월 종파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수의 반대파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정치범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지속적으로 그 규모가 확대된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최후의 분파였던 갑산파는 1967년 경제건설 노선에서 김일성과 이견을 보이다가 결국 숙청되고 만다. 대표적인 예가 김일성의 심복이었던 김광협이다. 이러한 숙청은 1970년까지 이어졌다.

4. 음란성[편집]

대략 1975년경에 김정일김일성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위해서 기쁨조를 만들어서 바쳤다.

기쁨조 안에 행복조, 만족조, 가무조가 있는데, 그중에서 만족조는 성적으로 만족을 주는 조이다. 이것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기쁨조를 하다가 퇴직한 사람은 고급 아파트에 들어가게 해준다. 그러나 기쁨조를 나올 때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못하게 각서를 쓰게 한다고 한다.

김일성의 경호원을 1년 6개월 했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기쁨조는 1975년도에 처음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인민국협조단에서 18명 정도를 뽑았는데, 실력보다는 예쁘기만 했으면 됐다고 한다. 북한에는 음팔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이 스트립쇼를 하면 김일성이 좋아했다고 한다.

한편,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에게만 여자를 안겨주기에는 부러웠는지 예술단에서 예쁜 사람들만 뽑아 김정일 주위를 빙빙 돌게 만들었다고 한다. 즉, 김일성도 살아있을 때 기쁨조를 신명하게 즐겼다는 이야기이다.

5. 외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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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붉은 군대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했을 당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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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의 김일성과 아내 김정숙. 앞의 아이는 3살 때의 김정일. 체형은 부계지만 이목구비는 모계 유전자가 강한 것 같다.

키가 무려 193cm나 되는 사람이었다는 소문도 있는데 탈북자들이 이 설을 신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2017년 시점에서 추정되는 실제 키는 177cm다. 그마저도 말년에는 173cm까지 줄었다. 177cm면 2017년 한국 기준으로도 평균 이상이며, 영양이 부족한 북한 기준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장신이다. 게다가 덩치도 제법 되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김일성이 청년기였던 1930년대 한반도의 20대 남성 평균 신장이 163~164cm이였음을 감안[13], 현재 한국 평균키로 환산하면 187~188cm이 된다. 1970년대에 김일성과 티토가 만난 사진이 있었는데 티토와 약간의 차이가 날 정도. 티토의 추청키는 대략 172cm정도.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 같은 덕스런 얼굴이 북한 기준으론 좋은 외모. 사실 장군님 킹왕짱, 희망 어쩌고 세뇌되어 자라니 미학이 그렇게 형성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아들 김정일보다는 김일성이 외모가 좋다. 게다가 본인은 이러한 외모에 자신이 있었는지 아니면 카리스마를 과시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항상 전면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고, 이는 그의 아들 김정일이 결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정치기반 확립과 숙청을 감행한 것과는 꽤나 대조적이다. 그리고 김정일은 언제나 인민복 차림인데 김일성은 정장을 좋아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물론 이상의 사항은 어디까지나 1970년대 이후 투실투실 살이 찌기 전의 이야기.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이 내외적으로 김일성을 닮았다고 한다. 1946년 북조선로동당 당수 취임 즈음 때까진 저 날씬한 모습이 유지됐지만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될 때 투실투실해진 것을 보면 2년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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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에 마지막으로 중국 방문을 했을 때 촬영된 사진들. 38년 만에 덩샤오핑과 공식 석상에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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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카터와 협상하던 중 뱃놀이를 즐기고 있는 김일성 ,그리고 정확히 14일 후 김일성은 사망했다.
지옥불에 들어가기전 마지막으로 뱃놀이를 즐긴것같다. 인지용하는 부분이고욥
왠지 대두가 됐다.

6. 김일성 가짜설[편집]

해당 문서 참조.

7. 1986년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편집]

해당 문서 참고.

8. 김일성 암살설[편집]

김정일이 김일성을 암살했다는 가설.

이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 즉 남북 간 정상회담이 최초로 성사될 뻔 했는데,[14] 겨우 보름을 앞두고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다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으로 성사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급작스러운 사망은 아직까지도 떠도는 김정일에 의한 김일성 독살설의 배경이 된다. 이미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을 원치않아 아버지 김일성을 독살했다는 설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 일을 두고 "내 기에 눌려 죽은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국가 원수가 이런 농을 칠 정도로 김일성 사망 전후 남북 간 분위기가 꽤 부드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부드러워도 그런 농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김일성의 급사 후에 조문에 대한 논쟁이 일었고, 결국 엄청난 논쟁끝에 정부는 조문 거부 결정을 내렸다. 게다가 김영삼 대통령이 어떠한 조의 표현도 국가보안법으로 위반해 엄중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음에도 당시 남총련 산하 전남대 총학이 김일성 분향소를 차렸다가 경찰에 적발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여기에 PD계열들이 대자보를 통해서 김일성 분향소를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하면서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도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 외에도 PC통신 하이텔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약칭 전대기련) 게시판에서 한 회원이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는 게시글을 올리자 전대기련 대표 김모 씨가 구속된 사례도 있었다. 1994년 주사파 파동도 논란이 커지는 데 한몫했다.

독살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원체 떠받들었고 당시 악화되는 경제상황을 왜곡해서 보고했기 때문에, 김일성은 북한의 경제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어가고 있었음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일례로 심화조 사건 항목에서도 언급했지만 김정일이 전권을 휘둘러 편 정책 등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 여파가 커져 진상을 보고 받은 김일성이 진노해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지시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러다가 1994년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왕이면 김 대통령이 기차를 타고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경의선 철도 보수 작업을 언제까지 할 수 있냐고 철도상에게 물었는데, 철도상은 대답을 못 하고 쭈뼛거리기만 했다.

이에 김일성이 담배갑으로 책상을 툭툭 치면서 "아니 배짱 좋던 사람이 왜 그래? 김영삼이가 오는 게 마음에 안 들어?"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이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는데, 철도상이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 폭탄 발언을 하면서 삽시간에 공기가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아니, 자금이라든가 물자가 부족한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야?"라고 반문했고, 철도상은 마침내 배급이 중단된 지 3개월이 지나 동원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사실 누가 됐든 간에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게 맞는다. 자금 및 물자를 조달하는 건 사정에 따라 유동적이지만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 건 정말로 사람이 없는 등의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 애초에 북한에서 자금이나 물자가 부족한 건 그냥 늘 있는 일 아냐?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는 게 함정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김일성은 즉시 김정일에게 전화해서 "이 김일성이가 이팝과 고깃국을 약속하며 정권을 잡았는데 배급조차 못 준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 그 따위로 일할 거면 당장 당 조직비서를 그만두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래도 김일성은 나름 고생해서 건국해서 그런지, 국가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긴 했다. 결과가 시망이라 그렇지(…). 『평양은 서울을 꿈꾼다』를 보면 김일성은 매일 아침 일어나서 공장이나 발전소의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는 "오늘 공장이 잘 돌아가는구만" 하면서 기분이 최고조에 이르는 과정을 거쳤는데, 어느 날 흰 연기만 뽈뽈나는 거 보고는 기분이 나빠서 빨리 발전소를 돌리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계속 차질이 빚어지자 이유가 석탄공급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이유를 파악하고자 개인비서를 노동자로 위장시켜서 탄광에 보냈다. 거기서 비서가 배급이 안 나와서 광산이 정지상태라는 것을 알고는 그대로 직통보고, 당연히 김일성은 노발대발했고 업무담당자들은 발전소를 돌릴 석탄을 구하느라 죽어나갔다고.

김일성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유가 철도상 때문임을 파악한 김정일은, 관련 장관을 호출하여 마구 혼을 냈고 후술할 "통일을 주장하는 자들은 다 반동"이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 직후의 행동이 의미심장하다. 이미 묘향산 초대소에 있던 김일성에게 "의료진들이 매우 과로하여 쉬게 해야겠다"고 진언하여 승낙을 받아 의료진이 잠시 철수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때 김일성은 심장 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

이것은 북한에서 떠도는 상당한 괴담이고, 월간 신동아에서는 탈북자들의 증언 등을 조합하여 김정일의 고의적 의료진 철수와 김일성 방치로 결론을 내리고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실제로 김일성 사망 이후 김일성 경호를 담당하던 호위총국 제1국의 요원이 김정일을 향해 총질을 했다는 괴담, 호위총국이 숙청 재개편된 데에는 김일성 암살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한 김정일이 주역할을 했다는 괴담도 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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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0월의 김일성과 김정일. 지 애비 꼬라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실제로 말년에는 김정일의 권력이 매우 강하여 김일성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는 증언이 적지 않기는 했다. 심지어 말기에는 김일성이 김정일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바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을 어느정도 유지하려면 통일 문제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계산을 해 남북 고위급 회담 등을 전격 추진하는가 하면, 김달현 부총리를 비롯한 개혁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을 직접 서울로 보내기까지 했는데, 당시 김정일은 "통일, 통일하는 것들은 다 노망난 것들이야!"라는 망언을 하는가 하면[15], 김일성이 주재한 회의에서 김달현이 "더 이상 공산주의로는 안 됩니다. 경제개방을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자 김정일이 화를 내며 제지하다가 김일성이 "일단 얘기나 들어보자."라고 말한 일화까지 있었다. 게다가 김일성이 공교롭게도 남북정상회담 바로 직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더욱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16]

이 때문에 이후 김정일은 후계자를 논하는 것 자체를 반역이라 간주하고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김정일을 너무 일찍 후계자로 내세우는 바람에 권력을 모두 빼앗기다시피 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전철을 밟기 싫었다는 설. 이 때문에 김정은의 후계체계는 빠르고 급작스럽게 진행되었고, 이것 역시 김정일이 권력 빼앗기는 것을 매우 두려워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차피 1980년대, 1990년대 들어 7~80대에 접어든 김일성이 죽는다고 해서 딱히 이상할 리는 없었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 남북 고위급 회담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김일성의 건강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었다. 특히 황장엽 비서의 증언에 따르면, 이미 김일성은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하는,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노인이었으며, 그해 5월에도 눈 수술을 받아 휴식이 필요했는데 지미 카터 전 대통령를 만나면서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 황 비서는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에서 한국 주민들이 항일영웅을 만세로 맞이할 것이고, 김일성이 통일의 주도자가 될 것인 양 아첨보고를 올리는 바람에 크게 들뜬 김일성이 무리하게 정상회담을 진두 지휘하다 과로가 겹쳐 사망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17]

하지만 2010년대에 이르러서 김정일 암살설이 정말 신빙성이 커보이는 이유는 바로 김정일의 후임인 김정은이 자기 고모부이자 김정일의 매제이자 김일성의 사위인 장성택을 정말로, 그것도 아예 대놓고 살해했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김정일의 아들이 이런 패륜을 보여줬으니,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를 암살해도 정말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사실처럼 보여지는 근거인 것이다.

이러한 김일성 암살설이 나도는 배경에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김정일 통치기의 북한에 실망한 주민들이 김일성 시절에는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았으니 그 시기를 낙원 시절로 여기는 심리가 생겼고, 이렇게 상황이 악화된 데에는 김정일 탓으로 생각하다 보니, 김정일에 대한 분노가 왜곡된 형태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명확한 증거를 내놓을 수 없는 그냥 떡밥일 뿐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파일:충격 북한 패륜사건[이만갑].mp4_20160428_162347.156.jpg
그 후 김일성이 사망한 장소인 특각을 철거 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김일성이 잠시 앉았다는 벤치를 사적지라고 보존하는데 그가 있었던 별장을 치워버렸다는 건 암살설에 힘을 더해주고 있다. 당장 김일성의 생가인 만경대도 보존되어 있는 판국에 김일성의 특각이 철거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뭐 많이 옅어지긴 했겠지만 북한 역사에서 김일성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여전히 중요한 편에 속한다.

이 사건의 진실은 아마 통일 이후에도 밝히기 어려울지 모른다.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을 김정일도 이미 죽었다.

9. 족보 집착[편집]

묘하게 자신의 성씨와 조상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전주 김씨 33세손(시조로부터 32대손)으로서 6.25전쟁 중에 전주 김씨 족보를 구하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했다. 한 일본 기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전주 김씨 족보와 조상의 영정을 모셔놓고 향을 피우는 방을 따로 마련해 놓은 걸 봤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또한 이 이야기 때문에 전주에서는 전주 김씨의 시조 김태서의 묘가 전주 모악산에 있기 때문에 북한과 전쟁이 나도 전주는 안전할 거라는 이야기를 우스개소리로 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6.25 전쟁 개전 초기(9월)에 전주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본가인 전주 김씨 시조는 사실 경주 김씨의 일파[18]인 김태서로서 그 후손 전주 김씨는 몽골 침입 당시 경주를 떠나 이주한 방계이며, 한동안 전주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주했다.[19] 즉 근원적인 조상은 신라쪽으로 닿는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실제로 전주 김씨들은 김일성과 종친이라는 이유로 분단 이후 상당한 세월을 눈치 보면서 살았어야만 했다. 실향민 + 전주 김씨 콤보인 사람들은 더더욱 사회적으로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으며 이런 이유로 모국을 떠난 이민 1세대들도 있다. 즉 경주시야말로 진짜 그의 뿌리인 셈. 참고로 일반 북한 주민들은 계속된 국가의 통제로 인해 지금은 자신의 본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10. 이야깃거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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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에는 크고 아름다운 혹이 있었으며, 혹부리 영감 이 꽤나 쪄 있어 반공 애니메이션에서는 주로 돼지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3대까지 세습되었다. 김씨 일가를 돼지로 묘사하는 것은 이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심지어 똘이 장군에서는 인간을 코스프레한 돼지로 등장해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김일성 본인은 이 콤플렉스를 거론하는 것을 무척이나 기분 나쁘게 여겼으며 이것에 관해 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만약에 논할 경우엔 아주 무시무시한 아저씨한테 끌려가서 코로 평양랭면 원샷을 하거나 아주 무시무시한 곳으로 끌려간다 카더라. 그래서 북한측에서 찍은 사진 중엔 김일성의 혹이 찍힌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 1988년 북한 정권 수립 40주년 기념 행사 때 프랑스 취재진이 녹화한 영상에 그의 혹이 드러난다. 20초 부근 참고.[20] 김일성의 혹은 지방종으로 추정되는데 외과 수술을 통해 조기에 절제할 수도 있었으나, 치료 시기를 놓쳤고 고령이 된 후라 수술을 하면 건강에 타격이 가겠기에 그냥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혹은 더 커졌다.

  • 김일성의 전직 주치의가 <신율의 시사열차>에 출연하여 "김일성이 젊은 청년 피 뽑아 피갈이를 했다."라고 증언했다. 이 피갈이의 부작용으로 목 뒤에 혹이 생겼다는 것이다.

  • 빨치산 시절부터 자신을 지지해 준 김책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원래 소련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김일성으로 내세우려던 것은 김책이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그가 죽고 나자 함경북도 성진을 '김책'으로 바꾸고 공업대학을 만들 때 그의 이름을 붙여서 '김책공업종합대학'이라고 짓기도 했다.

  • 의외로 어렸을때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생전 김일성이 인생에서 제일 후회하던 것 중 하나가 어렸을 때 교회 열심히 안 다니고 놀러 다녔던 거라고. 그가 살던 평양이 일제시대에는 '동양의 예루살렘'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기독교 강세지역이었는데 여기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냥 교회 착실히 다녀서 목사가 되었으면 지금의 김일성은 없었을 터이니 전 인류사에 불행한 일.

  • 자신의 카리스마를 대중들에게 드러내는 걸 좋아한 나머지 1946년부터 1994년 사망한 해까지 육성으로 신년사를 내보냈다. 예외적으로 1966년과 1970년에는 신년사 대신 로동신문 사설로 대체했다. 김정일 때에는 신년사 없이 공동사설이 신년사를 대체하다가 2013년에 김정은이 부활시켰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와는 완벽하게 정반대로 가는 인물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완벽하게 개무시한 인물이다. 지도자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최대한 누린 반면 자도자로서의 책무는 하나도 이행하지 않은 악질 독재자다. 특히 하나의 국가를 자기 집안 똥구멍 치다꺼리하게 만든 원흉이다.

  • 백괴사전의 김일성 항목은 모든 걸 왜곡하는 동네답지 않게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놈으로 분류를 하는 등 가루가 되도록 깐다. 자기가 권력 잡기 위해서 6.25전쟁을 일으킨 책임 하나만 보더라도 부관참시를 수만번 당해도 부족한 인간쓰레기임이 분명하다.

  • 한국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스탈린에게 허락받으러 갔는데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반대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끈질기게 아양 떨고 지랄 부리고 하여튼 스탈린에게 허락 받으려고 별짓을 다했다. 결국 스탈린은 무려 48번씩이나 거절한 끝에 한국전쟁을 허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 뒤 스탈린은 인민군이 깨져서 패주하는 꼴을 쳐다만 봤다.

  • 북한에서는 문화어가 '수령님께서 몸소 쓰시는 영광스러운 언어'라면서 김일성이 과거에 말한 '지주놈의 상통'(면상), '자본가놈이 뒈졌다', '대가리를 돌로 까부신다'와 같은 온갖 각종 욕설이 난무한 막말문화어라면서 대놓고 교과서에 실어놓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고. 그러나 타국에서는 보기 힘든 유례 없는 일인데, 아무리 도널드 트럼프로드리고 두테르테와 같은 사람들이 막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에 비하면 상당히 양반이며 적어도 미국이나 필리핀은 대놓고 교과서나 언론에서 쌍욕을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불분명하나, 일각에서는 1967년 김일성이 "전투적 화법을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을 시초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도 지도자의 품격에 따라 달라져서, 김정일 때는 더 심해졌다고.

  •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연설을 하던 도중 백의사에게 암살 당할 뻔했다. 아깝다 수류탄을 암살자가 던졌는데, 그 자리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집어던져 암살을 모면했다. 그 대신 그 장교는 가까이서 터진 수류탄 덕에 팔 하나와 여러 곳을 다치고 의병제대했다. 그 때문에 이승만김구는 파쇼테러단이라고 비난 받았다. 김일성이 권력을 확실히 잡은 195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이 장교를 손수 찾아가 고마워했고, 북한에서 따로 연금과 여러 가지를 제공하여 은혜를 보답했다고 한다. 이 장교가 죽을 때도 북한에서 장례비를 지원했다.

  • 외국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 신격화의 정도가 나오는데, 평양의 웬만한 공원에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덮인 벤치가 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은 '수령님께서 앉으셨던 의자'라서 길이 보존해야 한단다(…). 개인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 영구 사유화라니. 이건 뭐…

  • 북한에서 제작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김일성[21] 역할을 한 배우는 평생 그것만 해야 하고 대단히 경호를 잘 해준다. 일명 1호 공훈 배우. 참고로 북한에서는 박정희 전문 배우로 유명한 재일교포 출신의 배우도 이 정도 대우를 받지만 그 사람은 다른 역도 꽤 나왔다.

  • 작명법의 관점에서 그 후손들의 작명은 상당히 희한하다. 본래 부자간에는 같은 한자를 피휘하여 작명하는 것이 원칙인데, 아들 김정일과 손자들[22] 모두 각각 그 아버지의 한자를 차용해서 이름을 지었다. 김정일의 경우, 김정일(金正)에서 김정일(金正)로 일부러 개명까지 거친 이름인데, 이는 아버지의 이름자인 '日(날 일)' 자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김일성의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우기 위함이었다고. 본래는 그의 형제들인 김평일, 김영일, 김만일과 함께 '一(한 일)' 자 돌림자를 썼다.

  • '소 뒷걸음질로 쥐 잡는 격'으로 사람(과 국가)를 살리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박정희[23], 장제스[24], 요시다 시게루[25] 등이 있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 인간 때문에 일본은 아시아의 스위스가 아닌 경제 대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죽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전쟁에서 죽은 사람+북한에서 숙청된 사람 vs 대만 함락되면 숙청되었을 사람+일본 안 일어났으면 죽었을 사람+기타 친일파들+소위 빨갱이 사냥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

  • 해방 이후에는 한국의 정적들에게 죽을 위기를 몇 차례 넘겼다. 수류탄 투척을 받아서 겨우 살아난 적도 있다고. 소련군정문서 46년 4월 6일자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는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 전에 북한으로 파견된 테러분자들이 김일성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도 보도된 바 있다. 자동차에 수류탄이 투척되었는데 자동차는 어떤 파손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테러분자들은 이승만이 교부한 것으로 보이는 추천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만식 앞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 김정일이 실권을 쥐게 된 1980년대 이후로는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고, 유년기부터 항일투쟁과 해방 시기까지의 활동을 다룬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같은 책을 집필했다. 하지만 저 회고록은 자기 입맛에 맞게 항일운동사를 마구 뜯어고치고 윤색해 북한 밖에서는 양판소불쏘시개로 취급된다.

  • 평소 집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좋아했던 책은 역사책과 문학책이었으며, 심지어는 한국에서 발간된 책까지도 읽었다고. 실제 1989년 소설가 황석영문익환 목사 일행과 방북하여 주석궁에 갔을 때는 황석영의 여러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까지 했을 정도라 한다. 문익환 목사는 성경책을 보여줬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 김일성은 시와 노래를 좋아해서,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 때 동북항일연군이 부르던 것을 1993년에 보천보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김일성이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자장가이다.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외조모인 이보익의 애창가였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또 자연을 노래한 시는《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평안북도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의 내용은 국제친선전람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김정일의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광명성찬가'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는 한문으로 지어졌고, 양강도 삼지연군 화강암 비석에 새겨져 있다.

  • 서예 활동을 많이 했는데, 북한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의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친필비는 개성에 있으며, 인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 있는 건물로는 대동강여관과 김형직사범대학, 그리고 북한의 종합대학 중 하나인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 죽기 불과 한달 남짓 전이었던 1994년 6월 10일에는 지미 카터와 회동해 북미관계의 개선을 꾀하기도 했고, 당시 김영삼과 남북정상회담도 추진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김일성의 죽음에 대해서는 온갖 설이 나돌고 있는데, 김일성의 이러한 외교 정책을 탐탁치 않게 여긴 김정일이 몰래 암살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 북한 원의 인물이다. 북한 원 2기 3차 시리즈 100원권 지폐에는 '혁명의 영재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라고 김일성을 설명하고 있다. 개소리 집어쳐! 북한에서 김일성이 어떤 사람인지를 감안한다면 이 돈은 쓰일 일이 거의 없으며 북한의 경제상태가 어떤지를 감안한다면 이 돈은 그냥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쓸모가 아주 없는 건 아니고 불쏘시개 용으로는 상당히 쓸만하다 카더라

  • 김일성의 장례식에 당시에는 북한의 인민들이 참가 안하면 코랭면을 먹을 게 무서워서 총동원되어 매일 생화를 들고 김일성의 동상을 찾았고 이로 인해 북한에 꽃이란 꽃은 모조리 팔려버리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김일성 사망 당시에만 해도 김일성김정일의 생일날에는 김일성 동상이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는 관례가 있었고 이 시기를 이용하여 짬짬이 꽃장사에 나서는 장사꾼들이 있었는데, 김일성의 장례기간 동안마다 이 사람들은 말 그대로 떼돈을 벌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북한 돈으로 5원밖에 안 하던 생화 한송이의 가격이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10배 가까이 오른 50원까지 거의 인플레이션 급으로 올랐을 정도다 조화코인. 심지어 그 가격에도 꽃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일시적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가 김일성 동상앞에 놓이기도 했다.

  • 이 자식의 이름을 딴 거리 및 시설 이름도 있다. 이름은 "김일성 거리"로 모잠비크마푸투, 캄보디아프놈펜, 시리아다마스쿠스에 있다. 특히 다마스쿠스에는 김일성의 이름을 딴 공원도 있는데, 공통적으로 위의 나라들은 다 친북 성향들이다. 이전에는 '통일되면 개명요구를 할 수도 있다'는 서술이 있었으나, 외교적 간섭으로 비춰질 수 있으므로 그냥 묵인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 그리고 작곡가 김형석이 닮은 꼴로 각종 북한 드립의 희생양이 되었다

  • 죽기 1년 전 간이 부었는지 노망이 들었는지 "스탈린은 내 친구요."라고 지껄이기도 했다. 원래 김일성 성격이 이렇다. 감히 본인 앞에선 하지도 못했을 소리를 지껄이면서 허세를 부리는 것. 어디까지나 국내용 허세인데 이 허세의 대상엔 스탈린, 마오쩌둥, 카스트로까지 있었다. 한번은 카스트로가 피그만과 쿠바 핵위기를 거쳐서 집권한 것이 사실은 자기 덕분이라고 주접 떨었는데, 주 쿠바 대사가 그게 진짠 줄 알고 카스트로에게 깝쳤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11. 가족 관계[편집]

김일성은 김태서가 시조인 전주 김씨의 후손이다.

8대 조부 : 김계상
8대 조모 : 불명

7대 조부 : 김차형 (1699년 ~ 1768년)
7대 조모 : 나씨 (1703년 ~ 1744년)

6대 조부 : 김욱 (1728년 ~ 1813년)
6대 조모 : 도민숙 (1735년 ~ 1811년)

현조부 : 김민수 (1770년 ~ 1854년)
현조모 : 고송희 (1772년 ~ 1832년)

고조부 : 김송령 (1810년 ~1899년)
고조모 : 나현직 (1811년~ 1897년)

증조부 : 김응우 (1845년 ~1930년)
북한에서는 그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민중들을 선동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하게 만든 주동자라고 선전하고 있다…지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개소리. 실제로 이 사건의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당시 평안감사이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와 철산부사 백낙연이었고, 이 사건의 행동대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퇴역 장교 출신의 박춘권이었다. 물론 당시 기록 그 어디에도 김응우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제너럴 셔먼 호 사건 당시 김응우는 22세의 햇병아리 묘지기였을 뿐이지만 박규수는 이미 60을 바라보는 노회한 고위 관료였다. 누가 이 사건을 주도했을지는 알 법하다.
증조모 : 리씨 생몰년 미상

조부 : 김보현 (1871년 8월 19일 ~ 1955년 9월 2일)
조모 : 리보익 (1876년 5월 31일 ~ 1959년 10월 18일)
두 사람 다 북한 정권이 세워지고 나서 사망했다. 한민족을 막장으로 몰아넣은 손자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친 : 김형직[26] (1894년 7월 10일~1926년 6월 5일)
모친 : 강반석[27][28] (1892년 4월 2일~1932년 7월 31일)

처 : 정실 김정숙 (1917년 12월 24일 ~1949년 9월 22일)

후처 김성애 (1928년 ~ 2014년)(추정)
첩실 제갈 아무개[29]


형제


자식


의외로 사람들을 충공깽하게 만드는 사실은 김일성 집안이 본디 개신교 집안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강반석이 장로회 장로 강돈욱의 딸이었다. 김일성 본인도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다고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밝힌 바 있다. 일각에서는 예수쟁이들의 광신적 전도술을 그대로 배워 써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럴 듯하다. 실제로 이오시프 스탈린도 유년기에 신학교에서 배운 교리문답을 죽을때까지 써먹었다고 하니까. 김일성이 다니던 교회중 하나의 담임목사가 독립운동가인 손정도 목사인데 이 분은 대한민국 해군 초대 참모총장 손원일의 부친되는 분이다. 이런 인연으로 손제독의 형 손원태 박사는 김일성과 의형제처럼 지냈고 김일성 사망시 조문차 방문하고 방문기간에 생일을 맞은 손원태 박사의 생일잔치를 김정일이 직접 차려 주기도 했다. 헐...

북한이 1946년에 내놓은 공식 김일성 전기인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에 따르면 1930년대에 한영애란 여자와 하얼빈에서 살림을 차린 적이 있었으나 난리통에 헤어졌고 이후 최희숙이란 여자와 살림을 차렸으나 일본인들이 김일성을 홧병 걸려 죽게 하려고 사로잡아서 눈알과 심장을 뽑아 죽였다고 김일성은 주장했는데 소련에 의해 우상화된 김일성의 전기인만큼 신뢰성은 낮다. 한영애는 김일성이 한반도 이북의 수괴가 되자 6.25전쟁 도중에 김일성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동하다가 공습으로 죽었다 한다. 이후 최희숙의 친구인 '키도 작고 얼굴도 못난' 여자인 김정숙과 결혼했다고 김일성은 구술하고 있는데 이후 이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은 철저히 말소되었고 지금은 읽고 싶다면 평양 인민대학습당 비공개 열람실에 꿍쳐져 있는 정로 신문을 뒤져봐야한다. 하지만 위키러 중에 평양에 가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12. 어록[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 인민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높이 모시며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업적을 옹호 고수하고 계승 발전시켜 주체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여 나갈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서문 中.

천리마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인민은 쌀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도 책임이 있어!
- 1950년 11월 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 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우리 인민군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군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릴 때까지 용감히 싸우라.
-10월 10일 한국군과 UN군이 파죽지세로 평양으로 진격해 오자 평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기 전에 한 라디오 방송. [36]

남조선 인민들은 스스로 해방 투쟁을 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무장공비지속적으로 침투시켜서 해방구를 만들고 봉기를 시켜야 한다

생활 수준이 높아질수록 인민들은 사상적으로 나태해지고 행동은 더 산만해진다.
야, 저번엔 "이팝에 고깃국"이라며?

우리 행성에서 핵무기가 있는 한 핵전쟁의 위협은 가셔질 수 없으며, 인류는 항시적인 핵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핵무기의 시험과 생산, 배치를 금지하고 지금 있는 핵무기들을 축감하며 나아가서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합니다[37]

남조선에서 미국 놈들을 몰아내야 하겠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그냥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미국놈들과 다시 한 번 꼭 벌여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전쟁 준비를 다그쳐야 합니다. 동무들은 하루 빨리 핵무기장거리 미사일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혁명동지들이 뭍혀있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묻어달라. 그곳에서 내 옛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다.
- 1994년,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아들 김정일에게 유언처럼 남긴 당부.[38]

남조선 당국자들은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고 민족 단합이 아닌 외세와의 야합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위 자신들을 문민정부라 칭하지만 역대 부독 정권과 조금도 다를바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핵 문제를 물고 늘어지며 갈등을 충돌질 하는 건 미국입니다!
- 1994년 생전 마지막 신년사 중


13. 창작물[편집]

  • 198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의 얼굴이 공개되는건 한국에서는 코렁탕의 지름길이었다(…). 대부분 캐리캐처로 등장했으며 브리태니커나 뉴스위크지에서 김일성의 사진이 나올 경우 먹지로 처리하거나 찢어버려서 수입되었다. 해외제작 6.25다큐의 경우는 김일성의 육성부분은 묵음으로 처리했다. 이런 것들이 풀린시기는 88올림픽 전후.


김일성을 연기한 배우는 다음과 같다.

  • 김희라 - 북한 건국사를 다룬 KBS 미니시리즈. 혹이 포인트.

  • 전광렬 - 여명의 그날, 해방 직후의 젊은 김일성. 해당 작품은 외압성 조기종영으로 끝났다. 외압을 받은 이유는 김일성 미화 논란 때문이었다. 이 드라마의 김일성은 처음엔 이상을 가진 독립투사였으나 점차 권력을 장악하며 독재자로 타락하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전광렬은 기존의 '혹부리 돼지' 이미지와는 다른 샤프한 미남이었고, 1990년 당시에는 김일성 가짜설이 아직 대세였던데다 김일성의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든 경직된 시기였다. 정작 재미있는게, 이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박정희의 모습도 일본군 신분으로 비밀 광복군 활동을 하는 모습으로 나왔다는 것.

  • 문오장 - 지금 평양에선에서 손과 입만 나오는 걸로 처리.

  • 국정환 - 제1공화국(드라마)

  • 주현 - 제4공화국(드라마)

  • 박철호 - 서울 1945

  • 이원종 - 인천상륙작전(영화) - 아주 잠깐 나오며, 흰색 육군 원수용 하예복을 입고 있다. "밥 먹고 하자우!"

  • 문학작품에서는 <만인보> 16권에 그를 다룬 시가 실려 있다. 제목은 사람 이름과 같은 '김일성'.

    우수리 한푼 없는 땅 건넜다
    피붙이들 하나하나 원수에게 잃었다

    싸움 속
    꿈은 무르익었다
    그 남만주의 밤 한별[원주1]동지는 아슬아슬하였다
    아슬아슬 노래였다

    산 첩첩 바다가 없었다

    다음 백년이 오기 전 백년아 쉬이 가거라
    한 이름에서
    우둔한 감정이 사라질 빈 들녘까지는
    이곳은 아직 넘어갈 바람 치는 고개 몇이 더 있다

    촉목하라[원주2]

  • 1993년에 남파간첩 출신 귀순자 이항구[41]가 <소설 김일성>을 낸 바 있었다.

14. 관련 문서[편집]

[1] 1983년 9월 1일 북한정권수립일에 아들 김정일과 찍힌 사진. 파일에는 1994년이라고 나와있지만 사실은 1983년이다. [2] 현재 기준으로는 평양직할시 만경대구역 칠골1동이다. 한편 고순화면 남동(고평면 남리)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3] 북한의 김씨 3대 세습중에서 유일하게 AB형이다. 김정일김정은은 A형.[4] 사회주의자로 전향한 후에는 종교를 믿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상당 기간 유지한 걸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말년에 수술을 할 때 기독교식 기도를 했다고 한다. 자손들은 철저한 무신론자인 것이랑 대조된다.[5] 물론 북한 사회에 대하여 국가자본주의 사회, 관료집산제 사회, 기형적 노동자 집단 등등의 다른 평가도 존재한다. 왕정 집단이라는 평가는 권력 세습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6] 중공군 개입이 시작된 1950년 10월과 11월에 미군은 혜산진에 도착했고 국군은 청진으로 진격하고 있었다.[7] 스탈린과 마오쩌둥도 우선 민심을 얻기 위해 토지개혁으로 땅을 나눠주고 약탈과 학살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민심을 얻었다.[8] 하지만 생산력의 부족과 노동자 민주주의의 부재로 인해 사회주의 국가라고는 할 수 없는, 따라서 '기형적 노동자 국가'인[9] 많은 비판을 받는 이승만이지만 교육을 중시하여 대대적인 초등학교와 중학교 확장에 신경을 많이 썼고 특히 초등학교를 의무교육 강제함으로써 국민 교육을 강화시켰다.[10] 약 170명이 동원된 반면 보천보에 있던 일본 병력은 군도 아닌 순사 5명이 전부였다. 그들 중 아무도 죽지 않았고, 심지어 김일성은 보천보에 넘어가지도 않았다.[출처] 11.1 11.2 림은, (북조선 창설 주역이 쓴) '金日成 王朝', 沃村文化社, 1989) p252[13] 지역차가 좀 큰 편이라, 전라도 지방은 161~162cm, 함경도 지방은 167~168cm이였다.[14] 잊힌 얘기지만, 5공 시절인 1984~85년에 남북정상회담 계획이 논의되었으나 무산되었다.[15] 하지만 정작 북한 정권 수립 이래 처음으로 한국 대통령들과 정상 회담을 그것도 두 번이나 가진 최고 권력자는 2018년 이전까지 김정일뿐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아니었지만 후에 한국 대통령이 되는 또 다른 사람과도 회담을 했다. 뭐야 이거 츤데레??? [16] 김달현 역시 김일성 생전에 국가계획위원장에서 해임되고, 김일성 사후에는 부총리에서까지 공개적으로 해임되어 비날론 공장의 지배인으로 떨어졌고 7년 뒤 그 곳에서 죽었다.[17] 참고로 지미 카터와 만나는 독재자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죽거나 권좌에서 쫒겨나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김일성은 진지하게 카터에게 원인이 있다는 해석이 있다. 이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한 사람이 카터이기 때문.[18] 라고 했지만 경주 김씨가 인구가 많아 그렇게 표현했을 뿐, 전주 김씨가 장손(長孫) 집안이다.[19] 17세기, 김일성의 8대조인 김계상이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했다.[20] 프랑스 TF1 채널에서 '붉은 왕(Le roi rouge)'이라는 이름으로 1988년 12월 2일에 방영된 르포 프로그램의 일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88년 12월 27일에 KBS-1TV에서 방영된 바 있다.[21] 가장 유명한 작품이 연작영화 '조선의 별'이다. 의외로 김정일이나 김정은과 비슷한 배우가 젊은 날의 김일성으로 나온다.[22]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등. '正(바를 정)' 자 돌림.[23]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남로당 사건으로 군에서 예편된 후 군에 복귀하지 못하고 평생 배신자 소리나 들으며 살았을 것이다.[24] 6.25 전쟁이 없었다면 중화민국은 중공군의 침략으로 멸망 당했을 것이고, 자신도 반동분자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25] 전쟁 특수가 없었다면 이케타 하야토의 망언으로 실각되었을 것이다.[26] 개신교 미션스쿨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동문들과 '민족주의'단체인 조선국민회 결성에 참여했다. 아들과 달리, 이 단체의 목표는 일종의 준비론에 가까웠다고 한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는 자신의 아들과 달리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훗날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암살당했다는 것.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거점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때문에 남북통일 이후 김씨 일가의 진실이 밝혀질때 재평가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기도 하다.[27] 베드로의 그 반석이 맞다. 장로회 장로 강돈욱의 차녀로, 그녀 본인 역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참고로 숙부인 강양욱은 장로회의 목사였다.[28] 북한에서 성모마리아처럼 숭배되는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은 안도현 만보라고 부르는 중국 동네에서 아편농사를 지었던 조광준이라는 홀아비와 재혼했었다.[29] 김일성의 주석궁 안마사 내지는 간호사. 김일성의 많은 자식들 중 하나인 김현의 모친. 이외의 알려진 것은 없다.[30] 기쁨조 출신이라고 한다.[31] 김일성 말년에 전담 간호장교 였다고 한다.[32] 1993년~1989년 9월까지 부주석, 2003년부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33] 3살 때 김일성 관저에 있는 연못 근처에서 놀고 있다가 그 연못에 빠져 익사했다.[34] 김일성과 제갈씨에게서 태어온 사생아다. 북한 당국에서 존재를 철저히 숨겼지만 북한에서 넘어온 이한영이 자신의 수기를 통해 김현의 존재를 알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2001년 자신의 이복형인 김정일에게 처형당했다. 사람들의 추측으로 정통성을 위한 조치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김현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과 동갑이다. 그런데 2015년에는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있으며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35] 위에 나온 김송죽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아버지와의 나이차가 참으로 장대하다. [36] 후에 김일성은 10월 12일 밤 평양을 비밀리에 탈출하여 덕천으로 도주했다가 일주일 후 평양이 한국군과 UN군에 의해 점령되자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그곳으로 숨어들었다. 나중에 중공군이 개입하고 난 뒤 12월 6일이 되어서야 평양으로 나왔다.[37] 하지만 실제 현실은(...)[38] 잘 알다시피 김정일은 이 유언을 가볍게 씹었고, 체제 선전을 위해 그의 시신을 박제했다.[원주1] 한별: 동북항일연군 시기 젊은 김일성 장군의 호.[원주2] 觸目: 눈에 닿는 일체(『조당집(祖堂集)』[41] 1990년대에 각 언론매체에서 '북한통'으로 이름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