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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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북한의 국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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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이름

직책

임기기간

비고

1대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1948년 9월 9일 ~ 1957년 9월 20일

2대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1957년 9월 20일 ~ 1972년 12월 28일

1962년 재선
1967년 3선

3대

김일성

국가주석

1972년 12월 28일 ~ 1994년 7월 8일

1977년 재선
1982년 3선
1986년 4선
1990년 5선

권한대행

김정일

국방위원장

1994년 7월 8일 ~ 1998년 9월 5일

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 권한대행

4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1998년 9월 5일 ~ 2009년 4월 9일

상임위원회 위원장직은 현직

5대

김정일

국방위원장

2009년 4월 9일 ~ 2011년 12월 17일

권한대행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2011년 12월 18일 ~ 2012년 4월 12일

상임위원회 위원장직은 현직

6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2012년 4월 13일 ~ 2016년 6월 29일

직책 폐지

국무위원회 위원장

2016년 6월 29일 ~ 현직

파일:Kim Il-Sung 1950.png

파일:Kim Il-Sung 1994.png

1950년

1994년

김일성
金日成, Kim Il-Sung

본명

김성주(金成柱 또는 金聖柱)

출생

1912년 4월 15일일본 제국 조선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동 칠골[1]

사망

1994년 7월 8일 (향년 82세) | 북한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특각

국적

북한 파일:북한 국기.png

신체

175cm | 체중 90kg | AB형

직업

군인, 정치인

정당

조선로동당 (1945년 ~ 1994년)

경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 (1948년 9월 9일 ~ 1972년 12월 28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49년 6월 30일 ~ 1966년 10월 12일)
조선인민군 제2대 최고사령관 (1950년 7월 ~ 1991년 12월 24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6년 10월 12일 ~ 1994년 7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 (1972년 12월 28일 ~ 1994년 7월 8일)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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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종교

개신교무종교(무신론)

학력

중학교 (중퇴)

소속

동북항일연군 (1936년 ~ 1941년)
소련군 (1942년 ~ 1945년)
조선인민군 (1950년 ~ 1994년)

계급

대위 (소련군)
공화국 대원수 (조선인민군)

가족

부모

김형직 (1894년-1926년), 강반석 (1892년-1932년)

형제

남동생 김철주 (1916년-1935년), 남동생 김영주 (1920년- )

배우자

일처 한성희 (1914년-미상), 이처 김정숙 (1917년-1949년), 삼처 김성애 (1924년-2014년?)

자녀

장남 김정일 (1942년-2011년), 차남 김만일 (1944년-1947년), 장녀 김경희 (1946년- ), 삼남 김평일 (1954년- ), 사남 김영일 (1955년-2000년), 오남/사생아 김현 (1971년- ), 차녀/사생아 김백연 (1987년- )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어린 시절
2.1.1. 도용된 이름2.1.2. 날조된 타도제국주의동맹
2.2. 독립운동
2.2.1. 왕청 유격대2.2.2. 민생단 사건
2.2.2.1. 날조된 북만원정
2.2.3. 보천보 전투2.2.4. 88독립보병여단
2.3. 해방 정국2.4. 6.25 전쟁2.5. 봉건 왕조 체제의 수립
3. 사망4. 능력
4.1. 무능한 전쟁광4.2. 무자비한 숙청광
5. 가족 관계6. 이야깃거리
6.1. 외모6.2. 김일성 가짜설6.3. 1986년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6.4. 김일성 암살설 등6.5. 족보 집착
7. 발언8. 김일성/창작물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북한군인, 정치인.

생전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 국가주석, 조선인민군 공화국 대원수를 지냈고, 사후에는 정권 주도 하에 '영생불멸의 위대한 영도자' 따위로 숭배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무장항일투쟁에 참여하여 광복 이후 열렬한 지지 속에 북한의 최고권력자로 등극했으나, 6.25 전쟁을 일으켜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고 다수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전력이 있으며[2] 8월 종파사건 등을 통해서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여 1972년에 마침내 유일집권 체제를 완성했다.

전후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초반에는 대한민국보다 빠른 경제성장을 거두며 전후복구에 성공적이었지만 애초에 경공업 기반이 개판인 터라 차츰 남한의 경제성장 속도에 비해 밀리게 되었고, 소련중국대립 속에 독자노선을 구축하면서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 동떨어진 현실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레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란 목표도 허울좋은 집권 명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소련 붕괴로 시작된 동구권 국가들의 연쇄 붕괴에도 꿋꿋이 정권을 유지했으나, 차츰 정권 유지가 쉽지 않다는 현실 인식 하에 미국대한민국 등 국가들과 대화 통로를 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던 1994년 7월 7일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사용될 묘향산 특각을 둘러보다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사망 직후 정권유지 차원에서 시체금수산태양궁전박제되고 그의 장남 김정일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영원한 주석' 등으로 떠받들며 그 직책을 그대로 아버지에게 갖다 바쳤다. 40여 년간 장기집권한 독재자이긴 했어도 적어도 쥐꼬리만한 양심은 있어서 "인민들에게 고깃국이팝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자식농사를 개판으로 지어서 그 자식들은 정권 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대다수의 국민이 아사(餓死)하는 후진국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말년 목 뒤에 붙은 때문에 '혹부리 영감' 등으로 불렸으며, 6.25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악의 대마왕'급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2. 생애[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m_Il_Sung_Portrait-2.jpg

문제의 그 초상화(;;;)

2.1. 출생과 어린 시절[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m_Il-sung_in_1927.jpg
1927년의 김일성

1912년, 김형직과 강반석[3]장남으로 당시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동, 지금의 평양시 만경대에서 출생했다. 초명은 김성주로 소학교 때부터 중국인학교를 다녔고 지금의 지린성 쑹화강 강변에 있는 위원(毓文(Yùwén, 육문))중학교를 다녔다. 1929년경에 반일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위원 중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930년경 출소했다. 이후 공산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2.1.1. 도용된 이름[편집]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인데, 대략 1930년경 그 당시 항일투쟁으로 이름이 알려진 김일성(본명: 김경천)의 이름을 도용했다.

2.1.2. 날조된 타도제국주의동맹[편집]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4세였던 1926년에 타도제국주의동맹이란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고 주장하지만 이 단체는존재하지 않는 타도제국주의동맹 북한에서만 주장하는 날조된 단체다.

또한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1세였던 1923년, 만주 팔도구에서 만경대까지 14일간 천리길을 걸었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배움의 천리길' 이라는 이름으로 우상화하고 있는데 이것도 거짓말이다.

2.2. 독립운동[편집]

2.2.1. 왕청 유격대[편집]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같은 해 10월 12일 중국 공산당중앙은 '만주 병사공작지시에 관한 지시'를 내려 항일 유격대를 건설할 것과 이 유격대를 농촌으로 확대하여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에는 각 지역별로 공산 유격대가 형성됐다. 남만 유격대, 동만 유격대, 그리고 동북 인민혁명군 등이 그것이다. 김일성, 최현 등은 모두 동만 유격대 소속으로 분류된다.

김일성을 비롯하여 최광, 오진우 등은 왕청 유격대 소속이었다. 김일성은 당시 왕청 유격대의 대장이 아니었다. 1933년 9월에 왕청 유격대와 훈춘 유격대는 중국 구국군 오의성부대와 연합하여 동녕현성을 공격했다. 동녕현성 전투의 주도자는 오의성부대의 오의성이었다. 그는 원래 마적 출신이었다. 이때 김일성은 왕청 유격대의 일개 소대장으로 처음 항일운동에 참가했다.

김일성의 상관인 오의성이 과거 마적 두목이던 왕덕림과 의형제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유격대 조직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내용은 김일성을 마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마적들과 어울리면서 행했던 행적을 능히 짐작케 해준다.

2.2.2. 민생단 사건[편집]

이 당시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정치위원이었는데, 민생단 사건이 절정에 달했을 당시에 김일성은 다른 곳에서 활동중이었고 사건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소환되어 취조를 받게 되었다. 김일성은 자칫하면 죽을 위기에 놓였지만 중국인 왕윤성[4]의 도움을 받아 풀려나게 되었다.이때 뒤졌어야 되는데 아깝다;

이때 김일성은 정치위원 자리에서 이미 직위 해제됐고, 후임으로 남창익이라는 사람이 정치위원으로 임명됐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지휘했다고 주장하는 동년현성 전투도 중국 구국군 오의성부대의 지휘를 받은 것이다. 김일성은 민생단 감투를 쓰고 평대원으로 강등돼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민생단 혐의를 벗기 위해서 작탄대 대원이 되었다.

2.2.2.1. 날조된 북만원정[편집]

김일성의 회고록에서 "북만원정"을 일본군의 토벌 위기에 처한 '"주보중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 김일성이 벌인 원정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실제는 민생단 사건으로 몰려서 총살위기에 처한 김일성이 중국인 빨치산 간부의 도움으로 한밤중에 주보중 부대로 도망친 사건이다.

또한 "일본군에 투항한 투항한 유격대 길강성 지휘부 사령인 이종락이 김일성에게 처형됐다."라는 김일성 회고록 내용도 거짓말이다. 일본군으로 투항을 권고하는 옛 상사였던 이종락의 손을 김일성도 (일본군에 투항하기 위해) 잡으려 했지만, 이를 알아차린 항일1로군 총지휘관 양정우에 의해 저지됐고, 송무선 항일1로군 조직과장을 파견해서 이종락을 압송한 후 직접 처형했다. 당시 일본군에 투항하려고 고민하던 김일성을 항일 유격부대 총지휘관이 만류했다는 것이다.날조된 김일성의 회고록

2.2.3. 보천보 전투[편집]

항목 참조

2.2.3.1. 날조된 조선인민혁명군[편집]

북한은 "1934년에 이르러 김일성은 동만주의 반일 인민유격대남만주 반일유격대를 통합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설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935년 5월에는 반일 민족 통일전선 본보인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그 회의 회장으로 추천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만주 각지의 혁명적 무장세력을 통합하여 신박한 영도력을 발휘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을 만들었다"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30년대 만주지방에서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혁명군'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소비에트 홍군이라는 명칭을 취소하고 다시 성립할 것을 지시했던 코민테른의 '1월 서한'에 따라 결성한 동북인민혁명군의 명칭을 조합해서 고안해낸 가공의 조직이다.김일성이 가공해 만들어낸 군사조직

김일성의 자서전 "세기와더불어"에도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할 때에는 동북항일연군이라고 하였고, 조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거나 조선에 나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정황에 맞게 이름을 바꾸어 가며 활동했다." 라고 되어 있다. 즉, 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결론이다.[5]

동북항일연군은 조선인민혁명군과는 전혀 다른 실존했던 군사조직이었다. 심지어 북한이 '혈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중국조차도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를 부인했다. 예컨대 1962년 4월 25일 평양에선 항일유격대 창설 30주년 기념행사를 전례 없이 대대적으로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 초청된 중공측 수뇌급 간부 팽진(彭眞)은 이 점을 피력했다. 쉽게 얘기하자면, 중국 측은 김일성이 주도하여 조직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은 날조된 것이며,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의 일개 지방당의 말단 조직원으로서 당의 지도 하에 행동했던 자로 규정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에서는 현재도 4월 25일을 조선인민군 창건기념일로 선정하여 매해마다 성대한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으며 북한의 날조된 역사가 우리 백과사전에까지도 버젓이 등장하고 있다.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하지 않았다2

특히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내용 중에는 양세봉조선 혁명군을 김일성이 흡수해서 대규모 부대로 거듭나게 되었다(...).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완전한 거짓이다. 조선혁명군의 일부 대원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6]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북한에서 주장하는 조선 혁명군과 실제 사료에 등장하는 조선 혁명군이 다르다. 해당항목 참조.

2.2.4. 88독립보병여단[편집]

파일:FB_IMG_1474741801443.jpg
88독립보병여단 시절 사진. 좌로부터 김일성, 계청, 최현, 안길

1937년부터 일본군이 ‘만주국치안숙청계획’을 통해 만주 지역의 병력을 늘리고 토벌작전을 실시하자 동북항일연군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진다. 김일성, 최용건 등 동북항일연군 대원 중 일부는 일본군을 피해 연해주, 하바롭스크 소련 영내로 이동한다. 1942년 소련 극동군은 이들을 ‘동북항일연군교도려’로 편성하였으며 얼마 후 ‘88독립보병여단’로 정식 편성한다. 여기서 김일성은 소련군의 단기 군사 교육을 받고 주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여단 1대대의 대대장에 보임된다. 이때 소련군 지도부는 김일성의 부대원들과의 오랜 동지애, 성실성, 러시아어 실력 등을 눈여겨 보기 시작한다.

파일:external/mlbpark.donga.com/1291658313.jpg

1945년 10월, 잡지사 '선구'에서 서울 시민 2000명에게 여론조사한 자료.


광복 직후 '선구'의 설문조사에서 김일성이 군무부장 부문에 조사된 이유로 해방정국 당시 유명세가 있었다고 한홍구(성공회대교수) 등 일부 측에서 주장하고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을 지냈던 정상진은 단연 거짓이라고 폭로했다.[7] 해방 이후 소련정치부의 지시로 원산항에 귀국하는 김일성을 마중했는데, '김성주입니다'라고 인사하는 김일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뒤에 소련정치부에 보고하면서 김일성을 알았다고 한다. 정상진은 1945년 10월 14일에 있었던 "소련군 환영대회"는 소련의 각본이었으며, 1945년부터 1965년까지 북한에서 발표한 모든 연설문은 소련에서 작성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기사 즉 관제데모의 결과로 지지율 운운하는 꼴.

2.3. 해방 정국[편집]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은 88독립보병여단 조선공작단의 일원으로 원산을 통해 귀국한다.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평양시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에 임명된다. 9월 말 김일성은 삼팔선 이북에 새로운 공산당 지도 조직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9월 11일 박헌영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북한 지역의 지방 조직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 문제에 대해 소련군정과 교감한 후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주류였던 국내파는 1국1당 원칙에 어긋난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10월 초 김일성은 한발 물러서 서울의 조선공산당 산하에 이북 5개 도당을 총괄하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자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국내파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박헌영 역시 자신의 입지를 흔들 수 있는 변화에 부정적이었다. 10월 8일 김일성은 개성시 인근에서 박헌영과 북조선분국 설치를 두고 담판을 맺었다. 소련군은 이 자리에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를 배석하여 김일성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8][9] 박헌영도 고집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10월 10일부터 10월 13일까지 '북부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개최했다.[10] 얼마 후 북조선분국 중앙집행위원회가 열려 책임비서로 친 김일성계였던 김용범이, 제2비서로 박헌영파였던 오기섭이 선출됐다. 이후 북조선분국에서는 김일성 세력이 점점 우세해지다 1945년 말 아예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선출한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자 김일성은 위원장으로 선출된다. 1945년까지만 하더라도 소련군정은 군정의 얼굴마담으로 조만식을 내세웠으나 신탁통치 문제 등에서 소련의 뜻을 따르지 않자 대신 김일성을 전면에 세우기 시작했다. 3월 23일 김일성은 '20개조 정강'을 발표해 무상몰수-무산분배를 뼈대로 한 토지 개혁, 산업 국유화 등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자신의 구상을 밝힌다. 이 구상에 따라 3월부터 8월까지 이른바 '민주개혁'이 진행됐다. 지주와 우익 등 저항 세력은 탄압받았다.[11] 아울러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임시정부 수립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김일성과 소련은 남북 동수로 내각을 구성하고 저변의 지지를 얻고 있는 조선공산당이 남한 몫의 반을 가져올 수 있다면 공산주의 세력이 임시정부의 3/4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위해 여운형을 평양으로 소환해 좌우 합작 운동 중단을 종용하기도 했다.

1946년 4월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그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한다. 박헌영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이와 함께 김일성은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북조선민전)을 조직해 각 사회단체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그 해 8월에는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신민당을 흡수해 북조선로동당을 창당한다. 11월 3일에는 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됐다. 북조선민전이 추천한 단일후보에 대한 찬반투표였다. 소련군정은 인민위원이 다시 대의원을 뽑아 북한의 최고집행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하도록 했다. 2월 21일 김일성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은 공산주의에 입각하여 부르주아를 몰아낸다는 명목으로 갑부들을 숙청하는 사법살인을 마구 남발했고 그 재산을 갈취해댔다. 이 때문에 북한의 토호들은 죄다 남쪽으로 도망쳤고 이렇게 도망친 사람들 중에서 모여서 만든 학교가 오늘날의 대광고등학교이다.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수상으로 공식 취임하였다,

2.4. 6.25 전쟁[편집]

해방 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당시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민심을 잃은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석권하자, 김일성은 숭어가 뛰니 망둥어도 뛴다고 자신도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다는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자국민 학살적인 면에서는 제대로 본받는데 성공하긴 했다 여기에 박헌영의 '남로당원 20만 봉기설' 주장으로 하루에 10km씩 진격하면 50일 안에 대한민국을 정복하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김일성은 1950년까지 남침을 허락해 달라고 소련에게 끈질기게 들이댔다. 소련은 2차대전 이후 미국과의 대전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12] 김일성의 요청을 묵살했지만, 미국이 애치슨 라인[13]을 설정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미군이 공여한 대한민국 국군의 각종 군용장비가 후방으로 빠지는 등 호재가 발생하자 스탈린이 이를 승낙했다. 김일성은 승낙받자마자 빠르게 남침 작전계획을 구상한 뒤 스탈린에게 비밀문서로 전달했다.

김일성은 개전 초기 빠르게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내 엄청난 혼란이 생겨 대한민국의 숨은 공산세력이 후방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자연스럽게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서울을 점령해도 대한민국의 후방은 잠잠했고 미군의 참전이 빠르게 결정되는 등 악재가 생겼다. 여기에 동부전선의 진격 지연과 대한해협 해전 패배로 인한 부산에 대한 사보타주 실패 탓에 인민군 육군은 서울 점령 후 3일간 서울에 머무르는 작전상 엄청난 실수를 하였고,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어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특히 김일성은 인민군 점령지에서 대대적인 학살과 인민재판, 약탈을 실시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안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승리하기 위해서 민심을 얻어야 하는데 바보같은 짓만 하고 있다면서 진심으로 화를 냈다.

게다가 대한민국 내 공산주의 세력은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탄압 때문에 6.25 전쟁 직전즘에는 세력이 많이 약해진 때였다. 그러나 남로당박헌영은 전쟁을 일으키면 대한민국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전했고, 김일성은 이를 그대로 믿어버린 것이다. 또한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자 김일성도 이에 자극받아서 자신도 업적을 쌓고자하는 욕심으로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파악도 하지 않고 전쟁을 시작한다.

김일성도 게릴라로 활동한 전력은 있지만 실제로 군사적 능력은 파멸적으로 없었다. 중국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승리한 이유는 마오쩌둥이 문제가 많은 인물이기는 해도 적어도 당시 중국에 있던 토지개혁과 봉건악습 철폐, 뛰어난 군사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소련에 아부한 대가로 북한 지도자가 된 김일성은 이런 능력은 전무하였다. 김일성은 6.25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북한에서 기반이 부족했던 박헌영을 미국의 간첩으로 몰아서 숙청한다.

6.25 전쟁 초반 인민군은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데 이어 7월 13일에는 한강을 건너 20일 대전까지 함락시키고 승승장구하여 7월 말에는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때에는 지방을 돌면서 인민군을 독려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으로 UN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인민군에게 총 후퇴 명령을 하달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피로써 조국을 사수하자" 고 라디오 방송을 내보낸 뒤 평양을 떠나 덕천으로 피난했고 전쟁 시작할 때의 모 씨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건 기분탓이 아니다한국군과 UN군이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자, 피신 장소였던 덕천을 떠나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한다. 그런 뒤에 강계의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1월 후반에 한국군과 UN군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밀고 올라오자 마오쩌둥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마오쩌둥은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의 기치 아래 중국 인민지원군을 파견한다.

한국군과 UN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좀 바깥을 돌아다니며 한숨을 돌렸다. 한국군과 UN군이 12월 4일 평양 철수를 한 뒤 12월 10일 비로소 평양으로 나왔고 다음날 연설을 했다.[14]이후에 12월 7일, 펑더화이와의 합의 아래 중국과의 연합사령부인 조중련합사령부를 구성하면서 인민군의 지휘권을 중공군에 넘겼다.

조·중 연합군은 12월 25일경 북한 지역을 회복하였고 더욱 남하하여 12월 26일에는 38도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왔다. 결국 1951년 1월 조·중 연합군은 서울을 수중에 넣은 뒤 평택-오산-삼척-원주를 잇는 37도선 근방까지 밀고 내려온다(1.4 후퇴). 1.4 후퇴 후 소련 대사인 스티코프와 진격을 주장했지만 이 주장은 제2차 인천상륙작전을 우려한 펑더화이에 의해 무시되었다. UN군의 제2차 인천상륙작전으로 조·중 연합군은 서울을 내주고 다시 후퇴했고, 춘계대공세를 펼쳤지만 참패하고 한국군, UN군과 38선 부근에서 공방전을 계속한다. 이후 휴전협정일이자 북한에서 전승절이라고 정신승리하는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에 유엔, 중국 측과 체결한 휴전 협정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한마디로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시비만 걸어놓고 정작 진짜 싸움은 쑹스룬에게 죄다 떠넘겼을 뿐이었다. 즉,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한 것이 없다. 전쟁 초반의 선전은 6사단장 방호산 등의 활약과 전쟁 경험이 많았던 조선족 부대인 조선의용군의 도움으로 달성한 것이고, 후반의 반격은 쑹스룬이 지휘한 중공군이 주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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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1월 중국에서 덩샤오핑(왼쪽)과 만난 김일성. 이 둘은 38년 후에야 공식 석상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스탈린6.25전쟁을 반대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1990년대 초에 소련이 붕괴하여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남침유도설이나 북침설같은 수정주의자들이 모두 떼굴멍하게 됐는데, 김일성이 계획서를 입안했는데 그것을 수정해 준 사람이 스탈린이었던 것이다. 마치 위의 각주를 보면 스탈린은 반대했는데 이를 무시하고 김일성이 단독으로 한 것같은 뉘앙스로 읽을 수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선제공격계획 같은 문서도 있는데 한글(한국어)로 쓰였지만 한국어가 굉장히 어색한데, 왜냐하면 소련이 써준 러시아어를 북한이 한국어로 번역한 문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침계획서 같은 러시아어로 된 문서도 있었다. 당시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북한이 소련이 반대하는데 단독으로 전쟁을 결정 할 수도 없었고, 또 소련의 지원 없이 전쟁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남침 했을 때 소련제 탱크를 끌고 왔던 것이 북한이다. 도리어 구체적인 계획까지 짜준 것이 소련이었고 지원도 해줬다. 그러니까 스탈린과 김일성이 작당한 것이 맞다.[15]

김일성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발생한 피해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만 9천 명, 인민군 사망자와 부상자 52만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80만 명, 유엔군 사망자 5만 8천 명, 부상자 48만 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 명, 중공군 사망자 13만 6천 명, 부상자 20만 8천 명, 실종자와 포로, 비 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97만 3천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만 5천 명, 학살된 민간인 13만 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 명, 행방불명 30만 3천 명으로 모두 100만 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천명, 실종자 79만 6천 명이다. 이것은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으며, 개인별로 보면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 시설의 40%, 북한은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6.25전쟁의 피해 이 밖에 부상 후유증, 이산가족, 남북분단 등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수 많은 피해가 아직도 산적해있다.

2.5. 봉건 왕조 체제의 수립[편집]

비록 소련의 필요와 스탈린에 대한 충성과 아부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잡은 김일성이었지만 수십년동안 한반도와 만주에서 독립활동을 한 연안파와 국내파에 비해 정통성이 부족하였기에 김일성의 절대적 독재체제는 절대로 공짜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김일성의 통치 반세기사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숙청의 연속. 수십년간이나 나라 하나를 황제처럼 통치한 것은 김일성이 결코 만만한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반대파 제거를 통한 권력장악에는 정말로 능수능란했다. 권력장악만 따지면 호부견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북한 초기 김일성의 권력은 그다지 확고하지 못했다. 김일성이 최고 지도자이긴 했지만 그의 만주빨치산 파벌(갑산파)[16]허가이소련파, 김무정박일우연안파, 박헌영리승엽남로당파 등 수많은 파벌의 견제에 시달리고 있었다.[17] 이게 지속되었으면 북한도 나름대로 괜찮은 국가가 되었을지도[18]

한국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 이후의 군사적 대참사로 평양의 통치체제 자체가 붕괴되었는데, 김일성은 패배의 책임을 반대파에게 모조리 뒤집어씌워 버리면서 정치적 위기를 탈출했다. 연안파의 리더 김무정은 평양 함락 당시 김일성이 반 강제로(…) 평양 수비를 명령했는데, 정작 평양이 함락되자 평양 함락의 책임을 지고(…) 지위를 박탈당했다. 북한 초기 김일성과의 명목상의 공동정권을 구성할 정도로 위세를 자랑했던 박헌영은 남한 내부 호응의 부진에 책임을 지고 제거되었다. 사실 이건 박헌영도 할 말이 없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박헌영은 전쟁 전에 "전쟁이 일어나면 남조선 인민 20만 명이 호응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뭐 광복 초기에는 한국전쟁 이후에 비해 남한이 좌파적 성향이 깊었고 북한이 우파적 성향이 강했었는데 이건 당시 평양의 별명이 '동양의 예루살렘'일 정도로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우파의 입김이 셌던 까닭도 있다. 반면 남한의 대구는 '동양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파적 성향이 깊었는데 현재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얄궂은 역사. 물론 이것도 얼마 못 가 여순 사건으로 남쪽이 다 숙청됐다.

전쟁 이후에는 1956년의 8월 종파사건과 1958년의 "최창익 그룹 국가전복음모" 사건을 통해 옌안파와 소련파를 궤멸시켰다. 당시 300명의 장성 중 숙청당하지 않은 사람은 김일성의 최측근 15명, 그리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한 연안파와 소련파 장교들 몇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거기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승계하는 과정에서 갑산파들도 다 숙청시켰다. 한국전쟁 직후의 군사적 열세에서 불구하고 두 동맹국이 후원하는 두 파벌을 기어코 제거했다는 것만으로도 김일성의 정치적 수완(혹은 독재에의 집착)을 볼 수 있다.

김일성의 무자비함은 어찌보면 독재체제 성립 이후에 절정에 달했는데, 1960년대에는 당내의 "군사만능주의"를 비판하며(…) 평생 동지였던 김광협최광 등을 가차없이 숙청한다.[19] 이 숙청은 군부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방지하고 김일성 자신이 군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여담이지만, 김광협의 몰락 이후 군을 장악한 것이 그 유명한 오진우다.

권력을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계승[20]함으로써 북한이 사실상 전제주의국가로 거듭나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는 짓거리를 보면 전설로 자신에 대한 숭배도를 높이는 등의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하므로 봉건 국가라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독재정권이 들어선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도 권력 계승을 자기 자식에게 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어지간한 나라는 총애하는 부하에게 넘겨주긴 할 지언정 자기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넘겨주지는 않았으며, 그나마 국가 원수 자리를 형제에게 넘겨준 쿠바조차도 원수 자리를 계승받은 동생 역시 과 함께 혁명 투쟁에 참가한 서열 2위 원로였기에 계승한 것이지,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가 된게 아니다.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김일성을 존경해 그를 벤치마킹하려다가 벌집이 되어 버린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무나 하는 건 아닌 모양…[21] 물론 김일성은 제 딴에는 합법적이라는걸 강조하려고 선거 쑈를 벌였지만 이건 말 그대로 쑈일 뿐[22]이라…

또한 홍길동이 썼다는 축지법쓸 줄 안다고 한다. 축지법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기행이 있는데… 예를 들면, 독립운동을 하던 때에는 낙엽을 타고 두만강에서 일본군 함대를 격침시켰다던지 솔방울을 수류탄으로 바꾸어서 싸웠다고 한다. 간달프? 물론 일고의 가치도 없는 100% 거짓말. 다만 이건 보천보 전투 이후 한반도 민중 내에서 퍼진 소문들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박완서의 어머니가 김일성이 축지법을 쓴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장면이 있다. 요즘 북한 어린이들은 믿…으려나? 그리고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였을 때(아마 1920 - 30년대쯤) 웃통을 벗고 모래밭을 구르니 모래가 로 변했다고 한다. 근데 진짜 90년대에 들어 북한에 기아가 왔을 때 그런 액션을 전혀 취하진 않았고 그냥 죽어 버렸다. 여기에는 김정일이 죽였다는 카더라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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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가부장주의, 종교적 개인숭배, 경찰국가 등, 전근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권력 장악도는 매우 높고, 이런 모습이 제3세계 독재자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주화입마를 당한 독재자들로는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 등이 있다.

3. 사망[편집]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1994년 7월 8일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시었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온 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
- 1994년 7월 9일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방송된 전형규 방송원의 김일성 사망 공식 발표 중에서. -



[23]
1994년 7월 7일 밤, 그는 남북정상회담 숙소로 쓰일 묘향산 특각을 둘러보다 쓰러져 다음날 새벽 2시에 82살로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북한측은 표면상으로는 과로로 인해 심장병이 발병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의 말년에 모든 권한은 김정일에게 쥐어진지 오래였고 김일성이 하는 일이라곤 정치에서 손을 떼어 주석궁의 자기 사무실에 앉아 혁명열사릉을 감상하고 먹고 자는 것이었으니 과로 보다는 노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생전의 김일성은 과거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다며 자기가 죽으면 혁명열사릉에 자신의 시신을 안치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를 신격화시켜 권력 이양을 정당화하고자 한 김정일은 시원하게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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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속에 놓여 있는 김일성의 시신.

김일성이 죽고 나자 당연히 세뇌된 북한 주민들은 통곡을 했다.안그러면 죽거든 당초 북한측은 사망 순간부터 34시간 동안 비밀에 부쳤다가 조선중앙방송평양방송 등 북한의 주요언론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에서 “심장혈관과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에 쌓인 정신적 과로로 19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됐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되어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아나운서들은 김일성의 사망 당시에 방송에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일성 동지께서 뜻하지 않게 서거하신 것은 우리 당과 혁명의 최대의 손실이며 온민족의 가장 큰 슬픔"이라 말했다. 물론 김일성이 죽어서 휴가도 못 나가게 된 남한 장병들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고 한다.

이후에 김정일은 1994년 7월 20일에 금수산태양궁전(당시 이름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되어 있는 김일성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평양 시내를 한바퀴 돌고 다시 안치하도록 명령했다. 이날 아침 평양시민들은 김일성의 영구차를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모여들어 영구차가 지날 때마다 길가에 늘어선 군중들은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수령님, 수령님’하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북한의 지방 주민들도 조직적 또는 개별적으로 TV를 시청해야만 했고 김일성의 장례식을 봐야만 했다.

어쨌든 그렇게 장례식을 치루고 현재 김일성의 시신은 미라화되어서 그의 사무실이였던 주석궁을 개조한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되어 있다.

이후 북한 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리고 1년에 한번씩 정기 참배를 받고 있다. 하마터면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도 남북회담 당시 북한측의 회담 참가 조건으로 이 시체에 대고 참배를 할 뻔 했다고.

참고로 김일성을 미라화하는데는 예전에 레닌을 미라시켜서 지금도 보존중인 러시아 기술진들이 투입되었다. 참배 받을 때에 모양이 찌그러지면 안된다고 보존제를 비싼 재료를 쓰는 등, 경제사정도 안 좋은 주제에 이 시체 유지시킨다고 100만 달러 이상을 퍼부었으며, 지금도 1달에 2~3번씩 방부처리, 2~3년에 1번씩 재보존처리 등 돈지랄을 하고있다. 추정치로 만들때 100만 달러 이상이 들었으며 지금도 연간 그에 준하는 돈을 퍼붓고 있다고 한다. 저 시체 보존만 안해도 아사자가 몇 만명은 줄어들 것이라고 하니까 말 다했다.

미라 제조에 쓰인 기술은 엠버밍이라고 하여 시체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게 하는 것인데, 한참 전에 개발된 기술이지만 지금도 이 방법이 최상이라고 표현될 만큼 정교한 기술이나 그 대신 유지비가 미친듯이 깨지는 기술. 사실 엠버밍 기술도 고대 미라 제작 방법과 마찬가지로 썩기 쉬운 내장과 뇌는 제거하므로 그냥 껍데기만 남겨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후 아들 김정일도 사후에 박제가 되었다

아쉬운점은 최초로 성사될수있었던 1994 남북정상회담을 보름남기고 김일성이 사망한것이다. 김일성 사후 남북정상회담은 당연히 취소되었다.

4. 능력 [편집]

김일성은 무식하며 능력이 부족했다. 이는 그의 학력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24] 이는 한 나라를 끌어갈 지도자로서의 김일성을 말하는 것이며, 이 부분에서 그는 극도로 무지했다. 소련을 등에 업고 공산주의 국가를 이끌기는 했지만, 이런 그의 "무식함"은 마오쩌둥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었으며[25],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공산주의 자체에 그닥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한이 괜히 공산주의의 탈을 쓴 전제왕정국가가 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장시성 소비에트로 수차례의 초공을 격퇴해냈으며 불가능할 것 같았던 대장정을 성공하고 끝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였다. 사실 집권 이후에 병크가 워낙 커서 그렇지, 지도자로써 가져야 할 사람 보는 눈은 가졌으며, 전략가·전술가로서도 김일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특히 게릴라전의 교리는 거의 마오쩌둥이 새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리고 중국은 농민의 나라이므로 혁명은 농민들의 지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마오이즘"을 기반으로 혁명을 성공시켰고, 실제로 대부분의 동양권의 공산 국가에서는 소련처럼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게 아니라, 농민들, 특히 소작농들의 지지로 공산혁명을 성공시켰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중국베트남이다.

일례로 김일성의 이 무식함을 증명하는 일례가 바로 한국전쟁이다. 그 결과 김일성은 인천상륙작전으로 군세를 잃고 평양마저 함락당한 끝에 강계까지 도망쳤는데 그마저도 펑더화이쑹스룬 등이 이끄는 중공군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완벽하게 망할 뻔했다.

게다가 김일성의 정책은 주체사상을 선포하면서 도무지 공산주의라고는 볼 수 없는 요소를 많이 포함하게 되었다. 주체사상이라는 사이비 공산주의 사상을 만들어낸 것도 이 때문으로 보고있다.

다만 김일성은 권모술수 하나만 천재적이었고 그 때문에 한국전쟁이 끝난 즉시 박헌영 등을 숙청시키고 최용건을 바지사장으로 만들어 자기가 온갖 권력을 휘둘러댔다. 그러니까 김일성은 군인으로서는 정치군인인데 정치인으로서는 폐급 정치인인 것이다. 애초에 근본이 도적인 인물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도적은 오직 사리사욕만을 위해 살아가는 유형의 인간이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사실 김일성은 민족주의자이기는 하다. 아주 나쁜 의미로. 결국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전체주의+군국주의+파시즘 등등 인류 역사에서 등장한 모든 사상들 가운데 나쁜 것들만 다 뽑아내 섞어놓은 일개 개똥철학이자 그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는 극악무도한 사이비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4.1. 무능한 전쟁광[편집]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사탕연필대신 총알과 총을 쥐어주어야 한다. - 김일성

위의 말은 김일성이 강계 군수산업공장을 방문하면서 직접 한 말이다. 이때 김일성은 간부들에게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어야 하냐? 아니면 총알을 주어야 하냐?" 라고 묻자 의견이 반반씩 갈렸는데 김일성은 위의 말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간부들을 모두 반동으로 숙청시켰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북한은 지금도 남한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때부터 아이들에게 전쟁교육을 시켜 유사시 소년병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투자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마시게 하는 것이다."[26]라는 말을 했던 영국의 명 정치가 윈스턴 처칠 넘사벽으로 여러 모로 비교되기도 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맹활약한 전설적인 아프가니스탄 반군 게릴라 지도자로 조국을 구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 역시 어린이들까지 세뇌시켜 소위 자신들의 '성전'을 위한 도구로 써먹으려 하는 탈레반의 막장 행각을 비판하며 "여자와 아이를 죽이는 것이 어찌 지하드인가?"라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 전설적인 돌격소총 AK-47AK-74를 개발하며 유명해진 무기 개발자이자 소련의 군인이었던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역시 일본의 잡지사 Hobby Japan사의 <피크세루☆마리탄 - 소녀가 군인으로 묘사>의 홍보를 위해 그에게 사인을 받으러 온 일본인 편집자에게 '"아이에게 을 쥐어줄 참인가!"라고 일갈한 바 있다. 이만큼 소년병 제도는 그야말로 백해무익하고 되려 국가와 사회를 막장으로 만들 뿐이라는 것은 군사 분야에 대해 조금만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알 법한 부분인데도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김일성이 독재와 적화통일을 위해 얼마나 전쟁에 미쳐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일성의 군사적 능력은 매우 형편없었다.[27] 실제로도 김일성이 직접 지휘해서 승리한 전투는 도저히 질래야 질 수 없는 압도적인 물량차가 났던 전투인 보천보 전투[28] 한국전쟁 중의 오산 전투 정도였다.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으로 UN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인민군에게 총 후퇴 명령을 하달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피로써 조국을 사수하자" 고 라디오 방송을 내보낸 뒤 평양을 떠나 덕천으로 피난했고 전쟁 시작할 때의 모 씨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건 기분탓이 아니다한국군과 UN군이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자, 피신 장소였던 덕천을 떠나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한다. 그런 뒤에 강계의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남조선 해방을 호언장담했던 김일성은 스탈린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림은이 당시 김일성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얘기를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일성은 완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으며 시베리아 유형을 면치 못하리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다고 한다[29]

한국전쟁 중 자꾸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김일성에게 펑더화이"당신은 요행만 믿고 전쟁을 일으켰나!"라고 비난하였고 그래도 정신 못 차린 김일성은 유엔군한국군의 반격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이 주도하던 전세가 다시 밀리게 되자 북한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 상의도 없이 멋대로 북한군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유엔군이 중공군을 기습하여 중공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고, 이 때문에 펑더화이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홍콩 유력지 "명보"에 따르면 분노한 펑더화이가 김일성의 뺨을 때렸고 나이스샷 그 탓에 김일성이 일주일 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펑더화이는 북한군이 벌이는 대대적인 양민학살과 조직적인 약탈, 그리고 그로 인한 한국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김일성을 불신하였다고 한다. 비록 삼대기율 팔항주의는 허구로 밝혀졌고 중공군도 잔혹하기는 매한가지였다지만 적어도 중공군북한군만큼 막나가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시비만 걸어놓고 정작 진짜 싸움은 쑹스룬에게 죄다 떠넘겼을 뿐이었다. 즉,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한 것이 없다. 전쟁 초반의 선전은 6사단장 방호산 등의 활약과 전쟁 경험이 많았던 조선족 부대인 조선의용군의 도움으로 달성한 것이고, 후반의 반격은 쑹스룬이 지휘한 중공군이 주도한 것이다.

4.2. 무자비한 숙청광[편집]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은 6.25 전쟁 도중에도 진행했다. 전쟁 초기 김일성은 잦은 전술적 실패와 자신의 오류를 부하에게 전가하면서 처형을 명령하거나 강등시키는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의 잘못을 상대에게 뒤집어 씌웠다. 1950년 6월 28일 인민군 제3, 4 사단은 남진하여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제1사단(사단장 최광)의 진군이 문제가 됐다. 전쟁이 시작되자 제1사단은 고랑포를 거쳐 임진강에 도착했으나 국군 제1사단의 조직적인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진군이 타 사단에 비해 지연됐다. 당시 고랑포→임진강→문산→서울로 진군 경로를 하달한 이는 전쟁계획을 세우고 지침을 내렸던 최고사령관은 김일성이었다. 임진강에 도달한 제1사단장 최광은 예하 연대를 장악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김일성은 전선사령관 김책에게 최광을 체포하여 총살시키라고 명령했다. 당시 김일성은 제1사단의 부진한 진격에 대단히 신경질적이었으며 자신의 계획이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일체의 반성도 없었다.

김일성의 작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던 사례는 인민군 제2군단의 수원 점령 실패에서도 나타났다. 인민군의 제1차 작전에서 6월 28일까지 서울을 점령한다는 작전임무는 제1군단에 의해 성공적으로 달성됐다. 그러나 제2군단이 같은 날까지 수원을 점령한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6월 28일까지 한국군의 주력을 수원에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김일성의 작전목표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김일성은 수원점령에 실패한 인민군 제2군단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문책의 칼날을 들이댔다. 제2군단장이던 소장 김광협을 제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켰고, 참모장이던 최인은 보직 해임시켰다. 예하의 제2사단장과 제12사단장도 보직 해임과 동시에 대좌로 강등시키는 치욕적인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소장이던 최현은 제2사단장으로 임명됐다.

김일성의 책임전가성 문책은 전쟁 후에 더 잔인하게 나타났다. 전 조선노동당 비서였던 림은(林隱)에 따르면, 6.25 전쟁에서의 무참한 패배는 김일성으로 하여금 '피의 숙청'을 단행케 한 계기가 됐다. 자신이 전략안이 없음으로 인해 패배한 전쟁의 책임을 군사령관에게 전가하고 개인 독재의 길을 여는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김일성의 숙청은 그 잔인함에 있어 스탈린을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림은 자신이 희생의 직전까지 갔다. 그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장군 중 95%에 해당하는 70여 명이 학살 내지 처형되고 당·정·군의 간부급 20만 명이 숙청됐다.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된 사람들을 합하면 희생자 수는 무려 수백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30]#

또한 김일성은 항상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무정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에 숙청해버렸다. 김일성이 김무정을 밀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였다. 김무정이 평양 방어는 무리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억지로 평양 방어를 떠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일성은 평양이 함락당하자 방어사령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서 김무정을 실각시켰다.

6.25 전쟁에 대한 피해와 책임을 자신이 지게 될까 두려웠던 김일성은 자신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상으로 떠오른게 박헌영남로당파였다. 김일성 정권은 한참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에 이미 박헌영을 체포하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남로당파 간부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전 북한 내무상, 내가 치른 북한의 숙청

결국 박헌영은 한국전쟁 책임론에 휩싸여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3월에 체포당한다. 당시 체포당한 이유는 '리승엽이 미군과 비밀리에 내통한 간첩의혹'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리승엽은 6.25 전쟁 때 인민군 서울점령 치하 때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휴전 직후 미국 스파이, 반당종파분자 등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당에서 제명당하고 직위에서 해임당했다. 1955년 12월 15일, 박헌영은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고 결국 사형 판결을 받았다. 재판 직후 증인으로 나와있던 리강국 등 주요 남로당계 간부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북한에서 고위직 지내다 김일성으로부터 신변위협을 느껴 소련으로 망명한 박길룡에 따르면, 박헌영은 7월 19일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세워진 꼭두각시 답게 김일성 역시 스탈린식 개인숭배를 자신에게도 적용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후원자였던 스탈린이 죽고, 흐루시쇼프에 의해 스탈린의 신격화가 중지되었다. 김일성이 동유럽 순방을 위하여 북한을 비운 사이 연안파소련파는 소련의 지지 아래 연합하여 김일성 실각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연합한다.

그 연합 전면에 나선 서휘, 윤공흠, 리필규는 출당 조치되고 최창익박창옥의 당직은 박탈되었다. 동시에 최창익과 박창옥은 내각부수상직 등의 정부 직위도 박탈되었다. 반대파의 완전한 제거를 위하여 '반종파투쟁'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김두봉, 오기섭, 류축운 등이 현직에서 해임되는 등 1957년 여름까지 200여 명의 반대파 인사들이 '종파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종파주의자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두봉을 국가 주석의 자리에서 내쫓는 등 실각시킨다. 김일성 반대파의 대표나 다름없었던 최창익은 완전히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어 일생을 마쳤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이 1956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연안파와 소련파가 숙청되었다.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도 8월 종파사건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 한다. 8월 종파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수의 반대파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정치범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지속적으로 그 규모가 확대된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최후의 분파였던 갑산파는 1967년 경제건설 노선에서 김일성과 이견을 보이다가 결국 숙청되고 만다. 대표적인 예가 김일성의 심복이었던 김광협이다. 이러한 숙청은 1960년까지 이어졌고 김일성의 숙청을 피하여 중국으로 도망친 사람의 수만여 명에 달했다.

5. 가족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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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김태서가 시조인 전주 김씨의 후손이다.

8대 조부 : 김계상
8대 조모 : 불명

7대 조부 : 김차형 (1699년 ~ 1768년)
7대 조모 : 나씨 (1703년 ~ 1744년)

6대 조부 : 김욱 (1728년 ~ 1813년)
6대 조모 : 도민숙 (1735년 ~ 1811년)

현조부 : 김민수 (1770년 ~ 1854년)
현조모 : 고송희 (1772년 ~ 1832년)

고조부 : 김송령 (1810년 ~1899년)
고조모 : 나현직 (1811년~ 1897년)

증조부 : 김응우 (1845년 ~1930년)
북한에서는 그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민중들을 선동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하게 만든 주동자라고 선전하고 있다…지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개소리. 실제로 이 사건의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당시 평안감사이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와 철산부사 백낙연이었고, 이 사건의 행동대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퇴역 장교 출신의 박춘권이었다. 물론 당시 기록 그 어디에도 김응우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제너럴 셔먼 호 사건 당시 김응우는 22세의 햇병아리 묘지기였을 뿐이지만 박규수는 이미 60을 바라보는 노회한 고위 관료였다. 누가 이 사건을 주도했을 지는 알 법하다.
증조모 : 리씨 생몰년 미상

조부 : 김보현 (1871년 8월 19일 ~ 1955년 9월 2일)
조모 : 리보익 (1876년 5월 31일 ~ 1959년 10월 18일)
두 사람 다 북한 정권이 세워지고 나서 사망했다. 한민족을 막장으로 몰아넣은 손자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친 : 김형직[31] (1894년 7월 10일~1926년 6월 5일)
모친 : 강반석[32][33] (1892년 4월 2일~1932년 7월 31일)

처 : 정실 김정숙 (1917년 12월 24일 ~1949년 9월 22일)

후처 김성애 (1928년 ~ 2014년)(추정)
첩실 제갈공명 아무개[34]


형제


자식


의형제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로버트 무가베.
믿지 못하겠지만 정말이다. 형식상 외교 의례긴 했어도 좌우간 세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고, 그 중 김일성이 큰 형을 맡았다고(…) 생각해보면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이 전부 존재하는 구성이다. 황인종 대표 악귀 김일성, 백인종 대표 악귀 차우셰스쿠, 흑인종 대표 악귀 무가베...

의외로 사람들을 충공깽하게 만드는 사실은 김일성 집안이 본디 개신교 집안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강반석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장로 강돈욱의 딸이었다. 김일성 본인도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다고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밝힌 바 있다. 일각에서는 예수쟁이들의 광신적 전도술을 그대로 배워 써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럴 듯하다. 실제로 이오시프 스탈린도 유년기에 신학교에서 배운 교리문답을 죽을때까지 써먹었다고 하니까. 김일성이 다니던 교회중 하나의 담임목사가 독립운동가인 손정도 목사인데 이 분은 대한민국 해군 초대 참모총장 손원일의 부친되는 분이다. 이런 인연으로 손제독의 형 손원태 박사는 김일성과 의형제처럼 지냈고 김일성 사망시 조문차 방문하고 방문기간에 생일을 맞은 손원태 박사의 생일잔치를 김정일이 직접 차려 주기도 했다.

북한이 1946년에 내놓은 공식 김일성 전기인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에 따르면 1930년대에 한영애란 여자와 하얼빈에서 살림을 차린 적이 있었으나 난리통에 헤어졌고 이후 최희숙이란 여자와 살림을 차렸으나 일본인들이 김일성을 홧병 걸려 죽게 하려고 사로잡아서 눈알과 심장을 뽑아 죽였다고 김일성은 주장했다.[41] 한영애는 김일성이 한반도 이북의 수괴가 되자 6.25전쟁 도중에 김일성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동하다가 공습으로 죽었다 한다. 이후 최희숙의 친구인 '키도 작고 얼굴도 못난' 여자인 김정숙과 결혼했다고 김일성은 구술하고 있는데 이후 이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은 철저히 말소되었고 지금은 읽고 싶다면 평양 인민대학습당 비공개 열람실에 꿍쳐져 있는 정로 신문을 뒤져봐야한다. 하지만 위키러 중에 평양에 가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6. 이야깃거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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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에는 크고 아름다운 혹이 있었으며, 혹부리 영감 이 꽤나 쪄 있어 반공 애니메이션에서는 주로 돼지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3대까지 세습되었다. 빨갱이를 돼지로 묘사하는 것은 이것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심지어 똘이 장군에서는 인간을 코스프레한 돼지로 등장해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김일성 본인은 이 콤플렉스를 거론하는 것을 무척이나 기분 나쁘게 여겼으며 이것에 관해 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만약에 논할 경우엔 아주 무시무시한 아저씨한테 끌려가서 코로 평양랭면 원샷을 하거나 아주 무시무시한 곳으로 끌려간다 카더라. 그래서 북한측에서 찍은 사진 중엔 김일성의 혹이 찍힌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 1988년 북한 정권 수립 40주년 기념 행사 때 프랑스 취재진이 녹화한 영상에 그의 혹이 드러난다. 20초 부근 참고.[42] 김일성의 혹은 지방종으로 추정되는데 외과 수술을 통해 조기에 절제할 수도 있었으나, 치료 시기를 놓쳤고 고령이 된 후라 수술을 하면 건강에 타격이 가겠기에 그냥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혹은 더 커졌고…[43]

  • 빨치산 시절부터 자신을 지지해 준 김책을 존경하였다고 한다.[44] 그가 죽고 나자 함경북도 성진을 '김책'으로 바꾸고 공업대학을 만들 때 그의 이름을 붙여서 '김책공업종합대학'이라고 짓기도 했다.

  • 의외로 어렸을때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생전 김일성이 인생에서 제일 후회하던것중 하나가 어렸을때 교회 열심히 안다니고 놀러다녔던거라고. 그가 살던 평양이 일제시대에서는 동양의 예루살렘이란 별명이 붙을정도로 기독교 강세지역이었는데 여기에 영향을 받은듯. 그냥 교회 착실히 다녀서 목사가 되었으면 지금의 김일성은 없었을터이니 전 인류사에 불행한 일.

  • 자신의 카리스마를 대중들에게 드러내는 걸 좋아한 나머지 1946년부터 1994년 사망한 해까지 육성으로 신년사를 내보냈는데,[45] 김정일 때에는 신년사 없이 공동사설이 신년사를 대체하다가 2013년에 김정은이 부활시켰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와는 완벽하게 정반대로 가는 인물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완벽하게 개무시한 인물이다. 지도자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최대한 누린 반면 자도자로서의 책무는 하나도 이행하지 않은 악질 독재자다. 특히 하나의 국가를 자기 집안 똥구멍 치다꺼리하게 만든 원흉이다.

  • 백괴사전의 김일성 항목은 모든걸 왜곡하는 동네답지 않게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놈으로 분류를 하는 등 가루가 되도록 깐다. 자기가 권력 잡기 위해서 6.25전쟁을 일으킨 책임 하나만 보더라도 부관참시를 수만번 당해도 부족한 인간쓰레기임이 분명하다.

  • 한국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스탈린에게 허락받으러 갔는데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반대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끈질기게 아양떨고 지랄부리고 하여튼 스탈린에게 허락 받으려고 별짓을 다했다. 결국 스탈린은 무려 48번씩이나 거절한 끝에 한국전쟁을 허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 뒤 인민군이 깨져서 패주하는 꼴을 쳐다만 봤다.

  • 북한에서는 문화어가 '수령님께서 몸소 쓰시는 영광스러운 언어'라면서 김일성이 과거에 말한 '지주놈의 상통'(면상), '자본가놈이 뒈졌다', '대가리를 돌로 까부신다'와 같은 온갖 각종 욕설이 난무한 막말문화어라면서 대놓고 교과서에 실어놓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고. 그러나 타국에서는 보기 힘든 유례없는 일인데, 아무리 도널드 트럼프로드리고 두테르테와 같은 사람들이 막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에 비하면 상당히 양반이며 적어도 미국이나 필리핀은 대놓고 교과서나 언론에서 쌍욕을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불분명하나, 일각에서는 1967년 김일성이 "전투적 화법을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을 시초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도 지도자의 품격에 따라 달라져서, 김정일 때는 더 심해졌다고.

  • 미국 시사만화가 래넌 루리는 김일성을 살인 로봇처럼 풍자한 그림을 그렸는데, 1970년대 한국에선 좋아라 자주 소개했다. 그런데 루리는 박정희는 거만떠는 독재자로 풍자하여 그렸기에 이것이 반대로 북한에서 종종 소개되었고, 박정희 살아생전 한국에선 이 그림은 공개불가였다. 남북한에서 사랑받은 만평가 그런데 둘 다 세계 독재자 랭킹에 올라가 있다. 김일성은 10위, 박정희는 김정일과 공통으로 16위다. 무서운 사실은 17위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라는 것.

  •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연설을 하던 도중 백의사에게 암살당할 뻔했다. 아깝다 수류탄을 암살자가 던졌는데, 그 자리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집어던져 암살을 모면했다. 그 대신 그 장교는 가까이서 터진 수류탄 덕에 팔 하나와 여러 곳을 다치고 의병제대했다. 그 때문에 이승만김구는 파쇼테러단이라고 비난받았다. 김일성이 권력을 확실히 잡은 5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이 장교를 손수 찾아가 고마워했고, 북한에서 따로 연금과 여러 가지를 제공하여 은혜를 보답했다고 한다. 이 장교가 죽을 때도 북한에서 장례비를 지원했다.

  • 외국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 신격화의 정도가 나오는데, 평양의 웬만한 공원에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덮인 벤치가 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은 '수령님께서 앉으셨던 의자'라서 길이 보존해야 한단다(…). 개인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 영구 사유화라니. 이건 뭐…

  • 북한에서 제작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김일성[46] 역할을 한 배우는 평생 그것만 해야 하고 대단히 경호를 잘 해준다. 일명 1호 공훈 배우. 참고로 북한에서는 박정희 전문 배우로 유명한 재일교포 출신의 배우도 이 정도 대우를 받지만 그 사람은 다른 역도 꽤 나왔다.

  • 작명법의 관점에서 그 후손들의 작명은 상당히 희한하다. 본래 부자간에는 같은 한자를 피휘하여 작명하는 것이 원칙인데, 아들 김정일과 손자들[47] 모두 각각 그 아버지의 한자를 차용해서 이름을 지었다. 김정일의 경우, 김정일(金正)에서 김정일(金正)로 일부러 개명까지 거친 이름인데 이는 아버지의 이름자인 '日(날 일)' 자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김일성의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우기 위함이었다고. 본래는 그의 형제들인 김평일, 김영일, 김만일과 함께 '一(한 일)' 자 돌림자를 썼다.

  • '소 뒷걸음질로 쥐 잡는 격'으로 사람(과 국가)를 살리기도 했다.[48]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박정희[49], 장제스[50], 요시다 시게루[51] 등이 있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 인간 때문에 일본은 아시아의 스위스가 아닌 경제 대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 해방 이후에는 한국의 정적들에게 죽을 위기를 몇 차례 넘겼다. 수류탄 투척을 받아서 겨우 살아난 적도 있다고. 소련군정문서 46년 4월 6일자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는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 전에 북한으로 파견된 테러분자들이 김일성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도 보도된 바 있다. 자동차에 수류탄이 투척되었는데 자동차는 어떤 파손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테러분자들은 이승만이 교부한 것으로 보이는 추천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만식 앞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 김정일이 실권을 쥐게 된 1980년대 이후로는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고, 유년기부터 항일투쟁과 해방 시기까지의 활동을 다룬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같은 책을 집필했다. 하지만 저 회고록은 자기 입맛에 맞게 항일운동사를 마구 뜯어고치고 윤색해 북한 밖에서는 양판소불쏘시개로 취급된다.

  • 평소 집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는데 특히 좋아했던 책은 역사책과 문학책이었으며 심지어는 한국에서 발간된 책까지도 읽었다고. 실제 1989년 소설가 황석영문익환 목사 일행과 방북하여 주석궁에 갔을 때는 황석영의 여러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까지 했을 정도. 문익환 목사는 성경책을 보여줬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 김일성은 시와 노래를 좋아해서,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 때 동북항일연군이 부르던 것을 1993년에 보천보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김일성이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와 자장가이다.[52] 그리고 김정일의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광명성찬가'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는 한문으로 지어졌고, 양강도 삼지연군에 화강암 비석에 새겨져 있다.

  • 서예 활동을 많이 했는데, 북한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의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친필비는 개성에 있으며, 인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 있는 건물로는 대동강여관과 김형직사범대학, 그리고 북한의 종합대학 중 하나인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 죽기 불과 한달 남짓 전이었던 1994년 6월 10일에는 지미 카터와 회동해 북미관계의 개선을 꾀하기도 했고, 당시 김영삼과 남북정상회담도 추진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김일성의 죽음에 대해서는 온갖 설이 나돌고 있는데, 김일성의 이러한 외교 정책을 탐탁치 않게 여긴 김정일이 몰래 암살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밑의 '김일성 암살설' 참조).'

  • 북한 원의 인물이다. 북한 원 2기 3차 시리즈 100원권 지폐에는 '혁명의 영재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라고 김일성을 설명하고 있다. 개소리 집어쳐! 북한에서 김일성이 어떤 사람인지를 감안한다면 이 돈은 쓰일 일이 거의 없으며 북한의 경제상태가 어떤지를 감안한다면 이 돈은 그냥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쓸모가 아주 없는 건 아니고 불쏘시개 용으로는 상당히 쓸만하다 카더라

  • 김일성의 장례식에 당시에는 북한의 인민들이 참가 안하면 코랭면을 먹을 게 무서워서 총동원되어 매일 생화를 들고 김일성의 동상을 찾았고 이로 인해 북한에 꽃이란 꽃은 모조리 팔려버리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김일성 사망 당시에만 해도 김일성김정일의 생일날에는 김일성 동상이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는 관례가 있었고 이 시기를 이용하여 짬짬이 꽃장사에 나서는 장사꾼들이 있었는데, 김일성의 장례기간 동안마다 이 사람들은 말 그대로 떼돈을 벌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북한 돈으로 5원밖에 안 하던 생화 한송이의 가격이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10배 가까이 오른 50원까지 거의 인플레이션 급으로 올랐을 정도다 조화코인. 심지어 그 가격에도 꽃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일시적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가 김일성 동상앞에 놓이기도 했다.

  • 이 자식의 이름을 딴 거리 및 시설 이름도 있다! 이름은 "김일성 거리"로 모잠비크마푸투, 캄보디아프놈펜, 시리아다마스쿠스에 있다. 특히 다마스쿠스에는 김일성의 이름을 딴 공원도 있는데, 공통적으로 위의 나라들은 다 친북 성향들이다. 이전에는 '통일되면 개명요구를 할 수도 있다'는 서술이 있었으나, 외교적 간섭으로 비춰질 수 있으므로 그냥 묵인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 그리고 작곡가 김형석이 닮은 꼴로 각종 북한 드립의 희생양이 되었다

  • 죽기 1년 전 간이 부었는지 노망이 들었는지 "스탈린은 내 친구요."라고 지껄이기도 했다. 지옥에서 '친구'에게 쪼인트 까였을 듯[53]

6.1. 외모[편집]

"교수님, 저 공산주의자가 될 것 같아요! 신문에서 김일성 사진을 봤는데 아주 미남이에요!"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이후 한국 언론에 실린 김일성의 사진을 본 브루스 커밍스의 학생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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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붉은 군대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했을 당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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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의 김일성과 아내 김정숙. 앞의 아이는 3살 때의 김유라(김정일). 체형은 부계지만 이목구비는 모계 유전자가 강한 것 같다.

키가 무려 193cm나 되는 사람이었다는 소문도 있는데 탈북자들이 이 설을 신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2017년 시점에서 추정되는 실제 키는 177cm다. 그마저도 말년에는 173cm까지 줄었다.[54] 177cm면 2017년 한국 기준으로도 평균 이상이며, 영양이 부족한 북한 기준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장신이다. 게다가 덩치도 제법 되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 같은 덕스런 얼굴이 북한 기준으론 좋은 외모. 사실 장군님 킹왕짱, 희망 어쩌고 세뇌되어 자라니 미학이 그렇게 형성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김정일보다는 김일성이 외모가 좋다. 게다가 본인은 이러한 외모에 자신이 있었는지 아니면 카리스마를 과시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항상 전면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고, 이는 그의 아들 김정일이 결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정치기반 확립과 숙청을 감행한 것과는 꽤나 대조적이다. 그리고 김정일은 언제나 인민복 차림인데 김일성은 정장을 좋아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물론 이상의 사항은 어디까지나 1970년대 이후 투실투실 살이 찌기 전의 이야기. [55] 1946년 북조선로동당 당수 취임 즈음 때까진 저 날씬한 모습이 유지됐지만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될 때 투실투실해진 것을 보면 2년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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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에 마지막으로 중국 방문을 했을 때 촬영된 사진들. 38년 만에 덩샤오핑과 공식 석상에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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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와 협상하던 중 뱃놀이를 즐기고 있는 김일성. 그리고 정확히 14일 후 김일성은 지옥으로 갔다.[56]

왠지 대두가 됐다.

6.2. 김일성 가짜설[편집]

해당 문서 참조.

6.3. 1986년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편집]

해당 문서 참고.

6.4. 김일성 암살설 등[편집]

김정일이 김일성을 암살했다는 가설.

이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 즉 남북간 정상회담이 최초로 성사될 뻔 했는데,[57] 겨우 보름을 앞두고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다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으로 성사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급작스러운 사망은 아직까지도 떠도는 김정일의 의한 김일성 독살설의 배경이 된다. 이미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을 원치않아 아버지 김일성을 독살했다는 설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 일을 두고 "내 기에 눌려 죽은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이런 사안에 대해서 드립을 치는 김영삼의 패기[58]

독살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원체 떠받들고 악화되는 경제상황을 왜곡해서 보고했기 때문에, 김일성은 북한의 경제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4년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왕이면 김 대통령이 기차를 타고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경의선 철도 보서 작업을 언제까지 할 수 있냐고 철도상에게 물었는데, 철도상은 대답을 못하고 쭈뼛거리기만 한다.

이에 김일성이 담배곽으로 책상을 툭툭 치면서 "아니 배짱 좋던 사람이 왜 그래? 김영삼이가 오는게 마음에 안 들어?"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이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는데, 철도상이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 폭탄 발언을 하면서 삽시간에 공기가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아니, 자금이라든가 물자가 부족한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게 대체 무슨 소리야?"라고 반문했고, 철도상은 마침내 배급이 중단된지 3개월이 지나 동원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한다.[59]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김일성은 즉시 김정일에게 전화해서 "이 김일성이가 이팝과 고깃국을 약속하며 정권을 잡았는데 배급조차 못 준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 그따위로 일할 거면 당장 당 조직비서를 그만두라" 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설마 김일성이 그런 개념 발언을?[60]

김일성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유가 철도상 때문임을 파악한 김정일은, 관련 장관을 호출하여 마구 혼을 냈고 후술할 "통일을 주장하는 자들은 다 반동"이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 직후의 행동이 의미심장하다. 이미 묘향산초대소에 있던 김일성에게 의료진들이 매우 과로하여 쉬게 해야겠다고 진언하여 승낙을 받아 의료진이 잠시 철수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때 김일성은 심장 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

이것은 북한에서 떠도는 상당한 괴담이고, 월간 신동아에서는 탈북자들의 증언 등을 조합하여 김정일의 고의적 의료진 철수와 김일성 방치로 결론을 내리고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실제로 김일성 사망 이후 김일성 경호를 담당하던 호위총국 제1국의 요원이 김정일을 향해 총질을 했다는 괴담, 호위총국이 숙청 재개편된데에는 김일성 암살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한 김정일이 주역할을 했다는 괴담도 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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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0월의 김일성과 김정일. 지 애비 꼬라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실제로 말년에는 김정일의 권력이 매우 강하여 김일성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는 증언이 적지 않기는 하다. 심지어 말기에는 김일성이 김정일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바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을 어느정도 유지하려면 통일 문제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계산을 해 남북 고위급 회담 등을 전격 추진하는가 하면 김달현 부총리를 비롯한 개혁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을 직접 서울로 보내기까지 했는데 당시 김정일은 "통일, 통일하는 것들은 다 노망난 것들이야!"라는 망언을 하는가 하면[61], 김일성이 주재한 회의에서 김달현이 "더 이상 공산주의로는 안됩니다. 경제개방을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자 김정일이 화를 내며 제지하다가 김일성이 "일단 얘기나 들어보자."라고 말한 일화까지 있었다. 게다가 김일성이 공교롭게도 남북정상회담 바로 직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더욱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이후 김정일은 후계자를 논하는 것 자체를 반역이라 간주하고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김일성이 김정일을 너무 일찍 후계자로 내세우는 바람에 권력을 모두 빼앗기다시피 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전철을 밟기 싫었다는 설이 있다. 이 때문에 김정은의 후계체계는 빠르고 급작스럽게 진행되었고, 이것 역시 김정일이 권력을 빼앗기는 것을 매우 두려워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차피 1980년대, 90년대 들어 7~80대에 접어든 김일성이 죽는다고 해서 딱히 이상할 리가 없었고 실제로 1990년대 초반 남북 고위급 회담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김일성의 건강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었다. 특히 황장엽 비서의 증언에 따르면, 이미 김일성은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노인이었으며, 그해 5월에도 눈 수술을 받아 휴식이 필요했는데 지미 카터 전 대통령를 만나면서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 황 비서는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에서 남한 주민들이 항일영웅을 만세로 맞이할 것이고, 김일성이 통일의 주도자가 될 것인 양 아첨보고를 올리는 바람에 크게 들떠서 무리하게 정상회담을 진두 지휘하다 과로가 겹쳐 사망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참고로 지미 카터와 만나는 독재자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죽거나 권좌에서 쫒겨나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는데, 김일성만큼은 진지하게 카터에게 원인이 있다는 해석이 있다. 이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한 사람이 카터이기 때문.

하지만 2010년대에 이르러서 김정일 암살설이 정말 신빙성이 커보이는 이유는 바로 김정일의 후임인 김정은이 자기 고모부이자 김정일의 매제이자 김일성의 사위인 장성택을 정말로, 그것도 아예 대놓고 살해했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김정일의 아들이 이런 패륜을 보여줬으니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를 암살해도 정말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사실처럼 보여지는 근거인 것이다.

이러한 김일성 암살설이 나도는 배경에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김정일 통치기의 북한에 실망한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김일성 시절을 낙원으로 여기는 심리가 생겼고(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았으니까.), 이렇게 상황이 악화된 데에는 김정일 탓으로 생각하다 보니, 김정일에 대한 분노가 왜곡된 형태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명확한 증거를 내놓을 수 없는 그냥 떡밥일 뿐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파일:충격 북한 패륜사건[이만갑].mp4_20160428_162347.156.jpg[62]
그리그 그 후 김일성이 사망한 장소인 특각을 철거 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김일성이 잠시 앉았다는 벤치를 사적지라고 보존하는데 그가 있었던 별장을 치워버린다는건 암살설에 힘을 주고 있다.

6.5. 족보 집착[편집]

묘하게 자신의 성씨와 조상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전주 김씨 33세손(시조로부터 32대손)으로서 6.25전쟁 중에 전주 김씨 족보를 구하려고 무진 애쓰기도 했다. 한 일본 기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전주 김씨 족보와 조상의 영정을 모셔놓고 향을 피우는 방을 따로 마련해 놓은 걸 봤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또한 이 이야기 때문에 전주에서는 전주 김씨의 시조 김태서의 묘가 전주 모악산에 있기 때문에 북한과 전쟁이 나도 전주는 안전할 거라는 이야기를 우스개소리로 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6.25 전쟁 개전 초기(9월)에 전주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본가인 전주 김씨 시조는 사실 경주 김씨의 일파[63]인 김태서[64][65]로서 그 후손 전주 김씨는 몽골 침입 당시 경주를 떠나 이주한 방계이며, 한동안 전주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주했다.[66] 즉 근원적인 조상은 신라쪽으로 닿는다.[67]경주시야말로 진짜 그의 뿌리인 셈.[68]

7. 발언[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 인민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높이 모시며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업적을 옹호 고수하고 계승 발전시켜 주체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여 나갈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서문 中.

천리마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인민은 쌀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도 책임이 있어!
- 1950년 11월 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 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우리 인민군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군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릴 때까지 용감히 싸우라.
-10월 10일 한국군과 UN군이 파죽지세로 평양으로 진격해 오자 평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기 전에 한 라디오 방송. [69]

남조선 인민들은 스스로 해방 투쟁을 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무장공비지속적으로 침투시켜서 해방구를 만들고 봉기를 시켜야 한다

생활 수준이 높아질수록 인민들은 사상적으로 나태해지고 행동은 더 산만해진다.
야, 저번엔 "이팝에 고깃국"이라며?

우리 행성에서 핵무기가 있는 한 핵전쟁의 위협은 가셔질 수 없으며, 인류는 항시적인 핵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핵무기의 시험과 생산, 배치를 금지하고 지금 있는 핵무기들을 축감하며 나아가서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합니다[70]

남조선에서 미국 놈들을 몰아내야 하겠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그냥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미국놈들과 다시 한 번 꼭 벌여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전쟁 준비를 다그쳐야 합니다. 동무들은 하루 빨리 핵무기장거리 미사일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

8. 김일성/창작물[편집]

  • 198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의 얼굴이 공개되는건 남한에서는 코렁탕의 지름길이었다(…). 대부분 캐리캐처로 등장했으며 브리태니커나 뉴스위크지에서 김일성의 사진이 나올 경우 먹지로 처리하거나 찢어버려서 수입되었다. 해외제작 6.25다큐의 경우는 김일성의 육성부분은 묵음으로 처리했다. 이런 것들이 풀린시기는 88올림픽 전후.


김일성을 연기한 배우는 다음과 같다.

  • 김희라 - 북한 건국사를 다룬 KBS 미니시리즈 혹이 포인트.

  • 전광렬 - 여명의 그날, 해방 직후의 젊은 김일성. 해당 작품은 외압성 조기종영으로 끝났다. 외압을 받은 이유는 김일성 미화 논란 때문이었다. 이 드라마의 김일성은 처음엔 이상을 가진 독립투사였으나 점차 권력을 장악하며 독재자로 타락하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전광렬은 기존의 '혹부리 돼지' 이미지와는 다른 샤프한 미남이었고(물론 위에 나왔듯이 젊은 시절의 김일성은 나름대로 미남이었다), 1990년 당시에는 김일성 가짜설이 아직 대세였던데다 김일성의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든 경직된 시기였다. 정작 재미있는게, 이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박정희의 모습도 일본군 신분으로 비밀 광복군 활동을 하는 등 실제보다 미화된 모습으로 나왔다는 것.

  • 문오장 - 지금 평양에선에서 손과 입만 나오는 걸로 처리.

  • 국정환 - 제1공화국(드라마)

  • 주현 - 제4공화국(드라마)

  • 박철호 - 서울 1945

  • 이원종 - 인천상륙작전(영화)

9. 관련 문서[편집]


[1] 현재 기준으로는 평양직할시 만경대구역 칠골1동이다. 한편 고순화면 남동(고평면 남리)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2] 전쟁에 마뜩잖던 이오시프 스탈린마오쩌둥을 설득하여 억지로 전쟁을 일으켜서, 결국 태평양 전쟁 패전국이었던 일본을 경제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기여한 장본인이며 빈사 상태에 놓인 중화민국타이완 섬으로 도주하게 하여 살려놓은 장본인이다.[3] 독실한 개신교도로 김일성도 어렸을 적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고 한다. 반석이란 이름도 베드로의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4] 왕윤성은 김일성의 회고록에서 '머리가 커서 왕다노대'로도 불렀다고 소개된 인물이다.[5] 안찬일 박사님의 해설, 이 영상 23분부터 시청 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하지 않았다1[6] 그 산하 제2방면군장이 김일성이었음[7] 정상진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 해군 중위로 태평양함대 예하 해군보병연대에 소속되어 한반도 상륙작전에서 활약해 적기훈장을 수여받았고, 청진시의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8] 이때 소련은 이미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둘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실제 소련군은 주둔후 지역에 있는 치안조직을 모조리 해산한 뒤 보안대를 편성하고 김일성이 수장인 조직 휘하에 두었으며, 김일성과 반대되는 옌안파 세력인 조선의용군이 입북하려하자 이를 막았다.[9] 이상우,'북한 40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성과 변천',을유문화사,1990,pp349-350[10] 조선로동당 창건일의 유래다.[11] 남한에 비해 북한 지역에는 지주 세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저항의 동력이 충분치 않았다.[12] 스탈린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을 심하게 무서워했다. 그런게 모스크바에 떨어질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싸우는 것을 피하고 싶어했다.[13] 공산주의에 대한 극동 최종방어선은 필리핀-일본으로 정하는 애치슨 국방장관의 선언이다. 대한민국은 제외되었는데 이는 6.25전쟁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 애치슨 라인은 전쟁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설이 중론이라고 한다.[14] 단, 연설의 대부분은 김책이 했으며 이후 김일성은 성진시김책시로 부르도록 지시하였다.[15] 스탈린의 의도는 한반도같은 당시 상대적으로 가치 없는 땅에 미국의 역량을 묶어 놓고 유럽 쪽으로 공산주의를 확장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한반도는 지금보다 전략적 가치가 낮았다. 또 한가지 이론은 미군을 시험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이 나를 시험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핫바지처럼 행동하면 스탈린이 계속 여러곳에서 도발할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16] 그나마 갑산파들도 김정일의 승계 과정에서 숙청된다. 지금 남은건 이른바 '백두파'라 하는데 한마디로 그냥 김씨 왕가 후빨러들이다.[17] 그렇다고 김일성이 오늘내일 하는 수준이였다고 보면 곤란하다. 정당성이 어찌되었든 제일 힘 쎈 놈이 짱이라고,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어 마냥 무시할수는 없는 존재였다. 박헌영만 해도 본인의 실질적 기반은 죄다 남쪽에 남겨진 채로 자기 몸만 북쪽에 온 케이스라 불안하긴 마찬가지였고, 실제로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쓴 적도 있을 정도였다.[18] 정치학자 서동만은 다양한 정파가 공존하고 있던 1950년대의 북한을 지금의 북한과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존재한 시기로 보았다. (서동만, 1950년대 북한의 정치갈등과 이데올로기 상황) [19] 다만 최광은 김일성 통치 말기에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복직해 죽을 때까지 유임했다. 물론 군 상층부에서는 그냥 늙다리 바지사장이라고 뒷담화를 깠다지만.[20] 1974년에 아예 김정일을 '후계자'로 확정시켰고, 20년 후 사망하여 자연스레 김정일에게 넘어갔다.[21] 덩샤오핑이 뒤에서 도와줬기에 가능했지 김일성이 매우 잘나서가 아니다. 덩샤오핑이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준건 물론 아니지만.[22] 북한에도 선거 제도가 있긴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김정일도, 김정은도, 그 외 여러 권력자들도 전부 다 투표로 뽑힌거다. 다만 후보는 단 한명 뿐이며, 투표소에 보위부 요원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어서 반대표를 행사하면 누가 썼는지 다 보이니까… 그 외 다른 투표라고 해봐야 조선로동당에서 하는 거수 투표 정도가 있지만 주체가 그 조선로동당이니 결과가 너무 뻔하다. 사실상 말 그대로 그냥 쑈일 뿐이다.[23] 제목은 7월 4일이지만 실제로는 7월 9일자 뉴스다. 3분 40초에 운지천이 나온다 [24] 김일성은 중졸이다. 그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중졸 학력이면 상당한 근대식 교육을 받은 것이다.[25] 사실 마오쩌둥은 후난 사범학교를 졸업했고 베이징 대학에서 약 10개월 사서로 근무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중공 수립 후 저지른 일들이 워낙 병크가 커서 학교도 제대로 안다닌 놈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마오쩌둥의 문제는 그가 꽤 박식한 사람이었지만 학식과 감성의 조화가 없어서 마치 현실의 일을 역사책 안의 일처럼 아무런 감정없이 처리하여 생명을 경시했고 일부 분야에 있어서 심각할 정도로 무지하여 지식의 균형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 자신의 전공 아니면 분야에서는 무식한 것이 당연하지만 마오쩌둥은 자신의 독단으로 전문가들을 부르조아지로 몰아 찍어누르며 자신의 망상을 관철시킨 것이 문제였다. 그 최악의 결과가 대약진운동...[26] 굳이 안 써도 되는 말을 다는 것 같지만 세상에 어떤투자든지 미약하게나마 리스크가 있다. 금 수백톤을 가지고 있어도 금값이 폭락하면 손해이지만 아이들에 대한 교육복지는 다른 투자와 달리 당장은 손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가장 효율적인 투자다. 그 아이들이 잘 배우고 잘 자라서 인재가 되어 나라를 훌륭하게 이끌면 교육비용과 복지비용의 수백배는 뽑아낸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투자들은 원금을 까먹을 수도 있으나 교육은 최소한 원금은 까먹지 않는다. (매년 불의의 사고로 죽고 잘못된 길로 빠진 학생이 꾸준히 나와도 사회로 진출해서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는 인재들이 훨씬 많다는 걸 생각하면…) 매년 한 나라의 교육비로 지출한 비용과 미래에 나라를 이끌 인재가 없는 것 중 어느 것이 리스크가 큰지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되는 문제이며, 괜히 '교육은 국가백년대계'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과 복지는 그 나라의 흥망이 달린 투자이며, 결론적으로 보면 본전이면 본전이지 결코 손해를 볼 수 없는 투자이기에 윈스턴 처칠이 가장 안전한 투자라고 한 것이다.[27] 사실 애초에 기본적인 군사적 식견이라도 있었다면 저 위의 발언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28] 약 170명이 동원된 반면 보천보에 있던 일본 병력은 군도 아닌 순사 5명이 전부였다. 그들 중 아무도 죽지 않았고, 심지어 김일성은 보천보에 넘어가지도 않았다.[29] 림은, (북조선 창설 주역이 쓴) '金日成 王朝', 沃村文化社, 1989) p252[30] 림은, '北韓 金日成王朝 祕史' 한국양서, 1982, pp.326-327[31] 개신교 미션스쿨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동문들과 '민족주의'단체인 조선국민회 결성에 참여했다. 아들과 달리, 이 단체의 목표는 일종의 준비론에 가까웠다고 한다.[32] 베드로의 그 반석 맞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장로 강돈욱의 차녀로, 그녀 본인 역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참고로 숙부인 강양욱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목사였다.[33] 북한에서 성모마리아처럼 숭배되는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은 안도현 만보라고 부르는 중국 동네에서 아편농사를 지었던 조광준이라는 홀아비와 재혼했었다.북한 당국 강반석에 대한 내용 빼달라고 사정 [34] 김일성의 주석궁 안마사 내지는 간호사. 김일성의 많은 자식들 중 하나인 김현의 모친. 이외의 알려진 것은 없다.[35] 기쁨조 출신이라고 한다.[36] 김일성 말년에 전담 간호장교 였다고 한다.[37] 1993년~1989년 9월까지 부주석, 2003년부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38] 3살때 김일성 관저에 있는 연못 근처에서 놀고 있다가 그 연못에 빠져 익사했다. 일설에 의하면 형인 김정일이 등 뒤에서 떠밀어 살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39] 김일성과 제갈씨에게서 태어온 사생아다. 북한 당국에서 존재를 철저히 숨겼지만 북한에서 넘어온 이한영이 자신의 수기를 통해 김현의 존재를 알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2001년 자신의 이복형인 김정일에게 처형당했다. 사람들의 추측으로 정통성을 위한 조치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김현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과 동갑이다. 그런데 2015년에는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있으며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40] 위에 나온 김송죽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아버지와의 나이차가 참으로 장대하다. [41] 소련에 의해 우상화된 김일성의 전기인만큼 신뢰성에 대해서는 알아서 판단하자[42] 프랑스 TF1 채널에서 '붉은 왕(Le roi rouge)'이라는 이름으로 1988년 12월 2일에 방영된 르포 프로그램의 일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88년 12월 27일에 KBS-1TV에서 방영된 바 있다.[43] 출처 [44] 원래 소련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김일성으로 내세우려던 것은 김책이었다는 카더라가 있다.[45] 1966년과 1970년에 신년사 대신 로동신문 사설로 대체했다.[46] 가장 유명한 작품이 연작영화 '조선의 별'이다. 의외로 김정일이나 김정은과 비슷한 배우가 젊은 날의 김일성으로 나온다.[47]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등. '正(바를 정)' 자 돌림.[48] 물론 죽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전쟁에서 죽은 사람+북한에서 숙청된 사람 vs 대만 함락되면 숙청되었을 사람+일본 안 일어났으면 죽었을 사람+기타 친일파들+소위 빨갱이 사냥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49]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남조선로동당 가담 혐의로 처형당했을 것이다.[50] 6.25 전쟁이 없었다면 중화민국은 중공군의 침략으로 멸망당했을 것이고, 자신도 반동분자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51] 전쟁 특수가 없었다면 이케타 하야토의 망언으로 실각되었을 것이다.[52]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외조모인 이보익의 애창가였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또 자연을 노래한 시는《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평안북도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의 내용은 국제친선전람관에 내부에 전시했다.[53] 원래 김일성 성격이 이렇다. 감히 본인 앞에선 하지도 못했을 소리를 지껄이면서 허세를 부리는 것. 어디까지나 국내용 허세인데 이 허세의 대상엔 스탈린, 마오쩌둥, 카스트로까지 있었다. 한번은 카스트로가 피그만과 쿠바 핵위기를 거쳐서 집권하는 것이 사실은 자기 덕분이라고 주접 떨다가 주 쿠바 대사가 그게 진짠 줄 알고 카스트로에게 깝쳤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54] 김일성이 청년기였던 1930년대 한반도의 20대 남성 평균 신장이 163~164cm이였음을 감안(지역차가 좀 큰 편이라, 전라도 지방은 161~162cm, 함경도 지방은 167~168cm이였다.), 현재 한국 평균키로 환산하면 187~188cm이 된다. 1970년대에 김일성과 티토가 만난 사진이 있었는데 티토와 약간의 차이가 날 정도. 티토의 추청키는 대략 172cm정도.[55] 참고로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이 김일성을 닮았다고 한다. 얼굴이나 성격 등.[56] 참고로, 지미 카터가 만난 독재자 중 가장 빨리 죽었다. 만나지도 않았는데 단지 지미 카터의 방북만으로 죽은 아들내미보다는 나을지도? [57] 잊혀진 얘기지만, 5공 시절인 1984~85년에 남북정상회담 계획이 논의되었으나 무산되었다.[58] 국가 원수가 이런 농을 칠 정도로 김일성 사망 전후 남북간 분위기가 꽤 부드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일성의 급사 후에 조문에 대한 논쟁이 일었고, 결국 엄청난 논쟁끝에 정부는 조문 거부 결정을 내렸다. 게다가 김영삼 대통령이 어떠한 조의 표현도 국가보안법으로 위반해 엄중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음에도 당시 남총련 산하 전남대 총학이 김일성 분향소를 차렸다가 경찰에 적발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여기에 PD계열들이 대자보를 통해서 김일성 분향소를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하면서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도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 외에도 PC통신 하이텔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약칭 전대기련) 게시판에서 한 회원이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는 게시글을 올리자 전대기련 대표 김모씨가 구속된 사례도 있었다. 1994년 주사파 파동도 논란이 커지는데 한몫했다.[59] 사실 누가 됐든간에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게 맞다. 자금 및 물자를 조달하는건 사정에 따라 유동적이지만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건 정말로 사람이 없는 등의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 애초에 북한에서 자금이나 물자가 부족한 건 그냥 늘 있는 일 아냐? [60] 아무래도 김일성은 나름 고생해서 건국해서 그런지, 국가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긴 했다. 결과가 시망이라 그렇지(…). 『평양은 서울을 꿈꾼다』를 보면 김일성은 매일 아침 일어나서 공장이나 발전소의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나는거 보고는 "오늘 공장이 잘 돌아가는구만" 하면서 기분이 최고조에 이르는 과정을 거쳤는데, 어느날 흰 연기만 뽈뽈나는거 보고는 기분이 나빠서 빨리 발전소를 돌리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계속 차질이 빚어지자 이유가 석탄공급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이유를 파악하고자 개인비서를 노동자로 위장시켜서 탄광에 보냈다. 거기서 비서가 배급이 안 나와서 광산이 정지상태라는 것을 알고는 그대로 직통보고, 당연히 김일성은 노발대발했고 업무담당자들은 발전소를 돌릴 석탄을 구하느라 죽어나갔다고.[61] 하지만 정작 북한 정권 수립 이래 처음으로 남한 대통령들과 정상 회담을 그것도 두 번이나 가진 최고 권력자는 2011년 현재까지도 김정일뿐이다. 게다가 당시는 아니었지만 후에 남한 대통령이 되는 또 다른 사람과도 회담을 했다. 뭐야 이거 츤데레??? [62] 출처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63] 라고 했지만 경주 김씨가 인구가 많아 그렇게 표현했을 뿐, 전주 김씨가 장손(長孫) 집안이다.[64] 그런데 이 인물, 백과사전을 보면 알겠지만 권세를 믿고 탐욕스럽게 전횡을 휘둘렀던 상당히 평이 나쁜 인물이다.[65] 그런데 셋째 아들 김경손이 굉장히 충직한 무신이고, 최씨 무인정권에도 협조하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 견부호자의 실례로 들 수 있겠다. 참고로 전주김씨 대부분이 이 김경손의 후손이니 김일성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66] 17세기, 김일성의 8대조인 김계상이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했다.[67] 이러거나 저러거나 실제로 전주 김씨들은 김일성과 종친이라는 이유로 분단 이후 상당한 세월을 눈치 보면서 살았어야만 했다. 실향민 + 전주 김씨 콤보인 사람들은 더더욱 사회적으로 많은 불이익(쉽게 말하자면 지역 감정으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으며 이런 이유로 모국을 떠난 이민 1세대들도 있다.[68] 참고로 일반 북한 주민들은 계속된 국가의 통제로 인해 지금은 자신의 본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69] 후에 김일성은 10월 12일 밤 평양을 비밀리에 탈출하여 덕천으로 도주했다가 일주일 후 평양이 한국군과 UN군에 의해 점령되자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그곳으로 숨어들었다. 나중에 중공군이 개입하고 난 뒤 12월 6일이 되어서야 평양으로 나왔다.[70] 하지만 실제 현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