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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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

1. 설명2. 양반의 기준3. 양반의 붕괴
3.1. 반론
4. 현대인이 보는 양반5. 현대 한국어에서의 양반6. 기타7. 관련 문서

1. 설명[편집]

조선 시대에 완전히 정립된, 귀족적 성격과 단순 관료적 성격이 섞인 상류 계층. 무반과 문반을 함께 부르는 말.

일반적으로 말하는 귀족 체계에 비해서 유동적인 계층으로, 양반에 포함되고 퇴출되고는 수시로 변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한정된 용어로 알기 쉽지만, 고려시대에도 개념은 있었다.

본래 궁중에서 조회를 할 때, 북쪽에는 이 앉고, 동쪽에는 문관들이, 서쪽에는 무관들이, 남쪽에는 남반이라는 궁내 실무직들이 앉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중 남반은 조선시대에 들어 사라졌고, 동반(문반)과 서반(무반)만 남아 양(兩)반이 된 것. 양반의 기준은 후술.

서양의 귀족들과 달리, 신분제 폐지 이후에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양반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부정적인 감정, 특히 혐오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이러한 혐오적인 스탠스가 피로 피를 씻으며 왕정과 신분제를 몰아낸 프랑스보다 더 심하다. 진짜 양반 계층이 사라진 오늘날까지도 경우에 따라서는 양반이라는 단어가 가벼운 욕설에 가까운 뉘앙스로 사용되기도 한다.

2. 양반의 기준[편집]

법제적 기준과, 실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회적 기준이 달랐다.

법제적으로 양반의 기준은 본인의 관직 획득과 4조(부, 조부, 증조부와 외조부) 이내의 관직 보유 여부였다. 반면 사회적으로 양반의 기준은 이보다 훨씬 널널했는데, 족보를 위조하든 주변인을 포섭하든간에 어떻게든 사회적 품위를 인정받기만 하면 되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일제강점기때만 하더라도, 법제적인 양반 계층은 사라졌지만 향촌에서는 양반으로 인정 받는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때문에 조선시대에 양반이 인구의 몇 퍼센트였네 하는 통계는, 이러한 면을 감안하여 받아들여야 한다.

3. 양반의 붕괴[편집]

백성들 가운데 사족(士族)이란 명색(名色)의 사람이 거의 5분의 2나 됩니다.

정조실록 5권, 정조 2년 윤6월 23일 신사 2번째기사, 대사성 유당이 올린 상소 中


조선 초에는 양반을 보는 사회적 기준이 곧 법제적 기준과 같았기에, 사회에서 통용되는 양반의 수가 약 1% 미만이었다. 따라서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지배계층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기준과 법제적 기준의 갭이 어마어마하게 커치게 된다. 철종 시대에는 전 국민의 70%가 양반이 될 정도가 되었다는 일본 학자 사카타 히로시의 통계는 조선시대 호적에서 유학호로 기재된 것을 양반으로 취급한 것으로, 실제 사회에서 통용되던 양반의 수가 증가하였음을 보여준다.

물론 법제적인 양반 기준은 4대조 안에서의 관직 보유 여부로 판단되기에, 일정하게 제한될 수밖에 없다. 1910년의 전국 호구조사에서 확인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 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양반 통계이다. 그나마 충청남도가 전체 가구 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았고, 충청북도(4.5%), 경상북도(3.8%), 한성(2.1%) 그리고, 전라북도(1%) 순이었다.

여타 도는 모두 1% 미만이고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상북도 경주군(2,599호), 충청남도 목천군[1], 경상북도 풍기군[2], 충청남도 공주군, 전라북도 남원군 순이었다. 충청도경상북도, 한성(서울)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나마도 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충청도 지역과 경상북도 북부 지역[3]을 '양반의 고장'이라고 일컫는 것도 이러한 인구비율과 관련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양반의 비율을 언급할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단지 법제적인 기준만을 밀고 나간다면, 당대 사회에서 통용되던 양반 개념을 모조리 무시해버릴 수 있고, 신분제가 혼란하던[4]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완전히 부정해버릴 수 있다. 그렇다고 단지 사회적인 통용 기준만을 밀고 나간다면, '지배 계층의 숫자가 7할이었다'는 이상한 이야기로 연결될 수 있다.

3.1. 반론[편집]

단지 유학호로 기재하였다하여 그것이 곧 양반으로 사회적 통용이 되었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사회적 통용과 법제적 기준으로 대별하여 그럴듯 하게 들리나 사회적 통용이라는 근거는 여전히 미약하다. 유학호로 기재했다는 것은 스스로를 고시생으로 칭했다는 것 뿐이다. 고시생이 합격생이 될 순 없다. 조선시대는 여전히 향촌 중심의 사회였고 각 향촌의 중심엔 여전히 양반이 있었다. 다만 일반적 양반의 의미가 분화, 변천하였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조선후기까지 양반이라는 것은 상당한 위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단순히 유학호를 기재하였다는 것을 사회적 통용으로 보기엔 무리이다.

4. 현대인이 보는 양반[편집]


조선시대 사회상에 대해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과거에는 조선을 삼국시대 수준의 극단적인 신분제 사회로 해석하여, 상민은 글을 못 배우게 했다느니,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막았다느니, 양반이 상민을 재미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고, 글을 아는 상민은 역적이 될 놈이라고 처참하게 죽였다는 둥 황당한 묘사가 많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상민이나 남의 노비는 물론이고 자기 소유의 노비를 함부로 죽였을때도 관청의 조사를 받았다. 게다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농이나 대상 등 돈 많은 상민, 심지어 천민에게조차 멸시를 당하는 몰락 양반들의 사례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이러한 몰락 양반들은 잔반이라 불리었는데,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스스로 농사나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자기 소유의 토지나 장사 밑천이 있으면 그나마 나은 편으로, 부~중농층 상민이나 외거 노비 출신으로 땅부자인 천민에게 소작을 해 되려 이들에게 수확물을 갖다 바치며 연명하게 되면 아예 양반으로서의 존대나 해 주면 다행이었다. 그 외 글공부한 걸 바탕으로 서당훈장[5]이 되거나, 중인들이 주로 하는 송사의 소송서를 써주거나, 의약업 등을 하며 간신히 손에 흙은 안 묻히고 체면 유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최악의 상황으로 가면 족보를 팔거나 족보에 신분상승한 사람을 넣어주고 돈을 받는식으로 생계를 꾸려가기도 하였다. 여러모로 결국 돈과 관직 그리고 가문이 진정한 신분을 좌지우지 했다.

일제강점기 시대만 해도 양반 의식이 잔존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유교적 가치가 멸시를 당하면서(해당 각주 출처 부탁)[6] 양반 의식은 그 뿌리를 잃고 쓰러지게 된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어마어마한 인구이동과 전국민의 거지화가 일어나고 양반의 전통은 완전히 붕괴 및 파괴됐다. 만약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근대 소설을 보더라도 일제 때 양반이란 것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던 만큼 인도의 카스트 제도만큼은 아니더라도 요즘의 학벌과 같이 약간의 계급의식과 차별이 잔존했을 가능성이 높다[7].

5. 현대 한국어에서의 양반[편집]

현재에는 그저 남에 대한 존칭[8]또는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살짝 비꼬는 말이다. 가령 자주 쓰이는 예문으로 '에라 이 양반아'가 있는데, 이는 존칭이기 보단 '놈'이라는 단어보단 그냥 듣기 덜 기분나쁘기에 부르는 듯 하다. 영감과 비슷한 사례. 자기 손아래 사람에게 '에라 이 양반아'라는 말과 '에라 이 놈아'라고 불러보자. 반응이 꽤 다를 것이다. 친한 사람끼리 장난삼아 서로 부를때는 그리 기분 나쁜 말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분위기에서는 놈이라는 말 또한 시비조나 심지어 욕설이 된다.

이외에도 점잖은 사람을 비유할 때나 어떠한 상황보다 낫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한 단어인데도 뜻이 완전히 정반대인 경우다. '차라리 양반'이라는 말을 쓰는데 못마땅할 때 그나마 낫다는 의미이지 완전한 칭찬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가치중립적인 지칭어나 친근함이나 호의를 담은 존칭으로도 쓰이곤 한다.

6. 기타[편집]

선비와도 관련이 많다. 옛날 이야기에서는 아주 선하거나 아주 나쁘거나 하는 극단적인 캐릭터상을 보여주거나 하지만 대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한 주인공의 돈줄로 등장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양반은 특권 중 하나로서 제사[9]를 지낼 수 있었다. 제사는 가문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되는 시절이었다. 양반은 조선후기에는 4대까지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10] 양반은 4대 이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임금의 허락이 있어야 했고 이를 불천위제사라고 불렀다. 불천위제사를 많이 모시는 가문일수록 명문가로 명망이 높았다. 참고로 조선의 왕족은 양반보다 한 단계 더 뛰어나서 대에 상관없이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중국의 황제들은 한단계 더 뛰어나서 하늘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11]

제사에는 봉사대수라는 것이 있는데 쉽게 말해 몇 대 조상까지 제사를 모실 수 있나였는데 원래는 신분에 따라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조상의 대수가 달랐으나 후기로 갈수록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4대까지 지내게 되었다.##

상민 역시 1대까지는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조선시대 때 구휼 정책 중에 돈이 없어서 제사를 못 지내는 양민들을 지원하기가 있었으니 말 다 했다.

이러한 제사는 양반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데 서양 귀족들이 자기들을 차별화할 때 고상한 언어와 깍듯한 에티켓, 복장 등으로 구분한 것과 같이 조선의 양반은 유교적인 예의범절을 준수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배푸는 것으로 자신을 차별화했던것. 그리고 그 정점에 제사가 있었다.

복잡한 제사 절차와 화려한 제삿상. 우리가 아는 제사는 바로 주자가례에 따른 제사이자 양반층의 제사로 제사는 양반만 지내라는 법은 없었지만 그 복잡한 절차를 완벽히 숙지하고, 온갖 화려한 음식을 상에 차리는 건 당시 평민들은 하기 힘들다. 따라서 당시 양반의 제사는 그저 고인을 추모하는 것 뿐만이 아닌 온 고을의 소문거리로 아예 기안이라고 해서 마을 내의 양반들의 제사를 모아 놓은 달력도 있을 정도.

양반들은 이 복잡하고 화려한 제사 행위를 지내는 걸 과시해서 자신의 지위를 각인시키고 동류에게 인정받았고, 평민들은 그 제사에서 음복이라는 명목으로 그 제삿상을 먹고 즐길 수 있었다. 제공되는 음식은 제사용이다 보니 정성이 들어가고 고기나 물고기, 과일, 적전, 한과 등 귀한 음식들이었고, 양반집에서 먹기에는 너무나 양이 많았으니 양반들은 민심을 얻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인심 좋게 나눠준 경우도 많았던것.

이러면서 점점 과시를 위해 제사 음식은 더 많고 화려해지고 절차도 복잡화되어서 건전가정의례준칙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사란 명목으로 모여서 서로 그 제삿밥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서 제삿상을 차린 집은 일종의 카페 역할도 어느정도 했다.

이들 양반이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또다른 방법은 접객인데 그냥 손님을 받는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아무나 숙박할 곳이 필요하다면 양반집 대문을 두들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양반들 또한 이들을 접대함으로서 지역사회에 인정을 받고 하층민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또 타지역에서 온 이들을 통해 새로운 정보또한 얻는 것으로 경제적 이득을 보거나 손해을 줄이는등의 밥값을 얻기도 했다. 양반이 접객에 얼마나 신경을 썻나면 1년수입의 30%를 접객에 사용했으며 여러 기록에 따르면 제사만큼 손님대접을 제사와 동급으로 여겼다는게 나타난다.

양반에 관한 역사학 이론 중 조선이 완전한 신분제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12] 그 주장은 양반과 고관대직이 세습되지 않으며 단지 양반의 경우 권세와 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부를 편히 할 수 있었고 때문에 유학을 공부하며 관직에 진출하기 쉬워 기득권층을 계속해서 잡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순조때 시작된 세도정치 시기에는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특정 성씨만 과거에 합격하는게 여러 사람에 걸쳐서 폐단으로 지적되었으나 끝끝내 고쳐지지 않았고 결국 지역차별과 겹쳐져 조선 최대의 민란으로 부를 수 있는 홍경래의 난까지 불러왔을 정도니...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양반은 계급이 아니라 그저 헐렁한 계층일 뿐이다. 실제로 연산군~광해군 시절을 제외하면 양반을 제외한 양인의 과거 합격률이 3~40% 선을 오갔으며 순조~고종 시절엔 양인의 과거 합격률은 50%에 육박했다. 서당을 필두로 한 기초교육체계가 농촌 구석까지 퍼져있었으며 유일한 합법적인 계층이동 수단이 과거제라서 전 국민이 자식 교육에 집중했기에 나왔던 결과다. 앞에서 언급된 세도정치 시기인 순조 치하 시기엔 양인의 과거 합격률이 50%를 넘었다.

7. 관련 문서[편집]


[1]천안시 동부[2]영주시 북서부[3] 안동시, 예천군, 영주시, 봉화군, 청송군[4] 나쁘게 말하면 신분질서가 문란한 것이고, 좋게 보면 해체되어 가던[5] 그나마 스승이 존경받는 조선 사회다 보니 웬만큼 막장이 아니면 이 직업으로 먹고 사는 이상 적어도 지방에선 개무시당할 일은 별로 없었으며, 귀양이나 파직 등으로 물러나 내려온 전직 관리가 훈장을 한다면 되려 주변에서 자식들 좀 가르쳐 달라고 몰려오는, 요즘의 명문입시학원 스타강사같은 대우를 받았다.[6] 심지어 친일 세력조차도 초기에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 선 매국노들을 빼면 재능 있는 상민 출신들이 거의 70%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당장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거나 밀정 노릇을 한 자들의 상당수들은 가진 거 없이 태어나 친일을 해서라도 먹고 살려고 했던 일반 평민들이다. 물론 이는 문화 통치가 본격화하면서 일제가 독립 움직임을 막고 피지배층 사이의 싸움으로 만들려고 한국인에게도 기회를 준다는 핑계로 일부러 의도한 측면도 있다.[7] 특히 원래는 과거 시험에 합격해야 양반이 되는 것이지만, 일제 강점기 때는 그딴거 없었기 때문에 양반이라는 신분이 핏줄로 결정되는 경향이 생겼다. 염상섭의 소설 삼대를 보면 알 수 있다. 양반에 대한 오해는 여기서 비롯된 것도 있다.[8] 존칭 쪽은 "선생님"으로 하는게 대다수이므로 현재 양반 이라는 말은 비꼬는게 대부분[9] 제사에 관한 디테일한 내용은 주자가례참조.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사대부가 되면 반드시 제사를 지내는 법이 제정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묘를 설치해서 조상을 모시라는 것.[10] 조선초기에는 양반이어도 고위관직을 제수받지 못하면 4대까지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11] 중국의 제후국인 조선하늘에 지내는 제사인 천제를 지낼 수 없었고, 신라도 비슷한 이유로 삼국사기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불교/무속/도교적인 형식을 빌려 제석천을 모시는 절을 짓고 불교식 재를 올린다든지, 국가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니 국조 제사시 간접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 식 천제를 지내기는 했다[12] 미야지마 히로시, 「호적대장에 나타나는 사람들 ; 조선시대의 신분, 신분제 개념에 대하여」, 대동문화연구 4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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