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경제 발전 5개년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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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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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목록4. 평가
4.1. 긍정적 평가4.2. 부정적 평가4.3. 중공업 우선주의에 대한 후세의 평가

 
 
 
 
 
 
 
 
 
 
 
 
 
 
 
 
 
 
 
 
 
 
 
 

1. 개요[편집]

 
 
 
 
 
 
 
 
 
 
 
 
 
 
 
 
 
 
 
 
 
 
 
 
소련에서 행해졌던 5개년 계획들을 다룬 문서다.
 
 
 
 
 
 
 
 
 
 
 
 
 
 
 
 
 
 
 
 
 
 
 
 

2. 상세[편집]

 
 
 
 
 
 
 
 
 
 
 
 
 
 
 
 
 
 
 
 
 
 
 
 
Pn-slogan-zakon
계획은 법, 달성은 의무, 초과달성은 명예!

주로 '5개년 계획'으로 알려진 것은 스탈린 때 행해진 것이지만 실제로는 소련 붕괴 때까지 했었다.

6차, 7차의 경유로는 실제로는 각각 3년, 7년 동안 했었고, 13차는 소련 해체로 인해 1년 만에 중단되었다.
 
 
 
 
 
 
 
 
 
 
 
 
 
 
 
 
 
 
 
 
 
 
 
 

3. 목록[편집]

 
 
 
 
 
 
 
 
 
 
 
 
 
 
 
 
 
 
 
 
 
 
 
 
 
 
 
 
 
 
 
 
 
 
 
 

4. 평가[편집]

 
 
 
 
 
 
 
 
 
 
 
 
 
 
 
 
 
 
 
 
 
 
 
 

4.1. 긍정적 평가[편집]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에게 패하고, 터키의 지방총독에게 패하고, 스웨덴의 봉건영주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주들에게 패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에게 패하고, 일본 남작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가 뒤떨어진 탓에 모든 사람에게 패했습니다. 군사적으로 뒤떨어져서, 문화적으로 뒤떨어져서, 공업과 농업이 뒤떨어져서 패했습니다. 그들이 러시아를 친 것은 그게 이익이 되고, 그러고도 무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혁명 전의 시인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비참하다, 너는 풍요롭다, 너는 강력하다, 너는 무력하다, 나의 조국 러시아여.' (중략)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이 뒤떨어졌습니다. 10년 안에 그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소련의 노동자와 농민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1931년 2월 4일 산업 관리와 경영자 협의회 당시 스탈린의 연설.[2]
러시아인이 전차비행기, 함대로 무장하면 절대 정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절대로. 그러나 기술이 없어 제대로 무장하지 않으면 전진할 수 없습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933년 노동절, 스탈린의 연설.
히틀러: "만약 누군가 나한테 소련이 3만 5천대의 탱크로 무장할 수 있다고 말해줬더라면 그 사람보고 미쳤다고 했을 거요."
만네르하임: "우리는 소련을 20년, 아니 25년간이나 마음대로 무장할 수 있게 내버려두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와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의 비밀대화 중.
하여간 결과만 보면 낙후한 봉건사회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던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이다. 원래부터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을 표방했으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생산력을 들었다. 스탈린은 생산력을 늘리는 게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라 생각했고, 그랬기에 이런 생산력 증가에 모든 것을 걸었다. 특히 철강과 전기 생산이 중점적으로 강조되었다. 그 결과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소련은 대공황 시기를 지나자 서구 열강에 필적하는 공업국으로 성장했다.[3]

스탈린은 1928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정부의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여 산업화[4]를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였다. 이렇게 정부가 직접 나서서 산업을 육성하는 것은 독일과 일본 그리고 장제스 치하 중국[5], 아타튀르크 치하 터키에서도 벌어진[6] 일이었지만, 소련은 규모, 범위, 강도에서 독일, 일본, 중국, 터키를 훨씬 능가했다. 대부분의 개발독재자들처럼 스탈린도 기술력의 중요성을 이해했고, 개인적으로도 경제개발에 큰 열의를 보였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도 공업화는 추진되었지만 귀족 지주들이 농노라는 인력과 토지라는 땅을 독차지한 덕에 경제개발은 미지근했고 결국 계속 낙후된 농업 국가로 남았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의 절대 권력으로 귀족 지주들을 숙청하고 토지들을 몰수해 농업집산화를 이루어내면서 막대한 인력과 토지를 고스란히 흡수해 이러한 자산들을 중공업 부문으로도 전환할 수 있었다.

과학자들도 대접을 받았다. 대우가 훨씬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푸짐한 연구비를 타내 여러 최신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로켓 연구가 대표적인데, 현대 로켓의 아버지인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같은 경우 러시아 제국 때는 지나치게 공상적인 연구 때문에 학계에서 푸대접을 받았지만, 소련 성립 이후에는 연구의 중요성을 알아본 소련 정부의 적극지원을 받게 되어, 소련 공군사관학교가 생겼을 때 창립 교수가 되었고 장례식도 국장으로 치러졌다. 비록 과학계에도 대숙청의 칼날이 덮치긴 했으나, 체포 후 길어야 이틀, 심지어는 오전에 체포당해 정오에 처형당한 많은 다른 분야의 인재들과 달리 숙청대상이 된 많은 과학자들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고, 암암리에 지원해 준 훨씬 편한 전용 감방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세르게이 일류신이나 우주개발의 책임자가 된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대표적인 사례다. 물리학 전공자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이름인 레프 란다우[7]는 서슬퍼렇던 대숙청 기간에 "스탈린 독재는 히틀러와 다름 없다"고 말했다가 NKVD에 체포되어 반동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 재능을 아낀 대물리학자였던 표트르 카피차[8]가 스탈린에게 "쟤 죽으면 나도 그만두겠음"이라고 직접 위협 편지를 썼고, 다른 위협 따위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스탈린이 직접 베리야에게 명령해 감방에 갇혔던 그를 석방하였다. 소련은 하마터면 천재 물리학자를 잃을 뻔했으나, 스탈린의 과학자 사랑으로 란다우는 목숨을 건졌다.

그리하여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로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한다. 당시 대공황으로 전 세계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은 더욱 경이적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 영국, 독일을 추월하고 1938년에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며 이후 1945년까지 독일과 엎치락뒤치락했다. 혁명과 내전으로 잿더미가 되어 당시 영국 식민지 인도 제국 수준의 경제력을 가졌던 농업국가가 15년 만에 발전된 미국까지 넘보는 공업국가가 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세계 2~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스탈린 주도의 경제개발은 단순한 총생산 증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소련 경제의 체질이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에 그 중요성에 있다. 더 나아가 스탈린식의 경제개발은 소련의 상하부 구조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사실 러시아는 덩치가 워낙 크기 때문에 18세기 이래로 세계 5강에 꼭 드는 나라였다.[9] 그럼에도 러시아의 주산업은 농업이었으며, 공업의 비중은 매우 낮았고, 사회는 봉건제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는 후진 농업사회였다. 그리하여 러시아 제국은 그 덩치와 국력을 가졌어도 초강대국으로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러시아는 일선 병력 수십 만명에게 쥐어 줄 소총과 탄약조차 부족했고[10] 우월한 공업 생산력을 지닌 독일 제국에게 참패할 수밖에 없었다.[11] 그러나 스탈린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명분으로 러시아의 모든 부분에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제정시절에는 의무교육도 없었고, 문맹률은 90%에 육박했으며 20세기 들어서도 문맹률이 크게 줄지 않아 러시아 혁명 직전에는 문맹률이 75%에 달했다. 허나 스탈린 집권기간 동안 교육기관의 확충으로 문맹율은 1% 미만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광범위한 지식층이 생겨났다. 또한 제정시절 러시아의 과학기술은 유럽본토에 비해서는 2류로 간주되었고, 연구기관이나 교육기관 모두 형편 없었으나, 스탈린 시절 소련의 과학기술은 뿌리를 내리고 일취월장하여 20세기 중반에 가면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발달하게 된다.

스탈린 덕으로 소련이 20세기 후반에 미국과 맞장뜰 수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12] 소련이 독소전쟁의 상흔이 가시기도 전인 1950년대 스푸트니크보스토크로 우주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스탈린 시절에 키워놓은 중공업과 과학기술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오시프 스탈린이 전개한 공업화 덕분에 1950년대 소련은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인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고,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복지정책이 실행되었다. 특히나 실업률이 많이 낮아져 고용률 면에서 확실한 성과를 거두었다.

히틀러의 침략으로 일어난 독소전쟁으로 소련은 또다시 잿더미가 되었으나 종전 3년 만에 경제를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했다. 그가 사망한 1950년대에도 소련의 GNP 경제성장률은 평균 8%,[13] 소련의 국민소득 대비 투자율은 28%로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도 나중에 국가 주도로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소련과 아시아국들의 성장에는 비슷한 면이 많지만, 아시아국들은 미국이라는 거대시장을 잘 이용한 반면, 소련의 경우에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것이기에 이 시기의 소련의 경제성장은 더더욱 경이적인 것이다.[14] 이후 신생 국가들의 산업화 모델이 되었다.[15][16]

1930년대에 스탈린이 진행한 소련의 공업화 정책은 또 다른 점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하르코프와 같은 서부 지역에 위치한 소련의 주요 군수공장들을 통째로 뜯어내어 독일군의 공습이 닿지 않는 우랄 산맥으로 성공적으로 이전시켰고 그 덕에 우랄열차공장과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와 같이 우랄산맥 인근에 있는 공장들을 가동하여 독일군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에 필요한 탱크나 비행기 등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물론 1941년 일본 제국진주만 공습 이후 무기대여법이라 하여 미국이 소련에게 상당한 물자를 제공한 것도 영향이 있었지만, 소련 경제는 1942년 후반 여섯 달 동안 독일이 그해를 통틀어 얻을 수 있었던 생산 수준에 도달했을 정도로 전쟁 수행에 성공적으로 헌신했고, 그 수치는 주목할만 했는데, 그 반년 동안 소련은 15,000대의 항공기와 13,000대의 탱크를 생산해냈다. 즉 탱크와 항공기 생산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려 독일군의 침략을 상대했던 것이다.[17]

독소전쟁 당시 소련의 대량 군수물자 생산은 1930년대 중공업 위주의 공업화가 기반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중일전쟁 당시 중화민국도 비슷하게 미얀마의 버마 로드를 통해 미국의 무기대여법이라는 지원을 받긴 했지만 중국의 자체 공업 기반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일본군을 지연시키는 것을 넘어 반격해 섬멸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반면, 스탈린의 소련은 그야말로 총력전 체제를 몸소 실현시키며 그동안 마련한 막대한 군수공업지대를 바탕으로 소련군의 전력을 금방 회복시키고 성장시키면서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바그라티온 작전에서 거둔 대승리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소련은 스탈린이 이루어낸 신화적인 공업화를 바탕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셈이다.

또한 스탈린 덕분에 항공업도 꽤 많이 발전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왕복엔진 기술의 발전으로 프로펠러 비행기Li-2, Il-12, Il-14 수송기 겸 여객기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당시 스탈린이 밀어붙이기 식으로 경제개발 및 공업과학기술을 성공시켰기에 항공 과학기술이 아주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4.2. 부정적 평가[편집]

 
 
 
 
 
 
 
 
 
 
 
 
 
 
 
 
 
 
 
 
 
 
 
 
그러나 저런 초고속 성장을 밀어붙이기 위한 인민들의 희생은 너무나 어마어마했고, 그 대가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특히 농업 정책에서는 밀어붙이기가 잘 통하지 않았고, 중공업 위주 발전이라는 선택의 대가로 인한 농업 관련 산업의 약화와 집단화의 부작용 때문에 결국 소련은 망할 때까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그래도 국가가 안정된 다음에는 식량을 수입해서라도 국민들이 식량부족에 시달리지 않게 하기는 했다.

집단화 직전의 소련의 농업상황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이는 블라디미르 레닌니콜라이 부하린이 강력히 추진한 신경제정책(NEP)에 의해 농업부분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상당히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부하린은 실제로 농민들에게 "농민 여러분, 부자 되시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스탈린도 처음엔 부하린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18] 농민들은 고무되어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고, 그래서 농업생산량도 증대하고 부농[19][20]도 생겨났으나, 문제는 다른 부문에 비해 그 속도가 더딜 뿐만 아니라 그 부산물로 생긴 부농들은 정권의 위험요소였다. 사회주의 이론상 부농들을 그냥 놔두는 건 모순되었고[21] 자연스럽게 추진하면 5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르는 공업화 추진을 위해선 "내가 아니면 안 된다." 생각한 스탈린은 1929년 계급의 적 쿨라크 박멸을 선언한다.[22] 농촌에서 만들어지는 잉여를 모조리 공업생산에 투입할 목적으로[23] 전국의 모든 농토를 소프호스와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으로 재편하는 강제적인 농업집단화가 행해진다. 해당 지역마다 농민집단의 상위 4~5%의 쿨라크를 때려잡으라고 할당량까지 내려온다. 실제론 상위 15%~20%에 해당하는 필요 이상의 중농까지 때려잡았다.

어쨌든 자기 땅을 잃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24] 초기에는 자기 땅을 잃은 농민들이 항의를 하였고, 그게 통하지 않자 아예 종자를 태우거나 혹은 세 마리 이상 가축을 가지면 어차피 쿨라크로 몰리거나 몰수되니 가축을 굶겨 죽이거나 도축해서 숨기는 등의 태업을 하였다. 그 결과로 농기계 역할을 하는 가축과 퇴비의 부족으로 다음해 흉년크리로 이어졌고 심지어는 이판사판이라 생각한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서 군대가 출동하여 잔인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일어났고, 1932년~33년 기근은 절정에 달해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소비에트 연방에서 5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인구학적 타격은 2차대전 전에도 통계치에 수정을 가할 정도였다. 1937년 소련의 공식 인구 집계는 1억 5,600만명이었는데 경악한 담당자 쿠르만은 사망자, 군인, 탈소련자들의 통계를 갖다붙혀 1억 6,830만으로 허위보고했다. 그리고 그 조작된 자료를 보고 대기근의 여파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서방에서 1930년대 후반 소련의 기존 인구 증가 속도론 1억 8,800만 명이 넘어야 되는데 2,000만명 정도가 모자르자 희한하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25] 기존의 이에 대해 정권을 잡았던 스탈린의 책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으나 그것이 농민반항을 억압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혹은 그저 자연재해와 행정적 무능으로 인한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대체로 서방측 학자들은 전자라고 주장하지만,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후자를 주장한다. 스탈린과 소련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스탈린이 아니라 자연재해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이전 1921년 적백내전 직후 기근에 이은 발진티푸스로 500만 명 이상 죽은 참사가 근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도시에서 굶어죽었고 우크라이나 기근은 농촌에서 굶어죽었다. 강제 공출로 도시는 상대적으로 멀쩡하다.[26] 1932년 곡물 생산은 1930년보다 20%가 감소한 걸로 추정하고 가축수는 1929년 기준으로 1935년엔 절반에 불과 했다고 한다. 명백한 인재다. 이러한 삽질은 이념상 이유로만 단순히 농업집단화를 추진한 게 아니라 공업화 추진으로 기계류 등을 수입하는데 모자라는 외화를 식량 수출로 땡기기 위해서 농촌에 공출량을 늘리는데 개인적으로 갈취하기보다는 집단농장에서 공제하기 편한 사정도 있었다.
자주 그러했듯이, 다가오는 재앙의 최초 신호는 소련 경제에서 가장 불우한 부문인 농업으로부터 왔다. 소련 농촌은 불균형한 경제 정책과 늘어나는 정부 지출을 지탱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 부담의 타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비효율적인 집단농장 체제 하에서 농업은 침체되었고 나라를 먹여 살릴 능력이 없었다. 축산업의 상황은 특히 나빴다. 심지어 소련 공식 통계로 보아도 1953년 초 전국의 가축 두수는 1939년보다 늘어나지 않았고,이는 1928년보다 3분의 1이 더 적은 수였다. 1953년의 돼지 수는 1928년과 동일했다. 전국의 농촌에서 모스크바로 쏟아져 들어온 수많은 민원에는 절망적인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이런 외침 중의 일부는 스탈린의 귀에까지 닿았다. 1952년 10월과 11월에 접수되어 스탈린에게 전달된 편지 중에는 소련의 다양한 지역에서 집단 농장의 고초를 토로한 불만들이 담겨 있다. 수의사인 홀로도프는 사실상 무보수 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 집단농장 노동자들에게 일할 의욕을 복돋을 동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 언론에 따르면, 우리는 농업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실제로 현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호밀 수확량이 보잘 것 없습니다. 추수 과정에서 막대한 낭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감자는 어느 정도 수확되었지만, 과연 감자 수확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공장에서 동원된 노동자들이 감자를 캡니다. 이 기간에 그들은 평소 임금의 50퍼센트밖에 받지 못합니다. 이 일에서 얻는 이득이 없기 때문에 감자를 빠짐없이 캐내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려고 맨 위에 있는 것들만 대충 걷어낼 뿐입니다. 이제 축산업을 보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조차 창피스럽습니다 연간 우유 생산량은 사료를 먹인 젖소 한 마리당 1,200~1,400리터를 넘기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우스울 뿐입니다. 이는 보통 염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양입니다.

- 올레그 흘레브뉴크의 「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03p~504p
불만이 만연한 근본 원인은 소련의 낮은 생활수준이었다. 집단화로 생산성이 심하게 저하된 농업은 위기와 침체 사이에서 휘청거렸다. 스탈린 정부는 1931년~1933년과 1946년~1947년처럼 국토의 상당 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부 특정 지역이 기근이나 식량 곤란을 겪고 있음을 매년 인정해야 했다. 심지어 가장 호시절에도 평균 식사량이 빈약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빵과 감자에 의존해 살았다. 스탈린 사망 직전에 소련 시민은 주로 밀가루 음식(주로 빵) 약 500g, 소량의 곡물, 감자 약 400~600g, 우유나 유제품 약 200~400g을 소비했다. 이 식품들이 전형적인 식단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그 이외의 식품, 특히 고기는 특별한 때에만 먹을 수 있었다. 일인당 육류 및 육가공품 소비량은 하루 평균 40~70g, 지방(동물성, 식물성 기름, 마가린, 돼지비계) 소비량은 15~20g이었고 여기에 설탕 몇 티스푼과 약간의 생선을 더하면 끝이었다. 평균적인 시민은 달걀을 6일마다 1개꼴로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식단은 수용소 수감자의 표준 식단과 거의 동일했다. 이는 중앙통계국에서 산출한 기관인데 이 기관은 항상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었으므로 현실을 장밋빛으로 착색했을 가능성이 높다.[27][28][29][30]

- 올레그 흘레브뉴크의「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44p
공산품의 공급 사정 역시 마찬가지로 나빴다. 공장에서 제조한 물건의 가격은 전통적으로 특별히 높게 매겨졌다. 사람들은 단순하고 상대적으로 값싼 물건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물건을 살 형편이 되는 사람도 드물었다. 예를 들어 1952년에 가죽 신발을 구입할 수 있는 농민은 4명 중 1명꼴이었다. 가장 간단한 신발과 옷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 올레그 흘레브뉴크의「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45p
소련 인민의 고난을 초래한 또 다른 요인은 공업과 농업 부문의 지극히 열악한 노동 조건이었다. 물질적 보상 체계가 제대로 수립되지 않아 작업장에는 폭압이 만연했다. 노예 노동은 물론 굴라크 내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행해졌지만, 자유롭다고 하는 산업 및 농업 노동자들도 흔히 강압적인 환경에서 중노동을 했다. 일부 산업의 작업장, 특히 가장 임금이 낮고 위험한 곳에서는 청년들을 강제 동원하여 작업이 수행되었다. 동원을 회피할 경우에는 노동 수용소의 징역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1940년부터 1952년까지 약 1700만 명이 지각, 근무지 근무이탈, 동원 회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여기에 작업장 규율 위반 건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엄청난 숫자는 소련 노동자들의 이타적 열정을 과시하는 의기양양한 선전이 거짓이었음을 폭로한다.

올레그 흘레브뉴크의「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46p
1930년대처럼 스탈린은 재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빵 부족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된 '파괴자들'과 '투기꾼들'을 비난하는 쪽을 택했다. 크렘린 지도자에게는 전시에 쓰기 위해 인정사정없이 비축했던 엄청난 '전략적' 곡물이 있었다. 이제 그는 이 곡물을 소비용으로 방출하기를 거부했다. 스탈린은 또 외국에서 식량을 구매할 수 있는 금 1500톤도 국고로 갖고 있었다.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나중에 스탈린이 금의 매각을 금지했다고 회고했다. 심지어 스탈린은 국제연합의 국제부흥국이 러시아에 보내려 한 식량 지원도 마다했다.[31] 그와 동시에 스탈린은 소련 식량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게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스탈린은 산업 재건과 재무장에 돈을 쓰기 위해 소련 인민들, 특히 농민과 노동자들을 피폐화하는 전전의 정책으로 돌아갔다. 1946년과 1948년 사이에 농민들에게 물린 세금은 30% 증가했고, 1950년까지 150% 급증했다. 국가는 또 소련 인민들로부터 빌렸다고 하지만 사실은 몰수한 수십억 루블에 이른 전쟁 공채를 상환하는 것도 거부했다. 대신 새로운 재건 공채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시민들에게 강요되었다.

블라디슬라프 M.주보크의 「실패한 제국」(아카넷-김남섭 분 옮김) 163p~164p
베리야가 체포된 후 흐루쇼프는 재빨리 지휘자의 자리로 진입했다. 하지만 말렌코프가 눈에 잘 띄는 직책인 각료회의 의장 자리를 여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스탈린의 후계자로 계속 여겼다. 1953년 8월 8일 최고 소비에트에서 연설하면서 말렌코프는 '향후 2-3년' 내에 소련 인민들의 생활 수준을 급진적으로 개선시킬 깜짝 놀랄 만한 몇가지 정책을 발표했다. 1928년 이래 처음으로 국가는 군산복합체와 기계제작 부문을 희생하고 농업 및 소비재 관련 경제에 대한 투자를 증가시키기로 약속했다. 말렌코프는 또 농가와 개인 부속지의 크기를 늘릴 뿐만 아니라 질식할 것 같은 농업 세도 반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이 조치들은 1년 내에 농민들의 가처분 소득을 거의 배가시켰다. 심각한 식량 문제가 계속 소련을 괴롭혔으나, 적어도 농민들은 터무니없는 재산세를 모면하기 위해 과수원을 줄이고 소를 도살하는 짓을 그만두었다. 대신 그들은 고기와 우유를 시장에 다시 팔기 시작했다. 말렌코프는 러시아 전역의 무지크[32]들이 농촌의 밀주로 가득 채워진 술잔을 그의 건강을 위해 건배하는 등, 레닌 이래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블라디슬라프 M.주보크의 「실패한 제국」(아카넷-김남섭 분 옮김) 241p

이렇듯 집단농장에 종속된 농민들에게 지불되는 극도로 낮은 수매가로는 국가에 생산물이 모조리 몰수되었다는 뜻이다. 농촌을 착취함으로써 중공업과 무기 분야에만 집중 투자하고 공업부문 또한 무보수 강제노동이 만연하여 스탈린식 산업화는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 소련 지도자들은 스탈린이 죽은 즉시 오랫동안 과제로 남아있던 경제 개혁에 착수하였다. 농축산물에 대한 수매가를 인상하고 농민에 대한 세금을 인하하여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농민들의 숨이 트였고 농업생산성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삽질로 인해 반세기 뒤인 80년대 소련 농업인구는 전체의 20~22%, 미국 농업인구는 전체의 4~5%인데도 미국은 수출 잘하는데 소련은 자기 수요도 안되었다라는 참혹한 이야기도 있다. 물론 기후 탓도 있다. 러시아의 최남단이 미국의 북쪽 지역이다. 그러나 러시아도 추운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남쪽 지대에 농사가 매우 잘 되는 비옥한 땅이 있고[33] 소련은 유럽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곡창지대라는 남캅카스 지역과[34] 농사 잘 되고 자원도 풍부한 흑토지대인 우크라이나도 가지고 있었던 점을 보면 결국 당시 소련 정부가 농업 계획을 잘못 수립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다만 소련의 경우 미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농업하기 좋은 풍부한 곡창지대는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미국과 중국에 비해 조건이 좋지 않았다. 사실 소련의 밀 생산량은 세계 1위였지만 가축 사료용으로 밀을 썼기 때문에 밀을 수입했다.

어쨌든, 스탈린 시대 소련 인민들의 엄청난 희생은 헛되지 않아 1960년대부터는 소련도 그럭저럭 살기 괜찮은 나라가 되었다. 냉전 이후 미국에 비해 부족한 경제력으로 미국과 군비 경쟁을 하면서 국가 재정의 태반을 군사 부문에 밀어 넣기는 했어도 국가가 퇴보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로마노프 왕조 말기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형편상 정상적인 방식으로 문제 해결이 불가능했고, 결론은 스탈린의 냉혹하지만 효과는 확실한 방식밖에 선택지가 달리 없었다.[35]

1960~1980년대의 소련 노동자들의 삶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1년에 3주간의 유급휴가, 그리고 차례를 꽤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36] 월봉급 10%가 넘지 않는 임대료를 받는 국영 임대 주택. 그리고 소련 전체에서 최저/최고 봉급차는 6배에 불과했다. 참고로 현재 미국의 경우는 수천 배가 넘는다. 당시 소련은 보건의료도 무상이었고 약도 국가보조금이 나와서 매우 저렴했다.[37] 또한 소련은 193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 연금제도가 자리잡아, 일반적인 인민대중에게도 안정적인 연금을 제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괜히 냉전시대 서구 좌파들이 스탈린을 찬양했던 건 아니다.

박노자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소련의 붕괴에는 미국 부자들처럼 엄청난 부를 손에 쥐고 살고 싶어했던 소련 "높으신 분들"의 욕심도 작용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좋은 복지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생산성의 혁신이 제자리 걸음을 걸었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사기업을 비롯한 민간 주체에게 혁신을 고무할 인센티브 체계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스탈린 시대의 소련은 국가권력이 사회의 각종 자원을 동원해서 더 효율적인 생산단위에 때려박으면 성장하는 요소투입형 경제였다. 하지만 스탈린이 죽고 나서 전후복구까지 끝나자 소련은 이미 고도화된 도시경제였고, 혁신과 창조적 파괴, 생산성 향상이 아니면 성장을 유지할 수가 없던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바로 자본가(=기업가)가 사리사욕을 원동력으로 삼아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혁신을 선도한다. 하지만 계획경제적 인센티브를 제외한 효과적 혁신수단을 갖추지 못한 소련은 비효율만 양산했다. 인민들에게 정치권력과 거래로 준 것이나 다름 없던 복지제도는 점점 더 과중한 압박으로 소련 체제를 내리눌렀다. 이를 극복하고자 1960년대부터 성과급 제도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고, 소련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차차 둔화되었다. 문제가 계속 쌓여만 가자 브레즈네프 집권 말기~안드로포프 집권기에 들어서서는 성과급 제도를 강화했지만 그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기업가정신이 부재한 관료집단의 한계는 명확했다.

소련은 전통적으로 계획경제적 인센티브제에 기반하여 경제성장을 했다. 사기업이 없었지만 그래도 소련에는 인센티브제가 정착되었고, 소련의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먼저 소련의 경제성장과정을 보면 채찍과 당근이라는 방식을 도입했는데, 특히 스탈린의 경우 목표량을 초과생산한 동무에는 막대한 포상과 훈장 그리고 혜택을 부여했고, 그러지 않은 동무에게는 징계처벌을 하였다. 생산량이나 근태, 업무실적이 급격히 낮은 경우에는 심한 경우 숙청당했다. 그래서 대충대충 일한다고 해도 봉급이 크게 떨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게을러져서 소련이 망했다는 표현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소련에서 살아본 사람들의 말이나 러시아와 구공산권 국가에서 살면서 경험한 것에 의하면 소련권 사람들이 일은 열심히 한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잘한다는 게 문제이다. 이런 직업관을 표현하는 단적인 일화가 있는데, 한 남자가 소련 말에 놀러갔는데 한 사람은 땅을 파고 한 사람은 그 판 땅을 메꾸는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계획경제국가였다. 모든 목표치는 당관료의 손끝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필요한 물자의 양을 책상에서 결재하면 이 문서가 하달되어 공장에서 해당물자를 생산한다. 자유경제시장처럼 사기업이 마음대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목표치를 달성하면 해당 공장과 사기업은 충분한 혜택을 받았다. 그러니 공장도 딱 그 목표치만 생산하게 된다. 문제는 사람이 수요량을 예측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특정 물자가 부족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치에 따른 인센티브제도는 인센티브는 늘어나는데 막상 생산력이 떨어지는 막장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도입한 것이 바로 중앙당의 생산량 통제를 폐기하는 방법이었다.[38] 생산량 통제의 폐지는 당연히 인센티브제도의 폐지로 들어섰다. 중앙당은 각자 공장이 알아서 생산해서 벌어드린 수익으로 인센티브를 받으라고 했다. 당연히 근로의욕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목표치가 없으니 인센티브를 받을 수 없고, 직접 수익을 내라는데 어떻게 수익을 내야 하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문제는 생산량에 있었다. 수십 년간 중앙당이 정해준 목표치만 달성한 기업과 공장에서 알아서 생산하라고 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산하겠는가? 수요를 알지도 모르고, 돈을 번다는 개념도 없다보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것은 과거의 생산량을 목표치로 생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센티브도 없으니 의욕은 떨어지고 목표치만 생산하다보니 결국 생산력증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물자는 적고, 거기에다가 국영상점에다가 헐값에 납품하는 것보다 시장에 파는 것이 몇 배 이상의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눈치가 재빠르게 돌아가던 기업들이나 업자들은 물자들을 시장에 팔며 이득을 얻는 쪽을 택했다. 그야말로 이것의 악순환이 빅뱅을 일으켜 소련 말 물가폭등을 유발시킨 것이다.

이처럼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고질적인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자율 생산, 시장 납품 체계와 인센티브 폐지를 도입했으나 급격하게 이루어진 변화는 소련의 전통적인 유통-배급 시스템을 붕괴시켜버렸고, 인민의 삶은 수렁으로 굴러떨어졌다. 사회주의가 아니라 막장자본주의 국가가 되어버린 것. 여기에 보수파가 고르바초프를 끌어내리려던 쿠데타를 일으켰다 망하는 바람에 소련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보수파야 막나가는 나라를 걱정했겠지만, 사회주의적인 부작용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소련 체제를 유지하려고 해도 얼마 동안만 연장할 따름이었음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옐친 대에는 애써 모은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임금 수준이나 사회보장제도가 소련 시대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지며 많은 러시아인들이 저임금 빈곤층으로 굴러떨어져나갔으니, 이들은 적어도 삶의 질 측면에서는 소련 시절이 현재보다 나았다고 이야기한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노선과 그 저항으로써 보수파의 쿠데타에도 여러 관점이 있는데, 이중에는 아예 당시 소련은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기여한 만큼 소비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공산주의적 이상이 완성되는 사회로의 과도기에 있었는데, 그 과도기적 문제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인 고르비가 설레발을 쳐서 다 말아먹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있다. 한국에서도 대학 교수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얼핏 보면 막장 종북주의자들이 할 주장같지만 걔들은 북한밖에 몰라서 소련은 관심도 없으며, 애당초 북한은 출발만 공산체제지 실제로는 전제왕정이었으니 해당사항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주로 소련 말기의 개방기에 유학갔던 사람들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는데, 한국에서 대학 다니려면 부모 등골을 빼먹어야 하는데 소련에서는 학비가 공짜일뿐더러 대학생은 공부하는 게 일이라고 월급까지 주는 체제에 매료돼서 눈에 뭐가 좀 씌인 것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은 듯. 어쨌거나, 위 단락의 내용처럼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인들의 삶의 질은 소련 시절보다 훨씬 열악하고, 그나마 좀 나아진 것도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 뒤의 일이다.
 
 
 
 
 
 
 
 
 
 
 
 
 
 
 
 
 
 
 
 
 
 
 
 

4.3. 중공업 우선주의에 대한 후세의 평가[편집]

 
 
 
 
 
 
 
 
 
 
 
 
 
 
 
 
 
 
 
 
 
 
 
 
급진적인 공업화를 위한 농업 희생이 불가피했다는 견해도 있다.[39] 이게 꼭 소련만 그런 것도 아니고, 국가 주도의 고속 공업화를 추진한 나라에서는 대부분 농촌과 농업이 희생당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중공업화를 위해서는 국가의 자원을 공업 분야에 우선적으로 투자할 수밖에 없고, 공업 노동력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농촌 젊은이들을 도시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으며, 또 그렇게 도시에 밀집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농촌에서 생산한 식량을 싼 값에 도시에 공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스탈린 정권 당시의 소련이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토지를 국유화해서 이런 문제점이 크게 두드러진 부분은 있지만, 다른 나라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40] 위키피디아에 있는 영국의 농업 혁명을 보면 알 듯이 영국의 산업 혁명은 원래 농업 혁명부터 시작된 것이며 한국의 저곡가 정책 역시 흔히 왜곡되는 것과는 달리 농업 보조금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자유롭지는 않아서 일본의 전체주의가 크게 발흥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무자비한 식량 수탈은 다 이런 맥락에서 온 것이다. 산미증식계획으로 일본은 공업화에 박차를 가했지만, 일본 농민들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조선 농민들 역시 저가로 수탈의 고통을 겪었다. 물론 그렇다고 도시 노동자들이 풍부한 농산물을 누리면서 잘먹고 잘산 것도 아니지만. #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나는 이촌향도 현상은 원래 농촌에 있던 실업자들이 새로 일자리가 생긴 도시로 떠나는 현상이며 농촌이 가난해지거나 착취당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41]

이렇게 중공업 우선주의는 인민 생활의 저하 등의 많은 문제[42]를 야기했으나, 당시 소련은 안보적으로 이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세력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실제로 적백내전 당시 외국군들이 러시아 땅에 들어와 혁명을 방해했기 때문에 이런 강박관념은 절대 망상이 아니었다.[43] 1920년대 초엔 폴란드에 패하면서 붉은 군대의 현대화에 목말라 있기도 했다.[44] 하여튼 중공업 투자가 제2차 세계 대전 때 소련의 승리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소련군은 독일군 못지않게 기계화가 되어 있어서 초반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후에 승리할 수 있었다.[45] 실제로 1920년대에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붉은 군대의 현대전 작전 수행을 위해 필요한 전술에 필요하다 주장한 수만대의 전차, 장갑화 차량과 항공기의 요구는 당시 소련의 공업력 수준으로 불가능했고 스탈린의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시에 소련의 생산능력은 달성하기 어려웠다. 게오르기 주코프도 이때 이루어진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라며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농업을 초토화하는 동시에 중공업과 군수산업에 올인한 투자가 과연 최선이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들도 존재한다. 페레스로이카 이후 재발견된 부하린을 지지하는 시각에선 스탈린이 필요 이상으로 중농을 때려잡는 바람에 급격한 식량 문제가 발생하였고 오히려 이 같은 식량문제가 중화학공업을 추진했던 당시 걸림돌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부하린은 급격한 중화학공업화는 황금알을 낳는 닭을 죽이는 꼴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급격한 중화학공업추진은 결국 식량문제를 안게 만들었고 실질적으로 부하린식으로 추진했더라도 스탈린이 원하던 시기에 원하던 수준의 중화학공업에 이르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고 본다. 부하린도 중화학 공업으로 전환 필요성은 분명히 인식하기도 했고, 중화학공업으로 전환은 하되 급격하게는 하지 말자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급격한 공업화로 인하여 가축생산의 공급은 50%가 감소하였으며 곡물생산은 기대보다도 적었다. 부양인구가 줄었으므로 공업자본을 형성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인구유입은 산업자본 성장을 저해하였다 실제로 농촌에서 도시로 흘러들어간 인민이 필요보다 약 1900만 명 이상 이주해버렸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기초하여 1920년대 말에 소련경제의 잠재적 성장 가능성을 남용했다는 것이고, 만일 대안의 정책들이 채택 되었더라면 좀 더 큰 산출이 있을 수 있었고 좀 더 많은 자본이 더 적절한 비율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출처]
레닌은 네프에 대해 국가를 다시 자립하게 만들기 위해 시장에 임시로 양보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했다. 1927년 농가의 절반이 농업 협동조합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은 네프의 성공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그 결과로 생산성이 꾸준히 상승했다. 1926년에 이르러 1913년 수준의 농업 생산량이 회복됐고 1920년대 중반의 수확량은 러시아 농업의 황금기였던 1900년대 당시보다 17퍼센트나 높았다. 레닌이 기획했던 것처럼 네프가 지속됐더라면 그것은 제3세계에서 사회주의 발전의 본보기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소련 경제는 농업부문의 활황에 힘입어 1921년과 1928년 사이에 급속히 성장했다. 하지만 네프는 농업 집단화를 통해 중단됐다. 농업 집단화는 소련을 영구적인 불구로 만들었고 수백만 명의 농민들의 삶을 파괴했다.

- 올랜도 파이지스(조준래 분 옮김)의「혁명의 러시아1891~1991」(어크로스, 2017, pp.205~210)

이런 식으로 닥치고 일단 밀어붙이는 스탈린식 국가주도형 경제정책, 민주집중제의 '집중'을 강화하는 관료제의 강화는 후세의 좌파들에게도 엄청난 논쟁거리가 되었다. 스탈린 체제 하에서의 소련의 국가성격을 무엇으로 보는지에 따라 현재의 좌파들의 정파가 갈리기도 한다. 이는 현재 존재하는 북한, 쿠바, 베트남 등의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관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데, 먼저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관점이다. 한국의 급진좌파 중 하나인 노동자연대등이 주장하는 이 관점은 소련 관료제는 하나의 자본으로서 노동자에게 작용했고, 국제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 소련은 엄연히 그 일부였기에 세계공황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소련의 붕괴는 계획경제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경제 자본주의로의 이행일 뿐이라는 것이 그 입장이다. 한편 아나키즘이나 평의회 공산주의 등의 일부 분파는 스탈린 이전 레닌 집권기부터 소련의 붕괴까지를 국가자본주의 사회라 보기도 한다.

그 다음 주장으로는 스탈린의 정책들을 레닌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스탈린주의자(PD)들 대다수가 가진 입장이기도 하다. 레닌 집권 이후부터 소련의 붕괴까지의 역사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들이었다는 입장이고, 소련 붕괴 이후도 소련의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닐지 몰라도 사회주의에 근접한 복지국가라는 인식을 가진다.

비주류적인 주장으로는 정통 트로츠키주의 단체들의 '변질된 노동자국가론'이 있다. 노동자국가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의 과도기 국가를 말한다. 즉 한 사회의 권력이 자본과 지배계급에 존재하는지, 혹은 노동계급에 존재하는지에 따라 노동자국가 여부가 갈린다. 스탈린 이후의 소련은 이러한 노동자국가의 틀은 가졌지만 스탈린에 의한 중앙에의 집권, 사업장과 공동체의 민주주의를 관료제로 대체해 버린 것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국가'는 분명히 아니라는 입장이 '변질된 노동자국가론'이다.

결론적으로 적어도 수성 및 발전의 측면에서 따져본다면[47] 스탈린이 트로츠키보다 더 나은 지도자였다고 보는 의견이 주류이다. 트로츠키가 노농적군을 건설해 1919년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구해냈듯이 스탈린은 군대를 뒷받침할 산업을 재편해서 1941년에 소련을 구해내었다. 그의 급진적인 공업화 정책이 아니었다면 소련은 전지구의 상당부분을 공산화시키지도 못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게 승리하지 못하고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48] 트로츠키주의 측에서는 트로츠키와 스탈린과의 차이점만을 부각해 설명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 농민을 갈아넣는 중공업화, 군사력의 확대 및 확충 모두 트로츠키의 정책이었다.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트로츠키의 축출 이후 스탈린에게 적대하다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되자 도리어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했고[49] 이는 그것이 트로츠키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이, 농민을 갈아넣어 만든 자본과 전국적 징집으로 만든 군대로 승리한 전쟁실질적 최고사령관이 바로 누구였는지 생각해 보자. 트로츠키는 허망하게 축출된 토론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레닌 생전에 소련의 실질적 2인자였다. 그런 트로츠키는 포용력이 없는 정치적 리더십으로 실각했지만, 스탈린은 아무리 잔인하고 혹독할지언정 정치적으로 승리한 다음 계획에만 그친 트로츠키의 중공업화를 실제로 이룩해내어 소련이 맞이한 가장 위협적인 적을 격퇴해내었고 이는 트로츠키의 군사적 성공에 절대 꿀리지 않는다.

중공업화를 반대한 부하린과 중공업화를 점진적으로 효율적으로 진행하자고 한 트로츠키 모두 1920년대 당시에는 상당히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였고 스탈린은 세 명중 가장 강경한 공업화를 추진하였다. 스탈린은 몰로토프의 증언에 따르면 1943년 정도까지 유럽에서 전면전, 총력전을 벌일 수 있을 계획으로 산업화를 추진했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까지 이 구상에서 시작한 것이라 본다면 이는 15년짜리 계획이 된다. 그것도 트로츠키파를 제거한 1927~1929년에 시작한 계획이었다.[50] 그렇다는 것은 스탈린의 개인적 권력욕과 별개로 그가 어떠한 이유에서건 정말로 소련의 공업국가화, 군사대국화를 1920년대부터 마음 속에 품고 있었고 실행에 옮겼다는 결론이 된다. 스탈린의 경쟁자들은 무능하지 않았고 각자의 비전과 선견지명이 있었지만, 1928년을 기준으로 잡았을 때 농업국가인 소련을 15년 만에 수천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보유한 국가로 만들 추진력을 가진 게 스탈린이었다. 당대의 평가가 어땠는지, 그리고 다른 지도자들이 소련을 이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의 논의에 대해선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결과만 본다면 스탈린은 소련의 구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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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련 붕괴로 도중에 중단됨[2] 정확히 10년 후 독소전쟁이 발발했고, 그 10년 간 무자비하게 밀어붙인 산업화 덕에 나치 독일과 정면에서 맞서 싸워 승리했으니, 스탈린의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다.[3] 사실 경제력으로 따진다면 스탈린이 소련을 '미국에 필적하는' 공업국가로 성장시켰다는 이야기는 명백히 과장이다. 스탈린 시절 소련은 잘 나갔을 때도 경제력이 미국의 1/4 ~ 1/3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서 1944년 미국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결정했던 브레튼우즈 회의 때도 소련이 딱히 반대하지 못했다. 다만 소련이 진정으로 미국과 필적할 만한 초강대국으로 부각된 시점을 보통 소련이 최초로 비대칭 전력을 보유하는 데 성공한 시기, 즉 RDS-1 실험 성공 시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RDS-1 실험은 스탈린이 아직 집권하던 1949년에 일어난 일이다. 경제적 관점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스탈린이 소련을 미국에 필적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시켰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4] 특히 중화학 공업 분야.[5] 당시 장제스도 경제와 공업화 면에서 큰 성과를 누리며 "난징 10년"이라는 불리는 짧은 황금기를 주도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으로 인해 그 황금기는 무참히 박살났다.[6] 아타튀르크는 급격한 서구화와 공업화를 이루어내 현재에도 터키의 국부로 존경받는다.[7] 196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8] 197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9] 미국이 영국의 공업생산을 추월하면서 세계 1위의 총생산 국가가 된 게 1870년대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미국은 강대국 중 하나였지, 초강대국은 아니었다.[10] 이런 문제점은 1차 세계 대전보다 10년 먼저 겪었던 러일전쟁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당시 러시아는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먼 극동으로 파견된 러시아 군인들한테 줄 총탄이 무려 2800만 발이나 부족할 만큼 공업 생산력이 취약해서 끝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11] 제1차 세계대전은 협상국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러시아는 1년 전 일찍이 패전에 가까운 결과를 받아들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였다.[12] 소련은 스탈린 이후 G2로 평가받은 바 있지만, 러시아는 그 이전이나 이후로도 그 위치에 이른 바가 없었다. 스탈린 시절과 그 사후 40년 정도가 러시아가 세계사에서 보여준 최고의 전성기였다.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을 패퇴시키기는 했지만, 당시 양대 최강대국은 프랑스와 영국이었지, 러시아 제국이 아니었다.[13] 60년대까지도 소련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70년대부터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했는데 1970년대 소련의 경제성장률은 3.7%였다. 그래도 소련은 붕괴되기 직전(1990년)에도 한국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높았다. 1990년 당시 소련의 1인당 GNP는 $9,300 대였지만 한국의 1인당 GNP는 $5,800대였다. 지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의 반밖에 안 되는 러시아를 보면 소련보다 얼마나 몰락했는지 알 수 있다. (이걸 역으로 뒤집어 본다면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를 전환했을 때 부작용이 심각했다는 얘기도 된다.) 덧붙여 저 당시 서방의 국민소득은 1만 달러 ~ 2만 달러였다.[14]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소련이 해외 시장이 봉쇄된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인구가 있었고 드넓은 땅에서 자원이 쏟아져 나왔다. 또, 소련은 혁명과 내전으로 잿더미가 되기 이전 제정 시절에는 GDP만 따지면 프랑스보다도 더 높은 세계 5위였다. 유럽에 비해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세계적으로 강대국 임에는 틀림없었다. 아예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우리나라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 또, 내전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된 것은 맞지만 원래 역사적으로 그런 쑥대밭 국토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GDP 성장률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2차 대전 이후 1950~60년대의 전세계가 GDP 성장률이 높았던 것은 전후 수습의 탓이 크다.[15] 가령 김일성 역시 중공업화를 신나게 추진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중공업화 정책은 소련과 달리 실패하고 말았다. 소련의 공업화는 소비재 위주가 아닌 중공업이라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데 북한 같은 작은 나라에서 수출목적으로 많이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수입대체로 자력화 목적인데 그런 생산력 수준으론 경제적 생산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소련-중국간의 갈등과 소련의 붕괴에 따른 석유 수입통로 봉쇄 등이 원인이긴 했다. 하지만 체제 내의 무능으로 동력을 잃은 것도 역시 사실.[16] 한국도 박정희만주국에서 근무하였고 만주국의 경제개발계획도 소련의 스탈린식 경제개발을 본떠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만 한국은 성공적으로 경제개발을 이루었다는 차이가 있다.[17] 스탈린 강철권력 p.714~15를 참조[18] 물론 이후에 부하린은 농업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숙청되었다.[19] 네프만(NEPman)/쿨라크[20] 쿨라크는 단순히 부농이란 뜻보단 계급의 적으로 통했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건 아니고, 제정 러시아 시대 때에도 반동적인 성향의 농민들을 칭했고 적백내전 당시 붉은 군대에 식량을 숨기거나 병력 제공을 거부하거나 백군과 내통하는 부농들을 뜻한다. 쿨라크 판정 기준도 한심한 게 잘산다는 기준이 자기땅에 도와 줄 일꾼을 둘 이상 쓰거나 가축이 3마리 이상이면 부농이다.얼마나 가난했으면(1927년 소련 재무부 기준) 나중엔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으로 폴란드인이면 반드시 쿨라크다란 소리도 나왔다.[21] 부하린도 집단농장화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속도 조절을 하자는 것.[22] <러시아 역사>(История государства и народов России) (신아사) 문명식 번역.[23] 다만, 농촌의 잉여 역량을 도시로 흡수하는 과정 자체는 공업화 과정을 거친 모든 나라가 겪은 과정이다. 공업 지역에 밀집한 대규모의 노동력을 부양할 식량이 필요한 동시에, 농업 구조를 개편해서 농업의 노동력 효율을 높임으로써 생기는 잉여 노동력으로 공업 노동력을 충당해야 하니까...멀리는 인클로저 운동이 이러한 공업을 위한 농촌 착취의 효시로 꼽히고, 가까이는 60~80년대의 한국에서도 추곡수매의 저가정책을 통해 농촌 착취는 일어났다. 다만, 초고속 공업화로 인한 농촌 공동화가 지극히 격심한 것으로 평가받는 한국에서도 스탈린 당시의 소련같은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24] 이 부분은 카를 마르크스도 농민의 소 부르주아지적 특성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공장 노동자야 어차피 공장은 자기 것이 아니었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월급 받으면서 일한 것이니 국유화가 되건 말건 큰 불만이 없지만 농업은 가족이 소유한 땅을 가족 단위로 경작할 수 있으니 집단농장화를 곧 자기 땅을 빼앗긴다고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것. 농민들에게 자신이 농사지을 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야 러시아 최초의 인민주의자 조직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땅과 자유.[25] 니얼 퍼거슨(하버드 교수) 著 <증오의 세기>[26] 이 당시 농담으로 '볼셰비즘(20년대)와 공산주의(30년대)의 차이는 볼셰비즘은 도시에 식량이 없고 공산주의엔 지방엔 식량이 없는 것'이란 소리도 나왔다.[27] 이후로 소련인들의 식사량은 풍족해져서 1960년대에는 매일같이 고기를 먹는 나라가 되었지만 1990년대에 경제가 막장화되는 바람에 고기 소비량이 크게 줄고 빵이나 감자로 끼니를 대강 때우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일시적으로 스탈린때의 식단을 다시 재현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28] 앞의 각주에서 언급된 내용이지만, 박노자 교수에 따르면 1960년대 기준 1년 1인당 소련의 육류 소비량은 최소 40kg이었고, 1970,80년대 소련의 평균 저숙련 노동자 임금(약 200루블)으로는 쇠고기(1kg당 약 2루블)의 거의 100kg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적어도 1960년대부터는 소련사람들도 매일같이 고기식단을 즐겼다는 것이다. 이 기준이 감이 안온다면 2014년 기준으로 한국이 1년 1인당 육류 소비량이 51.4kg이었고, 중국이 47kg 그리고 일본이 35.6kg임을 생각하면 된다.[29] 반면 안드레이 란코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근이 덮쳤을 때도 최소 1주일에 한번은 소련 사람들이 고기를 섭취했다고 주장했으며, 1940년대 후반부터는 밥을 굶는 사람이 없었음을 강조했다. 흐르쇼프 통치하의 소비생활 [30] 하지만 흘레브뉵의 이런 주장은 다소 악의적인 측면도 강하다. 스탈린 시절 소비재는 1차 5개년 계획 도중 하락했지만, 그 이후 실질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1930년대 말 소비재의 생산량은 80% 증가했으며, 1910년에 1일당 칼로리 섭취량이 2,100 칼로리였다면 네프 시기에는 2,500 칼로리(kcal)로 상승했다. 비록 1차 5개년 계획(1928~1932) 시기에 1일당 칼로리 섭취량은 혁명 이전 시기의 수준으로 하락했지만, (1929년: 2,030 칼로리, 1932년: 2,022 칼로리) 하루당 칼로리 섭취량은 1930년 말엽에 2,900 칼로리로 증가했다. 1인당 칼로리의 섭취량이 2,000칼로리를 다소 웃도는 수준에서 10년 이내에 3,000 칼로리에 거의 도달할 정도로 성장세를 이룩한 것은 녹색혁명 당시 많은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된다. 가령, 인도에서 1961~63년 당시 1인당 칼로리 섭취량과 1991년의 칼로리 섭취량은 제자리걸음에 있었고, 1988년~1990년에 2,229 칼로리로 상승했을 뿐이었다. 파키스탄에서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같은 시기에 1,802 칼로리에서 2,280칼로리로 증가했다. 인도네시아만이 이들 국가들에 비해 현저한 성장을 거둘 수 있었는데, 1960년대 당시 1816칼로리에서 1990년대 초반에 2,605칼로리로 증가했지만, 이조차도 소련과 다르게 10년이 아니라 30년이 소요됐을 정도다. 즉, 스탈린 시절 소련의 소비재 성장률은 분명 괄목할만한 성과지만, 흘레브뉵은 스탈린 정권에 대해 까기 바빠서 이를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맥락적 생략을 보였다. 참고 자료는(Michael Kubi, «Die Sowjetdemokratie und Stalin: Theorie und Praxis in der Sowjetunion 1917-1953», 2008, p.116)을 참조[31]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에 대한 일부 지원은 허용했지만[32] 러시아어로 농부, 촌놈을 뜻하는 단어[33] 아랍의 봄의 도화선도 러시아의 흉작으로 인해 전 세계 곡물가가 올랐기 때문이다.[34] 북캅카스는 러시아의 영토이고 남캅카스는 현재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구성되어 있다.[35] 사실 한국에서는 공산국가 가운데 북한이 제일 유명하여 북한과 자주 비교를 하기는 하나, 사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심각하게 상황이 악화된 것이었다. 소련은 물론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심지어 북한조차도 소련이 건재했던 시기에는 그런 대로 무난하게 사는 편이었다.[36] 신혼부부들은 꽤 오랜 시간을 단독주택을 배정받기 위해 기다려야했고, 배정받기 전에는 한국처럼 여러 가구가 단칸방에서 같이 지내기도 했다.[37] 현재 이러한 무상의료를 그럭저럭 실행하고 있는 나라는 쿠바외에는 없다. 당연하지만 그 무상의료의 질은 여타 선진국의 의료시스템에 비해 빈약한 편이다.[38] 참고로 자유경제체제는 옐친이 들여온 것이지 고르바초프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폐지 이런 식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다.[39] 대체로 현재의 러시아인들도 이렇게 생각하며, 현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도 이런 식으로 스탈린을 옹호했다.[40] 당장, 한국의 경우에도 1960~70년대 중공업화 기간을 거치면서 농촌이 거의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공동화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자. 영국도 산업 혁명 당시 농촌 붕괴로 인해 도시로 유입된 농민들이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하는 문제를 겪었다.[41] 브리태니커에 "Disguised unemployment"를 검색해도 나오지만, 전근대 농촌의 경작지들에서는 사실상 일손이 남아도는 바람에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된 이들까지 해당 경작지에 소속된 농민으로 퉁치는 경우가 많아서 공식적으론 실업자가 아니지만 사실상 생산성 향상에는 아무런 기여가 없는 인구가 많고 이를 한자어로는 "위장실업"이라 한다.[42] 미국인 기자가 방문하여 취재한 바에 따르면 강철 생산 19톤당 인민 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철생산을 위해 베르됭 전사자(약 70만) 정도 사람이 희생되었다고 추정한 것이다. 출처-'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43] 트로츠키도 군비 확충을 위한 공업화를 구상하기는 했다. 물론 스탈린처럼 무지막지한 것은 아니었지만.[44] 혁명 직전의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와중에 기본적인 무기인 소총조차 모자라 한때 적국이었던 일본에서 38식 소총을 대거 사와야 했다.[45] 냉전 시절에 한국에서 독소전을 설명한 자료들에서는 이 부분은 빠지고 소련군을 단지 물량으로만 밀어 붙이는 야만적 군대로 묘사하곤 했다. 물론 독일군과의 교환비로 치면 소련군이 거의 항상 열세였기에 아주 부당한 평가는 아니지만 말이다.[출처] Testing Early Soviet Economic Altematives", Slavic Review, Surnmer 1991, pp.251-267., 1920년대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부하린적 대안의 문제, 권희영[47] 트로츠키는 국방상으로써 '전시지도자'였고 내정에서는 유능했느냐의 문제와 별개로 대숙청 못지않은 적색 테러를 일삼았다. 특히 적뿐만이 아니라 트로츠키의 정치성향상 아군이 될 수 있는 좌익공산주의자와 무정부 공산주의를 직접 많이 때려잡았다. 크론시타트 수병반란이 대표적인 예. 트로츠키가 채 잡아 죽이지 못한 수병반란 생존자들이 후일 트로츠키가 축출될 때 트로츠키의 편을 들은 황당한 일화가 있는데, 이는 소련의 권력층 내에서 어쨌든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비슷한 거라도 실현하려 했던 게 트로츠키였기 때문이다.[48] 트로츠키는 1920년대만 해도 강경한 중공업화론자였고 방식에 따른 차이만 있었다. 트로츠키파의 주요 경제학자였던 프레오브라젠스키가 괜히 스탈린의 중공업정책에 감명받아 스탈린파로 전향한 게 아니다.[49] 물론 이들은 대숙청때 전부 죽었다.[50] 실제로 1927년에는 소련-영국 단교로 인해 적백내전 제2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소련 내에 퍼져있었고, 중국 혁명의 실패로 아군이 사라진 것 또한 심각한 문제로 트로츠키와 부하린이 실각한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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