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렌틴 글루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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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틴 글루시코 Валенти́н Глушко́ | Valentin Glushk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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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발렌틴 페트로비치 글루시코 Валенти́н Петро́вич Глушко́ Valentin Petrovich Glushko |
출생 | |
사망 | |
서명 | ![]() |
학력 | |
소련의 로켓 공학자.
소련 OKB-456 설계국(현 NPO 에네르고마쉬)의 설립자이자 총책임자. 세르게이 코롤료프, 미하일 얀겔, 블라디미르 첼로메이와 함께 구 소련의 실질적인 우주 개발, 로켓 개발을 이끈 인물이다.
소련 역사상 최고의 로켓 엔진 전문가이자 역사상 베르너 폰 브라운 다음 가는 로켓 엔진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소련에서 개발한 발사체(로켓, 미사일)의 엔진은 사실상 글루시코가 거의 다 설계했으며, 그가 개발한 로켓 엔진은 2020년 현재도 세계 우주 발사체들 중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폰 브라운이 개발한 인류 역사상 최대의 로켓 엔진인 F-1 엔진이 사용된 이후 그렇게 대출력 엔진이 필요로 하지 않는 관계로 이후 더 이상 상용화되지 않고 있는 반면, 글루시코가 개발한 RD-170 엔진과 그 파생형은 4개의 실린더 구조를 분할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추력의 파생형 제작이 가능하고, 덕분에 오히려 실용성이 높아 현재 러시아는 물론이고, 미국의 발사체의 상당수도 글루시코와 에네르고마쉬에서 제작한 엔진을 사용하고 있다.
나로호에 사용된 RD-151 엔진도 에네르고마쉬이 설계한 엔진으로 글루시코가 설계한 RD-170 엔진의 파생형이다.
소련 OKB-456 설계국(현 NPO 에네르고마쉬)의 설립자이자 총책임자. 세르게이 코롤료프, 미하일 얀겔, 블라디미르 첼로메이와 함께 구 소련의 실질적인 우주 개발, 로켓 개발을 이끈 인물이다.
소련 역사상 최고의 로켓 엔진 전문가이자 역사상 베르너 폰 브라운 다음 가는 로켓 엔진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소련에서 개발한 발사체(로켓, 미사일)의 엔진은 사실상 글루시코가 거의 다 설계했으며, 그가 개발한 로켓 엔진은 2020년 현재도 세계 우주 발사체들 중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폰 브라운이 개발한 인류 역사상 최대의 로켓 엔진인 F-1 엔진이 사용된 이후 그렇게 대출력 엔진이 필요로 하지 않는 관계로 이후 더 이상 상용화되지 않고 있는 반면, 글루시코가 개발한 RD-170 엔진과 그 파생형은 4개의 실린더 구조를 분할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추력의 파생형 제작이 가능하고, 덕분에 오히려 실용성이 높아 현재 러시아는 물론이고, 미국의 발사체의 상당수도 글루시코와 에네르고마쉬에서 제작한 엔진을 사용하고 있다.
나로호에 사용된 RD-151 엔진도 에네르고마쉬이 설계한 엔진으로 글루시코가 설계한 RD-170 엔진의 파생형이다.
1908년 9월 2일,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탄생했다. 어린 시절 쥘 베른(Jules Verne)의 과학 소설들을 탐독하며 우주 비행에 매료되었다.[1] 14세 무렵에는 오데사에 '청년 세계연구가 모임'(Кружок молодых мироведов)을 창설하여 천문 관측 활동을 했고, 치올콥스키의 논문 「반작용 장치에 의한 우주공간 연구」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성 파벨 실업학교[2]에서 기계 공학과 금속 가공 등의 기초 학문을 이수했다.
1923년부터 1930년까지 우주비행학의 선구자인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와 긴밀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특히 16세이던 1924년 3월, 치올콥스키에게 보낸 서한에서 항공우주공학자로서의 평생의 과업을 확고히 선언했다.
1923년부터 1930년까지 우주비행학의 선구자인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와 긴밀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특히 16세이던 1924년 3월, 치올콥스키에게 보낸 서한에서 항공우주공학자로서의 평생의 과업을 확고히 선언했다.
"...межпланетные сообщения являются моим идеалом и целью моей жизни, которую я хочу посвятить для этого великого дела.""...행성 간 비행(우주 여행)은 저의 이상이자 삶의 목표입니다. 저는 이 위대한 대의에 제 모든 삶을 바치고 싶습니다."[3]
1925년, 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회의 추천서를 받아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ЛГУ)의 물리학 및 수학 학부의 입학생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재학 시절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며 P. F. 레스가프트 과학 연구소 작업장의 노동자, 레닌그라드 중앙측지국 측량사 등으로 일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1929년 봄, 글루시코는 졸업 논문으로 독창적인 행성 간 우주선인 '태양 로켓 비행기'(Гелиоракетоплан) 설계안을 제출했다. 이 우주선은 기본적으로 태양 에너지를 주 동력원으로 삼아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다. 먼저 우주선에 장착된 거대한 거울 형태의 집광기를 통해 태양광을 한곳으로 모아 고전압의 전력을 생산한 뒤, 생성된 전류를 송전 선로를 거쳐 로켓 엔진의 연소실(작업실)로 직접 전송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투입된 액체 수은, 금속 분말, 또는 전도성 용액 등의 작동 물질에 강력한 고전압 전류가 공급되면, 순간적으로 강력한 전기 방전이 일어나며 연소실 내부에서 격렬한 열폭발을 유도하게 된다. 이 전기적 폭발력으로 인해 극도로 가속된 물질들이 후방 노즐을 통해 초고속으로 분사되면서 강력한 추진력을 발생시키는 메커니즘이었다. 글루시코의 계산 결과, 이러한 전기 추진 방식은 당대의 전형적인 화학 반응 기반 연료 로켓보다 작동 물질의 분사 유속을 압도적으로 높일 수 있어 추진 효율 면에서 혁신적인 우위를 달성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1929년 4월 18일, 그는 이 논문의 핵심인 전기 로켓 엔진(ERE)의 원리를 다룬 제3부인 〈폭발성 물질로서의 금속〉[7]을 소련 발명위원회 부서에 제출했다. 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눈여겨본 군부와 과학계의 제안으로 그는 엔진의 실물 구현을 위한 실험 조사를 허가받았다.
1929년 2월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5학년 과정에 진입했으나, 장학금이 끊겨 잡일로 연명하던 그는 결국 첫 학기 수업료를 체납하여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에서 영구 제적되었다. 친구의 권유로 졸업 프로젝트 일부를 발명위원회에 제출한 것이 레닌그라드 군관구 기술참모부의 니콜라이 일린(Николай Ильин)의 손에 들어갔고, 이는 ГДЛ의 연구소장인 니콜라이 티호미로프와 미하일 슐레이킨 교수의 검토를 거쳐, 1929년 5월 15일 티호미로프가 그를 ГДЛ의 전기·액체 로켓엔진 개발 부서장으로 직접 채용했다.[8]
1929년 봄, 글루시코는 졸업 논문으로 독창적인 행성 간 우주선인 '태양 로켓 비행기'(Гелиоракетоплан) 설계안을 제출했다. 이 우주선은 기본적으로 태양 에너지를 주 동력원으로 삼아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다. 먼저 우주선에 장착된 거대한 거울 형태의 집광기를 통해 태양광을 한곳으로 모아 고전압의 전력을 생산한 뒤, 생성된 전류를 송전 선로를 거쳐 로켓 엔진의 연소실(작업실)로 직접 전송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투입된 액체 수은, 금속 분말, 또는 전도성 용액 등의 작동 물질에 강력한 고전압 전류가 공급되면, 순간적으로 강력한 전기 방전이 일어나며 연소실 내부에서 격렬한 열폭발을 유도하게 된다. 이 전기적 폭발력으로 인해 극도로 가속된 물질들이 후방 노즐을 통해 초고속으로 분사되면서 강력한 추진력을 발생시키는 메커니즘이었다. 글루시코의 계산 결과, 이러한 전기 추진 방식은 당대의 전형적인 화학 반응 기반 연료 로켓보다 작동 물질의 분사 유속을 압도적으로 높일 수 있어 추진 효율 면에서 혁신적인 우위를 달성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1929년 4월 18일, 그는 이 논문의 핵심인 전기 로켓 엔진(ERE)의 원리를 다룬 제3부인 〈폭발성 물질로서의 금속〉[7]을 소련 발명위원회 부서에 제출했다. 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눈여겨본 군부와 과학계의 제안으로 그는 엔진의 실물 구현을 위한 실험 조사를 허가받았다.
1929년 2월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5학년 과정에 진입했으나, 장학금이 끊겨 잡일로 연명하던 그는 결국 첫 학기 수업료를 체납하여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에서 영구 제적되었다. 친구의 권유로 졸업 프로젝트 일부를 발명위원회에 제출한 것이 레닌그라드 군관구 기술참모부의 니콜라이 일린(Николай Ильин)의 손에 들어갔고, 이는 ГДЛ의 연구소장인 니콜라이 티호미로프와 미하일 슐레이킨 교수의 검토를 거쳐, 1929년 5월 15일 티호미로프가 그를 ГДЛ의 전기·액체 로켓엔진 개발 부서장으로 직접 채용했다.[8]
이후, 1933년 9월경에 기체동역학 연구소가 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과 통합되어 반작용 추진 과학 연구소(РНИИ)로 개편되었고, 글루시코는 이곳에서 액체 로켓 엔진 연구를 주도했다.[9] 그러나, 1938년 3월 23일 대숙청 당시 정치적 야망을 가졌던 안드레이 코스티코프의 조직적인 정치 공작으로 글루시코, 코롤료프, 랑게마크, 클레이묘노프 등이 함께 체포되었고, 체포된 글루시코는 루뱐카와 부티르카 감옥에서 신문 과정 중 절연체 전선으로 만든 채찍과 몽둥이로 폭행당하는 등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10][11] 이 사건은 두 사람 사이에 오래 지속된 개인적 갈등의 한 배경으로 거론된다.[12]
이후 8년의 강제적인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은 그는 다행히 처형당하지 않았고, 과학자 및 공학자 출신 정치범 수감자들을 위한 특수설계국(샤라시카)에 배치되어 수감자 신분으로 군용 항공기용 보조 로켓 엔진 개발을 계속했다. 1938~1940년에는 모스크바 투시노 제82항공기엔진공장 산하 설계그룹에서, 1940년 이후에는 카잔 제16공장의 NKVD 제4특수부 설계국에서 РД-1, РД-1ХЗ, РД-2, РД-3 등의 엔진을 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4년 석방된 글루시코는 이듬해 패전국인 독일에 파견되어 1945~1946년 동안 나치 독일의 V-2 로켓 프로그램의 설계도와 연구 자료들을 정밀 분석하고 기술을 흡수할 기회를 얻었다. 소련으로 귀국한 직후, 자신만의 엔진 전담 연구소인 OKB-456 설계국(현 NPO 에네르고마쉬)의 수석 설계자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개발된 강력한 액체 로켓 엔진들은 훗날 세계 최초의 ICBM인 R-7과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그리고 유리 가가린을 포함한 우주 비행사들을 우주로 날려보낸 보스토크 우주선, 보스호드 우주선, 소유즈 우주선의 심장이 되었다.
이후 8년의 강제적인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은 그는 다행히 처형당하지 않았고, 과학자 및 공학자 출신 정치범 수감자들을 위한 특수설계국(샤라시카)에 배치되어 수감자 신분으로 군용 항공기용 보조 로켓 엔진 개발을 계속했다. 1938~1940년에는 모스크바 투시노 제82항공기엔진공장 산하 설계그룹에서, 1940년 이후에는 카잔 제16공장의 NKVD 제4특수부 설계국에서 РД-1, РД-1ХЗ, РД-2, РД-3 등의 엔진을 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4년 석방된 글루시코는 이듬해 패전국인 독일에 파견되어 1945~1946년 동안 나치 독일의 V-2 로켓 프로그램의 설계도와 연구 자료들을 정밀 분석하고 기술을 흡수할 기회를 얻었다. 소련으로 귀국한 직후, 자신만의 엔진 전담 연구소인 OKB-456 설계국(현 NPO 에네르고마쉬)의 수석 설계자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개발된 강력한 액체 로켓 엔진들은 훗날 세계 최초의 ICBM인 R-7과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그리고 유리 가가린을 포함한 우주 비행사들을 우주로 날려보낸 보스토크 우주선, 보스호드 우주선, 소유즈 우주선의 심장이 되었다.
1966년 평생의 라이벌이자 원수였던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사망한 이후, 소련의 유인 달 탐사 프로그램(N-1 로켓 프로젝트)은 연이은 발사 실패로 파국을 맞이했다. 이에 소련 지도부는 1974년 5월, N-1 프로젝트를 공식 폐기하고 글루시코를 중앙기계설계국(ЦКБЭМ, 현 RSC 에네르기아)의 수석 설계자이자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글루시코는 오랜 파벌 갈등의 중심지였던 설계국을 장악한 뒤, 자신의 평생 과업이었던 강력한 액체 로켓 엔진 기술을 집약해 새로운 초헤비급 우주 발사체 시스템 개발에 착수했다.[13]
이 시기 글루시코의 기술적 집착과 완벽주의가 탄생시킨 결정체가 바로 초대형 발사체 에네르기아(Энергия)와 소련판 우주왕복선 부란(Буран) 시스템이다. 특히 그는 에네르기아의 주엔진으로 쓸 세계 최강의 액체산소/등유(Kerosene) 기반 다단연소사이클 엔진인 RD-170의 개발을 주도했다. 연소실 압력이 250기압에 달하는 이 엔진은 기술적 난이도가 극도로 높아 개발 과정에서 무수한 폭발 사고와 지연을 겪었으나, 글루시코는 특유의 제어 집착과 공학적 직관으로 마침내 성공 가도에 올려놓았다.[14] 1987년과 1988년, 에네르기아 로켓과 부란 우주왕복선은 연이어 완벽하게 무인 자동 비행 발사에 성공하며 글루시코의 노년기 인생 최대의 기술적 승리를 장식했다.
그러나 영광의 순간도 잠시, 지독한 일중독자였던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글루시코는 동맥경화증을 비롯한 심혈관계 질환으로 고통받았고, 뇌졸중이 찾아와 신체 일부가 마비되는 투병 생활을 겪었다. 병상에 누워서도 그는 우주 개발의 미래와 화성 탐사 구상을 멈추지 않았으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부란의 역사적인 첫 비행 성공으로부터 불과 두 달 뒤인 1989년 1월 10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글루시코는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유해를 달이나 화성에 뿌려달라는 뜻을 밝혔다는 이야기가 일부 자료에서 전해지나, 아들 알렉산드르 글루시코가 작성한 공식 전기에는 이러한 유언이 언급되어 있지 않아 신빙성은 불확실하다.[15]
이 시기 글루시코의 기술적 집착과 완벽주의가 탄생시킨 결정체가 바로 초대형 발사체 에네르기아(Энергия)와 소련판 우주왕복선 부란(Буран) 시스템이다. 특히 그는 에네르기아의 주엔진으로 쓸 세계 최강의 액체산소/등유(Kerosene) 기반 다단연소사이클 엔진인 RD-170의 개발을 주도했다. 연소실 압력이 250기압에 달하는 이 엔진은 기술적 난이도가 극도로 높아 개발 과정에서 무수한 폭발 사고와 지연을 겪었으나, 글루시코는 특유의 제어 집착과 공학적 직관으로 마침내 성공 가도에 올려놓았다.[14] 1987년과 1988년, 에네르기아 로켓과 부란 우주왕복선은 연이어 완벽하게 무인 자동 비행 발사에 성공하며 글루시코의 노년기 인생 최대의 기술적 승리를 장식했다.
그러나 영광의 순간도 잠시, 지독한 일중독자였던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글루시코는 동맥경화증을 비롯한 심혈관계 질환으로 고통받았고, 뇌졸중이 찾아와 신체 일부가 마비되는 투병 생활을 겪었다. 병상에 누워서도 그는 우주 개발의 미래와 화성 탐사 구상을 멈추지 않았으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부란의 역사적인 첫 비행 성공으로부터 불과 두 달 뒤인 1989년 1월 10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글루시코는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유해를 달이나 화성에 뿌려달라는 뜻을 밝혔다는 이야기가 일부 자료에서 전해지나, 아들 알렉산드르 글루시코가 작성한 공식 전기에는 이러한 유언이 언급되어 있지 않아 신빙성은 불확실하다.[15]
RD-214는 1950년대에 OKB-456 설계국이 개발한 4개 연소실 구조의 액체연료 엔진으로, 장기 보관이 가능한 고독성 질산계 산화제를 최초로 채택했다. R-12 중거리 탄도 미사일(IRBM)의 핵심 무기화와 초기 코스모스 우주 발사체의 1단 메인 추진체 역할을 완수하며 구소련 로켓 기술의 기틀을 확립한 기념비적인 엔진이다.
- RD-211 : R-12를 위해 최초로 설계되었다. V-2의 A4 엔진을 개량한 RD-100을 기반으로 개발되다. 이 엔진은 이미 4개의 독립된 연소실과 과산화수소(H₂O₂) 증기 구동 터빈을 갖추고 있었으며, 로켓 제어를 위해 배기구 내부에 날개(vanes)가 필요하단 결론이 내려졌었다.
- RD-212 : 원래 부란(Buran) 순항 미사일 프로젝트를 위해 RD-211을 기반으로 개발되었다. 추력 부족으로 인해 RD-213을 지지하며 프로젝트가 폐기되었다.
- RD-213 : GRAU 색인 번호 8D13. RD-214와 유사하다. 부란(Buran) 순항 미사일 프로젝트를 위해 개발되었다. 해당 프로젝트와 함께 취소되었다.
- RD-214 : R-12(8K63)용으로 설계된 엔진의 오리지널 버전이다.
- RD-214U : 해당 엔진의 개량 버전이다. R-12U(8K63S) 및 코스모스-2(Космос-2, 11K63) 우주 발사체에 탑재되어 비행 임무를 수행했다.
- RD-214F : 코스모스-2(Космос-2)의 초기 버전을 위해 계획된 프로젝트이다.
보통 매체에서는 코롤료프를 사사건건 미워하고 질투하던 경쟁자로 묘사하지만, 글루시코 역시 코롤료프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우주개발에 매우 큰 공헌을 했다. 두 사람의 불화는 단순한 개인감정이 아니라, 로켓 추진제에 대한 근본적인 기술적 견해차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코롤료프는 액체산소/케로신(Lox/Kerosene) 계열을 선호했고, 글루시코는 저장 가능한 하이퍼골릭(자동점화식) 추진제가 운용상 더 유리하다고 보았다. 군 당국은 한동안 글루시코의 노선을 지지했으나, 이 갈등은 1959~60년 R-9 개발 과정에서 본격화되어 이후 N-1 달 탐사 계획의 실패에 영향을 준 주요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또한 인간 관계에서는 1930년대 초부터 함께 일하며 협력적 관계를 유지했고, 1938년 체포 이후에도 글루시코가 코롤료프를 자신의 샤라쉬카로 데려와 함께 일했을 정도로 가까운 동료였다. 그러나 1959~60년대 기술적 분쟁이 깊어지면서 개인적 갈등으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N-1 계획 실패에 영향을 준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되며, 소련의 상대적으로 열악한 경제 규모와 산업 제조 역량(품질관리 등), 역시 미국의 아폴로 계획에 추월당한 배경으로 흔히 거론된다. N-1의 실패는 엔진 신뢰성, 개발 일정, 설계국 간 협업 부재, 지도부 교체 등 다층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 관계에서는 1930년대 초부터 함께 일하며 협력적 관계를 유지했고, 1938년 체포 이후에도 글루시코가 코롤료프를 자신의 샤라쉬카로 데려와 함께 일했을 정도로 가까운 동료였다. 그러나 1959~60년대 기술적 분쟁이 깊어지면서 개인적 갈등으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N-1 계획 실패에 영향을 준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되며, 소련의 상대적으로 열악한 경제 규모와 산업 제조 역량(품질관리 등), 역시 미국의 아폴로 계획에 추월당한 배경으로 흔히 거론된다. N-1의 실패는 엔진 신뢰성, 개발 일정, 설계국 간 협업 부재, 지도부 교체 등 다층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1923년부터 1930년까지, 글루시코는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와 7년간 서신을 주고받으며 사제 관계를 맺었다. 16세이던 1924년 3월, 글루시코는 치올콥스키에게 "행성 간 비행은 저의 이상이자 삶의 목표이며, 이 위대한 대의에 제 모든 삶을 바치고 싶습니다"라고 썼고, 이 다짐을 평생 지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 체르토크(Б.Е. Черток)의 회고에 따르면 글루시코는 높은 기술적 역량과 폭넓은 교양, 핵심 문제를 빠르게 짚어내는 능력으로 두드러졌으며, 항상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모습을 유지했다. 동료들과 부하들에게는 때때로 까다로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 1929년 2월 학비 미납으로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제적된 글루시코는, 친구의 권유로 졸업논문(3부작) 중 전기 로켓엔진을 다룬 제3부를 소련 발명위원회에 제출했다. 이는 레닌그라드 군관구 기술참모부의 니콜라이 일린의 손에 들어갔고, ГДЛ 소장 니콜라이 티호미로프와 미하일 슐레이킨 교수의 검토를 거쳐, 1929년 5월 15일 티호미로프가 그를 ГДЛ의 전기·액체 로켓엔진 개발 부서 책임자로 직접 채용했다.
- 코롤료프가 대외적으로 "수석 설계자(Главный Конструктор)"로만 불렸던 것처럼, 글루시코 역시 "액체 로켓 엔진의 수석 설계자(Главный конструктор ЖРД)"라는 직함으로만 기밀 문서에 기록되며 보안 통제를 받았다. 그의 실명과 업적이 폭넓게 알려진 것은 페레스트로이카로 비밀주의가 전면 해제된 이후였다.
- 발렌틴 글루시코는 음악, 미술, 문학 등 다방면의 예술 분야에서 체계적인 영재 교육을 받았다. 1920~1922년경 오데사 음악원에서 훗날 원장을 지낸 그리고리 스톨랴로프 교수의 클래스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동시에, 정식 미술 교육을 받으며 수준 높은 회화 및 데생 실력을 다졌다. 청소년기부터 쥘 베른의 과학 소설에 매료되어 대중 과학 글쓰기에도 재능을 보였던 그의 학제 간 예술적 배경은, 훗날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구조를 가진 액체 연료 로켓 엔진을 탄생시킨 창의성의 원천이 되었다.
- 1938년 대숙청 당시 NKVD에 체포된 글루시코는 루뱐카와 부티르카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강요된 자백으로 코롤료프 등의 이름이 연루되었고, 이는 두 사람 사이에 오래 지속된 개인적 갈등의 한 배경으로 거론된다.[16]
- 어린 시절 쥘 베른의 소설을 읽고 우주에 매료된 글루시코는 오데사에서 '청년 세계연구가 모임'을 만들어 천문 관측 활동을 했다. 1976년 천문학자 N.S. 체르니흐가 발견한 소행성체 6357에는 '글루시코(Glushko)'라는 이름이 헌정되었다.
- 1994년 국제천문연맹은 그의 업적을 기려 달 앞면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지름 43km의 분화구(현재 Olbers A)에 '글루시코 분화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분화구는 올베르스(Olbers) 분화구의 서쪽 테두리에 붙어 있다.
[1] 정확한 나이/연도는 원문 출처마다 12~15세, 1921~1923년 사이로 엇갈리기에 단정하기 어렵다.[2] 볼셰비키 혁명 이후 교육 체제가 개편되면서 공식 명칭이 'L. D. 트로츠키 기념 제4전문직업학교 "금속"(IV Профтехшкола «Металл»)'으로 변경되었다.[3] 당시 러시아어 'Сообщения'는 통신뿐만 아니라 '교통·행성 간 이동'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였다.[4] Проблема эксплуатации планет, 1924[5] Завоевание Землёй Луны, 1924[6] Станция вне Земли, 1926[7] Металл как взрывчатое вещество[8] "전기·액체 로켓 엔진 부서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ОРМ 시리즈 액체연료 로켓 엔진 개발이 주요 성과였다.[9] ГДЛ과 ГИРД의 공식 통합 및 РНИИ 설립령은 1933년 9월 21일에 체결되었다.[10] 이 공작의 성격과 단계별 진행 과정, 관련 원문 서류는 발렌틴 글루시코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글루시코의 저서 『미지의 랑게마크(Неизвестный Лангемак. Конструктор «катюш»)』(모스크바, 2012)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코스티코프가 전문가위원회를 이끌었다는 사실은 1965년 군 검찰청 수사에서 공식 확인됐으며, 코스티코프는 훗날 심문 조서에서 "클레이묘노프 시절에는 자신이 뒷전으로 밀려났으나, 클레이묘노프 체포 이후에야 비로소 일할 기회를 얻었다"고 직접 진술했다. 코롤료프 본인 역시 최고재판소 의장에게 보낸 탄원서에서 "그 자료들이 기술국장 코스티코프가 쓴 것임을 알고 있다. 그는 수년간 나와 내 로켓 연구를 탄압해왔고, 이제 나를 모함하여 앞서 체포된 사람들과 엮어 НКВД를 오도하고 있다"고 직접 밝혔다.[11] 한편 코스티코프는 이 공작의 수혜자로 1938년 9월 НИИ-3 부소장으로 승진했으나, 1944년 로켓 전투기 개발 과정에서 성과를 부풀리고 정부를 기만한 혐의로 자신도 체포됐다가 약 1년 만에 석방되었다. 석방 결정문에는 "적대적 의도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적혔으나 이 결정이 최상부, 즉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로 내려온 것이라는 서술이 당시 기록에 남아있다. 그가 타인에게 씌운 혐의와 정확히 같은 내용으로 잡혔다가 권력의 비호로 풀려난 셈이다. 한편 일부 자료에서는 글루시코가 코롤료프를 고발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글루시코 역시 이 공작의 피해자로 동시에 체포되어 8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발렌틴 글루시코 문서 및 안드레이 코스티코프(러시아어 위키백과) 참고.[12] 후대의 전문가들은 1959~60년 R-9A 로켓 추진제 선택을 둘러싼 기술적 분쟁(글루시코가 코롤료프의 산소-수소 엔진 노선에 반대하고, 코롤료프가 류카, 쿠즈네초프 등 항공업계 설계국을 영입한 데 대한 반감)을 두 사람 관계 파탄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며, 이것이 이후 N-1 달 탐사 계획 실패의 주요 요인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13] 글루시코-코롤료프 갈등의 직접적 원인으로는 1938년 대숙청 당시의 상호 무고 사건보다, 1959~60년 R-9A 로켓의 추진제 선택을 둘러싼 기술적 분쟁(글루시코의 산소-수소 엔진 반대, 코롤료프의 류카·쿠즈네초프 설계국 영입에 대한 글루시코의 반감)이 더 자주 거론되며, 이것이 N-1 계획 실패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14] 이때 완성된 RD-170 설계안은 신뢰성과 추력이 워낙 압도적이라, 후대에 파생형인 RD-180, RD-191 등으로 이어지며 21세기 현대 미국 및 러시아의 최신 로켓(아틀라스 V, 안가라 등)의 핵심 엔진으로 여전히 쓰이고 있다.[15] 사인은 뇌동맥경화증(공식 전기 기준, 저자 알렉산드르 글루시코.). 그의 유해(골분)는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10구역 5열)에 아내 마그다 글루시코(Магда Глушко)와 합장되어 있다. 붉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묘비에는 그의 흉상과 두 개의 사회주의노동영웅 메달, 이륙하는 로켓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16] 다만 전문가들은 1959~60년 R-9A 추진제 분쟁을 두 사람 관계 파탄의 더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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