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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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 Группа изучения реактивного движения (ГИР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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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6]은 프리드리히 찬데르, 세르게이 코롤료프, 미하일 티혼라보프가 관련 학계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오소아비아힘(ОСОАВИАХИМ) 기관의 주선으로 소집하여 1931년 9월 15일에 공동으로 설립한 세계 최초의 정부 관할 우주공학 및 로켓 전문 연구 기관이었다.
당대 서구권의 연구가 개인[7]이나 순수 민간 아마추어 동호회[8]수준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ГИРД는 소련 공산당과 소련 정부의 행정적 승인 및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상설 연구 시설과 체계적인 분업 구조를 갖추고 출범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식적 우주 개척 조직이라는 독보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연구 시설은 레닌그라드 기체동역학 연구소(ГДЛ)의 일부 시설을 할당받은 'ЛенГИРД(GIRD 레닌그라드 연구소)'와 모스크바의 대학 및 오소아비아힘 연구시설 일부를 할당받은 'МосГИРД(GIRD 모스크바 연구소)'로 나뉘어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 인력은 공동 설립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각계각층의 인사들로 배정되어 있었고, 총 4개의 전문연구반(여단)으로 나뉘어져 각각 이론, 연구, 설계, 실험에 대한 역할을 분업하여 진행하였다. 이 조직적인 분업 구조 시스템 덕분에 이들은 소련 정부와 학계로부터 'ГИРД 여단'이라는 명칭으로 통칭되기도 했다.
자신들의 연구기관 명칭을 실험용 발사체의 넘버링 코드로 사용할 정도로 ГИРД 연구원들은 우주와 로켓을 매우 동경하고 사랑했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었다. 이들은 액체 연료 발사체 10개를 순서대로 기획 및 제작하여 실험에 사용했으며,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기술 실증을 위한 하이브리드 로켓인 ГИРД-9와 소련 최초의 순수 액체 연료 로켓인 ГИРД-X를 성공시키며 기대하던 성과를 낼 수 있었다.
ГИРД는 이후 1933년 10월 3일[9] 소련 정부의 더 효율적인 국방 연구 통합 정책에 따라, 당대 소련의 저명한 군 소속 연구기관이었던 '기체동역학 연구소(ГДЛ)'와 합병되면서 국방부 산하 국방과학위원회의 '반응 추진 과학 연구소[10]'의 직속 연구기관으로 흡수 합병 및 편입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쌓아 올린 연구 결과와 귀중한 경험들은 멀지 않은 미래에 소련이 우주 경쟁 시대의 선발 주자로서, 미국을 제치고 전세계에 가장 먼저 우주 개척의 신호탄을 쏘아 올릴 수 있도록 만든, 매우 귀중한 과학기술적 제반이자 주춧돌이 되어주었다.
당대 서구권의 연구가 개인[7]이나 순수 민간 아마추어 동호회[8]수준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ГИРД는 소련 공산당과 소련 정부의 행정적 승인 및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상설 연구 시설과 체계적인 분업 구조를 갖추고 출범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식적 우주 개척 조직이라는 독보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연구 시설은 레닌그라드 기체동역학 연구소(ГДЛ)의 일부 시설을 할당받은 'ЛенГИРД(GIRD 레닌그라드 연구소)'와 모스크바의 대학 및 오소아비아힘 연구시설 일부를 할당받은 'МосГИРД(GIRD 모스크바 연구소)'로 나뉘어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 인력은 공동 설립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각계각층의 인사들로 배정되어 있었고, 총 4개의 전문연구반(여단)으로 나뉘어져 각각 이론, 연구, 설계, 실험에 대한 역할을 분업하여 진행하였다. 이 조직적인 분업 구조 시스템 덕분에 이들은 소련 정부와 학계로부터 'ГИРД 여단'이라는 명칭으로 통칭되기도 했다.
자신들의 연구기관 명칭을 실험용 발사체의 넘버링 코드로 사용할 정도로 ГИРД 연구원들은 우주와 로켓을 매우 동경하고 사랑했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었다. 이들은 액체 연료 발사체 10개를 순서대로 기획 및 제작하여 실험에 사용했으며,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기술 실증을 위한 하이브리드 로켓인 ГИРД-9와 소련 최초의 순수 액체 연료 로켓인 ГИРД-X를 성공시키며 기대하던 성과를 낼 수 있었다.
ГИРД는 이후 1933년 10월 3일[9] 소련 정부의 더 효율적인 국방 연구 통합 정책에 따라, 당대 소련의 저명한 군 소속 연구기관이었던 '기체동역학 연구소(ГДЛ)'와 합병되면서 국방부 산하 국방과학위원회의 '반응 추진 과학 연구소[10]'의 직속 연구기관으로 흡수 합병 및 편입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쌓아 올린 연구 결과와 귀중한 경험들은 멀지 않은 미래에 소련이 우주 경쟁 시대의 선발 주자로서, 미국을 제치고 전세계에 가장 먼저 우주 개척의 신호탄을 쏘아 올릴 수 있도록 만든, 매우 귀중한 과학기술적 제반이자 주춧돌이 되어주었다.
ГИРД(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의 전신은 Осоавиахим(오소아비아힘, 국방 항공 및 화학 건설 진흥 협의회)와 가스동역학 연구소 "ГДЛ"에서 근무하던 과학자들 중 반작용 추진 장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던 과학자들이 모여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기존보다 더 나은 반작용 추진 장치에 대한 연구와 실험을 하고자 중앙 연구개발 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프리드리히 찬데르, 세르게이 코롤료프, 미하일 티혼라보프가 공동 창립자로서 1931년 9월 15일에 모스크바 ГИРД를 설립하였다. 이후에 2번째로 설립된 레닌그라드 ГИРД과 협업하며 여러 가지 과학적 성과를 창출한 ГИРД는 1933년 9월에 항공우주공학의 발전상을 지켜보던 소련 정부의 행정 명령 절차에 따라 1933년 10월에 관련된 여러 연구개발 학술기관들과 완전히 통폐합되어 РНИИ의 일부가 되었고, 이들의 연구개발은 꾸준히 진행되어 우주 경쟁 시대에 소중한 경험적 토대로서 작용하였다.
먼저 설립된 연구소는 모스크바 ГИРД로 1931년 9월 15일에 설립되었다. 연구진들은 Осоавиахим(오소아비하임)의 반작용 추진 엔진 부문을 담당하던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프리드리히 찬데르, 세르게이 코롤료프, 미하일 티혼라보프와 같은 오소아비하임 출신의 항공우주공학 전문가들이 모스크바 ГИРД를 기술적으로 지원하고 이론, 설계, 제작, 엔진, 실험 모든 분야에 걸쳐서 모스크바 ГИРД의 다른 연구진들과 협업하였다.
이들은 총 4개의 작업팀으로 나뉘어져서 분업 하에 항공우주공학 및 우주과학 연구개발에 대한 협업을 수행하였으며, 제 1 작업팀은 로켓 엔진 개발조, 제 2 작업팀은 로켓 조립 및 응용 작업조, 제 3 작업팀은 제트 추진 기술 연구조, 제 4 작업팀은 로켓 비행체 구조 및 형상 설계조로 지명, 활발히 활동하였었다.
1932년부터는 본격적인 실험과 연구를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같은 해 4월에는 모스크바 ГИРД가 연구 시설을 공식적으로 할당받았다. 약 3개월 뒤 7월 14일에 5월부터 점진적으로 진급해오던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오소아비하임 중앙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 ГИРД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소련 최초의 하이브리드 연료 발사체인 ГИРД-9(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 9호)와 전용 엔진인 Ракетный двигатель 09(09호 로켓 엔진)에 대한 작업과 동시에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발사체인 ГИРД-Х(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 10호)와 전용 엔진인 Ракетный двигатель 10(10호 로켓 엔진)을 개발하였다.
1932년 8월부터는 소련군 육군 대원수이자 군사발명관리그룹의 총책임자를 겸직하고 있었던 미하일 투하쳅스키로부터 공식적인 R&D 예산을 배정 및 지원 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느리고 더딘 자원자 참여 형식의 민간 연구개발 단체[11]에서 본격적인 정부 직속 항공우주 R&D 기관으로 전환된 ГИРД(레닌그라드 ГИРД 포함)는 연구개발에 더더욱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1933년 5월 31일, 모스크바 ГИРД는 마침내 제 2 작업팀의 주도로 ГИРД-9의 제작을 완료하였고, 3개월 뒤 8월 11일에는 제 4 작업팀이 독자적으로 연구하던 로켓 글라이더 БИЧ-11에 전용 로켓 엔진인 ОР-2를 기반으로 하는 더더욱 개선된 РП-1의 시험비행에 성공하였다. 6일 뒤 8월 17일에는 ГИРД-9의 발사 실험이 이루어졌고, 결과는 기대치에 부응하진 못했지만 만족스러운 성공이였다. ГИРД-9 발사 실험의 성공에 고무된 모스크바 ГИРД의 연구진들은 서둘러서 ГИРД-Х의 제작에 신중하게 임했고, 그 결과 11월 25일에 완성된 ГИРД-Х를 가지고 발사 실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모든 발사체 관련 실험은 모든 실험 및 보안 요건을 충족하는 소련 공군의 나하비노 공군 비행장에서 수행되었다.
특히 ГИРД-9와 ГИРД-Х의 성공에 대한 보고 소식은 소련 정부에 대해 항공우주공학 기술에 대한 큰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1933년 9월 21일에 육해군인민위원회가 먼저 모스크바 ГИРД를 관련된 항공우주공학 연구개발 학술기관과 통폐합하는 행정 절차에 들어갔으며, 10월 31일에서는 중공업인민위원회가 통폐합 과정에 참여하여 항공우주공학 연구개발 학술기관과 통폐합하는 행정 절차에 들어갔다.
이후에 여러 관련된 정부 기관들과 통폐합된 ГИРД는 РНИИ(Реактивный научно-исследовательский институт, 반작용 과학-조사 연구소)로서 1934년부터 다시 활동하였으며, 대숙청과 대조국전쟁이라는 역사적 파란을 겪게됨에도 불구하고, 관련 기관들과 협력 및 연계를 꾸준히 진행하며 항공우주공학 연구개발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오랜 연구개발 끝에 1957년부터 1969년까지 소련은 우주 경쟁의 초반부부터 미국을 앞서지르는 전성기를 열어나갈 수 있었다.
이들은 총 4개의 작업팀으로 나뉘어져서 분업 하에 항공우주공학 및 우주과학 연구개발에 대한 협업을 수행하였으며, 제 1 작업팀은 로켓 엔진 개발조, 제 2 작업팀은 로켓 조립 및 응용 작업조, 제 3 작업팀은 제트 추진 기술 연구조, 제 4 작업팀은 로켓 비행체 구조 및 형상 설계조로 지명, 활발히 활동하였었다.
1932년부터는 본격적인 실험과 연구를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같은 해 4월에는 모스크바 ГИРД가 연구 시설을 공식적으로 할당받았다. 약 3개월 뒤 7월 14일에 5월부터 점진적으로 진급해오던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오소아비하임 중앙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 ГИРД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소련 최초의 하이브리드 연료 발사체인 ГИРД-9(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 9호)와 전용 엔진인 Ракетный двигатель 09(09호 로켓 엔진)에 대한 작업과 동시에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발사체인 ГИРД-Х(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 10호)와 전용 엔진인 Ракетный двигатель 10(10호 로켓 엔진)을 개발하였다.
1932년 8월부터는 소련군 육군 대원수이자 군사발명관리그룹의 총책임자를 겸직하고 있었던 미하일 투하쳅스키로부터 공식적인 R&D 예산을 배정 및 지원 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느리고 더딘 자원자 참여 형식의 민간 연구개발 단체[11]에서 본격적인 정부 직속 항공우주 R&D 기관으로 전환된 ГИРД(레닌그라드 ГИРД 포함)는 연구개발에 더더욱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1933년 5월 31일, 모스크바 ГИРД는 마침내 제 2 작업팀의 주도로 ГИРД-9의 제작을 완료하였고, 3개월 뒤 8월 11일에는 제 4 작업팀이 독자적으로 연구하던 로켓 글라이더 БИЧ-11에 전용 로켓 엔진인 ОР-2를 기반으로 하는 더더욱 개선된 РП-1의 시험비행에 성공하였다. 6일 뒤 8월 17일에는 ГИРД-9의 발사 실험이 이루어졌고, 결과는 기대치에 부응하진 못했지만 만족스러운 성공이였다. ГИРД-9 발사 실험의 성공에 고무된 모스크바 ГИРД의 연구진들은 서둘러서 ГИРД-Х의 제작에 신중하게 임했고, 그 결과 11월 25일에 완성된 ГИРД-Х를 가지고 발사 실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모든 발사체 관련 실험은 모든 실험 및 보안 요건을 충족하는 소련 공군의 나하비노 공군 비행장에서 수행되었다.
특히 ГИРД-9와 ГИРД-Х의 성공에 대한 보고 소식은 소련 정부에 대해 항공우주공학 기술에 대한 큰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1933년 9월 21일에 육해군인민위원회가 먼저 모스크바 ГИРД를 관련된 항공우주공학 연구개발 학술기관과 통폐합하는 행정 절차에 들어갔으며, 10월 31일에서는 중공업인민위원회가 통폐합 과정에 참여하여 항공우주공학 연구개발 학술기관과 통폐합하는 행정 절차에 들어갔다.
이후에 여러 관련된 정부 기관들과 통폐합된 ГИРД는 РНИИ(Реактивный научно-исследовательский институт, 반작용 과학-조사 연구소)로서 1934년부터 다시 활동하였으며, 대숙청과 대조국전쟁이라는 역사적 파란을 겪게됨에도 불구하고, 관련 기관들과 협력 및 연계를 꾸준히 진행하며 항공우주공학 연구개발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오랜 연구개발 끝에 1957년부터 1969년까지 소련은 우주 경쟁의 초반부부터 미국을 앞서지르는 전성기를 열어나갈 수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오소아비아힘의 주도로 설립된 모스크바 ГИРД와 달리, 레닌그라드 ГИРД는 레닌그라드에 소재한 기체동역학 연구소 "ГДЛ(기체동역학 연구소)"의 주도[13]로 1932년 2월 경에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라주모프, 게오르기 에리호비치 랑게마크의 주도로 설립되었고, 야코프 이시도로비치 페렐만,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르닌등이 설립 전후 시기에 협력 및 보조에 나섰다.
1932년부터는 연구개발 인력이 400명으로 늘어났고, 이중 블라디미르 안드레예비치 아르테미예프와 보리스 세르게예비치 페트로파블롭스키, 발렌틴 글루시코와 같은 레닌그라드 기체동역학 연구소 "ГДЛ" 출신 연구원들이 주축이 되어 레닌그라드 ГИРД의 조직화와 업무 과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ЛенГИРД는 로켓 기술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소형 고체 연료 발사체의 시연 발사를 주도했으며, 특수 목적용 시험용 소형 고체 연료 발사체(사진 촬영, 기상 관측 등)들은 물론, 레닌그라드 ГИРД의 자체적인 기술력으로 회전식 액체 연료 발사체인 '라주모프-슈테른 로켓'을 설계하고 제작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직이 РНИИ으로 흡수 합병되었음에도, 산하 독립 기관인 '반작용 추진 운동 섹션(Секция реактивного движения)'으로서 연구를 이어나갔다. 기존의 연구 말고도, 군용 무기 연구개발에도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레닌그라드 지부의 핵심 연구원 중 한 명이였던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츠 마친스키(Михаил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чинский)의 주도로 ГИРД의 연구개발 분야에 대한 대중적 홍보 및 교육 활동과 더불어, 동물을 이용하여 발사체의 비행 시에 중력 가속도가 생리의학적으로 미치는 영향들을 연구했으며, 이전 발사체 연구개발 과정에서 축적한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ЛенГИРД만의 독창적인 설계가 적용된 발사체인 액체연료 로켓 엔진 모델(ЖРД)과 전용 발사체에 대한 연구개발과 실험 등을 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이어나갔다.
1932년부터는 연구개발 인력이 400명으로 늘어났고, 이중 블라디미르 안드레예비치 아르테미예프와 보리스 세르게예비치 페트로파블롭스키, 발렌틴 글루시코와 같은 레닌그라드 기체동역학 연구소 "ГДЛ" 출신 연구원들이 주축이 되어 레닌그라드 ГИРД의 조직화와 업무 과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ЛенГИРД는 로켓 기술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소형 고체 연료 발사체의 시연 발사를 주도했으며, 특수 목적용 시험용 소형 고체 연료 발사체(사진 촬영, 기상 관측 등)들은 물론, 레닌그라드 ГИРД의 자체적인 기술력으로 회전식 액체 연료 발사체인 '라주모프-슈테른 로켓'을 설계하고 제작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직이 РНИИ으로 흡수 합병되었음에도, 산하 독립 기관인 '반작용 추진 운동 섹션(Секция реактивного движения)'으로서 연구를 이어나갔다. 기존의 연구 말고도, 군용 무기 연구개발에도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레닌그라드 지부의 핵심 연구원 중 한 명이였던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츠 마친스키(Михаил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чинский)의 주도로 ГИРД의 연구개발 분야에 대한 대중적 홍보 및 교육 활동과 더불어, 동물을 이용하여 발사체의 비행 시에 중력 가속도가 생리의학적으로 미치는 영향들을 연구했으며, 이전 발사체 연구개발 과정에서 축적한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ЛенГИРД만의 독창적인 설계가 적용된 발사체인 액체연료 로켓 엔진 모델(ЖРД)과 전용 발사체에 대한 연구개발과 실험 등을 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이어나갔다.
- 연구원들은 자신들을 농담 삼아 "공짜로 일하는 엔지니어들의 모임(группа инженеров, работающих даром)"이라 부르곤 했는데, 이는 단체명인 ГИРД의 머리글자를 빗댄 말장난이었다. 그럴만 한 이유로는 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ГИРД)이 무보수로 자원해 일하는 동호인들로 하여금 창립된 민간 조직이였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모스크바 ГИРД의 경우, 국방과학위원장인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이들을 군 조직으로 편입 및 흡수하기 이전(국가 예산을 할당받는 정부 조직이 되기 전)까지 준군사조직인 오소아비아힘의 관리 하에 놓여있었는데, 글라이더학교 설계부가 쓰던 사도보-스파스카야 거리 모퉁이 건물의 버려진 지하실을 작업 공간으로 받아서 연구실로 썼었기 때문이다.
- ГИРД 중 처음으로 설립된 МосГИРД의 공동 설립자들(프리드리히 찬데르, 미하일 티혼라보프, 세르게이 코롤료프)은 현대적인 우주기술의 창시자인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두 명은 직접 치올콥스키의 이론과 성과를 지켜보고는 감복하여 제자를 자청하며 치올콥스키와 자주 교류해왔거나[14]과 우연한 계기로 우주과학에 대한 해답과 조언을 듣고자 직접 찾아간 이후에 인생의 방향성이 송두리째 뒤바뀌었을 정도였다. 만약에 칼루가 현자의 앞선 활동과 선견지명, 그리고 후배들에 대한 조력이 없었다면 우주 경쟁과 우주 개척은 조금은 먼 훗날의 미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1] 모스크바 ГИРД 설립일[2] 레닌그라드 ГИРД 설립일[3] 설립일 부재의 이유는 기록의 부재 때문이며, 얼마 남지 않은 자료 중 가장 확실한 정보로는 3월 중에 창설된 기록만 남아있다.[4] 모스크바 ГИРД와 레닌그라드 ГИРД를 포함한 관련된 항공우주 기술 연구개발 학술기관과 국방 관련 실험실 및 연구소와 НИИХИМИ(화학 산업 연구소)와의 통폐합 결정.[5] РНИИ(Реактивный научно-исследовательский институт, 반작용 추진 과학 연구소)로 완전 통폐합됨.[6] Группа изучения реактивного движения, ГИРД[7] 페루의 페드로 파울레트, 미국의 로버트 고다드[8] 독일의 우주비행협회(VfR)[9] 통상적인 법적 시행령 기준 날짜이며, 조직 통합 논의는 9월부터 시작되었다[10] Реактивный научно-исследовательский институт, РНИИ[11] 1920~30년대의 소련에서는 대부분 학계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학술활동 및 연구개발 단체를 설립[12]하여 모든 작업을 자비를 들여서 충당하면서 단체를 유지하다가, 과학기술을 통한 산업경제 육성의 필요성을 느끼던 소련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정부 직속 국영기관으로 성장하던 게 시대적 조류였다.[12] 정부 소속이지만 독립 기관 형태였다.[13] 레닌그라드 기체동역학 연구소가 이미 1921년에 설립된 이래로 이론 및 설계 연구를 시작해왔고, 1929년부터 자체적인 발사체를 개발해왔지만, ГИРД의 설립으로 더욱 연구 분야와 과정이 확대되었다.[14] 프리드리히 찬데르, 미하일 티혼라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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