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갈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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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사
История русской литератур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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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세기 중반)
키예프 루스(Рѹ́сьскаѧ землѧ)

키예프 루스 국장 서사시: 이고르 원정기(Слово о плъку Игорєвѣ)

노브고로드 공화국(Новгород)

노브고로드 공화국 국기 서사시: 빌리나(былина)(사드코/Садко, 바실리 부슬라예프/Василий Буслаев)

키예프 루스(Рѹ́сьскаѧ землѧ)

키예프 루스 국장 성인전: 보리스와 글레프 이야기(Сказание о Борисе и Глеб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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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국장 성경 필사본: 노브고로드의 서(Новгородский кодекс) · 오스트로미르 복음서(Остромирово Евангелие)
키예프 루스 국장 설교문: 율법과 은혜에 관한 설교(Слово о законѣ и благодѣт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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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차르국(Русское царство)

루스 차르국 국기 서신: 이반 뇌제안드레이 쿠릅스키의 서신(Переписка Ивана Грозного с Андреем Курбским)
루스 차르국 국기 자서전: 아바쿰
루스 차르국 국기 성인전: 로스토프의 데메트리우스
루스 차르국 국기 역사학: 아브라미 팔리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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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국기 러시아 포스트 소비에트 문학: 보리스 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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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Казахстан)

카자흐스탄 국기 카자흐스탄 포스트 소비에트 문학: 올자스 술레이메노프



망명(Изгна́ние)

미국 국기 모더니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미국 국기 포스트모더니즘: external/upload....이오시프 브로츠키
미국 국기 수용소 문학: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프랑스 국기 디스토피아: 예브게니 자먀틴(우리들)
프랑스 국기 상징주의: 지나이다 기피우스
호주 국기 생태문학: 니콜라이 바이코프(위대한 왕)
스위스 국기 포스트모더니즘: 미하일 쉬시킨




우크라이나(Украина)

우크라이나 국기 우크라이나 포스트 소비에트 문학: 안드레이 쿠르코프
소련(CCCP)

소련 국기 역사학: 스베틀라나 구르비치
소련 국기 유라시아주의 역사학: 표트르 사비츠키 · 레프 구밀료프
소련 국기 형식주의 비평: 빅토르 시클롭스키
소련 국기 마르크스주의 비평: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망명(Изгна́ние)

미국 국기 역사학: 보리스 니콜라옙스키
프랑스 국기 역사학: 파벨 밀류코프
독일 국기 유라시아주의 역사학: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


알렉산드르 아르카디예비치 갈리치
Александр Аркадьевич Галич
Aleksandr Galich
본명
알렉산드르 아로노비치 긴즈부르크
Александр Аронович Гинзбург
Aleksandr Aronovich Ginzburg
출생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드네프르페트롭스크주 드니프로)
사망
1977년 12월 15일 (향년 59세)
국적
소련 국기
소련
→ 무국적[1]
직업
시인, 극작가, 시나리오 작가, 바르드
활동 기간
1940년대 - 1977년
장르
러시아 바르드, 풍자, 드라마, 정치 문학
 
 
 
 
 
 
 
 
 
 
 
 
 
 
 
 
 
 
 
 
 
 
 
 
 

1. 개요2. 이름3. 생애
3.1. 유년 시절3.2. 관제 예술가 시절3.3. 반체제 예술가 시절3.4. 말년과 사망3.5. 사후 복권
4. 갈리치의 작품 세계
4.1. 역할적 서정시와 연극성4.2. 굴라크의 트라우마와 역사적 기억4.3. 순응주의자들에 대한 비판4.4. '소시민'의 비애와 인간 실존의 문제4.5. 유대인적 정체성
5. 주요 작품
5.1. 시 (노래)

 
 
 
 
 
 
 
 
 
 
 
 
 
 
 
 
 
 
 
 
 
 
 
 
 
 
 
 
 
 
 
 
 
 
 
 
 
 
 
 

1. 개요[편집]

 
 
 
 
 
 
 
 
 
 
 
 
 
 
 
 
 
 
 
 
 
 
 
 
 
 
 
 
 
 
 
 
 
 
 
 
 
 
 
 
Я выбираю свободу
나는 자유를 선택한다

Сердце мое заштопано,
나의 심장은 누덕누덕 기워졌고,

В серой пыли виски,
관자놀이는 잿빛 먼지 속에 덮여 있다만,

Но я выбираю Свободу,
그럼에도 나는 자유를 선택한다,

И — свистите по все свистки!
그러니 있는 힘껏 휘파람을 불어라!

"나는 자유를 선택한다"(Я выбираю свободу), 1970 번역 출처

알렉산드르 갈리치는 소련의 시인, 극작가, 바르드로 20세기 러시아 특유의 문화인 바르드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초기에는 소련 체제 입장에서도 '건전한' 성공적인 극작가로 명성을 누렸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 스탈린 정권의 후유증과 소련 체제의 모순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저항적인 노래들을 창작하며 반체제 예술가로 변신했다. 동시대의 불라트 오쿠자바가 지식인(интеллигенция, 인텔리)의 낭만과 도덕적 성찰을 노래하고, 블라디미르 비소츠키가 거리의 민중이 지닌 원초적 에너지와 반항 정신을 대변했다면, 갈리치는 정치적 · 역사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시대의 양심' 역할과 함께 날카로운 지성과 역사적 통찰력으로 소련 체제의 모순을 정면으로 겨냥한 '정치적 음유시인'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속적인 박해 끝에 1974년 강제로 망명을 당했으며, 3년 뒤 파리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노래를 넘어, 한 시대의 가장 정직한 증언이자 문학적 기록으로서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받는다.
 
 
 
 
 
 
 
 
 
 
 
 
 
 
 
 
 
 
 
 
 
 
 
 
 
 
 
 
 
 
 
 
 
 
 
 
 
 
 
 

2. 이름[편집]

 
 
 
 
 
 
 
 
 
 
 
 
 
 
 
 
 
 
 
 
 
 
 
 
 
 
 
 
 
 
 
 
 
 
 
 
 
 
 
 
본명은 알렉산드르 아로노비치 긴즈부르크(Александр Аронович Гинзбург)이며, 그의 필명 '갈리치(Галич)'는 본명인 Гинзбург, Александр Аркадиевич(긴즈부르크, 알렉산드르 아르카디예비치)에서 유래했다.[2]

부친의 이름이 아론 긴즈부르크(Арон Гинзбург)였으므로 실제 부칭은 아로노비치가 맞으나, 당시 소련에 반유대주의가 만연했기에[3] 차별을 피하기 위해 첫 국내 여권[4] 발급 당시 '아론'과 비슷하게 들리는 러시아식 이름인 '아르카디'에서 유래한 부칭 '아르카디예비치'로 자신의 이름을 등록했다.
 
 
 
 
 
 
 
 
 
 
 
 
 
 
 
 
 
 
 
 
 
 
 
 
 
 
 
 
 
 
 
 
 
 
 
 
 
 
 
 

3. 생애[편집]

 
 
 
 
 
 
 
 
 
 
 
 
 
 
 
 
 
 
 
 
 
 
 
 
 
 
 
 
 
 
 
 
 
 
 
 
 
 
 
 

3.1. 유년 시절[편집]

 
 
 
 
 
 
 
 
 
 
 
 
 
 
 
 
 
 
 
 
 
 
 
 
 
 
 
 
 
 
 
 
 
 
 
 
 
 
 
 
1918년 10월 19일 우크라이나 예카테리노슬라프의 유대인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경제학자인 아버지와 음악원 교수인 어머니 밑에서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1920년대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했으며, 학창 시절부터 문학과 연극 양쪽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35년에는 막심 고리키 문학 창작 대학과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 오페라-드라마 스튜디오에 동시 입학하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다. 이러한 학업 배경은 훗날 그의 작품이 지닌 깊이와 연극성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3.2. 관제 예술가 시절[편집]

 
 
 
 
 
 
 
 
 
 
 
 
 
 
 
 
 
 
 
 
 
 
 
 
 
 
 
 
 
 
 
 
 
 
 
 
 
 
 
 
독소전쟁 시기에는 전선을 돌며 소련군 휘하 극단에서 활동했으며, 전쟁 후에는 본격적으로 극작가와 시나리오 작가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타이미르가 당신을 부른다"(Вас вызывает Таймыр, 1948), "행운을 빌어!"(В добрый час!, 1954) 등 여러 편의 희곡 제작에 참여했으며, 특히 공동 집필한 영화 "믿음직한 친구들"(Верные друзья, 1954)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며 성공했다. 스탈린 체제 아래 갈리치는 소련 작가 동맹과 영화인 동맹의 정회원으로서 모스크바 중심가에 아파트를 보유하고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받는 주류 예술가로서 활동했다.
 
 
 
 
 
 
 
 
 
 
 
 
 
 
 
 
 
 
 
 
 
 
 
 
 
 
 
 
 
 
 
 
 
 
 
 
 
 
 
 

3.3. 반체제 예술가 시절[편집]

 
 
 
 
 
 
 
 
 
 
 
 
 
 
 
 
 
 
 
 
 
 
 
 
 
 
 
 
 
 
 
 
 
 
 
 
 
 
 
 
1953년 스탈린 사망과 함께 '흐루쇼프 해빙기'(Хрущёвская оттепель)[5]가 도래하며 갈리치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1956년 흐루쇼프의 제20차 당대회 비밀 연설을 통해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대숙청의 범죄가 일부나마 폭로되었고, 굴라크의 생존자들이 사회로 복귀하며 소련 사회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6]

이렇게 선동과 선전 뒤에 가려져 있던 끔찍한 진실이 날마다 폭로되는 가운데 갈리치는 더 이상 소련 체제의 비위를 맞추는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로 한 갈리치는 1950년대 후반 위험을 감수하고 아파트에서 소수의 친구들 앞에서 기타를 치며 금기시된 주제를 다루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7] 그의 목소리와 노랫말은 크바르티르니크에서 제작된 마그니티즈다트 형태로 소련 전역에 유포되었고, 지식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에 당연히 KGB의 감시와 압박이 시작되었다. 1968년 갈리치는 시베리아 노보시비르스크의 한 과학자 클럽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단독 콘서트를 열었으나, 이로 인해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히게 된다. 더 이상 갈리치는 공식 무대에 오를 수 없었고, 자신이 참여한 영화 크레딧에서 이름이 빠지기도 했다. 1970년에는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간신히 회복되었고, 이후에는 작가 동맹(1971년) 및 영화인 동맹(1972년)에서도 제명당했다. 당시 소련 특성상 예술가 동맹에서 제명당한 이는 더 이상 예술가가 될 수 없었고[8], 창작 활동으로 생계를 꾸릴 수 없었으니 사회적 사형 선고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모든 공식 활동이 막힌 상황에서도 갈리치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고, 소련 당국에 있어 갈리치의 존재는 부담스러워져만 갔다. 결국 1974년 6월 25일, 알렉산드르 갈리치는 추방당하게 된다.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갈리치는 편도 비행기 표를 들고 강제로 망명길에 올랐다.
 
 
 
 
 
 
 
 
 
 
 
 
 
 
 
 
 
 
 
 
 
 
 
 
 
 
 
 
 
 
 
 
 
 
 
 
 
 
 
 

3.4. 말년과 사망[편집]

 
 
 
 
 
 
 
 
 
 
 
 
 
 
 
 
 
 
 
 
 
 
 
 
 
 
 
 
 
 
 
 
 
 
 
 
 
 
 
 
이후 갈리치는 해외를 떠돌게 된다. 처음에는 노르웨이에 머물렀고, 이후 서독 뮌헨의 '라디오 리버티'에서 근무하며 자신의 프로그램 "알렉산드르 갈리치가 노래하고 이야기하다"를 진행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는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활동을 이어갔으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심한 향수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1977년 12월 15일 갈리치는 저택에서 사망하였다. 공식 사인은 사고사이나, 그의 딸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KGB가 갈리치를 죽이고 사고사로 위장했다고 주장했다.[9][10] 그는 파리 근교의 "생트 주느비에브 데 부아 러시아인 묘지"(Cimetière russe de Sainte-Geneviève-des-Bois)에 안장되었다.
 
 
 
 
 
 
 
 
 
 
 
 
 
 
 
 
 
 
 
 
 
 
 
 
 
 
 
 
 
 
 
 
 
 
 
 
 
 
 
 

3.5. 사후 복권[편집]

 
 
 
 
 
 
 
 
 
 
 
 
 
 
 
 
 
 
 
 
 
 
 
 
 
 
 
 
 
 
 
 
 
 
 
 
 
 
 
 
갈리치의 이름은 1980년대 후반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마침내 해금되었다. 1988년 갈리치는 작가 동맹 및 영화인 동맹에 복권되었다. 같은 해 그의 작품집이 소련에서 처음으로 공식 출간되었고, 그의 삶과 노래는 다큐멘터리와 연극으로 재조명되었다.

그의 노래들은 억압된 시대를 살아온 세대에게는 깊은 위로와 공감을, 새로운 세대에게는 전체주의의 위험성과 저항 정신의 가치를 일깨우는 강력한 역사적 텍스트가 되었다고 평가받았다.
 
 
 
 
 
 
 
 
 
 
 
 
 
 
 
 
 
 
 
 
 
 
 
 
 
 
 
 
 
 
 
 
 
 
 
 
 
 
 
 

4. 갈리치의 작품 세계[편집]

 
 
 
 
 
 
 
 
 
 
 
 
 
 
 
 
 
 
 
 
 
 
 
 
 
 
 
 
 
 
 
 
 
 
 
 
 
 
 
 

4.1. 역할적 서정시와 연극성[편집]

 
 
 
 
 
 
 
 
 
 
 
 
 
 
 
 
 
 
 
 
 
 
 
 
 
 
 
 
 
 
 
 
 
 
 
 
 
 
 
 
갈리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그의 연극 작가라는 커리어에서 비롯된 '역할적 서정시(ролевая лирика)' 기법이다. 갈리치는 청자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특정 인물의 가면을 쓰고 그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했다. 그의 노래에는 전직 굴라크 간수, 기회주의적인 관료, 순진한 노동자, 유대인 희생자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독백처럼 털어놓는다.

이를 통해 그의 노래는 인물의 시점을 통해 시스템의 부조리와 인간의 위선을 내부자의 목소리로 폭로함으로써 풍자의 역할을 극대화하였고, 직접적인 비판 대신 인물의 목소리를 빌림으로써 직접적 검열을 우회할 수 있었으며, 특정 인물의 구체적인 고백을 통해 청자들이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끼게 하고 시대의 비극에 대한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4.2. 굴라크의 트라우마와 역사적 기억[편집]

 
 
 
 
 
 
 
 
 
 
 
 
 
 
 
 
 
 
 
 
 
 
 
 
 
 
 
 
 
 
 
 
 
 
 
 
 
 
 
 
갈리치는 스탈린 시대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선구자라고 평가받는다. "구름"(Облака)에서는 20년간 아바칸[11] 굴라크에서 생활하다 풀려난 한 남자의 허망한 독백을 통해 되찾은 자유가 결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 주지 못하는 비극을 그리고 있으며, "나는 자유를 선택한다(Я выбираю свободу)"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으로서밖에 저항할 수 없는 소련 체제 아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실존적 저항으로서의 자유를 노래하며 인간 존엄의 궁극적인 의미를 탐구했다. 갈리치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작품에서 굴라크를 언급한 가장 최초의 인물들 중 하나였으며, 그에게 있어 굴라크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소련 사회의 근간에 자리한 원죄이자 끊임없이 되새겨야 할 기억이었다.
 
 
 
 
 
 
 
 
 
 
 
 
 
 
 
 
 
 
 
 
 
 
 
 
 
 
 
 
 
 
 
 
 
 
 
 
 
 
 
 

4.3. 순응주의자들에 대한 비판[편집]

 
 
 
 
 
 
 
 
 
 
 
 
 
 
 
 
 
 
 
 
 
 
 
 
 
 
 
 
 
 
 
 
 
 
 
 
 
 
 
 
그의 풍자는 체제 자체는 물론 그 안에서 기생하는 순응주의자들에게까지 뻗어나갔다. "나는 자유를 선택한다"(Я выбираю Свободу)에서는 한 방울씩 내면의 노예 근성을 짜내자던 체호프의 말은[12] 카프리에서나 통할 널널한 소리라며 억압받는 민중의 분노와 자유에 대한 갈망은 이제 임계점을 넘어 전면적이고 공개적인 저항으로밖에 해소될 수 없는 폭발적 상태에 다다랐다고 외쳤다. "우린 호레이스보다 나을 것 없이"(Мы не хуже Горация)에서는 "한 번에 네 부를 복사하는 에리카 타자기"[13]와 "야우자 녹음기"[14]를 언급하며 이를 단순한 사물이 아닌 거대한 국가의 거짓에 맞서는 진실의 지하 산업, 즉 '사미즈다트'와 '마그니티즈다트' 전체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승화시켰다.

갈리치는 "팡파르 가득한 침묵(фанфарное безмолвие)"으로 대표되는 공식 문화의 공허함과 "속삭임으로 읽힌 글(прочитанное шепотом)"이 지닌 폭발적인 힘을 대비시키며, 진정한 예술의 생명력은 권력의 인정이 아닌 진실 그 자체에 있음을 역설했다.
 
 
 
 
 
 
 
 
 
 
 
 
 
 
 
 
 
 
 
 
 
 
 
 
 
 
 
 
 
 
 
 
 
 
 
 
 
 
 
 

4.4. '소시민'의 비애와 인간 실존의 문제[편집]

 
 
 
 
 
 
 
 
 
 
 
 
 
 
 
 
 
 
 
 
 
 
 
 
 
 
 
 
 
 
 
 
 
 
 
 
 
 
 
 
갈리치는 거대 담론뿐만 아니라 체제 속에서 살아감을 당하는 평범한 '소시민(маленький человек)'의 비애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공산주의 이념의 허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혼란을 겪는 노동자, 관료주의의 벽 앞에서 좌절하는 시민, 사소한 욕망과 도덕적 딜레마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의 초상을 세밀하게 그려내며 이념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왜곡하고 파괴하는지를 보여주었다.
 
 
 
 
 
 
 
 
 
 
 
 
 
 
 
 
 
 
 
 
 
 
 
 
 
 
 
 
 
 
 
 
 
 
 
 
 
 
 
 

4.5. 유대인적 정체성[편집]

 
 
 
 
 
 
 
 
 
 
 
 
 
 
 
 
 
 
 
 
 
 
 
 
 
 
 
 
 
 
 
 
 
 
 
 
 
 
 
 
갈리치의 시에서는 유대인적 정체성 또한 드러난다고 평가받는다. 만민 평등의 이상을 외치던 소련의 이념이 무색하게 당시 소련에서 반유대주의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며, 스탈린은 유대인들이 뭉칠 것을 두려워해 중요 유대인 인사를 사고사로 위장해 살해하기도 했다. 서류 위에서 '아로노비치'가 아닌 '아르카디예비치'라는 부칭 아래 살 수밖에 없던 그의 삶은 소련의 반유대주의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의 대표적 장편시 "카디시"(Кадиш)[15]"는 야누시 코르차크의 실화를 바탕으로 인간성의 말살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책임을 다한 한 인간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진혼곡이다.
 
 
 
 
 
 
 
 
 
 
 
 
 
 
 
 
 
 
 
 
 
 
 
 
 
 
 
 
 
 
 
 
 
 
 
 
 
 
 
 

5. 주요 작품[편집]

 
 
 
 
 
 
 
 
 
 
 
 
 
 
 
 
 
 
 
 
 
 
 
 
 
 
 
 
 
 
 
 
 
 
 
 
 
 
 
 

5.1. 시 (노래)[편집]

 
 
 
 
 
 
 
 
 
 
 
 
 
 
 
 
 
 
 
 
 
 
 
 
 
 
 
 
 
 
 
 
 
 
 
 
 
 
 
 
  • 나는 자유를 선택한다 (Я выбираю свободу)
  • 우린 호레이스보다 나을 것 없이 (Мы не хуже Горация)
  • 구름 (Облака)
  • 카디시 (Кадиш)
  • 페테르부르크 로망스 (Петербургский романс)
  • 영원의 불꽃에 대한 발라드 (Баллада о вечном огне)
  • 자유를 향한 사랑 / 침묵은 금 (Любовь к свободе / Молчание — золото)

 
 
 
 
 
 
 
 
 
 
 
 
 
 
 
 
 
 
 
 
 
 
 
 
 
 
 
 
 
 
 
 
 
 
 
 
 
 
 
 
[1] 1974년 박탈.[2] 성씨 - 이름 - 부칭 순서로 전체 성명을 나열하는 이른바 'ФИО'(фамилия, имя, отчество) 방식에 따른 이름. 러시아에서 공문서 등에서 표준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이다.[3] '아론'은 구약성경아론에서 따온 이름으로, 러시아에서는 유대인이 아니면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름이다.[4] 소련의 경우 '국내 여권'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사실상 소련 내 공식 신분증으로 기능했다. 지금도 많은 동구권 국가에는 이런 국내용 여권 제도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5]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소련의 시대적 변화를 가리키는 용어. 당시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정책과 다른 국가들과의 평화공존론 정책들로 인해 억울하게 수감된 굴라크 수용자들이 다수 풀려났으며, 문화적으로도 검열 등이 완화되었다. 이 용어는 일리야 예렌부르크의 1954년 소설 "Оттепель"(해빙기)에서 유래했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집권 이후 이러한 해빙기는 중단되었다.[6] 굴라크의 생존자 중에서는 갈리치의 사촌도 있었다.[7] 이런 비공개 소규모 공연을 크바르티르니크(Квартирник)라고 불렀다. 적발 시 최대 징역형을 살 수 있는 위험한 행위였으나 이는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다.[8] 정확히는 '공식적 직업으로서' 예술가를 말한다. 무직이 범죄이던 소련 체제 특성상 아예 백수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다른 직업이 배정될 뿐. 빅토르 초이부터 유리 셰프추크까지 당시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이 괜히 투잡을 뛴 게 아니다. 투잡을 뛰어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고 당국의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9] 갈리치의 사망을 처음 확인한 것은 외출을 나갔다 돌아온 그의 부인이었는데, 당시 갈리치는 새로 구입한 그룬디히(Grundig) 스테레오 음향 장비의 안테나를 손에 쥔 채 발견되었다. 문제는 그 안테나가 전기 콘센트에 그대로 꽂혀 있었단 것. 공식 사인은 안테나 연결 중 감전사였지만 파리 경찰이 수사를 대충 마무리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10] KGB의 요원이자 저널리스트였던 레오니트 콜로소프(Леонид Колосов)는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 국적과 창작의 자유를 보장해 줄 테니 갈리치에게 러시아로 다시 귀국하라는 제안을 보내라는 사적 명령을 KGB를 통해 내렸다고 주장했다. 다만 실제로 그런 제의가 갈리치에게 닿았는지는 불분명.[11] Абакан. 하카시야 공화국에 위치한 도시 이름.[12] "Выдавливает из себя по каплям раба". 안톤 체호프가 친구 알렉세이 수보린에게 쓴 편지에서 사용한 표현을 인용한 것. 점진적으로 교양과 교육을 통해 노예 근성을 극복하자고 체호프는 주장했다.[13] 사미즈다트 문서 참조.[14] Яуза. 당시 소련에서 널리 사용되던 녹음기 브랜드. 이름의 유래는 모스크바 지역을 흐르는 동명의 강.[15] קַדִּישׁ. 유대교 예배 중 신에게 올리는 찬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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