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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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주요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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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련 국장.png 소련 서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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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러시아 제국 차르

소련 대통령 →

1대

2대

3대

4대

5대

6대

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고르바초프

* 스탈린의 후임인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서기장의 위치가 아니라 소련 장관회의 주석의 자격으로 소련을 통치했다. 흐루쇼프가 서기장 직위를 맡은 뒤 제1서기라는 직위로 개명했다 그뒤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직위를 맡은뒤 서기장 직위로 다시 개명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Hammer_and_sickle_red_on_transparent.svg.png 소련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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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1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P

미하일 투하쳅스키

세묜 부됸늬

바실리 블류헤르

세묜 티모셴코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그리고리 쿨리크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이오시프 스탈린P

이반 코네프

레오니트 고보로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로디온 말리놉스키

표도르 톨부힌

키릴 메레츠코프

라브렌티 베리야N

바실리 소콜롭스키

니콜라이 불가닌P

안드레이 예레멘코

키릴 모스칼렌코SRF

바실리 추이코프

세르게이 비류조프AD, SRF

이반 바그라먄

마트베이 자하로프

필리프 골리코프

니콜라이 크릴로프SRF

표트르 코셰보이

파벨 바티츠키AD

레오니트 브레즈네프P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니콜라이 오가르코프

빅토르 쿨리코프

세르게이 소콜로프

바실리 페트로프

세묜 쿠르콧킨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

드미트리 야조프

해군
●2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이반 이사코프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공군
●3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알렉산드르 고로바노프

파벨 지가레프

콘스탄틴 벨쉬닌

파벨 쿠타코프

보리스 부가에프

알렉산드르 콜두노프

비고

파일:external/www.colordic.org/eee8aa.png : 소비에트연방 초기 5원수
파일:external/www.colordic.org/9acd32.png : 전간기 ~ 제2차 세계대전(~1945년 8월) 중 진급
파일:external/www.colordic.org/c0c0c0.png : 냉전 시기 진급

P : 정치장교, AD : 방공군, SRF : 전략로켓군, N : NKVD

● 1 : 전원 소비에트연방원수(Marshals of the Soviet Union). 스탈린은 대원수.
● 2 : 소비에트연방 함대사령관(Admiral of the fleet of the Soviet Union)
● 3 : 공군(항공원수)은 병과상원수(Chief marshal of the branch, 상급대장에 상응)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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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러시아 국영방송 로시야 1이 러시아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러시아인’을 선정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해 투표가 진행됐으며 러시아 인구 1억4천300만명중 5천만명 이상이 투표에 참가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표트르 스톨리핀

이오시프 스탈린

알렉산드르 푸시킨

표트르 대제

6위

7위

8위

9위

10위

블라디미르 레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이반 4세

11위

12위

예카테리나 2세

알렉산드르 2세

영문 위키 참조.

같이 보기: 위대한 영국인, 위대한 독일인, 위대한 프랑스인, 위대한 미국인

파일:Stalin_.jpg

이름

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1],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2]
Joseph Stalin
이오시프 스탈린(요세프 스탈린)

국적

러시아 제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8px-Flag_of_Russian_Empire_for_private_use_%281914%E2%80%931917%29_3.svg.png
러시아 공화국 파일:러시아 국기.png
소련 파일:소련 국기.png

출생

1879년 12월 18일, 러시아 제국 그루지야 고리

사망

1953년 3월 5일 (총 26741일), 소련 쿤체보

학력

트빌리시 신학교 중퇴

직업

정치인, 작가, 군인, 시인

정당

소련 공산당

종교

조지아 정교회국가 무신론

신체

168cm, A형

배우자

에카테리나 스바니드제 (1906–07)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1919–32)

자녀

야코프 주가슈빌리, 바실리 스탈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Stalin_Signature.svg.png


1. 개요2. 생애3. 평가4. 당대 각국 정상들과의 관계5. 가족사
5.1. 아내들5.2. 장남 야코프 주가시빌리5.3. 차남 바실리 스탈린5.4. 외동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5.5. 사생아
6. 이름7. 소문8. 비합리적인 의심과 불안9. 이야깃거리10. 스탈린을 다룬 저서
10.1. 국내 정발된 저서10.2. 국내 비정발된 저서
11. 매체에서12. 스탈린주의13.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14. 어록

1. 개요[편집]

파일:CroppedStalin1943.jpg

테헤란에서의 스탈린, 1943년[3]

인류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양면을 지닌 독재자[4]

소련의 초대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이자 소련 장관회의 주석. 블라디미르 레닌 휘하에서 러시아 혁명에 동참하여 러시아 제국을 무너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하 소련)을 건국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레닌 사후 교묘하게 권력을 장악하면서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권력을 장악한 이후 독재를 벌이며 정적과 반대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명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5] 한편, 구 러시아 제국 시절의 낙후된 농업 사회 기반의 소련을 5개년 계획으로 중공업/화학공업 위주로 급속도로 발전시켜서 초강대국으로 도약시켰다. 이러한 상반된 면모와 더불어 생전의 그가 휘둘렀던 절대권력 때문에 강철의 대원수 혹은 조지아의 인간백정[6]이라는 2가지의 이명으로 불린다.

세계에 전운이 감도는 와중, 나치 독일불가침조약을 맺는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발짝 물러서려 했지만, 독일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독소전쟁이 개시되며 연합국에 가입,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대숙청으로 말미암은 소련 내부의 혼란을 비롯한 여러 문제로 초기엔 큰 피해를 입었지만, 2천만을 훌쩍 넘기는 인명손실을 견뎌내며 끝끝내 승전하였고, 인민을 희생해 이룩한 공업화는 소련을 미국과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의 자리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캅카스조지아 출신이다.[7] 러시아 출신이 아닌데도 그는 평생 러시아의 내셔널리스트였다.[8] 그의 반대 선상인 극우에 서있던 아돌프 히틀러 역시 독일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역사 속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9] 1913년에는 캅카스 민족들은 우월한 러시아 문화에 머리 숙이고 들어와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히틀러가 스탈린을 가리켜 볼셰비즘을 러시아-슬라브 민족주의로 바꾸었다라고 평가한게 결코 틀린 말 아니다. 현재 학자들까지도 히틀러의 평가가 일리있다고 본다.[10] 더욱 흥미있는 점은,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스탈린은 당 내에서 대표적인 민족문제(특히 소수민족 문제) 전문가라는 평판을 얻었다는 점이다. 실제 스탈린 선집에는 민족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논문이 들어있기도 하다.

인간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잔인한 학살자로 지구상에서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권력자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이다. 스탈린이 실시한 대숙청에 의해 죽은 숫자만 약 60만명 정도로 추정되며, 굴라크에 끌려갔다가 사망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사망자는 좀 더 많아진다. 한편 서방 쪽에서는 대체로 200~400만 정도로 측정하며,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독재자들>의 저자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는 180만 정도로 추산했으며, 미국 하와이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국가권력에의한 민중 학살인 데모사이드(Democide)라는 용어를 정립한 루돌프 럼멜(Rudolph Rummel)은 여러 사학자들의 소스를 교차검증한 결과, 대숙청 시기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430만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11] 이 때문인지 사후에는 소련의 공식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서방 세력이 아닌 스탈린의 후임인 니키타 흐루쇼프를 비롯한 소련 공산당이 직접 내린 평가.

흔히 대숙청이 1937~1938년 대숙청 기간에만 진행되었다고 오해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1945년을 제외하고는 대숙청 기간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소련인들에게 이러한 종류의 위협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사회 전반에 대한 억압과 통제는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 이후에 더 강해진 면이 있다.

후퇴하는 비겁자에게 자비는 없다는 최고 사령부 명령 제270호(1941년 8월. 후퇴하는 자는 즉결처분)와 악명높은 형벌 부대를 만든 국방 인민 위원회 명령 227호(1942년 7월 형벌 부대 창설명령) 등이 역사에 길이 길이 남을 그의 피비린내나는 예술적(?) 사상이 돋보이는 대표적 작품이다. 붉은 군대 내 방첩부의 이름을 지을 적의 일화를 보면 그의 예술적 똘기가 잘 나타나는데, 그가 직접 제안하여, "스파이에게 죽음을!"(смерть шпионам! 스메르찌 쉬피오남!)의 앞글자들을 따서 스메르쉬(СМЕРШ)로 지었다. 이것이 그냥 별명이 아니라 공식명칭이었다. 작명 방식 자체야 그다지 특이할 것은 없지만[12] 보통 저런 공식명칭에 저렇게 과격한 표현을 쓰는 일은 흔치 않다는 점에서 그의 똘끼(...)를 엿볼 수 있다.[13]

멋있는 카이젤 수염을 기른 인상적인 용모를 하고 있으나[14] 사실 공식 사진 대다수가 곰보자국을 지운 편집판. '인민의 뽀샵질'이 아니라 '인민의 에어브러시'질이 이루어졌다. KGB의 검열기구 내에 이를 위한 특별팀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레닌 시절부터 에어브러시질은 소련 정권의 필수품이었다. 한 사람이 숙청되면 곧바로 공식 사진에서 그 사람 얼굴을 날려버려야 했으니까. 이것이 소설 1984의 모티브가 되었다. 물론 뽀샵질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레닌의 연설에 모인 사람들을 수십배로 뻥튀기한 사진 등이 있다. 천연두를 앓은 관계로 그렇게까지 미남은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자라면서 많이 잘생겨졌다. 그렇지만 마차 교통사고로 왼팔을 제대로 쓰지못해 병역도 면제될 정도였다. 키도 168cm 정도였는데[15], 그 당시의 키로서는 아주 작은 편은 아니었다. 또한 베니토 무솔리니김정일과는 달리 높은 구두를 신어서 키를 커보이게 하려고 하진 않았다. 이 사람은 다른 나라의 많은 독재자들과는 달리 권력 자체에만 탐닉했을 뿐, 허세를 부리거나 사치를 일삼는 일은 거의 없었다.[16] 그래서 독소전쟁 전까지는 군복이 아니라 그냥 인민복 차림으로 다닐 정도.

2. 생애[편집]

3. 평가[편집]

4. 당대 각국 정상들과의 관계[편집]

5. 가족사[편집]

파일:JJhtv48.jpg


카토 스바니제와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와 두 차례 결혼, 카토로부터 야코프 주가시빌리를, 나데즈다로부터 바실리 스탈린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를 얻었다. 카토는 젊어서 병으로 죽었고 나데즈다는 가정불화 끝에 자살했으며 야코프는 독일군 포로로 잡혀서 죽고 바실리는 스탈린이 죽자마자 바로 감옥에 끌려가는 등 스탈린 가족은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이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멀쩡한 스베틀라나마저도 미국으로 망명하여 아버지를 비난하는 입장을 취했다.

5.1. 아내들[편집]

첫 아내 : 예카테리나 스바니제(ეკატერინა სვიმონის ასული სვანიძე) : 1885년 4월 2일 ~ 1907년 12월 5일(22세)
두번째 아내 :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 1901년 9월 22일 ~ 1932년 11월 9일(31세)
아내들에게는 좀더 다른 태도를 보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첫 아내가 결혼 2년도 못채우고 병사하자(제정 러시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도 있다.) 몇 달 동안 상복을 입은 채로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다.[17] 심지어 아내 장례식 때 아내의 관을 묻을 때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구덩이로 뛰어들려고 했다고. 친구들이 다시 붙잡고 산 사람은 앞으로도 살아야지 이랬다지만... 흠좀무한 건 그 짧은 찰나의 시간에 제국 정보부인 오흐라나의 정보원이 장례식에 끼어있는 걸 간파하고 장례식 중간에 슬쩍 도망갔다는 사실.[18] 두번째 아내가 자살했을 때에도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내의 시신에 열렬히 입맞췄다고 한다. 또 정치국에 사표를 내고 서기장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첫 아내의 사인은 원래 허약한 아내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이곳저곳 도피생활을 반복하다 생긴 영양실조가 원인이 된 티푸스였고 두번째 아내의 자살 원인은 스탈린이 혁명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 생긴 우울증이라고 보고 있으니[19]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5.2. 장남 야코프 주가시빌리[편집]

해당 문서 참조.

5.3. 차남 바실리 스탈린[편집]

해당 문서 참조.

5.4. 외동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편집]

1926년 2월 28일 ~ 2011년 11월 22일(만 85세)
외동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Светлана Аллилуева)는 스탈린에게 매우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를 닮았는지 머리는 꽤 좋아서 러시아어는 물론,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에도 매우 유창했고, 최고 명문대인 모스크바대학을 나와서 번역자와 대학강사로 일했다. 아버지와 매우 돈독한 관계였으나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알렉세이 카플레르 사건으로 틀어졌다. 알렉세이 카플레르는 스베틀라나보다 나이가 두배나 많은 유대인 작가로, 서방 문물을 즐겨 보는 불온한 기질이 있었는데 스탈린은 그를 매우 싫어했다. 스탈린의 경호대장 블라시크가 알렉세이에게 스베틀라나에게서 떨어지라고 경고했지만 카플레르는 욕설을 퍼부으면서 거절했다. 결국 노한 스탈린은 카플레르를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종군기자로 쫓아버렸지만 카플레르는 바퀴벌레처럼 살아 돌아와서 다시 스베틀라나와 연애를 했다. 결국 스탈린은 카플레르를 굴라그에 처박고 스베틀라나를 불러 카플레르는 영국 스파이이며 지금까지 둘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도청기록을 보여주었다. 스베틀라나가 울면서 카플레르를 사랑한다고 하자 빡친 스탈린은 전쟁 중인데 철없는 소리 하고 자빠졌다고 스베틀라나의 뺨을 갈겼다. 스베틀라나는 이후 아버지와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회고했다.

이후로도 스베틀라나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 베리야와 연애를 해서 스탈린의 눈밖에 났고 이후로도 스탈린이 탐탁치 않아 하던 야코프의 친구 그리고리 모르조프와 결혼했다. 스탈린은 그 결혼에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사위를 자신의 다차에 초대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베틀라나는 얼마 안가서 모르조프와 이혼했고 스탈린 사후 스탈린이 독재자로 격하당하자 자신의 성씨였던 스탈리나(Сталина, 스탈린의 여성형 성씨)를 그녀의 어머니이자 스탈린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Аллилуева)의 성씨에서 따온 알릴루예바로 바꾸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심복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아들 유리 즈다노프와 두번째로 결혼했다가 자식낳고 얼마안가 이혼하고, 다시 결혼은 하지 않고 인도의 공산주의자와 동거하다가 1967년 미국으로 망명해 이주하여 '라나 피터스(Lana Peters)'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피터스 라는 성은 미국에서 재혼한 세번째 남편 건축가 윌리엄 피터스의 성을 딴 것. 그와의 사이에서도 딸을 한 명 낳기도 하였다.

1984년에는 두명의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이 있는 소련으로 다시 귀국하여 소련 국적을 회복한 후, 소련 당국의 강요였는지, 자의에 의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하루도 자유로운 날이 없었다"라며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년도 채 못돼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1980년대 말에는 영국에서 잠시 살다가, 말년에는 미국의 위스콘신 주의 소도시 리치랜드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며 극도로 폐쇄된 생활을 했다. 그 후, 2011년 11월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1년 전, 미국 일간지 '위스콘신 스테이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스탈린이 내 인생을 망쳤다. 어딜 가든 나는 아버지의 이름 아래 언제까지나 정치범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 전에 소련에 있을 당시에는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스탈린은 도덕적, 정신적인 괴물이다."라고 '''공개비판'"하기까지 하였다(...). 하인리히 힘러도조 히데키의 딸과는 비교되는 부분. 망명 후에 미국에서 '나의 아버지 스탈린'이라는 글을 썼는데, 이것이 소련 정부의 어그로를 끌었다. 당연히 소련에서는 금서. 그러나 그녀는 이 책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녀의 망명 당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소련 정부는 그녀의 망명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으며, 오히려 그녀의 망명으로 스탈린과 그 가족들의 명예가 실추되길 내심 기대했었고, 당시 미국에서도 그녀에게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었다는 주장도 있다.

5.5. 사생아[편집]

스탈린은 유배지에서 수많은 여자들을 사귀었고 실제로 사생아를 여럿 두기도 했는데, 흥미로운 케이스가 조선에서 태어난 손자인 유리 다비도프. 노보쿠즈네츠 지역 건설기술업자인 그는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시베리아 쿠레이카 마을에서 혼외로 자신의 부친 알렉산드르가 태어났으며 출생 후, 아버지인 스탈린은 곧 떠났고 어머니는 한 마을에 살았던 '다비도프'란 성을 가진 남성에게 시집가 다비도프란 성으로 자랐으며 차후, 스탈린은 아들을 모스크바로 부르려 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동의하지 않았다."

사생아인 아버지가 1941년 독소전쟁에서 모스크바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후 일본군의 침공을 대비하여 다시 극동지방으로 부대가 이동하였다고 한다. 유리 다비도프가 태어난 경위는 그의 아버지가 적군으로서 "한반도(조선반도) 해방전투(만주 작전)"에 참여했으며 1948년 4월 22일에 조선(북한)에서 아들을 보았다는 것이며, 1955년 노보쿠즈네츠크에 영구적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 콤소몰스카야 프라프다 러시아신문의 보도.

또한 러시아 대중역사가 에드바르트 라진스키의 주장에 따르면, 두번째 아내 알릴루예바가 사망한 이후, 가정부였던 발렌티나 이스토미나와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고 하며, 두명의 사생아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라진스키는 학계에서 스탈린을 근거없이 비판한 것으로 비판을 받은 볼코고노프에게조차 스탈린을 부분적으로 옹호하는 회색분자라고 욕을 하면서, 스탈린을 정신병자로 초점을 맞추고 대중의 입맛에 맞게 비난을 퍼부은 인물로, 그의 연구는 학술적으로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걸러들어야 할 소리.

6. 이름[편집]

  • 러시아어: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 영어: Iosif Vissarionovich Stalin


조지아어 초명은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Ioseb Besarionis dze Jughashvili).[20] 조지아어로 '제(ძე)'는 '아들'이라는 의미이고, '베사리오니스(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는 아버지의 이름인 베사리온. 따라서 러시아어로 바꾸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Iosif Vissarionovich Dzhugashvili)가 된다.
'이오시프'라는 이름의 영어 표기인 조지프 스탈린(Joseph Stalin)으로 부르는 사람도 제법 있으니 참고하자. 영미권 국가에서 만든 2차대전 관련 다큐멘터리 등지에서도 이 이름으로 자주 나온다.

가명으로 코바(კობა)가 있는데, 조지아 사람인 알레크산드레 카즈베기(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ყაზბეგი)가 쓴 소설 <아버지 살인(მამის მკვლელი, 마미스 므크블렐리)>의 주인공 코바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주인공은 말하자면 로빈 후드 같은 인물이었다. 스탈린의 친구이자 혁명동지였던 니콜라이 부하린은 숙청으로 처형 직전에 "코바, 왜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Коба, зачем тебе нужна моя смерть?)라는 마지막 전문을 보냈다고.[21][22] 애칭으로 자주 쓴 모양이다. 레닌이 다른 사람들에게 스탈린의 성을 물을 때도 코바라고 불렀다.

그 밖에도 '랴보이'(Рябой, 마맛자국)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어린시절 천연두를 앓아 마맛자국이 있었기 때문. '가이오즈 니자라제(გაიოზ ნიჟარაძე, Gaioz Nizharadze)'라는 별칭도 조금 쓰였다. 또 여러 번 쓰인 가명인 베소와 베소시빌리라는 이름은 자신의 아버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 밖에 수많은 가명과 별명, 필명이 있다. 하지만 대체로 동네 친구나 어머니와 같은 가족은 그를 소소라고 불렀다. 문필가로서 작품을 발표할 땐 소셀로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페트로프, 이바노비치, 갈리아시빌리, 세묜 즈벨라야, K. 카토, 곰보 오스카, 오시프 코바, 괴짜 오시프, 캅카스인, 우유장수, 곰보, 게자(절름발이), 쿤쿨라(비틀거리는 사람), 코바 신부 등등등... 나중엔 그의 캅카스적 정체성을 대표해주는 코바의 사용빈도가 늘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 유명한 별칭은 항목명과 같은 스탈린. 스탈(Сталь)은 러시아어로 강철을 뜻하는데, '스탈린'이란 '강철 사나이'라는 의미다. 성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스탈린 본인은 "동지들이 나에게 그 이름을 주었다."며 말했지만 바쿠에서 사귀었던 여자친구 류드밀라 스탈이 지어준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스탈린의 평생 측근이었던 몰로토프는 "그건 그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23] 수없이 많은 가명들 중에서 본격적으로 '스탈린'의 사용빈도가 늘어나는 것은 스탈린을 당내에서 정말로 유명하게 만들어준 저작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에 필명으로 이 이름을 쓰고나서 부터다. 이 이름은 영어로 뜻을 해석하자면 웃기게도 아이언맨이 된다.

7. 소문[편집]

신빙성이 희박한 루머이긴 하나 사모님과 비서, 자신해서 3P플레이를 시도하려 했다가 사모님에게 퇴짜를 맞은 적이 있다 한다. 사모님은 당연히 울고불고 뛰쳐나가고, 실망한 스탈린은 비서 하나를 더 불러서 소원을 성취했다 한다. 흠좀무. 그리고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어린이를 사랑해서 같이 자기까지 했다는 소문도 있다. 진실이라면 페도필리아. 그가 로리콘이란 설은 있다. 그의 딸 스베틀라나의 기록에 의하면 스탈린은 사망 직전 병적으로 소년, 소녀들의 사진을 무차별적으로 수집했다고 전한다.[24]

또 다른 루머로는 스탈린의 자살한 두번째 부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나디아)가 실은 자신의 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나데즈다의 어머니와 스탈린이 내연관계였다는 에 기초한 것이다. 스탈린은 나데즈다의 아버지의 집에 자주 피신을 왔는데, 이때 어린애였던 그 딸과 친해졌고, 혁명 후에 그 애와 결혼을 했다. 결혼할 당시 나데즈다는 18세, 스탈린은 40세로서, 아무리봐도 정상적인 결혼은 아니었다. 나데즈다가 자살한 이유는 스탈린이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너무나 충격받아서 그랬다는 것이다.[25]

또는 항상 민심을 탐방하던 나데즈다가 스탈린 앞에서 농업정책 실패와 대숙청을 비난하자, 이를 듣고 스탈린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끝에 부인을 사살하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썰도 있다.[26]

하지만 냉전 이후 공개된 KGB의 사건 조사서 및 의학 기록 등의 문서 자료에 의하면 나데즈다는 말 그대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는게 정설, 계속되는 두통과 발작, 빈혈, 생리불순(폐경기도 아니었지만 3년 넘게 하지 못했다.) 등등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했다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피폐한 상태에서 여러 사람들과 모인 파티 직후에 충동적으로 방에서 총으로 쐈다는 것이 오늘날에는 결론으로 정립되었다. 게다가 둘째 아내와는 결혼생활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나디아는 사교적이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길 원했지만 스탈린은 내조를 원했던 것.

아내들의 끝도 좋지 않았지만 처가 식구들의 끝은 더 좋지 않았다. 부하린이나 과거 다른 볼셰비키들과의 친분도 있었지만, 스탈린은 자신이 인격적인 모습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930년대 이후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스탈린 관련 포스터를 보면 스탈린을 마치 부동자세를 취한 고요한 신처럼 그리고 있는데, 군중들 속에 섞여 있거나 캐리커쳐로 바뀌어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레닌 포스터와는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자신의 인격적인 모습을 알고 있는데다가 그것을 출판까지 한 처가 식구들은 스탈린의 눈에 좋기 보일 리가 없었고, 아내도 죽었기 때문에...

8. 비합리적인 의심과 불안[편집]

굉장히 심약해서 잔걱정과 겁이 많은 성격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 뒤에도 불안을 버리지 못해 대숙청을 감행하였다. 특히 군을 믿지 못해 장교를 왕창 죽였으며,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미하일 투하쳅스키 같은 많은 유능한 장교들이 숙청당했고,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도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군을 믿지 못하는 데에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적백내전을 거치면서 형성된 소련군은 매우 정치화되어있던 군대였고 스탈린을 비롯한 국가대사에 사사건건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군을 정치의 개로 밖에 생각 안 했던 스탈린 입장에서는 다 조져버리는 것이 맞았던 것. 상부의 통제를 안 받으려고 하니까 각종 비리가 횡행한 것은 덤이었다.

한편으론 매우 사무적이고 꼼꼼하여 수많은 서류를 자신이 직접 보고 결재하고 계산해 가며 업무를 했다고 한다. 그런 과도한 업무에다가 자신이 신경 안써도 될 너무 많은 일에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독소전쟁 시절에는 직업군인들이 짠 작전의 세부적인 면에까지 간섭하다가 몇 번 크게 말아먹었고, 그 다음부터 작전에 그다지 간섭을 안했다니, 그래도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못한 히틀러는 결국... 참고로 동양에도 이런 특성을 가진 독재자가 존재하니 바로 진시황. 절대 권력을 가진 일벌레였다는 점과 의심이 많았다는 점, 의외로 겁쟁이였다는 점조차 유사하다.

한편, 정작 자신은 새벽 3~4시까지 일하고 잠자리에 든 뒤 다음날 11시쯤 늦게 일어났는데 반면에 주위 당 간부들과 군 장교들은 스탈린이 그러고 나서도 아침 일찍 업무시간을 엄수해야 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잘 수 있는 시간이 2~3시간도 안되는(…) 경우도 많았다. 거기다 술까지 폭음을 했기에, 주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과로에 수면부족에 숙취까지(…) 3중고로 시달려 결국 병을 얻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스탈린 통제 하의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스탈린의 생활리듬에 맞춰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도 생활리듬을 모두 바꿔야 했고, 언제 스탈린이 전화를 때릴지 몰라 늘 전화기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고 한다(…).

머리는 상당히 명석한 편으로 판단력이나 이해력은 서방의 관찰자들도(심지어는 윈스턴 처칠도!)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는데, 문제는 잊어버려야 할 사소한 원한 같은 것도 마찬가지로 기억했다가 후에 모조리 배로 갚는다는 점. 아주 기억하기도 힘든 작은 노여움 때문에 후에 숙청당한 이도 많았다. 반대로 작은 은혜도 기억해뒀다 갚았는데 스탈린이 유배 생활 도중에 즐겁게 지내고 동지들과 연락하는 걸 방조해주었다는 이유로 부농으로 몰린 유형지 간수 하나를 그냥 풀어준 경우도 있었고, 또 어릴적 신학교에 다니다 불온서적을 걸렸을 때 자기꺼라고 하면서 감싸줬던 급우나 시베리아에서 탈출할 때 잠깐 태워준 마부도 기억해뒀다 보답했다고. 막심 리트비노프는 런던에서 스탈린이 항구 노동자들에게 두들겨맞던 걸 구해준 것 때문인지 말년까지 험한 꼴을 안 당했는데 리트비노프는 아무래도 자신이 스탈린을 구해줬던 것 때문같다고 농담하곤 했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도 무명 시절의 스탈린과 친해졌다가 덕 본 케이스.

스탈린의 의심 때문에 연해주에 살고 있던 우리 동포와 독립군들이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 일본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며 강제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끌려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가 죽어버렸다. 물론 그들은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그 곳에서도 나름대로 잘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올라서기까지의 고통은 누구라도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고려인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항상 그 당시를 이야기 하는데 영하 -10도인 상황에 몸만 던지고 알아서 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땅굴을 파서 겨우겨우 살아 남은게 현재 고려인이다. 홍범도 장군도 이때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가서 극장 간수로 취업하여 빈곤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잠시 묵념.

또한 1941년 독소전 발발을 틈타 캅카스의 무슬림 체첸인들이 게릴라 활동을 벌이자 1944년 봄, 체첸인들을 독일군과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인근의 잉구시인과 함께 몽땅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당시 체첸인의 10%가 강제이주 당시 사망했다. 이들은 흐루쇼프 시기가 돼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캅카스인이나 고려인만이 타깃은 아니었고,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들도 스탈린에게 밉보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 실제로 독소전쟁 시기에 소련 치하의 동유럽 국가들, 캅카스나 아시아 출신 러시아 포로들을 이용해서 독일군은 후방관리를 맡겼고 파르티잔들을 때려잡거나 포로 감시소 경비로 쓰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 근거 없이 숙청한건 아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시로 숙청을 단행했으며, 죽기 직전에는 자기 주치의들을 숙청하기 시작해서, 주치의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던 관계로 발작을 일으켰는데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90년대에 구소련이 붕괴되고 여러 자료들이 비밀 해제되자 라브렌티 베리야가 독살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그 베리야도 흐루쇼프에 의해 축출…이 외에도 흐루쇼프와 말렌코프가 용의선상에 오르기도 한다.

말년에는 의심이 너무 심해져서 심지어는 자신의 충복이었던 베리야조차도 믿지 못했을 정도. 게다가 필생의 라이벌 아돌프 히틀러의 망령이 씌웠는지, 갑자기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며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1953년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체포 사건이 계속 벌어났고, 스탈린이 죽기 직전에는 "유대인 의사 음모사건"이 소련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유대인 의사들이 스탈린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 이는 대숙청 당시와 비슷한 패턴이라 소련 인민들은 모두 긴장했으나, 본격적인 숙청이 이뤄지기 전에 스탈린이 사망하므로서 흐지부지되었다. 스탈린 사후 유대인 의사 음모사건이 조작이라며 혐의자를 모두 KGB(NKVD의 후신)에서 풀어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베리야였다.[27]

9. 이야깃거리[편집]


  • 혁명가 시절에는 여성편력이 대단하여 엄청난 숫자의 애인을 사귀고 곳곳에 사생아를 만들고 다녔지만[28] 정작 집권을 한 후에는 대다수의 독재자와는 달리 여성편력 면에서는 그다지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 독재자 치고는 사생활이 매우 담백했다. 아마 소싯적에 실컷 놀고[29]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집권 후엔 후련하게 정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의 명령을 집행하던 NKVD 장관들인 겐리흐 야고다, 니콜라이 예조프, 라브렌티 베리야는 하나같이 변태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색마이자 새디스트들이었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된 스탈린의 3P 얘기는 양성애 성향의 변태였던 예조프의 얘기가 와전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예조프는 실제로 한 부부를 통째로 협박하여 동시에 3P로 성관계를 가졌다. 여자아이들을 납치해서 같이 잤다는 얘기는 베리야의 얘기가 와전됐을 가능성이 크다. 베리야는 실제로 NKVD를 동원해 여자아이들을 무작위로 납치, 강간하는 것을 즐겼다.

  • 스탈린의 지위가 지위인만큼 당연히 일반 소련 인민들에 비해 풍족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영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탈린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올레크 흘레브뉴크같은 사람들도 스탈린이 그리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스탈린은 소련 최고 권력자로서 막대한 양의 월급을 받았지만 돈에 관심이 없어 월급 봉투조차 뜯지 않은채 아무데나 팽개쳤고 스탈린 사후에는 서랍에서 아무렇게나 꿍쳐둔 스탈린의 월급이 쏟아졌다고 한다. 스탈린이 자신의 월급에 손을 대는 일은 주로 유년시절이나 혁명가 시절에게 자신에게 사소한 도움을 줬던 사람들이 스탈린에게 도움을 청할때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기억력 좋은 스탈린은 정말 사소한 일까지도 기억하고 보답했는데 유배 시절에 자신의 사생활을 일일히 보고해주지 않은 경찰관이나 탈출 과정에서 잠깐 태워준 마부, 신학교 시절에 불온서적을 들켰을때 자신의 것이라고 대신 말해준 친구까지 죄다 기억하고 금일봉을 내리거나 직장을 알선하여 보답하곤 했다. 애초에 스탈린이 월급쟁이의 설움(...)을 느낄 일이 없는 위치이긴 하지만서도 로버트 서비스는 스탈린의 블리즈나야 별장에 깔린 카페트가 국영상점의 카페트보다는 질이 좋아도 스탈린이 어린 시절 트빌리시의 시장에서 팔던 카페트보다는 저질이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사생활 면에서는 담백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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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년 전당대회 연설
    얄타 회담 사진같이 서방기자들이 찍은 것을 제외하면, 스탈린의 사진이나 영상은 여러 이유로 뽀샵질로 처리된 것이 많다. 그러나 이 동영상은 해상도가 낮아 조작이 어려웠기 때문인지 그나마 가공이 안 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청중들이 지루해서 턱을 괴고 있는 듯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은 스탈린의 연설을 들으려 귀에 이어폰을 대기 위해서임이 영상에서 확인된다. 소련이 다민족국가라서 소수민족 언어로도 번역해서 들려 준 것인지, 그냥 음량 좀 더 키워서 들려 준 것인지(…)는 불명. 아시아계 인물이 중간중간에 많이 보이는걸로 보아 아마 동시통역을 해준걸로 추정된다. 엄청난 연설능력을 가졌던 레프 트로츠키아돌프 히틀러[30]와는 달리, 스탈린의 연설은 어눌하고 매우 평이하게 원고나 읽는 수준이었다. 일단 조지아 출신으로 러시아어모국어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말이 없는 성격이었다. 러시아어를 조금 아는 사람은 눈치채겠지만 스탈린의 연설에는 러시아어 특유의 억양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그러나 단순히 이것만으로 스탈린의 연설능력이 떨어졌다고 평하기는 어렵다. 그는 젊은 시절에도 대중 앞에서 많은 연설기회를 가졌고, 그때마다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연설의 대상인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때때로 멘셰비키나 지식인들의 달변에도 불구하고 연설 내용에 대해 어려워하거나 쉽게 흥미를 잃었는데, 그럴 때쯤 등장하여 지식인들의 달변보다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평이한 연설을 통해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스탈린의 장점이었다.

  • 조지아어는 물론 모국어여서 매우 능숙하였고, 스탈린의 생애 문서에도 나오듯이 정치를 하기 전부터 공식 등단한 시인일 정도로 조지아어로 쓴 글 솜씨도 뛰어났다. 스탈린의 시가 당대의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 다시 말하지만 스탈린의 시가 유명해진 것은 그가 혁명가, 정치가로 활동하기 전이다. 그 전부터 글솜씨로 두각을 나타내었다는 뜻이다.

  • 콜라와 관련해서 꽤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트루먼 대통령이 보내준 코카콜라의 맛에 감탄을 하면서도 그런 음료가 서구에서 나온다는 것에 격분하며 식품화학자 미트로판에게 배를 원료로 해서 콜라를 능가하는 음료를 만들라고 명령했으며, 콜라를 수입금지 시켜버렸다.[* <스탈린>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이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말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족을 남겼다. 그러자 콜라의 맛에 푹 빠졌던 게오르기 주코프는 안절부절 못해서 콜라를 밀수입해서 들어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콜라의 색을 투명한 색으로 바꿔 달라는 특별 요청을 한 뒤 보드카 병에 담아 보드카로 위장했다.

  • 스탈린은 말년에 러시아에 대해서 병적으로 집착했으며, 또한 모든 위대한 인류의 지적 유산은 소련과 러시아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역사왜곡까지 하려고 들었다. 그는 말년에 소책자로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문제점>를 냈는데, 이 책에서 그는 '러시아 민족의 언어'의 기원을 쿠르스크와 오룔 지방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언어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말에 동의를 하지 않지만, 스탈린이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유럽의 르네상스의 뿌리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에 두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 2차대전 직전 미국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과, 소련 국내에서 폭압 통치를 자행하는 스탈린을 맹렬하게 까댔으나, 이후 독소전이 발발하고 소련이 자신들의 우군이 되자 이번엔 소련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 대대적인 선전을 했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에게도 애칭을 붙였는데, 바로 조 아저씨(Uncle Joe).[31] 링크 단 스탈린은 이 별명을 싫어했다고 한다.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가 회담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미국인들은 스탈린을 친근하게 조 아저씨라고 부른다'고 조크를 던졌는데 스탈린은 불쾌해했다고 전해진다.

  • 어느 회담[32] 당시 욕탕에서 킬로이 다녀감을 보고 "도대체 그 빌어먹을 킬로이가 누구야?"라고 말했다는 루머가 있다.

  • 자신을 강철의 사나이로 자칭했지만 고소공포증 환자였다. 1943년 테헤란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캅카스 지방 바쿠까지 열차로 이동하고 나서 비행기를 탄 것이 스탈린에게 있어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 것이다. 다만 격이 떨어진다면서 조종사를 장군으로 하라는 측근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대령에게 조종간을 잡게 했는데, 이유는 "장군까지 됐으면서 비행기 모는 법 기억이나 하겠냐?"였다(…)아돌프 갈란트: ???.[33] 얄타 회담 당시 비행기를 타기 싫어서 회담 장소를 소련 영토인 얄타로 정했고 이로 인해 안 그래도 건강이 나빴던 루즈벨트가 건강이 더 악화돼서 죽게 만드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좀 다르다. 스탈린이 얄타 회담의 장소를 자국 영토로 지정한 이유는 비행기를 타기 싫어서가 아니라 주치의의 권고를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며[34], 얄타 회담에 참석할때도 멀쩡히 비행기를 타고 왔기 때문. 다만 루즈벨트가 얄타 회담에 참석한 것으로 인해 건강이 더 악화된 것은 사실이므로 100% 거짓말은 아니다.

  • 앞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주로 밤에 일하고 새벽이 되어서야 잠에 드는 그의 수면리듬에 맞추느라 그의 측근이나 주요정부기관까지 새벽근무를 해야했다. 그리고 라이벌이었던 히틀러가 행정업무를 싫어했던 것과 달리 스탈린은 지독한 일벌레로 모든 일을 꼼꼼하게 직접 처리하는 스타일이어서 부하들은 그야말로 죽어났다. 2차대전 때는 철도 운행 스케줄에 과부하가 걸려서 병력이나 물자를 수송하던 열차의 행방이 묘연해진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이를 보고하던 한 장군에게 "별을 달고서도 못 찾겠다면 전선에 졸병으로 나가 찾게 해주겠다."고 갈구기도 했다.[35]
    가끔 스탈린은 그렇게 일을 잘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중증의 워커홀릭이었다는 증언이 수두룩하며 취미로 가꾸던 별장의 농원까지도 기록을 남겨가면서 세세하고 꼼꼼하게 관리한 인간이 본 업무에 그러지 않았으리란 근거는 적다.

  • 트로츠키를 평생 싫어하고 두려워해 그의 업적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위조했다. 호찌민의 당당함을 질투해서 소련에 초대되었을 때 KGB에게 그의 소지품을 훔쳐내게 하여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즐겼고, 마오쩌둥의 사상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다르다고 '마가린[36] 공산주의자'라고 험담했으며, 김일성을 의외로 마음에 들어했다는 일화가 있다. 중국 건국 60주년 영화 건국대업에선 저 마가린 운운하는 내용을 조금 비틀어서 스탈린이 미국을 마가린같은 자본주의자라고 욕하는 장면으로 바껴서 나온다.

  • 히틀러만큼은 아니지만 스탈린도 반유대주의적인 측면도 조금 있었다. 다만 후술하겠지만 유대인만 딱히 더 싫어하고 차별한 것은 아니고 그냥 소수민족 자체를 탄압 대상으로 여겼던 듯 하며 뭐 따지고보면 러시아인이나 고향사람들도 수틀리면 시베리아로 내보내거나 죽이는건 마찬가지였지만 능력있으면 유대인을 측근으로 중용하기도 했으니 반 유대주의자 라고 하기는 좀 지나친 감도 있다. 이는 그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37]를 비롯한 고참 볼셰비키들이 유대인이었다는걸 근거로 드는데 초기 혁명 직후에 러시아 내 유대인 인구에 비해 공산당원수나 고위급 중에 유대인이 많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후 적백내전 때부터 새로 당원들이 유입되면서 유대인 출신은 인구수 법칙상 점차 줄어드는 추세였다. 소련에서 유대인 박대는 서유럽처럼 종교적인 이유나 히틀러처럼 인종적인 이유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에 기인한다. 또한 유대인들은 국제적으로 선민사상이 쩔었고(…) 전통과 민족문화를 매우 중시했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며, 스탈린이 유대인들은 당이나 국가보다 이스라엘에 더 충성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히틀러와 의도나 목적이 다른 부분이 있다면 스탈린은 캅카스인(고향 조지아 포함), 폴란드인, 중앙아시아인 등을 모두 공평(?)하게 박대했다. 히틀러처럼 엄청난 반 유대주의, 유태인 혐오에 휩싸여 유대인이라고 더 박대한건 아니다. 그리고 따져보면 사실 무작정 박해만 한 것도 아니어서 막심 리트비노프처럼 유대인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등용했고 시베리아 남부 일대에 유대인 자치주라는것을 만들어서 소련의 유대인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려고도 했다. 물론 고려인이나 체젠인들처럼 강제로 내보낸건 아니고 지원금 보내주면서 이주시켰다. 지금도 남아 있는 '유대인 자치주'는 이 때의 유산이지만, 극동 지역 중심도시와도 꽤 멀리 떨어져있는 위치와 비교적 열악한 인프라 조건때문에 스탈린 사후로 유대인들이 다른곳으로 많이 이주하여 현재 유대인 자치주에서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의 수는 수천명 가량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러시아인이다. 이 밖에도 이스라엘에 무기를 판 체코 공산주의자들을 반역죄로 처형한 것,[38] 스탈린의 마지막 숙청이 될 뻔했던 "유대인 의사 음모 사건"도 반유대주의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남아 있다. 스탈린 사후에 아이러니하게 스탈린의 심복이었던 베리야가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하면서 이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 스탈린은 집권기간 동안 총을 다루다가 사람죽일 뻔한 일화도 몇번 있었다 있었다. 말년에 스탈린은 해로운 새참새를 쫓아버린다고 총을 들고 참새에게 사격을 가하다 경호원 한 명이 상처를 입혔다. 또 한 번은 스탈린이 총을 다듬다가 실수로 총이 오발되어 미코얀을 죽일 뻔 했다. 그러자 총알이 간발의 차이로 죽을 뻔했던 미코얀은 물론, 식탁 앞에 앉은 측근들이 모두공포에 질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런데도 스탈린은 자신이 사격의 명수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는 흠좀무한 일화가 있다.

  • 한번은 스탈린이 하루 정도를 쉬기 위해서 카프카스로 온 적이 있었다. 때마침 라코시(헝가리 공산당 서기장)가 스탈린을 방문하기 위해 그 곳에 왔는데 라코시가 도착하자 스탈린의 측근들은 그와 함께 식사도 하고, 술도 마셨다. 그런데 스탈린의 측근들은 스탈린이 자주 술을 권해서 주량이 늘었기 때문에 측근들은 취할 때가지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래서 측근들이 너무 심하게 술에 취하자 파티 와중에 라코시가 한 마디 내뱉었다.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꼴들이요? 이런, 주정뱅이들 같으니라고!" 측근들은 라코시의 모욕에 견딜 수가 없었고 라코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베리야가 스탈린에게 달려가 라코시가 자신들을 싸잡아 모욕한 사실을 고자질하자, 스탈린은 "좋아, 두고 보자고!"''라며' 바로 그날 밤 만찬 석상에서 라코시에게 마구 을 권했고, 샴페인을 두서너병, 아니 얼마나 많은 술을 먹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강제로 먹여 만취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깨어나자마자 라코시는 곧바로 도망가 버렸다. 스탈린은 기분이 몹시 좋았는지, 하루 종일 농담을 했다. "보게! 그 녀석이 지금쯤 어떻게 되었겠나?!"'''

  • 사담 후세인은 스탈린을 존경하여 그를 벤치마킹 했다는 흠좀무한 사실이 있다. 한편 고향 취급인 조지아에서는 나름대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위인이다(…).

  • 사실 아무리 악명 높은 권력자라 해도 정작 고향에선 그 인물에 대한 지지도가 의외로 높은 경우는 꽤 많다. 후세인도 그렇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고향을 여러번 털어먹은 전적이 있기 때문에 평판은 반반이라고 한다. 특히 조지아어를 아예 없애려고 했으니...죽은 뒤에 기밀해제된 문서들이나, 자료들에 의하면 나름대로 좋은 면도 있지 않았나 싶지만 해놓은 짓이 위낙 악당이라 변명의 여지가 없다.

  • 위의 행각 때문에 좀 그렇긴 하지만 훌륭해 보이는 일화도 있는데, 존경하는 모든 노동자와 농민의 지도자에게 자신이 기르던 암소를 선물하려던 페클라 코르슈노바라는 70세 노인이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직접 답장을 써 줬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 다정한 편지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농장이 없어 소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완전히 국가에 고용된 사람이라 최선을 다해 국민에게 봉사하지만, 고용된 사람은 농장이 없답니다. 어머니, 제 생각에는 제게 소를 선물하지 말고 계속 기르면서 저를 기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탈린-"

    다만 스탈린은 다챠(별장)에 농원을 두고 과채류를 기르는 취미가 있었고, 모스크바 상점에 수박을 출하하거나 방문객들에게 직접 기른 레몬을 대접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저 편지에서 농장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

  • 또다른 훌륭해 보이는(?) 일화가 있다. 소련군의 총참모장이었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아버지는 러시아 정교회 신부였는데, 당시 신부는 인민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바실렙스키는 출세에 지장이 있을까봐 아버지와 의절하고 지냈다. 아무리 스탈린이 군사 지도부에 대해 의심을 풀고 신뢰하게 되었다 해도 대숙청을 생각해보면 그 피튀기는 시대가 얼마나 지났다고 인민의 적과 공공연히 만나겠는가? 아니 생각해보면 아직 숙청은 끝나지 않았다. 인민의 적과 가족이란 점은 출세가 문제가 아니고 그 이전에 목숨이 위험했다. 한 번은 스탈린이 같이 식사를 하다가 바실렙스키에게 그의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동무의 아버님은 잘 계시나?" 그러자 바실렙스키는 "저의 아버지는 신부로서 인민의 적입니다. 저는 공산당원으로서 아무리 아버지라 하더라도 인민의 적과는 상종을 안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바실렙스키를 꾸짖으며 "아무리 그래도 자네는 자네 아버지의 아들 아닌가. 아들이 그러면 되나." 하고 아버지와 화해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누구 명령이라고 거역하겠는가...

  • 현대 러시아와 주변국들을 들썩이게 하는 러시아 내 공화국들의 독립투쟁이나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 문제는 사실 이 사람이 러시아 내 소수민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펼친 이주정책의 영향이 크다. 여러 의미로 러시아는 스탈린이 남긴 유산들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셈이다. 소련 초기 민족인민위원 시절에는 캅카스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볼셰비키에 의해 떼몰살을 당하는 와중에 개인적으로 간섭해서 자기 지인을 빼내주기도 했었다.

  • 1945년1948년 노벨평화상 후보가 된 적이 있었다. 한 국가의 의회의 의원이면 누구나 추천할 수 있었기에 그런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외에도 히틀러, 무솔리니 등 온갖 사람이 후보에 오른적이 있다.(당연히 상을 받을 일은 없다.)

  • 의외로 단신이다. 영상이나 사진 등 매체에서 일부러 스탈린을 크게 보이려고 노력했기 때문. 프로필에는 168cm로 적혀 있으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160cm 정도로 보았다.

  • 사후에 레닌과 마찬가지로 엠버밍 처리되어 훗날의 김정일마냥 붉은 광장레닌 영묘에 합장되었으나, 후에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이후 크렘린에서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석방된 사람이 "꿈에 레닌이 찾아왔는데 스탈린 보고 방 빼랍니다."라고 크레믈린에서 연설을 하자 스탈린을 빼는 것이 심각하게 고려되었다. 결국 시신은 화장되어 레닌 영묘 바로 뒤에 있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됐다. 모욕하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방부처리를 중단한 후, 바로 화장하지 않고 뜸들이다가 시체가 많이 부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크렘린 벽 묘지도 국가에 기여한 인물들에만 수여되는 상당한 영예인데,[39] 스탈린의 업적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그 악명높은 20차 전당대회 연설에서조차 시도되지 않은 것이다. 흐루쇼프가 스탈린이 공이라곤 없는 악랄한 차르로 격하했다고 알려졌지만 해당 연설문을 보면 스탈린이 잘한 점 역시 언급은 한다. 아직도 붉은 광장 한켠에는 이 벽 묘지와 스탈린의 흉상이 남아 있다.

파일:external/markhumphrys.com/stalin.grave.jpg

  • 스탈린의 동상은 러시아와 구소련 지역 여기저기에 많이 남아 있다. 위 사진과 같이 모스크바 크렘린 벽묘지에는 스탈린의 석상이 하나 남아있으며, 그의 고향인 조지아 고리 시청 앞의 거대 동상은 철거되었으나 스탈린 박물관[40] 내에도 또다른 스탈린의 동상이 있고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전투 파노라마 박물관에도 버젓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도 스탈린의 벽 묘지 앞에는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참배객들이 매일 찾아와서 을 놓고 간다고 한다.

  • 6.25 전쟁은 스탈린이 지시한 것이라고 추정되어 왔지만, 흐루쇼프 회고록이나 소련 붕괴 후에 문서 상 밝혀진 바로는 스탈린은 이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었고, 김일성이 계속 주장해대서 마지못해 승낙했다고 한다. 후에 북한이 패망 직전에도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이 직접 개입하지는 않으려 했지만 북한과 중국의 공군력이 너무나 형편없어서 마지못해 소련 공군의 참전은 허락했는데, 이것이 들통나지 않도록 미그앨리라고 부르는 북한의 북부 상공에서만 비행하도록 했고, 교신에 러시아어를 쓰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받을 정도였다. 스탈린은 미국과 대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의외로 북에 대한 지원은 매우 소극적이었다.[41]

  • 말년에는 뇌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정신병적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흐루쇼프의 회고에 따르면 개의 울음소리를 녹음한 레코드를 틀어놓고서는 정치국(폴리트뷰로)의 일원들을 춤추게 하였는데, 흐루쇼프, 말렌코프, 불가닌, 몰로토프, 주코프 같은 자들이 구두를 벗고 개 울음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흐루쇼프는 춤을 아주 못 추어서 웃음 거리가 되었지만, 몰로토프는 상당한 춤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춤판에 딸 스베틀라나를 데려와 실신할 때까지 춤을 추게 했다는 말도 있다. 이는 냉전시대의 선전이 아니라 드미트리 볼코고노프[42]의 책에 실린 내용이다. 높으신 어른들이 이런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남녀노소 술퍼먹고 미친듯이 춤추는 건 러시아의 고유의 미풍양속(?)이긴 하다. [43] 서비스의 서술에는, 죽기 전날의 파티에서 스베틀라나에게 춤을 추자고 했지만 스베틀라나가 싫다고 하자 스베틀라나의 뺨을 사정없이 갈긴 다음에 머릿채를 잡고 파티장에서 마구 끌고다녔다고 한다.(...) 주변에선 스베틀라나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면서도 감히 스탈린을 말리진 못했다고. 그런데 해당 일화의 원전인 흐루쇼프 회고록에는 이것도 나름대로 스탈린의 애정의 표현(...)이었다고 평가했다.

  • 볼코고노프의 책에 실린 또다른 회고들에 따르면 스탈린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친지, 심복들과 같이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가서는 웃으면서 같이 보면서 웃던 사람들의 유배문서에(...) 서명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국 회의 도중에 갑자기 한명을 지목하여 '당신은 스탈린 동무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나?' 등의 얼토당토 않는 질문을 던지는데,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목숨은 경각에 달리게 된다는 것이다.[44]
    하지만 저 내용이 신뢰성이 높은 편은 아니다. 실제로 볼코고노프의 책은 좀 과장되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역사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인용된다. 이 사람은 원래 소련군 장성 출신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소련이 흔들리자 가장 먼저 사상전향하고 소련과 공산당을 디스하는 책을 많이 펴냈다. 이런 책들이 옐친에 이로움을 줬음은 물론이다. 한국 뉴라이트들의 역사관을 생각해보면 이 사람의 역사관이 대충 그림이 나온다. (태생적으로 반공적인) 영미학계에서는 이사람 소스를 인용하여 스탈린 체제나 동유럽 체제를 비판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사람은 원래 옐친 정권에서 대통령 보좌관을 했던 사람으로, 특히 옐친 정권 하에서 정권의 입맞에 맞는 역사서를 펴내서 러시아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던 사람이다.

  • 익히 알려졌다시피 독소전쟁 당시 이 사람은 전술적인 면에서 별 도움이 안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공적을 인정 받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사실 군사적으로는 실책이 많았지만 전시 지도자로써는 제법 뛰어난 면모가 있었고, 이 사람의 공업화 정책 덕분에 기갑웨이브를 선보일 수 있었기 때문에[45] 아주 근거없는 서훈은 아니긴 하다. 후임자가 "우리는 스탈린 덕분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승리한 것이다"라고 평가한 것이 유명하긴 하지만 저건 너무 지나친 악평이라는 것이 현재의 주류 의견이다.

  • 그가 죽은 후 그의 블리즈냐야 별장의 서랍에서 신문지로 쌓인 3장의 편지가 나왔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다.

    1.

    스탈린에게
    이제 날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벌써 다섯 명을 체포했는데, 하나는 폭탄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는 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또 다시 살인자를 보낸다면, 그때는 내가 모스크바로 하나 보낼 것입니다. 나는 두번째는 보낼 필요가 없을 겁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
    2.

    코바, 왜 당신한테 내 죽음이 필요하지?
    -니콜라이 부하린
    3.

    스탈린 동지에게

    존경하는 스탈린 동지.
    당신은 내 아내에게 전화하여 욕설을 하는 무례를 범했소. 비록 아내가 그 일을 잊자는 당신의 말에 동의했을지라도, 이 사실은 그녀에 의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게 알려졌소. 나는 내게 적대적인 행위를 그렇게 쉽게 잊을 생각이 없는데, 아내에게 적대적인 행위는 내게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소. 그러므로 동지에게 청하건대, 동지가 했던 말을 취소하고 사과하든가, 아니면 우리 사이를 끝내는 것을 선택한든가를 저울질해보기 바라오.

    경의를 표하며, 블라디미르 레닌.

    각각에 대해 로버트 서비스는, 1에 대해 깡패가 다른 깡패에게 편지를 보냈고 스탈린에게 대든 유일한 깡패였기 때문에 스탈린이 간직했을 것이라 했으며 2에 대해서는 부하린을 죽이면서 떨리는 만족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평하면서 부하린에 대한 스탈린의 애정을 거부했다. 3에 대해서는 그의 마음에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키고 상처를 남겼기 때문에 보관했을 것이라 평했다.
    이에 대해 보통 1과 3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비스의 평에 동의하지만, 2의 경우에는 스탈린이 부하린의 유언만 보관한 것이 아니라 굳이 보관할 이유가 없었던 회고록도 같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서비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46]. 부하린을 숙청했을 당시의 만족감을 되새기는 용도로는 유언장 하나로 충분하며, 세상 그 어떤 독재자도 자기에게 숙청당한 정적의 회고록을 멀쩡하게 보관해주지는 않을테니까(...). 여하튼, 스탈린이 부하린의 마지막 편지와 회고록을 자신이 죽을때까지도 보관하고 있었던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미 죽은지 오래인 스탈린 본인밖에 없으니 후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추측의 영역일 뿐이다. 그야말로 진실은 저 너머에.
    참고로, 스탈린이 2의 편지를 간직한 이유를 짐작할 때 감안할만한 요소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레닌의 유언장에 후계자(레닌 사후 공산당의 지도자)로 거론된 다섯 인물(트로츠키, 스탈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중 스탈린을 제외한 나머지 네명은 모두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었고, 부하린은 그 중 마지막으로 숙청된 인물이다. 스탈린은 일단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와 손을 잡고(속칭 트로이카) 트로츠키를 숙청한 후 부하린과 손을 잡고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를 숙청한 다음 마지막으로 부하린을 숙청했다. 즉, 부하린은 스탈린의 숙청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숙청된 대권 경쟁자였다.

    2. 다만, 그렇다고 부하린이 스탈린의 정적 중 라스트 보스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스탈린의 최대 정적은 당연히 군사인민위원이자 붉은 군대의 창설자로써 군권을 몰아쥐고, 10월 혁명을 주도하여 누구나 스탈린보다 한 급 위라고 여기던 트로츠키였고, 부하린은 두 수도(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소비에트 의장을 역임한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에 비교한다면 딱히 격이 낮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더 거물이라고도 할 수는 없는 그 정도의 상대였다. 오히려, 이 지독한 숙청 과정에서 최후까지 스탈린의 편에 남아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스탈린에게 우호적이고 다루기 편한 상대였던 것이다.

    3. 그리고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점 중 하나는, 부하린은 다른 세명과 달리 스탈린과 개인적으로 아주 친한 사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부하린의 마지막 편지를 죽을때까지 간직한 것이 일종의 뒤틀린 애정(우정)때문이 아니었냐는 추론이 나오는 것이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부하린은 단순히 정치적인 관계가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다른 숙청 대상들과 달리 그의 유품만큼은 간직할만한 동기가 충분하다는 것.

    4. 편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부하린의 태도 역시 흥미로운 부분이다.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까지 스탈린을 '코바' 라는 애칭[47]으로 부르며 왜 당신에게 내 죽음이 필요하냐고 묻는 부하린의 편지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느낄법한 적대감이나 분노, 하다못해 원망이라거나 자신의 처지에 대한 회한보다는 왜 상대에게 자신의 죽음이 필요한가(즉, 왜 상대가 자신을 위협적인 적으로 보았는가) 알 수 없어하는 당혹감의 표시처럼 보인다. 조금 과감하게 추측한다면 '왜 내가 네 편이란 걸 믿어주지 않는 것이냐'는 호소처럼 보일 정도. 스탈린에게 숙청당한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반응과 비교해 보면 이 점은 상당히 명확한데... 숙청 직전 지노비예프가 남긴 유언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는 트로츠키와 손을 잡지 않은 것이다"(= 트로츠키와 손을 잡고 스탈린에게 맞섰다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회한이었고, 트로츠키의 경우 추방당한 상태에서도 (스탈린을 자신과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던 평소의 오만한 태도처럼) 스탈린을 매독 환자, 사기꾼등으로 조롱하며 '스탈린주의 날조학'이라는 저서를 출판했을 정도였다.

    5. 또한, 다른 흥미로운 스탈린의 유품으로는 트로츠키의 저서인 "테러리즘과 공산주의"가 있다. 공산주의 체제의 구축을 위해 폭력이 유효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이 저서를 스탈린은 밑줄까지 처가며 꼼곰히 읽고, 고이 간직해 뒀다가 유품으로 남겼다. 이 역시 '자신이 숙청한 정적의 흔적에 대한 스탈린의 사고방식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 중 하나일 것이다.

10. 스탈린을 다룬 저서[편집]

10.1. 국내 정발된 저서[편집]

  • 스탈린 선집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적이 있다. 하지만 현재는 절판.

  •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가 내놓은 <나의 아버지 스탈린>이란 책이 있다. 우리나라엔 1993년에 들어왔으며 2017년 현재도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

  • 고전 중의 고전으로, 트로츠키 평전을 지은 바가 있는 아이작 도이처의 스탈린 평전이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도 들어왔으나 지금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 러시아의 반공 역사학자이자 소련 장성 출신인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장군이 지은 스탈린 평전과 <크렘린의 수령들>이 스탈린을 다루고 있다. 문제는 볼코고노프의 스탈린 평전은 한국에 들어오면서 2차 대전 이전 얘기가 죄다 짤려버렸고 볼코고노프 장군이 친 옐친, 반 소련 사관을 중심으로 매우 편향적인 내용을 많이 저술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볼코고노프의 연구는 언급되면서 근거 제시가 미비하다는 등의 비판이 한번 쯤은 반드시 언급된다. 하지만 유사역사학의 수준은 아니라서 스탈린의 장점에 대해서도 인정할 부분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고 볼코고노프의 관점을 연구한 논문들도 있다. 2017년 현재는 스탈린 평전과 크렘린의 수령들 모두 절판.[48]

  • 영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가 내놓은 스탈린 평전이 있다. 맨 처음에 강철 권력이란 부제를 달았으나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이란 새 부제를 달고 새로 나왔다. 이 책도 기본적으로 스탈린에 대해 부정적인 서술이 대부분이지만, 올레크 흘레브뉴크가 쓴 스탈린 평전 보다는 스탈린에 대해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두권 다 분량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현재는 두 버전 모두 절판되었다.

  •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가 스탈린과 히틀러의 권력작동 방식을 연구한 <독재자들 - 히틀러 vs 스탈린, 권력작동의 비밀>이란 책이 있으나 역시 절판.

  •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가 내놓은 젊은 스탈린이라고 스탈린의 혁명가 시절을 다룬 전기가 있다. 이건 아직 판매되는 중.

  • 2017년 8월 러시아 연방 국립문서보관소 선임연구원이자 러시아 국립고등경제대학 소속의 올레크 흘레브뉴크가 집필한 스탈린 평전인 스탈린:독재자의 새로운 얼굴이 허버트 빅스의 히로히토 평전을 출판한 바가 있는 삼인 출판사에서 정발되었다. 90년대 이후 해금된 기밀문서들을 중심으로 스탈린을 전체주의자이며 악랄한 폭군으로 묘사한 저서이다. 한국의 소련사 권위자인 류한수 교수가 감수했다. 하지만 노경덕 박사가 지적한 대로 학계에 누적된 스탈린의 통치에 대한 다각도에서의 분석을 무시한 채 과거의 전체주의자 프레임을 가져와 스탈린 신화를 부수기 위해서만 노력하였기 때문에 무리한 비난과 억측이 많이 섞였단 비판이 있지만 동시에 현재까지 가장 읽어볼만한 스탈린 평전이라는 호평도 공존한다.[49]

10.2. 국내 비정발된 저서[편집]

  • 소련 체제이 비판적이었던 로이 메드베데프는 1960년대부터 스탈린을 비판한 여러 저작을 내놓았다.

  • 소련 붕괴 이후 에드바르트 라진스키는 스탈린이 정신병자라는 관점 하에서 대중적인 스탈린 저작들을 내놓았으나 당연하지만 학술적 가치는...

  • 2014년 프린스턴 대학의 스티븐 코트킨 교수가 내놓은 스탈린 평전이 있다. 총 3부작으로 구성될 것이라는 이 책은 현재 1878~1928년을 다루는 1부까지 나왔다. 평가가 굉장히 높지만 2017년 10월 현재까지도 2부가 나오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 제임스 해리스 교수의 거대한 우랄 산맥, 스탈린의 철도 시리즈 등이 스탈린 시대의 중앙당과 지방당 사이의 관계 및 스탈린 시대의 중공업화 정책을 정밀하게 다루고 있다.

  • 아치 게티는 스탈린의 대숙청과 대기근에 대한 2세대 수정주의 차원의 연구를 많이 내놓았다. 로베르타 매닝과 공저한 대숙청에 대한 새로운 관점 등이 대표적인 저서로 나무위키 대숙청 문서는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11. 매체에서[편집]

12. 스탈린주의[편집]

스탈린은 그 특유의 독재정치로 인해 '스탈린주의'라는 독자적인 사상을 낳았고, 이는 오랫동안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현실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보급되었다.

13.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편집]

이들 지명 중 대부분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이후 원래 이름이나 다른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14. 어록[편집]

다만 여기에 기록한 말 가운데 정말로 스탈린이 했는지 의심스러운 말이 많다. 스탈린은 러시아어에 서툴렀고, 유창한 언변을 구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쓴 글은 대부분 그가 신학교에서 배운 교리문답식의 자문자답 형식의 문장이 많다.(예를 들어, "자본가들을 왜 타도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직설적인 어법을 구사했기 때문에[51] 가끔은 다른 작가들의 말(아래에도 있는 레마르크)이나, 창작물 속에 등장하는 스탈린의 말이 스탈린이 한 말로 둔갑한 경우가 많다. 다만 그래도 타고난 문재가 어디 가진 않았는지, 비교적 서툴렀던 러시아어로도 복잡한 내용을 쉽고 간결하게 풀어쓰는 능력은 뛰어났다고 한다. 실제로 중요한 외교전문은 초안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나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당의 결정을 따르는 일꾼일 뿐이죠."
ㅡ 1931년 영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현대군은 공격부대다. 붉은 군대는 현대군이다.!"

'이어야한다'가 아니다.


"히틀러라는 친구 굉장해! 정적은 바로 그렇게 다뤄야 해!!"
ㅡ 1934년 돌격대 숙청(장검의 밤) 소식을 듣고[52]


"지도자들은 왔다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인민들은 남습니다. 오직 인민만이 영원합니다."
ㅡ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연설


"현명한 자는 보는 걸 믿고 겁쟁이는 믿는 걸 본다."


"죽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인간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


"정직한 외교관은 나무로 만든 철이나 마른 물과 같다."[53]


"어떤 나라의 외무장관이 평화 협정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고 말한다면, 그 시간에 본국에서는 최신 군함과 전투기들을 만들고 있다고 보면 된다."[54]


"감사하는 마음나 앓는 질병이다."[55]

"예의배려나 앓는 질병이다." 라는 것으로도 전해진다. 정작 스탈린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면 늘 감사하다면서 인사를 했으며, 잊어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말 사소한 도움들도 다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권력을 잡은 뒤 전부 보답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어록.


"우리의 적들이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다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직접 해버리면 된다."[56]


"가장 큰 기쁨은 적을 골라 세심하게 한 방 먹일 준비를 하고 무자비한 복수의 갈증을 충족시킨 뒤 집에 가서 자는 거야."[57]

트로츠키는 이 말을 카메네프가 스탈린, 펠릭스 제르진스키와의 대화 내용을 말해준 것을 회상한 것이라고 했다. 스탈린은 어릴 적부터 조그만 모욕이라도 당하면 장기적 보복 계획을 세밀히 궁리했다고 한다.


"교황이라! 그런데 교황은 몇 개 사단이나 갖고 있답니까?"

1935년에 프랑스 외무장관 라발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스탈린과 회담하다가 소련에서 종교 탄압이 줄면 저희가 교황과 일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자 스탈린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58] 처칠은 라발이 뭐라 답했는진 모르지만 열병식에 보이지 않는 종류의 군단(legion)이 있다고 답했을 거라 적었다. 사족으로 이는 극단적인 관념론적 존재인 종교 교황에 대해 극단적 유물론자인 공산주의 반종교주의자의 관점을 한 마디로 보여준다.


"내가 죽고 나면 사람들은 내 무덤에 쓰레기를 집어던지겠지만, 결국 역사의 바람이 그 쓰레기들을 전부 쓸어낼 것이다."[59]

스탈린 다음으로 집권한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작정하고 까내렸지만, 세월이 흐른 21세기 러시아에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이 말은 정말로 사실이 된 것이다.
자주 비교되곤 하는 마오쩌둥은 "살아서 비판받지 않은 자, 죽어서 비판받을 것이다."라는, 비슷한 맥락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스탈린 사후 스탈린의 말이 현실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의 말 또한 마오쩌둥 사후 그대로 실현되었다.[60] 또한 쿠바피델 카스트로도 "너희들이 현재 온갖 더러운 모함으로 나를 더럽혀도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며,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는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세 명 모두 '공산주의 혁명가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결국 역사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올바른 방향에 도달할 것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 사고방식을 잘 보여준다. 아마 이들 말고도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공산주의자 아무나 한명을 골라도 비슷한 맥락으로 생각할 것이다.


"표를 던지는 사람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표를 세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61]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1941년 7월 3일, 라디오 연설에서.


"붉은 군대에서는 전진할 때보다 후퇴할 때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 당시의 미국 대사 Averell Harriman과의 대화 중.[62]
-독소전 초반 독일군의 기세에 놀란 소련군에서 탈영병이 늘어나자 스탈린이 탈영병뿐만 아니라 탈영병의 가족들도 모두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한 말이다.


"교육은 누구의 손아귀에 쥐어졌는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에 따라 효과가 결정되는 무기다."
- 1937년 9월, 허버트 조지 웰스와의 인터뷰.


"신이 당신의 편이라고? 그가 보수당원인가? 악마는 나의 편이지.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야."
-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에게.[63]


"양은 양만의 질이 있지."


"열린 마음은 문지기 없는 요새와 같다."


"인간에겐 막역한 사이란 없다. 막연한 사이만 있을 뿐이다."


"악인의 무관심은 선행이 되지만 선인의 무관심은 악행이 된다."


"공포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스탈린의 부하들이 별다른 반항 없이 순순히 스탈린의 명령에 따르자, 그것을 부러워한 처칠이 스탈린에게 비결을 물어보자 스탈린이 답한 대답이라고 한다.


"결국 죽음이란 나쁜 것을 잃는 거다."


"공포 앞에 논쟁이란 없다."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상황은 단지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혁명은 적들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 적에게 죽느니 차라리 우리가 흘린 피에 익사하는 길을 택하겠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


"인민은 낙엽과 같다. 하나씩 밟을 때는 바스락거리지만 한데 긁어모아 불을 붙이면 매우 잘 탄다."

낙엽(인민)을 적당히 탄압하거나 한두명만 못살게 굴면(밟으면) 국민들은 저항하지만(바스락거리지만) 군중 다수를 싹 모아 불을 붙이면(집단 학살, 대숙청) 매우 잘 탄다.(죽이는 족족 잘 죽을 뿐더러 대중들은 공포에 겁을 먹게 되어 찍소리 못하고 조용히 사라지게 된다.) 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본격 인간 연료설, 혹은 떨어질 인민은 떨어진다. 뭔가 나무 뭉쳐서 꺾어보라는 일화도 생각나고…


"사단을 시장에서 판다면 사주겠지만 시장에서는 사단을 팔지 않는다. 증원은 불가능하다."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치르던 세묜 티모셴코의 병력 증원요청을 거부하며 남긴 말. 은하영웅전설암릿처 성역 회전에서 라인하르트양 웬리 함대에 털린 비텐펠트에게 하는 말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포병은 현대전의 신이다."

현대전에서 포병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하는 그 문구이다. 이를 두고 포병 병과에 복무했던 스탈린이 남긴 일종의 자뻑이란 의도도 있었다는 설이 한 때 있었으나, 스탈린은 기병 정치장교 출신이다. 오히려 기병으로서 포병의 무서움을 정확히 체험하고 이 발언을 남긴 것에 가깝다. 또한 스탈린은 단순히 경험만으로 저런 말을 한 게 아니라 포병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상당한 통찰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 글을 보면 스탈린은 포탄을 아끼고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행위를 비판하면서 포탄을 아끼는 것을 범죄로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포병이 주는 심리적 효과와 전천후 능력이 떨어지는 공군의 문제 등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다.


"석유 없이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장차 다가올 전쟁에서는, 석유에서 우위를 점하는 자가 전쟁에서 승리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 1927년 12월 3일 연설에서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 1935년 5월 4일 붉은 군대 사관학교 졸업식 연설.

간부가 결정권을 전부 갖는다는 뜻이 아니라 간부 집단의 질적인 상승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 짓는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소련 정권은 수준미달인 중견간부들 때문에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넌 스탈린도 아니고 나도 스탈린이 아냐! 스탈린은 소련 권력이야!"[64]

그의 둘째 아들 바실리 스탈린이 자신의 성을 쓰자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누가 진정한 공산주의자인지, 그리고 누가 공산주의자인 척 말하고만 있는지 보게 될 것이오. (중략)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권력을 얻었으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권력을 행사하는 능력은 부족하오."
- 1928년 시베리아의 바르나울에서, 대대적인 농업 집단화를 시행하기 전에.


"제일 쓸모없는 놈이 뒈져버렸어."
-1945년 5월 베를린 공방전 당시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자 한말이다.

[1] 레닌이 지어준 별명으로 개명 전[2] 레닌이 지어준 별명으로 개명 후[3] 원본 사진에는 옆에 루스벨트, 처칠도 같이 앉아 있다.[4] 스탈린은 '2류 강대국 러시아초강대국 소련으로 도약시킨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동시에 '세계사를 통틀어 2번째로 많은 숫자의 자국민을 학살한 인간백정'이기도 했다. '평가' 문단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세계사의 수많은 국가원수들을 통틀어서도 이 정도로 극단적인 공과가 병존하는 인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5] 보통 숙청이라는 것은 정치적인 생명만 끝장내고, 귀양이나 투옥, 수용소행이라는 온건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나, 스탈린 치하에서 숙청당한 이들은 처형으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대다수였다.[6] 전자는 스탈린이 집권했을 당시, 후자는 스탈린 사후에 붙여진 별칭이다.[7] 조지아의 고리(Gori) 시에 스탈린의 생가와 박물관이 있다. 고리 시의 중심부 스탈린 광장에는 거대한 스탈린 동상이 스탈린 격하와 구소련 붕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최근까지 서 있었지만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2010년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스탈린 박물관 안쪽에 동상이 남아 있다.[8] 그가 젊은 시절에는 당 내에서 수많은 비판과 공격을 받으면서도 '조지아 민족주의자'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9] 단 아예 계통이 러시아인과 다른 민족 출신인 스탈린과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언어ᆞ민족이 같은 나라이므로 히틀러도 분명히 독일 민족이며 독일인 우월론을 펼치는 데 명분적인 문제는 없었다. 물론 금발벽안의 순혈 아리아인은 아니었지만 사실 독일인 중에서도 금발벽안이 그리 흔한 건 아니다.[10]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11] 허나 이보다 더 많을수도 있음은 결코 부정할수 없다. 서구의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가진 기준에 비춰 보면 이쪽은 그나마 기록 검증, 증언 등을 교차해서 생각보다 높은 정확도를 컷트라인으로 잡아서 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실제 수치보다 낮을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만 해도 이 걸 지네들 공적으로 삼아 그럭저럭 쉽게 잡혀 1100만이 정설이지만, 확인안되는 것 까지 따져 1700만까지도 되잡힌다. 다만 루돌프 럼멜의 경우 사회주의 자체를 단순히 학살로만 간주하고, 네오콘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던 인물이다. 학살 수치는 통계치를 내는 사람이 누구이냐를 따라서 다르지만, 럼멜의 통계치는 실제 보다 더 낮게 잡은 것일수도 있고 더 높게 잡은 것일수도 있다. 그리고 루돌프 럼멜은 역사학자도 아니다. 리처드 오버리의 경우 소련의 공식통계보단 좀 더 높게 잡은 것일수도 있지만, 이 쪽은 2차세계대전사과 소련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영국의 역사학자다. 따라서 학문의 중립성은 리처드 오버리에게 더 있다.[12] 한국도 이같은 방법으로 부서이름을 작성한다. 기무사의 전 이름이었던 방첩부의 이름도 방어할 방 과 첩자 첩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13] 한국어로 치면 기무사 공식명칭을 살첩사령부 내지 살간사령부(...)라고 지은 셈이다.[14] 서구권 사회주의자들 중에선 스탈린의 용모를 두고 어떤 아이가 스탈린의 자애로운 얼굴을 보고 안기지 않겠는가 하는 오글거리는 찬양을 남기기도 했다.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에 나오는 대목.[15] 당시 20세기 초의 동부유럽인 평균키가 160cm대 중반이었다.[16]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사치를 부린다는게 쉽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 시다바리일 때부터 사치를 부렸는데 절대 권력자인 스탈린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치를 부릴 수 있었지만, 스탈린 본인이 사치와 거리가 멀었다. 혹자는 신학교 출신이었기에 그렇다고 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찌됐든간에 확실한 것은 스탈린이 다른 독재자들과 달리 사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17] 이에 관하여 한 말이 앞서 보듯이 "나는 첫 아내를 묻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 또한 묻었다." [18] 실제로 이 시기의 청년 스탈린을 다룬 전기 '젊은 스탈린'은 그야말로 어지간한 첩보물 뺨친다.[19] 자주 도는 일화는 두번째 아내가 아는 사람이 굴라그로 추방될 위기에 처하자 스탈린의 아내를 통해서 줄을 놔서 추방을 면하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강철의 대원수는 추방될 사람과 아내에게 줄을 놓는데 가담한 사람 전원을 처형시켰다고 한다. 냉전 때 돌던 이야기니 신빙성은 얼마나 있을지?[20] <크렘린의 수령들>에 따르면 레닌은 1915년에 지노비에프에게 보낸 자신의 서한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코바의 성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리샤(지노비에프)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레닌은 그에 대해 재차 카르핀스키에게 묻고 있다. "부탁이 있습니다. 스티프코나 미하에게 코바의 성을 알아봐 주십시오. 우리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시프 드주…뭐라고 했는데…"[21] 스탈린은 이 편지를 죽을 때까지 자기 책상 서랍 안에 보관하고 있었고 그가 죽은 후에 발견되었다. * 출처 :Медве́де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메드베데프 알랙산드로비치). Unknown Stalin)[22] 참고로 부하린은 러시아 혁명에 동참한 혁명 영웅중 하나다. 레닌과 설전을 벌일 정도로 수준 높은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레닌의 유언장에 언급되는 차기 국가원수 후보자이기도 했다. 대숙청 말기에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이후 1988년 복권됐다.[23] 여담으로 몰로토프는 망치라는 뜻이 있다.[24] 스탈린이 치매에 걸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노년에 치매에 걸리면 증상 중 하나로 갑자기 페도필리아 증세를 보일 수 있다고 한다. 당신들의 조국의 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가상역사소설 아크엔젤이 스탈린의 어린이 사진 수집을 중요한 플롯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런 페도필리아설의 신빙성이 낮은 것이, 아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격심한 미국이나 서유럽에서 누군가에 대한 흑색선전을 하면 꼭 나오는 것이 아무개는 페도였다는 이야기라서...스탈린 페도설, 베리야 페도설, 마오쩌둥 페도설이 다 있는데, 뭐 공산당이 무슨 페도당도 아니고?[25] 문제는 이 설 자체가 말이 안되는 건 스탈린이 나데즈다의 부모와 처음 알게 된게 나데즈다가 3살때였다는 것이다. 어머니와의 내연설은 사실 당대부터 있지만 나데즈다가 딸이라는 건 조금만 봐도 성립되기 어려운 일.[26] 김일성도 비슷한 이야기가 도는 걸 보면 냉전시 흑색선전은 어디나 비슷하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나데즈다가 자살한 방에서 나온 문건이 당시 감옥에 있던 고위 볼세비키 당원이 퍼뜨렸던 스탈린 흑색선전에 대한 문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비밀 서류도 아니었고 스탈린이나 기타 당원들도 사건 자료의 목적으로 보던 문건이었고 무엇보다도 스탈린 자신이 읽다가 만 것이었다![27] 전 버전에서 농아를 숙청했다고 잘못 기술된 레닌그라드 사건(1950)은 농아학교의 교사진이 연루되어 숙청된 사건이다.[28] 이중에는 스탈린이 집권한 후에 양육비를 청구했다가 사라져버린(...) 사람들도 있다.[29] 조지아에서 시인이던 스탈린은 지금으로 치면 아이돌 같은 존재였고, 마크로스 마냥 노래하는 혁명가 였던 스탈린의 친구이자 팬인 은행직원에게 은행털이를 할 때 도움받기도 했다. 「젊은 스탈린」첫 내용.[30] 엄밀히 말해서 히틀러의 경우, 연설 자체의 내용은 매우 단순했다. 그는 제스처, 말의 톤과 투 특히 무대설정이라는 연설 내용 외적인 요소를 통해 청중들의 감정적 자극을 이끄는데 능숙했다. 요즘 언어로 청중들이 원하는 "사이다"적 발언과 메세지 내용을 전달하는 능력 및 개인의 카리스마를 통해 청중들을 선동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 때문에 히틀러의 연설들은 이러한 연설 내용 외의 요소들을 배제한 상태로는 그다지 특기할 만한 것이 없고 오히려 말이 산만한 경우가 많다. 파시즘 진영에서 순수한 의미의 연설능력이 뛰어났던 인물들을 꼽으라면 총통보다는 두체절름발이 악마를 들 수 있다.[31] 실제로 이후에도 조, 혹은 조 아저씨는 소련의 상징이 된다. '샘'과 '조'는 냉전기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특히 수학자 폴 에어디쉬는 자신의 수수깨끼같은 말버릇 중 하나로 이런 말을 애용했다.[32] 카이로인지, 테헤란인지, 포츠담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카더라 통신이니 그렇겠지만. 일단 얄타가 아닌 건 확실하다[33] 스탈린이 비행기를 기피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이는 소련의 항공기용 엔진 신뢰성이 낮아 사고율이 높았기 때문. 의외로 당대의 많은 국가원수 및 군 수뇌가 그 문제 때문에 비행기를 기피했고, 추락사고로 죽기도 했다.[34] FDR도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주치의와 측근들에게 건강상의 이유로 인해 얄타에는 가지 않는게 좋다는 권고를 받았었다. 단지 FDR은 스탈린과 달리 권고를 뿌리치고 얄타로 향했을 뿐이다.[35] 리처드 오버리의 저작에 따르면, 실제로 이런 과부하가 걸려서 철도 수송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자는 곧장 숙청당했고 바로 신입이 들어와서 업무를 맡았다. 그리고 그 신입도 문제를 일으키면 바로 숙청당했다.[36] 마가린은 버터의 대체품으로, 요새 말로는 '유사 공산주의자', '공산조무사' 쯤 될 것이다.[37] 원래 성이 브론슈테인으로, 전형적인 유대인 성이다.[38] 초창기 이스라엘의 무기들은 체코제가 많았다. 근데 이스라엘에 무기를 팔라고 한 것은 스탈린의 지시였다.(...) 이스라엘 측에서 먼저 스탈린에게 중동에서의 소련 영향력 확대를 돕겠다면서 지원을 요청한 것. 스탈린은 이를 반신반의하면서도 받아들였다가 이스라엘의 친미화를 보고 이스라엘과 단교하고 엉뚱한 사람들을 조졌다.(...)[39] 스탈린 외에도 막심 고리키, 유리 가가린, 게오르기 주코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등 소련의 쟁쟁한 위인들이 다수 묻혀있다.[40] 스탈린의 생가가 있던 자리이다.[41] 사실 미국은 소련 공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미국 역시 소련과의 직접적인 대결은 원하지 않았기에 일부러 모른척 했다고 한다.[42] 1928-1995. 정치장교이자 구소련 심리전부서의 책임자였으며 장성까지 승진했던 인물로, 후일에는 역사가로서 맹활약하였다. 만나본 사람의 평가에 의하면 꽤나 공산주의 사회의 고위층답지 않게 자유롭고 유연한 사상을 가졌다고 하며 나중엔 스스로도 공산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근데 이사람은 아버지가 대숙청 때 숙청되었기 때문에 원래 공산주의를 좋게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소련은 의외로 연좌제가 느슨했던 듯.[43] 우리나라도 의외로 예외는 아닌데 왕이 이러기도 했다(...). 차이점이라면 꽐라가 되는게 목표라서 왕과 주변 인물들은 춤은 커녕 몸겨누기도 힘들어 했다랄까.[44] 레드얼럿 1편의 소비에트 미션9 오프닝 컷신에서 이게 패러디되었다. 그라덴코 장군과 함께 보드카를 들이키며 화기애애하게 유배문서에 서명했지만 다음미션에서 쿠코프와 정부인 나디아에게 독살당했다.[45] 독소전쟁 초반의 병크대문에 매우 비판을 받지만, 일반적으로 그때만을 제외하면 스탈린의 전쟁수행 지도는 모범적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는 서구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리처드 오버리著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군사적인 면은 전문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군인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민간부분에서 독재권력을 이용하여 모든 국력을 전쟁에 효율적으로 투사하도록 지도했는데, 군사작전에 개입하여 말아먹거나 혹은 행정을 팽개친채 괴링이나 힘러 등의 중간보스들의 전횡을 방치하여 국력을 낭비한 히틀러와 비교하면 스탈린의 성과는 분명하다.[46] 로버트 서비스가 '부하린에 대한 스탈린의 애정 때문이라는 평가를 거부했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 스탈린이 이 편지를 굳이 간직한 이유는 부하린에 대한 특별한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오히려 더 다수이다.[47] 이 애칭은 고참 볼셰비키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생전의 레닌이 스탈린의 성을 잊어버리고는 '코바의 성이 뭔지 알려주세요. 제 기억으론 주... 뭐였는데' 라는 편지를 쓸 정도였다.[48] 단 볼코고노프의 스탈린 평전은 riss에서 서비스하고 있어서 정 읽고 싶다면 거기서 볼 수 있다.[49] 이 책은 스탈린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공업화를 무작정 비판하기만 했다.[50] 소련 당시 소련의 최고봉.[51] 사실 기독교 교리문답식의 자문자답 문장은 스탈린 뿐 아니라 19세기 중반 이후의 혁명가들이 굉장히 선호하던 형식이다. 일단 기독교문화권에서 교리문답은 대중들한테 상당히 익숙한 데다가, 무엇보다도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한테도 따라 읽기도 좋고, 외우기도 좋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강조하기 쉬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구전으로 퍼트리기엔 최적의 형식이다. 사실 공산당 선언마르크스가 싹 정리해서 새로 쓰기 전의 초안은 '공산주의자의 교리문답' 형태로 쓰여졌었다.("당신은 무슨 주의자입니까? 저는 공산주의자입니다", "공산주의자는 무엇에 반대합니까? 공산주의자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에 반대합니다.)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이유 중 하나가 트로츠키처럼 말 많은 혁명가들을 혐오하는 러시아 인민들의 성향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52]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53] Speech "The Elections in St. Petersburg" (January 1913)[54] Speech "The Elections in St. Petersburg" (January 1913)[55] The Memoirs of former Stalin's secretary (1992) by Boris Bazhanov[56] The Political Report of the Central Committee, The Fifteenth Congress of the C.P.S.U.(B.) (7 December 1927)[57] 1923년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와 잡담 중. Trotsky's Diary in Exile, 1935, p. 64.[58] 1차 출처, 2차 출처 Churchill, Sir Winston. The Gathering Storm : The Second World War Vol.1. Houghton Mifflin, 1948(Houghton Mifflin Harcourt, 1986). p.121.[59] 1943년, 몰로토프와의 대화에서. 출처: Felix Chuev's 140 Conversations with Molotov Moscow, 1991.[60] 덩샤오핑이 마오를 평한 '공7, 과3'이 현재 마오쩌둥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사실상의 공식적인 견해이며, 현대 중국인들도 3의 과오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있다. 참고로 공칠과삼도 마오가 스탈린 사후 그에 대해 평한 것을 그대로 마오 사후에 쓴 것이다.[61] Said in 1923, as quoted in The Memoirs of Stalin's Former Secretary (1992) by Boris Bazhanov[62] 출처: Truth about the Great Patriotic war by B. Sokolov (in Russian)[63] 출처 - Fallen Eagle: The Last Days of the Third Reich (1995) by Robin Cross, p. 21[64] 젊은 스탈린, 49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