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전쟁

최근 수정 시각:

독일어: Ostfront (동부전선), Deutsch-Sowjetischer Krieg (독일-소련 전쟁)
러시아어: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대조국전쟁)[1] [2]
영어:'Eastern Front (동부전선)

동부전선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30px-Bundesarchiv_Bild_101I-209-0090-28%2C_Russland-Nord%2C_Infanterie_und_Panzer_35t.jpg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진격하는 독일 국방군
파일:external/www.military-history.us/EasternFront1941.jpg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황폐화된 소련의 마을
파일:external/ww2today.com/Bundesarchiv-146-1972-042-42.jpg
1942년 봄 데미얀스크 전선의 독일군과 3호 전차
파일:external/cdn.theatlantic.com/main_1200.jpg
1942년 가을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진격하는 소련군
파일:external/www.worldwarphotos.info/StuG_III_eastern_front.jpg
동부전선에서 사용된 3호 돌격포
파일:external/8106dff5287d17267591e663e71c2d232228cd1a9d592855dedf33276f910918.jpg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6호 전차 티거와 독일군 병사
파일:external/ww2today.com/Bundesarchiv_Bild_183-H29033.jpg
1945년 참호에서 판처파우스트로 무장한 독일 국민돌격대 대원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ilhelm_Keitel_Kapitulation.jpg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빌헬름 카이텔 원수

날짜

1941년 6월 22일 ~ 1945년 5월 9일

장소

소비에트 연방유럽 지역, 중유럽

이유

아돌프 히틀러레벤스라움 확보 야욕

교전국

파일:소련 국기.png 소비에트 연방
파일:폴란드 국기.png 폴란드 동부군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기.png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194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lag_of_Czechoslovakia.png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망명 정부 (194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uvan_People%27s_Republic_flag_1933-1939.png 투바 인민 공화국 (~1944)

● 부수적 참여국
파일:루마니아 국기.png 루마니아 왕국 (1944~)
파일:불가리아 국기.png 불가리아 왕국 (1944~)
파일:핀란드 국기.png 핀란드 (1944~)

● 지원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0px-Flag_of_Free_France_%281940-1944%29.svg.png 자유 프랑스 (1943~)
파일:영국 국기.png 영국 (1941)
파일:미국 국기.png 미국 (1944)
파일:캐나다 국기.png 캐나다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나치 독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Flag_of_Italy_%281861-1946%29.svg.png 이탈리아 왕국
파일:루마니아 국기.png 루마니아 왕국 (~1944)
파일:핀란드 국기.png 핀란드 (~194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Hungary_%281867-1918%29.svg.png 헝가리 왕국
파일:불가리아 국기.png 불가리아 왕국 (~194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Flag_of_First_Slovak_Republic_1939-1945.svg.png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Flag_of_Spain_(1938_-_1945).svg.png 스페인국 (~194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Flag_of_Independent_State_of_Croatia.svg.png 크로아티아 독립국
파일:러시아 인민 해방 위원회.png 러시아 인민 해방 위원회

지휘관[3]

파일:소련 국기.png 이오시프 스탈린
파일:소련 국기.png 게오르기 주코프
파일:소련 국기.png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파일:소련 국기.png 이반 코네프
파일:소련 국기.png 바실리 추이코프
파일:소련 국기.png 로디온 말리놉스키
파일:소련 국기.png 세묜 티모셴코
파일:소련 국기.png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파일:소련 국기.png 알렉세이 안토노프
파일:소련 국기.png 세묜 부됸늬
파일:소련 국기.png 키릴 메레츠코프
파일:소련 국기.png 표도르 톨부힌
파일:소련 국기.png 니콜라이 바투틴
파일:소련 국기.png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파일:소련 국기.png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파일:소련 국기.png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기.png 요시프 브로즈 티토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아돌프 히틀러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에른스트 부슈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하인츠 구데리안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발터 폰 브라우히치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귄터 폰 클루게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빌헬름 리터 폰 레프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빌헬름 리스트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에리히 폰 만슈타인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발터 모델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파일:external/www.thegospelintheendtimes.com/bible-white-flag.png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페도르 폰 보크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페르디난트 쇠르너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발터 폰 라이헤나우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알베르트 케셀링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헤르만 호트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게오르크 폰 퀴힐러
파일:external/f810ccc8185f52028ba410d063471cf757ab57bd8e1481e68f7022f0ebab94c9.png 프란츠 할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Flag_of_Italy_%281861-1946%29.svg.png 베니토 무솔리니
파일:루마니아 국기.png 이온 안토네스쿠
파일:루마니아 국기.png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파일:핀란드 국기.png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Hungary_%281867-1918%29.svg.png 호르티 미클로시

결과

유럽 전구의 종결

영향

소련의 초강대국 등극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동독의 공산화

병력

총 3,450만 명

총 1,800만 명

피해규모

파일:소련 국기.png 소련
- 총 피해 1,060만 명
- 전사 및 실종 760만 명
- 포로 52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260만 ~ 360만 명
파일:폴란드 국기.png 폴란드 망명 정부
- 총 피해 2만 4천 명
- 전사 및 실종 2만 4천 명
- 포로 수 미확인
파일:루마니아 국기.png 루마니아 왕국
- 총 피해 1만 7천 명
- 전사 및 실종 1만 7천 명
- 포로 8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미확인
파일:불가리아 국기.png 불가리아 왕국
- 총 피해 1만 명
- 전사 및 실종 1만 명
- 포로 수 미확인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나치 독일
- 총 피해 430만 명
- 전사 및 실종 310만 명
- 포로 33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37만 명 ~ 120만 명 추산
파일:러시아 인민 해방 위원회.png 독일에 가담한 소련인
- 총 피해 21만 명
- 전사 및 실종 21만 명
- 포로 10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미확인
파일:루마니아 국기.png 루마니아 왕국
- 총 피해 28만 명
- 전사 및 실종 8만 명
- 포로 5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20만 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Hungary_%281867-1918%29.svg.png 헝가리 왕국
- 총 피해 30만 명
- 전사 및 실종 10만 명
- 포로 5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20만 명

민간인 피해

소련 민간인 2,000만 명 사망


1. 개요2. 배경
2.1. 안보 체제2.2. 독소 불가침조약2.3. 징조2.4. 히틀러2.5. 스탈린
2.5.1. 긍정론2.5.2. 부정론
3. 참전국4. 경과5. 전쟁이 남긴 것
5.1.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잿더미가 된 두 나라
5.1.1. 소련5.1.2. 독일
5.2. 초강대국으로 등극한 소련과 스탈린 신격화5.3. 독일의 분단과 영토 상실5.4. 전쟁범죄5.5. 생태계5.6. 의의
6. 연표
6.1. 1941년6.2. 1942년6.3. 1943년6.4. 1944년6.5. 1945년6.6. IF 시나리오6.7. 독소전쟁 연구의 변화
6.7.1. 냉전 이전까지의 소련 측 연구6.7.2. 냉전 이전까지의 서방 측 연구
6.8. 냉전 이후
7. 매체
7.1. 영화7.2. 게임7.3. 만화7.4. 기타
8. 어록9. 관련 자료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202fef11435b31cd36722047d81bab2c.jpg

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ww2-cartoons-illingworth-stalin-spanks-hitler.jpg

히틀러 : "용서 하시게, 동무. 하지만 놓치긴 너무 아까운 기회인걸 어쩌겠나!"[4]

프랭클린 루스벨트 : " 눈물 좀 아끼라고, 히틀러, 그건 그냥 맛보기니깐 말이야."[5]
히틀러 : (스탈린에게 얻어터지며) "아악! 이 살인마야!"

Wollt ihr den totalen Krieg? Wollt ihr ihn, wenn nötig, totaler und radikaler, als wir ihn uns heute überhaupt erst vorstellen können? #
여러분! 총력전을 원하십니까? 만약 필요하다면, 오늘날 우리가 대체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총력적인 전쟁이 되기를 원합니까? -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을 위시한 추축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주요 전역으로 꼽힌다. 전투 규모, 사상자 면에서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전투 목록뿐만 아니라 독립적으로 분류 가능한 전투들의 규모 순위를 매기면 상위 10개 중 7개, 1위부터 5위가 전부 동부전선에서 일어난 전투들이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대규모로 침공하면서 발발했으며, 1945년 5월 8일까지 약 4년간 지속되었다. 전쟁 초반까지는 평화협상을 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협상 가능성이 사라졌다.

이전에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자 역전승을 한 전쟁은 바로 참호전이 난무했던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이었다. 이때 독일 제국군은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까지 불과 50km가 남은 지점까지 진격했다. 반면에 독일군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불과 30km 앞둔 킴키까지 진격했다. 베를린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무려 1500km에 육박하므로 독일군은 정말로 지척까지 갔던 셈이다.

그 직전까지는 중일전쟁이 그나마 가장 넓은 판도에서 치러진 전쟁이었지만, 중국은 병력 동원력이 영 좋지 않아 거대한 인구에 비해 의외로 병력 동원이 얼마 안 되었다. 반면에 일본 제국중국군과 싸우는 동시에 미국이랑 태평양 전쟁을 치르면서 태평양 전선에도 병력을 투입하였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못한 관계로 중일전쟁에서 일어난 양군 간 교전의 규모는 비교적 작다. 가장 큰 전투들도 양군 합쳐서 100만 명 안팎이 동원되었다.[8] 게다가 중국군은 일본군을 포위 섬멸할 능력이 안 되었다. 포위 섬멸 시도는 많이 했는데 화력과 화생방전에 대비하는 능력이 취약했으며, 물자 및 훈련 부족으로 인해 승기를 잡아도 일본군의 적절한 병력 지원이나 공습, 독가스 살포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힌 것에 만족하고 후퇴해야 했다. 일본군은 중국의 거점을 점령하는 데만 집중했지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 것을 경시하거나, 중국군을 얕잡아보아서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각 전투에 큰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가장 거대한 인명 피해가 나왔던 대륙타통작전이 양군 합쳐 60만 정도의 사상자가 나왔으니 상당히 큰 규모에 해당한다. 이러다 보니 중국의 희생은 대부분이 중일전쟁의 여파로 기아나 한파, 전염병으로 죽은 민간인이었고, 군 병력의 손실은 그래도 군인인지라 일본군의 3배가 조금 안되는 수준이었다.

2. 배경[편집]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아돌프 히틀러 총통게르만-아리아인 인종의 '동방생존권'인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 유대-볼셰비즘(Judeo-Bolshevism)을 제거하고 '열등인종(Untermensch)'인 슬라브족을 정복 후 추방,노예화시켜 버림으로서 최종적인 '천년제국'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소련을 격파하여 굴복시킴으로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영국을 굴복시킨다.'라는 히틀러 특유의 전략적 사고방식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히틀러의 의중에서 어느 쪽이 더 비중이 컸는지는 알 도리가 없고 자료가 밝혀질수록 논란만 가중되고 있다.

히틀러는 집권 전부터 공공연히 공산주의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원인 중의 하나라고 주장했으며,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 대해서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그 전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독일과 소련의 밀월 관계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소련 인사들은 독일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성공시킨 적이 있으며(레닌도 독일 제국 측이 제공한 열차를 타고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밀입국했다) 그들도 독일 공산주의자들봉기를 지원하려 하기도 했다.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도 말하듯,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이자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사력 확장을 크게 제한받고 국제 사회에서 평판이 추락한 독일과, 세계 각국의 집권층이 전혀 환영할 수 없는 이념인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은 어느 면에서는 동질성을 지녔던 것이다. 집권 후에는 이것이 국가 정책이 되었으며, 위협을 느낀 소련은 영국-프랑스-폴란드-소련 4자 안보 체제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를 의심한 서방 측의 불신에 의해 이는 난관에 봉착했다. 소련은 겨우 체코슬로바키아와 군사 협정을 체결하였으나, 체코슬로바키아는 1938년 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되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동맹국을 상실해 버렸고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2.1. 안보 체제[편집]

소련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영국-프랑스-폴란드-소련으로 이어지는 4자 안보 체제 구축을 위해 여러 모로 노력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1939년 5월 3일 리트비노프는 해임되었고,[9]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외무장관이 되었다.

1939년 4월 17일, 소련은 '발트해-지중해까지 모든 나라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라도 독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영국, 프랑스, 소련이 모두 전쟁에 돌입한다'는 내용의 동맹 관계를 제안하는 내용을 적은 문서를 영국, 프랑스에 전달했다. 그러나 6주가 지나서야 영국에서 답신이 왔으며, 그나마도 동맹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비 회담을 열자는 데 동의하는 것이었다. 몰로토프는 7월 17일, 영-프-소 외교 회담에서 군사 협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어서야 영국, 프랑스 협상단은 비행기가 아니라 여객선 시티 오브 엑스터(City of Exeter) 호를 타고 레닌그라드에 입항하여 소련 측에 나쁜 인상을 심어 주고 말았다.

8월 12일이 되어 겨우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소련 측 협상단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친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였다. 스탈린의 최측근을 협상단장으로 임명한 데서 소련이 이 협상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협상 자리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원수 등 소련군 고위 사령관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할 필요 없이 바로 군사 협정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를 영프 협상단에게 보여주었다. 반면 영-프 협상단장의 자격은 소련에 비해 상당히 떨어졌다. 프랑스 협상단장은 프랑스 제1군관구사령관 조제프 두망(Joseph Doumenc) 장군이었는데 보로실로프와 마찬가지로 협상 서명권을 지니고 있었기는 하나 당시 프랑스군 내 서열 40위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영국 협상단장 레지널드 드락스 경(Reginald Drax)[10]은 일개 함장 출신인 데다 영국 정부에 보고만 할 수 있을 뿐 협상 권한이 없었다. 자국의 쟁쟁한 인물들을 협상단으로 내세운 소련으로서는 매우 불쾌할 것이 당연했다.

소련 협상단은 매우 당황했으나 계속 협상을 이어나갔는데, 소련군이 독일로 진군할 수 있도록 동유럽 국가, 특히 폴란드(당시 영-프와 동맹국)가 길을 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협약을 양국 정부와 맺었는가를 질문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절대로 소련군을 영토에 들일 수 없다고 했다[11]는 강경한 자세를 굽히지 않음에 따라 그런 협약은 존재할 수가 없었고, 그게 밝혀진 시점에서 이미 다자 안보 체제는 결렬된 상태였다.

전쟁이 발발할 시 각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수치를 밝힐 때 소련 협상단은 120개 사단,[12] 야포 5천여 문, 전차 9천여 대, 항공기 5천여 대를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는 110개 사단, 전차 4천여 대를 파병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영국 협상단은 16개 사단이라고 밝혀 보로실로프가 "통역을 잘못한 것 아닌가?"라는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황당한 소련이 세부 사항을 캐묻자 영국은 사실은 단 4개 사단만이 전투 가능하다고 실토했다. 회담 종료 후 스탈린이 영국 대사에게 구체적으로 더 묻자, 사실 4개 사단 중에서도 2개만이 제대로 된 사단이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완편된다는 것이었다.[13]

영국-프랑스가 이런 식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소련은 자신들이 계획한 대 독일 4자동맹 안보체제가 성립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며, 독일의 침략에 홀로 맞설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몰리게 되었다.

2.2. 독소 불가침조약[편집]

이때 스탈린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다름 아닌 독일이었다. 독일 또한 침략 전쟁에 소련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계획의 스타트를 끊게 될 폴란드 침공에 소련이 개입하면 초장부터 만사를 그르칠 수 있으므로 소련에게 추파를 보내기 시작했다. 8월 2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소련에게 발트해에서 흑해까지의 지역의 결산[14]을 제안했다. 8월 17일 몰로토프는 리벤트로프와의 회담에 동의했고, 8월 19일 양국은 독소 신용 협정(German-Soviet Credit Agreement)를 체결하였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전보를 교환한 후, 8월 23일 리벤트로프를 위시한 독일 외교단이 소련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당시 모스크바 공항에는 하켄크로이츠 깃발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크레믈린에서는 스탈린이 직접 외교단을 맞이했다.

이로써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독소 불가침조약과 독소 신용 협정에 의해 소련은 폴란드를 독일과 나눠먹고, 독일과 소련은 상대방이 약소국(발트 3국, 루마니아 등)을 침략하는 것을 묵인했으며, 독일은 소련에 기계류를, 소련은 독일에 자원을 공급해 주기로 약속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고 9월 17일부터는 소련이 참전해 폴란드 동쪽을 침략함으로써 폴란드 제2공화국은 멸망하고,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1940년 6월에는 소련이 발트 3국을 강제 합병하였다. 소련은 1939~41년 사이에 독일의 전쟁에 대체로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고 같은 슬라브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가 공중 분해되거나 자국의 영향권이라고 인식한 핀란드나 불가리아에 독일이 손을 뻗어도 침묵하는 등 우호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2.3. 징조[편집]

그리고 1941년부터 독일의 소련 침략 징후가 서방 세계와 추축국에서 곳곳에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독일 측 암호를 해독해 내서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가 스탈린에게 직접 경고하기도 했고, 1941년 봄에만 180건이 넘는 독일 항공기의 소련 영공 침범 사례도 있었으며, 일본 제국에 상주하던 전설적인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어가며 소련에 독일의 침공이 곧 개시될 것을 알렸지만, 스탈린과 소련 방첩국, 정보국은 그것들을 모두 무시했다. 6월 16일 베를린에 파견된 소련 측 간첩들도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지속해서 알리고,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하루 전인 6월 21일 독일군 탈영 병사[15]가 '독일이 내일 공격할 것이다'라고 털어놓기도 할 정도로 징후는 있었다[16]. 영공을 침범하는 독일 항공기에 대해서도 공격하지 말고 특별한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말라고 강력히 명령했으며, 이는 전쟁 초기 소련 공군이 루프트바페의 공습이 임박했음에도 손 놓고 있다가 이륙조차 해 보지 못한 채 대거 궤멸되는 참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물론 스탈린도 히틀러가 쳐들어 올 것에 대비를 하긴 했는지, 폴란드 점령 후 스탈린 라인을 뜯어다 앞에 짓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쯤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등 유능한 장군들 모가지가 전부 날아가 버린 데다 제대로 된 장교는 거의 있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개판이 난 붉은 군대가 제대로 싸웠을 리가 없다.

소련은 독일이 서부에서 전쟁을 치르는 내내 독일에게 물자를 제공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불과 하루 전에도 물자를 가득 실은 열차가 독일 국경을 넘었다.

2.4. 히틀러[편집]

히틀러가 영국이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 소련 침공을 개시해 독일의 전쟁 수행 양상을 양면전쟁 구도로 만든 것은 전략적으로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러나 히틀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나름대로 이유는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 이념적 이유 외에도 군사적인 이유도 나름대로 있었다.

육군 강국인 프랑스가 버티고 있어 서부전선을 형성해 줄 수 있었던 제1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프랑스가 무너진 상황인 데다가, 영국은 섬나라라는 특성상 육군이 약했으며 그나마 보유하고 있던 장비의 상당수를 영국 원정군으로 파병했다가 프랑스 침공 때 날려먹고 그 이후 영국 본토 항공전이 벌어지면서 자원을 대부분 공군 강화에 투자해야 했던 상황이라 영국 혼자서는 유럽 대륙에 상륙해 독일 육군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비록 1944년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미국과 더불어 서유럽의 양대 주력이 되기는 하지만 당장은 육군의 장비조차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건재했기에 독일은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을 분산해야 했으며, 이 때문에 미국에서 소련으로 보내는 항로에 대한 견제가 어려워졌다. 반대로 독일이 영국을 확실히 제압해 놓았더라면 미국이 유럽에 전선을 전개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당장 영국 본토를 제압할 능력이 없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바다에서의 U-보트 작전과 북아프리카 및 중동에서의 작전에 시간을 들여가며 공을 들였다면 중기적으로 영국을 굴복시키거나 협상을 이끌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채 후방에서의 생산과 보급이 전세를 결정짓는 현대전에서 상대방의 보급 능력을 두 배 이상 향상시키고, 아군의 후방 생산 기지를 상대의 항공 세력으로 위협할 수 있는 영향권 내에 남겨둔 것만으로도 전력 약화를 야기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게다가 이미 북아프리카 전역이 진행 중이었던 데다가, 바다에서도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양면전쟁이 아니라는 건 말도 안 된다.

전해에 독일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했는데, 그 결과 영국의 정복을 위해서는 보다 훨씬 강력한 해군이나 공군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틀러는 수십 개 사단을 해체하고 그 돈으로 해군과 공군을 증강할 계획을 세웠지만, 당장 400만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유사시 천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소련을 앞에 둔 상황에서 육군을 줄이기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당시 독일과 소련의 인구 비는 1:2였으므로 유사시 동원 능력도 큰 차이가 났다. 독소전쟁 발발 후 독일군과 소련군의 병력 손실 차이는 1:5였다. 하지만 소련군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물량뿐만 아니라 전략과 전술의 성공과 같은 많은 측면에서 독일군을 따라잡으면서 독소전 양 측의 총 손실 비율을 1:1.5~1.3까지 줄여 버린다. 무장 친위대가 점령지에서 벌인 학살로 소련의 사망자(민간인+포로 등)는 독일의 몇 배에 달했다.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전 세계가 놀랐던 이유가 절대 손을 잡을 것 같지 않았던 두 나라가 손을 잡은 데 있었을 만큼 독일과 소련은 결코 서로 간에 믿을 만한 국가가 아니었고 언젠가는 서로를 침공할 것이라는 예측을 이미 상호간에 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해 두지 못한다면 영미를 막느라 상당히 약화된 상태에서 소련의 침공을 받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봉착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이는 어느 정도 필연적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1차 대전 때 동부전선에서 독일에 쭉쭉 밀리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거대한 땅덩어리를 떼주고 전쟁에서 이탈해 사실상 패배한거나 다름없었던 제정 러시아의 무능함도 한몫했다. 만일 소련이 제정 러시아만큼 무능해 또 다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비슷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추후 있을 대 미국전에서 배후를 노릴 수도 있는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함과 동시에 독일의 고질적 문제였던 자원문제도 해결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도 있었다. 동시에 이념, 정치적 목표인 레벤스라움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으니 히틀러 입장에서는 참기 어려운 유혹, 아니 도박이었을 것이다.

이중 자원 문제는 중요한것으로 특히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석유가 독일엔 항상 부족했다. 미국이 1941년~1945년 까지 유럽과 아프리카 전선의 연합국에 제공한 석유는 60억 배럴이었는데, 이탈리아와 독일은 13억배럴도 채 되지 않았다. 이 부족한 석유를 동부지역을 침공함으로써 얻어내고 싶었던것이다.

폴란드와 프랑스를 기갑 부대를 이용한 최소한의 희생으로 한 달 정도의 단기간에 정복했듯이, 한창 물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육군을 동원하여 기습 공격을 한다면 소련을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다. 당시 독일군 육군 참모본부[17]도 소련은 10주의 작전(!)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작전을 내놨는데 이는 히틀러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물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 프란츠 할더, 하인츠 구데리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등 독일군의 주요 상급 지휘관 및 참모들은 '"영국과 전쟁 중인 마당에 굳이 우리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소련을 상대로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서 군을 소모시킬 필요는 없다"라는 의견이었다. 물론 잘못될 경우 1차 대전의 악몽이 재현될 수도 있었지만,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긴 했지만, 당시에는 그 누구도 실제로 전쟁이 개시되면 소련이 길게 버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독일군 장성들은 소련군의 역량을 낮잡아 봤고#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독일군의 동계장비가 허술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일단 쳐들어가기만 하면 강압적인 공산 통치에 염증을 느낀 소련 국민들이 독일군을 환영하여 소련 체제는 공격하는 즉시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히틀러가 소련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기만 하면, 저 엉터리 건물은 스스로 무너진다."[18]
(We have only to kick in the door and the whole rotten structure will come crashing down.)

사실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등은 처음에는 독일군을 스탈린의 학살, 숙청, 공포 정치에서 해방시켜 준 군대로 환영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독일군의 보답은 학살, 파괴, 약탈. 독일이 이러한 행위들을 저지른 것은 열등한 슬라브족을 멸살시키기 위해 취한 학살이며 문제는 전쟁이 장기화되고 본토 방어전으로 밀리고 나서야 이런 끔찍한 행위가 멈췄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독일군의 잠재적 협력자가 될 뻔했던 우크라이나인이나 발트 3국인도 모두 독일군에 등을 돌렸고 후방에서 빨치산을 하든지 소련군에 앞장서 입대했다. 히틀러는 이 침공 작전에 대해 낙관적이었는데, 소련이 비록 거대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지만 서방에서 육군력이 강했던 프랑스도 수도인 파리가 함락되자 바로 무너졌던 전례가 있는만큼 소련도 그렇게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 대숙청으로 소련군이 반고자가 된 상태인 데다가 소련 체제가 막장이기 때문에 소련군이 군사 작전을 펼쳐 봤자 그 범위만 컸지 결과는 프랑스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19]

이렇듯 히틀러는 소련을 매우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 정보부나 다른 국가들도 소련이 저 정도로 저 정도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 등의 많은 나라에서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 소련군이 격파당하자 저 정도의 병력을 잃었으니 소련은 얼마 못 가서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스탈린만이 군대에 대한 정보와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정보에 대한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한 결과 외부에서 소련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소련 정복은 쉬울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후방에 배치된 공업 시설과 소련군이 집결하기 전까지는 그러하긴 했다. 후방 병력 견제는 일본이 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일본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는 상호 간에 불가침 조약까지 체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0]

결과적으로 초반의 무지막지한 대패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상상을 초월하는 저력으로 저항하여 무너지지 않았다. 게다가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은 미국에도 선전포고를 해 버렸는데 독일의 3국 동맹이 있었다지만 진주만 공습은 일본이 먼저 시작한 공격이기 때문에 독일이 굳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안 해도 무방했다. 물론 선전포고를 안 하고 무시했다고 쳐도 아마 미국이 먼저 선전포고를 때리고 전쟁에 착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이미 유럽 전선에 참전하기로 영국에 비밀리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진주만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높은 상황에서 정부가 유럽 전선에 우선적으로 전력을 집중하는 상황을 국민들에게 납득시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21] 즉 히틀러는 미국 정부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고 미국이 일치단결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셈이다.

사실 이 선전포고에는 일본이 중국 그만 공격하고 소련으로 발 돌리길 요구하는 의미도 섞여있긴 했지만, 소련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몇년 전에 맞본 일본은 "니들이 때려도 우린 극동부대 못 부술걸?"이란 결론에 이르렀으며 소련에 대한 선전 포고를 하지않았다. 어쨌든 일본 제국 때문에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해상 보급에 연명하는 영국이 독일의 유일한 상대였으나, 이제는 물량이 승패를 결정하는 현대전에서 세계 1, 2위의 공업국[22]을 상대로 자진해서 전쟁을 벌이는 자살적인 모양이 되었고, 히틀러가 물량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이미 전세는 돌이킬 수 없었다.

2.5. 스탈린[편집]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의 독일군의 공격이 그처럼 놀라운 정치적, 군사적 기습의 효과를 달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남는다. 사실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조짐은 상술하였듯이 충분히 많았다. 스웨덴에 있는 공산주의자 철도 노동자나 폴란드 저항군, 그리고 많은 정보원들이 동쪽에서 독일군이 독-소 국경 지방에 대규모로 집결하고 있음을 알려 왔다. 그리고 독일군이 고도 정찰 비행 중에 소련 영공을 침범한 사례가 300회를 넘었고, 외교적인 항의가 반복되었으나 독일 측은 별다른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또한 독일 정보원과 독일의 후원을 받는 우크라이나 게릴라들이 1941년 봄에 소련 서부를 교란시켰으며,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은 6월 16일에 필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인력을 본국으로 후송했으며, 6월 21일에는 소련이 지배하는 항구에 독일 상선이 단 한 척도 정박하지 않았다. 일단 이러한 파멸적인 상황이 스탈린의 완고하면서도 맹목적 사고 때문이었다는 일반적인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쉽다. 그가 종종 적의 공격 의도에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적의 공격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무시하는 지도자의 전형으로 언급되어 왔다.

2.5.1. 긍정론[편집]

후대의 많은 연구자들은 스탈린은 '진심으로'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영국 공군이 소련의 바쿠 유전에 대해 폭격을 검토할 정도로 소련은 독일에게 많은 전쟁 자원을 공급했다. 아마도 스탈린은 소련이 독일에 전쟁 물자를 계속 공급하는 한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독일 경제에 없어서는 안 될 희귀 광물을 제공하면서, 소련과의 전쟁이 임박하면 독일에게 중요한 인센티브를 박탈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소련은 1939년부터 독일이 침공한 1941년 6월까지 94만여 톤의 석유 및 석유 제품을 보냈고, 16만 톤의 망간 단괴와 2만 3천 톤의 크로뮴 광석과 여타 대량의 자원을 독일에 제공했다.2차출처 실제로 최후의 화물 열차는 독일이 공격을 개시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국경을 넘어갔다. 독일 점령 하의 유럽과 일본에 산재한 소련 간첩들은 독일의 공격 징후를 1년 전부터 계속 보고했지만, 스탈린은 이런 정보가 오히려 독일의 역공작이 아닐까하고 의심했다. 게다가 무솔리니의 삽질로 독일의 공세가 이집트, 그리스-유고슬라비아 쪽으로 확대되자 스탈린은 히틀러의 의중은 소련 공격이 아니라 수에즈 운하 확보라고 확신하고 말았다. 이때는 히틀러가 대놓고 소련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쿠데타도 유대-볼셰비키들이 수작을 부린 것이라 주장하고 있었는데도 그러했다.

히틀러는 소련 공격 준비 명령을 이미 내린 후에도 소련을 안심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낚시를 내걸었다. 전쟁 1년 전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히틀러는 몰로토프에게 "대영제국은 이미 망했소, 소련이 독이일 3국 동맹에 가입하면 인도를 나눠 주겠소."라고 제안한다. 이때 이미 히틀러는 소련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으며, 따라서 이는 단순한 낚시라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영민한 몰로토프는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독일의 동유럽 위성국 확장에 대해서 항의했다. 특히 당시 막 끝난 겨울전쟁으로 소련에 영토를 빼앗긴 핀란드몰도바를 빼앗긴 루마니아가 독일 측에 붙었다. 또한 하필이면 그날 영국 공군이 베를린을 폭격하여 몰로토프는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함께 방공호로 대피했다. 그때 몰로토프가 한 말이 걸작이다.[23]

스탈린의 문제는 히틀러를 너무나 '정상'으로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사실 영국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을 꺾어버릴 의도에서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히틀러 자신만의 논리는 사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믿기 힘들 만큼 복잡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24] 평범한 사람이라면 영국을 공격하는 편을 택하지 소련을 공격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굉장히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단지 독일에게 자원을 공급해 주고 독일 정찰기가 소련 위를 날아다녀도 자극하지만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스탈린은 독일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굉장히 고심했고, 그래서 전쟁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전쟁 1달 전부터는 독일의 침공 징후가 확실했는데도 소련군에 경계경보를 내리는 것을 주저했다. 게오르기 주코프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 국방장관세묜 티모셴코 원수와 총참모장인 자신은 계속 경계령 발동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그게 오히려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결국 하루 전인 6월 21일에야 경계령을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독일군 특공대들이 소련군 제1선 부대들의 통신망을 절단하여 명령이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스탈린은 히틀러가 정상적이라는 기본 전제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는 명분이나 우발적 충돌만 억제하면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위에서 말했던 대로 월경해서 정찰 활동을 하는 독일의 정찰기나 정찰 부대에 대한 대응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들며 소련군 상황을 정찰할 수 있었고, 이는 소련군의 초반 참패를 초래했다.

물론 스탈린처럼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벌이는 일에 도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정상이다. 비록 2차 대전 초반에 프랑스를 항복시키면서 적어도 육군은 소련 쪽으로 집중할 수 있을 듯이 보였지만 이탈리아 왕국 덕분에 북아프리카 전역이 개전했고 이탈리아군을 보조하면서 영국군을 격퇴하라고 보낸 에르빈 롬멜은 아예 공세로 돌아서 지원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히틀러는 10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희대의 또라이였고 스탈린만 그걸 모르고(혹은 믿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사실 스탈린뿐만 아니라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내각이나 프랑스의 달라디에 내각도 앞서 있었던 오스트리아 합병이나 뮌헨 협정의 주데텐란트 강탈 등에서 히틀러가 희대의 정신병자라는 걸 모르고 상식인의 선에서 판단했다가 매우 큰 엿을 먹었다.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럴 리가 없다며 현실부정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나중에 가서는 정신을 부여잡고 소련을 지휘하긴 하지만 노발대발 화를 내기도 하고 독일이 왜 침공하겠냐며 전전긍긍한 것을 보면 이전까지는 정말로 히틀러가 소련과 전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2.5.2. 부정론[편집]

스탈린은 절대로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히틀러가 단시간에 독일 민족들을 통합하고, 독일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던 독일 공산당을 완전히 전멸시킴과 더불어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순식간에 정복하는 광경을 보면서 히틀러를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개인적으로는 히틀러를 존경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도 자신과 비슷해서 남의 뒤통수를 후려갈겨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스탈린도 정치판에서 구르고 구르다 못해 대숙청까지 저지른 인간인 만큼, 히틀러에 대한 대비를 하긴 했다. 위에서 말한 '스탈린 라인'이 바로 그것.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그 이후도 잠시 동안이나마) 독일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육군력을 보유한 적수는 없었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했다고 해도 영국이 딱히 상륙할 것도 아닌 이상 독일의 패권을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독소전이 개시되어도 딱히 양면전쟁이라고 말하기 뭣하다. 게다가 소련과 겨울전쟁으로 맞붙은 다음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는 핀란드가 추축국으로 붙었으니 장기적으로 뭔 생각인지 아주 뻔히 보이는 상황. 유럽의 최강국이자 패권 국가가 된 독일을 앞에 두고, 또한 보여준 전쟁 실력을 보고, 거기에 핀란드 등의 움직임을 보고 그 의심많은 스탈린이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나 전쟁에 대한 준비를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래서 스탈린은 자신의 이름을 직접 딴 스탈린 라인을 독일 앞에다 구축하려 했다.

그런데 '스탈린 라인'은 독소전 최대의 오산 중 하나로 꼽힌다. 일단 폴란드 함락 이후에 만들어졌으니 만들 시간이 부족해서 미완성이었다. 또한 원래 폴란드 국경에 짓고 있는 방어선을 포기하고 새로 만들게 되면서 새로운 방어 작전을 대숙청 이후의 빈약한 장교단으로 짜야 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주둔하게 된 소련군들은 그동안 훈련하던 지역이 아니라 새로운 지형으로 오게 되었으니 당연히 역량이 감소했다.

만약 스탈린 라인이 계획대로 완성되었다면 독일이 맞닥뜨릴 소련은 대숙청 이후로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복구된 군대와 스탈린 자신의 이름을 딴 강력한 방어선과 그곳에 있는 패권 국가인 독일에 대응할 만한 (나름 정예) 병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원래 짓던 폴란드의 방어선까지 탄탄하게 2중으로 갖추었을 수도 있다. 스탈린 또한 전쟁을 싫어하는 인물도 아니며, 독소 불가침 조약은 누구나 있을 수 없는 조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학자들 중에서는 독소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준비된 소련의 선제 공격'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최소한 미국에게 털리는 중에 뒤치기는 했을 듯하다. 이 경우에는 서부전선에서 미국과 영국에게 털리는 와중에 양면전쟁이 개시된다.[25]

당연히 소련 입장에선 대 독일 전쟁 계획이 없다고 하면 약화된 군과 없다시피 한 방어벽을 가진 채 떠오르는 태양인 독일 제3제국과의 전쟁은 극구 피해야 할 것이다. 대 독일 전쟁 계획이 있다면 이쪽도 당연히 시간을 끌어야 한다. 많은 시간도 아니다. 3~5년 정도만 있으면 대숙청의 여파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몰로토프가 회상한 바에 따르면 스탈린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1943년에는 전쟁을 할 준비가 마련된다."라는 스탈린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스탈린이 독일에 선제 공격 가능성을 내 주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전쟁을 피한 것은 이러한 까닭일 것이다. 전쟁을 피하고 어떻게든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가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스탈린 입장에서도 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상황 자체가 대숙청을 벌여서 어쩔 수 없던 거지만.

스탈린이 보여준 우유부단함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유들도 있다. 우선 스탈린은 독일의 다른 적인 영국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그 외에 폴란드와 같은 저항 조직들이 소련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거짓된 정보를 제공한다고 우려했다. 게다가 대숙청으로 인해서 소련의 중요 인재들이 쓸려나가서 소련의 정보 작전 능력은 굉장히 축소되었으며, 소련의 정보 장교들은 만약에 스탈린의 생각에 거슬리는 보고를 하게 될 경우에는 죽을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보고가 스탈린이나 히틀러를 자극할 것을 지나치게 우려했기 때문에 전쟁 발발 가능성을 담은 보고서들을 주작질로 왜곡시켜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한마디로 스탈린이 원하는 보고서만을 보낸 것이다. 게다가 독일 측의 기만책도 스탈린의 결정을 주저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바다사자 작전이라는 영국 침공 계획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가리는 바람잡이 역할로 사용되었는데,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가 동부에서 창설된 부대는 사실은 영국의 정보부를 기만하기 위한 것이며, 독일은 바다사자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영국 폭격기와 정찰기가 닿지 않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정보를 소련 측에 보란 듯이 알렸다. 게다가 1941년 6월의 신문 기사에는 선전 장관이였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영국 침공이 임박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물론 괴벨스는 배포된 신문을 바로 마치 소련이 보란 듯이 회수해 버렸는데, 이 행동의 목적은 이것으로 자신들이 정말로 영국을 공격하려 한다는 역정보를 흘리기 위해서 이러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괴벨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중요 군사 정보를 실수로 흘린 것처럼 위장하여 나치당 내에서 불명예를 얻은 것처럼 행동하였다.

게다가 유고슬라비아 침공그리스 침공 또한 바르바로사 작전을 숨기는 데 기여했다. 이 침공은 그동안 동부에서 독일의 새로운 부대가 편성된 이유를 그럴 듯하게 설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침공 자체를 연기시킨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원래 독일의 계획이었던 1941년 5월 15일에 독일이 침공할 것이라는 올바른 정보를 제공했던 정보원들은 독일군이 자신들이 침공한다고 이야기했던 날에 공격하지도 않았으며 공격을 감지할 만한 어떤 낌새도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러자 스탈린은 정보원들을 신뢰하지 못하였다. 6월 하순이 되자 그동안 보고되었던 수많은 위험 징후가 거짓으로 판명되면서 정보원들은 더 이상 스탈린과 그의 참모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스탈린이 전략적 관점에서 허를 찔렸다는 사실이 보다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그리고 1년 전부터 리하르트 조르게를 비롯한 스파이들이 정보를 보내왔다는 것 때문에 스탈린이 고집이 세고 무식한 지도자로 보이지만 저 말은 다르게 생각해보면 스파이들이 1년 동안 보내왔던 정보들은 거의 대부분 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나폴레옹러시아 원정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를 침공하려고 했을 때에는 러시아의 라스푸티차동장군을 우려하여 봄, 아니면 아무리 늦어도 초여름에는 러시아를 침공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발칸 반도에서 이미 시간을 허비해서 봄과 초여름이 지나 한여름이 되어 버리면 독일군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으로 판단하였고, 한여름이 되자 스탈린은 "적어도 이번 해에는 들어오지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독일군이 소련 내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안심해서 마음을 놓아 버린 것도 상당한 영향이 있었다. 게다가 1941년의 소련의 육군과 공군은 이제 막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조직과 지휘부, 장비, 훈련 병력 배치, 방어 계획 모두가 바뀌던 중이었다. 말 그대로 이 당시에는 설령 공격을 결심했다고 하더라도 공격을 시도한다면 소련은 반드시 파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스탈린에게는 시간을 끄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허나 운이 나쁘게도 히틀러는 자신의 군대가 최상의 전력에 근접하고, 맞닥뜨리는 적이 가장 취약한 시점을 선택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독일의 선제공격은 비교적 탁월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탈린의 내숭과 앞날을 내다본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최고의 상황을 적이 마련해 준 것이다. 언젠가 한판 붙어야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 선제 타격은 말 그대로 필연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숙청이라는 희대의 삽질로 자산을 잔뜩 날려먹긴 했지만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스탈린은 언젠가 한판 붙을 것을 예상은 하고 있었고 나름 대응하려고 했다. 그러나 독일의 노련한 교란 작전, 그리고 독일군이 라스푸티차를 우려하여 여름에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히틀러의 생각을 파악하지 못했던 스탈린은 방심했고, 대숙청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독일에게 최대한 배려하는 길을 택했으나 이는 커다란 재앙이 되었다.

3. 참전국[편집]

3.1. 연합국[편집]

3.2. 추축국[편집]

4. 경과[편집]

문서 참조.

5. 전쟁이 남긴 것[편집]

5.1.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잿더미가 된 두 나라[편집]

거의 60년 동안 전 세계에 참사들이 더 쌓인 뒤에도 여전히 소련인들이 겪었던 고통을 그저 듣기만 해도 상상력이 마비되어 보잘것없게 된다.
-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385

5.1.1. 소련[편집]

  • 소련 측 피해

A: 군인 피해

동원군인 총수

29,574,900

동원군인 총수(기타 정부부처 포함)

34,476,700

총 손실(사망/전쟁포로/행방불명)

11,444,100

전사, 부상으로 인한 총 사망자 수

6,885,100

행방불명/전쟁포로 총수

4,559,000

1941~1945년 사이의 사망자 총 수

8,688,400

의학상

사상자 총수

18,344,148

부상/심리장애

15,205,692

질병

3,047,675

동상

90,880

B: 민간인 인명 손실 추산

소콜로프(Sokolov)

민간인 사망자 총 수

16,900,000

코롤(Korol)

민간인 사망자 총 수

24,000,000

코즐로프(kozlov)

인구학적 총 손실

40,000,000

쿠르가노프(Kurganov)

인구학적 총 손실

35,500,000


소련은 전쟁 중 공식적인 수치로 2,900여만 명이 사망했으며[26], 이는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2차 세계 대전 사망자 5,000만 명의 60%에 달하는 수치다.

소련에서 동원된 남녀 3450만 명 중 약 84%가 죽거나, 다치거나, 사로잡혔다. 민간인 약 2천만 명, 군인 약 1,128만 명이라고 하는데[27] 이 수치라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1941년 6월 22일부터 베를린이 함락되어 사실상 독일이 끝난 45년 4월 30일까지 '''하루 평균 민간인 약 1만 4천명, 군인 6500명이 죽었다. 하루 평균 2만 명이 넘는 수치다.

역사학자 제프리 A. 호스킹(Geoffrey A. Hosking)에 따르면, 소련인은 높은 사망률로 인해, 1940년대 말의 젊은이는 적었고, 1939년 이후 소련이 예측한 인구인 4500만-5000만 명보다 적을 정도로 전체 손실은 높았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여초 현상이 대단히 심각하게 발생했는데 종전 후 소련 인구 중 10대 후반~40대 남녀 성비가 4:7이었다, 인구손실은 1950년대 베이비붐으로 대강 해결했지만[28] 영향이 꽤나 오래갔으며 1930년대-40년대에 출생한 사람 가운데서 한창 자랐을때 아버지 없이 자란 경우도 많다. 물론 오랜시간이 흐르며 여초현상은 대강 해결되었지만 음주문화의 영향으로 현재도 러시아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여초국가이다.

게다가 소련은 전쟁으로 모스크바 서쪽의 거의 모든 기간 설비와 공업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농지와 마을, 인프라의 파괴도 심각했다. 도시 1,710개, 촌락 70,000여 개, 2,508개 교회, 31,850개 산업 시설, 4만 마일(64373.76km)의 철도, 4,100개 철도역, 4만 개의 병원, 8만 4,000개 학교, 4만 3,000개 도서관이 초토화되었다. 집을 잃은 인원은 2,500만 명 정도였고, 약 국부의 1/3 이상이 손실되었다. 가히 멸망되지 않은 것이 정말로 기적인 나라 같다.

독일은 소련에서 민간인 학살, 강간을 넘어 아예 그들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절멸 시키려고 했다. 독소전쟁 동안 민간인만 하루 평균 1만 4천명, 도합 2천만명 이상 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했고, 심지어는 학살된 사람들이 한 곳에 묻혀서 해골과 시체로 지층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독일의 전쟁범죄는 심하고 차원을 달리 했다. 이는 단순히 슬라브 민족을 지배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 모두를 없애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소련의 여성들이 독일군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이런 소련군의 범죄를 다루는 독일영화 베를린의 여인에서는 "독일군이 소련에서 한 일의 1/10만 소련군이 해도 독일인은 다 죽는다"는 대사가 있을 정도다.

5.1.2. 독일[편집]

* 독일 측 피해

독일 국방군 인명 손실(1939년~1945년)

영구 손실(사망, 실종, 영구 장애)

1939년 9월 ~ 1942년 9월 1일

922,000(총 인원 중 14%)

1942년 9월 1일 ~ 1943년 11월 20일

2,077,000(총 인원 중 30%)

1943년 11월 20일 ~ 1944년 6월

1,500,000(추정 인원)

1944년 6월 ~ 11월

1,457,000

1944년 12월 ~ 1945년 11월

2,000,000

총 손실

1945년 4월 30일까지 총 손실

11,135,800
(부상자 포함,
동원된 총 병력의 75%,
1939년 당시 남성 인구의 46%)


나치 독일에게는 이 전쟁은 말 그대로 파멸로의 행진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총 사상자 1,348만 명[29] 중 80%인 1,075만 명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사상당하거나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추산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약 3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독일군 전사자 및 기타 사망자 중에 280만여 명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포로 수용소에서 죽었다.

후술되는 전쟁범죄 항목에 소련측 만행도 독일이 까발린게 아니라 나중에 미국,영국의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것들이며 소련측의 만행은 정작 독일도 굳이 꺼내려고 하지 못했던 민간사안이었던만큼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채 묻어갔기에 조사하면 더 나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5.2. 초강대국으로 등극한 소련과 스탈린 신격화[편집]

종전 후 소련은 초강대국이 되었으며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는 계기가 되었으며 소위 냉전의 결과물이지만 세계를 반분한 초강대국의 위상을 인정받았다. 또 전쟁의 결과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수복하고 독일 및 추축국에게서 일부 영토를 할양받아 병합했다. 그리고 승전국의 위치로 인해 국제연합에서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승전을 이용해 자신을 완벽히 신격화하는 데 성공했다.심지어 초반의 패배도"스탈린 동지께서 저 얍삽한 나치놈들을 함정에 빠뜨린것"으로 포장할정도. 스탈린의 공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갈린다. 스탈린 격하 운동을 주도한 니키타 흐루쇼프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승리했다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역할을 매우 축소했다. 스탈린의 독재 체제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말할 때가 많다. 그러나 대체로 러시아인들은 스탈린이 초반에 여러 심각한 병크를 저지르기는 했으나 소련의 승리에 기여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게오르기 주코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스탈린의 고집으로 인한 여러 병크들인 대독 경계령 발동 금지, 키예프 후퇴 불허, 모스크바 공세 이후 무리한 반격 작전을 지시하여 전력 낭비를 야기한 것들을 나열하기는 했지만, 여러 모로 볼 때 스탈린이 독소전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것은 틀림없다고 밝혔다. 특히 전후 처리에서 영미와 유리하게 흥정을 하여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나설 수 있게 된 것은 스탈린의 공이 분명했다. 물론 실제로 전쟁에 참전한 장성들에게 돌아가야 할 공들을 스탈린이 가로챈 것은 사실이며, 정치적 야심을 의심받은 주코프는 한직을 맴돌았다.[30] 전쟁 전부터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스탈린은 전쟁 후에는 여기에 군사적 커리어까지 더한 완벽한 위대한 영도자로 숭배 받게 됐으며 그의 이름은 소련에서 신과 다름없게 되었다.

5.3. 독일의 분단과 영토 상실[편집]

나치스는 비단 자신들만의 정권뿐만 아니라, 역사적 독일이 동유럽과 가지고 있던 깊은 관계와 유산마저 한꺼번에 싸그리 불태워 버려 아예 민족 국가로서의 독일의 정체성과 영토적 기원 또한 한방에 영원히 같이 말아먹었다. 당장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에도 유지했던 동프로이센과 동부의 몇몇 주를 영구적으로 상실했다. 전승 국가인 소련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집어삼킨 폴란드의 동쪽 영토를 그대로 차지하고, 대신 폴란드를 달래기 위해서 오데르-나이세 선을 국경으로 설정하여, 독일의 동부 영토를 폴란드에 넘겨 주었다. 이에 따라 오데르 강 동쪽의 독일 영토 서프로이센, 슐레지엔, 포젠, 포메른동프로이센이 폴란드 영토로 귀속되고, 이 지역에 거주하던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추방당했고 남은 소수의 독일인들은 폴란드계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동프로이센의 중심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는 소련의 칼리닌그라드가 되었다. 이 중 쾨니히스베르크, 슈테틴, 스톨프 같은 도시들이 위치한 동프로이센, 동부 포메라니아 지방 같은 곳은 역사적으로 중세부터 독일계 국가의 땅이었거나, 그단스크 같이 딱히 한 나라가 독점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하기 힘든 지방도 적어도 독일계 상인, 지식인들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지방이었다.

직접적으로 폴란드에게 영토를 뜯긴 것 뿐만 아니라 애초에 2차 대전 자체의 서곡을 장식한 현대 체코의 주데텐란드 지방, 중세 독일기사단령 시절부터 독일계 국가들이 지배하거나, 적어도 사회-경제적 엘리트로 군림했던 쿠를란트 등의 발트 3국, 역시 수백년 동안 독일인들의 집중 이민으로 큰 독일계 영향력이 있던 트란실바니아의 독일인 등,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독일인들이 동방으로 진출하며 일구어 왔고 문화적, 사회적 영향력을 짙게 발휘했던 지역 모두에서 일괄적으로 독일인들이 싸그리 추방당하여 종전 이후의 독일은 아예 자신들의 지정학적 역사와 뿌리째 단절돼 버린 절름발이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전후 독일은 철저히 나뉘어, 상당한 수의 독일계가 살고 있고 나치 독일과 합심하여 연합까지 한 오스트리아는 아예 다른 살림을 차리면서 나가게 되었고 두번이나 같이 싸웠다가 두번이나 다 졌는데 안 나갈리가 독일 본토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다. 온 유럽을 만신창이로 만든 대가로 본인들도 갈래갈래 찢기게 된 것. 동서독 분단 이후 동유럽 공산권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던 서독은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지 않고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의 국경선을 주장했으나, 1970년대 동방정책 과정에서 폴란드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이 주장을 철회하였다. 결국 1990년 독일의 재통일시 구 영토를 포기하기로 결정하여 이 지역을 영구 상실하였다.

결국 독일은 패전 이후 소련, 미국에 의해 국가가 분단되어 서독동독이 45년간 대립하는 초유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나치와 전혀 관계 없는 1차 대전을 넘은 이전 프로이센의 군사적, 역사적 전통마저 굉장히 껄끄러워 하는 현대 독일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컴플렉스는 결국 주로 독소전이란 역사적 경험이 근간에 자리잡고 있다.

5.4. 전쟁범죄[편집]

전쟁범죄 측면에서도 독소전은 최악을 달린다. 점령 지역에서 소련군 포로와[31] 주민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학살을 자행했고, 그 지역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 역시 꾸준히 자행되었다. 게다가 아인자츠그루펜은 똑같이 학살과 전쟁범죄를 저지른 독일 국방군무장SS 사단들에게도 '독일군의 수치' 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다. 물론 그걸 열심히 도와주고 자기들도 열심히 똑같은 짓을 하고 다닌 국방군이나 무장친위대가 할 말은 절대 아니지만. 이렇게 처절한 전쟁범죄 때문에, 지금도 벨라루스를 비롯한 동유럽 일대에는 전쟁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해로 지층이 이루어진 곳도 있다.

물론 소련군 또한 전쟁 초반부터 독일군 포로들에 대한 잔혹한 보복이 있었으며[32] 소련이 주도권을 잡고 독일 국내에 진입한 후에는 지휘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아예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다수의 약탈 및 강간과 같은 보복성 범죄 행위가 발생하였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 모든 희망을 잃고 항복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독일군이 마지막까지 저항한 여러 원인 중 하나로, 소련군을 피해 민간인들과 잔존 병력이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한 서방 연합군 점령 지역으로 탈출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실제로 소련에 포로로 잡힌 독일군의 사망률은 서방 연합군에 잡힌 포로의 사망률보다 훨씬 높았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점령 초기에 제대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0년대와서도 소련의 포로 대우가 독일과 비교해도 굉장히 나빴다는 내용의 주장이 미국, 영국, 독일 등의 학자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며 어느 정도의 논란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은 참고할 만 하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도 부정하기도 하지만 '그래 맞아, 하지만 나치 독일놈들이 러시아에서 벌인 학살과 온갖 약탈 등에 견주면 저런 포로 대우는 차라리 낫다.'나 싸그리 찢어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걸?같은 방식의 반발적인 태도도 많다. 사실 전쟁 기간에도 독일 민간인들이 전쟁의 고통을 호소할 때 영미연합군은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는 묘사도 있는 반면 소련군은 "먼져 쳐들어 와서 우리 가족들을 다 죽여놓고 뭐가 어쩌고 어째? 개소리 집어쳐!" 라는 반응도 많았다. 그럼에도 소련의 약탈들이 나치의 약탈에 비해 잘 조명되지 않았던건 소련의 약탈들은 대부분 조직적이라기보단 우발적이고 감정적으로 발생한 것들이 많았으며,나치의 학살과 약탈들의 목적도 규모도 더 잔혹하고 대부분의 학살이 공식적인 명령 체계들로 인해 수행되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기 힘들었던 측면도 있다.[33]

가령 스탈린그라드 전역에서 항복한 9만명 가량의 독일군 포로들은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포위 도중 질병, 굶주림에 시달리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부상병들이 많았다. 상처 악화, 악화된 전시경제로 인한 배급 부실, 학대, 특히 1943년 봄 유행한 티푸스로 대부분이 사망했다. 이 포로들 가운데 살아서 독일로 돌아온 자는 6000여 명에 불과했다. [34]

  • 바르샤바 게토 봉기

  • 바르샤바 봉기 당시의 학살

  • 바비야르 학살

  •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 카틴 학살

  • 홀로코스트

  • 페오도시야 학살 - 1941년 12월 29일 소련 해군 보병대가 크림 반도 페오도시야에 상륙해 독일군 병원을 점령, 포로 160명을 죽인 사건. 저체온증으로 죽을 때까지 중상자들에게 물을 쏟아붓거나, 창문으로 내던지고 심지어 성기를 훼손시키는 등 끔찍하게 죽였다. 1983년, 서독 라디오에서 이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다.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자서전에서도 이 사건을 목격한 장병의 증언담이 서술된다.

  • 네멜스도르프 학살 - 소련군이 독일로 진입하면서 동프로이센 국경에 있던 굼비넨 남서쪽의 네멜스도르프 마을 주민 72명, 프랑스 및 벨기에 포로 50명을 학살한 사건. 나중에 독일군이 마을을 탈환하면서 발견됐고, 괴벨스가 소련군의 악랄함을 선전하기 위해 프로파간다로 사용했다. [35]

  • 폴란드 주민 강간 - 독일과 소련 양국이 저지른 문제로 독일의 경우 점령기간 동안 적지 않은 수의 폴란드 주민들이 동원되거나 학살당했다는 사실은 잘알려진 상황이지만 독일 패망 시기 폴란드로 들어온 소련군이 폴란드 주민들을 강간하거나 약탈한 사건도 규모가 크다. 당연히 폴란드의 역사책과 교과서엔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나 러시아에선 침묵하는 중이다.

  • 부다페스트 약탈 - 부다페스트 공방전이 끝나고 소련군과 루마니아군이 저지른 강간, 약탈 사건.

5.5. 생태계[편집]

독소전쟁은 동물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람만 죽은 것이 아니었다. 700만 마리의 말과 1,700만 마리의 염소와 2,000만 마리 돼지와 2,700만마리 양도 식량 용도로 도살되었다. 야생 동물들도 영향을 받았다. 1939년부터 시작된 소련의 서부 진출부터 시작하여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부터 시작된 소련의 서부 공세로 인해 러시아와 동유럽의 "킬링 존" 지역에 있던 늑대 무리들은 유럽 내로 도망을 갔고, 1968년 영국 해협까지 진출하면서 점차적으로 서유럽으로 이주하며 광견병을 확산하는 데 일조하였지만 그 결과 서유럽의 멸종직전에 있었던 늑대들이 다시 개체수가 복귀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36]

5.6. 의의[편집]

독소전쟁 초 처칠을 포함한 연합국 지도자과 추축국 지도자는 소련이 기껏해야 3개월 안에 나치독일에게 패배할것을 예상하였다. 그러나 쉽게 무너질것처럼 보인 소련은 나치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고 급기야는 반격하여 마침내 유럽전선의 마침표를 찍어 소련의 국력이 제정 러시아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 전쟁은 국가의 모든 기능을 투입한 총력전이라는 단어를 현실화한 전쟁이다.

태평양 전쟁과 함께 2차 세계 대전 전선 중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전쟁이기도 하다. 한동안 유럽 본토에서는 서부전선은 섬에서 버티는 영국과 스위스 등의 중립국을 제외하고는 추축군이 다 장악해 버렸고, 북아프리카를 제외하면 동부전선만이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일개 야전군 수준의 수만 명이 맞붙었던 서방의 엘 알라메인 전투 승리나 동부전선의 승패가 거의 결정된 후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제2차 대전의 전환점이었다는 서방 연합국 측 주장에 대해 코웃음을 치고 있다. 주코프 회고록에서도 전후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연합국 지도자 간 회동에서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엘 알라메인 전투가 전쟁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하자 자기는 화가 나서 그것을 반박했다고 나와 있다.

1980년대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전쟁사를 연구하는 거의 유일한 기관인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에서는 냉전을 의식해 소련군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기 위한 서술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소련군의 승리는 추운 겨울이나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 때문에 어부지리로 얻어졌다는 식이다. 물론 추운 겨울은 병력의 운용에 지장을 주지만 독일군만 추위를 타는게 아니라는걸 간과하고 있다. 결국 추위떄문에 졌다는건 상대는 거기에 대비했지만 자신들은 거기에 대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히틀러의 오판은 맞는 말이지만 독일군 내에서 히틀러만 오판을 저지른것도 아니고 그런식으로 따지면 독일의 초반 승전의 공로를 스탈린의 트롤링으로 돌려야할 판이다. 이런 설명은 소련군의 기량 상승이나 2천만에 달하는 희생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37] 다만 무조건 그렇지만도 않은 게 소련군의 손실 부분은 오히려 현대 사가들이 주장하는 1천만 명 사상보다 좀 더 낮춰서 잡았고, 1944년 이후로는 소련군에 대해 칭찬 일색이다.[38] 다만 독소전쟁 초반부에는 아무래도 소련군을 폄하하는 서술이 많다. 그러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나치독일 전력 80%를 발라버린 소련군의 기여를 인정하는 추세다.

어쨌든 제2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 승리에 대한 소련과 소련군이 큰기여른 했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5.6.1. 승리의 날[편집]

이후 소련과 소련에서 분리된 러시아, 우크라이나CIS 국가들은 매년 승리의 날(День Победы: 덴 빠볘디)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승리를 기념하며 수십만 명의 군사들과 신형 무기들을 공개하고 국력을 과시하는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부터는 독일의 정상들까지 초청받고 있다. 일단 현대 독일인들도 나치와 히틀러를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에 나치를 물리친 것을 함께 기념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이 날에 대한 자세한 것은 승리의 날 문서 참조.

"소련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 날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말에 따르면, '소련 인민의 삶에서 '영광의 순간'이 되었다. 이는 소련 역사상 사람들이 조국의 승리와 자유를 위해 감당한 상실의 의미가 명약관화했던 유일한 시기다." 역사학자이자 라디오 방송 '베스티 FM'의 정치 평론가인 안드레이 스베텐코의 말이다.

사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소련 시절보다 더 성대히 기념하는 기념일이다.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고, 현대 러시아인들의 국가적 자긍심, 긍지의 원천이다. 단순히 러시아 민족주의로 과거 초강대국의 승리를 추억하는 추억팔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피할 수 없는 적과의 생사를 건 결전에서 승리했고, 아주 큰 희생을 치르며 승리했다. 상상 이상의 아주 큰 피해를 입었고, 거의 패배 직전까지 갔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피해에도 무너지지 않고 반격하여 기적적으로 역전해 결국 적의 수도를 함락시키며 완벽하게 승리했기 때문에 더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감격스러운 승리가 되었다.

이 날은 많은 러시아인에게 특별한 날이다.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른 국가적 총력전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상실을 겪지 않은 가족은 러시아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며,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도 아직까지 일부 살아 있다. 5월 9일이 조국 러시아에 자긍심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고 인정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세계적으로 봐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고 러시아 역사를 봐도 역사상 비견할 예가 없는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나폴레옹을 막기는 했지만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고 크림 전쟁부터 열강에 얻어맞기만 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에 압도적으로 대조국전쟁에서의 승리라고 답한다.

소련 시절 붉은 광장을 지나는 군사 퍼레이드는 10월 혁명 기념일(11월 7일)에만 매년 실시되었고 승리의 날에는 1965년, 1985년, 1990년에만 실시되었다. 스탈린 시대와 흐루쇼프 시대에는 공휴일도 아니었다. 역사학자인 데니스 바비첸코에 따르면, 이오시프 스탈린과 그 사후 소련을 이끈 니키타 흐루쇼프는 대조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사령관들이 정치적으로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때문에 군사령관들과 참전용사들의 공적을 치하하는 일에 인색했다. 1965년에야 승전기념일은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군사 퍼레이드가 실시되었다. 승전기념일을 국가적 차원에서 전국적 규모로 성대하게 기념할 수 있도록 한 최초의 소련 지도자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였지만 그의 재임기에도 군사 퍼레이드는 혁명 기념일에만 매년 실시되었고 승리의 날에는 1965년에만 치러졌다. 소련 해체 이후 10월 혁명 기념일은 없어졌고 1995년 승리 50주년 퍼레이드 이후 매년 5월 9일에만 군사 퍼레이드를 실시한다.[39]

6. 연표[편집]

6.1. 1941년[편집]

6.2. 1942년[편집]

6.3. 1943년[편집]

6.4. 1944년[편집]

6.5. 1945년[편집]

6.6. IF 시나리오[편집]

일부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독일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기회가 몇 번 존재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미 시작부터 정해진 승패가 아니라 진짜로 결과가 바뀔 뻔한 적이 매우 많다. 사실 전쟁이란 것이 객관적으로 유리해보이는 쪽이 이기는 게 절대 아니며 간단한 예시로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에 영프가 겁을 먹고 소심하게 굴지만 않았다면 2차 세계 대전은 1년도 안 걸려서 끝난 작은 전쟁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항상 독일이 소련에게 승리한다는 것이 아닌 이미 독일이 밀리기 시작한 후에서의 국제 정세에 관한 시나리오들도 빼놓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독일이 방어전으로 나왔다든가, 티토를 암살했다든가 반대로 소련이 선공을 가했더라든지 말이다. 이런 경우들은 보다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라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꽤나 진지하게 토의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더라면?
→ 말이 필요 없는 문제다, 그리고 이게 가장 독일로서는 희망적인 경우. 그랬더라면 히틀러와 제3제국의 목숨은 몇 십 년 더 연장되었을 것이고 오히려 영국이 먼저 소련을 공격했을 수도 있다.[40] 그렇게 소련이 추축국으로 참전했다면 붉은 군대는 이란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인도까지 진격하여 뉴델리에 T-34가 질주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41] 물론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참전하지만 당장 독일-일본 꺾는 데 고생하던 연합군이 소련까지 상대할 수 있었을까? 설령 소련이 추축국이 되지 않는다 해도 동유럽에 가 있을 독일군이 서부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 서방 연합국에게는 심각한 부담이다. 만일 존 키건 교수가 말한 대로 히틀러가 원래라면 소련 침공에 동원했었을 병력들을 중동 전선으로 투입했더라면 독일이 유럽과 북아프리카서아시아 일부를 완전히 장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당시 독일 해군력을 생각한다면 미국 본토는 물론이고 영국도 건드리지 못하는 수준이라 일본과 교류는 무리고 일본은 역사처럼 미국에 패했을 확률이 크다. 그리고 일단 일본이 패하면 그 전력을 유럽으로 돌려서 독일에 핵을 떨어뜨리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일본은 미국 혼자서도 꺾을 수 있는 상대고 연합군의 전력이 유럽전선으로 집중되면 실제 역사보다 더 오래 버틸 뿐 결국은 제공권 상실->핵투하로 이어질 것이다. 소련의 항공기 제작기술은 형편없기에 방공전에서는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랜드리스가 없었다면?
→ 소련 학자들과 군인들도 인정한 부분인데 미국의 어마어마한 양의 랜드리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소련은 도저히 독일을 몰아낼 방법이 없었다. 산업 시설들이 시베리아로 이동되었기에 각종 무기류만이라면 소련도 충분히 생산이 가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곡창 지대는 이미 상실한 상황이었기에 미국의 식량 지원이 소련 자체의 능력으로는 무기를 만들더라도 전선까지 보급할 수송력도 없었다. 이 상태에서 소련은 독일에게 밀려 아시아 러시아로 쫓겨났을 것이며 국가 역량을 모두 쏟아내 지속적인 게릴라전을 펼치며 우랄 산맥 너머에서 버티는 것은 가능했겠지만 대규모 공세를 펼쳐 독일군을 몰아내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미국 정치권의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 소련에 대해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면 실제 역사에서처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까지 도착한 뒤 뻘짓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소련은 현상유지면 모를까 독일군을 몰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레닌그라드의 완전 점령
→ 리처드 오버리의 명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에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주제. 약 100만의 북부집단군이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치르는 대신 레닌그라드를 완전 점령한 이후 모스크바 전투 시 북부에서 양익 작전을 실시했거나 무르만스크, 아르항겔스크 등의 랜드리스 북극해 항로를 마비시켰다면 41년의 소련은 도미노처럼 무너졌을 것이다. 상기 서적에서는 러시아의 옛 수도의 결사 항전이 새로운 수도의 목숨을 살렸다.라는 평을 하고 있을 정도.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
독소전쟁의 결정적 전환점 중의 하나이다. 모스크바 전투를 가장 상세하게 다룬 서적인 '세계사 최대의 전투'에 따르면 스탈린은 모스크바 점령에 대비하여 시가전을 준비하는 등 독일군이 모스크바 점령 이후에도 계속해서 피를 보았을 것이 확실하나, 전쟁은 짧아도 몇 년은 더 끌었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모스크바의 상실로 유럽 러시아의 모든 교통로가 마비되어 보급이 절단 나는 상황이 왔었을 것이다. 물론 독일군도 보급선 등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모스크바 점령 후 보급이 절단된 소련 주요 도시들로 진격을 계속했더라면 말 그대로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래도 소련이 바로 항복했었을 가능성은 없으나, 스탈린에겐 히틀러와의 강화를 생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42] 또 무엇보다도 일본이 모스크바가 넘어가는 것을 보고 소련 침공을 감행했을 것이고 진주만 공습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참전도 뒤로 늦추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모스크바 함락 이후 소련 서부 지역 대부분이 독일에게 점령되고 일본이 몽골연해주를 기습했다면 전세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른다. 추축국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미국이 참전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문제는 그게 언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참전하기로 마음을 굳혔을 즈음엔 이미 독일과 소련 사이엔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영국이 포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미국은 진주만 공습 이전에도 참전하기로 약속을 했기에 시기가 늦춰지기는 했어도 참전했을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승전했다면?
독소전쟁의 결정적 전환점 중의 둘이다. 모스크바 전투 다음으로 중요한 전투인 만큼 그에 대한 파급력도 상당했을 것이 확실하다. 당시 일본은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 소련을 공격하겠다고 독일과 밀약을 체결한 터라 일본이 독소전에 참전하여 연해주와 북사할린, 캄차카 반도 등이 공격받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미국과 이미 전쟁 중인 터라 소련과의 전면전은 무리고 극동지역의 소련군을 묶어두는 수준에서 그쳤을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독일에게는 굉장한 이득이다. 게다가 독일이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여 소련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면, 소련에게 매우 중요한 바쿠 유전의 상실로 소련군은 전쟁 말기의 독일군이 겪었던 연료부족으로 인해 각개격파당하는 것을 피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다만 랜드리스로 연료를 더 뜯어내는걸로 때웠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존재도 지속적으로 위협받았을 것이며 동부전선의 붕괴는 못해도 2,3년 뒤로 미루어졌을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6군이 성공적으로 철수 했다면?
→ 앞의 가정과 함께 많이 의논되는 이야기이다. 6군이 독일 정예군의 결정체로서 이들의 전멸이 독소전쟁이 분기가 되었을 정도로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코카서스에는 이들보다 규모가 훨씬 큰 A집단군 역시 소련군에게 포위될 위기를 겪었다. 6군의 저항 덕분에 코카서스의 A집단군이 철수 할 수 있어서 남부전선 전체가 붕괴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가장 희망적인 가설은 A집단군 철수 이후 다시 구조작전이 시작되어 남은 6군이 성공적으로 철수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시기에 소련의 포위망이 엄청나서 병력은 몰라도 장비회수에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남아 전선에 다시 투입될 병력자체만으로도 독일군 역량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만약 장비들 역시 운좋게 회수하였다면 독일군 역량 회복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쿠르스크 전투의 경우
→ 앞의 2개의 가정에 비해선 파급력이 낮은 편이지만 이 또한 매우 중요한 편이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이 승리함으로써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후퇴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전선에 상륙한 병력들도 북진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노르망디 상륙작전바그라티온 작전이 이루어짐으로 독일이 패망했다. 그런데 여기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 이후 독일은 방어전으로 전환하여 동쪽에선 소련군을 막아내면서 남부에선 이탈리아 방어에 더 치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과 바그라티온도 없었던 일이 되었을 것이고 당시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했던 게릴라들도 싸그리 청소함으로써 독일의 목숨이 몇년 연장되었을 것이다.[43]

영국을 완전히 항복, 종속시킨 후 침공했다면?
→ 이건 앞의 것들보다는 좀 가능성이이 적은게 애초에 영국을 항복시킬 힘이 없었기 떄문. 그러나 IF시나리오이고 역사라는 특성상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현상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최소한 영국이 독일의 패권을 인정, 협조하게 되었다고 가정하고 영국의 막대한 해군력과 식민지 상당부분이 독일의 영향권에 간접적이나마 들어갔다고 치자. 사실 독소전쟁의 개전부터 승패가 갈렸다고 볼 수 있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레닌그라드 전투 시점까지 독일은 영국과 싸우느라 별로 에너지를 소모하지도 않았으며 비록 해전과 공중전은 계속 발생했지만 동부전선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규모였다. 독일이 항복한 영국의 도움을 받고 공군력과 해상 보급도 동원했다면 안습한 보급이 상당부분 나아졌을 것이고 속전속결로 모스크바나 스탈린그라드 정도는 점령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점령한 후에 영국도 없이 유럽에 홀로 남겨진 소련이 강화를 결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소련이 초반에 패배한 결정적 이유가 '히틀러 그놈이 설마 영국이 아직 건재한데 전쟁을 또 벌일까?'였던 걸 보면 영국이 항복한 시점에서 소련은 최고 경계 상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초반부터 그렇게 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전 유럽 점령은 아니더라도 모스크바와 아르항겔스크, 스탈린그라드를 잇는 광활한 지역과 중앙아시아 일부도 독일군의 공격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영국이 이미 독일의 아래로 들어간 마당에 미국이 유럽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상황까지 왔다면 미국은 독일 중심의 유럽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인정하고 독일과 공존하기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44] 그렇게 영국을 굴복시킨 후 소련 침공도 순조롭게 이루어짐으로써 유럽 일대를 제패했더라면 당신들의 조국이 현실화됐을지도.

일본 제국이 미국 대신 소련을 공격했다면?
→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소련을 공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심리적 영향과 소련에 타격은 주었겠지만 일본군의 역량을 생각해본다면 궁극적으로는 적백내전 때처럼 북 사할린 및 연해주, 더 나아가 봐야 바이칼 호 이동 지역만 초토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독소전이 시작된 이후에도 극동에는 최소 30개 이상의 사단이라는 대규모 병력[45]이 배치되어 있었고 일본 육군은 소련까지 상대할 여력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독일처럼 불가침조약을 무시하고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극동에 배치된 병력을 잡아두는게 최선이고 그 이상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군이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아무리 주공이 아니여도 막으려고 지휘관과 병력을 보내긴 해야 할 것이고 이러면 소모품, 전차, 중화기, 항공기 같은 보급품도 같이 보내줘야 하는데 전선이 많고 늘어지면 보급품이 더 빨리 소모한다. 또한 동부전선에서 시베리아 너머에서 온 정예 부대들[46]이 엄청난 전공을 세운 것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독일군에게 많은 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독일군의 목적인 소련군을 잡아두는걸로도 모스크바 방위가 강화되지 못하여 모스크바가 심대한 타격을 받던가 심지어는 함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항복했더라면?
→ 만일 그랬더라면 중국의 광대한 인력과 자원이 일본 본토의 자본과 협력하게 되면서 수십 만의 상비군과 물자가 시베리아를 향해 쏟아져 올지 모른다.[47] 이 경우에 시베리아 주둔군에서 군대를 빼 오기는커녕 오히려 해당 지역에도 군대를 투자해야 할지도 모르고 이 경우에는 정말 소련에게는 암울한 시나리오가 진행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시나리오대로 가면 진주만 공습이 생길 이유가 없어진다. 미국은 아시아 전역과 유럽 전역을 장악한 두 나라를 상대로 무리해서 전쟁하기보다는 독일과 일본 중심의 질서를 인정하고 3강 체제로 나아가려고 했거나 최소 아시아-태평양에서 자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일본을 집중적으로 상대하느라 직접 상대하기 영 좋지 않은 독일의 패권은 묵인하였을 것이다.[48]

에니그마를 해독하지 못했다면?
→ 연합군이 만약 독일의 암호였던 에니그마를 해독하지 못했었다면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결국엔 미, 영, 소 삼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게 하는 결말을 불려왔을 수도 있다. 단순한 상상력만이 아닌 게, 영국으로 향하는 보급선을 죄다 격침함으로써 섬나라인 영국은 엄청난 물자난에 시달렸을 것이고 결국엔 독일과 강화했을 수 있다. 이 시나리오로 간다면 에르빈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단에게 연료를 보급할 수 있게 됨으로써 카이로바그다드를 거쳐 히틀러가 추축국에 동조시키려 안달이였던 친독성향의 중립국인 터키를 가입시키고 원래 목표지점을 점령하고 스탈린그라드까지 가게 됨으로써 소련군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 가능하며 소련은 유보트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이란 루트나 태평양 루트로의 랜드리스를 받을 수는 있겠으나 그 보급이 늦어지는 약점이 생기며 영국이 결국 독일과 강화하여 전쟁에서 발을 뺀다면, 원래대로라면 미국, 영국과 상대했을 병력들이 죄다 동부전선에 투입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고 그만큼 소련의 부담도 가중되었을 것이다. 랜드리스야 어차피 독일 해군이 현실적으로 건드리기 어려운 루트로 운영되기도 하였으니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불리한 것은 확실하며 소련과 독일의 단독 싸움에서 독일이 소련을 압도하기는 힘들었겠지만 굉장히 유리한 상황에서 협상을 맺을 정도가 되었을 수 있다.

독일 국방군인종차별과 그에 기반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독일만이 아니라 모든 참전국들에게 가장 희망적인 가정이지만,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경우. 만일 나치 독일군이 인종차별과 학살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자제하고 소련 치하의 민족들의 국가 설립을 막지 않았다면 600만여 명에 달하는 유대인과 집시는 물론, 전쟁 초반에 독일군을 해방자로서 반긴 점령지의 수많은 슬라브족 인구가 독일군에게 적극 협조하고, 병력이 되어 소련군과 싸우면서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이랬을 경우 독일군의 병력은 소련군과 동등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성립 이념을 생각해보면 이런 인종차별과 전쟁범죄가 없을 수가 없었다. 만일 나치 지도부가 개전 이후 타민족의 협력을 얻기 위해 인종차별 정책을 철폐했다면 인종주의에 기반한 나치 이념과 충돌을 일으켜 모순을 이뤘을 것이다.

히틀러가 군사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뺐더라면?
의외로 가장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이다.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히틀러가 아예 전적으로 군 지휘권을 맡긴다던가 스탈린처럼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등 초반에서의 참패를 맛본 후 장군들에게 모든 군사 지휘권을 이양했다면 독일의 목숨이 상당 기간 연장되었을 것이다. 최대한 행복회로 과열희망적으로 가정하면 보병들의 화력을 대폭 상승시켜줄 수 있는 StG44의 대량 생산을 1942년부터 시작(흠...)[49] 보급에서부터 전선 축소에서부터 기동 방어전에 이르기까지 장성들의 꿈이 이루어질 것이며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계획대로 하르코프에서 소련군을 격퇴시키고 헛된 공세로 병력들을 다 소모하는 일 없이 드네프르 강변에 구축된 이중, 삼중으로 된 방어선으로 소련군의 진격을 막으면 소련에게 조금이라도 더 큰 피해를 강요하고 진격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미국은 1945년 8월에 독일을 핵공격할 계획이었다.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을 막아내더라도 독일 본토에 핵이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Me262가 히틀러의 때문에 개발이 늦어진것도 아니고 연합군의 공세로 독일 공군이 붕괴되는건 피할 수 없었으므로 독일이 핵 투하를 막는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인데 대신 독소전쟁에서 이기거나 소련의 진격을 어떻게든 막아서 연합군이 좀 더 동쪽으로 전진했을 가능성은 있다.

◆ 소련이 먼저 독일을 공격했다면?
→ 만약 소련이 T-34를 좀 더 일찍 배치하고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선제공격을 하였다면 소련군의 공격은 아무리 잘해 보아야 단치히바르샤바, 동프로이센쯤에서 중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소련은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군이 반병신이 된 상태였고 독일도 소련을 침공하기 전에 소련의 공격에 대비한 어느 정도의 준비를 해 둔 상태였다. 다만 소련의 선공이 있었더라면 모스크바까지 뚫리는 일과 더불어 소련의 침공으로 여력이 없게 된 독일은 홀로코스트를 실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홀로코스트 계획이 이루어진 것은 1942년 1월의 일로 독일이 소련을 쳐바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런데 당장 전황이 심각해진 상황에서 소련군 막을 생각을 먼저 하지 유대인을 죽일 생각을 할까? 하더라도 실행은 나중의 일로 미루었을 것이다. 일단 당장은 눈앞의 불을 꺼야 할 상황이니까. 그런데 소련의 선공으로 독일이 여념이 없는 동안 북아프리카에선 롬멜의 진군과 후퇴도 없이 방어전의 상황으로 지속되었을 것이고 오히려 북아프리카 군단이 좀 더 오래 견디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었을지도. 그러나 이런 경우 소련이 명백히 침략자인 상황이므로 미국이 랜드리스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어쩌면 독일이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비시 프랑스에게 점령지를 뱉어주고 어쩌면 영국, 미국과도 평화협상을 하는 등 공산주의의 위협 앞에 독일과 미영프가 단합하는 등 정치적 상황이 대파시즘 연합이 아니라 대공산주의 연합군으로 2차 대전이 영 다른 의미로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50]

◆ 소련이 독일의 공격을 조기에 막아냈더라면?
→ 대표적으로 스탈린 라인의 완공 문제와 키예프 방어전이 있다. 폴란드 국경에 건설 중이던 스탈린 라인을 괜히 옮기는 일 없이 그대로 계속했더라면 1941년이 오기 전에 완공할 수 있었을 테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독일은 소련 침공을 재고해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키예프의 경우도 마찬가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 독일군이 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는데. 독일의 공격을 조기에 막고 전쟁의 종결을 앞당기는 동시에 수천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 멍청한 독재자와 무능한 장성의 결정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뮌헨 회담이 결렬되었다면?
회담이 결렬되고 독일의 선공으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독일이 체코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진격하더라도 마른 강 유역에서 막히고 나아가 루마니아를 통과하여 체코로 진입한 소련군이 전쟁의 진행을 완전히 바꿔 놓았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소련군은 스탈린의 숙청으로 제 상태가 아니었고 폴란드가 있었으므로 히틀러가 소련 때문에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이후로의 진행 과정을 보면 1차 대전 꼴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히틀러에게는 이대로 마른 강에서와 폴란드-루마니아-북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동부전선에서의 전쟁을 계속하다가 패망하던지 아니면 점령지를 죄다 토해내는 것으로 강화를 하던지 두 가지 선택만이 남았을 것이다. 그래도 현실과 비교하면 독일을 비롯한 전 유럽인들과 히틀러 그 자신에게도 해피엔딩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였다면 독일은 그냥 1차 대전 재탕이 될뿐이고 홀로코스트도 본격화되지 않은채 히틀러도 그냥 권좌에서 쫓겨나 기껏해야 추방, 망명 내지는 감옥에 가는 정도로 끝났을테고, 나치 독일은 평범한 패권국으로, 히틀러는 보통(?) 독재자 정도로 평가받을 것이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성공했다면?
→ 당시 쿠데타 측의 계획은 히틀러와 괴링, 파울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마르틴 보어만 등을 비롯한 나치당 수뇌부를 제거하고 독일 제국 시절과 같은 군주국을 세운 뒤 연합국과 강화하고 그들과 함께 소련에 맞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독일의 패망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연합군 수뇌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설령 그들이 히틀러 암살에 성공하고 주요 인사들을 제거한다 치더라도 힘러의 경우 테러가 일어났을 땐 저 혼자서 멀리 떨어진 채 SS 호위 병력의 경호를 받으면서 무장 열차 안에 있었고 힘러가 쿠데타 진압을 명령한 뒤 자신이 독일의 총통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51] 파울 하우서요제프 디트리히 등 SS 소속 장성들은 힘러를 싫어하며 오로지 히틀러에게 충성하였으나 이들도 쿠데타 측을 그냥 보고 있었을 리도 만무. 결국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지적한 데로 쿠데타 측과 SS의 충돌로 내전이 벌여졌을 것이고 전선이 붕괴되어 연합국이 12월 크리스마스 전에 베를린에 입성하는 꼴로 끝났을 것이다. 진짜 많이 잘해서 쿠데타 측이 힘러까지도 제압하고 SS의 진압도 물리친 후 신정부를 세웠다고 치자. 이미 독일 내부의 혼란으로 전선의 붕괴는 더 빠르게 이루어졌을 테고 신정부가 협상을 시도할 즈음엔 연합군은 이미 지프크리트와 동프로이센까지 밀려오고 있었을 것이고 강화는 결렬, 신정부 측은 좋든 싫든 계속 전쟁을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전선 붕괴 없이 방어전에 어찌어찌 성공하고 점령지 대부분에서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처칠, 루스벨트와 강화했다고 치더라도 독일 혼자만의 여력으로 소련군을 막기는 힘들 것이 확실. 게다가 병사들의 사기도 쭉쭉 내려가고 국민들의 신뢰도 내려간 마당에 소련군에 쳐발리는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세력에 의해 제2, 제3의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도 없다. 즉, 쿠데타 측이 암살과 신정부 수립에 성공했어도 독일의 패망은 정부만 바뀌었을 뿐 이루어졌을 일이고 더욱이 이들은 총통을 죽이고 나라를 망하게 한 매국노들로 후대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렇게 되면 철저한 나치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한 번 배후중상설이 돌며 독일이 또다시 군국주의화되었을 수도 있다. 설령 민주화가 됬더라도 현재 일본마냥 과거사 문제로 유럽 주변국과의 관계가 매우 시끄러웠을 것이다.

◆ 독일이 연합국보다 먼저 핵을 개발했다면?
→ 이쪽은 가능성이 낮다. 대전 말기 원자로 가동도 하지 못한 상태를 감안하였을 때, 나치 독일의 핵 개발은 힘들었을 듯. 핵이 개발되어도 독일은 핵 공격을 할 만할 초대형 전략 폭격기의 생산이 어려웠다. 핵 투발용 특수 전략 폭격기의 생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 핵폭탄을 제작한 주요 인물들의 입국을 거부하고 입국했으면 사형선고를 때릴 정도로 인종청소가 만연했다. 1945년에는 이미 루프트바페보텐플라테 작전 등의 삽질을 통해 갈가리 찢겨 핵 폭격기 호위기도 부족한 상황이고. 이 한 방에 모든 것을 걸어 보았자 광활한 시베리아를 전부 점령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나마 V2 개량이라는 묘수가 있긴 했으나 핵무기가 올라갈 플랫폼 수준으로 개량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핵 공격은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만약 독일이 핵을 1940년이나 1941년에 개발하였더라면 동시에 로켓 개발이 빠르게 이루어져 V2, V3 개발을 완료했다면 런던과 레닌그라드, 모스크바는 지도에서 증발하고 핵으로 초토화된 유럽은 제3제국으로 통합되었을 것이다. 전쟁 중후반에 미국과 독일이 비슷한 시기에 핵개발을 했다면 끔찍한 상황이 될텐데 당시에는 매우 강력한 폭탄 정도로 알고있기에 어느 누구도 핵무기의 폐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진행중인 전쟁에 거리낌없이 사용했을테니 핵무기가 만들어지는대로 죄다 적국 주요 도시와 전선에 뿌려버렸을 것이며 수많은 핵공격이 일어나는 진정한 의미의 핵전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스탈린이 독일과 강화했다면?

→ 모스크바 전투 이전에는 스탈린은 불가리아의 중재로 일단 나치 독일과 폴란드 서부, 발트 3국, 몰다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부를 내주는 선에서 강화를 맺으려고 했다.[52] 이는 선례도 있어서 더 유리하다. 블라디미르 레닌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거대한 영토를 떼어 주고 1차 대전에서 빠진 후 한숨 돌렸다가 나중에 독일이 패한 다음에 많은 영토를 수복했다. 스탈린은 이를 따라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조기강화의 경우에 독소전쟁은 사실상 독일의 승리로써 소련은 1차 대전 전후의 러시아 제국처럼 대러시아 부분만 간신히 유지했을 것이고, 더불어 스탈린의 권력 또한 엄청나게 위험해지게 되어 조기 실각의 가능성이 훨씬 커졌을 것이다. 심지어 소련 자체가 해체될 수도 있다. 동쪽의 위협이 사라지고 자원 수급도 원활해진 독일은 혼자 버티는 영국과의 전쟁에 집중했을 것이며 일본이 이 와중에 혼자 진주만 공습을 벌이더라도 일본의 도움이 불필요해진 독일이 일본 편을 들어서 미국에 선전포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도 영국 빼고 전 유럽을 장악한 독일을 공격하지는 않았을테니 일본과만 전쟁을 했을 것이고 전후 질서는 유럽의 독일 세력 vs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미국 세력의 냉전 체제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일부에서는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한 시점에서 소련 공략을 포기하고 강화 조약을 맺었다면 좀 더 생명이 연장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데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독소전쟁 중 독일과 소련의 강화 가능성은 모스크바 전투가 끝날 때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이다.

1944년에는 오히려 위기에 몰린 독일이 스탈린과 협상하여 단독 강화를 맺으려고 하며,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서방 측보다 이쪽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나치에게 죽을 번하다가 살아난 소련이 다 잡은 맹수를 살려 줄 리가 없지 않은가.[53]

◆ 독일이 소련에 좀 더 일찍 쳐들어갔다면?

의외로 가장 가능성이 높았을 사례 원래 바르바로사 작전은 1941년 5월 15일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침공이랑 그리스 침공이 예상치못하게 터짐으로써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이 병력을 빼서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 점령하는데에 군사력이 소비됨으로써 바르바로사 작전이 1941년 6월 22일로 미뤄졌다. 한마디로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으로 독소전쟁의 발발을 늦춘 것이다. 이 1달이 늦어진 것으로 인하여 추축국의 점령 직전의 레닌그라드 공격이 포위전으로 바뀌고 모스크가 공방전이 겨울까지 끄는 바람에 월동 준비가 부족한 추축국이 공세를 중단했기 때문에 모스크바 점령 직전에 실패한 주요한 이유이다. 작계대로 혹은 4월쯤 일찍 바르바로사 작전이 발동되었다면 겨울이 오기 전에 주요 도시인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등이 함락, 소련은 그야말로 멸망 직전까지 몰렸을 것이다. 최소한 모스크바 시내가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세로 전장터로 초토화되었을 것이다.[54]

◆ 독일이 바그라티온 작전비수아-오데르 대공세를 막아냈다면?
→ 당시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쿠르스크 전투의 피해로 역량이 많이 하락한 상태였지만, 전선 붕괴의 주 원인이 히틀러의 고지사수 명령이었다는 점에서 위에서 나온, 히틀러가 군사문제에 더이상 개입하지 않았다는 가정과 연결된다. 히틀러가 군사 문제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서 장군들의 재량이 주어졌다면 독일은 소련군의 공격을 잘 소화해내며 어느 정도 방어에 성공하였을 수도 있다. 사실, 소련 역시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어서 여기서 엄청난 손실을 본다면 소련 역시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서부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점으로 서방연합군이 승기를 잡고 진격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멸망을 막을 수 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쪽 전선에서의 여유를 통해 벌지 전투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고 벌지 전투 없이 방어작전을 구사했다면 어느 정도 생명 연장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서방 연합군이 일찍 베를린을 점령하는 등 조금 더 동쪽으로 진격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6.7. 독소전쟁 연구의 변화[편집]

이 부분은 소련군 전문 이글루스인 РККА Ставка 이글루스 지부에서 상당 부분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


냉전 체제의 특수성으로 인해 독소전쟁에 대해 진실에 근접한 연구는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전쟁 당사자인 소련은 대외적인 독소전쟁 자료와 연구를 선전에 알맞거나 검열을 통과한 것만 공개했고 주요한 1차 사료들은 문서 보관소에 꼭꼭 숨겨 놓았다. 심지어 후일 신빙성 있는 사료로 밝혀진 자료들마저도 공산주의적 강박증이 큰 서술 방식 때문에 믿기 힘든 자료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6.7.1. 냉전 이전까지의 소련 측 연구[편집]

1945~58년 사이 소수의 소련 자료들만이 작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자료들마저 너무 정치색을 강하게 띄었고 독자나 학자의 관심을 끌만한 작전 적으로 자세한 자료가 아니었다.

1958년까지의 소련 군사 저작들은 너무 정치적이었고 모든 부분에서 스탈린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부합하여 작전술 적, 전술적 자세함은 없었다. 1958년 이후 개인 숭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며 군사 저작들에는 작전술적, 전술적 정보가 자세히 실렸다.

1958년이 시작되며 소련에서도 정확하고 유용한 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자료들을 받아들이며 소련군 군사사 저널에서는 모든 수준의 전투 경험을 다룬 뛰어난 연구 자료들을 방출했다. 군사사 저널은 1958년 직후부터 전쟁의, 최초 시기에 대한 괄목할 만할 연구들을 내놓았고 이전의 정치성이 강한 연구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군사사 저널은 이론적 상황에서의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소련의 군사 문제를 보는 경향이 구체성을 띄게 했고 각자의 화제를 역사적 문맥에서 보게 했다.

1958년, 소련 최초의 2차 세계 대전사 통사인 플라토노프의 <제2차 세계대전사>가 발간되었다. 이 책에서는 최초로 소련의 전쟁 초기 실패를 언급했으며 전쟁 초기를 전체적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소련군이 실패한 1942년의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다루고 있는데 이 전투는 지금도 소련 내에서 논하기에는 너무 쓰라린 주제로 남아 있다. 플라토노프는 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패배한 전투를 솔직하게 말하는 최초의 소련 측 자료가 되었다. 같은 시기 소련 역사학자들은 전후 사례를 가르치는 전쟁 기 경향으로 복귀했다. 콜가노프의 <대 조국 전쟁기의 전술 발전>은 1958년에 나왔고 전투 사례를 통한 전쟁 기 전술을 다뤘다. 이 교훈적인 저작은 장교들의 교육을 위해 만들어졌고 성공한 사례와 실패한 사례를 동등한 비중으로 담았다. 콜가노프의 자료들은 다소 단편적이지만 실패 사례와 성공 사례를 동등하게 다루고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정확, 마르크스주의적 표현으로는 '과학적으로' 대처하는 교육 사례로서 최대한 자세해야 했다.

1958년 이후 회고록, 부대 사, 그리고 작전 자료들이 전보다 지속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소련 학계는 당시 군사 지휘관들과 참모들의 기록들을 대거 끌어 모았다. 이 기록들은 스타브카 수준의 인물들(주코프, 바실렙스키, 시테멘코), 전선군 사령관 수준의 인물들(로코솝스키, 코네프, 메레츠코프, 예레멘코, 바그라먄), 야전군 사령관 수준의 인물들(모스칼렌코, 추이코프, 크릴로프, 바토프, 갈리츠키, 그레치코, 카투코프, 렐류셴코, 로트미스트로프), 군단장 수준의 인물들과 그 이하 지휘관들의 회고록들이 출간되었다. 소련 군사사가들은 제병 협동 군, 전차군, 군단, 사단, 그리고 여단이나 연대 수준까지의 부대 사를 저술했다. 회고록은 지원 부대 지휘관들의 책까지 포함했다.

이후 뛰어난 작전 연구들이 주요 작전(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벨라루스)이나 조금 덜 중요한 작전(노보고로드-루가, 동포메리아, 돈바스), 그리고 기타 수행했던 작전들을 다룬 연구서들이 나왔다. 대학의 역사학자(삼소노프)나 군사학자(질린, 갈리츠키, 시도렌코) 등이 대규모 사료를 동원하고 자세한 서술을 사용해 1등급 연구 자료들을 내놓았다. 회고록, 부대 사, 작전 연구는 총체적인 전훈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 연구들은 전쟁사 전체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작전술 발달사를 연구하는 인물들(세메노프, 스트로코프, 바그라먄, 크럽첸코)과 전투 사례를 전술적, 작전술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라지옙스키, 쿠로치킨), 기갑 부대와 기계화 부대를 다루는 인물들(로트미스트로프, 바다자냔, 라지옙스키, 로시크), 작전술과 전술을 연구하는 인물들(시도렌코, 사브킨, 레즈니첸코), 그리고 막대한 전투 지원을 주제로 하는 연구들을 포함한다.

대조국 전쟁사와 제2차 세계 대전사를 총체적으로 다룬 저작들이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났다. 6권의 <동부 전선사>는 이전의 학자들이 다루기 꺼려한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들을 솔직하게 다뤘으며 작전적 자세함도 증가했다. 하지만 분량의 한계 때문의 작은 규모의 작전이나 전투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11권짜리 <제2차 세계대전사>는 정치적으로는 덜 솔직하지만 작전술적, 전략적 수준의 분석에서 더 자세했다.

그리하여 동부 전선의 작전들에 대해 소련이 막대한 양의 자료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게다가 에릭슨이 설명했듯이 이러한 자료들의 종합은 동부 전선 작전의 인상적인 그림이다. 하지만 이 자료들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독일 측 사료와 똑같은 문제로 독일 측의 편견과 같은 소련 측의 편견이다. 첫째로 소련 저작들은 너무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이다. 요점은 소련 저작들은 전투 사레를 가르치고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전쟁은 정치적, 이념적 맥락 내에서도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정치적 편향성도 이해받을 수 있으며 비판적인 독자들은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고 무엇이 비정치적인 것인지를 판단할 능력을 가져야 한다. 독자들은 읽기 편하고 대중적인 책일수록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소련 내에서 만든 작전술적, 전술적 사실은 개인이나 부대의 희생과 영웅주의를 장려하는 용도가 되었다.

군사 저작이 정치적 맥락에 휘둘리던 이래로 군사 저작 발행 환경은 독자(=공산당)의 입맛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문맥이 간략하고 세련됨이 부족한 저작은 정치성이 강한 것이었다. 제일 중요한 작전과 전술은 계획 수립과 수행에서 당의 역할을 강조하느라 비교적 제한된 연구 소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소련 군사 저술가들은 성공적인 작전에 강세를 두고 자세히 쓰며 실패한 작전은 자세하게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최근까지 전쟁 극 초반인 1941년 6~7월의 전투나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세바스토폴 공방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기타 성공적인 작전들에서도 위험했던 국면들은 잘 나오지 않았다. 비슷하게, 1943~45년 사이에도 중요하지 않은 작전에 참가한 부대의 역사도 얼마 나오지 않았다.

60년대 초의 소련군은 실패한 작전들을 논하기 시작했는데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예로 들 수 있다. 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대한 당의 기술은 정확했지만 실패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시간이 흐르고 더 많은 자료가 나타나자 이 패배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어 하르코프의 재앙에 대해 더 자세한 연구가 나올 수 있었다.(예를 들면 모스칼렌코의 <남서부 축선>의 한 장이 있다.)

비슷한 경향이 소련 공수부대를 다룬 문건에서도 나타난다. 당시의 소련 공수 작전들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1964년 전에는 소련 공수 부대를 다룬 자료가 거의 없었다. 1976년까지도 공수 부대 활동에 대한 자료들은 자세하지 않았고 낭만적인 문장들로 포장되었다.

매우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작전 해석은 독일의 해석과 매우 달랐다. 사실 소련 학자들의 작전 해석 시기에 따라 해석이 달라졌다. 장군들의 회고록이 작전 경과에 대해 합리적이지 못하게 적었다면, 학자들은 이에 대한 토론을 통해 공식 역사를 시정했다.

소련 자료와 독일 자료가 가장 상충되는 부분은 서로 대적한 병력의 숫자였다. 양측 자료를 평가하면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첫째로 소련 자료는 소련군의 병력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독일 정보부 자료와도 일치한다. 대조적으로 소련 자료는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한다. 게다가 소련 자료는 독일군의 포병과 기갑 전력을 인력보다 더 과장한다. 부분적으로 이는 소련군이 독일 동맹국 병력과 경찰 병력, 그리고 민병대(국민돌격대) 병력도 합쳐 추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준을 사용한다 해도 소련군은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 기록과 대조해 봤을 때 너무 높은 적 전투력 측정을 했다. 독일군 또한 상대하는 소련군의 전력을 과장했다. 독일 측은 전력 차를 8:1에서 17:1까지 과장했고 소련군은 전력 차를 3:1에서 2:1로 낮췄다.[55]

소련 사료들은 전쟁의 사상자 문제 때문에 신뢰성을 스스로 떨어트렸다. 초기의 소련군 저작들은 아군 사상자에 대한 기술을 완전히 무시했고 그 이후에도 사상자 도표도 나타나지 않아 현대 소련군 저술가들의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거대 작전에서의 손실 도표나 사단 사에 수록된 중대들의 전투 전후 전력 비교 도표 정도가 간간히 남아 있는 정도였다. 아마 소련 저자들이 숨기고 있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6.7.2. 냉전 이전까지의 서방 측 연구[편집]

소련 사료에의 접근성 부족과 냉전의 영향으로 영미권 학자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일 측 사료들 위주로 독소전쟁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독소전 연구의 편향성을 가져왔다.[56]

주요한 사료로 쓰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나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계화부대장>,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의 <기갑 전투>는 회고록의 특성상 자신의 실수나 병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 안 하고 공적만 늘어 놓은지라 신중한 교차검증이 필요했으나, 소련 측 자료가 거의 입수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를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기에다가 미 육군에서 독소전쟁에 관해 편찬 책임자를 맡은 전 독일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57]는 오로지 독일 측의 시각으로 독소전쟁을 기술하였다. 그리하여 전술적, 작전적으로 항상 우위에 있던 독일 국방군이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과 무한한 인력과 자원으로 몰아붙이기만 할 줄 아는 소련군에게 패배한 것인 양 서술함으로서 소련군의 승리의 원인을 거의 "운빨"로 돌리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50년대 독일군에 의해 만들어진 저작들은 소련군의 작전 자료 부재라는 결점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독일 집단군, 야전군, 군단, 사단 소속의 독일군들은 수요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수적 우위와 끝없는 포격 하에 행해지는 인해전술,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무수한 소련군 기갑 부대와 대적했다고 주장했다. 소련군 규모에 대한 부정확한 서술에는 적 부대 각각의 작전술 적 역할에 대한 고려가 전무하여 독일 저작들이 소련군에 대해 공통적으로 말하는, 상상력 없이 단순한 정면 공격밖에 모르지만 막대한 물량을 가진 소련군이 뛰어난 능력과 기교 넘치는 기동을 구사하는 독일군을 이겼다는 주장을 깔아 놓았다. 소련군의 '스팀롤러'는 동유럽에 그들의 시체와 부상자를 끝없이 쌓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독일 자료들이 전해 준 소련군에 대한 심리적 인상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더 나아가 작전들에 대한 이러한 개관은 소련군의 규모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해 독자들에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독일군이 항상 압도적인 수의 소련군과 대치했다고 믿게 했다. 이런 회고록들과 팸플릿들은 독일의 원 사료들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 소련군에 대한 작전 자료의 부재를 보여 준다.

1960년대 나온 앨런 클락의 동부 전선에 대한 자료인 <바르바로사(Barbarossa)>는 작전술적으로 소련 자료를 부족하게 담고 있었다. 게다가 클락은 다른 학자들이 쉽게 받아들인 수법인 전쟁 첫 2년을 자세히 쓰고 마지막 2년은 간단히 쓰는 서술 방법을 사용했다. 사실 총 506쪽의 책 중 400쪽 이상이 전쟁 초기에 할애되어 있다. 이러한 서술은 독일 저작들에도 잘 나타나는데 그들의 패배를 히틀러의 오판으로만 몰아세움으로서 그 때의 작전들에 대해 자세히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 육군 군사사 연구소는 이 불균형을 어느 정도 해결할 얼 짐케의 두 저작인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그라드까지(Moscow to Stalingrad)>와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Stalingrad to Berlin)>을 내놓았다. 이 저작은 유효한 자료로 학술적인 것이다. 짐케는 1942년 11월부터의 전쟁을 조명하고 전략과 고차원적인 작전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독일 사료에 많이 의존하고 있지만 짐케는 독일 기록 자료를 연구했고 그곳에서 소련군의 작전 자료들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짐케는 동부 전선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각을 넓혀 주었으며 기존 자료들의 문제점들을 교정했다. 짐케와 그를 따르는 저자들은 동부전선을 서술하며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에 가속화된 소련 역사학자들의 대전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새로운 소련의 연구들은 나중에 더 말하겠지만 질이 천차만별이었음에도 전쟁사 연구에 새롭고 핵심적인 차원을 열었다. 대부분의 뛰어난 학자들은 소련군 연구를 흡수했다. 1970년대까지 소련 측 저작들은 동부 전선사를 보는 시각에 균형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케 또한 독일 자료에 상당히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초, 독일 저자인 폴 카렐(=파울 칼 슈미트)은 동부전선에 대한 2개의 책인 <히틀러, 동쪽으로 움직이다(Hitler Moves to East)>와 <조각난 대지(Scored Earth)>를 썼다. 이 책들은 기사 형식의 매력으로 독일군의 작전술적 작전을 자세히 조명했고 참전 장교들에 대한 막대한 인터뷰를 실었다. 카렐의 저작은 독일 관점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소련군 사료에 대한 참고 비중은 짐케의 저작보다 많다. 카렐의 책은 그 생생함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지금 보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통해 독일이 승리할 수 있었다는 걸 진지하게 주장하는 등 문제가 많다.

카렐 식의 서술에서 더 학문적인 저작으로는 알버트 시튼의 2권의 책인 <러시아-독일 전쟁(Russo-German Conflict)>와 <모스크바 전투(Battle of Moscow)>로 짐케의 연구를 전술적 수준으로 분석한 것이다. 독일 사단들의 공식 기록을 통해 시튼은 전술적 수준에서의 전쟁사 서술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카렐처럼 시튼은 소련 자료의 부족 때문에 독일 측 관점에서 전쟁을 보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서방권의 저술에는 나치의 인종주의적인 기술도 많이 눈에 띤다. 가령 러시아인들은 "중세부터 억압과 순종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희대의 독재자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독일과의 전쟁에서도 맹목적인 희생을 바쳐 승리할 수 있었다."[58]는 식의 기술이다. 이런 기술은 러시아인을 자기 목숨도 전제자에 바치는 노예 정도로 묘사하는 것이고, 나치 침략자들이 바라본 러시아 관과 똑같다. 그러나 만약에 전쟁에 패하면 자신이나 자기의 가족이 학살될 텐데 싸우지 않을 병사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당장 소련이란 나라 자체가 러시아 혁명이라는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단일 사건이라 불러도 부족할 만한 거대한 대중 봉기와 항쟁을 통해 생긴 정권이고, 꼭 숙청이나 굴라그 같은 강압적 방법이 아니라 진심으로 공산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이상에 믿음을 가지고 투신한 사람들도 많았고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도 러시아 민족주의와 애국심으로 종교에 의지하기도 하며 싸운 병사도 많았다.

실제로 독일군이 대승을 할 때(바르바로사 작전~청색 작전)는 개별 전장에 투입된 인원은 독일군이 더 많았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참패는 소련군의 졸렬한 지휘도 한몫했지만, 애당초 투입된 독일군 병력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59][60] 그러나 소련군이 우세한 시기가 되면 소련군은 대체로 1.4~2배 정도의 전체 병력을 투입했으며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방어의 취약점을 찾아 집중 공격했다. (그러나 르제프전투에서도 독일군은 적은 병력으로 소련을 완파했다.) 이 때문에 공세의 중심에 서 있는 독일군 지휘관이 느끼는 적의 병력 수는 수십 배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세를 펼 때 적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는 점은 독일군이든 소련군이든 마찬가지다.

이러한 독일 편향적인 냉전기 서방의 연구 저작에서 존 에릭슨의 저작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에릭슨의 연구는 1960년대 이후부터 그가 작고한 2001년까지 독소전쟁 연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에릭슨의 책들은 기존의 독일 관점 동부 전선 서술을 극복하고 소련 측 관점을 대거 차용해 동부전선 사를 서술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소련군 최고 사령부(Soviet High Command)>는 1941년 여름의 상황을 최초로 조명했다. 그의 뒤따른 두 책인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The Road to Stalingrad)>와 <베를린으로 가는 길(The Road to Berlin)>은 전쟁 전체를 자세하게 기술했다. 이 책들의 원칙적인 가치는 수백 개의 소련 자료에서 가치 있는 자료를 뽑아 동부 전선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에릭슨 같은 저자도 있고 베트남 전쟁 이후 대두된 미군의 개혁 바람에서 소련군의 기동전과 작전술을 연구하는 경향이 생겨나긴 했지만 사실 대부분 학술적인 것이라 대중이 접하기 힘들었고, 특히 에릭슨의 저작들은 영미권에서도 어렵기로 소문나 있던 지라 대중의 인식을 바꿔놓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서구권의 창작물 및 가볍게 볼 수 있는 서적들이 독소전쟁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6.8. 냉전 이후[편집]

냉전이 해빙기를 맞이하고 소련 쪽 자료 공개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독소전 연구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존 에릭슨을 비롯한 서방 학자들은 동서독 역사학자들의 교류 중에서 유출된 소련의 내부 연구 자료들과 1, 2차 사료들을 구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존 에릭슨은 기념비적인 독소전쟁 3부작인 <소련군 최고사령부(Soviet High Command)>,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The Road to Stalingrad)>, <베를린으로 가는 길(The Road to Berlin)>을 출판할 수 있었다.

이후 소련이 붕괴되고 문서 보관고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독소전쟁 연구는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존 에릭슨은 물론이고 데이비드 글랜츠를 비롯한 새로운 연구자들이 개방된 소련측 자료들을 대거 연구에 수용함에 따라 독소전쟁 연구는 크게 활기를 띄었다. 글랜츠는 이 시기 조너선 하우스와의 공저를 통해 체계적인 독소전쟁 개괄서인 <거인들이 충돌했을 때(When Titans Clashed-국내 번역명 '독소전쟁사')>를 출판했다.

<When Titans Clashed> 이후 글랜츠와 니입 부자(父子), 스웨덴의 군사사학자 니콜라스 채터링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독소전 연구에 뛰어들어 명저들을 출판했고 공산주의 체제의 강박증에서 풀려난 러시아 학자들 또한 갈수록 가치 있는 연구 성과들과 출판물들을 내고 있다.

그리하여 여러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는데, 데이비드 글란츠가 발굴한 "르제프 공세"가 대표적이다. 이 공세는 글란츠의 저서 Zhukov's greatest defeat page(1999)가 나오면서 알려졌다. 요약하면 1942년 11월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천왕성 작전은 사실 주공세가 아니었고, 실제 주 공세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그 북쪽인 르제프에서 맡았던 "화성 작전"이었는데, 여기서 주코프가 대패를 당했다는 것이다. 현재 영미권에서 화성 작전으로 대표되는 르제프 전역과, 그 동안 남부집단군에 비해 주목도가 낮았던 중부집단군의 전투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연구가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러시아 군사학자들은 화성 작전으로 독일 중부집단군의 발이 묶여서 스탈린그라드의 위기를 지원할 수 없게 했다는 주코프의 일기 등을 기반으로 하여 이 작전이 글란츠의 말대로 꼭 실패라고 볼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지만, 글란츠는 7년여 만에 발매된 러시아어 저서에서 부록으로 당시 소련군 군사 문서를 다량 수록하여 재반론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사례는 니콜라스 채터링이 발굴한 프로호프로카 전투의 손실 분석이다. 이 사람의 책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Frank Cass》(2000)에서는 소련 제5전차군이 SS 기갑사단과 격돌해서 대등하게 싸웠다고 선전되었던 프로호프로카 전투에서 사실 소련군이 전술적으로는 대패했다는 것을 독일군 작전 일지를 분석하여 밝혔다.(독소의 손실 비는 약 1:6) 그러나 이런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 참가한 독일 기갑 부대는 그 전투에서 입은 손실 또는 지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격을 중단, 소련군의 돌출부를 잘라 버리는 데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이 전투가 전략적으로 소련의 승리라는 점은 부인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성채 작전의 북부 방면을 담당한 독일 중부집단군과 오룔 탈환 전투인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에서의 손실 또한 1:7에 가까웠다는 연구가 제기되고 있다.

7. 매체[편집]

7.1. 영화[편집]

  • 베를린 함락 - 1949년, 소련. 물론 시대에 걸맞는 스탈린 숭배 영화다. 베를린 전투만을 다루진 않고, 독소전의 시작과 끝까지 다루었다. 그래도 소련군의 복식이나 무기들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제대로 고증되어 있다. 잘 관찰하면 대전 기간 중의 소련군 제복의 변천사를 볼 수 있다. 거기다가 수백 대의 T-34 전차, SU-76, SU-152 자주포, 카츄샤 로켓포를 실은 트럭들이 소련군 저글링 병사와 함께 행진하는 CG 없이 찍은 실사판 장관을 볼 수 있다.

  • 인간의 운명 - 1959년 소련. 전쟁의 참혹함과 전쟁 고아 등 피해자들의 고통, 그리고 가족애와 인간애를 다룬 영화. 미하일 숄로호프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숄로호프는 인간의 운명으로 레닌 상을 받았고, 여러 소설들을 저술해 196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 철십자 훈장 - 1977년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독소전을 다루었다. 이미 전황이 기울어진 1944년 산전수전을 다 겪고 철십자 훈장을 탄 독일군 고참 부사관 슈타이너 중사가 훈장을 위한 공명심에 들뜬 귀족 장교 슈트란스키 대위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전쟁의 허무함을 나타낸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현지에서 로케를 해서 T-34 수백 대와 함께 몰려나오는 우라 돌격이 이 영화의 백미. 슈타이너가 실전에서 탄창도 제대로 교환하지 못하며 허둥대는 상관을 보고 미친 듯이 웃어대는 모습 또한 명장면이다.

  • 벙커 - 1981년, 프랑스. 2부작 TV영화로, 훗날의 다운폴과 마찬가지로 벙커에 갇힌 히틀러와 주변 인물들을 다뤘다. 히틀러 역할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명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 컴 앤 씨 - 1985년, 소련. 어린 소년을 화자로 독일군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영화다.

  • 즈베즈다 - 2002년, 러시아. 1944년 독일군 후방으로 침투한 소련군 정찰대 이야기. 즈베즈다는 영화에 등장하는 소련군 정예 정찰 부대명이자 암호명이다.

  • 피아니스트 - 2003년, 프랑스, 영국, 독일, 폴란드. 독소전쟁 자체보다는 독일군 점령 하의 바르샤바가 배경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소련군과 패배한 독일군이 나오기는 한다.

  • 탈리-이한탈라 1944 - 2007년 핀란드. 1944년 6월 25일~7월 9일까지 벌어진 핀란드와 소련의 탈리-이한탈라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전투 자체는 핀란드 군이 소련군의 공세를 막고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 최종 사상자수 차이도 2.5배 가까이 차이 났지만, 전체 전력 차이 때문에 핀란드는 GG 치고 정전 협정을 체결한다. 그리고 핀란드는 소련과 함께 독일을 공격한다.

  • 베를린의 여인 - 2008년, 독일, 폴란드 합작. 베를린 전투가 배경. 점령군으로서의 소련군과 독일인의 복잡한 감정을 다루었다. 이 영화에서 초반부에 소련군의 범죄(약탈, 강간) 및 독일여성들의 치부(성상납)같은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소련군 병사들의 인간적 모습이 잘 나타난다. 다큐멘터리나 전쟁물 같지만 실제로는 점령군 장교와 피점령국 여인 사이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그린 멜로네토라레물이다.

  • 디파이언스 - 독일군 점령 하의 벨라루스에서 지역 농부들이였던 비엘스키 형제들이 이끈 유대인 게릴라가 주 소재. 이들은 천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보호했고, 소련군 유격대와 협력해 독일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소련군 유격대 사령관도 이들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아서 많이 도와줬다.

  • 레닌그라드 - 2009년, 러시아, 영국 합작.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배경이다. KGB에 의해 스파이로 오인 받아 붙잡힌 영국인 기자(미라 소르비노)가 여자 민병대원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독일군에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추위, 굶주림 속에서 생존의 투쟁을 하는 내용.

  • 브레스트 요새 - 2010년, 러시아. 1941년 6월 22일~29일 브레스트 요새 전투가 배경이다. 처절한 우라돌격 신으로 유명하다. 불시에 기습당해 무기조차 들지 못한 상태에서 창틀, 의자, 도끼 등등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독일군에게 돌격한다. 실제 브레스트 요새 전투에서 독일 45사단은 후퇴를 명령받았다. 춘천-홍천 전투?아이러니하게도 이 요새는 하인츠 구데리안이 폴란드에게 뺏어서 소련에 넘겨준 것이었다. 따라서 영화 초기에 민간인들과 희희낙락하게 평화로운 삶을 사는 소련군의 모습 따윈 다 뻥이고, 실제로 소련 점령 치하 폴란드는 나치 치하 지역처럼 살벌한 군정이 이루어졌으니, 폴란드인들 말마따나 이건 역사 왜곡이 굉장히 심한 편이다. 한국에선 개봉도 제대로 안 되고 다운로드 서비스만 하는 영화지만 의외로 한국 영화 채널에서 자주 틀어 주었다.

  • 화이트 타이거 - 2012년, 러시아. 제85회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노미네이트. 1943년부터 종전까지의 기간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일 전차와 이에 대적하는 소련군 전차 승무원들의 모습을 담았다. 전쟁으로 나타난 인간 심리를 이야기하는 전차병 나이데노프, 그런 그와 적 전차를 전쟁에 맞추어 새롭게 태어난 존재로 여기는 상관 페토도프, 베를린의 항복 식전에 등장한 독일군 고관들, 그리고 마지막 히틀러와 누군가의 대화 등을 보면 단순히 전차전만을 그린 영화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Unsere Mütter, Unsere Väter - 2013년, 독일. 1941년 6월부터 1945년 5월까지를 5명의 시점에서 다룬다. BoB와는 다르게 '승리의 영광'이 아닌 '처절한 패배'를 다루는 것이 특징. 초반에는 "모스크바까지 OOkm"였지만 독일이 밀리기 시작하는 중반부부터는 "베를린까지 OOkm"로 바뀐다. 전쟁을 지속하며 결국 인간성이 마비되어 가는 인물들, 전쟁에 광기에 휩쓸린 사람들과 처절하게 죽어 가는 병사들을 주로 보여 준다.

  • 스탈린그라드 2013 - 2013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1993년 독일에서 만든 원조 스탈린그라드를 패러디해서 만든 영화이다. 1993년작 스탈린그라드와는 달리 소련군 시점이며,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군인들과 함께 생활했던 한 러시아 여인의 회상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1993년 작품과는 내용도 전혀 다르고 등장인물도 전혀 다르다.

  • 1944 - 2015년, 에스토니아. 독일과 소련 사이에 있어서 2차 세계 대전에 휘말려 버린 에스토니아를 배경으로 같은 민족의 인물들이 한쪽은 독일 무장친위대에, 다른 쪽은 소련군에 소속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벌이는 이야기. 나바 전투(Battle of Narva)에서 일어난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제20무장척탄병 사단[61]이 소련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도중, 상대방으로부터 에스토니아어가 들리기에 싸움을 멈추고 확인해 보니 비록 군복과 장비는 달랐지만 같은 에스토니아인으로 구성된 소련군 제8 '에스토니아' 소총병 군단[62]이었다.영화로 유명한 국가에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의외로 전투 장면의 퀄리티가 굉장히 높다. 다양한 독일군 총기와 보존 상태가 좋은 다수의 T-34/85를 볼 수 있다.

  • 여기의 여명은 고요하리라 - 1969년 소설 원작의 영화로 1972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처 영화화 되었다. 1942년 키예프 철도를 파괴하려는 독일군 16명을 상대로 싸우는 소련 여군 병사들과 지휘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7.2. 게임[편집]

7.3. 만화[편집]

  • 수리부엉이 - 독소전의 공중전을 다루고 있다. 프랑스 만화 특유의 정밀한 묘사가 일품.

  • 요한의 타이거 - DC 코믹스 산하의 버티고 코믹스의 워스토리의 단편 중 하나. 정확히는 독소전 말기인 1945년 4월의 시점으로 전차장 요한이 부하들을 살리기 위하여 고생하는 이야기이다. 고증이 다소 좋지 못하지만 작품이 나온 시점을 감안하면[63]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애초에 주인공 요한부터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7.4. 기타[편집]

  • 록그룹 sabaton - Panzerkampf, Attero dominatus 등 독소전쟁을 포함해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노래들을 불렀다.

  • 러-일 합작 애니메이션 제 1부대: 진실의 순간'[64]

  • 버프소녀 오오라 - 88화에서 '인류역사상 ㅄ같은 결정을 하면 항상 나타나 우는 새' 븟새가 등장하는데, 그때 나온 컷이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한다.라고 말하자 창가에서 븟새가 울었다.

  • 일본의 만화가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작품들

  • 잊혀진 병사 (Le soldat oublié) : 프랑스-독일 혼혈로서 동부전선에 참전했던 독일군 병사 ‘기 사예르’(처음에는 수송부대로 참전하지만 나중에는 독일의 정예사단이자 전략예비대로 동부전선의 소방수 역할을 한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으로 들어감)의 수필이다. 당시 동부전선의 처절함이 최악 중의 최악의 상황을 묘사하며 나타낸다.[65] 화자는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히는데 다행히도 아버지가 프랑스인이어서 프랑스 재건이라는 암묵적인 명목으로 별다른 재판 없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버지가 프랑스인이라는 혼혈, 작품 시작 부분에는 머리가 검고 곱슬이라는 외모까지 더해져, 독일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동료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습도 나온다.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기 사예르는 평범한 독일 병사들과 달리 포로로 잡히어 나름의 파격적인 대우를 받게 된다. 여담으로 2차 대전 후 프랑스 군에서 나름의 지옥 훈련을 받는다고 했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동부전선에서 겪은 것들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 수준이었다 라는 정도로 시니컬하게 쓴다.)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전쟁에 참여한 여군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풀어낸 '이야기 소설'. 1988년 작품이나 소련 당국이 "이 책을 읽고 조국을 위해 싸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저열한 사실주의에 물든 더러운 속옷 같은 책."이라고 비판하며 압박을 주는 바람에 소련이 망하고 나서야 출판했다. 독소전쟁의 지옥도를 있는 그대로 풀어낸 수작. 링크는 그 지옥도의 일부. 201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 폭풍속의 씨앗 - 실제 무장친위대 참전 병사인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회고록. 그가 소속된 3 SS 토텐코프 사단 옹호, 자원 입대 여부 등 문제가 있으나 동부전선의 처절함과 당시 독일군의 상황 등을 훌륭하게 묘사하였다.

8. 어록[편집]

"내가 유일하게 배우지 못한 말, 그것은 바로 항복이라는 말이다."
"우리 도이칠란트 역사에 항복이라는 단어가 적히지 않을 것을 온 세계에 선언하노라."
- 아돌프 히틀러

신병들은 이곳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들은 어머니를 찾다가 결국 미쳐서 죽게 된다. 8월 8일, 6중대의 총 사망자 50명 중 우리는 그렇게 35명을 잃었다.
- 독일 제18보병연대 '호케' 소령[66]

"히틀러의 독일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그들의 공격은 냉혹하고 무자비하다. 이 나라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 이오시프 스탈린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이오시프 스탈린[67]

'나는 여기서 죽지만 항복하지 않는다. 조국이여 안녕.'
(I'm dying, but I won't surrender! Farewell, Motherland.)
-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벨라루스 브레스트 요새(Brest Fortress)의 이름 없는 소련군 병사가 남긴 문구[68]

졔냐가 1941년 12월 28일 아침 12시에 죽었다.
할머니가 1942년 1월 25일 낮 3시에 죽었다.
레카가 1942년 3월 17일 새벽 3시에 죽었다.
엄마가 1942년 5월 13일 아침 7시 30분에 죽었다.
사비체프 집안 식구가 죽었다.

'모두 다 죽었다.'
-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11살 소녀 타냐 사비체바의 일기장. 일기장의 주인도 1942년 말 병으로 사망했다.[69]

'죽이고 또 죽여라, 적들의 시체는 예술이며 혁명이다.'

"네가 유능한 장교들을 다 죽여 버렸잖아!"(you had our best generals killed!)[70]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자신을 질책하는 스탈린에게

"그 때 1학년 학생이 세 반 있었는데, 이웃 마을에 두 반, 가예보에 한 반이 더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지냈죠. 그래서 나는 전쟁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압니다. 우리는 100명쯤 됐는데, 전선에서 죽은 사람이 분명히 아흔 두 명이에요. 나머지는 모두 불구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고요. 사지 멀쩡히 돌아온 사람은 저 한 명뿐이었습니다."

- 소련군 참전 용사의 증언

전반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소련군이 궤멸시킨 독일의 전력은 25 개국 연합군 모두가 한 것보다 명백히 크다.

9. 관련 자료[편집]

  •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리처드 오버리)

  •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안토니 비버)

  • 독소전쟁사(데이비드 글랜츠)


[1] 벨리까야((위)대(한)) 아쩨취스뜨벤나야(조국) 바이나(전쟁), 영어로는 The Great Patriotic War라고 한다. 조국전쟁은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치른 전쟁이다. 거기에 대를 붙여서 대조국전쟁이다.[2] 2018년6월22일,문재인 대통령두마에서 연설 중 독소전쟁을 직접 대조국전쟁이라고 언급했다. 15분20초부터[3] 제2차 세계 대전/관련 인물 참조.[4] 스탈린이 떨어뜨리는 문서는 독소 불가침조약 문서이다.[5] 들고 있는 몽둥이에 쓰여 있는 단어는 합동 공세이다.[6]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이 패배한 직후 군중들을 다시 선동하기 위해서 베를린 스포츠 궁전에서 행한 연설이다.[7] 여담으로 괴벨스는 이 연설로 인해 더더욱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고한다(출처:안토니 비버의 피의기록 스탈린그라드) [8] 2차 상하이 사변, 우한 방어전 등.[9] 표면적 이유는 외교적 실패였으나, 유대인이었던 리트비노프가 해임된 것은 독일에 우호적인 제스쳐를 보낸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10] 본명은 레지널드 에일머 랜펄리 플렁켓-언리-얼-드락스(Reginald Aylmer Ranfurly Plunkett-Ernle-Erle-Drax, 1880-1967). 조지 6세 직속 해군 장교였다. 최종 계급은 해군 대장(계급)이다.[11] 냉전 당시 같은 동구권 국가였으며 민족 구성도 슬라브족으로 비슷한 면 때문에 가끔 오해하지만 폴란드와 러시아는 이란-이라크 관계급으로 사이가 좋지 않으며 그 역사도 유구하다. 1772년, 1793년, 1795년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영토가 3번이나 강제 분할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러시아 또한 폴란드 기병대 윙드 후사르 때문에 심한 골치를 앓던 적도 많다. 여기에 1919년-1921년, 러시아가 러시아 혁명을 겪어 국내적으로 아주 혼란하던 시기를 틈타 영토 수복을 위해 폴란드가 선제 공격을 날려 소련-폴란드 전쟁까지 겪어 두 나라는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다. 이러니 당시 폴란드가 독일과 홀로 싸울지언정 러시아와는 손 안 잡는다는 반응이 나올 만하다.[12] 실제로 소련은 독소전쟁 때 수백 개의 사단을 동원했으니 소련의 호언장담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독일 국방군은 독소전쟁을 개시할 당시 소련군이 유럽 전선에 동원 가능한 병력을 180개 사단 정도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180개 사단을 모조리 전멸시킨 독일군 앞에는 새로운 소련군 360개 사단이 기다리고 있었다.[13] 섬나라인 영국이 몇십 개 육군 사단을 유럽 본토에 투입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웃기기는 하다. 섬나라면 당연히 해군의 비중이 클 것이다. 독소 불가침조약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영국은 1907년 맺은 삼국협상이 영국의 참전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맹국인 프랑스가 두들겨 맞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참전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유럽 본토전에 대규모 파병을 굉장히 꺼려할 수밖에 없으며, 1939년은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때여서 영국이나 프랑스 둘 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처지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뮌헨 협정을 맺은 것에도 알 수 있듯 영-프는 독일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1차 대전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두 나라로서는 소련의 다자 안보 체제를 소련만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소련으로서는 '독일이랑 싸움 붙이고 니들은 손 떼려고?'라고 강하게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자세한 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협상 과정 문서 참조.[14]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이를 유럽에서 옛 차르 제국을 재건할 가능성이라고 표현했으며, 스탈린은 리벤트로프를 만날 때 어린애같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했다.[15] "알프레드 리스코프(Alfred Liskov)"란 인물로 독일군 내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였다.[16] 리스코프는 소련측의 프로파간다에 사용되다 감옥에 수감되었다 풀려나지만, 그의 최후는 알려지지 않았다. 스탈린이 독일군 탈영병을 역정보 제공 혐의로 사형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은 있는데 그것이 리스코프인지 아니면 다른 탈영병인지는 확인 불가[17] 브렌하드 본 루스부르크(Bernhard von Lossberg) 중령알프레트 요들 포병대장이 이른바 로스부르크 연구(Lossberg study)를 통해 작전을 입안했다.[18] 이 문 운운하는게 틀렸다고 말하기는 뭐한게,직접 소련과의 전면전을 겪은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소련은 금방 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게다가 초반,스탈린은 항복을 하기위해 불가리아 대사에게 협상을 요청햇는데,불가리아 대사왈 "우랄 산맥까지 후퇴하더라도 결국은 소련이 이길것입니다" 진짜 우랄까지만 후퇴하고 이김 예지력보소[19] 이러던 히틀러는 소련군이 전세를 뒤집고 반격을 개시해 전쟁 막판에 베를린 전투가 벌어져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는 오히려 독일인이 소련인보다 약해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독일인은 모두 멸종되어야 한다는 개소리를 지껄였다.[20] 이는 독일의 태도도 문제가 되었는데, 일전에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을때 일본과 아무런 의논없이 체결한 바 있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외교무능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이 총사퇴를 할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다. 그런데도 이후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서도 히틀러가 일본에 알리지말라 지시해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일본 외무장관이 조약을 맺기 한달전에 베를린을 방문해 불가침조약을 추진중이라는걸 알리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러니 일본 입장에선 그렇게 필요했으면 상의라도 하지 그랬냐고 불만이 나올수밖에 없는 상황.[21] 당시 미국내의 여론은 2차 대전을 유럽내에서 일어나는 즉 이웃동네 싸움 정도로만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내의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참전할 이유가 없다는 식이었고 이는 먼로 독트린을 바탕으로 한 방임주의의 영향이 컸다.[22] 그러나 소련은 초반의 기습으로 공업 역량을 상당히 빼앗긴 반면에 독일은 유럽 전역의 공업력과 자원을 끌어다 쓸 수 있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지원을 해 준 것도 1943년에 들어서의 이야기이다.[23] 몰로토프: "대영제국이 망했다고 한다면 지금 떨어지고 있는 폭탄은 누구의 것이오?"[24] 굳이 분석해보자면 이렇다. 당시 유럽은 이미 영국과 소련만이 남아있는 상황이었고, 나머지 국가들은 중립을 선언하거나 독일에 의해 모두 점령당한 상태였다. 만일 여기서 소련이 독일에 의해 점령된다면, 사실상 유럽에서 고립되어버린 영국이 스스로 항복하고 나오거나, 설령 영국이 끝까지 저항하더라도 소련의 막대한 자원과 인구를 바탕으로 군대를 재정비해 영국을 치면 전유럽의 통일이 완성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게르만족은 세계에서 제일 우월한 민족이니 노예 슬라브족들을 상대로 결코 지지 않는다.' 라는 히틀러 특유의 게르만 우월주의가 깔려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전선이 양면으로 형성되면서 안 그래도 부족한 군이 양쪽으로 나뉘게 되었고, 소련의 뒤를 쳐주길 바랬던 일본은 소련에 개겼다가 실컷 털리고는 바짝 쫄아있었으며, 게르만 민족은 세계에서 제일 우월한 민족이 아니었다.[25] 이 경우 독일이 일방적으로 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영국과 미국이 상륙도 못하고 독일과 신경전으로 아웅다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독소전쟁이 벌어지기 9개월 전만 해도 독일군은 프랑스와 독일 본토를 위시한 서유럽에 전 병력의 7할 이상이 몰려있었고, 심지어 됭케르크 철수로 영국군이 남기고 간 수많은 물자까지 노획한 상태라 제2차 세계대전 전 기간 중 컨디션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영-미 연합군의 상륙이 성공한 것은 어디까지나 독일이 괴물이 된 소련군을 상대하느라 대부분의 병력과 장비들을 동부전선에 보냈을 때 빈집털이식으로 들어와 전쟁의 방향을 사실상 확정시켜버린 것이었지, 만약 독일이 병력도 건재하고 특히 기갑부대들이 동부로 빠져나가지 않은채 그대로 있었다면 연합군이 설사 상륙했더라도 얼마 안 가 다시 바다로 쓸려나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6] 이 수치는 정확하지 않다. 1945년 종전 당시에는 2,000만이라고 주장하였고 현재 역사가들은 종전 이후 인구 성장률과 남녀 비율을 살펴 볼 때 최대 4,000만의 인명 손실을 주장하기도 한다. 주요 전장이었던 벨라루스우크라이나에서는 아직도 시체로만 이루어진 지층이 존재한다.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문서 참고.[27] 러시아에서는 다년생 검사 기준으로는 3700만 명까지 추산을 하고 있다.[28] 다만 1946-47년도 기근의 영향으로 베이비붐 수준은 미국에 비해서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출산율 3명대 후반을 기록할 동안 소련은 출산율 3명대 초반 정도 기록하던 수준이었다.[29] 이 사상자 수는 나치 독일이 대전 중 투입한 총 병력의 75%에 해당하며, 1939년 기준 전장에 투입 가능한 독일 성인 남성 인구의 46%에 달한다. 대전 중 남성 인구 절반이 죽거나 부상을 당한 셈이다. 물론 모든 부상자가 불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는 심한 부상으로 장애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이 수치는 민간인 피해는 포함하지 않은 수치이다.[30] 이 점에 있어선 미국더글러스 맥아더와 비슷하다. 주코프와 마찬가지로 맥아더도 성격이 매우 오만했으며, 정치적 야심을 의심받았기 때문에 정치계에서 견제가 심했다.[31] 전쟁 당시 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은 무려 30%~58%로 추산된다. 중국쪽에서는 70%라고 주장한다고 하는데 이쪽은 신빙성이 높지 않으므로 논외. 일단 58%로 잡은건 영국 학자 니얼 퍼거슨인데 이쪽은 아무래도 높게 잡힌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소련에게 잡힌 포로는 15~30%정도로 추산되며 30%는 마찬가리로 니얼 퍼거슨의 추산이다. 참고로 일본군에 잡힌 미군 포로의 사망률은 27%이고 중국군까지 집계하면 최대 40% 수준이니 저게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라는걸 알 수 있다.[32]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보면 포로로 잡힌 독일군의 내장과 갈비뼈를 볼때까지 고문하고 죽였다는 증언들이 있으며 나치의 병사들의 도청 기록엔 전쟁 초반에 포로로 잡힌 독일군들이 푸줏간에서 도살되거나 혓바닥이 못에 박힌채 잔혹하게 처형된 사례들이 다수 보고된다.[33] 당시 나치의 목적은 동유럽 지역의 비 게르만 족에 대한 말살이었으며 소련 측 감청자료에서는 이들이 입으로도 말하기 어려운 끔찍한 전쟁범죄를 즐거웠던 일처럼 추억하는 내용도 있다.[34] 2003년 독일 영화 베른의 기적에서 주인공 꼬마 아버지도 이때 징집되어 소련 전선에 갔다가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10년동안 강제노동을 하고 겨우 살아돌아왔지만 광부였던 아버지는 10년동안의 트라우마로 독일에서 광부 일을 하려고 하자 발작을 일으켜 일도 그만둬야 했다.[35] 후일 재조사에 따르면 네멜스도르프라고 선전된 학살 사진 상당수는 다른 동프러시아 마을에서 촬영됐다고 한다.[36] 출처 : Bellamy, Chris Absolute War: Soviet Russia in the Second World War. Macmillan, 2007. ISBN 978-0-375-41086-4 p.1~7[37] 독소전쟁의 인식이 한국에서 안좋은 게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등 제 2선급으로 소련에 타격을 준 나라가 있을 정도로 단순히 독일 VS 소련으로만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헝가리, 루마니아는 추축국에 가입하여 소련에서 나치 독일 못지않은 학살을 했다.[38] 소련이 자주 승리를 얻어낸 대전 후반부에도 소련의 손실은 연패를 거듭한 독일보다도 오히려 많았다. 전쟁 초반에 독일군과 소련군의 교환비는 무려 2~30 : 1이었다.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에 가서야 겨우 1 : 1 남짓으로 교환비를 좁히게 된다.[39] 다만 모스크바에서는 10월 혁명 기념일이 아니라 1941년의 모스크바 전투 기념일로 기념행진을 하는 경우는 있다.[40] 실제로 처칠은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에 바쿠 유전 지대를 폭격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했다.[41]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전 이루어진 회담에서 히틀러는 몰로토프에게 소련이 독일을 도와 참전할 경우 아프간을 거쳐 영국령 인도를 침공할 것을 부탁했으며 향후 인도에 대한 소련의 지배권을 묵인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소련 침공으로 없었던 일이 되었다.[42] 실제로 모스크바 전투 전에 스탈린은 히틀러와의 강화를 매우 진지하게 검토했다.[43] 그린힐의 대체역사 전집에서 참고. 해당 서적은 국내 미출간.[44] 다만 일부는 영국과 노르웨이가 모조리 독일의 손에 넘어갔다면 제해권이 완전히 장악되어 미국이 랜드리스를 하려고 하더라도 제대로 소련에 도착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틀린 의견으로 그 이유는 랜드리스 수송선의 북극 항로의 비중이 역사적으로 상당히 적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소련에 건네준 랜드리스 물품의 대부분은 북극 항로의 계절적인 위험과 영국을 포위한 유보트 때문에 북극 항로가 아닌 인도양태평양을 통해 옮겨졌다. 북극 항로를 통한 랜드리스는 초기에 시도해 보다가 손실률이 너무 커서 유보트를 거의 다 잡아낸 대전 후기까지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배만 운영되던 비주류 항로이며 랜드리스 물품의 과반수 이상은 일본과 중립 관계였던 소련이 직접 태평양을 통해 옮겼고 나머지도 대부분은 인도양으로 옮겨졌다. 이 북극 항로의 위험성 문제는 랜드리스가 42년 중반이 넘어야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치가 영국을 점령하고 그로 인해 일본이 독소전에 참전하여 태평양 항로가 막힌다고 가정하면 랜드리스 자체에 큰 위험이 되겠지만 단순히 미소 간 랜드리스로 한정한다면 북극 항로는 역사적으로 차지하면 엄청 좋은 항로지만 없다고 랜드리스 운송을 못할 항로는 아니었다. 북극 항로가 그나마 대전 총합 20% 수준의 랜드리스 물품이라도 옮긴 건 대전 후기에 유보트를 다 잡아내고 제해권을 장악한 이후에 이 항로를 애용했기 때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 초기에 북극 항로를 통한 운송 실패가 워낙 빈번하여 대전 총합 이 항로의 손실률은 7%에 달했다.[45] 독소전의 정신나간 스케일에 비하면 30개 사단이 별거 없어보이지만 상식적인 구성에서 30개 사단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대군이다. 그 유명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은 고작 4개 사단이었고 아프리카 전역의 대전투들이라는건 고작 몇개 사단들끼리 서로 치고박는 정도였다. 30개 사단은 북아프리카에 가져다두면 그 즉시 전역 자체가 종결되는 수준의 대군이다.[46] 극동의 부대들은 정예였고 그 수도 상당했으나 앞서 적혀있듯 심지어 소련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모스크바 전투에서도 소련은 극동에 대규모 군대를 유지했다.[47]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사실인데 막부 말에서 1940년까지 일본의 가상 적국 1위는 러시아(소련), 2위가 중국, 3, 4위가 영국과 미국이었다. 단, 해군은 미국을 주적으로 삼고 있었고 미국이 일본의 침략행위에 제재를 가하고 있었기에 언제든지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임을 고려해야 한다.[48] 실제로 당시 미국은 중일전쟁을 은근히 반가워하고 있었는데 전후 복구 사업에서 대규모 투자가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49] 하지만 이 주장이 추진에 어려울 것이 히틀러는 StG44의 초기형인 Mkb42의 시연을 보고 신무기의 채택을 원했지만 이미 널리 보급된 주력 소총인 Kar98k의 탄약과 호환이 되지 않았다. 그게 왜 문제가 되냐면 안그래도 총기 보급을 겨우겨우 해주는데 갑자기 새로운 총을 생산하면서 투 트랙 생산라인으로 가야한다는 것... 생산성이 심히 떨어져 오히려 더 빨리 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히틀러는 고심 끝에 자동화기의 생산금지를 명령할 수 밖어 없었고 그나마 군수장관인 알베르트 슈페어의 산업개혁으로 생산성이 향상되고 나서 MP43을 허가, 공식 명칭을 "Sturmgewehr, 돌격소총"으로 자신이 짓고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한마디로 히틀러의 자동화기 생산중지는 어느정도 일리가 있던 정책이였던 것.[50] 실제로 처칠은 소련과 전쟁을 벌일 생각을 진지하게 고려중이었고 아직 본격적 인종주의적 학살이 시작되기 이전인만큼 미국, 영국과 프랑스인들도 대체로 나치 독일을 절대악이 아닌 이웃 독재국가 정도로 여겼다.[51] 진압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외국으로 망명할 수 있는 조건까지 충분히 갖추어진 상태였다.[52] 당장 불가리아는 추축국이지만, 같은 슬라브족-정교회를 매개로 러시아와 매우 가까웠으며, 특히 제정 러시아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불가리아를 독립시켜줬기 때문에 소련을 상대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추축국인데도 독소전쟁에서는 병력을 보내지 않고 사실상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53] 애당초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개같이 털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원래 양면전쟁은 어떤 국가나 피하려고 하는 데다가 독일에는 전선을 두 개로 만들지 말라는 격언까지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확대한 점은을 일으킨 점은 두고두고 까일 일이다. 애시 당초 승리를 확신하지도 않으면서 2차 대전 애시 당초 독일 스스로도 이 전쟁에서 패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초기 전선이 잘 돌아가면서 잠시 착각을 했을 뿐 결국 예상대로 되었다고 볼 수 있을 듯.전투는 이기지만 전쟁을 이기지 못하는 독일의 종특 뭐...전체적으로 본다면 동맹간에 손발이 영 안맞았던게 문제기는 하다. 일본 제국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기에 소련을 협공하자는 독일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탈리아 왕국은 전쟁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제 앞가림도 못하는 바람에 독일이 상당한 도움을 줘야했으니(...)[54] 전황이 급격히 악화된 후 어느날, 히틀러가 프리드리히 대왕 초상화 앞에서 그 한달을 돌려달라고 절규했다는 풍문이 전해질 정도이다.[55] 예를 들어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이 1,500대의 전차를 보유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1,500대의 전차 대부분은 소련군의 전차들이랑 맞싸우기 힘든 중전차라고 부르기 힘든 경전차들이었다.[56] 이 때문에 소련군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냉전 당시 서방 세계의 독소전 연구를 패자의 손으로 쓴 역사라고 비판하기도 한다.[57] 이 공적으로 할더는 미국 훈장까지 받았다![58]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가 이런 기술을 하고 있다. 아마도 본이 되었을만한 영문 자료에서 따온 듯.[59]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군이 300만인 데 만해 소련군은 400만이 있었지만, 그것이 모두 분산되어 있었고, 특히 최전선에 배치된 290만은 독일군에 수적으로 적었을 뿐만 아니라, 방어 진지에 대대 단위로 분산되어 있어서 각개 격파당했다.[60] 아주 예외적으로 독일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소련군을 격파한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이 있지만 일반화될 수는 없는 사례이다.[61] 에스토니아 1사단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기도 했으며 제3 SS 의용 에스토니아 여단을 기반으로 확대 개편한 것이다.[62] 에스토니아 동부에서 지원 혹은 강제 징집된 에스토니아인을 근간으로 편성되었다. 산하에 제7 '에스토니아' 소총병 사단과 제249 '에스토니아' 소총병 사단을 두었으며, 이들은 전후 각각 제118근위소총병 사단과 제122근위소총병 사단으로 발전했다. 군단 자체도 마찬가지로 '근위'와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의 칭호를 수여받아 제41 '에스토니아 탈린' 근위소총병 군단으로 개편되었다.[63] 2001년에 출판되었다. 당시에는 깨끗한 국방군 이론이 주류였을 때였다.[64] '러시아를 침공하다가 격퇴로 전사했던 유령 기사단'을 부활시켜 써먹으려는 SS 친위대의 음모와, 이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소련군 비밀기관의 소녀인 나댜의 이야기를 다룬다. 트레일러 영상을 보면 독일군의 이족 보행병기도 나오는 등 여러 편을 기획한 모양인데, 1편의 흥행 성적이 나빠서인지 유령 기사단을 다룬 1편이 나온 지 3년이 지난 2015년 현재까지 후속작 소식은 없다. 사실 스토리나 작화 등은 괜찮은데, 다큐멘터리처럼 실사 인터뷰 내용 등을 집어넣는 등 연출이 나쁘다.[65] 수송 트럭을 타고 가다가 소련 공군의 기총 소사로 바로 옆에 탄 친구를 잃는다든가 분대원이 너무 굶주려서 소련군이 먹다가 남기고 간 삶은 감자를 먹느라 소련군을 놓치기도 한다. 전선에서 겪는 질병은 덤이다.[66]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제2차 세계 대전 4부[67] 1941년 7월 3일의 라디오 연설에서.[68] 브레스트는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의 도시였으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의 침공에 호응해 동쪽에서 쳐들어온 소련군에게 점령당해 이곳을 기준으로 양국은 폴란드를 동서로 분할했다. 분할선의 기준점이 된 이상 이곳은 당연히 소련의 가장 최전방에 위치한 도시가 되었고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다. 요새는 1주일 간 저항하다 결국 함락당했고 요새 내 병력 9천여 명 중 2천여 명이 전사했다. 이 문구를 쓴 병사가 생존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정황상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문구대로 4년 후 이 병사의 조국조국을 유린한 침략자들에게 복수하는 데 성공한다.[69]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리처드 오버리 저, 류한수 역)[70] 다만 이 이야기가 나온 배경은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이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