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

최근 수정 시각: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0112301211820002010-001.gif
파일:external/kookbang.dema.mil.kr/BBS_201303070458353660.jpg

위 그림은 국방일보에 나온 기사의 그림으로, 여성 탈북자 이애란씨가 탈북 후 남한에서 통감자를 보자 북한에서 먹던 통감자가 생각났다는 이야기로, 배고픔이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이야기.[1]

1. 개요2. 진행 과정
2.1. 식량난 도래2.2. 에너지난&수송난
3. 파멸적인 결과4. 영향5. 기타

1. 개요[편집]

고난의 행군은 1995년에서 1998년까지 북한에서 발생한 대기근을 이르는 말이다. 영어로는 Arduous March라고 하는 듯. 한 마디로, 지금의 북한이 현재의 막장 형태로 변하기까지의 과정인 기간이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095-00_01202816.jpg

이 당시 MBC 뉴스데스크에 보도된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 참상이다(미국 CBS 촬영). 1997년 10월 2일, 북한 주민들의 굶주리는 모습이 미국 CBS 방송에 방영되며 전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미국 CBS 방송, 굶주리는 북한의 모습 미국 전역에 방영. 당시 북한을 취재한 기자 피터 밴 센트는 북한 인구의 1/5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전하며, 북한을 돌며 북한의 고난의 행군으로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비참한 상황을 촬영하였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단어는 원래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김일성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쫓겨 다니며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가며 유격전을 감행했다고 주장하던 대장정 삘나는 시기와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북한의 궤멸적인 경제난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현재도 김일성의 유격전을 1차 고난의 행군, 8월 종파 사건을 2차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북한이라는 국가 조직의 모든 기본적인 시스템을 붕괴시켰다.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북한이 막장국가가 된 도화선. 그래도 고난의 행군 전에는 그럭저럭 먹고 살았고 나라도 정상적으로 잘 운영되었다. 실제로 90년대까지 월북이 발생했던 이유기도 하다. 아무리 발악을 해도 지옥 같은 상황을 숨길 수 없는 현대와는 달리, 90년대까지만 해도 적어도 외신에 소개되는 평양직할시와 근방은 남한의 80년대 정도의 수준은 유지했다. 더군다나 당시에 북한 관련 자료는 폐쇄적인 운동권 내부 자료로만 접할 수 있었으니.

사람의 하루 평균 권장 소비량은 600g인데[2], 김일성 시대, 그러니까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620g 정도의 쌀을 배급하였다. 즉,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80년대 후반 즈음부터 농사 작황이 좋지 않아 양이 조금씩 줄기 시작하더니, 고난의 행군 시기 들어서부터 그 배급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 시기 김정일의 미친 짓.

이후 김정일 시대와 현재 이어지는 김정은 시대까지, 100g이 조금 넘는 양을 그것도 아주 가끔 배급하고 있다. 국가 전반의 산업은 붕괴되었으며, 배급 제도로 운영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배급을 중단하였다는 건 배급에만 의존하며 살았던 인민들을 죄다 굶어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단, 평시에도 제대로 배급제를 실시한 사례는 북한이 이례적인 경우이다. 사실 소련에서도 배급제는 스탈린 초기 시기, 정확하게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와 2차 세계대전 시기에만 제한적으로 시행되었고, 1947년 12월 들어서면서 배급제를 완전히 폐지시켰다[3]. 물론 배급제 폐지 이후에도 간간히 상당수 물품들은 배급하기도 했지만 법적으로 공식화된 건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물건을 팔았냐면, 국가에서 각 가게별로 물건을 보급하고, 소비자들은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방식으로, 사실 유통 과정 자체만 본다면[4] 서방과는 큰 차이는 없었다[5]. 다만 TV나 자동차 같은 사치품을 제외한 생필품은 국가에서 굉장히 싸게 공급했는데, 중간에서 차액을 노리고 물건을 빼돌리는 경우가 은근히 많았고, 또한 급작스러운 수요가 발생할 때를 대비되지 않다보니[6] 물건 공급이 후달리는 경우가 꽤나 빈번해서, 어떤 가게에서 좋은 물품이 나왔다는 소문이 나오면 무조건 줄을 서는 경우가 많아서 다리가 아팠다나...[7]

여하튼, 북한은 배급제를 공식적으로 폐지시킨 것은 아니었으니 영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북한의 인민들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일은 더 시키고 학생들까지 노동과 농사일까지 시달리게 되었다. 당연히 배가 고파져 도저히 일을 하러 올 수 없는 사람이 늘게 되어 노동자들은 직장에 출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배급이 줄자 북한의 인민들은 장마당에서 식량을 구해다 먹게 되었고, 부족한 식량을 조금이라도 증산시키기 위해 농사에 동원되면서 기초적인 국가 시스템은 마비되었다. 철도는 움직이지 않았고 편지 배달을 할 집배원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북한에서 시장 경제가 싹트는 계기가 되었고, 탈북자를 급속도로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북한 내에서 이 시기부터 경제적인 의미의 계층분화[8]가 시작되었다.

2. 진행 과정[편집]

2.1. 식량난 도래[편집]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말 대대적인 집단농장화를 완수한 북한의 농업은 외견상 전쟁으로 인한 물자와 노동력의 부족을 해소해 가면서 착실히 성장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근저에는 사회주의 농업의 고질적 병폐인 부족의 경제국가로부터의 과도한 수탈이 만연해 있었다.

1960년대 쿠바 위기와 중소 분쟁, 베트남 전쟁 등으로 연이어 위기를 느낀 북한은 국가경제 운용에 있어서 자력갱생을 원칙으로 내세웠고, 이는 척박한 북한 토지에서 농사를 지을 때 가장 중요한 화학비료 생산량의 감소로 이어졌다. 아직은 에 불과하지만, 이로 인해 촉발된 경제위기가 1960년대 말 북한의 과도한 무력도발과 이어지는 갑산파 숙청의 계기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김일성은 1970년대 초부터 적시적작, 적지적작을 통해 화학비료의 사용을 줄인다면서 다락밭 개간과 강냉이 영양단지 농법, 밀식재배를 주축으로 하는 주체농법을 내세웠고, 1975년 435만톤의 식량을 생산하면서 이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주체농법은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영양단지 농법, 일명 주체농법이란 사진처럼 거름이 많은 부식토에 미리 강냉이 알을 심어 싹을 틔운 뒤 이를 밭에 옮겨 심는 것으로, 말하자면 강냉이판 모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벼운 벼 모를 심는 모내기만 해도 엄청나게 노동집약적인 농법이라 논 하나에 마을 하나가 통째로 달라붙어야 할 정도인데, 그게 강냉이를 심은 모종에 산비탈에 만든 다락밭이 작업장이라고 하면 어떨까? 더 심각한 건 심는 건 이앙기를 개조해서 굴리면 된다 쳐도 진짜 문제는 파종이다. 벼만 해도 파종기를 써도 인력이 많이 들어간다. 근데 강냉이는 한 칸에 한 알씩 일일히 심어줘야 하고, 그런 파종기는 적어도 민수용으론 존재하지 않으므로, 결국 가뜩이나 기계 써도 인력을 미친 듯이 먹는 작업을 기계 없이 순수 인력만으로 해야 한다.

막대한 노동력이 주체농법에 투입되기 시작하자, 이런 주기적인 농촌지원전투 동원은 사회의 전체적인 생산 능력마저 감퇴시켰다. 게다가 척박한 한반도 산악지대에서 지력을 미친 듯이 소모하는 옥수수를, 그것도 밀식으로 재배하면서 일시적인 식량 증산은 가능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지력고갈을 피할 수 없었다.

그 결과 1970년대 말부터 북한의 농업 생산량은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감자를 심는 것이 낫기 때문에 감자를 보급하려 했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다. 다만 북한 입장에서 감자가 그다지 유용한 작물이 아니다. 옥수수보다도 척박한 량강도 고산지대에서 재배가 용이하다는 정도의 장점이 있을 뿐, 단위 면적당 수확량 및 열량 충족도, 특히 보존/수송에 있어서 난점이 있기 때문에 북한의 처참한 물류 환경으로는 옥수수에 비해 쓸모가 없다. 1998년부터 그렇게 대홍단 감자 노래를 불러댔으면서도 그놈의 감자 농사가 여태껏 량강도를 못 벗어나고 여전히 옥수수와 쌀을 주식으로 삼는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식량 생산량이 줄어드는 것은 남한도 마찬가지 현상이기는 한데, 남한의 경우 식량 생산량 감소의 직접적인 원인은 맛 없다고 혹평이 쏟아지는 통일벼 재배[9]의 포기와 대규모 도시화로 인한 농지 감소, 밀가루 등 저렴한 대체작물의 수입, 당분 및 육류 등의 섭취량 증가로 인한 주식작물 소비량 감소가 수반되었던 반면, 북한은 그런 요소가 없이 식량 생산이 줄어들었다는 게 가장 결정적인 문제였다. 거기다 남한은 식량 수입이라도 하지, 자력갱생 내새우는 북한은 식량 수입 같은 건 없었다[10].

일부 지방도시에서는 1980년대부터 배급이 밀리는 현상이 발생했고, 신의주청진 등 대도시들도 이런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11] 1980년 371만톤[12]까지 떨어진 식량 생산량은 1991년 441만톤으로 회복되었지만, 고난의 행군이 일어나기 직전인 1993년에는 동아시아를 휩쓴 냉해로 인해 다시 388만톤으로 떨어지는 등 극심한 등락이 반복되었다.

참고로 2013년 북한의 식량 생산량 추정치는 약 480만톤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북한에서 필요한 식량 소요량은 약 500만톤. 일반적인 국가에서 연간 30만톤 정도의 식량 부족분이라면 외국에서 수입하면 되기는 한데, 북한의 경우 군사력 유지와 정권 세습을 위해 여기저기 돈을 쏟아붓다 보니 식량 사올 돈이 없다는 게 문제로 그 좋은 본보기가 바로 금수산태양궁전이다.

이 쯤 되면 일찌감치 중국이나 베트남의 사례를 본받아 농업 부문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하는 것이 상식이다. 조금 자세히 짚어보자면 영농조직의 소규모화와 자율화, 정부 수매의 축소와 개별 처분권 강화 등이 골자가 될 것이다[13].

다만 소규모화와 자율화에서 무작정 개인농화하는 것은 자칫 개별농가의 영세화로 이어져 국내 농업의 전반적인 붕괴를 야기할 수 있다. 일례로 폴란드는 막 공산화 되었을 시절에 집단농장을 만들어냈으나, 1956년 호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이어서 벌어진 포즈난 항쟁 이후 스탈린주의파가 물러나고 고무우카가 집권하면서 백지화,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는 드물게 개별 자영농 체제가 유지되었지만, 그 결과 폴란드 농업은 영세화를 면하기 힘들었다.[14] 반면 러시아의 경우 개별농으로 전환된 농민들이 결국 콜호스를 재결성, 자본주의 협동조합화 하였다. 중요한 것은 조직을 어떻게 운용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강제적 정부수매는 국방경제병진 노선과 직결되는 문제다. 간단히 말하자면 '군량미 확보'. 그리고 농업집단화와 주체농법은 수령 스스로가 바득바득 우긴 결과이니 철회=수령의 오류 인정이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은 주체사상을 통해 수령의 무오류성을 하나의 사상으로 확립해놓은 상태였고, 그 작업을 진두지휘한 것이 바로 김정일이었다[15].

북한에서 소련이나 중국에서처럼 후임 지도자가 전임 지도자의 정책을 바꾸거나, 혹은 베트남처럼 당 내의 개혁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관철시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사실 이는 김일성이 정확히 의도한 바였다. 심지어 하부단위에서 자체적으로 자구책을 마련할 수조차 없는 여건이었다.

결국 북한은 어영부영하는 사이 1995년 갖은 자연재해를 겪고 농촌진흥청 추산 345만톤에 불과한 식량 생산량을 기록하면서 파멸적인 경제난의 막을 올렸다.

여기까지라면 "뭐야, 생각보다 심한 게 아니었네?"라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위에도 나왔듯 1993년에도 300만톤 대의 식량 생산량을 기록한 바가 있지 않은가? 물론 고난의 행군은 단순히 식량 부족만으로 발생한 사태는 아니었다. 단순히 이것이 고난의 행군의 전모라면 외국으로부터 식량 수입을 하거나 혹은 식량 지원을 받으면 어지간한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진짜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2.2. 에너지난&수송난[편집]

1960년대부터 자력갱생을 내세워 온 북한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전력 중심의 에너지 수급 정책을 고수했다. 수력 자원과 석탄 자원은 나름 넉넉했기 때문이다. 소련이나 중국을 통해 들여온 석유는 군용 차량이나 단거리를 수송하는 민간 차량, 각종 선박 등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북한의 높은 전철화율과 철도 중심의 수송체계가 대표적인 사례다. 장거리에 거쳐 계획적으로, 저렴한 수송이 가능한 철도가 교통의 중심이 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저개발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례다.[16] 북한은 특히 석유의 사용을 줄이기 위해 부족한 재원을 주요 철도의 전철화에 집중했고, 그 결과 전체 철도의 80%를 전철화하는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철도 수송 능력의 강화에 절실하게 필요한 복선화와 선형 개량은 포기해야 했다. 거기에 김일성은 전철화를 우선적으로 추진하면서 철도 복선화 요구를 대놓고 씹어버린 바 있다. 전철화를 택하고 복선화를 포기한 것 자체는 자금, 인력 등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의 선택과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나름 일리 있다고 보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자력갱생 운운만 안 했어도 이럴 일은 없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렇게 전철화를 이뤄내면서 수송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 참 좋았겠지만, 문제는 전철화로 향상된 견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각종 제반 사항들이 제 때 개선되지 못하면서 북한의 전기철도는 전기 먹는 기계로 전락해버렸다.

제반사항이라고 함은, 예를 들면 한꺼번에 많은 짐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좀 더 무거운 중량화차와 이를 받아낼 중량궤도가 필요하다. 또한 열차 편성이 길어지면 그만큼 대피선이나 신호장 등도 확충되어야 단선에서도 무리 없이 교행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 사업들이 제대로 수행되는 일은 없었다. 철도전기화에만 신경을 쓴 북한은 이어지는 후속 사업들에선 거짓말처럼 파행을 거듭했다.

오죽하면 김일성이 대놓고 "니들 전철화만 해놓으면 다냐? 다른 것도 제 때 해놔야 할 거 아냐!"라며 짜증을 냈지만, 니가 저지른 응가는 보지도 못하냐, 이 혹부리돼지야!! 위에서 보듯 철도가 제대로 짐을 실어나르지 못하는 판인데 제철소에서 어떻게 철광석을 받아서 강철을 생산하고, 공장에서는 어떻게 강철을 받아서 궤도와 화차를 생산하고, 철도국에서는 어떻게 궤도와 볼트와 자갈과 공구를 받아서 대피선을 설치한단 말인가? [17]

이것이 철도 내부의 문제만으로 끝나면 참 다행일 텐데, 문제는 발전소에서 석탄을 받아야 전기생산하고, 전기가 들어와야 석탄을 캔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의 탄광들은 갱도식이기 때문에 조금만 발전기가 멈춰도 지하수가 차버려 못 쓰게 된다. 이렇게 멈춰버린 탄광들이 부지기수다. [18]

수력 발전소가 있다고는 하지만, 하상계수[19]가 큰 한반도에서 수력발전은 계절간에 발전량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화력이나 원자력발전은 필수다.[20][21] 사실 수력발전 자체가 한반도, 중국, 인도, 동남아 같은 몬순성 기후에는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다. 현재도 수력발전이 발달한 나라는 대부분이 영국, 노르웨이1년 내내 강수량이 고른 해양성 기후를 띤 나라들이다.

게다가 그 수력발전소들의 상당수는 일제강점기의 설비나 구 소련이나 동유럽에서 오래 전부터 쓰다가 새로운 발전기를 도입하면서 버려야 하는 것들을 북한에 무상 공여해주었고, 그걸 북한측은 운영하는 식이기에 고장이 나면 더 이상 고칠 수도 없는 데다가[22] 어떻게 가동된다고 하더라도 발전 효율성은 안드로메다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수송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1970년대 중반의 일로, 결국 김일성이 직접 "차도 좀 멀리 많이 굴려라!"라고 주문할 지경에 이르렀다. 차 굴릴 기름은 있는감? 실제로 북한은 1970년대부터 평양원산간 고속도로를 비롯해 각종 고속도로를 건설했고, 유류소비량도 1980년대 중반까지 큰 폭으로 늘어났다. 어차피 기름 쓰게 될거 차라리 철도 복선화에 몰빵치지...

하지만 이후 북한 경제의 내부예비 고갈과 80년대의 삽질로 쓸 수 있는 예산이 크게 줄고, 이로 인한 성장률 감소 현상이 지속되면서 유류소비량의 성장은 둔화되었고, 여기에 크리티컬 히트를 날린 것이 1990년대 동구권의 체제 전환이었다. 그동안 무상지원이나 현물 교환으로 들어오던 각종 원자재나 기계 부품 공급이 끊겼다. 소련 몰락 이후에 제 코가 석 자인 러시아에서는 달러를 요구했는데, 북한엔 위조 달러만 넘쳤다는 소문이 있다.

참고로 공산권 국가들은 화폐 가치로 무역을 하지 않고 노동 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물물교환 형식의 거래를 주로 했다. 정치적인 배려로 공산권 큰형님인 소련이 많이 퍼주기도 했었다.

어찌되었든 다급해진 북한 정부는 1991년 라진선봉경제무역지대라는 나름의 승부수를 띄웠지만, 70~80년대에 시장경제에 적응할 기회를 제 발로 차낸 끝에 다급하게 도입한 특구가 제대로 돌아갈 리는 만무했고, 들어오는 달러 수입은 신통치 않았다[23][24]. 게다가 거의 의존하고 있던 공산권 형님인 중국러시아는 체제를 전환하고[25], 심지어 폴란드, 체코, 헝가리, 몽골, 베트남, 불가리아 등 공산권 동지 국가들이 90년대 들어 북한의 철천지 원수 대한민국과 국교를 맺어 정치적/체제적으로 매우 큰 충격까지 받게 되었다[26].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이지만 대한민국은 너무나도 성장한 상태였고, 북한은 그 자신의 폐쇄성이나 지도자의 쓰잘데기 없는 고집 등으로 인해 점점 더 심하게 나락으로 빠져갔다.

사실 북한도 1984년 합영법과 합작법을 시행하고, 1986년 관광총국을 만드는 등 이래저래 뭔가를 하기는 했다. 문제는 그것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전면적인 시장화 개혁·개방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돈 몇 푼에 합영·합작 기업의 뒤통수를 치는 등 뻘짓만 잔뜩 하다가 시간을 날려먹었다는 것이다.

결국 1993년 북한의 화력발전량은 88억kWh(추정)를 기록하며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100억kWh선이 무너지는 참사를 맞이했으며, 현재까지도 좀체로 100억kWh선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전력이 부족해지자 군수·중공업 부문에 우선적으로 전력을 공급했지만, 그 결과 안 그래도 빈약했던 경공업 부문이 연쇄적으로 붕괴하면서 농민들과 근로자들의 생활고는 가중되었다.

여기에 국가 교통의 근간을 이루는 철도가 전력 부족으로 운행에 어려움을 겪고, 이를 보완해야 할 도로교통 또한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서 국가 수송체계 또한 전면적인 마비에 직면했다. 설령 쌀이 있다 해도 실어나를 수 없는 전근대적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일례로 1996년 청진철도국에서는 남포항에 쌀이 들어와 있는데 이걸 실어올 수가 없어서 쫄쫄 굶고 있었다. 다른 조직도 아니고 철도국이 말이다.

에너지난과 수송난이 고난의 행군에 미친 영향은 식량난의 피해 분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UN에서 2002년에 자강도, 강원도를 제외한 북한 전역에서 실시한 어린이 발육부진 현황 조사를 보면, 식량 생산이 적고 공업 비중이 높은 함경남·량강도 같은 동북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평안남·북도가 뒤를 이었으며, 곡창지대인 황해남·북도는 지방 중에서는 가장 피해가 적었다. 물론 가장 피해가 적은 건 평양직할시남포특별시다.

1920년대 소련 대기근이나 대약진운동 당시 중국 대기근이 주로 농촌 지역에 피해가 집중되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1990년대 이후 북한의 시장화가 주로 함경북도 및 량강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반정부 움직임 또한 나름 나타나는 것은,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과 함께 이 시기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동안 북한의 문제를 정리하자면, 북한의 제한된 예산으로는 철도를 개선하는 데 전철화와 복선화&선형개량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고, 김정일은 이 중 전철화를 택했다. 이로 인해 북한의 철도는 대부분 전철로 바뀌었지만 대신 다른 정비 사업에 쓸 돈이 없어졌고, 이는 좋은 전철을 가지고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철도가 주요 수송 수단이었던 북한은 전철의 효율성이 떨어지면서 국가 전체가 마비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전철을 굴리려면 전기가 필요하지만 문제는 전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석탄을 나를 수가 없었다. 또한 석탄을 캐는 탄광 역시 전기가 있어야 석탄을 캘 수 있었기에 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대체 에너지 자원이지만 수력발전 같은 건 북한의 들쭉날쭉한 강수량으로는 효율이 개판이었고, 1980년도 북한의 내부 예산마저 고갈되며 북한은 고립되었다. 이때 중국이나 러시아에게 지원이라도 받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건 있을 수 없었고, 결국 90년대에는 에너지 생산량이 바닥을 치며 국가 전체가 마비가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3. 파멸적인 결과[편집]

황장엽회고록을 근거로 300만이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북한 외무성은 22만 사망설을 주장했다.[27]

황장엽은 고난의 행군 첫 해에 100만 명이 죽어나갔고,[28] 이후에 추가로 100만명이 더 죽어나갔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300만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소한으로는 150만, 많게는 350만은 죽었다고 주장했으며, 함흥시에서 입수된 내부 문서는 360만 사망설을 적고 있었다.

하지만 2008년 UN에서 조사단을 파견해 직접 인구조사를 실시한 결과, 예상보다 총 인구 숫자가 많았다. 이 조사 결과로 추정한 고난의 행군 시기 아사자는 의외로 북한측의 주장에 가까운 약 30~40만 명. 물론 그래도 많은 숫자임은 확실하다. 당장 이 당시 인구 17만명의 김책시에서만 하루에 무려 200명이 죽어나갔을 정도로 심각했다.

인구의 5%가 사라진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나 인구의 5%가 증발한 대약진운동에 비하면, 인구의 1.5~2%가 감소한 것은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문제는 저 수치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태도 절대로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실제, 나름대로 잘 먹던 70~8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던 북한 성인층은 그래도 허우대가 비교적 좋은 반면에 아사 현상이 발생한 9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키가 아주 작다. 이 때의 청소년들은 성장이 매우 느려서 탈북 관련 TV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10대 후반의 고등학생이 한국의 10대 초반 초등학생과 비슷하였고, 10대 중반의 여학생은 아예 한국의 8~9세 정도의 성장을 보일 정도로 영양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

더 심각한 것은, 대약진운동은 몇 가지 병크로 인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로 수습 또한 고난의 행군과 비교하면 단기간에 성공한 반면, 고난의 행군은 무려 만 5년에 걸쳐 이런 엄청난 기근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워낙 구멍이 크고 광범위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 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었던 것. 반 세기 동안 내부 자원을 있는 대로 쥐어짜내고 갉아먹은 끝에 발생한 기근이니, 단기간 내에 수습이 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마오쩌둥마저도 권위는 유지했으나 실권을 크게 상실하고, 뒷방 늙은이 직전까지 전락할 정도로 '책임'을 지도록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도, 오직 외부에만 책임을 돌리고 사실상 정권 핵심부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북한의 정치 체계가 정상적인 수준의 평가기능은 커녕, 최소한의 판단 능력조차도 완전히 상실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는 이 때부터 북한 정권이 어떤 집단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특히 한국 내 북한에 대한 환상은 이 일을 계기로 완전히 깨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그래도 빠는 애들이 있다

고난의 행군은 북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지나친 영양 결핍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갈 정도다. 성인에 진입한 90~00년대 출생자들의 키가 머리 하나 크기 감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2014년 현재 10~20대의 평균 신장은 150cm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을 발육부진 세대라고 부른다. 출생자들의 저신장으로 인하여 이들의 군 복무 시기부터 대폭 하향된 신검 신장 기준이 확인이 되면서 이 추측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또한 이 대재앙은 북한의 교육에도 커다란 악영향을 줬다. 이 시기를 겪은 아동들, 그러니까 90년대 출생자들의 문맹률이 이전 세대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했다. 북한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그것도 쉽게 배우라고 창제된 한글을 쓰는 국가에게 무슨 문맹이 발생할 수 있느냐는 말이 나오겠지만, 정말로 농담 아니고 이 시기를 거친 탈북 청소년 절대 다수가 한글조차도 읽거나 쓰질 못한다고 한다. 폐쇄적이고 철옹성 같았던 북한의 시스템 자체가 이때 당시 총체적 난국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북한 관련 통계를 보면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인데, UN 추산 1인당 GNI가 1994년 약 400$ 수준에서 1995년에는 200달러로 급감했고, 이후 2012년까지 600달러를 회복하지 못했다. 사실 1990년부터 GNP 하락이 시작됐다는 것을 보면 이 시기 북한 경제는 말 그대로 멸망.

2000년 북한은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하며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경제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기에 이후에도 15만 명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수치상으로는 대략 90년대 초반 수준으로 경제 상황은 상당히 나아졌고 시장도 크게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시장화의 부작용으로 양극화 현상이 벌어져 빈부격차가 급속히 커진 데다 사회 복지 제도와 배급 체계는 고난의 행군 시기 이전으로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장화 과정에서 부를 축적해 출세한 계층[29]을 제외한 나머지 계층의 사정은 굶어죽을 일이 줄어들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고난의 행군 이후 인구 손실 추정.

김정일은 이 시궁창스러운 결과에 대한 책임과 관심을 애먼 데로 돌리느라 급급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심화조 사건이었다.

4. 영향[편집]

북한 주민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의 탈북을 감행하였고 이 중 일부는 한국으로 입국하게 된다[30]. 물론 그 전에도 소수 주민이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넘어왔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정치적인 문제가 주류였다. 경제적 문제로 생존을 위해 북한에서 도망친 탈북자의 존재가 대규모로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를 기점으로 북한의 여성들의 지위가 급상승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공장이나 기업소가 문을 닫는 바람에 직장 생활이 의무적(?)인 남성이 졸지에 실업자가 되고 만 것[31]. 그러다보니 그동안 가정에서 살림만 하던 여성들이 밖으로 나와 장사를 시작한 것이 장마당의 시초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북한의 경제 주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되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버린 남성은 '집 지키는 강아지' 내지는 '낮전등(낮은 밝기에 전등을 켤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한마디로 잉여라는 뜻)' 정도로 그 위치가 전락하고 말았고, 여성은 지위가 높아지자 이혼까지 할 정도로 위치가 높아졌다.

타이밍이 좋게도 김일성이 죽고 바로 시작된 재앙이라서 탈북자들이나 북한의 나이 든 사람들은 "김정일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 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가 꽤 탄탄하게 자리 잡혀[32] 배부르게 먹거나,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았던 80년대를 겪다가 이런 대기근을 겪으니 더더욱 잊을 수가 없을 듯.

사실 김정일에게 실드를 쳐주기도 힘든 이유는 김정일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 이미 일선에 나섰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는 아예 아버지를 대신해서 직접 북한을 통치했기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김정일을 그리도 비난하던 황장엽은 적어도 김일성이 집권을 하던 시절에는 죽어라 굶주리진 않았다며 비난을 하지 않았다. 결국 황장엽 역시 탈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김일성이 살아있었다 해도 북한은 이미 1990년부터 지속적인 마이너스 경제 성장을 기록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전면적인 개혁개방을 하지 않는 이상 이런 결과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1993년에 라선항을 특구로 지정하는 등 부분적인 개방 정책을 펴기는 했다. 경제-외교정책을 전면적으로 전환하지 않아서 문제다.

더불어 고난의 행군을 쿠바 같은 북한과 동맹이던 나라나 해외에서도 잘 알고 "쟤들은 왜 저러냐?" 하고 어이없어 한다. 쿠바를 여행한 한국 여행자가 쿠바 전직 외교관[33]인 집주인과 만나 이야기한 경험을 보면, 이 사람이 외교관 시절인 90년대 북한에 가서 지옥을 눈으로 봤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쿠바는 정말 북한에 견주면 천국이지, 저렇게 굶어죽는 사람 여긴 없잖아" 이렇게 느끼고 와서 쿠바에 대하여 외국이 뭐라고 비난하면서 코웃음 치면 "북한 같은 나라를 보라구 쯧쯧" 이렇게 반론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외교관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과 친하게 지낸 피델 카스트로조차 이 일에 대하여 당시 허구헌 날 김정일을 미쳤다고 욕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과 우호를 다졌고 북한과 일단 우호국이라 외교적으로 대놓고 이러진 못했고, 쿠바 정계에서 "아주 민중을 굶겨죽이네..." 라고 미친 놈이라고 꼴보기 싫다는 투로 투덜거렸다고 한다. 정작 미국 같은 서방 국가들 사이에서는 저런 식으로 카스트로 자신이 욕 먹고 있긴 하다.[34] 김정일과 카스트로가 비교된다는 건 카스트로에게 굴욕이다.

카스트로 말고도 쿠바 내 정계에서도 다 같은 반응이었고 다른 반미 나라, 구 공산권 나라들이라든지 북한과 우호국인 나라 대다수는 같은 반응이었다. 외교적으로 차마 뭐라고 비난은 안했어도 언론이나 여론에서 북한이 미쳤다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이 수두룩했었으니까.

사실 쿠바도 북한과 비슷한 시기[35]에 경제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이쪽은 군비를 대대적인 축소까지 하며 배급 제도 같은 기본적인 사회 복지 시스템은 최대한 유지하려 노력했고, 또한 농업 체계도 개편해서 유기농 농법을 확산시켰다. 북한에서 이렇다 할 조치를 하지 못하는 사이 쿠바에선 자영업의 활성화 및 관광 산업 활성화 등의 정책을 통해[36] 2000년대엔 상당한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일단 1990년대 초반의 경제난을 그럭저럭 극복했다. 그에 반해 북한은 90년대 고난의 행군 와중에 산업 기반 및 사회 복지 체계 자체가 깡그리 리셋됐기 때문에 그 후유증이 매우 컸고, 2000년대 와서야 겨우 부분적인 자영업 활성화 조치를 했는데 그마저도 매우 소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거기에 핵실험까지 더해 중국의 호황과 남한과의 경제 교류 확대라는 절호의 기회를 얻고도 경제를 90년대 초반 수준으로 돌려놓는 선에 그쳤다. 이건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도 이때 일어난 경제난의 영향을 전부 극복하지 못하는 중이다.

북한은 미국의 경제 제재를 탓하지만 당연히 북한이 하는 소리는 그냥 헛소리다. 자력갱생하는 주체적인 나라라면서 타국의 경제제재가 무슨 상관인가?[37] 김정일은 그 당시에도 정작 인민들에게는 자신이 줴기밥(주먹밥)[38]소금국으로 연명한다며 거짓말을 하고는 혼자 산해진미는 죄다 처먹어대서 지금도 두고두고 까인다[39].

조선일보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천국의 국경을 넘다"를 보면 북한에 사는 여동생을 탈북시킨 언니가 북한으로 기어이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여동생에게 "김정일이 때문에 삼백만이 굶어 죽었는데 왜 돌아가니?"라고 뜯어말리는데도 여동생은 "우리 장군님은 잘못 없다. 그건 다 제 명에 죽은 거다!" 궤변을 늘어놓는다. 언니가 "굶어 죽은 게 어찌 제 명이니?"라고 해도 "제 명이다!"라고 고집을 부리고 끝내 북한으로 돌아간다. 물론 이 여동생은 돌아간 후 무시무시한 곳으로 끌려가서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 당국의 세뇌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다. 허나 지금의 북한의 궤멸적인 상황은 더 이상 이런 세뇌로도 눈과 귀를 막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고난의 행군이 끝난 지, 아니 아직도 이어지던 2000년 초반, 경수로 공사로 북한에서 1년 동안 머물던 만화가 겸 전기기술자 오영진이 목격한 걸 보면, 아침을 굶고 온 북한인 노동자가 점심을 먹는데[40] 적어도 여기 노동자들은 밥만은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인지 엄청나게 퍼먹는데, 정말 놀라울 정도로 밥을 엄청 퍼가서 먹더란다. 하지만 아침이나 저녁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점심만 엄청나게 폭식하니, 노동자들은 점심시간 끝나고 비몽사몽 식곤증으로 제대로 일하지 못하며 공사에 그리 도움은 되지 못했다고 한다.

5. 기타[편집]

위에서 대강 고난의 행군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서술하긴 했지만, 사실 '왜 하필 1995년이었는가?' 하는 질문은 아직도 북한경제학계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어차피 북한이라는 나라는 건국 이래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아본 적은 없었고[41] 특히 고난의 행군의 핵심으로 알려진 식량난 역시 1980년대부터 지속되어 왔는데, 왜 약 10년 이상을 버텨오던 이 시기에 급작스럽게 국가 체제 자체가 동반붕괴하는 현상이 나타났느냐는 것. 그만큼 고난의 행군이라는 현상은 기존의 대기근들과는 차별화되는 사태다.[42][43]

북한 식량난의 원인에 대하여는 사회주의 경제권의 붕괴가 많이 거론된다. 상대적으로 부유하던 유럽의 공산국가들이 경제력이 약한 북한 등의 국가에게 물물교역 형식으로 원조를 해주고 있었다. 북한이 수출한 제품은 품질이 너무 낮아 쓸 수도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꾸준히 북한 제품을 사주고 북한에 물품을 공급해주고 있었던 것. 이런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력이 떨어진 북한으로써는 해외의 식량을 수입할 돈이 없었다. 북한은 미국의 농업회사 카길과 식량을 받고 광석을 넘겨주는 거래를 시작했으나, 식량만 받고 광석을 보내주지 않자 카길이 거래를 끊었다.

1987년부터 계속 방영한 북한의 장수 만화영화였던 령리한 너구리 또한 고난의 행군을 피해가지 못하고 1995년부터 3년간 공백기를 뒀다. 먹고 살기 힘든데 시청자가 만화 영화를 보거나, 제작진이 그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1] 이거 말고도 한 탈북자는 질긴 고기라도 맛있다며 남한 와서 고맙게 여기고 먹는다고 지인들에게 밝힌 바 있는데, 고난의 행군 시절 정말로 썩은 고기라도 먹었던 기억이 있기에 질긴 고기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 시절 지옥을 겪어본 탈북자 증언을 보면 그야말로 입에 넣고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죄다 먹었다는 증언들이 부지기수로 나온다. 그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일부 탈북자들은 과수원이나 농촌 일손 돕기 같은 것이나 심지어 가로수에 열린 열매들만 봐도 따 먹고픈 충동이 일어난다고 한다.[2]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2013년 기준으로 쌀을 하루 206g 정도밖에 소비하지 않는다.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일일 권장량은 2,500kcal(1,800kcal 미만으로 내려가면 기아 상태로 본다), 쌀 100g의 열량은 360kcal이므로, 대부분을 다른 데서 충당한다는 의미. 그러나 북한의 경우에는 부식류가 너무 부실하므로, 쌀 소비가 줄어들면 그것이 그대로 1인당 칼로리량에 현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3] 그나마도 2차 세계대전 시기의 배급제는 공산주의적 경제 원칙에 따른 배급제라기 보다는 전시배급제에 가까웠다. 동 시대 영국 역시 전쟁으로 인하여 식량부족 현상이 두드러지자 식량 배급제를 실시한 바 있고, 우리나라도 전쟁 등 위급 상황에서는 식량이나 의약품 등 필수물자에 대해서는 시장통제와 배급제를 실시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준비가 되어있다.[4] 예시는 체코슬로바키아이지만 소련과 동독 등 타 동구권도 이런 식의 국영 상점이 존재했다고 보면 된다.[5] 모든 생활 필수 물자에 대한 배급제는 사실상 30년대에 포기한 셈이고, 이후 소련의 배급제는 일부 생필품을 배급의 형태로 지급하는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에 가까운 개념으로 운영되었다고 보는 쪽이 더 적절하다.[6] 이럴 경우에는 암시장에서 웃돈을 주고 물건을 사야 했다.[7] 사회주의 국가에서 기초 생필품이 아닌 자전거, 시계 등의 '사치품'들은 무진장 비쌌다. 당장 북한만 해도 노동자 월급 70원 하던 1980년대에 흑백TV의 국정가격이 1500원이었다. 사회주의 체제는 단기간 내에 생산량을 무지막지하게 늘려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똑같은 자원이 있으면 당연히 조금이라도 더 많은 물품을 생산할 수 있는 생필품, 아니면 인민의 적들로부터 당과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국방공업에 쏟아부어야지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닌 사치품들을 생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생산량 자체를 철저히 통제하는 것은 물론, 의도적으로 높은 가격을 책정해 구매의욕 자체를 박탈해버린다. 어중간한 가격이면 근로대중들이 그 쥐꼬리만한 돈으로 차 한 대 사보겠다고 아득바득 현금을 모을 테고, 그렇게 모인 현금으로 현금 거래가 활발해지는 것은 모든 물자의 유통을 장악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정권 입장에서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다.[8] 그 이전에도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으로 나누어졌기는 했지만, 이건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계층 분화다.[9] 당시 세대한테 물어보면, "통일벼 맛없어 그런 거" 한마디는 꼭 나온다.[10] 게다가 이때부터 북한의 신용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하던 중이었으니 수입하려고 해도 수입을 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을 터이다.[11] 이런 식량 공급의 부진이 청진시직할시에서 일반시로 격하된 이유 중 하나였다. 직할시 주민들의 식량공급 규정은 일반시보다 훨씬 급이 높은데, 당시 북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2] 농촌진흥청 추산.[13] 그런데 이건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과 동의어인데, 중국과 베트남이야 공산주의 국가였음에도 실용주의적 정책을 과감하게 도입해 해결 가능했지 일인독재체제, 그것도 우상화의 정점에 오른 북한에 있어서는 체제 전복이나 거의 다름없는 말인 것이다.[14] 하지만 이게 오히려 득이 되기도 했던 것이, 폴란드가 1980년대 외채난으로 인해 가용예산의 상당수가 외채를 갚는 데 들어가서 식량 부족이 시달릴 때에도 각 폴란드 가정은 시골에의 연줄을 통해서(혈연, 지연 등) 음식을 날라다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폴란드/경제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폴란드는 동유럽에서 알아주는 대농업국이다. 북한 꼴은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15] 이는 김정일의 지도력이 그만큼 약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실제로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의외로 상당수 전문가들이 김정일의 승계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기도 했다. 말이 많기는 하지만 어쨌든 군 출신에 항일 유격전을 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김정일은 군 관련 활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작업을 통해 적자인(김일성과 본처인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므로) 자신에게 이를 이을 정통성을 부여받고자 한 것이다.[16] 예를 들자면 일본의 개화기 시절 때에는 적은 비용과 빠른 속도로 건설할 수 있는 협궤를 깔아 물류 이동을 통한 산업화에 성공했었지만, 후대에서는 협궤의 단점 때문에 후손들이 두고두고 고생을 했다. 아니 어찌 보면 아직도 하고 있다.그렇다고는 해도, 철도 정책 자체는 대단히 성공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17] 하다 못해, 요즘은 게임만 해봐도 이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팩토리오참조. 채취/제련/수송/제작 중 어느 한 부분만 커진다고 전체 산업이 커지는 게 아니다.[18] 훗날 통일 이후 이런 탄광들의 사용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그리 나쁜게 아닐지도 모른다.[19] 河狀係數, 한 하천에서 어떤 지점을 정해놓고 1년 또는 여려 해 동안의 최대 유량을 최소 유량으로 나눈 비율.[20] 쉽게 말해서, 전력은 지속적이고 꾸준한 공급이 생명이다. 과생산된 전력은 잉여일 뿐이고 부족하면 난리가 난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여름철에 비가 집중되므로 수력발전 위주로 전력을 설계했다간 겨울에는 전기가 끊겨 모닥불을 지펴야 하는 지경이 된다.[21] 실제로 이거 때문에 연간 강우량은 많지만 가뭄이 심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비들이 모조리 여름에 집중되다보니 발생한다. 이런 논리로 하천부 개발, 저수지 확충 등이 이루어졌던 것이다.[22] 일례로 청진 화력 발전소는 2015년 가동을 중단했는데, 그 중단 이유로 연료 부족은 당연하고 유일하게 돌아가던 발전기 하나마저도 완전히 고장났다고 할 정도이며, 과거부터 있어왔던 평양 화력 발전소조차도 상당수 발전기들은 고장이 나서 돌리지 못한 상태에서 작동이 가능한 발전기들을 최대한 돌리지만, 수명이 이미 초과된 발전기들을 가동시켜봤자 효율이 떨어지기에 김정은이 동평양 화력 발전소를 건립하라고 지시해서 이를 보완했을 정도.[23] 일단 무역이란 게 자유로운 상업 활동과 구매력 높은 상품, 신용과 신뢰, 철저한 이윤보장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인데 그런 게 전혀 없는 북한과 어느 나라가 무역을 하겠다고 나서겠나? 심지어 혈맹(?)이란 중국조차도 북한에다 선불을 먼저 내야 하겠다고 할 정도다.[24] 북한이 무역에 있어서 얼마나 개막장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재일동포 사업가가 북한과 합작해 마카오에서 원단을 수입, 남포에서 양복을 제작, 일본 내의 중, 저가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 과정에서 모든 비용은 다 재일동포 사업가 자신의 돈으로 부담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본으로 와야 할 제품들이 들어오질 않자 궁금해진 그 재일동포 사업가가 남포로 가서 물으니, 마카오와 홍콩이 돈을 더 주겠다고 해서 그곳으로 수출하게 되었다는 대답을 듣게 된다. 그런데 투자를 모두 자신의 돈으로 부담했었던 이 재일동포 사업가가 기가 막혀 "공장과 사업에 관계된 모든 비용을 내 돈으로 한 것인데 나와 상의 없이 당신들 마음대로 바꾸는 게 어딨냐"고 따졌더니, "조국의 혁명적인 사업을 위해 돈을 기부한 것으로 여기면 될 것을 왜 따지느냐"고 적반하장식으로 나오기에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훗날 임종 전 유언으로 자녀들에게 "북한과는 그 어떠한 사업도 하지 마라!"고 했다는 것이다.[25] 러시아는 공산주의가 몰락했으며, 중국은 정치만 공산주의를 표방할 뿐, 경제체제 자체는 자본주의화 된 지 오래다. 여기에다 두 나라는 북한이 하는 한심한 짓에 일찌감치 내버린 자식 취급하며 제대로 된 대우조차 안해줬다. 심지어 이 양국이 대한민국과 수교를 맺을 것 같은 조짐을 보이자 김일성이 직접 방문해서 혈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막으려 했지만, 중국과 러시아(당시 소련)은 겉으로만 체면치레 답변을 했을 뿐, 결국 수교를 맺고 말았다.[26] 북한의 거짓 선전으로 최빈국으로 알고 있었던 한국의 실상이 1988 서울 올림픽 개최로 인해 알려지면서 충격을 받았고, 이후 동구권 국가들과 한국의 외교 관계가 수립된다.[27] 저 22만 명 설의 비율을 대약진운동 당시 중국 인구에 대입하면 700만이 나온다. 누가 봐도 적은 숫자가 아니다. 게다가, 중장기적으로 볼 경우의 인구 손실은 이보다 더 클 수도 있다.[28] 100만명이 얼마나 많은 숫자인가 하면, 고양시 같은 대도시의 사람들이 전부 사라졌다고 보면... 무섭다.[29] 예를 들면 조총련계 교포 출신들과 화교, 중국이나 일본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 이들은 외부로부터 자금 조달이 비교적 쉬웠기 때문에 고난의 행군 시기 시장화의 혜택을 본 계층으로 손꼽힌다고 한다[30] 이들 중 대부분이 국경지대와 가까운 함경도 출신들이었다.[31] 거기다 북한은 직장 생활을 하는 남성들은 사업을 할 수 없게 방침을 내려버렸다. 사회주의 기반이 무너진다는 황당한 이유 때문에...[32] 하지만 이것도 결국 소련의 막대한 원조(주로 석유나 원자재)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쿠바나 다른 나라들도 소련에게 온갖 먹을거리를 지원받아 이렇게 배부르게 지냈다가 아프가니스탄 전쟁 및 여러 사정으로 소련이 지원을 끊자 북한도 쿠바도 난리가 났다. 그래도 쿠바는 유기농 농업이라든지 여러 모로 노력하고, 적어도 북한이랑 다르게 최소한 민중을 굶겨죽이는 일은 안 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럼에도 80년대 3대 실정 같은 뻘짓으로 막대한 돈을 날려버렸으니...[33] 은퇴하여 게스트하우스 차리고 그럭저럭 잘 살아간다고.[34] 물론 이것도 상대적이다. 적어도 카스트로가 독재자로 욕 먹을지언정 김씨 혹부리 돼지 일가랑 차원이 다르게 기근으로 자국 사람들을 굶주려 죽이게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북한보다 쿠바가 훨씬 개방적인 것도 사실이다. 쿠바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쿠바는 바로 미국 아래에 있기에 미국이 경제적, 무력적으로 북한과 다르게 압력을 가하고 카스트로 암살도 엄청나게 시도했다. 더불어, 쿠바에 대한 엄청난 경제 제재를 미국이 주도했음에도 쿠바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빈곤하긴 해도 기근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지 않게 했다는 점을 봐도, 국정 능력으로 보면 김씨 돼지들이랑 차이가 크다.[35] 1993년. 북한의 대기근은 1995년에 일어났다.[36] 북한도 비슷한 조치를 하긴 했는데 2000년대에 와서야 시행했다는 게 문제. 1990년대 중반에도 상당 부분은 시행하다시피 했으나, 이건 사회 통제가 붕괴하다보니 먹고 살 길이 없어진 인민들이 어쩔 수 없이 장사했던 게 퍼진 것이다. 북한 정부는 그 무렵 어버버거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가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제도적으로 시행됐다.[37] 당장 1990년대 초반 일어났던 구 공산국가 출신인 동구권 국가들이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자본주의국가로 들어가려는 전환기 때에도 내부적으로 "우리 식대로 살자"라는 병크를 터뜨렸을 정도다.[38] 줴기밥을 자주 먹기는 했는데, 그 줴기밥이란 게 동유럽산 기름, 뉴질랜드쇠고기, 연어알, 캐비아 등을 넣어서 만든, 개당 단가가 $45(!)나 되는 물건이었다고 한다(...)[39] 김정일 항목으로 들어가 이 작자가 처먹은 산해진미 목록을 살펴볼 것. 이것은 심지어 남한의 재벌과도 같은 부자들마저도 먹어본 일이 없는 희귀 요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이 굶주림을 못 이겨 민가를 습격해 민가의 식량을 훔쳐가는 것이 밝혀져 처벌하자는 얘기가 나오자, "지금 내 아들들이 배고파서 한 일을 처벌하겠다는 거냐?"라는 개소리를 해댔다. 이뭐병[40] 밥은 서로 같은 자리에서 먹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밥을 퍼는 것만 볼 수 있었다.[41] 흔히 말하는 1960년대에는 남한보다 잘 살았다는 이야기도, 뒤집어놓고 보면 결국 북한은 아주아주아주 잘 나가던 시절 이후에는 줄곧 경제적으로 정체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42] 사회학적으로 김일성 사망과 이로 인한 국가 행정의 일시적 마비,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등의 요소를 생각해볼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주류경제학은 애초에 현상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르다보니.[43] 공산주의식 혁명 의식 실종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국전쟁 이후 20년 간 없는 자원에서 경제를 일으켰는데, 갈 사람은 다 가고, 2대는 혁명 정신은 없고, 그렇다고 일하자는 동인도 없고... 그러니 자꾸 정체되다가 김일성 사후에 뻥 터졌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