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니 달글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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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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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BE Grand Cross of t...
KBE external/s-media...
밥 호프
(1998)
Knight Bachelor knightbachelor
칼 포퍼
(1965)
폴 너스
(1999)
믹 재거
(2002)
톰 무어
(2020)
CBE + Knight Bachelor knightbachelor
존 밀스
(1976)
엘튼 존
(1998)
이안 홈
(1998)
톰 피니
(1998)
존 허트
(2015)
배리 깁
(2018)
OBE + Knight Bachelor knightbachelor
톰 존스
(2006)
MBE + Knight Bachelor knightbachelor
닉 팔도
(2009)
케니 달글리시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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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클럽
리버풀 FC 라이버 버드 로고...

13대, 20대
셀틱 FC 로고

대행

셀틱 FC 역대 주장
빌리 맥닐
(1963~1975)
케니 달글리시
(1975~1977)
케니 달글리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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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Ballond'or
2위
케니 달글리시
케니 달글리시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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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선수 이름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102회
1971.11.10
1986.11.12

리버풀 FC 라이버 버드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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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rpool's Greatest
※ 2026년 리버풀 FC 공식 투표로 선정한 구단 역대 최고의 선수 100인. 팬, 전직 선수, 기자, 구단 패널 투표와 선수별 통계를 종합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6위
7위
8위
9위
1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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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tic FC Greatest ever team
(3-3-2-2)
ST
달글리시
UEFA EURO SCO
(1969~1977)
ST
라르손
UEFA EURO SWE
(1997~2004)
LM
레녹스
UEFA EURO SCO
(1961~1978)
(1978~1981)
RM
존스톤
UEFA EURO SCO
(1962~1975)
LCM
올드
UEFA EURO SCO
(1955~1961)
(1965~1971)
CM
맥스테이
UEFA EURO SCO
(1981~1997)
RCM
머독
UEFA EURO SCO
(1959~1973)
LB
게멜
UEFA EURO SCO
(1961~1971)
CB
맥닐
UEFA EURO SCO
(1957~1975)
RB
맥그레인
UEFA EURO SCO
(1970~1987)
GK
심슨
UEFA EURO SCO
(1964~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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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국적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소속 기간
출장
득점
GK
아일랜드 국기
Packie Bonner
1978~1998
641
0
스코틀랜드 국기
Ronnie Simpson
1964~1970
188
0
스코틀랜드 국기
John Fallon
1958~1972
195
0
스코틀랜드 국기
John Thomson
1926~1931
188
0
DF
스코틀랜드 국기
Jim Craig
1965~1972
231
6
스코틀랜드 국기
Danny McGrain
1967~1987
663
8
스코틀랜드 국기
Tommy Gemmel
1961~1971
418
63
스코틀랜드 국기
Roy Aitken
1975~1990
672
52
스코틀랜드 국기
Billy McNeill
1957~1975
790
35
스코틀랜드 국기
John Clark
1958~1971
316
3
스코틀랜드 국기
Bobby Evans
1944~1960
537
11
스코틀랜드 국기
Alec McNair
1904~1925
641
9
스코틀랜드 국기
Jock Stein
1951~1957
148
2
MF
스코틀랜드 국기
Bobby Murdoch
1959~1973
485
102
스코틀랜드 국기
Paul McStay
1981~1997
677
72
스코틀랜드 국기
Bertie Auld
1955~1961
1965~1971
275
79
스코틀랜드 국기
Tommy Burns
1973~1989
503
82
FW
스코틀랜드 국기
Jimmy Johnstone
1961~1975
515
130
스웨덴 국기
Henrik Larsson
1997~2004
315
242
스코틀랜드 국기
Stevie Chalmers
1959~1971
406
231
스코틀랜드 국기
Kenny Dalglish
1969~1977
320
167
스코틀랜드 국기
Bobby Lennox
1961~1978
1978~1981
586
277
스코틀랜드 국기
Jimmy McMenemy
1902~1920
516
164
아일랜드 국기
Patsy Gallacher
1911~1925
464
192
스코틀랜드 국기
John Hughes
1959~1971
383
188
스코틀랜드 국기
Jimmy McGrory
1922~1937
448
469
스코틀랜드 국기
Sandy McMahon
1890~1903
217
177
스코틀랜드 국기
Jimmy Quinn
1900~1915
331
217
스코틀랜드 국기
Willie Wallace
1966~1971
232
134
출처: 셀틱 FC 공식 홈페이지#

IFFHS로고
IFFHS 선정 남자축구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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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rpool Football Club
Dalglish-1999563...
MBE[1]
케니 달글리시 경
Sir Kenny Dalglish
본명
케네스 매시슨 달글리시
Kenneth Mathieson Dalglish
출생
국적
신체
173cm / 체중 73kg
주발
오른발 (양발)
직업
소속
선수
셀틱 FC (1968~1969 / 유스)
셀틱 FC (1969~1977)
리버풀 FC (1977~1990)
감독
리버풀 FC (1985~1991 / 선수 겸 감독)
블랙번 로버스 FC (1991~1995)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7~1998)
셀틱 FC (2000 / 감독대행)
리버풀 FC (2011~2012)
경영
블랙번 로버스 FC (1995~1997 / 풋볼 디렉터)
셀틱 FC (1999~2000 / 풋볼 디렉터)
리버풀 FC (2013~ / 비상임 이사)
국가대표
102경기 30골[3] (스코틀랜드 / 1971~1986)
SNS
X Corp 아이콘(블랙) | 인스타그램 아이콘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역대 등번호
가족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2.3.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경력4. 평가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5.1.2. 개인 수상5.1.3. 개인 기록
5.2. 감독
5.2.1. 대회 기록5.2.2. 개인 수상
5.3. 수훈
6. 여담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스코틀랜드축구 선수 출신 前 축구 감독. 현재는 리버풀 FC의 비상임 이사직을 맡고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엔지니어의 아들로 태어나 레인저스의 서포터로서 자랐다. 밀튼 뱅크 초등학교에서 골키퍼로 축구를 시작했으며, 이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리버풀에서 트라이얼을 받았으나 입단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본인이 응원하던 레인저스에 입단하기 위해 몇 번이나 입단을 신청했으나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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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 1967년에 다름 아닌 레인저스의 최대 라이벌 셀틱과 임시 계약을 체결하며 본격적인 축구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첫 시즌을 컴버널드 유나이티드에서 임대생활로 보내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한 시즌 동안 37골을 넣으며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당시 셀틱의 감독 조크 스타인은 달글리시에게 한 시즌 더 임대를 떠나 실력을 갈고 닦을 것을 제안했으나, 달글리시가 프로 계약을 정식으로 맺기를 원했고 결국 다음해 셀틱과 정식 계약을 맺어 프로 선수가 된 달글리시는 1968년 스코티시 리그컵 8강전 해밀튼 아카데미컬과의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1군 데뷔전을 치른다. 하지만 1968-69 시즌, 그는 아직 무르익지 못한 실력에 의해 리저브에서 주로 출장하면서 17경기 4골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그다음 시즌에는 약간 더 처진 위치로 포지션을 변경해 31경기에서 19골을 기록, 리저브 팀의 리그와 컵 더블을 견인할 수 있었다. 이 당시 셀틱의 리저브 팀은 달글리시 외에도 대니 맥그레인, 조지 코넬리, 루 마카리, 데이비드 헤이 등 대단한 잠재력을 일찍이 평가받은 걸출한 유망주들이 즐비해 '퀄리티 스트리트 갱'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리저브 팀에서의 활약에 의해 1969-70 시즌 1군 경기에 종종 얼굴을 비췄으며, 1971-72 시즌에는 리저브 팀에서 시즌 23골을 넣으며 라이벌 레인저스와의 리저브컵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대단한 활약을 이어갔다.

리저브 팀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 후 1971-72 시즌에는 마침내 셀틱의 1군 팀에 자리잡게 되었다. 1971년 8월 4일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드펌 더비에서 페널티킥으로 득점을 올리며 화려한 데뷔골을 기록한 후, 해당 시즌 53경기에 출장하여 29골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셀틱은 달글리시의 등장에 힘입어 리그 7연패를 달성했으며 스코틀랜드컵도 들어올렸다. 그다음 시즌에는 모든 대회에서 39골을 기록하며 셀틱 최다 득점자에 올랐고, 셀틱은 리그 8연패를 달성했다. 1973-74 시즌에는 팀과 함께 리그 9연패와 컵 더블, 유러피언컵에서는 4강까지 올라서며 절륜한 활약을 이어갔다. 1974-75 시즌에는 리그 연패에 실패했으나 컵 대회에서 우승을 챙길 수 있었다. 이후 1975-76 시즌에는 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해당 시즌 셀틱은 감독 조크 스타인이 자동차 사고로 팀에서 이탈하여 12년 만에 무관의 시즌을 보냈다. 1976-77 시즌에는 리그와 컵 더블을 다시 이뤄냈는데 이 시즌에도 날카로운 공격력을 과시해 모든 대회에서 27골을 집어넣었다.

셀틱에서 통산 320경기 출장에 167골이라는 뚜렷한 활약을 올린 달글리시는 당대 유럽 강호들의 구애를 받기 시작했고, 1977년 당시 리버풀 감독인 밥 페이즐리에 의해 440,000파운드의 금액에 영국 내 이적료 기록을 갱신하며 리버풀로 이적하게 되었다.[5][6]
 
 
 
 
 
 
 
 
 
 
 
 
 
 
 
 
1977년, 리버풀의 첫 번째 전성기를 이끌던 리그 최고의 공격수 케빈 키건함부르크로 떠나보낸 밥 페이즐리와 리버풀은 팀의 새로운 간판이 되어줄 선수를 찾아나섰다. 이때 선수를 보는 안목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던 밥 페이즐리 감독의 눈에 띈 선수가 바로 당시 셀틱에서 에이스로 거듭나고 있던 케니 달글리시였다.
달글리시 리버풀

밥 페이즐리 감독은 당시 잉글랜드 축구계 최고의 이적료였던 44만 파운드를 투자해 달글리시를 안필드로 데려왔고, 천문학적인 이적료와 더불어 팀의 간판선수였던 키건의 대체자라는 꼬리표 덕에 달글리시는 수많은 관심과 기대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달글리시는 곧 그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게 된다.

1977년 8월 13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채리티 실드에서 데뷔한 달글리시는, 일주일 후 8월 20일 미들즈브러와의 리그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했고, 데뷔 시즌부터 리그 20골을 포함, 시즌 31골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선수로 단번에 거듭나게 되었다. 키건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활약을 펼친 그는 팬들과 구단의 기대에 정확하게 부응하는 선수였고, 결정적으로 해당 시즌 유러피언컵[7] 결승전에서 그레이엄 수네스의 패스를 받아 결승골을 집어넣으며 팀의 유러피언컵 2연패를 이루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달글리시 챔스 1
달글리시 챔스 2

두 번째 시즌에도 달글리시의 활약은 이어졌다. 1978-79 시즌에는 리그 21골을 포함 모든 대회에서 25골을 집어넣으며 팀 내 최다 득점자로 활약하여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 했고, 해당 시즌 FWA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며 잉글랜드 풋볼 리그를 폭격했다. 1982-83 시즌까지 달글리시는 1980-81 시즌을 제외하고 리그 전 경기에 출장했으며, 전 시즌 20골 이상을 기록하는 등 엄청난 경기력과 득점력을 보여주었다. 1980-81 시즌에는 약간 주춤하며 리그에서 두 자릿수 득점에 실패했지만 해당 시즌 팀을 유러피언컵 결승전으로 이끌어 결국 본인의 통산 두 번째 빅 이어를 들어올렸고, 풋볼 리그컵까지 우승해 더블을 달성했다. 1981-82 시즌부터는 다시금 득점포를 가동하여 이안 러쉬와 함께 공격진을 이끌었는데, 이 시기 최전방에서 팀의 득점을 책임지는 러쉬와 한 칸 아래에서 공간을 파고 들어 수비진을 농락하는 달글리시의 투톱 조합은 잉글랜드와 유럽 최고의 공격진으로 이름을 날렸고, 구단 역사상 최고의 공격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리시러시

이후 유럽 축구 역사에 있어 최강의 언더독으로 불리는 노팅엄 포레스트가 유러피언 컵 2연패 등 대기록들을 세우며 리버풀을 압박했지만, 케니 달글리시-그레이엄 수네스-앨런 한센으로 이어지는 스코티시 코어 라인에 더해 신예 이안 러쉬의 활약, 구단 역사상 최고의 풀백 필 닐과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레이 클레멘스 등이 만든 강건한 수비라인을 보유하고 있던 리버풀은 1980년에서 1984년까지 유러피언컵 2회 우승, 리그 3연패, 풋볼 리그컵 3회 우승 등을 기록하며 유럽 축구를 지배했다. 이 시기 달글리시는 1982-83 시즌 PFA 올해의 선수와 더불어 1983년 발롱도르 2위에 오르며 명실상부 붉은 제국의 왕으로 군림했고 1983-84 유러피언컵에서는 팀을 이끌어 AS 로마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며 본인의 세 번째 빅 이어이자 구단의 통산 네 번째 유러피언컵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달글리시 챔스 3
킹 케니

그러나 1984-85 시즌에는 득점력의 감소와 함께 팀도 에버튼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었고, 약간의 하락세를 그리기 시작했다. 해당 시즌 리버풀은 유럽에서 여전히 강력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1985년 유로피언컵 결승전에서 터진 헤이젤 참사[8]로 인해 구단의 운명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조 페이건 감독이 고령의 나이로 인해 사임했고, 참사로 인해 어수선해진 팀의 분위기를 잡아줄 적임자를 찾고 있던 구단에게 팬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달글리시는 적임자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85-86 시즌부터 달글리시는 선수 겸 감독의 신분으로 리버풀을 이끌게 되었다.

1985-86 시즌 달글리시는 리그 21경기에 선발로 나섰고, 첼시와의 리그 마지막 라운드에서 결승골을 터트리며 팀의 통산 16번째 우승을 자축했다. 이후 에버튼과의 FA컵 결승에도 선발로 출전하여 더블을 달성했다. 그다음 시즌에는 리그에 18경기 출전, 6골을 득점해 여전히 선수로서 경쟁력있는 모습을 보였으나 점차 젊은 선수들을 위해 출전을 양보했고, 감독직에 더 전념하게 되었다. 1987-88 시즌과 1988-89 시즌에는 리그에서만 2경기씩 출전하는 데에 그쳤으며, 1989-90 시즌에는 1990년 5월 5일에 더비 카운티와의 리그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하며 본인의 선수 커리어 마지막 경기에 출전하였다. 마지막 득점은 1987년 4월 18일 노팅엄 포레스트를 상대로 터트린 안필드에서의 리그 득점이었다. 1990-91 시즌부터는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감독직만을 맡게 되었다. 리버풀에서는 총 515경기에 출전하여 172골을 기록했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1971년 11월 10일, 유로 1972 예선전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교체 출전하여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1년 뒤인 1972년 11월 15일, 덴마크와의 월드컵 예선전에서는 데뷔골을 기록했다. 이후 1974 FIFA 월드컵 서독에 승선하여 에선 3경기에 모두 출장하였고 팀을 이끌어 1승 2무로 선전했으나 골득실에서 밀려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1975년 이후로는 스코틀랜드 대표팀의 주포로 자리잡아 팬들에게 기억될 만한 플레이를 남겼다. 1976년 잉글랜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득점한 햄든 파크에서의 경기와, 1977년 잉글랜드웸블리에서 만나 득점하여 2-1 승리를 견인한 경기가 손에 꼽힌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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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의 전성기를 선봉에서 이끌었다.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에서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동점골을 기록하여 3-2 역전승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후 1982 스페인 월드컵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월드컵에서는 모두 본선 진출에 실패하여 아쉬움을 남겼고,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는 22인 최종 명단에 합류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후 1986년에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출장 기록인 102경기를 소화했으며, 30골을 기록하여 데니스 로와 함께 국가대표팀 최다 득점자에 올랐다. 15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며 1986년 11월 12일 햄든 파크에서 열린 룩셈부르크와의 유로 1988 예선전에서 3-0으로 승리를 이끌며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마지막 득점은 1984년 11월 14일, 스페인을 상대로 월드컵 예선전에서 3-1로 승리한 경기에서 나왔다.
 
 
 
 
 
 
 
 
 
 
 
 

2.3. 플레이 스타일[편집]

 
 
 
 
 
 
 
 
 
 
 
 
최전방에서부터 측면과 2선 전역을 소화할 수 있는 전천후의 포워드였으나, 리버풀에서 활약할 당시 스트라이커인 이안 러쉬의 아래 처진 위치에서 세컨드 스트라이커 롤을 맡았을 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최전방 공격수가 수비진을 끌고 들어갔을 때 생기는 박스 근처의 공간에서 당대 가장 위협적인 공격수로 명성이 높았다.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은 첨예한 슈팅력에서 나오는 결정력. 감아차는 기술적인 슈팅에서 발등에 얹혀서 때리는 슈팅에 이르기까지 왼발과 오른발을 가리지 않고 상당한 완성도를 보였다. 이에 선수 커리어 초창기 셀틱에서부터 리버풀 커리어 초반부에 이르기까지는 팀 내 주 득점원으로 활약했다. 특히 리버풀에서 러쉬가 등장하여 투톱으로 가동되기 이전에는 포워드진 중앙과 측면에서 모두 활약하며 위치를 가리지 않고 박스를 타격하여 훌륭한 생산력을 선보였다. 특히 측면에서 공을 몰고 들어가 상대 수비를 무너뜨리고 감아차기로 골을 기록하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했다.

그러나 처진 위치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였던 만큼 선수로서의 최대 장점은 기술적인 온 더 볼 능력에 있었다. 기본적으로 굉장히 빠른 스피드를 보유하는 동시에 정교한 드리블 능력까지 보유하고 있었기에 상대 수비진 사이로 직접 볼을 운반하며 박스 안으로 돌파하는 플레이를 즐겼다. 당대 최고의 드리블러였던 맨유의 레전드 조지 베스트는 달글리시의 능력이 레알 마드리드 최고 레전드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비슷하다고 평했을 정도. 이에 이안 러쉬라는 걸출한 주포가 팀에 가담하자 포워드 전역에서 자유도를 부여받고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세컨드 스트라이커 롤을 소화할 수 있었다. 1선의 플레이 메이커로서 달글리시는 팀의 결정적인 찬스를 만드는 찬스 메이커였으며, 달글리시가 직접 공을 가지고 박스 근처에서 보여주는 재기넘치는 퍼포먼스는 리버풀이 공격 과정에서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 수 있는 이유였다. 특히 당대 이안 러쉬와 더불어 순간적으로 공격진에 가담하는 그레이엄 수네스와 펼치는 연계플레이는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했는데, 그 중심에 있던 달글리시의 활약으로 리버풀은 '붉은 제국'이라고 불리는 잉글랜드 클럽 역대 최고의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활동량이 많고 근면성실한 멘탈을 가지고 있어 수비 가담 또한 훌륭한 편이었으며, 175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점프력이 상당해 헤더가 위협적이었고, 꽤 많은 헤더 득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리버풀로 이적하여 33세까지 한 시즌을 제외하면 리그 전 경기에 출장해 지속적으로 시즌 두 자릿수 득점을 유지하는 등, 경기 소화력과 내구성, 꾸준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다재다능함과 날카로운 득점력, 절륜한 기술력으로 인해 당대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플레이 스타일로 따지자면 리버풀에서의 전임자인 케빈 키건과 상당히 유사하나, 리버풀에서 퍼포먼스의 완성도는 더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된다.
 
 
 
 
 
 
 
 
 
 
 
 

3. 지도자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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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셰필드 웬즈데이에서 감독직 제의가 오지만 이를 거절한 케니 달글리시는 축구팬들을 놀라게 하며 2부 리그의 블랙번 로버스 감독으로 취임한다. 취임한 바로 그 해 블랙번 로버스를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시킨 후 달글리시는 잭 워커 회장이 다져놓은 탄탄한 자금을 바탕으로 1992년, 사우스햄튼 소속의 앨런 시어러를 영입했고 승격 첫 해를 리그 4위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마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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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셔우드와 함께

바로 다음해를 맨유에 이어 2위라는 성적으로 마쳤으며, 1994-95 시즌에는 극적인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이는 블랙번의 81년 만의 리그 우승이었다. 이후 케니 달글리시는 블랙번의 고문위원장에 임명되었으나 1996년 상호 합의하에 블랙번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1997년 1월에 갑자기 물러난 케빈 키건의 뒤를 이어 케니 달글리시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케니 달글리시 취임 당시 4위였던 뉴캐슬은 시즌을 2위로 마감하여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성공하였지만,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바르셀로나전 3-2승리를 포함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13위라는 리그 성적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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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취임 기자회견장에서 회장인 존 홀 경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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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시절 동료인 테리 맥더모트 코치와 함께
 
 
 
 
 
 
 
 
 
 
 
 
 
 
 
 
 
 
 
 
이후 휴식을 취하던 케니 달글리시는 1999년부터 친정팀인 셀틱의 단장으로 일하다가 2000년 2월, 자신의 리버풀 시절 제자인 존 반스가 감독직에서 해임되자 자신이 임시 감독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 해 스코티시 리그컵 결승전에서 에버딘을 2-0으로 물리치며 우승을 달성하고, 셀틱이 2위로 그 해 시즌을 마감하면서 케니 달글리시의 임시 감독 생활은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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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편집]

 
 
 
 
 
 
 
 
 
 
 
 
"케니 달글리시는 모든 면에서 케빈 키건보다 뛰어난 선수였다."[10][11]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스코틀랜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 받는다. 또한 1970년대와 80년대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의 전성기를 이끌며 영국을 넘어 유럽 전역에 명성을 날린 스타 플레이어이자, 고향 클럽인 셀틱에서도 손에 꼽는 레전드로, 리버풀에서는 선수 뿐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전설적인 커리어를 보내며 불세출의 입지를 쌓았다. 지도자로서는 블랙번 로버스를 이끌고 돌풍의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거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기의 재능으로 손꼽히며 일명 '퀄리티 스트리트 갱' 세대의 주축으로 셀틱에서 화려하게 데뷔했고, 조크 스타인 감독의 70년대 에이스로 활약하며 국내 대회 더블만 3회를 달성, 팀의 리그 9연패와 유러피언컵 4강 진출에 기여했다. 셀틱의 역사상 최고 전성기 후반부를 이끌며 320경기에 출장하여 167골을 득점하는 뛰어난 활약으로, 셀틱에서는 2002년 역대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렸으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로 손꼽히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키건의 대체자로 밥 페이즐리가 이끄는 리버풀에 입성하여 국내 4개 대회와 유럽 대항전을 수차례 정복했으며, 안필드 커리어 내내 팀 내 최고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특히 1977-78 시즌에는 데뷔 시즌부터 30골 이상을 득점하고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집어넣는 등, 단숨에 당대 최고의 선수로 올라섰으며,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풋볼 리그와 유럽 무대를 그야말로 폭격하며 리버풀을 사상 최고의 전성기로 이끌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리버풀을 이끌고 선수로서 이룩한 1부 리그 우승이 6회, 들어올린 빅 이어만 3개에 달하며, 이에 붙은 그의 별명이 왕(King).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지배적인 전성기로 불리는 붉은 제국 시절 리버풀의 절대자였기에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잉글랜드 리그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뛰어난 포워드 중 하나로, 2009년 포포투는 달글리시를 전후 영국 축구사에서 가장 뛰어난 스트라이커로 선정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 대표팀 소속으로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며 역사적인 활약을 펼쳤다. 대표팀의 전력상 월드컵과 유로에서 순위권에 드는 성적을 내지는 못했으나, 1974년 월드컵을 무패로 이끌고 1978년 월드컵에서는 네덜란드를 격침시키는 등 뛰어난 플레이를 펼쳤고, 당시 영국 내 국가 대항전이었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잉글랜드를 격파하고 세 차례나 우승을 들어올렸다. 대표팀에서 통산 102경기 30골을 기록하여 현재까지도 대표팀 최다 출장자와 최다 득점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국가대표로서는 대항전 성적이 거의 없는 데니스 로보다 상위로 평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BBC, 포포투, 기브미스포츠, 스포츠바이블 등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코틀랜드 선수로 달글리시를 선정했다. 스코틀랜드 명예의 전당에도 알렉스 퍼거슨, 빌리 브렘너, 맷 버스비, 짐 박스터와 함께 초대 헌액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감독으로서는 리버풀을 1985-86 시즌부터 이끌면서 붉은 제국의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걸출한 리더십으로 헤이젤 참사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내에서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업적을 세웠다. 특히 힐스버러 참사의 여파로 사임하기 전까지 3회의 1부 리그 우승과 2회의 FA컵 우승을 달성했으며, 잉글랜드 1부 리그 역사상 플레잉 코치로서 리그 우승을 달성한 유일무이한 인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에 21세기에 위르겐 클롭이 새로운 전성기를 열기 이전까지 조 페이건과 함께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다음가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늘 거론되곤 했었다.[12] 또한 힐스버러 참사 당시 유족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며 지역 사회에 깊게 공헌했기에 선수를 떠나 인간으로서도 리버풀 서포터들의 존경과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인물이다.

리버풀 커리어 이후에는 당시 2부 리그에 있던 블랙번 로버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1995년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돌풍의 위업을 이루기도 하는 등, 리버풀에 국한되지 않고 프리미어 리그 초창기까지 리그사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5. 기록[편집]

 
 
 
 
 
 
 
 
 
 
 
 
 
 
 
 
 
 
 
 
 
 
 
 

5.1.1. 대회 기록[편집]

 
 
 
 
 
 
 
 
 
 
 
 
 
 
 
 
 
 
 
 
 
 
 
 

5.1.2. 개인 수상[편집]

 
 
 
 
 
 
 
 
 
 
 
 
 
 
 
 
 
 
 
 
 
 
 
 

5.1.3. 개인 기록[편집]

 
 
 
 
 
 
 
 
 
 
 
 
 
 
 
 
 
 
 
 
 
 
 
 
 
 
 
 
 
 
 
 
 
 
 
 

5.2.1. 대회 기록[편집]

 
 
 
 
 
 
 
 
 
 
 
 
 
 
 
 
 
 
 
 
 
 
 
 

5.2.2. 개인 수상[편집]

 
 
 
 
 
 
 
 
 
 
 
 
 
 
 
 
 
 
 
 
 
 
 
 
 
 
 
 
 
 
 
 
 
 
 
 
 
 
 
 
 
 
 
 
 
 
 
 

6. 여담[편집]

 
 
 
 
 
 
 
 
 
 
 
 
  •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국에서 국내 대회 트로피 3종[17]을 모두 들어 올린 최초의 선수이며, 현재까지도 이 기록을 가진 선수는 달글리시를 포함해서 3명뿐이다.[18]
  • 잉글랜드 1부 리그 역사상 플레잉 코치로서 우승을 달성한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 부인인 마리나 달글리시는 마리나 달글리시 재단을 세워 유방암 환자들의 치료 기금 마련에 힘을 쏟고 있다.[19]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마리나 또한 2009년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수훈하여, 부부가 모두 MBE 수훈자가 되었다.
  • 이안 러쉬의 회고에 따르면, 러쉬가 팀 페스티벌에서 마리나 달글리시의 얼굴에 케이크를 묻히는 장난을 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마리나는 이후 러쉬를 볼 때마다 한동안 케이크를 던지며 복수했고, 러쉬의 양복에 간지럼을 유발하는 가루를 뿌려 인터뷰 도중 계속 몸을 긁적이게 만든 적도 있었다고 한다. 러쉬는 해당 일화를 두고 “누구든 마리나 달글리시를 건드리지 말라.“고 회고했다.
  • 2018년 6월 서훈명단에 Knight Bachelor 대상자로 올라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Sir' 칭호를 쓰게 되었다.
  • 헤이젤 참사를 회고한 발언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참사 1년 전 AS 로마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이 끝난 후 로마 울트라스들로부터 리버풀 팬들이 공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게 헤이젤에서 벌어진 리버풀 훌리건들의 행패에 어떠한 정당성도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당시 유벤투스 서포터의 소수의 부적절한 행동이 있어 유벤투스도 관중 징계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유벤투스 서포터들이 먼저 돌을 던지고 도발을 했다는 주장 역시 리버풀 측의 입장에 불과하다.[20] 다만, 경기장을 제공한 벨기에 측과 UEFA의 경우 안전 사고 예방에 매우 불성실했기에 충분히 비판이 가능하다. 실제로 벨기에 측 인사들은 재판을 통해 처벌도 받았고 UEFA 측도 과실에 대한 조사와 구금을 받았다. 서포터즈들의 대한 언급 없이 벨기에 측과 UEFA 측만 비판했다면 충분했을 것이다.
"리버풀 팬들의 행동을 용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편이 계속 자신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을때 이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참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I can't condone the action of some Liverpool fans but it is difficult not to react when the opposing supporters are throwing missiles at you.)"

"만약 그들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일어날 지 알았다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고, 영국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보복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었던 이탈리아 사람들과 영국 사람들 모두 반드시 후회해야 합니다.(If they had foreseen the dreadful consequences, or thought what terrible things might unfold, I'm sure the stones would never have been thrown by the Italians and that the English retaliation would never have occurred. Every single one of them, both Italian and English, must have regretted it.)"

  • 2020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4월 10일에 검사를 받아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확진 당시에는 무증상이었다고 한다. 검사 전부터 집에서 자가격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접촉자는 없다고 한다.# 다행히 4월 13일에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했다.#
  • 2021년 현재는 잉글랜드 8부 리그 팀인 머린 AFC의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 별명은 가수다. YNWA를 부른 게리 마스덴이란 가수와 닮았다는 이유로 그러한 별명이 붙여졌다.
  • 2026년 6월, 자신의 SNS를 통해 암 투병 사실을 밝혔다. 무슨 암인지는 알리지 않았지만 다행히 잘 치료되고 있다고 한다.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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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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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징 디렉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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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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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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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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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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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퍼포먼스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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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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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개발 총괄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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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렝스 및 컨디셔닝 코치
북아일랜드 국기
크리스 블랙
Chris Black
재활 피트니스 코치
잉글랜드 국기
David Rydings
아카데미 코치진
U-21 감독[H]
웨일스 국기
Rob Page
U-18 감독[H]
잉글랜드 국기
Simon Wiles
메디컬 스태프
메디컬 및 영양 부서
직책
국적
한글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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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닥터
인도 국기
아밋 파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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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 케어 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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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지 아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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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 물리 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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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지 치료 총괄
잉글랜드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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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지사
잉글랜드 국기
Michelle Hudson
마사지 및 스포츠 치료사
일본 국기
Watanabe Motonori
리서치 및 분석 스태프
리서치 부서
직책
국적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데이터 과학 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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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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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 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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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 스카우트
북아일랜드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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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팅 운영 총괄
북아일랜드 국기
Craig McKee
테크니컬 스카우팅 총괄
스코틀랜드 국기
Mark Burchill
스카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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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 오브라이언
Sienna O'Br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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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e Cromp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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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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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w O'Br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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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lvain N'Dia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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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장비 관리관
잉글랜드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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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nka Ademuyiwa
기타 스태프
스타디움 운영 총괄
잉글랜드 국기
스튜어트 베이커
Stuart Baker
스타디움 아나운서
잉글랜드 국기
피터 맥도웰
Peter McDowall
그라운드 관리 총괄
잉글랜드 국기
Dave McCulloch
출처: 리버풀 FC 공식 웹사이트 / 최종 수정 일자: 2026년 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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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hairman[2] President[3] Chief Executive Officer, 최고 경영자[4] FSG international(FSG 해외법인) CEO와 겸직[5] 총괄이사[6] Chief Commercial Officer, 최고 영업 관리자[7] Chief Financial Officer, 최고 재무 관리자[8] Chief Legal Officer, 최고 법무 관리자[H] 9.1 9.2 9.3 Head Coach, 헤드 코치
 
 
 
 
 
 
 
 
 
 
 
 
[1] 1985년,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수훈 받았고 2018년에 Knight Bachelor에 서임되며 ‘Sir(경)’ 칭호를 받게 되었다.[2] 스트라이커, 세컨드 스트라이커[3]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출장, 최다 득점자.[4] 7번 외에 6, 12, 14번을 사용하기도 했다.[5] 당시 페이즐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기 전에 빨리 이 글래스고를 떠나는 게 낫겠다."[6] 당시 셀틱 팬들은 팀의 간판이자 에이스가 잉글랜드로 떠나는 것에 분개했고, 달글리시가 1978년 8월 셀틱 파크로 돌아와 조크 스타인 헌정 경기에 출전했을 때 관중들의 야유를 받기도 했다.[7] 現 UEFA 챔피언스 리그[8] 이것 때문에 UEFA는 모든 잉글랜드 클럽들의 유럽 대항전 출전을 5년간 금지시켰고, 리버풀은 7년이나 출전 금지시켰다. 그것 때문에 리그 우승한 에버튼은 유러피언컵에 못 나가게 되었고, 머지사이드 더비는 더더욱 치열해졌다.[9] 이 두 경기에서 득점한 상대 골키퍼가 리버풀 팀 동료 레이 클레멘스였다.[10] 달글리시는 그가 영입되기 이전, 리버풀의 간판스타이자 유럽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던 케빈 키건의 대체자였다. 발롱도르를 2회 수상한 선수보다 뛰어난 선수라는 평을 라이벌 팀의 역대 최고의 감독에게 듣게 된 셈.[11] 다만 달글리시는 키건과 달리 발롱도르를 수상(최고 순위 2위)하지 못했는데, 하필이면 본인의 최전성기가 미셸 플라티니,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케빈 키건과 겹친 것이 까닭이었다.[12] 이에 2010년대에 감독으로 복귀하여 그리 좋지 못한 성적을 냈음에도 전반적인 평가가 거의 절하되지 않기도 했다. 물론 암흑기인 와중에 EFL컵을 기어코 우승시키며 무관을 끊어냈기 때문이기도 하다.[13] 당시 명칭은 스코티시 풋볼 리그 디비전 원, 스코티시 프리미어 디비전.[14] Manager of the Year Award[15] 1985년 신년 수훈 명단(1985 New Year Honours)에서 선정됐다.[16] 2018년 6월 수훈 명단(2018 Birthday Honours)에서 선정됐다.[17] 리그, FA컵, 리그컵[18] 나머지 두 명은 2001-02 시즌에 이 기록을 달성한 안드레이 칸첼스키스와 2022-23 시즌에 이 기록을 달성한 조 하트.[19] 실제로 유방암을 앓았다가 완치되었다.[20] 누가 먼저 사건을 촉발했는지에 관해선 양측의 상반된 주장이 있다.# 당시 양 서포터즈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좌석 배분이 이뤄졌기에 누가 먼저 그랬느냐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한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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