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최근 수정 시각: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역임 직책

[ 펼치기 · 접기 ]

유벤투스 FC 역대 주장

안토니오 콘테
(1996~2001)

파일:Juventus.png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2001~2012)

파일:Juventus.png

잔루이지 부폰
(2012~2018)


파일:Alessandro-Del-Piero-11.jpg

이름

알레산드로 델피에로[1]
(Alessandro Del Piero)

생년월일

1974년 11월 9일 (43세)

국적

파일:이탈리아 국기.png 이탈리아

출생지

코넬리아노

신체 조건

173cm, 73kg

포지션

세컨드 스트라이커

등번호

유벤투스 FC - 10번[2]
시드니 FC - 10번
이탈리아 - 7번, 10번

소속 클럽

칼초 파도바(1991-1993)
유벤투스 FC(1993-2012)
시드니 FC(2012-2014)
델리 다이모스 FC(2014)

국가대표

91경기 27골

소셜 미디어

파일:alessandrodelpiero_logo.png
파일:트위터 아이콘.pn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png 파일:유튜브 아이콘.png


1. 개요2. 커리어3. 플레이스타일4. 기타5. 기록
5.1. 대회 실적5.2. 출전 기록5.3. 개인 수상
6. 델 피에로에 대한 말말말

1. 개요[편집]

"신사는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는 법이다."


로베르토 바조의 뒤를 이은 판타지스타이자 유벤투스 FC의 위대한 주장

유벤투스 FC의 영원한 No. 10[3]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마지막 판타지스타, '진정한 천재(IL Fenomeno Vero)'[4] 등으로 불렸던 선수. 핀투리키오(Pinturicchio, 예술가)라는 별명다운 우아한 드리블 능력과 뛰어난 테크닉, 높은 득점력, 이타적인 플레이, 다양한 공격 롤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 능력까지 갖춘 공격의 토탈 패키지 같은 선수로서 아주리 군단유벤투스를 대표했다.

이탈리아 판타지스타 혈통의 적통이며, 어쩌면 마지막 판타지스타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델 피에로의 노쇠화, 그리고 은퇴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후계자가 될 이탈리안 판타지스타의 재목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5]

세컨드 스트라이커 시대를 연 선수이다. 그를 이어 데니스 베르캄프라울 곤잘레스 등이 명성을 날렸다.

앞선의 공격수 이지만 이타적인 플레이와 플레이메이킹 능력에 자신에게 기회가 왔을때 골결정력 까지 보유한 이 엄청난 선수는 유벤투스의 전성기를 만들어 주었다..

흔히들 간단히 줄여 알레, 델피라 한다. 델레 알피? 골을 넣으면 혀를 내밀고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세리머니로 유명하지만, 본격적으로 해축이 보급된 2000년대 중반부터 세리에 A 중계가 거의 없었고 이탈리아 국대 방송 또한 잘 틀어주지 않았기에 대다수의 해축 팬들은 알레에게 전용 세리머니가 있는 줄 모른다.

2. 커리어[편집]

2.1. 클럽[편집]

세리에 B팀이던 칼치오 파도바의 유스였던 그는 1991년 성인팀으로 승격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나 많은 경기를 뛰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1993년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한창 유망주 발굴하던 재미에 빠졌었던 마르첼로 리피 감독의 요청으로 유벤투스로 이적했다. 제1기 리피의 아이들(Lippi's Children)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994년 3월 20일, 당시 강팀이었던 파르마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파르마를 4-0으로 박살을 내 버린다. 이때 유벤투스는 바조를 비롯한 주전 선수들이 부상이 있어 부득이하게 델 피에로를 투입한 것인데, 최고의 결과로 돌아온 것. 참고로 이게 데뷔 첫 선발 출전이었다. 이후 유벤투스의 에이스였던 바조를 완벽하게 밀어내며 주전자리를 꿰찬다.[6]

파일:빅이어를 들어올리는 델 피에로.png

빅이어를 들어올리는 델 피에로

그의 데뷔 이후 유벤투스는 94-95, 96-97, 97-98, 01-02, 02-03 세리에 A 우승[7], 95년부터 98년까지 3시즌 연속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하여 95-96 시즌에는 우승, 96-97, 97-98 시즌 준우승, 02-03 시즌 준우승이라는 엄청난 위업을 달성했다. 혹자는 이 시기를 유벤투스의 진짜 화양연화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그 속에서 델 피에로는 97-98 시즌에만 32경기 21골을 넣었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0경기 10골로 경기당 1골을 달성하며 득점왕을 석권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비드 트레제게와 영혼의 투톱을 결성한다.

선수로서의 재능도 최고급인데 더불어 멘탈까지 훌륭해 감히 멘탈甲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는 인격적으로도 완성된 사람. 01-02 시즌부터 안토니오 콘테의 뒤를 이어 주장 완장을 달기 시작했으며, 팀이 06-07 시즌 칼치오폴리로 인하여 세리에 B로 강등되었고, 알레 자신에게도 수많은 러브콜에 있었음에도[8] 의리 하나로 다비드 트레제게, 파벨 네드베드, 지안루이지 부폰, 마우로 카모라네시 등과 함께 끝까지 팀에 남았으며, 20골이나 득점하여 세리에 B 득점왕을 차지함과 동시에 팀이 세리에 A로 복귀하는데 공헌했다. 이때 "신사는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9][10][11] 팀 강등이 결정되자 동료들과 팬들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복귀시즌에 곧바로 세리에 A 득점왕 접수(21골). 팀은 리그 2위로 곧바로 챔피언스 리그 직행 티켓을 따냈고, 그 때 그의 나이 34세.

09-10 시즌, 유벤투스는 페라라-자케로니-델 네리로 이어지는 막장 감독 3연타로 위기를 맞는다. 칠벤투스라 조롱당하기까지 한 시기에도 홀로 고군분투하며 활약했다. 팀내 최다 경기 출장이면서도 1경기당 0.5 포인트씩은 올렸으며 노년 가장 이라는 호칭도 이 시기에 불렸다. 10-11 시즌에는 서포터 선정 팀내 MVP로 뽑혔다.[12]

노년가장 대패로 씨(...)

물론 당시 30대 중반까지 넘겼기에 노쇠화가 이루어지며 풀타임 출장에 난조를 보였으나, 여전히 팀에 공헌했던 모습을 보면 유명한 선수의 이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현대 축구에서는 그야말로 충성심의 화신급의 선수로 볼 수 있다.

잘 살펴보면 이 사람도 은근히 선수생활에 굴곡이 많았다. 한창 커리어 하이를 찍던 때에 난데없는 금지약물 복용 혐의를 받지 않나(결국 무혐의였다), 상대 수비수들의 집중견제로 부상을 달고 산 적도 있었으며, 부상에 잇따른 슬럼프로 한때는 주전경쟁에서 밀려난 적도 있었으며, 모두들 잘 아는 칼치오폴리 사건에 휘말려 들었던 아픈 과거가 있다. 그럼에도 한결같이 유벤투스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다시금 이탈리아의 제왕의 자리를 되찾는 그 순간까지.

11-12 시즌에 들어서 노쇠화로 인한 체력부담으로 선발출장보다는 슈퍼서브로 활약했으며, 그럼에도 출장시간 대 공격포인트 부분에서 팀내 1, 2위를 다투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주었다(...). 클래스는 영원하다.

2011년 겨울, "이번 시즌이 유벤투스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즌이 될 것이다."라는 인터뷰를 하여 유벤투스 팬들이 눈물을 뿌리게 만들었다. 시즌 종료 후 타 리그로 이적할 것이라 했으며, 유벤투스가 아닌 세리에 A에서는 더 이상 뛰지 않겠다고 한다. 팬들과 구단은 피눈물을 흘리며 재계약을 요청했으나 선수 본인의 의지가 확고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신사도 언젠가는 숙녀곁을 떠날때가 있다.

2012년 5월, 유벤투스는 37라운드 칼리아리 원정 경기에서 9년만의 세리에A 우승을 확정지었다. 칼치오폴리, 세리에 B 강등, 2연속 리그 7위의 아픔을 딛고 이뤄낸 우승이라 더욱 갚진 결과였으며, 델 피에로 역시 마침내 유종의 미를 거두고 떠날 수 있게 된 셈이다.

2012년 5월 13일 이미 리그 우승이 확정된 이후, 아탈란타와의 리그 최종전에 선발출장하여 전반 28분 팀의 2번째 골을 작렬시켰다. 그야말로 마지막 경기에서까지 판타지스타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후반 들어 교체되는 순간 유벤투스 스타디움에 모인 모든 관중, 아탈란타 선수들 마저 열렬한 기립 박수를 보냈고, 경기가 약 3분간 중단되며 레전드 of 레전드의 마지막 모습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우승팀 입장식에도, 선수단은 물론 팀 스탭들까지 다 입장한 후 마지막으로 입장하며 스쿠데토와 우승컵을 치켜들었다. 이 날 경기를 마지막으로 델 피에로는 유벤투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무패 우승으로 장식하며 떠난다.
일주일 뒤에 열린 나폴리와의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도 출전하긴 했으나, 팀은 패배하였다.

파일:external/l.yimg.com/12cc6fde0b17c8ed2d47d8221dcac213-getty-510882369.jpg
파일:external/l.yimg.com/a118f9b33b953af1f554d181d1aef82b-getty-510882170.jpg

#

시즌 종료 후 그가 구단과 팬들에게 남긴 장문의 이별 편지로 인하여 유벤투스 팬들은 그야말로 눈물의 도가니가 되었다. 구단의 라커룸을 정리하고 약 1개월 정도를 유유자적하며 지냈던 듯. 그리고 여름 이적시장 막바지에 호주의 시드니 FC와 계약, 호주 리그에 진출하게 되었다.

다음은 편지 전문이다.

2012-06-30
이제 끝입니다. 저와 유벤투스와의 계약은 오늘로서 막을 내립니다.
꽤 오래된 뉴스이긴 해도 "공식적"이란 말은 꽤 강하게 다가오는군요. 제게는 슬픈시간은 아닙니다. 전 어떤 후회도 회한도 없습니다. 요즘 전 제가 비안코네리로 지내왔던 지난 시즌들과 추억들 그리고 저의 꿈이 실현되고 있었던 그 순간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수많은 추억들과 기쁨과 환희, 그리고 솔직하게 인정해서 요 근래의 쓰라린 순간까지 오늘 확실하게 보여지고 있었고 토리노에서 가진 나의 마지막 경기후 나눈 포옹 속에서 어느 순간 떠올려진 순간들이 희미하고 거의 사라져가는 것 까지도 보여지더군요. 5월 13일에 찍힌 제 사진에는 제가 영원히 간직하고픈 모든 것들이 제 마음에 영원히 세겨져 있습니다. 잊혀지지 않을 추억으로 말입니다.

얼마전 휴가를 떠나기 앞서 비노보에 있는 제 락커룸을 정리하고 훈련장을 떠날 때, 여러분이 저와 사진을 찍거나, 제 사인을 받기 위해, 또는 저와 악수를 하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땡볕이 내리쬐는 한 여름 낮이거나 절 기다리시는 걸 몇 개월 동안이나 해 오셨던 팬들 여러분이 기다리고 계시던 그 장소에 멈춰 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제가 여러분에게 작별의 인사와 그동안 저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에 대해 감사드린다는 차례가 되었군요.

선수들은 왔다 갈 뿐이지만 유벤투스는 계속 남아있습니다. 나의 팀동료들도 거기에 있을 것이며 아울러 전 그들에게 무운을 빕니다. 전 언제나 그들의 열렬한 팬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제 팬들 역시 계속 남아계실 것이고 바로 여러분들이 유벤투스입니다. 여기 남겨진 제 유니폼 역시 전 계속 가감없이 사랑할 것이고 존중할 겁니다. 넘버 10이 들어간 제 이름이 세겨졌던 제 유니폼이 내 후의 어떤 이가 입을 것을 생각하니 행복감이 넘칩니다. 아울러 전 그 유니폼을 입게 될 그 누군가 -그가 이탈리아인이든 다른 해외출신이든- 에게 기쁨을 느낍니다. 그 역시 이 유니폼을 그토록 입기를 희망했었을테니까 말이죠. 아울러 그 누군가가 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한다면 제가 저 이전의 레전드들과 챔피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했었던것과 같이 그러려고 한다면 제겐 더 없는 영광이 될 거구요.

내일부터 전 더 이상 유벤투스의 선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전 언제나 여러분들 중 한명으로 남아 있을 거예요.

자 이제 새로운 모험을 할 차례로군요. 19년전의 그때의 여름과 같이 전 지금 굉장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그리고 여러분 모두들 고맙습니다.

알레산드로


여담이지만, 그를 상징하는 등번호 10번은 12-13 시즌이 시작될 때까지도 누구에게도 배정되어 있지 않다가, 빅네임 탑클래스 포워드를 원했던 유벤투스에 마침내 카를로스 테베즈가 입성하면서 이를 물려받게 받게 되었다.

델 피에로는 시드니 FC에 와서도 등번호는 10번을 배정받았는데 델 피에로가 시드니 입단식을 치르던 날 시드니 홈구장은 난리가 났다. 시드니의 구장인지 유벤투스 홈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

2013년 1월 19일, 웰링턴 피닉스와의 경기에서 무려 4골을 몰아치며(PK 포함) 팀의 7-1 승리를 견인했다.

2014년 8월 28일, 시드니 FC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새롭게 출범하는 인도 슈퍼리그의 델리 다이모스 FC로 이적하였다. 10경기 출전 1득점. 그러나 애초에 인도 슈퍼리그는 가을 기간에만 치뤄지는 단기 리그이기 때문에 계약 기간을 길게 유지하지는 않았다.

2015년 6월, 이탈리아 언론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와의 인터뷰에서 은퇴의사를 밝혔다. 당장 유럽의 코치를 시작할 것은 아니며, 미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파일:KakaoTalk_20160728_005108654.jpg

월드컵과 유로 본선에서 단 3득점에 그친 국대 울렁증

클럽에서의 퍼포먼스와는 대조되는 국대 활약상 때문에 까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첫 메이저대회는 유로 1996이었지만 이탈리아가 독일, 체코와 한조에 묶이면서 결국 3위로 조별리그 탈락을 하게 되었다. 이후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로베르토 바조의 백업이었고, 득점도 없었다.

그가 진짜 활약을 해야할 대회가 바로 유로 2000이었는데. 심각한 부상과, 약물복용 의혹으로 제대로된 컨디션으로 유로에 출장할 수 없었기에 선발은 프란체스코 토티의 몫이되고, 이번에도 그는 토티의 백업이 되었다. 그래도 조별리그 3차전에서 득점에 성공하며 메이저대회 첫 골을 신고한다. 8강전도 교체출장하며 컨디션을 찾아갔고, 4강전에서는 선발출장했지만, 잠브로타가 퇴장당해 수적으로 불리해진 대표팀을 이끌고 인자기와 함께 단둘이서 공격진을 이끌었고, 토티와 교체되었다. 문제가 바로 이 결승전. 교체투입이 된 직후 델 베키오가 선제골을 넣어 리드를 지켜가는 상황에서 그에게 두 번의 완벽한 노마크 찬스가 왔지만 두번다 무위로 날려버렸고 결국 프랑스가 대역전극을 연출하며 우승해버린다.

이후 2002년 한일 월드컵에도 출장하지만, 아주리 군단의 에이스 자리, 등번호 10번 모두 프란체스코 토티에게 빼앗기고 등번호 7번으로 대회를 출장하는 굴욕을 맞이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도 그는 토티의 백업일뿐. 그나마 멕시코전에서 극적인 헤더 동점골로 팀을 탈락위기에서 구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경기력은 저조했고, 한국과의 16강전에서 그도 선발출장했지만 그 토티가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퇴장당하며 1-2로 역전패했다.

그리고 유로 2004 지역예선에서는 5골을 넣는 활약으로 이번엔 토티와 공존에 성공하여 첫 경기부터 당당하게 선발출장했다. 그러나 1차전에서 토티가 상대선수에게 침을 뱉어 퇴장당하는 변수가 발생했고, 이탈리아도 1, 2차전을 연달아 비기는 졸전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과 덴마크에 밀려 탈락하고 만다. 델 피에로 자신도 무득점.

이렇게 국가대표와는 별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으니 바로 2006년 독일 월드컵이었다. 이 대회에서 그는 풍부한 경험으로 주전과 서브를 넘나들며 활약했고, 개최국 독일과의 4강전에서는 질라르디노의 패스를 받아 멋진 쐐기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결승전에서도 교체출장하여 승부차기에서 4번째 키커로 나서 슛을 깔끔하게 성공시켰고, 아주리는 통산 4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 델 피에로 자신도 국대에서 처음으로 메이저대회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된다.

그의 마지막 메이저대회가 된 유로 2008에선 부상으로 빠진 파비오 칸나바로를 대신하여 주장 완장을 찼지만 무득점에 그쳤고, 이탈리아도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패배하여 탈락했다.

A매치 통산 91경기 27골로 단순히 스텟만 보면 나쁘지 않지만 메이저대회 본선에선 월드컵 2골, 유로 1골로 이름값에 걸맞는 활약을 보이지 못한게 아쉽다.

3. 플레이스타일[편집]

Fantasista



파일:external/c2down.cyworld.co.kr/download?fid=642249182f6bb8b29ae4491a6b5cb320&name=mir.gif
저기 어시 찔러주시는 하얀 드록바는 무시하자
많은 순간, 많은 경기에서 많은 이들을 웃고 울게했던 그의 '메롱' 세레머니.[13]

공격과 관련한 모든 분야에서, 즉 드리블, 패싱, 플레이메이킹, 킥 등 공격수로서 모든 면에 있어서 최상급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노쇠한 이후에도 충분히 먹히는 한방을 가지고 있었다. 키퍼가 도저히 손쓸 수 없는 각도로 슈팅을 날리는 델 피에로 존은 한 때 그의 전매특허였다.

파일:/image/139/2009/01/14/SK00702_20090114_090101.jpg
특히 전혀 예측하지 못할 각도로 뚝 떨어지는 프리킥은 공포 그 자체였다. 90년대부터 2000년대를 통틀어 최고의 키커를 손꼽을 때 최상위권에 들어가는 S급 프리키커. 특히 08/09 챔스 조별예선 VS 레알 마드리드 전 때 천하의 카시야스가 손도 못 뻗어보고 데꿀멍해야 했던 프리킥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파일:attachment/델피프리킥.gif
바로 이것. 프리킥? PK랑 다른게 뭐야?[14]

그도 사람인지라 나이를 먹다 보니 몸놀림이 예전같지 않다는 세간의 혹평도 따랐으나, 정확히는 젊은시절 장기부상후 연속된 부상으로 인해 스타일을 바꾸었다. 심지어 스트라이커의 최전성기로 평가받는 20대 후반에는 부상으로 인한 기량 하락과 플레이스타일의 변화로 갓 이적해온 풋내기뿐만 아니라 발레리 보지노프, 라파엘 팔라디뇨과 주전경쟁을 하기도 하는 등 시련의 시간을 지내기도 했다.[15] 오히려 나이를 먹으며 발 끝이 더욱 날카로워졌다는 호평이 따랐다. 체력은 좀 문제긴 하지만...
참고로 97년도 장기부상이후 계속된 잔부상으로 스타일이 현재처럼 정착된것 뿐이지, 데뷔시절이나 97년 이전을 보면 호나우두처럼 압도적인 속도로 수비를 터는 플레이에도 매우 능하였다. 인테르 시절의 호나우두의 라이벌로 언론 및 대다수의 팬이 지목한것이 바로 장기부상 이전의 델 피에로. 호나우두의 별명이 일 페노메논(천재), 델 피에로의 별명이 일 페노메논 베로(진정한 천재)였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4. 기타[편집]

2002 한일 월드컵 끝나고 2003년에 공중파 스포츠뉴스 1주년 특집으로 이탈리아 현지 방문해서 이탈리아선수 인터뷰를 요청하였는데 유일하게 인터뷰를 해준 선수이기도 하다. 한국이 강해서 이겼다고 립서비스까지 해준 알레의 멘탈은 한국 축구 팬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다섯 사람중 한 명이자 그 중 유일한 비 바르셀로나 선수였으나 15/16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전에서 프란체스코 토티가 교체 출전하면서 기립박수를 받아 유이한 선수로 바뀌었다.[16]

프로 데뷔는 다른 곳이었지만, 현재는 그냥 유벤투스 그 자체. 유벤투스 클럽 역사상 최다출장 및 최다골, 역대 최장기간 주장 역임 등 나서는 경기 하나하나가 현재 유벤투스의 역사가 되었다.

세리에 A에서만 통산 187골로, 이는 역대 세리에A 최다득점 9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17] 그리고, 이것저것 대회 다 포함해 비안코네리 유니폼을 입고 "그려넣은" 전체 골 수를 따지면 통산 290골. 세리에 A의 전설 쥐세페 메아자의 기록(인테르-282골)을 깨버렸던, 세리에 A 역사를 통틀어 원클럽 최다득점기록이었다. 이후 이 기록은 프란체스코 토티에 의해 경신되었다. 오오 알레신 오오

선수 통산 클럽 기록은 호주리그, 인도리그 포함 777경기 316골이다.

다만 클럽에서의 대활약과는 대조되는 국대 활약상 때문에 까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단적이 예로 월드컵에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2002년 한일 월드컵,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출장했으나 2002년 한일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멕시코전에서 한 골, 그리고 2006년 독일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한 골이 전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뼈저린 것은 유로 2000 결승전에서의 역적질.

델 베키오의 선재골로 프랑스에게 불안한 리드를 지키고 있던 아주리에게는 두 번의 완벽한 노마크 찬스가 있었지만 한명의 선수의 연달은 실수로 당시 당대 최강이었던 프랑스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릴 기회를 놓쳐버리는데 이것을 놓친 선수가 바로 델 피에로. 결국 프랑스가 대 역전 극으로 2:1로 우승해버린다.

그의 A매치 경력은 91경기 27골이다. 그래도 06년 우승멤버였으니 우승을 못한 것 보단 조금 나으려나

묘하게도 AS 로마프란체스코 토티와 비슷한 축구 인생(?)을 살고 있다. 팀에 대한 충성심이나 비슷한 포지션, 그리고 젊은시절부터 주장을 맡은 점과 알레하면 유베, 유베하면 알레이듯, [18] 이러한 것들이다.[19] 차이점이라면 나이는 델 피에로가 2살 더 많고, 델 피에로는 파도바 유스에서 유베 유스로 옮긴것이고 토티는 어릴때부터 로마의 유스 팀에 속해있었다는 정도이다..

파일:attachment/델피3.jpg
외모는 전형적인 이탈리아형 미중년으로 잘생긴 편으로 인정받는다. 이탈리안 판타지스타의 기본소양 1990년대 유벤투스의 동영상을 보면 델 피에로의 20대 시절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수려한 외모를 자랑한다. 더군다나 당시 델 피에로와 함께하던 유벤투스의 투톱은 필리포 인자기. 부녀자들 하악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오아시스의 리더였던 노엘 갤러거와 친분이 있다. 오아시스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노엘을 독일과의 4강전에 초대하기도 했고 그 경기에서 이기니까 결승전에 노엘에게 같은 옷을 입고 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었다.

참고로 이 남자 정말 멋진남자다. 이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너란 남자 멋진 남자

부폰의 2017/18 UEFA 챔피언스 리그 관련 항의성 발언들에 대해서 잔루이지 부폰에게 침착할 것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유벤투스 악성 팬덤에게 욕을 먹고 있다. 메드히 베나티아가 강간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고,지오르지오 키엘리니가 마찬가지로 과도한 심판 비난으로 구설수에 오른 것에 비해서 델 피에로는 부폰이 너무 흥분해서 그렇다는 두둔과 자제를 둘다 시도한 몇 안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 악성 울트라스들은 자기팀 레전드를 까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해당 경기 심판의 아내에게 살해 문자나 협박이 오고가는 마당에서 유일하게 침착하고 냉정한 판단을 보여줘서 알레의 멘탈은 다시끔 재평가 받고 있다.

카잔의 기적을 보고 한국은 심한 농담을 만들어내는데 익숙한 팀이라고 말했다.

5. 기록[편집]

5.1. 대회 실적[편집]

5.2. 출전 기록[편집]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1/92

파도바

이탈리아 세리에 B

4

0

0

0

-

-

1992/93

파도바

이탈리아 세리에 B

10

1

0

0

-

-

1993/94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11

5

1

0

2

0

1994/95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29

8

10

1

11

1

1995/96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29

6

2

1

11

6

1996/97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22

8

4

0

6

4

1997/98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32

21

4

1

10

10

1998/99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8

2

1

0

4

0

1999/00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34

9

2

1

9

2

2000/01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25

9

2

0

6

0

2001/02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32

16

4

1

10

4

2002/03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24

16

4

0

4

0

2003/04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22

8

0

0

13

5

2004/05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30

14

4

3

4

3

2005/06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32

12

1

0

10

3

2006/07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B

35

20

2

3

-

-

2007/08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37

21

3

2

-

-

2008/09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31

13

1

2

9

6

2009/10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23

9

2

0

5

0

2010/11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33

8

4

0

10

3

2011/12

유벤투스

이탈리아 세리에 A

23

3

4

0

-

-

2012/13

시드니 FC

호주 A 리그

24

14

-

-

-

-

2013/14

시드니 FC

호주 A 리그

24

10

-

-

-

-

2014

델리 다이나모스

인도 슈퍼리그

10

1

-

-

-

-

5.3. 개인 수상[편집]

  • 브라보상: 1996

  • ESM 올해의 팀: 1995-96, 1996-97, 1997-98

  • FIFA 100: 2004

  • 세리에 A 득점왕: 2007-08

  • 세리에 B 득점왕: 2006-07

  •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1997-98

  • 올해의 이탈리아 축구선수: 1998, 2008

  • 발롱도르: 4위 (1995, 1996)

  • 월드사커 어워드: 2위 (1995)

6. 델 피에로에 대한 말말말[편집]

파일:del-piero_m.jpg

"이탈리아에서 아름다운 게임을 불러오는 사람."
ㅡ 롭 휴즈

"그가 곧 유벤투스이며, 유벤투스가 곧 델 피에로다."
루이스 피구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델 피에로이다."
라울 곤잘레스

[1] 영어를 제외한 로망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입단초기에는 15, 16번을 달았다.[3] 이 말이 과장이 아닌 것이, 실제로 델 피에로가 시드니로 떠나고 나서 구단에선 진지하게 10번을 영구 결번을 시키려 했다. 아쉽게도 1 시즌만 공번 상태였고 2013-14 시즌, 카를로스 테베스가 두 시즌 동안, 10번을 달았으며 테베스가 이적한 후에는 폴 포그바가 6번에서 10번으로 등번호를 바꿨다가 1 시즌만 뛰고 친정팀인 맨유로 리턴했다. 그 후, 다시 1 시즌을 공번 상태로 두다 파울로 디발라가 2017-18 시즌부터 10번을 달고 있다.[4] 인테르에서 활약하던 호나우두가 천재(IL Fenomeno)라 불리자, 라이벌인 유벤투스 팬들이 "델 피에로야말로 진정한 천재"라며 붙인 별명이다.[5] 이건 재능문제가 아니다. 축구전술의 흐름상 안 나오는게 당연하다. 판타지스타라는 스타일 자체가 유기적인 압박이 중시되는 현대 축구에서 주류가 될 수 없는 스타일이다. 멀리갈거 없이 원조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조조차 사키, 카펠로, 리피같은 당대 최고의 명장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받으며 볼로냐같은 중하위권팀으로 떠나야했다.[6] 실상 절묘하게 바조의 슬럼프가 겹치며 바조 안습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플레이스타일도 비슷한 데다 아직 짬밥이 안되니 감독 말도 잘 듣는 어린 영계 델 피에로를 중용한 리피 감독의 용병까지 겹쳐 소속팀에서는 물론 국대에서까지 델 피에로에게 밀려버리게 된다. 등번호까지 뺏긴다(...).[7] 04/05와 05/06은 박탈당했다. 자세한 것은 칼치오폴리 문서 참조.[8] 그동안 델 피에로를 눈여겨보던 맨유알렉스 퍼거슨 감독도 직접 영입의사를 타진했다.[9] 유벤투스 팬들의 애칭이 '올드레이디'인 것을 이용한 언어유희.[10] 유벤투스라는 단어 자체가 라틴어로 젊은이,젊은남성 같은 뜻으로 해석 된다. 그래서 유벤투스의 팬들을 그와 반대인 '올드레이디'라고 부른다.[11] 델 피에로가 말한 신사는 '젊은이'를 뜻 하는 유벤투스 선수들이며 숙녀는 '올드레이디'인 팬들을 말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유벤투스 선수들은 팬들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12] 이미 96년도 시즌에 받은적이 있다. 15년이 지난 지금 또 받다니 당시의 유벤투스의 상황을 말해주는듯 하다.[13] 2008/09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선취골을 뽑아내는 장면[14] 다만 보면 알겠지만 벽 세우는 위치가 이상하다. 델 피에로가 먼 포스트 쪽으로 감아차는 것을 의식해서 저렇게 세운듯.[15] 최종 승자는 델 피에로였다.[16] 나머지 5명은 디에고 마라도나 , 요한 크루이프, 호나우지뉴, 안드레스 이니에스타.[17] 06/07 세리에 B에서 넣은 20골을 포함하면 208골. 7위까지 단박에 UP![18] 토티도 로마나 마찬가지으므로.[19] 다만 비슷한 포지션이라 해도 델 피에로는 좀 더 섀도우 스트라이커로 한정 된다. 토티의 경우는 공격형 미드필더부터 최전방 스트라이커까지 소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