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트베르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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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市旗) | 문장(紋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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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
국가 | |||
행정구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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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환경 | |||
인구 | 565,039명[2] | ||
면적 | 208.22km² | ||
인구밀도 | 2,713.7명/km² | ||
정치 | |||
시장 | |||
벨기에 서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안트베르펜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영어 명칭인 앤트워프로 잘 알려져 있다.
안트베르펜 주는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메헬런과 튀른하우트(Turnhout) 같은 중소 도시들이 퍼져나가 있는 형태며 대부분의 도시들이 스헬더(Schelde) 강과 연결된 소규모 강과 운하를 중심으로 세워져 있다. 플란데런에서 유일하게 국경과 주 경계가 동일한 언어권만을 접한 주다. 그래서 모든 공문서 작성과 공무가 네덜란드어로만 진행된다. 위에는 네덜란드가 있으며 남쪽에는 브뤼셀을 감싸는 플람스브라반트와 접해 있다.
명칭인 안트베르펜의 기원에 대한 설화가 있다. 고대 로마 시절, 드루온 안티고누스(Druon Antigonus)라는 거인이 사람들의 손목을 잘라내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러자 로마의 장군인 실비우스 브라보(Silvius Brabo)가 안티고누스를 죽여서 물리치고 그의 손을 똑같이 잘라내서 스헬더 강에 던졌다고 한다. 이 '손목을 던지다'(Hantwerpen)란 단어가 묵음화 등을 거쳐 안트베르펜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이때 실비우스 브라보는 이 단어가 '항구에'란 뜻도 있으니 그대로 도시 이름을 유지하자고 했다고 한다. 안트베르펜 시청사 앞에는 실비우스 브라보가 손목을 던지는 모습을 묘사한 분수대가 있으며, 안트베르펜 내에서는 이 손목 모양의 초콜릿 등의 기념품을 판매한다.[4]
안트베르펜 주는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메헬런과 튀른하우트(Turnhout) 같은 중소 도시들이 퍼져나가 있는 형태며 대부분의 도시들이 스헬더(Schelde) 강과 연결된 소규모 강과 운하를 중심으로 세워져 있다. 플란데런에서 유일하게 국경과 주 경계가 동일한 언어권만을 접한 주다. 그래서 모든 공문서 작성과 공무가 네덜란드어로만 진행된다. 위에는 네덜란드가 있으며 남쪽에는 브뤼셀을 감싸는 플람스브라반트와 접해 있다.
명칭인 안트베르펜의 기원에 대한 설화가 있다. 고대 로마 시절, 드루온 안티고누스(Druon Antigonus)라는 거인이 사람들의 손목을 잘라내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러자 로마의 장군인 실비우스 브라보(Silvius Brabo)가 안티고누스를 죽여서 물리치고 그의 손을 똑같이 잘라내서 스헬더 강에 던졌다고 한다. 이 '손목을 던지다'(Hantwerpen)란 단어가 묵음화 등을 거쳐 안트베르펜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이때 실비우스 브라보는 이 단어가 '항구에'란 뜻도 있으니 그대로 도시 이름을 유지하자고 했다고 한다. 안트베르펜 시청사 앞에는 실비우스 브라보가 손목을 던지는 모습을 묘사한 분수대가 있으며, 안트베르펜 내에서는 이 손목 모양의 초콜릿 등의 기념품을 판매한다.[4]
안트베르펜(독일어: Antwerpen) 또는 안트베르펀(네덜란드어: Antwerpen), 앙베르스(프랑스어: Anvers)
네덜란드어 현지 발음은 안트웨르펀에 가까우나 이전에 국립국어원이 안트베르펜으로 채택한 상태에서 아직 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표기법은 안트베르펜이다. 현행 네덜란드어 표기법으로는 "안트베르펀"이 맞지만, 예외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어의 경우 벨기에 표준 발음은 앙베르스(/ɑ̃.vɛʁs/)인데 프랑스에서는 앙베르(/ɑ̃.vɛʁ/)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라루스 사전에서는 앙베르스라고 표기하고 옆에 프랑스에서는 앙베르라고 적어놓았다.
대체로 역사적으로 중요했거나 영국과 교류가 많았던 등의 이유로 도시에 별도의 영어 이름(exonym)이 붙는 경우가 많은데, 플란데런의 경우 중세부터 영국과 경제적 교류가 많았던 관계로 브뤼셀(Brussel-Bruxelles/Brussels)과 안트베르펀(Antwerpen/Antwerp) 뿐만 아니라 브뤼허(Brugge/Bruges, 영어, 프랑스어 공통), 겐트(Gent/Ghent), 이프르(Ieper/Ypres, 영어, 프랑스어 공통), 오스텐데(Oostende/Ostend)에도 영어 이름이 따로 붙어 있다. 이웃 네덜란드에는 헤이그만 별도 영어명이 붙어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네덜란드어 발음을 살려 안트베르펀이라는 표기도 사용되고, 안트베르펀식 방언으로는 안트와르프(Antwarp)라고도 부른다. 유래는 상당기간 브라반트 공국에 속했지만 그 이전에 존재했던 안트베르펜 후국. 한국에는 과거 영어식 발음인 '앤트워프'로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에는 현지 발음을 존중하여 안트베르펜으로 부르는 추세다.[5]
네덜란드어 현지 발음은 안트웨르펀에 가까우나 이전에 국립국어원이 안트베르펜으로 채택한 상태에서 아직 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표기법은 안트베르펜이다. 현행 네덜란드어 표기법으로는 "안트베르펀"이 맞지만, 예외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어의 경우 벨기에 표준 발음은 앙베르스(/ɑ̃.vɛʁs/)인데 프랑스에서는 앙베르(/ɑ̃.vɛʁ/)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라루스 사전에서는 앙베르스라고 표기하고 옆에 프랑스에서는 앙베르라고 적어놓았다.
대체로 역사적으로 중요했거나 영국과 교류가 많았던 등의 이유로 도시에 별도의 영어 이름(exonym)이 붙는 경우가 많은데, 플란데런의 경우 중세부터 영국과 경제적 교류가 많았던 관계로 브뤼셀(Brussel-Bruxelles/Brussels)과 안트베르펀(Antwerpen/Antwerp) 뿐만 아니라 브뤼허(Brugge/Bruges, 영어, 프랑스어 공통), 겐트(Gent/Ghent), 이프르(Ieper/Ypres, 영어, 프랑스어 공통), 오스텐데(Oostende/Ostend)에도 영어 이름이 따로 붙어 있다. 이웃 네덜란드에는 헤이그만 별도 영어명이 붙어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네덜란드어 발음을 살려 안트베르펀이라는 표기도 사용되고, 안트베르펀식 방언으로는 안트와르프(Antwarp)라고도 부른다. 유래는 상당기간 브라반트 공국에 속했지만 그 이전에 존재했던 안트베르펜 후국. 한국에는 과거 영어식 발음인 '앤트워프'로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에는 현지 발음을 존중하여 안트베르펜으로 부르는 추세다.[5]
로마 시대에는 스헬더강의 흐름이 지금과 달랐으며, 안트베르펜 일대에는 갈로-로마인 정착지가 형성되어 도자기, 기와, 화폐, 건물 흔적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은 이곳이 단순한 군사 기지가 아니라 지역 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입증하며, 4~5세기까지도 로마 문화의 흔적이 이어졌다. 안트베르펜이라는 지명은 로마계 언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7세기에는 메로빙거 왕조의 중요한 거점으로 성장했다. 성 엘리기우스와 성 아만두스가 이 지역을 방문해 기독교 선교를 펼쳤고, 성 베드로와 성 바울에게 봉헌된 교회가 세워졌다.
당시 안트베르펜은 화폐를 주조하는 정치·종교적 중심지였으며, 귀족과 왕권이 결합한 권력 거점으로 발전하였다. 836년에는 바이킹의 공격으로 도시가 불탔지만 이후에도 재건되었고, 9~10세기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초기 상업도시가 형성되었다. 목조 가옥과 계획적인 도로망, 공예 작업장, 수입 도자기 등이 발견되어 북유럽의 초기 상업도시들과 유사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10세기 이후 안트베르펜은 동프랑크 왕국의 변경 요충지가 되었고, 스헬더강을 통한 무역과 통행세 징수로 경제적 중요성이 커졌다.
12세기에는 마을 전체를 둘러싼 성벽이 축조되었으며, 성 미카엘 수도원과 같은 종교 시설이 들어섰다. 이후 성모 대성당이 1352년부터 1521년까지 건설되었고, 화약 무기의 등장에 맞춰 성곽도 개량되었다. 안트베르펜은 점차 브라반트 공국의 대표적인 상업도시로 성장하여 브뤼허의 경쟁 도시가 되었으며, 영국산 모직물과 독일 금속제품, 포르투갈 향신료 무역을 바탕으로 국제 상업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16세기 초에는 도시 발전의 절정기를 맞아 유럽을 대표하는 무역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1501년 포르투갈 상인이 안트베르펜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산 향신료와 사치품을 가져오면서 안트베르펜은 신항로 무역의 중간기지 역할을 하게 되어 상업과 금융업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후 16세기 중반에는 인구가 10만 명에 육박하면서 당시 지중해 무역의 최대 거점인 베네치아를 능가하게 되었다. 세계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던 안트베르펜은 거상들이 독점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수입한 원당을 정제하는 설탕 산업도 크게 번성하여 1550년에는 15개의 정제소가 운영되었다. 한편 안트베르펜은 루터교가 가장 먼저 확산된 지역 가운데 하나였으며, 수도원 출신 개혁자들의 활동으로 종교개혁이 퍼졌지만 당국은 수도원을 폐쇄하고 이단으로 규정한 인물들을 화형에 처했다.
이 시기 안트베르펜 시청이 건설되고 성곽이 개축되는 등 도시 기반 시설도 크게 발전했으며, 경제적 번영과 함께 미술과 문화도 황금기를 맞아 훗날 플랑드르 회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1566년 성상파괴운동 이후 도시는 반가톨릭 폭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1576년에는 스페인 왕의 용병들이 자행한 '스페인의 분노' 사건으로 약 8천 명의 시민이 학살되고 도시가 약탈당했다. 이후 안트베르펜은 잠시 칼뱅파가 통치하는 반스페인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1584~1585년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1년이 넘는 포위전 끝에 도시를 함락시켰다. 함락 이후 주민의 절반가량이 독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로 이주해 인구는 약 4만 5천 명으로 감소했으며, 1587년 네덜란드 공화국이 스헬더강을 봉쇄하면서 해상 무역이 크게 쇠퇴했다. 이로 인해 상업과 학문, 예술의 중심은 북부 네덜란드로 이동하여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기반이 되었고, 이후 안트베르펜은 스페인령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중요한 도시로 남았지만 이전과 같은 번영은 회복하지 못했다.
1792년 프랑스 혁명군이 안트베르펜을 점령하면서 스헬더강은 다시 개방되었으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무역은 제한되었고, 나폴레옹은 안트베르펜을 '영국의 심장을 겨누는 권총'이라 부르며 군항으로 육성해 선박학교와 선박용 도크를 건설했다. 1830년 벨기에 혁명 당시에는 네덜란드군이 성채를 점령한 채 저항했으나 1831년 프랑스군이 이를 함락시켰고, 1839년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분리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스헬트강 통행세를 계속 징수할 권리를 유지했다. 이 통행세는 1863년 양국의 협정으로 폐지되었으며, 이를 기념해 '스헬트강 자유 축제'가 여러 차례 개최되었다.
산업 혁명으로 철제 증기선이 보급되고 국제 무역이 확대되면서 안트베르펜은 함부르크, 로테르담과 함께 유럽 최대 항구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도시의 산업·금융·노동·증권거래소 등 경제 전반이 항만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19세기에는 경기 변동도 겪었지만 벨기에령 콩고 자유국과 이후 벨기에령 콩고가 건설되면서 고무와 상아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독일과 동유럽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향하는 관문 역할도 수행했다. 급속한 도시 성장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고 신시가지가 조성되었으며, 옛 성벽을 철거하고 새로운 요새선을 구축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1914년 독일군의 공격 끝에 도시가 함락되었고, 전후인 1920년에는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경기장과 도시 시설이 정비되었다. 1930년에는 세계박람회가 열렸고 유럽 최초의 초고층 건물 가운데 하나인 보어런토런이 건설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1940년 독일군에게 점령되었다가 1944년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으며, 점령 기간 동안 나치와 협력 세력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대규모 검거를 실시해 최소 9,500명 이상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했고 대부분이 학살되었다. 많은 시민들이 저항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독일군은 항구를 겨냥해 V-1과 V-2 로켓 공격을 계속하여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특히 시네마 렉스 피격으로 566명이 목숨을 잃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항구 자체는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어 연합군의 독일 진격을 위한 핵심 보급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안트베르펜은 화폐를 주조하는 정치·종교적 중심지였으며, 귀족과 왕권이 결합한 권력 거점으로 발전하였다. 836년에는 바이킹의 공격으로 도시가 불탔지만 이후에도 재건되었고, 9~10세기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초기 상업도시가 형성되었다. 목조 가옥과 계획적인 도로망, 공예 작업장, 수입 도자기 등이 발견되어 북유럽의 초기 상업도시들과 유사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10세기 이후 안트베르펜은 동프랑크 왕국의 변경 요충지가 되었고, 스헬더강을 통한 무역과 통행세 징수로 경제적 중요성이 커졌다.
12세기에는 마을 전체를 둘러싼 성벽이 축조되었으며, 성 미카엘 수도원과 같은 종교 시설이 들어섰다. 이후 성모 대성당이 1352년부터 1521년까지 건설되었고, 화약 무기의 등장에 맞춰 성곽도 개량되었다. 안트베르펜은 점차 브라반트 공국의 대표적인 상업도시로 성장하여 브뤼허의 경쟁 도시가 되었으며, 영국산 모직물과 독일 금속제품, 포르투갈 향신료 무역을 바탕으로 국제 상업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16세기 초에는 도시 발전의 절정기를 맞아 유럽을 대표하는 무역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1501년 포르투갈 상인이 안트베르펜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산 향신료와 사치품을 가져오면서 안트베르펜은 신항로 무역의 중간기지 역할을 하게 되어 상업과 금융업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후 16세기 중반에는 인구가 10만 명에 육박하면서 당시 지중해 무역의 최대 거점인 베네치아를 능가하게 되었다. 세계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던 안트베르펜은 거상들이 독점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수입한 원당을 정제하는 설탕 산업도 크게 번성하여 1550년에는 15개의 정제소가 운영되었다. 한편 안트베르펜은 루터교가 가장 먼저 확산된 지역 가운데 하나였으며, 수도원 출신 개혁자들의 활동으로 종교개혁이 퍼졌지만 당국은 수도원을 폐쇄하고 이단으로 규정한 인물들을 화형에 처했다.
이 시기 안트베르펜 시청이 건설되고 성곽이 개축되는 등 도시 기반 시설도 크게 발전했으며, 경제적 번영과 함께 미술과 문화도 황금기를 맞아 훗날 플랑드르 회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1566년 성상파괴운동 이후 도시는 반가톨릭 폭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1576년에는 스페인 왕의 용병들이 자행한 '스페인의 분노' 사건으로 약 8천 명의 시민이 학살되고 도시가 약탈당했다. 이후 안트베르펜은 잠시 칼뱅파가 통치하는 반스페인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1584~1585년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1년이 넘는 포위전 끝에 도시를 함락시켰다. 함락 이후 주민의 절반가량이 독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로 이주해 인구는 약 4만 5천 명으로 감소했으며, 1587년 네덜란드 공화국이 스헬더강을 봉쇄하면서 해상 무역이 크게 쇠퇴했다. 이로 인해 상업과 학문, 예술의 중심은 북부 네덜란드로 이동하여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기반이 되었고, 이후 안트베르펜은 스페인령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중요한 도시로 남았지만 이전과 같은 번영은 회복하지 못했다.
1792년 프랑스 혁명군이 안트베르펜을 점령하면서 스헬더강은 다시 개방되었으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무역은 제한되었고, 나폴레옹은 안트베르펜을 '영국의 심장을 겨누는 권총'이라 부르며 군항으로 육성해 선박학교와 선박용 도크를 건설했다. 1830년 벨기에 혁명 당시에는 네덜란드군이 성채를 점령한 채 저항했으나 1831년 프랑스군이 이를 함락시켰고, 1839년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분리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스헬트강 통행세를 계속 징수할 권리를 유지했다. 이 통행세는 1863년 양국의 협정으로 폐지되었으며, 이를 기념해 '스헬트강 자유 축제'가 여러 차례 개최되었다.
산업 혁명으로 철제 증기선이 보급되고 국제 무역이 확대되면서 안트베르펜은 함부르크, 로테르담과 함께 유럽 최대 항구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도시의 산업·금융·노동·증권거래소 등 경제 전반이 항만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19세기에는 경기 변동도 겪었지만 벨기에령 콩고 자유국과 이후 벨기에령 콩고가 건설되면서 고무와 상아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독일과 동유럽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향하는 관문 역할도 수행했다. 급속한 도시 성장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고 신시가지가 조성되었으며, 옛 성벽을 철거하고 새로운 요새선을 구축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1914년 독일군의 공격 끝에 도시가 함락되었고, 전후인 1920년에는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경기장과 도시 시설이 정비되었다. 1930년에는 세계박람회가 열렸고 유럽 최초의 초고층 건물 가운데 하나인 보어런토런이 건설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1940년 독일군에게 점령되었다가 1944년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으며, 점령 기간 동안 나치와 협력 세력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대규모 검거를 실시해 최소 9,500명 이상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했고 대부분이 학살되었다. 많은 시민들이 저항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독일군은 항구를 겨냥해 V-1과 V-2 로켓 공격을 계속하여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특히 시네마 렉스 피격으로 566명이 목숨을 잃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항구 자체는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어 연합군의 독일 진격을 위한 핵심 보급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항구도시답게 안트베르펀 시 인구 중 56.3%가 이민자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총 172개국 국적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1#2 다만 벨기에에서는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외국인이거나 귀화인이었다면 이민자 배경이 있는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6] 전국 평균치가 이미 35%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다. 3/4이 이민자 배경을 가진 브뤼셀은 물론이고, 더 작지만 똑같이 50%대를 기록하는 왈롱의 도시들[7]과 60%에 달하는 중소도시 겡크[8]같은 케이스도 있기 때문이다.
교외화와 화이트 플라이트가 심하게 진행된 벨기에 대도시들의 특성상 시내에는 빈곤층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며, 대체로 시내 동부 지역과 스헬데 강 서부(좌안)에 주로 분포한다. 반대로 시내 남서부와 북부 항만을 재개발한 Eilandje 지구는 젊은 고소득층이 주로 거주하는 편이다.
교외화와 화이트 플라이트가 심하게 진행된 벨기에 대도시들의 특성상 시내에는 빈곤층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며, 대체로 시내 동부 지역과 스헬데 강 서부(좌안)에 주로 분포한다. 반대로 시내 남서부와 북부 항만을 재개발한 Eilandje 지구는 젊은 고소득층이 주로 거주하는 편이다.
국립대학교로 안트베르펜 대학교가 있으며 AUHA[9]라는 연맹의 주도로 고등교육이 운영되고 있다. AP-호게스쿨(AP-Hogeschool)[10], 안트베르프 마리팀 아카데미(Antwerp Maritime Academy)[11], 카를 데 흐로테 호게스쿨(Karel de Grote Hogeschool)[12] 가 속해 있다.
패션 분야에서 높은 입지를 갖고 있다.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는 패션 디자인 쪽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3대 패션스쿨이며, 유명 디자이너들도 상당수 배출해냈다. 대표적으로 뎀나 바잘리아, 마틴 마르지엘라, 앤 드뮐 미스터, 드리스 반 노튼, 크리스 반 아쉐, 더크 비켐베어크 등이 있다. 세계 3대 패션 스쿨 중 하나인 만큼, 입학도 힘들지만 졸업은 더 힘들다. 60명 ~ 70여 명이 입학해서 졸업하는 건 10여 명 수준이다. 패션 디자이너 황재근이 이곳 출신. [13]
헨트나 뢰번이 학문적인 도시의 성격이 강하다면 안트베르펜의 고등교육기관의 정책 방향의 경우 학문의 실제적 활용에 집중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다른 벨기에 대학에서 볼 수 없는 좀 더 전문적이고 사회 혹은 경제 중심의 학문들이 발달해 있는데 이는 다른 헨트나 뢰번과 비교했을 때 안트베르펜은 전통적으로 상업이 중심이 되는 도시였고 지금도 벨기에 대표적인 상업중심 도시이기에 실용적인 면을 중시하는 영향이 교육 정책에도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패션 분야에서 높은 입지를 갖고 있다.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는 패션 디자인 쪽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3대 패션스쿨이며, 유명 디자이너들도 상당수 배출해냈다. 대표적으로 뎀나 바잘리아, 마틴 마르지엘라, 앤 드뮐 미스터, 드리스 반 노튼, 크리스 반 아쉐, 더크 비켐베어크 등이 있다. 세계 3대 패션 스쿨 중 하나인 만큼, 입학도 힘들지만 졸업은 더 힘들다. 60명 ~ 70여 명이 입학해서 졸업하는 건 10여 명 수준이다. 패션 디자이너 황재근이 이곳 출신. [13]
헨트나 뢰번이 학문적인 도시의 성격이 강하다면 안트베르펜의 고등교육기관의 정책 방향의 경우 학문의 실제적 활용에 집중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다른 벨기에 대학에서 볼 수 없는 좀 더 전문적이고 사회 혹은 경제 중심의 학문들이 발달해 있는데 이는 다른 헨트나 뢰번과 비교했을 때 안트베르펜은 전통적으로 상업이 중심이 되는 도시였고 지금도 벨기에 대표적인 상업중심 도시이기에 실용적인 면을 중시하는 영향이 교육 정책에도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접한 네덜란드 로테르담과 함께 유럽의 물류 및 중화학 공업의 중심지이다. 물동량 기준 로테르담에 이은 유럽 2위의 항구를 가지고 있으며, 항만의 물류상 이점을 살려 정유시설 5개를 보유한 세계 2위의 석유화학 클러스터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15] 로테르담이 라인강을 통한 독일 루르 공업 지대로부터의 내륙 수운에 집중한다면 안트베르펀은 전통적으로 철도(Ijzeren Rijn)와 고속도로(1960년대 이후)를 통해 루르 이남 지역(쾰른, 라인-마인 등)의 물동량에 집중했다.[16] 또한 벨기에는 네덜란드와 달리 석탄과 철광석을 기반으로 19세기부터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국내 발생 물동량 또한 상당한 편이며[17], 왈롱의 리에주부터 프랑스의 랭스까지 이어지는 공업 지역에 더해 가까이는 옆동네 켐펀[18]과 브뤼셀 인근 지역에서 발생하는 물동량도 안트베르펀의 항구를 통해 이동한다.[19]
역사적으로도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제일가는 상업 및 금융 중심지이자 항구 도시였다. 과거 영국의 양모 수출 루트가 안트베르펜이었으며,[20] 스페인령 식민지에서 나오는 향신료와 사탕수수 같은 생산물들도 안트베르펀의 항구로 들어와 가공되었다. 플란데런 지역이 스페인의 영토이던 시절에는 세계적인 은광인 포토시 은광의 수익과 이 안트베르펜에서 나오는 수익이 비슷할 정도였다.
또 다이아몬드 관련 산업이 발달했다. 다이아몬드 거래소만 해도 4개가 있고, 아예 중앙역 바로 서남쪽에 '다이아몬드 구역'(Diamantwijk)이 따로 있을 정도다. 이 다이아몬드 구역은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유통의 중심지로서, 보석 가공 인력만 12,000여 명이 있으며 전 세계 다이아몬드의 80%가 이곳을 거쳐갈 정도다. 안트베르펀의 다이아몬드 산업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주도권을 잡아 왔었지만, 요즘에는 인도인, 특히 구자라트의 팔란푸르라는 소도시 출신 인도인들이 본국과의 공급사슬을 무기로[21] 다이아몬드 거래를 꽉 잡고 있다. # 이러한 보석 유통의 밀집도로 인해 세기의 강도 사건이라 불리는 안트베르펀 다이아몬드 강도 사건이 여기서 발생했다. 이때 5인조 강도들이 탈취한 다이아몬드와 금 등 보석들의 가치는 1억 달러 이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범행을 주도한 리더는 잡혔지만 훔친 보석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나머지 범인은 잡히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백신을 생산하는 그 유명한 얀센이 바로 이 안트베르펜 주 동부 튀른하우트 인근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얀센이라는 회사 이름은 이 회사의 창시자인 플란데런인 파울 얀센[22]의 성씨에서 유래한다. 1960년대 이후 얀센은 미국 제약사 존슨앤드존슨에 인수되어 다국적 기업이 되었다. 본래는 할로페리돌, 리스페리돈 등 조현병 치료제로 유명했었으며, 코로나 사태 이후 일명 얀센 백신인 얀센-존슨앤존슨 코로나 백신은 한국에서도 접종되어 인지도가 높다.
역사적으로도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제일가는 상업 및 금융 중심지이자 항구 도시였다. 과거 영국의 양모 수출 루트가 안트베르펜이었으며,[20] 스페인령 식민지에서 나오는 향신료와 사탕수수 같은 생산물들도 안트베르펀의 항구로 들어와 가공되었다. 플란데런 지역이 스페인의 영토이던 시절에는 세계적인 은광인 포토시 은광의 수익과 이 안트베르펜에서 나오는 수익이 비슷할 정도였다.
또 다이아몬드 관련 산업이 발달했다. 다이아몬드 거래소만 해도 4개가 있고, 아예 중앙역 바로 서남쪽에 '다이아몬드 구역'(Diamantwijk)이 따로 있을 정도다. 이 다이아몬드 구역은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유통의 중심지로서, 보석 가공 인력만 12,000여 명이 있으며 전 세계 다이아몬드의 80%가 이곳을 거쳐갈 정도다. 안트베르펀의 다이아몬드 산업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주도권을 잡아 왔었지만, 요즘에는 인도인, 특히 구자라트의 팔란푸르라는 소도시 출신 인도인들이 본국과의 공급사슬을 무기로[21] 다이아몬드 거래를 꽉 잡고 있다. # 이러한 보석 유통의 밀집도로 인해 세기의 강도 사건이라 불리는 안트베르펀 다이아몬드 강도 사건이 여기서 발생했다. 이때 5인조 강도들이 탈취한 다이아몬드와 금 등 보석들의 가치는 1억 달러 이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범행을 주도한 리더는 잡혔지만 훔친 보석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나머지 범인은 잡히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백신을 생산하는 그 유명한 얀센이 바로 이 안트베르펜 주 동부 튀른하우트 인근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얀센이라는 회사 이름은 이 회사의 창시자인 플란데런인 파울 얀센[22]의 성씨에서 유래한다. 1960년대 이후 얀센은 미국 제약사 존슨앤드존슨에 인수되어 다국적 기업이 되었다. 본래는 할로페리돌, 리스페리돈 등 조현병 치료제로 유명했었으며, 코로나 사태 이후 일명 얀센 백신인 얀센-존슨앤존슨 코로나 백신은 한국에서도 접종되어 인지도가 높다.
안트베르펜의 성모 성당(Onze-Lieve-Vrouwekathedraal)[24]은 유난히 뾰족해 보이는 첨탑이 특징인 성당이다. 루벤스의 작품 4점이 이 성당에 있으며, 플랜더스의 개가 안트베르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네로가 보고 싶어했던 루벤스의 그림이 있는 성당이 이곳이다. 1556년 성상 파괴 사건(beeldenstorm) 때 신교도들에게 파괴당한 적이 있으며, 그 때문인지 성당에는 구체적인 인물 조각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 패널화가 걸려있다. 성모 성당은 '벨기에와 프랑스의 종루'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안트베르펜 시청 건축물 역시 같은 세계유산에 포함되어 있다.
왕립 미술 박물관에는 루벤스, 안토니 반 다이크, 티치아노 같은 안트베르펜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던 르네상스 시기부터 바로크 시기까지의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루벤스의 경우는 그가 생전에 공방으로 사용하던 루벤스하우스가 그대로 남아있어 부유했던 화가의 대표 주자인 루벤스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베네룩스 일대를 통틀어 현재까지 가장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의 문화가 잘 보존된 도시이다. 지금도 다이아몬드 구역과 시내 곳곳에서는 키파를 쓰고 이디시어를 쓰며 생활하는 하레디들을 매우 흔히 볼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동유럽 지역의 유대인 박해(포그롬)를 피해 운 나쁘게 가까운 독일로 도망쳤다가, 1930년대 나치 집권 이후 다시 벨기에로, 특히 상업이 발달한 안트베르펀으로 넘어온 사람들로, 옆 나라 네덜란드의 주류 세파르딤 유대인들(16세기 이주)과는 문화가 판이하게 다르고 현지 문화와의 동화 정도도 크게 달랐다.
왕립 미술 박물관에는 루벤스, 안토니 반 다이크, 티치아노 같은 안트베르펜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던 르네상스 시기부터 바로크 시기까지의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루벤스의 경우는 그가 생전에 공방으로 사용하던 루벤스하우스가 그대로 남아있어 부유했던 화가의 대표 주자인 루벤스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베네룩스 일대를 통틀어 현재까지 가장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의 문화가 잘 보존된 도시이다. 지금도 다이아몬드 구역과 시내 곳곳에서는 키파를 쓰고 이디시어를 쓰며 생활하는 하레디들을 매우 흔히 볼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동유럽 지역의 유대인 박해(포그롬)를 피해 운 나쁘게 가까운 독일로 도망쳤다가, 1930년대 나치 집권 이후 다시 벨기에로, 특히 상업이 발달한 안트베르펀으로 넘어온 사람들로, 옆 나라 네덜란드의 주류 세파르딤 유대인들(16세기 이주)과는 문화가 판이하게 다르고 현지 문화와의 동화 정도도 크게 달랐다.
대한민국 출신 축구 선수들 여러 명이 거쳐갔던 로열 앤트워프 FC의 연고지다. 앤트워프는 이 도시의 영국식 이름으로,[25] 이때 한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이 도시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K 베이르스홋 VA도 본 도시를 연고지로 하고 있으며 두 팀 간의 경기를 안트베르펜 더비라 부르고 있다.
1920년 올림픽이 개최된 곳이며, 테니스 ATP 250 대회(European Open)가 2016년부터 매년 10월 경에 개최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ATP의 경우 인도어(In-door) 대회이고 사용 코트는 하드코트이다. 프로축구 구단으로 인지도 높은 도시이지만 테니스 대회로도 꽤 유명하다.
2022년에는 카운터 스트라이크: 글로벌 오펜시브의 메이저 대회인 CS:GO Major Championships이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1920년 올림픽이 개최된 곳이며, 테니스 ATP 250 대회(European Open)가 2016년부터 매년 10월 경에 개최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ATP의 경우 인도어(In-door) 대회이고 사용 코트는 하드코트이다. 프로축구 구단으로 인지도 높은 도시이지만 테니스 대회로도 꽤 유명하다.
2022년에는 카운터 스트라이크: 글로벌 오펜시브의 메이저 대회인 CS:GO Major Championships이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 벨기에, 프랑스 국적의 지휘자 앙드레 클뤼탕스가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났다. 앙드레라는 이름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면서 개명한 것이다.
- 세계적으로 매우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일렉트로닉 뮤직 페스티벌인 Tomorrowland가 안트베르펜 봄에서 개최된다.
[서머타임] [2] 2025년 1월 1일 기준.[3] 연방 하원, N-VA 대표 겸직[4] 이 손목 모양의 초콜릿에 대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레오폴드 2세의 악행과 연관되어 '벨기에는 자국이 식민지한테 자행한 추악한 제국주의적 역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음식화하는 미개한 사이코패스 인종차별주의 옹호 집단이다!'라고 호도하고 선동하는 글이 떠돈다. 벨기에가 인종차별 관련 이슈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적이 적은 나라이지만 인터넷 커뮤니티 상의 근거 없는 글과 실제 지역의 전통 정도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다만 레오폴드 2세의 악행이 있고도 굳이 '다크 초콜릿'으로 기념품을 만드는 건 좋은 소리가 나오기 힘든 행동이긴 하다. 레오폴드 2세의 문서에도 적혀있지만 벨기에 초콜릿 자체가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착취로 얻은 결과이기 때문. 차라리 초콜릿이 아닌 로마시대 방식으로 만든 빵이나 과자로 만들었다면 오해가 조금이나마 줄었을 것이다.[5] 한국에서는 유럽은 다른 배경을 가진 문화권이니만큼 현지 발음을 존중해서 영어식으로 '모스코우', '롬', '워쏘' 등으로 부르지 않고 되도록 현지식으로 '모스크바', '로마', '바르샤바' 등으로 부르고 있지만, 이상하게 유독 안트베르펜만 '앤트워프'라고 표기해놓은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엑소님이 붙은 이웃 네덜란드의 헤이그도 똑같다.[6] 이 통계 산정 방식으로 인해 네덜란드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림뷔르흐 동부와 안트베르펀 북부 지자체들에서는 딱히 (흔히 생각하는) 이민자가 많은 지역이 아닌데도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치가 나온다. 전자는 사실상 다리 건너 마스트리흐트의 교외 지역처럼 기능하고, 후자 또한 인접한 브레다, 틸뷔르흐, 에인트호번의 교외 지역처럼 기능함과 동시에 주택 가격을 감당하지 못하는 취약계층과 자산에 대한 세금 면탈을 노린 자영업자 및 자산가들이 네덜란드 전역에서 넘어와 거주한다. 이러한 연유로 네덜란드 접경 지역은 실업률이 비슷한 시골 지역 지자체들보다 살짝 높게 나온다.[7] 리에주, 샤를루아, 무스크롱, 라 루비에르 등[8] 이쪽은 옛날 광산 노동자로 이민한 이탈리아계 주민들 위주.[9] Associatie Universiteit en Hogescholen Antwerpen.[10]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가 속해 있다.[11] 벨기에 국립 해양 대학교.[12] 보석디자인과 시각 예술쪽으로 유명하며 예술관련 학위에 한해서는 신트 루카스 안트베르펀(Sint Lucas Antwerpen)과 공동 학위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13] 자고로 저 60명 ~ 70명이 1차 서류평가와 2차 실기 시험을 통과한 이들이다. 실제 지원자는 더 많다. [14] Team Fouad Ahidar의 선전에서 보여지듯 이민자 출신 유권자들의 비중과 선거 제도를 악용해 플란데런에 투표하는 프랑스어 화자들의 영향도 배제할 순 없지만, 대체적으로 브뤼셀에 거주하는 플란데런인들은 비교적 젊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 진보적이다.[15] 로테르담이 이웃 드레히트스테덴(Drechtsteden, 로테르담 동남쪽의 -drecht로 끝나는 네 도시들)과 항만 운영주체를 통합한 것과 같이 이쪽도 브뤼헤의 항구와 운영주체 통합이 예정되어 있다. 특이하게 두 항구 사이에 끼어 있는 겐트의 항구는 독립되어 있는데, 이쪽은 입지상 네덜란드 제일란트(플란데런 제일란트)의 테르뇌전을 통해서만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관계로 2021년 통합 발표 이전부터 이미 제일란트의 항만공사와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6] 동아시아에서 부산항이 감당하는 환적수요를 유럽에서는 로테르담과 안트베르펜이 양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산항이 일본과 러시아 쪽에서 오는 환적수요를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독보적인 규모의 물동량을 확보했듯이 이쪽도 독일과 체코, 오스트리아 등 중부 유럽 쪽에서 오는 환적수요가 상당한 편이다.[17] 비슷한 방식의 공업화는 네덜란드 동남부 끝자락의 림뷔르흐 주 남부에 한해 일부 찾아볼 수 있었지만, 이쪽은 위치가 위치인지라 전통적으로 Ijzeren Rijn 철도를 따라 안트베르펀 항구로 향하는 물동량이 상당했다. 이외 네덜란드 전국에서 전통적인 석탄/철광석 기반의 산업화는 벨기에에 비해 크게 미약했다. 일례로, 벨기에의 1인당 GDP는 암스테르담이 전 유럽의 유대인들과 위그노들을 받아들이며 상업 중심지로 성장한 1600년대부터 네덜란드에 역전되어 있던 상태였지만, 19세기 말 산업화 이후 벨기에가 네덜란드를 재역전하어 1차대전으로 벨기에가 쑥대밭이 되기 직전 연도인 1913년 기준 네덜란드보다 1인당 GDP가 높았다. 출처에 따라서는 전간기와 2차대전 이후에도 네덜란드보다 앞섰다고 나오는 출처도 있다.[18] 이쪽은 물류 중심이다.[19] 다만 하천가에 접한 하항이라는 특성상 확장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편이다. 이는 유럽의 주력 항구인 로테르담과 함부르크 등이 공유하는 문제점인데 하천가에 위치한 하항이라는 특성상 확장에 제약이 많이 붙다 보니 중국의 항구들이나 부산항, 싱가포르항 등에 밀리는 편이다.[20] 원래는 브뤼헤가 이 역할을 했으나, 15세기 전후로 즈웨인 만의 퇴적으로 물길이 막히면서 안트베르펜에게 그 지위를 넘겨준다. 그래도 아름다운 과거 도시의 모습은 브뤼헤가 더 잘 간직하고 있다.[21] 본래는 가공부터 유통까지 전부 안트베르펀에서 이뤄졌지만, 이들은 임금이 저렴한 인도에서 가공하고 안트베르펀에서 거래하는 모델을 정립했다.[22] 얀센은 네덜란드어권에서 흔한 성씨이다.[23] 지하 구간으로 운행하는 트램[24] 보통 안트베르펀 대성당이라고 한다.[25] 로열 앤트워프 창단을 주도한 이들이 영국인들이었다.[26] 쉽은 앤트워프와 함부르크에서만 건조가 가능한데 그 중에서도 공업가치가 더 높은 앤트워프 쪽이 더 빠르게 쉽을 뽑아낼 수 있다. 앤트워프 쪽이 대서양과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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