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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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Paul Gaugui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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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Eugène Henri Paul Gauguin (외젠 앙리 폴 고갱) |
출생 | |
사망 | |
마르키즈 제도 히바오아 | |
국적 | |
배우자 | 메테소피 가드 (1873년 ~ 1894년, 결별) 테하아마나 (1891년 ~ 1893년, 결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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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폴 고갱 (1889년 作), 국립미술관 |
전업 화가로 뛰어들기 전에는 도선사로 있다가 1871년 모친상을 당한 후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사에 취직, 주식중개인으로 있으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덴마크 여인 메테 소피 가드(Mette Sophie Gad, 1850~1920)와 결혼한 뒤에는 생활이 한층 안정되어 여유로운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처럼 주말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소위 주말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훗날 인상파로 불린 화가 카미유 피사로 등의 그림을 팔아줬을 만큼 제법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35세에 돌연 처자식 내팽개치고 화가가 되었다.1883년 금융위기로 주식시장이 위축되었던 게 주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요즘은 고갱이 처자식을 팽개친 게 아니라, 부인한테 쫓겨났다고 보는 쪽이 더 많다. 프랑스 주식시장이 불황으로 접어들면서 고갱의 수입이 줄어들자 견디지 못한 메테소피가 덴마크로 돌아가버렸고,[1] 고갱도 뒤따라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고갱이 제대로 밥벌이를 못하자 메테소피의 가족들이 나가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프랑스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렇다면 흔히 이야기되는 처자식 팽개쳤다는 말은 고갱 입장에서는 꽤나 억울한 소리인 셈이다. 처자식의 생계를 팽개쳤다면 말이 되겠지만 1891년을 마지막으로 메테소피와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2][3]
초기에는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 퐁타방에서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고 파리로 가서 미술계의 최신 트렌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고갱의 목적은 인상파가 초기에 줬던 충격처럼 '이 인간들에게 엄청난 쇼크를 주는 작품을 만들면 나는 미술계의 no.1이 되겠지'라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쇼킹한 작품을 내놓지는 못했다. 오히려 조르주 쇠라가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점묘법으로 미술계에 쇼크를 일으켜서 쇠라에게 이목이 쏠리자 쇠라의 점묘법을 가리켜 저주받은 점이라고 칭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우키요에를 접하고 어린 시절 본 페루의 도자기를 사 모으면서 그런 경험을 살려서 도자기 만드는 작업도 했다. 이를 통해서 고갱은 '유럽에서 있어봤자 모두가 놀랄 그림은 안 나오겠다. 유럽에서 떠나자.'라고 결심하고 매형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에서 근무한다는 것을 알고 파나마로 떠났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 공사는 개쪽이 나고 있었고[4] 매형은 파산해서 고갱을 챙겨줄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파나마를 떠나 마르티니크 섬에서 몇 달 간 머물렀다. 이때 마르티니크 섬에서 고갱은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성과를 거둔다.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후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친구였던 것으로 유명하다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고흐가 고갱을 동경해서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있는 아를로 와주기를 간청했다. 여기에는 고흐의 이상인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결말은 좋지 않게 끝나고 말았다.
고갱은 고흐의 초청으로 아를에 있는 고흐의 집, 노란색 벽 때문에 '노란 집'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그곳에서 9주 동안 고흐와 함께 지내며 작업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성격과 예술관의 차이 때문에 불화가 심해졌고, 결국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는 자해 사건이 일어나자 고갱은 노란 집을 떠났다. 두 사람은 이후에 다시 만나지는 않았지만 오만한 고갱도 고흐의 사건이 충격이었던지 파리로 돌아간 후 귀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의 모습으로 만든 도자기가 남아있다. 근래에 고갱이 고흐의 귀를 잘랐다는 설이 돌기도 했지만 고갱의 성향이나 여러 정황으로 봐서는 그냥 설에 불과한 듯하다.
이후 브르타뉴로 돌아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등의 걸작을 만든 후 1889년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동남아시아와 일본, 태평양의 독특한 문화를 접한 고갱은 다시금 유럽을 탈출하면 영감이 솟구치는 이상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서 타히티로 떠났다. 심지어 타히티에 갈 때 고갱은 자신이 공식적인 초상화 화가로 파견되었다고 거짓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고갱의 거짓말을 몰랐던 것이 타히티가 프랑스의 식민지이긴 했어도 머나먼 변방이었기 때문에 그런 데서 사기를 쳐봤자 아무도 따질 생각을 하지 않았던 탓이 컸다.
고갱은 때묻지 않은 타히티의 원주민들과 교류하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했지만 상상과는 달랐다.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는 당시 시점에서 유럽인들이 처음 방문한 지 100년이 넘었던데다가, 프랑스가 타히티를 식민화하면서 건너온 유럽인들이 기득권층으로 정착한지 상당한 시일이 흘렀기 때문에. 타히티 원주민들에게 서양인들은 익숙한 존재였다. 타히티의 원주민 소녀들에게 고관대작이 아니고 그렇다고 대단한 연줄도 없던 고갱은 그저 평범한 서양인 아저씨 정도로 여겼고, 그들은 뚱한 표정으로 고갱을 소 닭 보듯 할 뿐이었다. 고갱의 그림 속 파레오를 입은 원주민 여성들의 표정이 그냥 시큰둥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로는 정치싸움에 끼어들어 유명인사가 되는 데 성공하며 알아주는 인사가 되었지만 정작 그 때쯤에는 타히티를 떠났다.
타히티에서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자신만의 그림을 체득한 고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것도 의기양양하게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이 미술계에 쇼킹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람들은 '이게 그래서 뭐 어쨌다고?'라는 반응 정도였다. 게다가 고갱이 그림제목으로 붙인 타히티어들을 유치찬란하다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 대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보면 원초적인 그림과는 다르게 금테두리로 장식을 하였는데 자신의 그림이 대작이라고 확신한 고갱이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고전들처럼 화려한 장식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당대에는 뭔 허세를 부리냐며 조소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다시 타히티로 돌아간 고갱의 삶은 그야말로 궁핍과 뻘짓의 극치였다. 그림을 그려서 프랑스로 보내서 친구들에게 팔아서 돈을 부치라고 했고 친구들은 어렵게 그림을 팔아서 돈을 부쳐줬다. 하지만 고갱의 경제관념 부족으로 그렇게 부쳐진 돈은 며칠 안 돼서 날리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투견 본능이 충만했는지 타히티의 정치싸움에 끼어들어서 타히티에 건너온 중국인을 비난하는 글을 현지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타히티의 중국인은 고갱을 미워한다고 한다.
이후 타히티보다 좀더 문명의 손길이 덜 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로 옮겼지만 이곳에서는 앞서 정착해있던 가톨릭 주교와 다툼을 일으켰고[5] 현지인을 위한답시고 총독을 비난하는 등 좌충우돌 했다. 결국 알코올 의존증과 매독과 유사한 통증으로 1903년 5월 8일 고갱은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그곳에 있으며, 덕분에 고갱의 묘는 유명 화가의 묘역 중에서 찾아가기 가장 힘든 축에 속한다. 여담이지만 이런 오지에 고갱 못지않은 유명인이 또 한 명 묻혀있는데 바로 자크 브렐. 이 사람은 고갱을 좋아해 행적을 좇아다니다보니 이렇게 됐다.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색면, 실제 대상의 색깔과는 다른 강렬한 색채가 고갱 그림의 특징이다. 그는 자연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자신의 그림 속으로 녹여내서 그려냈다. 이 때문에 한때 고갱과 절친했던 카미유 피사로는 고갱을 격하게 비난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문명을 멀리하고 원시와 자연을 예찬했다는 특징도 있다.
부인과 다섯 명의 아이까지 뒀음에도 여자 관계도 꽤나 복잡한 편이었다. 타히티에 간 뒤로 몇 차례 현지 여성과 결혼과 동거를 거듭했고, 개중에는 15세 정도의 미성년자 소녀도 있었다. 첫 번째로 타히티 생활을 하고 돌아온 뒤에 프랑스에서 머물던 시절에도 미성년자들과의 관계가 심각했다. 아나 자바네즈라는 동남아계 미성년자 소녀와 애인으로 동거하기도 했다. 다만 19세기 사람에게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던 만 18세 미만 미성년자와의 연애가 어쩌구 하는건 시대상을 무시한 비난이다. 당시에는 어느 나라고 간에 10대 중반에 결혼했고 10대 초반의 조혼도 드물지 않았던 시대이다.
사실 고갱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좀 에누리를 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 상당한 허세의 소유자로 그가 적은 글이나 작품에 대한 설명, 심지어는 미성년자 소녀들과의 관계조차도 말이다. 흔히 첫 번째로 맞이한 사실혼 상대인 테하마나가 13세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출생증명서 기준으로는 15세였다.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그 시절이면 실제 나이는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이는 고갱 본인이 상당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과시욕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인성 때문에 상당히 까인다. 특히 고흐에게는 악연이나 다름없는지라 고흐 팬들에게는 애증과 비판의 대상이다.
오늘날에는 미성년자 성착취라는 이유로 까이는데, 사실혼 여성들의 실제 연령이 15세 정도였고, 저 당시에는 성인으로 간주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성 편력을 자랑한 것 자체가 요즈음 관점에서는 경악스럽게 보이므로 취소 문화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6]
고갱이 화가로서의 인생 중 상당 기간을 보낸 타히티에는 고갱 박물관이 있다. 근데 Musèe Gaugain이라고 간판 달고 영업하는 주제에 정작 이곳의 콜렉션엔 고갱의 진품 그림은 한 점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갱은 돈이 필요해서 그림을 그리면 말리자마자 배편을 통해 프랑스로 보내 팔았기 때문에 당연히도 타히티에 남은 건 없다. 고갱이 직접 만든 것으로 범위를 확대하면 도자기 하나랑 목각 숟가락 세 개가 전부다. 고갱의 그림 말고 고갱이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타히티는 한국에서 공들여 찾아가기에는 매우 힘이 드는 오지다.
오랫동안 매독 환자로 알려졌지만 2018년에 공개된 논문에 따르면 매독이 아닌 다른 질병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의 치아를 연구한 결과 수은 성분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의문을 제기한 근거다. 매독은 뼈에 흔적을 남기는 질병이며, 당시에는 치료법으로 다량의 수은을 사용했으므로, 실제로 매독에 걸렸다면 어떤 식으로든 치아에 뚜렷한 흔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35세에 돌연 처자식 내팽개치고 화가가 되었다.1883년 금융위기로 주식시장이 위축되었던 게 주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요즘은 고갱이 처자식을 팽개친 게 아니라, 부인한테 쫓겨났다고 보는 쪽이 더 많다. 프랑스 주식시장이 불황으로 접어들면서 고갱의 수입이 줄어들자 견디지 못한 메테소피가 덴마크로 돌아가버렸고,[1] 고갱도 뒤따라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고갱이 제대로 밥벌이를 못하자 메테소피의 가족들이 나가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프랑스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렇다면 흔히 이야기되는 처자식 팽개쳤다는 말은 고갱 입장에서는 꽤나 억울한 소리인 셈이다. 처자식의 생계를 팽개쳤다면 말이 되겠지만 1891년을 마지막으로 메테소피와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2][3]
초기에는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 퐁타방에서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고 파리로 가서 미술계의 최신 트렌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고갱의 목적은 인상파가 초기에 줬던 충격처럼 '이 인간들에게 엄청난 쇼크를 주는 작품을 만들면 나는 미술계의 no.1이 되겠지'라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쇼킹한 작품을 내놓지는 못했다. 오히려 조르주 쇠라가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점묘법으로 미술계에 쇼크를 일으켜서 쇠라에게 이목이 쏠리자 쇠라의 점묘법을 가리켜 저주받은 점이라고 칭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우키요에를 접하고 어린 시절 본 페루의 도자기를 사 모으면서 그런 경험을 살려서 도자기 만드는 작업도 했다. 이를 통해서 고갱은 '유럽에서 있어봤자 모두가 놀랄 그림은 안 나오겠다. 유럽에서 떠나자.'라고 결심하고 매형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에서 근무한다는 것을 알고 파나마로 떠났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 공사는 개쪽이 나고 있었고[4] 매형은 파산해서 고갱을 챙겨줄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파나마를 떠나 마르티니크 섬에서 몇 달 간 머물렀다. 이때 마르티니크 섬에서 고갱은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성과를 거둔다.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후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친구였던 것으로 유명하다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고흐가 고갱을 동경해서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있는 아를로 와주기를 간청했다. 여기에는 고흐의 이상인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결말은 좋지 않게 끝나고 말았다.
고갱은 고흐의 초청으로 아를에 있는 고흐의 집, 노란색 벽 때문에 '노란 집'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그곳에서 9주 동안 고흐와 함께 지내며 작업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성격과 예술관의 차이 때문에 불화가 심해졌고, 결국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는 자해 사건이 일어나자 고갱은 노란 집을 떠났다. 두 사람은 이후에 다시 만나지는 않았지만 오만한 고갱도 고흐의 사건이 충격이었던지 파리로 돌아간 후 귀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의 모습으로 만든 도자기가 남아있다. 근래에 고갱이 고흐의 귀를 잘랐다는 설이 돌기도 했지만 고갱의 성향이나 여러 정황으로 봐서는 그냥 설에 불과한 듯하다.
이후 브르타뉴로 돌아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등의 걸작을 만든 후 1889년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동남아시아와 일본, 태평양의 독특한 문화를 접한 고갱은 다시금 유럽을 탈출하면 영감이 솟구치는 이상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서 타히티로 떠났다. 심지어 타히티에 갈 때 고갱은 자신이 공식적인 초상화 화가로 파견되었다고 거짓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고갱의 거짓말을 몰랐던 것이 타히티가 프랑스의 식민지이긴 했어도 머나먼 변방이었기 때문에 그런 데서 사기를 쳐봤자 아무도 따질 생각을 하지 않았던 탓이 컸다.
고갱은 때묻지 않은 타히티의 원주민들과 교류하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했지만 상상과는 달랐다.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는 당시 시점에서 유럽인들이 처음 방문한 지 100년이 넘었던데다가, 프랑스가 타히티를 식민화하면서 건너온 유럽인들이 기득권층으로 정착한지 상당한 시일이 흘렀기 때문에. 타히티 원주민들에게 서양인들은 익숙한 존재였다. 타히티의 원주민 소녀들에게 고관대작이 아니고 그렇다고 대단한 연줄도 없던 고갱은 그저 평범한 서양인 아저씨 정도로 여겼고, 그들은 뚱한 표정으로 고갱을 소 닭 보듯 할 뿐이었다. 고갱의 그림 속 파레오를 입은 원주민 여성들의 표정이 그냥 시큰둥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로는 정치싸움에 끼어들어 유명인사가 되는 데 성공하며 알아주는 인사가 되었지만 정작 그 때쯤에는 타히티를 떠났다.
타히티에서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자신만의 그림을 체득한 고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것도 의기양양하게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이 미술계에 쇼킹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람들은 '이게 그래서 뭐 어쨌다고?'라는 반응 정도였다. 게다가 고갱이 그림제목으로 붙인 타히티어들을 유치찬란하다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 대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보면 원초적인 그림과는 다르게 금테두리로 장식을 하였는데 자신의 그림이 대작이라고 확신한 고갱이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고전들처럼 화려한 장식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당대에는 뭔 허세를 부리냐며 조소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다시 타히티로 돌아간 고갱의 삶은 그야말로 궁핍과 뻘짓의 극치였다. 그림을 그려서 프랑스로 보내서 친구들에게 팔아서 돈을 부치라고 했고 친구들은 어렵게 그림을 팔아서 돈을 부쳐줬다. 하지만 고갱의 경제관념 부족으로 그렇게 부쳐진 돈은 며칠 안 돼서 날리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투견 본능이 충만했는지 타히티의 정치싸움에 끼어들어서 타히티에 건너온 중국인을 비난하는 글을 현지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타히티의 중국인은 고갱을 미워한다고 한다.
이후 타히티보다 좀더 문명의 손길이 덜 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로 옮겼지만 이곳에서는 앞서 정착해있던 가톨릭 주교와 다툼을 일으켰고[5] 현지인을 위한답시고 총독을 비난하는 등 좌충우돌 했다. 결국 알코올 의존증과 매독과 유사한 통증으로 1903년 5월 8일 고갱은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그곳에 있으며, 덕분에 고갱의 묘는 유명 화가의 묘역 중에서 찾아가기 가장 힘든 축에 속한다. 여담이지만 이런 오지에 고갱 못지않은 유명인이 또 한 명 묻혀있는데 바로 자크 브렐. 이 사람은 고갱을 좋아해 행적을 좇아다니다보니 이렇게 됐다.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색면, 실제 대상의 색깔과는 다른 강렬한 색채가 고갱 그림의 특징이다. 그는 자연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자신의 그림 속으로 녹여내서 그려냈다. 이 때문에 한때 고갱과 절친했던 카미유 피사로는 고갱을 격하게 비난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문명을 멀리하고 원시와 자연을 예찬했다는 특징도 있다.
부인과 다섯 명의 아이까지 뒀음에도 여자 관계도 꽤나 복잡한 편이었다. 타히티에 간 뒤로 몇 차례 현지 여성과 결혼과 동거를 거듭했고, 개중에는 15세 정도의 미성년자 소녀도 있었다. 첫 번째로 타히티 생활을 하고 돌아온 뒤에 프랑스에서 머물던 시절에도 미성년자들과의 관계가 심각했다. 아나 자바네즈라는 동남아계 미성년자 소녀와 애인으로 동거하기도 했다. 다만 19세기 사람에게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던 만 18세 미만 미성년자와의 연애가 어쩌구 하는건 시대상을 무시한 비난이다. 당시에는 어느 나라고 간에 10대 중반에 결혼했고 10대 초반의 조혼도 드물지 않았던 시대이다.
사실 고갱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좀 에누리를 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 상당한 허세의 소유자로 그가 적은 글이나 작품에 대한 설명, 심지어는 미성년자 소녀들과의 관계조차도 말이다. 흔히 첫 번째로 맞이한 사실혼 상대인 테하마나가 13세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출생증명서 기준으로는 15세였다.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그 시절이면 실제 나이는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이는 고갱 본인이 상당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과시욕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인성 때문에 상당히 까인다. 특히 고흐에게는 악연이나 다름없는지라 고흐 팬들에게는 애증과 비판의 대상이다.
오늘날에는 미성년자 성착취라는 이유로 까이는데, 사실혼 여성들의 실제 연령이 15세 정도였고, 저 당시에는 성인으로 간주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성 편력을 자랑한 것 자체가 요즈음 관점에서는 경악스럽게 보이므로 취소 문화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6]
고갱이 화가로서의 인생 중 상당 기간을 보낸 타히티에는 고갱 박물관이 있다. 근데 Musèe Gaugain이라고 간판 달고 영업하는 주제에 정작 이곳의 콜렉션엔 고갱의 진품 그림은 한 점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갱은 돈이 필요해서 그림을 그리면 말리자마자 배편을 통해 프랑스로 보내 팔았기 때문에 당연히도 타히티에 남은 건 없다. 고갱이 직접 만든 것으로 범위를 확대하면 도자기 하나랑 목각 숟가락 세 개가 전부다. 고갱의 그림 말고 고갱이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타히티는 한국에서 공들여 찾아가기에는 매우 힘이 드는 오지다.
오랫동안 매독 환자로 알려졌지만 2018년에 공개된 논문에 따르면 매독이 아닌 다른 질병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의 치아를 연구한 결과 수은 성분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의문을 제기한 근거다. 매독은 뼈에 흔적을 남기는 질병이며, 당시에는 치료법으로 다량의 수은을 사용했으므로, 실제로 매독에 걸렸다면 어떤 식으로든 치아에 뚜렷한 흔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빨래하는 아를의 여인들 (1888)
- 자화상 (1889)
- 타히티의 여인들 (1891)
- 언제 결혼하세요? (1892)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8)- 두 여인 (1902)
- 2017년 개봉한 프랑스 영화 <고갱(Gauguin)>에서는 배우 뱅상 카셀이 연기했다.
- 2018년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 에서는 오스카 아이작이 연기했다. 고흐와의 갈등 끝에 결별을 선언하고 집을 나서는데, 이에 절망하는 고흐의 얼굴이 밈이 되었다.
- 고갱의 외할머니는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주의자인 플로라 트리스탕(flora tristan, 1803~1844)이다. 그녀는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노동조합(L'Union Ouvrière)에서 직업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속할 보편적 노동조합을 제안했고, 그의 글이 모든 프랑스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프랑스 전역을 여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여행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트리스탕은 병에 걸려 사망했다.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1,5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그녀의 무덤을 봉헌하면서 그녀의 죽음을 기렸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2003년도 소설 '천국은 다른 곳에'가 플로라 트리스탕과 폴 고갱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 외할머니가 페미니스트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와서는 미성년 소녀들과의 동거로 인해 타히티 여성들을 성착취한 식민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2025년 더 가디언에 소개된 고갱 전기 작가 수 프리도(Sue Prideaux)[7]의 글에 따르면, 타히티 원주민들에게는 오히려 영웅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된 주교와의 갈등 때문인데, 이 주교는 원주민들에게 프랑스 기숙학교 입학을 강제하여 모국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만을 사용하게 하려고 했다. 이때 고갱은 프랑스의 법률에 학교에서 2마일 이내에 거주하는 아이들만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원주민들에게 학교를 피해서 멀리 이사를 떠나라고 조언했고, 원주민들은 고갱 덕분에 식민지 교육을 피할 수 있었다.[8] 저자인 수 프리도는 미투 운동에 공감하면서도 고갱의 작품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위선이 아닌가 하는 고민에서 출발해 고갱의 생애를 추적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고갱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 본인도, 고갱의 사생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숨기지 않았으나, 당시에는 유럽 기준으로도 고갱과 동거했던 소녀들이 성인으로 간주되었고[9], 고갱의 경우도 그 시대 기준을 따랐음을 참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10]
더구나 타히티 원주민 사회는 친부모와 양부모가 모두 있는 문화라서 결혼을 하려면 신부의 친부모뿐만 아니라 양부모의 허락도 받아야 했는데, 고갱도 이런 절차를 따랐다. 이 점을 근거로 수 프리도는 고갱이 현지 문화를 나름 존중했다고 본다. 무려 네 명의 허락을 받는 복잡한 절차를 거쳤으니 오늘날 생각하는 그루밍과는 거리가 있다는 얘기다.[11] - 수 프리도의 전기가 나오기 훨씬 전에도 고갱의 악명이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긴 했다. 2011년 인디펜던트 기사에서 기자는 고갱의 증손녀인 메테 고갱을 인터뷰하며, 선교사들이 원주민 소녀들한테 고갱의 집에 가지 말라고 하니, 고갱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원주민 소녀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다라는 소문을 언급했는데, 메테 고갱은 기자 앞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메테 고갱은 자신의 증조할아버지는 절대로 묻지마 관광을 하지 않았고 소아성애자도 아니었다면서, 당시 타히티에선 사춘기만 지나면 혼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적어도 현지에서 고갱이 여성을 강간했다는 증언은 전무하다라고 강변했다.[12] 일단은 현지에서 사실혼의 형식을 갖췄고, 저 시대 관습에 비춰 보면 고갱이 유난히 문제가 있었다 보긴 어렵다는 게 증손녀의 주장인 것이다.[13]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앞서 언급된 프랑스 법률은 식민지에 세워진 학교의 정부 지원을 줄이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고갱이 이 법을 알려주자, 학교를 중간에 그만둔 여학생이 있었고, 그중 한명이 고갱과 사실혼 관계로 지냈다.링크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타히티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저항한 고갱의 행보에 반감을 품은 가톨릭 선교사들이 의도적으로 악의적인 소문을 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선교사들의 주장은 고갱이 원주민 소녀를 착취하기 위해서 학교를 못 다니게 했다는 것인데, 저 시대 특성상 학교에는 남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이니 고갱이 여학생만 노리고 학교에 가지 말라고 선동했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여담으로 가톨릭 교회법은 1917년까지만 해도 여성은 12세부터 남성은 14세부터 결혼할 수 있다고 봤으니 사실상 청소년은 작은 어른으로 간주되던 시절이다.링크[14] 원주민 사회에선 성인 역할을 하는 시기가 더더욱 빨랐을 것이니, 원주민 입장에선 선교사들의 주장에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고갱을 자신들의 은인으로 여겼을 법하단 얘기다.[15] - 2020년대에 들어서 포털 조회수를 노리고 미술가 사생활에 초점을 맞춘 낚시성 제목이 달린 미술 기사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고갱이 바로 이러한 흐름을 타고 인기 소재로 급부상했다(...) 사실 자세히 보면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나름대로 알찬 내용이긴 하지만, 제목에 낚여 기사의 취지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으며[16], 위에 언급된 최신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아 본의 아니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기사도 있다. 대표적으로, 매독을 앓고 있으면서 13살 소녀와 관계했다는 식의 내용인데, 고갱이 앓은 병은 매독이 아닌 악성 피부병이었으며, 고갱의 아내와 자식, 연인들 중에 매독을 앓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심지어 장수한 인물마저 있다. 다만 15세 이상을 13세로 줄여서 말한 것은 고갱이므로, 이로 인한 악명은 자업자득인 면이 있다.[17]
[1] 당시 메테소피는 고갱의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그 전부터 애들 키우면서 가정교사 일로 집안을 벌어먹이고 있었는데 이 판국에 고갱이 돈 안 되는 전업화가의 길을 걷자 메테소피는 말렸지만 고갱이 듣지 않았다.[2] 고갱의 증손녀인 메테 고갱의 주장에 따르면, 고갱은 별거 후에도 아내와 12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 주장에 따르면 적어도 고갱이 일방적으로 가족을 버린 것은 아니란 얘기다. 링크[3] 또한 고갱은 타히티로 떠난 후에도 본처인 메테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고갱이 그린 원주민 소녀 그림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 남편 사망 후 메테는 남편 작품의 경매 수익금을 받았다.[4] 산맥을 깎아야 해서 공사 난이도부터 상상 이상이었던데다 모기 때문에 말라리아를 비롯한 전염병까지 창궐해서 프랑스의 공사 기간 동안 2만 명이 넘게 죽어 나갔다. 나중에 미군 공병대가 프랑스로부터 일을 인계받아 고투 끝에 운하를 개통하는데 성공, 본격 콜롬비아 경제와 내정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운하를 관할하는 파나마 지역이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는 데 도움을 준 것도 미국.[5] 다만, 현지인들에게 가톨릭 강요하는 게 프랑스에서 일상적인 식민지 처사였기에 반발한 것도 컸다. 그리고 문제의 주교는 단순히 종교를 강요한 정도가 아니라, 타히티 언어를 말살하려 한 인물이기에 더욱 반발이 컸다.[6] 조혼이 가능했던 시절이라 미성년자와 사실혼 관계를 맺은 것 자체를 오늘날 관점에서 비난하긴 어렵지만, 일단 중혼을 한 것은 당시 기준으로도 비난받을 일이었다.[7]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된 에드바르트 뭉크 전기로 상을 받은 전기 작가이다.[8] 타히티 문서에도 나오듯, 프랑스는 1844년에 타히티를 식민지로 삼고 타히티어를 금지했다. 여담으로 1881년에 여기에 저항하는 원주민 축제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링크[9] 일단 조혼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20대 이상 여성은 자식이 여럿 있는 유부녀일 가능성이 높으니 애초에 타히티 관습으로 혼인 성사 가능성이 희박했을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그냥 동거가 아니라 타히티 관습을 따라 혼인의 형식을 취했다. 단지 법적인 효력만 없었을 뿐이다.[10] 수 프리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타히티는 여성의 재혼이 자유로운 문화였다. 고갱이 타히티에서 처음으로 사실혼 관계를 맺은 테하마나는 고갱과 헤어진 후 이웃 부족 소년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애초에 기독교적인 성문화가 아니었으므로, 원주민 사회 기준으로는 테하마나의 과거가 전혀 흠결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11] 다만, 고갱은 멀쩡히 살아 있는 본처 메테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으므로, 그 점은 사기 결혼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블로그 글을 보면, 고갱이 미성년 소녀와의 관계로 그 시절 법률로도 처벌받을 수 있다고 나오는데, 사실은 중혼이 처벌받는 것이지, 현지 소녀와의 관계 자체를 처벌받는 게 아니었다. 만약 그러한 법이 있었다면, 타히티에 파견된 프랑스 공무원에게 찍힌 상태였으니 당연히 처벌받았을 것인데, 그 문제가 아니라 원주민 정책에 항의한 것으로 옥살이를 했다.[12] 고갱처럼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식민지 공무원이나 성직자와 마찰을 빚었던 사람이면, 강간 루머가 돌 법도 한데, 그러한 루머조차 확인되지 않았다.[13] 여담으로 타히티에 가기 전 고갱의 행적을 보면 줄리엣 후아이스(Juliette Huais)라는 20대 중반 그림 모델과의 관계도 확인되니, 미성년자만을 선호하는 취향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저 시대엔 마음만 먹으면 유럽에서도 십대 소녀를 꾀어 즐기는 것이 가능했던 시기이다.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 보면, 타히티처럼 조혼이 일반적인 지역에선 싱글인 성인 여성 찾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증손녀의 주장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근거로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14] 다만 빅토리아 여왕 시절 영국은 특이하게도 20대 초반 결혼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고갱은 가톨릭 국가 출신이므로 여성의 어린 나이가 문제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법적인 배우자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다른 여성과 결혼한 것이다.[15] 우리나라로 치면, 1940년대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기 위해 자식을 학교에 안 보낸 것인데, 이게 '여자라서 학교에 안 보냈다'로 와전된 것과 비슷하다.[16] 사실 고갱 기사만의 문제는 아니고, 옛 시절 사람들의 사생활을 오늘날 잣대로 판단한 제목이다 보니, 억울한 오해를 받는 인물들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 대표적으로 에드가 엘런 포가 있다. 다만, 내용 전체를 정독하면 기자만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 언론사에서 조회수를 노리고 이러한 제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떤 연재 기사를 보면, 기사 말미에 낚시성 제목에 대한 양해를 부탁하는 내용도 있다.[17] 당시 조혼이 가능했으므로 문제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뻥을 쳤을 것이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문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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