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터 그로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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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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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발터 아돌프 게오르크 그로피우스 Walter Adolph Georg Gropius |
출생 | |
사망 | |
국적 | |
직업 | |
경력 | |
수상 | |
배우자 | 알마 말러 (1915~1920년) 이세 프랭크 |
자녀 | 마논 그로피우스 베아테 그로피우스 |
독일의 건축가. 근대 건축의 4대거장 르 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미스 반 데어 로에와 같이 한 명으로 여겨진다.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이자 교육자였던 그의 휘하에서 많은 학생들이 모더니즘 건축학을 배웠으나, 모더니즘이 나치의 건축 지향점과 충돌하자 바우하우스 관련 교육자들은 탄압을 받기 시작했고, 결국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을 간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이후에도 독일 역사에 하나의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베를린의 그로피우스슈타트가 그것이다. 전후 들어선 서독과 서베를린 정부는 전후 복구와 주택수요 충족을 위해 노이쾰른구 남쪽에 큰 신도시를 지을 것을 계획했는데, 이때 도시 설계를 위해 초청된 것이 바로 발터 그로피우스였다. 그는 나치로부터 해방된 조국이 자신을 다시 필요로 한다는 소식에 기쁘게 베를린으로 날아가 주요 설계를 담당했다. 당시에도 아파트 위주의 개발계획이긴 했으나, 당시에는 5층 정도의 저층 아파트 위주의 건물들에 녹지를 크게 조성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독 정부가 1961년 기습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세우면서 육지의 섬이 되어버린 서베를린은 모든 주택 수요를 자체적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고,[1] 이에 서베를린 상원에서는 기존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주택 공급량을 신도시에 요구하게 된다. 이에 따라 그로피우스슈타트 아파트들의 키는 두배나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몇몇 건물은 그로피우스의 허가 없이 다른 건축가에게 일감이 돌아가기도 했다. 당연히 이런 상황은 설계자인 그로피우스에게 크게 불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도 불가피한 상황임은 알고 있었고, 프로젝트 자체를 때려치우고 나가는 대신 수많은 변경 속에서도 최대한 많은 건물과 구역 설계에 자신의 원안과 사상을 다수 반영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 예를 들어 당시 베를린에서 가장 높은 주거용 건물이었던 호흐하우스 이데알(Hochhaus Ideal)을 설계한 것도 그였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1969년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서베를린 정부에서 그의 공로를 높이 사서 이 신도시의 이름을 그로피우스슈타트라고 붙이는 것은 그가 사망한 지 3년 뒤인 1972년의 일이었다. 명명과 동시에 그의 유작이었던 그로피우스하우스의 초석이 놓였는데, 그 대신 그의 미망인이 이 행사에 참석했다. #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이자 교육자였던 그의 휘하에서 많은 학생들이 모더니즘 건축학을 배웠으나, 모더니즘이 나치의 건축 지향점과 충돌하자 바우하우스 관련 교육자들은 탄압을 받기 시작했고, 결국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을 간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이후에도 독일 역사에 하나의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베를린의 그로피우스슈타트가 그것이다. 전후 들어선 서독과 서베를린 정부는 전후 복구와 주택수요 충족을 위해 노이쾰른구 남쪽에 큰 신도시를 지을 것을 계획했는데, 이때 도시 설계를 위해 초청된 것이 바로 발터 그로피우스였다. 그는 나치로부터 해방된 조국이 자신을 다시 필요로 한다는 소식에 기쁘게 베를린으로 날아가 주요 설계를 담당했다. 당시에도 아파트 위주의 개발계획이긴 했으나, 당시에는 5층 정도의 저층 아파트 위주의 건물들에 녹지를 크게 조성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독 정부가 1961년 기습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세우면서 육지의 섬이 되어버린 서베를린은 모든 주택 수요를 자체적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고,[1] 이에 서베를린 상원에서는 기존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주택 공급량을 신도시에 요구하게 된다. 이에 따라 그로피우스슈타트 아파트들의 키는 두배나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몇몇 건물은 그로피우스의 허가 없이 다른 건축가에게 일감이 돌아가기도 했다. 당연히 이런 상황은 설계자인 그로피우스에게 크게 불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도 불가피한 상황임은 알고 있었고, 프로젝트 자체를 때려치우고 나가는 대신 수많은 변경 속에서도 최대한 많은 건물과 구역 설계에 자신의 원안과 사상을 다수 반영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 예를 들어 당시 베를린에서 가장 높은 주거용 건물이었던 호흐하우스 이데알(Hochhaus Ideal)을 설계한 것도 그였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1969년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서베를린 정부에서 그의 공로를 높이 사서 이 신도시의 이름을 그로피우스슈타트라고 붙이는 것은 그가 사망한 지 3년 뒤인 1972년의 일이었다. 명명과 동시에 그의 유작이었던 그로피우스하우스의 초석이 놓였는데, 그 대신 그의 미망인이 이 행사에 참석했다. #
[1] 1950년대에는 베를린 S반 전철이 동서독을 관통했기 때문에 물가가 싼 동베를린에 살면서 서베를린 직장에서 일하는 편법을 쓰는 직장인들이 많았고, 반대로 가정주부나 노인들은 용돈이라도 벌려고 동베를린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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