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토르 오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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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오르타는 1861년 겐트에서 15남매 가운데 열네 번째로 태어났다.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미술학교를 이수하고 신고전주의를 추구한 건축가 바라의 하수인으로 있었다. 1886년 자립하여 서양 미술운동의 근원인 아르누보를 창시하였으며, 이것의 영향이 유럽에 미치면서 서양식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왔다. 1888년에는 브뤼셀의 프리메이슨 단체인 '자선의 벗(Les Amis philanthropes)'에 가입하였다. 1889년에는 스승의 추천으로 제프 랑보의 대형 조각 작품 《인간의 열정》을 위한 전시관인 인간의 열정관 설계를 맡으며 건축가로 본격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890년에는 둘째 딸 시몬이 태어났으며, 오르타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고 1906년 이혼 후 양육권도 직접 맡았으나 시몬은 1939년에 세상을 떠났다. 1897년 브뤼셀의 라 리브르 에스테티크 전시회를 통해 가구와 장식 디자이너로서도 높은 명성을 얻었으며, 1893년부터 1898년까지 쏟아진 의뢰 덕분에 생질의 아메리카 거리 부지에 자신의 집과 작업실을 건축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에는 금속 구조를 과시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석재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오베크 저택, 로제 저택, 뒤부아 저택, 막스 알레 저택 등에서 한층 성숙한 건축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 공로로 1913년 브뤼셀예술협회장을 역임하였고 벨기에 왕실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35년 빅토르 오르타는 브뤼셀 식물원의 온실 설계자에 관한 연구서를 집필했으며, 1938년에는 식물원 보존 단체에서 활동하며 문화유산 보호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39년부터 회고록 집필을 시작했지만 두 번째 결혼의 실패와 같은 해 딸 시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집필을 중단했다가 1941년에 다시 집필을 재개했으며, 회고록은 사후인 1986년에 출판되었다. 1945년 마지막 이사를 하면서 약 800kg에 달하는 설계도와 스케치, 기록물을 폐지로 판매해 자신의 방대한 건축 기록 대부분이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1947년 브뤼셀에서 자신이 설계한 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20세기 초에는 금속 구조를 과시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석재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오베크 저택, 로제 저택, 뒤부아 저택, 막스 알레 저택 등에서 한층 성숙한 건축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 공로로 1913년 브뤼셀예술협회장을 역임하였고 벨기에 왕실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35년 빅토르 오르타는 브뤼셀 식물원의 온실 설계자에 관한 연구서를 집필했으며, 1938년에는 식물원 보존 단체에서 활동하며 문화유산 보호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39년부터 회고록 집필을 시작했지만 두 번째 결혼의 실패와 같은 해 딸 시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집필을 중단했다가 1941년에 다시 집필을 재개했으며, 회고록은 사후인 1986년에 출판되었다. 1945년 마지막 이사를 하면서 약 800kg에 달하는 설계도와 스케치, 기록물을 폐지로 판매해 자신의 방대한 건축 기록 대부분이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1947년 브뤼셀에서 자신이 설계한 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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