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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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어: Rinascimento
프랑스어: Renaissance
영어: Renaissance
스페인어: Renacimiento
중국어: 文艺复兴
에스페란토: Renesanco

1.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계의 대변혁
1.1.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이유1.2. 르네상스의 시초1.3. 건축1.4. 조각1.5. 회화
1.5.1. 초기1.5.2. 전성기1.5.3. 외전 북유럽
1.6. 음악1.7.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락
2.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3. 대한민국의 순정만화 잡지4. 디시인사이드에서 시작된 합성계의 대변혁5. 삼성전자가 생산했던 오디오 브랜드6.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국가7. 리듬 게임의 음악 장르

1.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계의 대변혁[편집]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에서 일어난 문화계의 큰 변화. 각 세기별에 따라 이탈리아어트레첸토(trecento, 300), 콰트로첸토(quattrocento, 400), 친퀘첸토(cinquecento, 500)라 부른다.

문화 전성기의 상징처럼 쓰인다. 기본적인 성격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로의 회귀를 추구한다. 흔히 문예 부흥으로 번역된다. 용어 르네상스의 의미는 재생, 부활이며 그 어원은 조르조 바사리의 책 "예술가 열전"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재림이라 하여 라틴어로 리나시타(rinascita, 부활)이라한 것이다.

이것을 프랑스의 역사가였던 쥘 미슐레가 '르네상스Renaissance"재탄생"(re'다시' + naissance'탄생')으로 번역하고, 스위스의 역사가였던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확실하게 정의 내린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인문주의자들이 신이 모든 것의 중심인 기독교(가톨릭)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였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려 한 운동, 즉 인문주의(humanism)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르네상스식 인문주의가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을 의미한다는 해석에는 오늘날 많은 반론이 쌓여있다. 자세한건 인문주의 항목 참조.

일반적으로는 중세적인 문화가 쇠퇴하고 근세적인 문화가 성립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교황권이 약화되고 페스트 등과 도시의 발달 등으로 봉건 제도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문화 변화로, 그렇게 중세적 문화를 부정하고 근세적 문화를 성립했다고 생각된다. 다만 오늘날에는 르네상스와 중세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애초에 고대, 중세, 근대라는 3시대 구분법은 14세기에도 등장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는 중세를 암흑시대라 부르며 잊힌 고전 문명이 자신들의 시대에 부활했다고 선언했으나,[1] 아이러니하게도 14세기는 오늘날에는 완전히 중세로 분류되는 시기다. 중세의 끝이 언제인지는 학자마다 이견이 있으나, 대체로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 혹은 루터교회의 출현으로 잡으며 페트라르카의 시대가 중세라는 것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

르네상스 시대에 대해서 자본주의의 발달 미비를 이유로 중세 전성기로 보는 소수설도 있다. 이 시대구분법은 칼 마르크스의 경제 체제에 따른 시대구분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현대에는 전성기(특히 처음의 것)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1.1.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이유[편집]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이탈리아 반도의 국가들은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문헌들과 지식이 보관되고 있었던 중세 로마인 비잔티움 제국과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탈리아 반도였을까?

첫째, 이탈리아 반도는 오랫동안 비잔티움 제국, 즉 동로마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파괴되었던 고대 로마의 문헌과 기술력을 거의 복원했기 때문이다.

둘째, 중세 유럽을 지배하고 중세 사람들의 삶을 결정짓던 대표적인 체제인 봉건제가 유독 이탈리아에서는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반도가 나폴리와 교황령을 제외한 수많은 도시국가와 소국들로 분열되어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지 못했던 것이다.[2]

셋째, 12세기부터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무슬림 해적을 소탕하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에 지중해를 장악하여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중계무역 특성상 여러나라의 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높기 때문에 많은 문물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도시의 상인들은 부와 힘을 얻고 교양과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상인들은 특유의 이해타산적 계산으로 인해 기독교등 종교의 꼬드김, 상업에 방해가 되는 윤리적 규범에도 넘어가지 않았고 자신들과 비슷한 속성[3]의 직종들인 예술가, 철학자, 인문학자, 수학자들에게 큰 후원을 해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많은 예술가들이 여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후에 피렌체에서 발달했던 초기 르네상스는 16세기를 기점으로 베네치아에도 전파되기 시작한다. 이 두 도시는 교황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에 새로운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1.2. 르네상스의 시초[편집]

스콜라 철학자들이 그리스와 아랍어로 된 자연과학, 철학, 수학에 집중한 중세 전성기와 달리,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라틴어와 그리스어 문학, 역사, 연설문 수집에 집중했다. "인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페트라르카 등 초기 휴머니스트들이 키케로, 루크레티우스, 리비우스, 세네카의 저서를 찾아 유럽의 도서관을 수색한 것이 14세기였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문학, 역사, 연설문 등은 라틴 세계에서도,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도 무시되고 있었고, 오직 비잔티움 학자들만이 보존하고 있었다. 1396년 초청을 받아들여 피렌체에 이주한 비잔티움의 외교관 겸 학자 마누엘 크리솔로라스(Manuel Chrysoloras)를 시작으로 비잔티움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건너와 수많은 공헌을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특히 피렌체가 다른 도시들을 제치고 르네상스의 발원지가 된 원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렌체의 패권을 차지하고 예술을 후원한 메디치 가문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어떤 역사가들은 1348년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을 맞이하여 피렌체 시민들이 경험한 세계관의 동요를 들기도 한다.

1.3. 건축[편집]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은 15세기 초 토스카나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피렌체의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꼽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르네상스 시기 이전의 이탈리아 건축은 기술적으로 고딕에 비하면 뒤떨어져 있었다. 북쪽의 '야만인'들은 자신들이 멸망시킨 로마의 건축 유산을 잘 이어받아 로마네스크 양식이라는 모방을 넘어 고딕이라는 대담하고도 놀라운 구조의 건축양식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고딕이란 명칭 자체가 이탈리아인들이 비하의 의미로 붙인 명칭이다. 고딕건축으로 지어진 높은 성당과 거기에 들어간 기술 - 플라잉 버트레스, 리브볼트 등은 이탈리아인들이 가지지 못했던 신기술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자존심이나 미학적인 취향의 다름으로 인해 고딕의 새로운 구조를 높이에만 집착해 추한 덧댐으로 마무리된 불완전한 구조로 규정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건축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을 모색하게 된다. "높이"에 집착하던 고딕과 다르게 건축물의 높이는 좀 낮더라도 건축의 "질서"에 집중한 것. 기둥과 창의 엄격한 배치와 구성(오더), 기하학적인 형태와 비례를 가진 장식을 강조하였다. 물론 기술적 성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11세기 즈음부터 토스카나 지방에서 주로 보이던, 십자형 로마네스크 교회의 중심에 팔각형 혹은 둥근 작은 이 올라가던 양식[4]도 계속 계승되어 르네상스 시대에는 여러 성당들이 인상적인 거대한 을 구현하며 기술적인 성취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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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두오모가 대표적인 예이다.[5]브루넬레스키의 작품. [6] 다만 이 두오모를 비롯한 이 시기의 많은 건물들은 돔을 여전히 완성된 르네상스 양식과는 좀 다른 과도기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며, 오늘날에 와서는 이탈리안 고딕 양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후 후대 건축가들의 실험과 도전이 계속 된 결과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주장한 그리스-로마 건축으로의 회귀를 내세운 산탄드레아(Sant'Andrea) 교회(1472~1494)에 이르러 르네상스의 표준적인 양식이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브루넬레스키의 산토 스피리토 성당(1441-1481) 등 기둥과 보를 이용한 경쾌한 모습과는 달리 엄청나게 두꺼운 벽 구조와 둥근 드럼 천장 등으로 무거운 느낌을 자아내고 있어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산탄드레아 성당은 이후 궁극적인 성당 건축이라 할 수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원형이 되었으며 수많은 건축물들의 모범이 되었다. 더해서 알베르티는 원근법에 대해 체계적인 안내를 했고, 건축과 조각에서의 가장 이상적인 수학적 비례를 제시하고 정립하였다.

알베르티 이후의 완성된 르네상스 양식과 고딕 성당과 비교한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뾰족하고 높은 첨탑과 외부로 나와있는 기둥들, 넓은 스테인드 글라스와 높은 천장을 가진 성당은 고딕양식이다. 반면 네모와 같은 도형과 그리스, 로마식 기둥과 창으로 장식된 벽면, 그리고 건물 가운데의 거대한 돔과 그 아래의 큰 공간을 가진 성당은 르네상스 양식이다. 다만 이후 시대로 가면서 점점 위의 특징들이 섞이게 된다는 점은 유의하자. 이러한 특징은 고대 로마의 건축을 제대로 연구해 응용한 것으로 레온 알베르티에 의해 로마 고전주의가 부활한 것이 계기이며 그동안 서유럽의 건축 구조에서 등한시한 돔이 다시 건축구조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다가 16세기에 고전적인 균형미와 조화에 집착한 르네상스 양식에 대한 반발심으로 매너리즘 건축이 등장하게 되었다. 매너리즘(이탈리아어 : 마니에리스모 Manierismo)은 일반명사로는‘습관적 반복, 상투적인 모방, 진부한 기교’ 등을 일컫는 말로 새로운 창조력이 상실되었다는 부정적 의미가 들어있지만, 고유명사가 되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매너리즘의 특징은 기존의 양식에 대한 심한 탈 법칙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당시 종교개혁이 발생한 시대 상황의 산물인 측면이 많았지만 르네상스 양식을 대체하지는 못했고, 알프스 이북 너머로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알프스 이북 너머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곳은 프랑스로 이탈리아와도 지리, 인종, 언어, 문화 등 여러 면에서 가까웠을 뿐 아니라 이미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전 국토가 속주에 편입되어 로마 건축 양식을 경험한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적었다. 또한 롬바르디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었고 종교개혁의 여파가 적었기 때문에 교황청이 주도하던 르네상스 표준 고전주의를 적극 수입할 수 있었으며, 르네상스 애호가였던 프랑수아 1세 때 시작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했고, 그중에 1541년 이주한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는 프랑수아 1세의 수석 화가이자 건축가로서 부분적으로 프랑스 전통 양식을 혼합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성관을 지으면서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피에르 레스코와 필리베르 들로름에 거쳐 세르소 가문에 이르려서 점차 이탈리아 르네상스 표준 양식과도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1세기가 지난 16세기의 영국에서도 뒤늦게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와 먼 것과 종교개혁의 여파 때문에 1534년에 교황청과 단절되는 등 가톨릭이 지배하고 있던 로마와의 교류가 어려웠다.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 때부터 권력층의 성채나 생활환경 등에서 이탈리아 풍이 유행하는 형식으로 르네상스 건축이 단편적으로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양식 운동으로 나타난 것은 17세기가 지나서였다. 프랑스와 달리 자연스러운 예술운동이 아니라 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스튜어트 왕조개신교와 연합하면서 자신들의 정치 이상을 상징할 새로운 건축양식이 필요해졌다. 중세 가톨릭을 이끌던 고딕을 밀어내고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선택되었고, 이니고 존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대체적으로 이니고 존스 한 개인에 의해 선도되었고, 따라서 독창성도 부족했다.

독일의 경우 영국보다도 더욱 침체된 상태였다. 개별 건물에 부분적으로 르네상스 어휘를 사용하는 정도였고, 정식 양식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는 미진한 상태였다. 이는 16세기 종교개혁부터 불거진 신·구교 갈등이 폭발한 30년 전쟁과 같은 외부 요인 때문이었다. 15세기 독일과 네덜란드의 미술을 '북유럽 르네상스'로 지칭할지, '후기 고딕'으로 지칭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 북유럽 르네상스의 의미를 긍정하는 편이다.[7]이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서야 등장한 '고딕 매너리즘'은, 이탈리아 매너리즘과 달리 분산적 장식을 이용한 흥겨운 율동이 주요 특징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그 당시 문명 발전의 최전으로 본 부르크하르트식의 역사관에 기초한 윗 문단은 다소 비판적으로 볼 여지가 많다. 같은 시대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집단을 단순비교하는 것이 맞는 문제인지 생각해보자. 우선 본문에서 언급되는 독일에서 유행한 '매너리즘'은 '국제 고딕양식'이라고 부르는 '고딕 매너리즘'이지, 르네상스 이후의 '매너리즘'와는 다르다.

독일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다른 양식이 유지되었던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핵심이었던 고전주의적인 양식이 독일인들의 취향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전주의적인 양식 외에는 독일 역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같은 관심사들을 공유하고 창작에 활용했다.[8] 실제로, 독일인들의 취향과 맞아떨어지는 바로크는 르네상스와 달리 매우 쉽게 유입되었다.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티에폴로 등이 독일 내에서도 활동하고, 많은 독일인 건축가들과 화가, 조각가들이 바로크 시대에 활동하게 된다. 이는 비슷한 사정이었던 네덜란드도 마찬가지.

1.4. 조각[편집]


초기 르네상스에는 기베르티 로렌초에 의해 새로운 기법이 탄생했으며, 도나텔로는 조각이라는 장르를 건축으로부터 독립시켰다. 르네상스 특유의 개성적인 표현과 사실주의, 휴머니즘에 입각한 작품인 가타멜라타 장군의 기마상도 그의 작품, 더불어 실물크기의 누드상인 다윗상도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상과는 다르다. 도나텔로는 청동으로 만들었고 모양도 다르다.

천재적인 건축가,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이 많은 작품을 만들었으며, 완벽함의 상징이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에 비견될만한 걸작들을 쏟아낸다. 당시 발굴된 고대 조각의 최고 걸작인 라오콘 군상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후 파묻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

1.5. 회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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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초기[편집]

초기에 활약한 화가들로는 조토 디 본도네, 마사초, 프라 안젤리코, 보티첼리 가 있다.

조토는 사실적인 표정의 묘사와, 투시, 명암 등으로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격 인물이었고 마사초는 최초로 선 원근법을 사용한 그림을 그렸다. 안젤리코는 수태고지를 그렸고 보티첼리는 앞서 세 화가와는 달리 그리스의 고전 신화의 주제를 그림으로 그렸다. 앞서 세 사람이 르네상스 기술의 선구자들이라고 한다면 보티첼리는 정신적인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1.5.2. 전성기[편집]

1.5.3. 외전 북유럽[편집]

진작에 봉건체제는 붕괴했는데 아직 정치체제는 절대군주정으로 이행하지는 않았던 북유럽은 초기 기독교와 성경의 원전에 관심을 둔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뮈스나 모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볼 수 있다.

결국 이쪽은 아직도 종교화가 수두룩한데 비잔틴 미술과는 다르게 애들이 좀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었다는 소리다.

대표적인 화가들로는 알브레히트 뒤러, 잔 반 에이크, 히에로니무스 보스, 피터르 브뤼헐이 있다.

뒤러는 알다시피 동판화, 종교화를 주로 제작해 판화의 대가로 불리었다. 하지만 회화실력도 웬만한 화가 뺨 친다. 보스는 약간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르네상스에선 보기 힘든 독창성을 지니고 있는데 의의를 둔다.브뤼헐은 민간의 미신, 관습을 주로 그렸다. 덕분에 그의 그림은 시대상이 아주 잘 반영되어있다. 반 에이크는 아주 세밀한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서는 두 부부의 뒷편에 있는 거울에 맺힌 상까지 그려내었다.

1.6. 음악[편집]

1.7.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락[편집]

분명 유럽 대륙의 정세가 혼란하고 지중해 무역이 성행하던 15세기까지는 나름대로의 군사력과 재력, 정보망을 틀어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여러모로 유리한 입지에 있었다. 도시국가의 군주들이 무식한 힘싸움보다는 문화와 부의 과시를 통해 자존심 경쟁을 벌인 것도 한몫했다.

15세기 말까지는 백년전쟁 등으로 대륙의 사정이 혼잡해서 외침의 걱정은 없었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백년전쟁을 마무리한 후 이탈리아에게 군침을 흘리기 시작하고, 여기에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을 비롯 거의 전 유럽을 한 손에 틀어쥔 합스부르크의 강대한 황제 카를 5세의 출현으로 이탈리아는 강대한 영토 국가들의 영향하에 놓이기 시작한다. 이제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영토 국가는 이탈리아 개별 도시 국가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군사력이 강해진 것이다.

16세기가 시작되면서 이탈리아는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서 땅따먹기의 현장으로 변하고 특히 1525년 이탈리아를 둘러싼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카를 5세에게 개관광당함으로써 이탈리아는 사실상 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놓이고 만다. 이에 당황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어떻게든 이탈리아 내에서의 자주권을 확보하고자 코냑 동맹을 결성해 발버둥쳤으나, 이것을 명분으로 카를 5세는 교황의 비열함을 비난하면서 가톨릭 군대로 하여금 교황령을 털어버리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코 디 로마. 이 전쟁에서 시원하게 털린 교황이 6개월이나 유폐에 가까운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로마는 쑥대밭이 되었고 로마에 세워진 르네상스풍 건물은 개발살나서 현재 로마 시내에서는 르네상스풍 건물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다.

사코 디 로마는 사실상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종결지었다고 평가된다. 이후 이탈리아의 부는 고갈되고 문화는 생명력을 상실하는 한편문화의 경우 바로크까지는 그래도 건재했다. 카라바조도 있고... 유럽에서의 이탈리아 미술의 문화 주도권 상실은 1680년 베르니니 사망을 기준으로 본다, 대부분 지역이 외세의 지배에 놓이고 만다. 이 시점을 흔히 '르네상스가 알프스 이북으로 건너간 분기점'이라 칭한다. 이후 결국 교황을 포함한 모든 이탈리아 도시국가가 카를 5세 밑에 굴종하는 처지로 전락했으며, 이탈리아는 지난 세기의 영화를 대륙에 내준 채 3류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 대륙으로 이식된 르네상스는 그 나름대로 각국의 토양에 문화가 융성하게 꽃피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뛰어난 철학자, 인문학자, 예술가, 건축가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특히 15세기 이탈리아 못잖게 상공업과 개방성을 중시했던 네덜란드의 경우 자체적으로 회화 예술이 붐을 일으켰다. 당시에 확산된 금속 활자 인쇄술 덕분에 15세기말부터 유럽 널리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전파되지만, 유럽 전체가 균일하게 르네상스를 경험하지 않았다.

또한 종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주었고, 군주론이라든가 인문주의에서 파생된 사회계약설은 훗날 유럽 각국의 절대왕정 체제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적어도 계몽주의의 새로운 바람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각국 귀족과 군주들의 후원 하에서 다방면의 발전이 계속될 수 있었다.

사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활발하게 진행이 되었음에도 전문적으로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들은 많지 않았다. 이탈리아 통일전쟁 이전의 여러 지방으로 나누어있었던 탓이 크다. 19세기까지 이탈리아는 도리어 외지인들에게 경이의 땅이자 관심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그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 외지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 물론 위에 언급한 조르조 바사리 등 이탈리아인의 시각에서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도 존재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르네상스 양식이라는 것도 메디치가 피렌체 시의 절대권력이 된 이후에 등장한 소위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 혹은 '피렌체 르네상스'만에 국한된 것이다. 밀라노베네치아는 피렌체와는 다른 양식적인 특징이 있었다.

2.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편집]

르네상스(밴드) 항목 참고.

3. 대한민국의 순정만화 잡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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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순정만화 잡지. 1989년 11월 창간, 1994년 7월 폐간.

1980년대 후반, 한국 만화는 여러모로 격변하는 시대를 맞게 된다. 기존 대본소 체제가 서서히 한계에 부딪힌 반면, 작가층과 독자층 모두 양적, 질적 성장이 두드러졌다. 더구나 거품이긴 했지만 경제 성장으로 인해 독자층은 구매력이 한결 커졌고 자연스레 출판업자는 서점 진출이라는 리스크가 큰 사업에 도전해 볼 의향을 품게 된다. 이 무렵 학교앞 문방구를 점령해버린 불법 일본만화 역시 '재미있는 만화는 팔린다'는 희망을 품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이후 댕기(1991) 윙크(1993) 이슈(1995) 등 순정만화 잡지가 차례로 등장하며, 1990년대 초, 순정만화는 잡지를 통한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부분은 잡지이면서도 장편연재보다 중편과 단편이 더 비중이 컸다. 르레상스 연재작 가운데 그나마 장편이라고 꼽는다면 원수연의 '엘리오와 이베트'인데, 전 10권. 그나마도 도중에 잡지가 망해서 다른 잡지로 옮겨서 완결했다. 여타 장편 연재작이라면 기껏해야 3~4권 분량 정도. 때문에 작가의 개성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때로는 실험정신이 충만한 이색작도 선뜻 실어주었고, 지금 와서 다시 봐도 읽는 맛이 있다.

더구나 최초의 순정잡지답게 참가한 작가진 면면을 살펴보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 창간호부터 김동화, 한승원, 황미나같은 거물급 작가는 물론이고, 강경옥, 김진, 김혜린, 신일숙 등 1980년대 후반 대본소를 강타한 젊은 에이스들까지 연재했다.

또한 르네상스를 통해 만화 팬에게 이름을 알린 신인 작가들 또한 지금 보면 한마디로 대단하다. 강모림, 김은희, 문계주, 이강주, 이빈, 이은혜, 원수연, 유시진.

4. 디시인사이드에서 시작된 합성계의 대변혁[편집]

2008년 경 디시인사이드에서 일어난 문화의 혁신. 전진, 구준엽 등으로 변화의 발판이 마련된 가운데 빠삐놈이 등장해 본격적인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빠삐놈전진, 구준엽, 나아가 뿌뿌뽕빵상 등까지 끌어들이며 HIT 갤러리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빠삐놈병神디스코믹스는 20000플을 달성하는 기적을 이루었다.

이후 내가 고자라니, 빌리 헤링턴, 달이 차오른다 가자 등이 연타석에 섰다. 이 이후 갑작스런 훈훈한 힛갤 분위기가 조성되고 내가 고자라니 중심의 동영상이 과하다 싶은 생각이 살짝 들 정도로 많이 제작되면서 퇴보하는 듯이 보였으나,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할머니 욕(이른바 할미넴)이 등장하면서 이전보다는 약해졌지만 그래도 넓게 보면 2011년까지 르네상스가 이어졌다.

초기에는 음악이 그 중심축을 이루었지만 시간이 흘러 시각 자료 중심으로 내용이 변화하면서 고대 자료까지 부활해 진정한 르네상스를 완성하고 있다. 홍진호, 김대기, 티벳여우 등은 물론이요 홍석천, 딸녀, 개죽이, 장승업, 아시안 프린스까지 가세한 상황.

이 덕분에 합성 갤러리는 부활, 아니 아예 부활을 넘어서 진화에 성공했다.

2011년 초에 퍼진 디시인사이드 인수논란으로 이 르네상스가 끝나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이 떡밥이 '타회사로의 인수가 아닌 김유식의 유령회사를 통한 법인전환'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면서 일단 우려는 많이 가라앉은 상태이다.

2010년 말에 정사갤 문화권이 합필갤을 점령하면서 많은 수의 장잉들이 떠나 합필갤의 르네상스가 끝난다는 말이 있었으나, 지역드립 등이 매우 논란이 되지만 새로이 합필의 길에 들어선 이들 덕분에 퀄리티는 유지하고 있다. 단 사진 합성만 그렇다. 음원/동영상 합성의 수준은 오히려 떨어졌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고퀄의 작품을 내놓기도 하지만 평균수준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 사실 수준에 대한 문제는 개개인에 맡겨놓아야 할 문제지만, 합필갤이 정사갤/야갤 등의 영향권에 든 이후로 음원/영상 합성의 절대빈도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다행히 2011년 10월 기준으로 점령기 초창기보다는 좀 나아진 듯하지만...

2011년 8월에 급부상한 모형탑 기자(기자상스)처럼 지금도 새로운 소스들이 발굴되고 있지만, 고인드립 패러디 때문에 합필갤 앞마당이라고까지 불리던 힛갤에 입성하는 합필 작품이 눈에 띄게 줄었다. 평균 2~3만, 못해도 1만 힛을 하는 힛갤의 특성상 고인드립의 수위가 지나치면 법적 대응이 걸릴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 합성 갤러리 항목에 따르면 엄밀하게는 2009년까지가 르네상스라고 한다.

5. 삼성전자가 생산했던 오디오 브랜드[편집]

1990년대를 중심으로 커다란 오디오보다 책상 위에 올려놓는 크기인 소형 오디오가 유행일 때 삼성전자가 출시한 제품 브랜드이다. 소형 오디오는 미니콤포라고 불리기도 했다. TV광고 모델은 김수철. 현재는 단종된 상태. 르네상스 이전에는 소노라마도 존재했었다.

6.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국가[편집]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국가로 1976년 부터 1979년까지 존재한 중앙아프리카 제국에도 같은 국가가 사용되었다. 바르텔레미 보간다가 작사/에르베 페페가 작곡하였다.[10]
가사(상고어)
Bêafrîka, mbeso tî âBantu
Kîri mo gbû gîgî tî mo-mvenî
Mo bâa pâsi na gbe tî âzo kûê
Me fadësô, mo ke na kürü gô
Mo sö benda, mo bûngbi kûê ôko
Na kusâra ngâ na nëngö-terê
Tî tö ndâ tî finî dutï tî ë sô
E mä gbegô tî_âkötarä tî ë
CHORUS
E gbû kua nzönî na nëngö-terê
E kpë ndiä nzönî na mängö-terê
E kinda wasïöbê, ë tomba pâsi
E yâa bandêra tî ködrö tî ë!
가사(프랑스어)
Ô Centrafrique, ô berceau des Bantous!
Reprends ton droit au respect, à la vie!
Longtemps soumis, longtemps brimé par tous,
Mais de ce jour brisant la tyrannie.
Dans le travail, l'ordre et la dignité,
Tu reconquiers ton droit, ton unité,
Et pour franchir cette étape nouvelle,
De nos ancêtres la voix nous appelle.
CHORUS
Au travail dans l'ordre et la dignité,
Dans le respect du droit dans l'unité,
Brisant la misère et la tyrannie,
Brandissant l'étendard de la Patrie.
가사(영문 해석본)
Oh! Central Africa, cradle of the Bantu!
Take up again your right to respect, to life!
Long subjugated, long scorned by all,
But, from today, breaking tyranny's hold.
Through work, order and dignity
You reconquer your rights, your unity,
And to take this new step
The voice of our ancestors call us.
Chorus:
To work! In order and dignity,
In the respect for rights and in unity,
Breaking poverty and tyranny,
Holding high the flag of the Fatherland.
가사(한글 해석본)
오, 중앙아프리카여, 반투의 요람이여!
존경을 위해, 삶을 위해 다시 손을 잡으리라!
모두에게 오랜 복속과 오랜 멸시가 있었더라도
오늘날 압제를 파괴하였다네.
노동, 질서, 위엄을 통과하여
정의와 단결을 잡으리라
새로 밟아서
조상의 목소리를 울려라.
후렴
노동이여! 질서와 위엄은
정의와 단결을 잡으리라
새로 밟아서
조국의 깃발을 높이 들거라!

7. 리듬 게임의 음악 장르[편집]

[1] 그러나 중세인들은 그리스-로마 고전을 굉장히 사랑했고, 르네상스인들이 반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지닌 것도 아니다. 물론 교황과 멱살 잡는 일이야 있었지만, 그 정도는 중세에도 아주 흔한 일이었다. 흔히 중세는 교황권이 강했으나 시대가 흐르며 추락했다는 인식이 강하고 크게는 맞는 말이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세의 교황은 교권이 현대 교황보다 훨씬 약했고 대신 속권이 강했다.[2] 이는 교황령의 존재 때문이기도 하다. 교황령로마를 포함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형태로 존재하였고. 이로 인하여 이탈리아는 남부 지역과 북부 지역이 사실상 분단 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강력한 군주가 나타난들 교황령을 넘어서 반대쪽으로 군대를 보낼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게 1100년이 넘게 이어졌다는 것... 그래서 현재의 이탈리아 역시 남부 지역과 북부 지역은 서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많은 차이를 보이며 이탈리아 내에서 남북 간에 지역갈등이 심각하다. 북부지역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정당이 이탈리아 국회에 입성했을 정도이니...[3] 자신의 재능을 기반으로 성장한[4] 아퀴 성당이나 피사 대성당 등이 대표적. 이탈리아에만 이러한 돔이 건설된 성당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앙굴렘 성당 등에서 돔이 올라간 11세기의 로마네스크 건축물을 볼 수 있다.[5] 두오모는 돔이란 뜻이지만 대성당을 의미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성당에서 돔을 처음 올린 것은 아니지만, 당시 유럽에는 이 성당의 돔 크기를 능가하는 건축물은 없었다. 유럽 이외까지 포함하면 하기아 소피아와 Oljeitu Mausoleum이 가장 크다.[6] 브루넬리스키는 건축공학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더해서 수학적 원근법을 발견 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르네상스에 큰 영향을 미친 셈[7] 물론 북유럽 르네상스에 대한 담론이 처음 등장한 건 나치의 싹수가 보이던 1930년대(...)였었지만...[8] 독일에서 고전주의 양식이 유행하지 않은 이유는 도시 단위로 다른 취향을 갖고 있던 독일의 상황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왕에 의해 국가 전체의 문화적 취향이 좌지우지 되는 프랑스처럼 어떤 한 취향을 가져가기 어려웠다는 것.[9] 각 이 셋 문서로 들어가면 자세히 설명이 되어있다. 그래도 각각 요약을 하자면 고전 양식의 완성, 스푸마토, 공기원근법-다빈치 인체 표현양식 완성, 천장화- 미켈란젤로, 짬뽕- 라파엘로[10] 출처: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C%95%99%EC%95%84%ED%94%84%EB%A6%AC%EC%B9%B4_%EA%B3%B5%ED%99%94%EA%B5%AD%EC%9D%98_%EA%B5%AD%EA%B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