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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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괴테메달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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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998년

2007년

윤이상

백남준

김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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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Nam June Paik (백남준, 白南準)

출생

1932년 7월 20일
경기도 경성부 서린정

사망

2006년 1월 29일 (향년 73세)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

국적

미국

학력

경성수송국민학교
경기제1고등보통학교[1]
홍콩 로이든 고등학교
도쿄대학 미술사학 학사 (부전공 음악사학)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 수료
뮌헨 대학교 철학 석사
뮌헨 대학교 음악사학 박사
프랫 대학교 미술학 명예박사

가족

아버지 백낙승, 어머니 조종희, 3남 2녀 중 막내
배우자 구보타 시게코[2]
외손자 지누

직업

예술가 (비디오 아티스트)





"그건 그렇고, 30세기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선생님, 혹시 (곧 다가올) 21세기 말씀이십니까?"
"아니, 1000년 후 30세기."
"...."


1994년 미국 휘트니미술관 2인전시를 함께한 설치미술가 강익중과 나눈 대화[3]

인생은 싱거운 것입니다. 짭짤하고 재미있게 만들려고 예술을 하는 거지요.

백남준은 어려울 때마다 정신적으로 의지한 내 마음 속의 부처였다.


오노 요코, 백남준의 장례식 추모연설 中


1. 개요2. 일생
2.1. 유소년기2.2. 행위예술가로2.3. 결혼2.4. 비디오 아트
3. 평가4. 미술관5. 여담

1. 개요[편집]

백남준, 白南準, Nam June Paik
1932년 7월 20일 ~ 2006년 1월 29일
경기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출신.

나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아닙니다. 세기(世紀)적인 예술가입니다.


2002년 무렵 경기문화재단에 보낸 친필 편지


비디오아트의 창조자이자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힌 세기적인 괴짜 예술가

그 특유의 파격적인 예술세계로 유명하다. 지금은 볼프 보스텔과 더불어 비디오아트의 세계를 개척한 누구도 부정 못할 세계적인 예술가이지만, 비디오아트 이전 시절에는 전위예술 퍼포먼스 아티스트였다. 전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으며, 플렉서스 멤버로 퍼포먼스 예술에서도 한 축을 담당했다.[4]

2. 일생[편집]

2.1. 유소년기[편집]

백남준은 조선 직물업계의 큰 손이었던 굴지의 기업가이자 친일파인 백낙승의 아들로 태어났고, 덕분에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집에는 피아노나 전축은 물론 당시에 서울에 딱 2대 밖에 없었던 캐딜락도 있었고, 해방 전에 유치원(애국유치원)에 다녔으며 한국 전쟁의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파인애플을 먹을 정도의 부잣집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돈은 물 쓰듯 쓰는 거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조부 백윤수 또한 청나라 비단을 독점 판매했던 거부로, 종로5가와 동대문시장 일대의 포목상 절반이 그의 것이었고, 국상 때 만조백관의 상복과 제복을 일체 도맡았을 정도로 섬유업계의 막강한 실력자였다. 후에 그는 직물, 대부업, 제약회사 등을 세웠고, 재산은 한성은행 자본금의 3배에 달했다.

백남준은 당시 상류층만 다니던 수송국민학교경기공립중학교[5]를 다녔는데, 해방 전 그 시절에 학교에는 풀장과 영사기가 있어서, 당시 학부모였던 대한극장 사장이 학교에서 직접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경기중학교 음악교사로, 후에 이대 음대학장을 지냈던 신재덕에게 피아노를,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배웠다. 194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으로 무기구입을 위해 홍콩으로 갔다는 설이 있는 부친 백낙승[6]의 통역으로 따라가 홍콩의 로이덴 스쿨로 전학한다. 백남준은 이때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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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리 뭔가 손아섭 닮았다

2.2. 행위예술가로[편집]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여권[7]일본 비자가 있었던 백남준은 도쿄로 건너가 도쿄대학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다.[8][9][10] 그리고 대학원을 당시 현대음악의 메카 독일 뮌헨대학으로 진학하여 철학 석사와 음악학 석사를 취득했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현대음악 쪽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11][12] 그런데 독일에 있을 때쯤 존 케이지조지 마치우나스 등의 영향을 받아 행위예술을 접한 뒤, 행위예술가로 변신하게 된다. 머리카락에 먹을 묻혀 선을 그리는 것도 사실 백남준이 했던 퍼포먼스다. 이후 플럭서스의 일원이 되고, 미국 뉴욕과 독일을 오가면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사실 백남준이 1964년 미국 뉴욕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알아 주지 않았었다. 무대에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를 때려 부수거나 넥타이를 자르기도 했다. 1967년에 백남준이 누드인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과 공연하다가 샬롯이 경찰에 체포당해 논란을 일으킨 사건은 유명하다.[13] 그 결과 백남준은 미국 예술계에서 제대로 된 예술도 못하고 기행을 일삼는 사람, B급 예술가 정도로 치부되었다.

B급 예술가라는 것은, 당시의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언급일 수도 있다. 당시 60년대에서 70년대에는 서서히 퍼포먼스 예술이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였고, 물론, 현대에는 현대미술하면 알 수 없는 무용과 행위들을 떠올리곤 하지만, 이전 예술은 단순히 회화아니면 조각 정도로, 이루어지는 오브제 중심적인 예술이었다. 때문에, 당연히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오브제 없이 예술가의 행위 자체와 관람객이 느껴야하는 '경험' 위주의 예술은 매우 비주류라고 할 수 있으나, 개척기이자 태동기였다. 예술의 범위가 확장되는 시기였다고 생각하면 쉽다. [14]

후에 퍼포먼스예술은 80년대 이후 대중예술에서도 독특한 무대연출(패션쇼, 콘서트, 오케스트라 등)로 발전하여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다. 제대로 된 무대연출을 할 줄 아는 아티스트가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면, 퍼포먼스예술이 현대예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것은 종합예술의 영역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2.3. 결혼[편집]

오노 요코 때문에 잠깐 존 레논과 약간의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백남준은 그 당시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으나 요코는 존을 선택해 그와 결혼했고, 백남준은 꽤 충격 받았던 듯.(지금 생각하면 천만다행) 존 케이지 등과도 교분이 있었으며 비디오 아트 예술가 이전에는 피아노 행위예술가로도 알려진 바 있다. 무엇보다 연주하다가 도끼로 피아노를 부숴버리던 짓도 곧잘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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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웨스트베스 작업실에서의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

1977년 자신과 같이 행위예술 작업을 했던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와 결혼했다. 구보타 시게코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에게 매료되어 자신의 남자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결국 결혼.[15] 평생 구보타 시게코를 쳐다보지도 않았었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다음 그녀가 지극으로 챙기면서 그나마 쳐다보기라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혼녀[16]인 구보타 시게코가 자궁암으로 불임 진단을 받고 엄청난 수술비에 모든것을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백남준이 본인 명의의 의료보험 혜택[17]을 활용하자며 먼저 청혼을 하고[18] 결혼 후에도 구보타 시게코의 불임 진단과 의료보험과 관련해서는 주변 친구들에게 전혀 입밖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등의 모습을 보면, 백남준의 구보타 시게코에 대한 배려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으며, 구보타 시게코 역시 이런 백남준의 배려와 사랑에 사후에도 그를 아끼는 마음에서 백남준과의 삶을 회고하는 책 "나의 사랑, 백남준"을 출간하기도 했다.# 다만 양자격인 백남준의 사촌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갈등을 빚어서 이미지 하락을 겪기도 했다. 이후 암 투병중이던 구보타 시게코는 2015년 7월 23일 작고했다.

2.4. 비디오 아트[편집]

B급 예술가로 치부당하는 와중에도 백남준의 인지도는 꾸준히 쌓여가고 있었고, 기괴한 퍼포먼스를 하며 조금씩 시도했었던 비디오아트는 점점 백남준의 예술 세계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백남준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만 알고 있는데,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19] 1974년부터 비디오 아트 설치 작업을 선보였으며, 영상이 공중파 TV에 방영되는 등 점점 유명해지고 예전과 다르게 높은 평가를 받는다. 결국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고전이 전시되었고, 뉴욕 뿐만이 아닌 미국 예술계에 큰 인지도를 얻게 된다. 이때부터 백남준은 바쁘게 활동하였다. 1979년부터 1996년까지 17년 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조각과 교수로 있었는데, 뉴욕에서 작품활동 하느라 바빠서 학생들을 자주 보지 못해 미안해 했다고 한다.


[20]

1984년 새해 벽두에 전세계 동시송출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21]의 풀 버전 영상.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 쇼 프로그램인데다 더불어 뉴욕, 샌프란시스코, 파리의 다원생중계였다! 훗날 이 작업은 인공위성 예술의 대표적 사례로 불리게 된다. 현대음악가의 전설로 남은 존 케이지가 나오는가 하면,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 배우 이브 몽탕이 신나게 탭댄스 추며 노래도 부른다! 후반부에 진지하게 첼로를 키는 장면은 압권. 전반적인 스토리는"오웰, 당신이 예측한 미래는 오지 않았고 우리는 잘 살고 있다."로 전개된다.

실제로 소설 1984에는 발달한 과학이 텔레스크린같은 것처럼 오히려 인류를 옥죄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데, 백남준은 발달한 과학을 이용해 예술의 새 지평을 연 셈. 예술의 신기원을 열면서 동시의 영미문화의 대작가를 까고, 아울러 현대 과학의 발전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갖춘 셈인데, 이렇게 보고 위 동영상을 보면 소름이 쫙 돋는다. 오직 1984년에만 할 수 있는 예술인 셈.


(바이 바이 키플링의 초반 인터뷰 영상. 풀버전의 30분짜리는 회원제 사이트에만 있다.)
1986년에는 <바이 바이 키플링>이라는 작품으로, 러디어드 키플링(1936년 졸로 당시 사망 50주년)의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다. 동양과 서양은 절대로 서로 어울릴수 없다'(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는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주제로 도쿄, 뉴욕, 서울의 '서구'와 '비(非)서구'의 모습을 순서 없이 뒤죽박죽 방영하면서 동양과 서양 모두 동일한 시간축에 살고 있음을 역설하고,-동양과 서양이 서로 상대를 봤을때 신기하고 자기들 끼리는 비슷비슷해보이는 것 처럼, 제3의 생명체가 봤을떈 동양과 서양 둘은 쌍둥이처럼 같아보인다는 논리이다.- 오리엔탈리즘을 철저하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딕 카벳과 류이치 사카모토가 출연하기도 했다. KBS-1, TV아사히, WNET 의 세 방송사에서 방송되었다. PBS, NHK에서 방송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1988 서울 올림픽 1주일전, <손에 손잡고>라는 작품으로 2년전의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더 많은 참가국가로 극대화 시키며, 냉전의 시대가 끝났음과, 전세계의 조화와 공존을 담아내면서 백남준의 위성 연작 3부작의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한국 대중들에게 '백남준'이라는 예술가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비로소 한국에 알려지게 된다. 사실상 한국은 백남준에 대해서 역수입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백남준이 일본에서 뉴욕에 가기까지는 한국에서도 무명이었고, 그가 현지에서 악평을 들을 때도, 유명해지고 세계적인 수준에 오를 때 까지도 한국에서는 잘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사실 백남준보고 세계적인 예술가라고 해도 한국에서는 실감이 안나기 마련이다.[22] 그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랴부랴 일본으로 출국하여 독일과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를 떠돌다 34년만인 1984년에 다시 고국을 찾았을 때 한 기자가 '왜 한국을 놔두고 외국에서만 활동하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해요.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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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다익선, 1988년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에서 백남준은 초기의 악동 행위예술가 같은 이미지는 거의 없고, 88올림픽을 기념해 만든 다다익선 같은 작품처럼 오로지 텔레비전 여러 대를 이용한 비디오 아트의 이미지만 강하게 남아있다. 비디오 아트 작업을 하는 데 많은 TV가 필요했는데, 초기엔 소니 제품을 쓰다가 어느 시점 이후로는 삼성전자의 협력을 받아 삼성 TV를 사용하였다. 이 때를 즈음해서 삼성 텔레비전 광고도 찍었다. 백남준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오리지널 서울 사투리가 정겹다.



▲ 칠성사이다 CF 1편 - "기억하는 과거"



▲ 칠성사이다 CF 2편 "창조하는 현재"

1995년 8.15 광복 5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제작된 칠성사이다 CF에 출연하여 과거 칠성사이다의 CF 영상들과 시대별 영상자료들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웅장함으로 뇌리에 깊숙히 남는 1편의 BGM은 가수 김수철이 작곡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3. 평가[편집]

백남준이 높게 평가 받는 이유는 첨단기술매체와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 상상하고 이를 예술로 표현했다는 점에 있다. 당시 예술가들이 텔레비전 같은 새로운 매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이를 배척하거나 파괴하는 작업을 선보인데 반해, 백남준은 새로운 예술을 선보이기 위해 전자회로 관련 기술도 직접 공부하고 아베 슈야 같은 기술자와 협력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작품 <etude 1>(1967-1968)을 만들기 위해 벨 연구소에서 포트란 언어로 코딩까지 시도했다고 한다. 1967년에 말이다.

게다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백남준은 저술이나 이론 작업도 꽤 많이 했다. '전자 고속도로'를 예견한다든지, '인포 아트'에 대해 논한다든지,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지금 읽어보면 당연하고 뻔하다 싶은 내용을 써놓은 경우가 많지만, 인터넷이 나오기도 전에 그런 예견을 한 사람은 당시 몇몇 매체이론가들 밖에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백남준의 선견지명이 대단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23] 이 때문에 사실상 비디오 아트 뿐 아니라 미디어아트를 논할때도 백남준을 빼놓고 말하는 것은 힘들 정도다. 실제로 미디어아트 관련 서적에 백남준은 적어도 한 절씩은 들어가 있을 정도다.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소장품목에 넣은 것도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상 한국 미술이 백남준에게 많이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 예술 경향을 국내에 소개하거나, 휘트니 비엔날레의 경험을 살려 광주비엔날레 조직에 도움을 주는 등 한국 미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아직 한국 현대 예술가 중에 백남준의 명성을 넘은 사람은 없다. 오히려 한국보다 해외 예술계에서 뛰어난 네임밸류를 보이며, 국내외 근현대 미술사에서 빠질래야 빠질수 없는 플럭서스의 주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퍼포먼스 예술이건, 비디오 아트 개척 이후 이건, 공인된 위대한 예술가.

4. 미술관[편집]

2008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백남준 아트센터를 개관했다. [24] 주로 현대미술을 위시한, 퍼포먼스, 개념, 설치 미술이 중점적으로 전시되며, 정기적으로 행위예술 페스티벌이 열리곤 한다. 또한 용인 마북동에 있는 한국미술관은 그의 작품과 그의 아내의 작품이 자주 전시된다. 이래저래 백남준과 용인은 인연이 깊은 듯. 용인의 백남준 아트센터 외에는 다음의 기관에서 백남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엄청 큰 작품을 갖고 있다. 모니터가 자그마치 1003개... 작품명은 '다다익선'. 수리할 때가 되었는데 이미 단종된 CRT를 구해서 고칠지 이참에 LCD로 바꿀지 고민하더니 그냥 CRT로 고친듯.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층 통로에 설치되어 있는데 웬만한 사람들은 전시물인지 모르고 지나친다. 작품명은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1965-67>

  • 대전시립미술관: 1993년 대전엑스포당시 재생관에 전시되었던 비정수의 거북선[25]이 있다. 근래까지 재생관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현재 대전시립미술관으로 이동, 수리후 전시중이다.

  • 삼성미술관 리움: 2동 1층에 <My Faust-Communication> 전시중. 도슨트가 투어 중에 설명해주는 작품에 포함되어 있다.

    • 부산시립미술관: 1층 로비의 <덕수궁> 외에 4점 보유.

  • 서울시립미술관: 1층 로비에 <서울 랩소디> 전시 중.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바이 키플링', '서울 판타지아', '네 마음 속의 서울' 등 영상이 담겨있다. 이 중 2대의 모니터에서는 꽤 야한 누드가 나온다.

  •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로비에 <호랑이는 살아 있다> 영구설치.

  • 수원역 AK프라자: 6층 문화센터 입구에 전시중. 2003년 수원역 민자역사 (개관당시 애경백화점) 준공 당시부터 2층 로비에 있었던 작품이지만 AK프라자 측이 매각을 시도한적이 있어서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 우리들병원: 병원로비에 <안심낙관> 작품이 전시중이다.

  • 한국산업은행: 여의도 영업부 로비에 1점. 산은본점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니 눈으로만 보자. 다이렉트 계좌개설 핑계삼아 가보자.

  • 하나금융투자 여의도 본점: 1층 후문[26] 쪽에 <하나 로보트, 2001>, <초고속 경제, 2001>, <시집온 부처, ?>, 총 세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촬영과 출입이 자유롭다.

  • 한양대학교 백남학술정보관(중앙도서관): 로비에 <TV 첼로>라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출입통제 및 사진촬영 금지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로비 앞 출입게이트에 있는 경비가 해당 작품을 감시하고 있다.

  • SK증권 여의도점: 1층 로비에 <개선장군>이 전시되어 있다.

  • 삼성화재교통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다.


해외에서는 미국 워싱턴 DC의 허쉬혼 미술관과 아메리칸 아트 미술관, 예일대 미술관,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일본 후쿠오카의 후쿠오카 미술관과 캐널 시티 하카타, 독일 뒤셀도르프의 노르트라인주립미술관, 호주 캔버라의 국립미술관,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27] 등이 백남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다만 소장중이더라도 모니터가 나가서 수리중일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말자. 실제로 백남준 작품은 CRT 모니터가 나가서 수장고에 끌려가거나 가림막으로 가려놓거나 아예 TV를 꺼버리는 경우가 있다.

5.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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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0일구글에서는 그의 탄생 78주년을 기념하여 로고를 특별히 제작하기도 했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앞에서 큰 실수(?)를 범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19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 방미에 맞춰 백악관에 초대받은 백남준은 클린턴 대통령 면전에서 그와 악수하다가 바지가 흘러내렸다. 아무 속옷도 입지 않은 채. 단순한 실수였다고는 하는데 당시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빌 클린턴은 얼마나 놀랐을까 김대중의 표정도 만만치 않다고 전하였다. 일각에서는 연이은 섹스 스캔들에 시달렸던 클린턴을 '빗대어' 이 같은 '퍼포먼스'를 했다거나 '전자 정보 고속도로'라는 단어를 클린턴이 마음대로 가져다 사용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등 각종 설들이 나왔다.[28] 이 당시 백남준의 표정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러한 설들이 더 부추겨진 면도 있는 듯.

원로 코미디언 백남봉과 앞글자 두자가 동일하고 연령대도 비슷한데다[29] 두 사람 모두 국내에서는 이름이 잘 알려진 관계로, 80~90년대에는 대중들이 두 사람의 이름을 은근히 헷갈려 하거나 백남봉백남준의 짝퉁 취급[30]을 받는 안습한 경우도 많았다. 물론 최근인 2006년 백남준의 작고와 더불어 2010년 백남봉까지 작고하면서 이런 혼란은 완전히 사그라든 듯 하다.

일본의 작곡의 신이자 YMO용일이형사카모토 류이치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YMO의 PV를 보면 백남준의 영향을 받았다는 걸 볼 수 있다.[31]

백남준의 대표작인 다다익선을 전시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도슨트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 CRT의 수명이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라 삼성전자의 기술지원을 받아서 작품을 계속 돌아가게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모니터들이 꺼지고 있고 교체도 어렵게 수급해서 이루어지고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실제로 현장에서 관람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하단부와 최상단부의 작은 사이즈 CRT는 정말로 가뭄에 콩나듯 켜저있고 중간의 큰 사이즈 모니터들도 종종 꺼져있다. 그래서 삼성측에서 적절한 시점을 잡아 LCD모니터로 교체를 하자는 제안도 했다고. 백남준 선생도 작품의 외관보다는 내부에 든 컨텐츠가 유지되기를 바랬다고 하기에 국립현대미술관측에서도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중이라고 하나, 아직까지는 CRT를 수급할수 있어서 그런지 현재까지도 그런 일은 벌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조만간에 CRT의 수급이 정말로 불가능한 순간이 도래할것이기때문에 그때가 온다면 LCD로 다 갈아버릴듯하다. 게다가 이젠 커브드 UHD TV도 나오고 삼성이 곡면 디스플레이를 어느정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상황이어서 곡면 디스플레이로 박아버리면 완벽한 곡률을 가진 작품으로 완성할수도 있다.그리고 제일기획 불러서 광고 잘 뽑으면 UHD TV 광고 한편 완성

결국 2018년 4월에 30년 넘게 가동되던 다다익선이 수명에 한계가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1998년 예술계에 기여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수상했다.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 괴테 메달 수상자이다.

[1] 당시 6년제 중.고등학교 통합 학제였기 때문에 중학 과정 수료 후 영국령 홍콩으로 유학을 떠났다.[2] 재혼했다.[3] 2인전이 끝나고 백남준과 강익중, 그리고 미국 월가(街)의 금융인들과 가진 식사자리에서 나온 대화였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광적인 독서와 매일 두 시간씩 여덟 개의 주간지, 네 개의 월간지, 세 개의 일간지를 읽었던 백남준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월가에서 벌어지는 세세한 변화들을 꿰뚫어 본 그는 월가의 금융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 직후에 나온 대화가 바로 문제의 30세기에 관한 질문. 후에 강익중은 30세기의 세상을 상상하던 백남준을 두고 낮에도 별을 보는 사람이라고 했다.[4] 퍼포먼스 예술은 그 이전 예술에서는 볼 수 없는 현대예술의 대표적 예술활동인데, 플렉서스 멤버들과 했던 수많은 퍼포먼스가 이제는 주류 예술이 되었다.[5] 당시 경성제1고등보통학교, 1938년 경기공립중학교로 교명변경. 지금의 중학교가 아닌 중고등 과정이 통합된 구제 중학교 과정[6] 백낙승은 당시 메이지대학 법과와 니혼대학 상과를 나온 당시의 최고 엘리트로, 해방 이후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의 사장이었다. 해방 전에는 비행기 회사를 운영하며 일제에 헌납금과 비행기를 바치는 등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그렇게 번 돈으로 이승만, 여운형 등 좌, 우를 막론하고 대대적으로 돈으로 회유해 반민특위에서 빠지려고 했다. 하지만 친일행위를 덮기엔 부족했고, 결국 구속되었으나 보석으로 빠져나왔다. 그 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아비규환한 상황에서 정경유착을 벌여 이승만 정부 부정부패의 핵심축으로 자리잡았다. 1956년 사망 후 백남준의 큰형이 태창방직을 경영하였으나 5.16 군사 정변 이후, 부정축재 대상자가 되어 태창방직이 국고로 몰수되었다. 이후 온가족이 일본으로 망명 후 귀화했다.[7] 여권 번호가 '7번'이었다. 그 당시에 여권 번호는 발행 순서대로 부여되었다.[8] 수험 준비 기간이 3개월밖에 안 걸렸다는 전설이 있다. 백남준의 가족은 백남준이 법학부나 경제학부에 지망할 거라고 생각하고 입학 절차를 전적으로 백남준 본인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입학 전 도쿄대학에서 학부모 모임을 초대하는 편지에서 백남준이 문학부를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9] 도쿄대학의 체제상 지원당시는 문학부로의 지원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전공은 교양과정을 이수하고 정하는 것.[10] 사실 어릴때부터 백남준은 기업인이나 정치가보다는 예술가 기질이 강했다. 어린 시절에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과달카날 레퀴엠 같은 이후의 작업 경향을 봐도 권위주의나 군국주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약간 오늘날의 강남 좌파 같은 느낌이 있었던 듯. 이 때문에 독일 유학 때는 유학비를 제한받을 정도로 부친과 사이가 안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비디오 아트 작업을 할때 사용할 비싼 텔레비전을 구하는데에는 백남준 집안의 도움이 컸다.[11] 동경대에서 전공한 미학이 음악미학이다. 학부때의 부전공도 음악사학. 이미 이전부터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았다.[12] 뮌헨대학에서의 공부도 그에게는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보다 진취적인 분위기의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으로 옯겨서 현대음악 공부를 더했다고...뮌헨대학의 석사학위를 완전히 마쳤는지는 자료에 따라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13] 샬롯은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당시 뉴욕 예술계는 유죄 판결에 대해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다. 결국 당시 주지사였던 넬슨 록펠러(록펠러 가문 출신, 후에 미국 부통령)는 예술적인 퍼포먼스라면 누드라도 처벌할 수 없다고 법을 개정하게 만든다. 이로써 뉴욕은 퍼포먼스에 관해서 보다 자유롭게 변했다.[14] 물론 행위 예술이 남발하고 있는 현대에도 그림이나 조각이라는 '물질'의 존재 없이 퍼포먼스를 예술로 삼는 예술가들은 비교적 높은 수준의 예술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시각에서도, 당시 예술계에 이단아들이자, 맨땅에 퍼포먼스 예술을 시도한 '플럭서스'의 일원이며 그중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던 백남준의 수준은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다.[15] 두 사람 다 재혼이었다. 백남준에겐 첫번째 부인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 바로 다름아닌 지누션의 멤버 지누(김진우)의 친어머니였다.[16] 게다가 전 남편은 다름아닌 백남준의 친구인 작곡가 데이비드 베어맨이었다. 백남준을 기다리다 지친 상황에서 베어맨이 청혼을 해서 결혼하게 된 것. 하지만 일본인과 독일인을 싫어했던 시아버지 때문에 갈등을 빚고 결국 이혼한다.[17] 미국의 의료보험은 악명이 높다.[18] 어차피 백남준 입장에서도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기 때문에 불임은 문제가 아니었다고 한다.[19] 볼프 포스텔(Wolf Vostell)이 먼저 TV를 사용하긴 했는데, 포스텔은 TV를 끈채로 부수기만 했다.[20] 초반부에 등장하는 노래는 로리 앤더슨의 Excellent Birds. 같이 부르는 남자는 피터 가브리엘로 2년 후 가브리엘의 앨범 So에 This Is the Picture (Excellent Birds)라는 이름으로 수록된다.[21] 이름이 왜 이런지는 영미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다.[22] 박하 줄거리, 허영만 그림인 만화 비트를 보면 여주인공 로미의 부모가 부자인데 80년대 백남준 관련 작품을 티브이로 보고 세계적으로 알아주는데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모르면 수준이 낮다고 할테고 이런 생각으로 작품을 보면 당황해하더라는 이야기가 나온다.[23] 예술가는 항상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때 마다,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마련인데, 당시 TV는 바보상자라고 불리며, TV컨텐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대부분이였으며, 좋은 미래를 전망하지 않았다.[24] 서울을 포함하더라도, 이 정도 수준의 현대미술관은 찾기어렵다. 난해하고,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백남준의 세계적 네임밸류로 인해, 해외의 현대미술작가들은 이 곳에서 전시를 많이한다. 때로는, 해외에 엄청난 네임밸류를 가진 작가가 서울이 아닌, 용인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전시를 열기도 한다.[25] 일반에는 텔레비전거북선으로 잘 알려져 있다.[26] 여의도역 쪽을 정문이라 가정. 사실 정문과 후문이 구분이 안간다.[27] 테이트 모던에서는 아예 백남준의 작품만을 전시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http://www.tate.org.uk/visit/tate-modern/display/media-networks/nam-june-paik[28] 클린턴의 스캔들을 비꼬아 사실 클린턴은 주위 사람의 바지를 벗기는 힘이 있기 때문에 백남준이 당한 것이라는 드립도 나왔었다,[29] 백남준은 1932년생, 백남봉은 1939년생으로 두 사람은 7살 차이밖에 안 난다.[30] 참고로 백남봉의 경우 본명은 박두식으로 백남봉이라는 이름은 연예인 활동을 위한 예명인데, 백남준이 국내에 알려지기 십여년 전부터 이 예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백남준의 명성을 노린 것과는 전혀 관계 없다.[31] 실제로 사카모토 류이치는 백남준에 대한 존경을 담은 헌정곡 A tribute to NJP라는 곡을 작곡해 자신의 앨범에 수록한 바 있다. 그가 작곡한 영화음악 등에 비교해보면 다소 전위적인(?) 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