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르조 데 키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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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데 키리코 Giorgio de Chiric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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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주세페 마리아 알베르토 조르조 데 키리코 Giuseppe Maria Alberto Giorgio de Chirico |
출생 | |
사망 | |
국적 | |
직업 | 화가, 작가, 조각가, 무대 디자이너, 삽화가, 보석 디자이너 |
서명 | ![]() |
부모님은 모두 이탈리아인이었으나, 엔지니어였던 아버지가 그리스 볼로스의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위해 그리스에 머물던 기간에 태어났다. 역시 그리스에서 태어난 동생 안드레아 프란체스코 데 키리코는 알베르토 사비노라는 가명으로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1900년부터 조르조는 게오르기오스 야코비데스의 지도를 받으며 아테네 폴리테크닉에서 드로잉과 회화를 공부했다. 190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과 함께 피렌체를 거쳐 독일로 이주하였고 뮌헨 예술원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프리드리히 니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오토 바이닝거 등의 저서를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09년 뮌헨 예술원 졸업을 떠난 조르조는 이탈리아 밀라노, 피렌체, 토리노 등에서 잠시 거주했다. 이 기간 동안 The Enigma of an Autumn Afternoon, The Enigma of the Oracle 등을 그렸으며 이탈리아 건축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11년 7월, 동생이 머물고 있던 프랑스 파리로 이사했다. 동생의 소개로 살롱 도톤의 피에르 라프라드 등을 만났고, 살롱에 Enigma of the Oracle, Enigma of an Afternoon, Self-Portrait를 전시했다. 1913년에는 살롱 데 앙데팡당에도 전시하였으며 파블로 피카소와 기욤 아폴리네르의 주목을 받았다. The Red Tower는 그가 처음으로 판매한 작품이 되었다.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폴 기욤을 만났고, 폴 기욤은 조르조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계약을 체결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 5월, 이탈리아로 귀국해 입영 지원하였으나 페라라의 병원으로 배치되었다. 이 곳에서 카를로 카라를 만나 형이상화파 결성하고 잡지 Pittura Metafisica를 창간한다. 이 시기에 그는 마네킹으로 가득찬 실내, 이젤, 비스킷, 고무장갑 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품과 소재를 그렸다.
1919년 11월, 미술 잡지 발로리 플라스티치에 "장인의 귀환"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전통적 기법과 도상학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루카 시뇨렐리와 라파엘로 산치오의 고전주의 양식을 강조하며 전후 "질서로의 회귀" 운동에 동참했다.
1920년대 초, 앙드레 브르통는 폴 기욤의 갤러리에서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을 발견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파리 초현실주의 그룹을 결성했다. 1924년 조르조 데 키리코가 파리를 방문하자, 브르통은 그를 그룹으로 초대했다. 다만 초현실주의자들은 브르통의 후기 작품에는 부정적이었다. 점차 그룹과 조르조 데 키리코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1926년 데 키리코는 초현실주의자들을 "바보 같고 적대적이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1925년에는 첫 아내인 러시아의 발레리나 라이사 구리에비치와 혼인하였으며, 1929년에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무대를 디자인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는 소설 Hebdomeros를 집필했다. 비록 이미 초현실주의자들과 다툰 이후에 출판된 책이었지만, 문학 피평가들은 이 소설 역시 초현실주의 문의 하나로 평한다.[1]
1930년 데 키리코는 두 번째 부인 이사벨라 파크스베르 파를 만난다. 새 부인과 이탈리아, 미국의 여러 곳을 지나 로마에 정착하였다. 1939년부터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네오 바로크 스타일을 사용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같은 거장들의 테크닉을 재발견하고 재현하는데 흥미를 가지기도 했다.
데 키리코의 후기작들은 그의 초현실주의 시기에 비해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데 키리코는 자신의 후기작이 더 성숙하다고 생각했다. 말년에는 마시밀리아노 푹사스를 수학하기도 했으며 1974년에는 파리 보자르에 선출되었다. 1978년 11월 20일 로마에서 사망했으며 산 프란치스코 아 리파 성당에 묻혔다.
1900년부터 조르조는 게오르기오스 야코비데스의 지도를 받으며 아테네 폴리테크닉에서 드로잉과 회화를 공부했다. 190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과 함께 피렌체를 거쳐 독일로 이주하였고 뮌헨 예술원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프리드리히 니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오토 바이닝거 등의 저서를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09년 뮌헨 예술원 졸업을 떠난 조르조는 이탈리아 밀라노, 피렌체, 토리노 등에서 잠시 거주했다. 이 기간 동안 The Enigma of an Autumn Afternoon, The Enigma of the Oracle 등을 그렸으며 이탈리아 건축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11년 7월, 동생이 머물고 있던 프랑스 파리로 이사했다. 동생의 소개로 살롱 도톤의 피에르 라프라드 등을 만났고, 살롱에 Enigma of the Oracle, Enigma of an Afternoon, Self-Portrait를 전시했다. 1913년에는 살롱 데 앙데팡당에도 전시하였으며 파블로 피카소와 기욤 아폴리네르의 주목을 받았다. The Red Tower는 그가 처음으로 판매한 작품이 되었다.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폴 기욤을 만났고, 폴 기욤은 조르조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계약을 체결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 5월, 이탈리아로 귀국해 입영 지원하였으나 페라라의 병원으로 배치되었다. 이 곳에서 카를로 카라를 만나 형이상화파 결성하고 잡지 Pittura Metafisica를 창간한다. 이 시기에 그는 마네킹으로 가득찬 실내, 이젤, 비스킷, 고무장갑 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품과 소재를 그렸다.
1919년 11월, 미술 잡지 발로리 플라스티치에 "장인의 귀환"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전통적 기법과 도상학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루카 시뇨렐리와 라파엘로 산치오의 고전주의 양식을 강조하며 전후 "질서로의 회귀" 운동에 동참했다.
1920년대 초, 앙드레 브르통는 폴 기욤의 갤러리에서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을 발견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파리 초현실주의 그룹을 결성했다. 1924년 조르조 데 키리코가 파리를 방문하자, 브르통은 그를 그룹으로 초대했다. 다만 초현실주의자들은 브르통의 후기 작품에는 부정적이었다. 점차 그룹과 조르조 데 키리코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1926년 데 키리코는 초현실주의자들을 "바보 같고 적대적이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1925년에는 첫 아내인 러시아의 발레리나 라이사 구리에비치와 혼인하였으며, 1929년에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무대를 디자인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는 소설 Hebdomeros를 집필했다. 비록 이미 초현실주의자들과 다툰 이후에 출판된 책이었지만, 문학 피평가들은 이 소설 역시 초현실주의 문의 하나로 평한다.[1]
1930년 데 키리코는 두 번째 부인 이사벨라 파크스베르 파를 만난다. 새 부인과 이탈리아, 미국의 여러 곳을 지나 로마에 정착하였다. 1939년부터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네오 바로크 스타일을 사용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같은 거장들의 테크닉을 재발견하고 재현하는데 흥미를 가지기도 했다.
데 키리코의 후기작들은 그의 초현실주의 시기에 비해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데 키리코는 자신의 후기작이 더 성숙하다고 생각했다. 말년에는 마시밀리아노 푹사스를 수학하기도 했으며 1974년에는 파리 보자르에 선출되었다. 1978년 11월 20일 로마에서 사망했으며 산 프란치스코 아 리파 성당에 묻혔다.
데 키리코의 잘 알려진 작품들은 그의 초현실주의 시기의 것들이다. 빈 아케이드, 탑, 늘어진 그림자, 마네킹, 열차 등의 모티프는 황량하고 공허한 이미지를 형성해 모순적이게도 자유와 힘의 느낌을 준다.
미술 평론가 샌포드 슈워츠는 데 키리코가 "기차 창문을 통해 건물과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을 암시하는 이미지들을 그렸다고 평한다. 그의 탑, 벽, 광장은 마치 번쩍이는 듯 지나가며, 그런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힘을 느끼게 되고, 마치 매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더 친밀하게 그것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에드워드 호퍼와도 공통점이 많다고 평가된다. 낮은 햇빛, 길고 비현실적인 그림자, 빈 산책로, 시각적 정적 등이 비슷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미술 평론가 샌포드 슈워츠는 데 키리코가 "기차 창문을 통해 건물과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을 암시하는 이미지들을 그렸다고 평한다. 그의 탑, 벽, 광장은 마치 번쩍이는 듯 지나가며, 그런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힘을 느끼게 되고, 마치 매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더 친밀하게 그것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에드워드 호퍼와도 공통점이 많다고 평가된다. 낮은 햇빛, 길고 비현실적인 그림자, 빈 산책로, 시각적 정적 등이 비슷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 이브 탕기는 미술상점의 창문에서 데 키리코의 작품을 보고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 르네 마그리트는 데 키리코의 The Song of Love를 처음 본 순간을 "삶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 내 눈이 처음으로 생각을 보았다."고 적었다.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데 키리코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 실비아 플라스의 시 The Disquieting Muses는 조르조 데 키리코의 동명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 존 애쉬베리는 Hebdomeros를 초현실주의 문학의 최고봉으로 평한다.
- 이코의 박스 아트는 조르조 데 키리코의 스타일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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