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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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역사
사우디아라비아 제7대 국왕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سلمان بن عبد العزيز آل سعود
Salman bin Abdulaziz Al Saud
사우디아라비아 제7대 국왕 살...
이름
살만 빈 압둘아지즈 빈 압둘라흐만 빈 파이살 빈 투르키 빈 압둘라 빈 무함마드 알사우드
(Salman bin Abdulaziz Al Saud)
출생
재위기간
제7대 국왕
재임기간
제5대 총리
서명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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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 국왕
어머니 수다이리 왕비
배우자
술타나 빈트 투르키 알수다이리 왕비 외 2명
자녀
무함마드 왕세자, 바하라인 왕자, 나세르 왕자 등 13자녀
신체
183cm, 68kg
종교
 
 
 
 
 
 
 
 
 

1. 개요2. 생애
2.1. 리야드 주지사2.2. 권력으로의 부상2.3.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3. 선거 정책4. 종교 정책5. 스포츠?6. 경제7. 대 시아파 강경책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리야드 주지사[편집]

 
 
 
 
 
 
 
 
 
 
 
 
Salman bin Abdul...
젊은 시절의 모습
1935년 12월 31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대 국왕이자 개국군주인 이븐 사우드의 2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살만에게는 수많은 형제들이 있었지만, 그중 국왕이 가장 총애했던 여덟 번째 부인 수다이리 왕비가 낳은 7명의 아들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른바 '수다이리 세븐'이라 불리는 막강한 권력그룹을 형성해 어린 시절부터 유력한 왕위계승후보로 자랄 수 있었다. 무라바 궁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븐 사우드 국왕이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특별히 리야드에 세운 왕실 학교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다. 한발리파의 이슬람 법학에 기반한 와하비즘 해석을 중심으로 이슬람교아랍어를 공부했다. 당대 일반적인 사우디 왕족들이 그렇듯이 서구식 학문을 배우지는 않았고 와하비 성직자 밑에서 쿠란을 낭독하고 암기하는 것이 주요 배움이었다.

살만은 막강한 수다이리 세븐의 일원이었기에 다른 형제들보다도 더 좋은 직책을 받을 수 있었다. 때문에 고작 18세였던 1954년 3월 17일에 리야드주의 부지사로 임명되어 같은 수다이리 세븐의 일원이자 주지사였던 나예프 왕자를 보좌하며 1955년 4월 19일까지 재직했다. 이후 1963년 2월 5일부터는 아예 리야드 주지사로 부임했다. 주지사 시절 살만은 인구 수십만의 중소도시였던 리야드를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대규모 국책 사업과 외자를 유치하고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핵심 창구 역할을 담당했으며, 특히 서구권과의 정치적·경제적 협력을 중시했다. 재임 기간에는 킹 사우드 대학교 출신의 인재들을 고문단으로 적극 영입하기도 했다.

살만은 2011년 11월 5일 퇴임할 때까지 거의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리야드를 이끄는 과정에서 사우디 정치를 좌우하는 삼각축인 성직자 계층, 부족 세력, 그리고 왕가 내부의 이해관계를 정교하게 조율하는 탁월한 정치력을 터득했다. 해외 외교 무대에서도 활발히 움직였다. 1974년에는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를 방문해 걸프 지역 우방국들과의 관계를 다졌고, 1991년 캐나다 몬트리올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미술관 개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접견했으며 같은 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찾아 무슬림 주민들을 위한 구호기금을 전달했다. 1998년에는 아시아 순방길에 올라 파키스탄, 일본, 브루나이, 중국을 차례로 방문했다.

물론 빛나는 업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훗날 살해당한 사우디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에 따르면 살만 왕자는 리야드 주지사이자 '아프간 무자헤딘 지원 사우디 위원회'의 수장으로서 살라프파 극단주의 세력에게 무분별하게 자금을 대주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진흙탕으로 만들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살만의 통치 아래 리야드는 중동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이자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우뚝 섰다. 학교와 대학교, 대형 경기장 등 도시의 대대적인 인프라 확충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거의 반 세기 동안 리야드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키워낸 도시다보니 살만 스스로도 리야드에 대한 애정이 대단히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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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에는 당시 고건 서울특별시장 초청으로 방한하여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과 면담했는데, 비록 즉위하기 한참 전이었지만 사우디아라비아 국왕(또는 차기 후계자)이 될 인물이 방한하여 대한민국 대통령과 직접 면담한 첫 사례였다. #
 
 
 
 
 
 
 
 
 
 
 
 

2.2. 권력으로의 부상[편집]

 
 
 
 
 
 
 
 
 
 
 
 
2011년 11월 5일, 살만은 친형인 술탄 왕세자의 뒤를 이어 국방장관 자리에 올랐다. 이와 함께 국가안보회의(NSC) 위원직도 겸임하게 되었고, 그가 반세기 동안 지켰던 리야드 주지사 자리는 사탐 빈 압둘아지즈에게 돌아갔다.

그가 곧바로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살만의 독보적인 개인적 역량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첫째, 그는 타고난 외교가이자 중재자였다. 2000년 파하드 국왕이 왕실 내부의 골칫거리들을 해결하고 스캔들을 막기 위해 설립한 '왕실 가족 회의(후손 위원회)'의 수장을 맡은 이도 바로 살만이었다. 둘째, 그는 왕실 내에서 이른바 '낀 세대'에 속했기에 원로 왕족들과 젊은 왕자들 사이를 문화적, 사회적으로 매끄럽게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냈다. 마지막으로, 주지사로 장기 집권하며 아랍권은 물론 국제 사회 전반에 걸쳐 탄탄한 인맥을 구축해 둔 상태였다.

국방장관으로서 살만은 바레인에 대한 군사 개입 정책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갔다. 2012년 4월에는 미국과 영국을 잇달아 방문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그의 지휘 아래 사우디의 국방비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2013년에는 영국, 프랑스, 일본을 단숨에 제치고 세계 4위 규모인 670억 달러에 달했다. 2014년에는 이라크시리아에 자리 잡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를 격퇴하기 위해 미군 및 아랍 연합군이 벌인 합동 공습을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했다.

2012년 6월 18일, 친형인 나예프 왕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살만은 지체 없이 그 뒤를 이어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로 책봉되는 동시에 제1부총리직도 거머쥐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왕세자 겸 부총리에 오른 것을 두고 당시 압둘라 국왕이 추진하던 조심스러운 점진적 개혁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란 청신호로 해석했다. 반면, 사우디 내 개혁 성향의 인사들은 살만이 고압적인 다른 왕족들에 비해 한결 유연하고 외교적인 태도를 갖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를 진정한 의미의 '정치 개혁가'로 볼 수는 없다고 확실히 선을 그었다. 이들은 살만 역시 전임 국왕들과 마찬가지로 체제를 뒤흔드는 정치적 변화보다는 경제 성장에만 방점을 찍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2012년 8월 27일, 사우디 왕실은 압둘라 국왕의 해외 순방 기간 동안 살만 왕세자가 국정 전반을 통할한다고 공식 발표하며 그의 굳건한 입지를 증명했다. 한편 그는 같은 해 9월 군 복무 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2013년 2월에는 트위터 계정을 개설하며 대중과의 소통에도 나섰다. 소말리아, 수단, 아프가니스탄 등 빈곤한 이슬람 국가들에 앞장서 자선 사업에 나서며 대중적 이미지를 챙기기도 했다.
 
 
 
 
 
 
 
 
 
 
 
 
살만 국왕
2020년 새로 임명된 사우디 대사 2명을 접견하는 살만 국왕의 모습
2015년 1월 23일, 이복형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이 90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죽은 직후 살만이 79세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았다.[1] 압둘라는 즉위 직후 자신의 이복동생인 무크린을 곧바로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했다.

권좌에 오른 살만은 며칠 뒤인 2015년 1월 30일에 대대적인 물갈이 개각을 단행하며 압둘라 국왕의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 칼리드 빈 알리 빈 압둘라 알후마이단을 새로운 정보수장 자리에 앉혔다. 전임 압둘라 국왕의 총애를 받던 반다르 빈 술탄 왕자를 국가안보회의 보직에서 해임하고 기존의 국왕 고문직도 날려버렸으며, 압둘라 국왕의 아들들인 투르키 리야드 주지사와 미샬 메카 주지사마저 가차 없이 자리에서 내쫓았다. 반면 알리 알나이미 석유광물자원부 장관과 사우드 알파이살 외무장관, 이브라힘 알아사프 재무장관 등 핵심 관료들은 자리를 지키게 했다. 또한 연금 수급자와 학생을 아우르는 모든 사우디 국가 공무원과 군인들에게 두 달 치 급여에 해당하는 특별 보너스를 화끈하게 쏘며 민심을 챙겼고, 국민들에게 '기도할 때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낭만적인 당부도 곁들였다.

같은 해 2월, 살만은 6일간 중동을 순방 중이던 영국의 찰스 왕세자를 접견했다. 시간이 훌쩍 흘러 2021년 4월에는 1997년부터 줄곧 제다(Jeddah)의 주지사 자리를 지켜온 미샬 빈 마지드 알 사우드 왕자가 장관급 예우를 받는 국왕 고문으로 전격 발탁되기도 했다.

살만 국왕은 즉위 후 차기 왕위 계승권자인 초대 국왕 이븐 사우드의 35번째 아들 1945년생 무크린 빈 압둘 아지즈를 왕태제 자리에서 해임하고, 2015년 4월 29일 칙령으로 무함마드 빈 나예프 내무장관을 새 왕세자로 임명했다. 나예프 왕세자는 살만 국왕의 동복형제 나예프 빈 압둘 아지즈의 아들로, 사우디아라비아 초대 왕위 계승 이후 두번째로 왕위 계승에서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셈이다. 이븐 사우드의 아들 세대는 다들 나이가 너무 들어버렸기 때문에 세대교체 자체는 이미 예측된 부분이지만, 나예프 왕세자가 국왕이 된 후의 왕위계승이 부자상속이 될지 다시 형제상속이 될지는 미지수였으나.. 결국 나예프 왕세자마저 2년 뒤에 쫒아내고 본인의 친아들 무함마드 빈 살만을 왕세자로 올리면서 친자상속을 확정지었다.

게다가 이 세대교체에도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초대 국왕 이븐 사우드의 왕비들 중 제8비 수다이리 왕비의 소생들로 구성된 '수다이리 파벌'이 다시 사우디의 정권을 장악한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 # 살만 현 국왕, 파드 5대 국왕, 나예프 현 왕세자의 부친 나예프 왕자는 수다이리 왕비의 소생이며, 전 압둘라 국왕과 해임된 무크린 왕자는 수다이리 왕비의 소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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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국왕과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부자
2017년 6월 21일 살만 국왕이 제1왕태자이자 조카였던 나예프마저도 왕세자 자리에서 쫓아내고 친아들 무함마드 빈 살만을 왕세자로 삼는 칙령을 내렸다. 왕위를 더 이상 친형제들끼리 돌아가며 계승하지 말고 본인의 아들에게 직접 물려주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한 것. 이에 따라 왕위 계승에 있어서 세대교체는 물론이거니와 왕위 승계를 확정하였다. #, #

2020년에 담낭 염증으로 입원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고 했고(#), 열흘 만에 퇴원했다(#).

2022년 9월 27일에 총리직을 무함마드 빈 살만에게 넘기게 되었다. # 이렇게 대외 활동에서 물러나서 무함마드 빈 살만이 사실상의 실권자가 되었다.
 
 
 
 
 
 
 
 
 
 
 
 

3. 선거 정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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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여성투표를 2015년에 시행하기로 결정하였고 2015년 12월에 첫 여성 투표가 이루어졌다. 단, 여러 정책으로 인해 남성 유권자가 참가하는 대면 유세를 하지 못하는 등 선거 운동에 제한이 많았으며, 특히 여성 후보들은 남성 친척들을 통해서만 남성 유권자들과 간접 대화를 할수 있다.

또한 당선되더라도 지방의회 의원의 역할이 대단히 제한적이다. 지방의회는 예산을 다룰 권한이 없고 쓰레기 처리나 정원 규모 제한 같은 단순한 업무만 처리하며, 사우디 정부가 여성이 운전할 권리를 주장했던 사우디 여성들을 후보 심사에서 탈락시키기도 했다. 그래도 3년 뒤인 2018년에 여성 운전을 허용하긴 했다.

의원이라고 해서 뭔가 국회의원 같은 최고급 위치일 것 같지만 의원이 아니라 그냥 환경미화원이라고 보면 된다. '의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내각의 극소수 고급 정치인들이다.
 
 
 
 
 
 
 
 
 
 
 
 

4. 종교 정책[편집]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은 백화점엔 여성 탈의실이 없어서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며[2], 생리 중일 때는 쿠란에 손을 댈 수 없다. 외출할 때는 아바야[3]로 온몸을 가려야 하고, 혼자 은행 계좌 개설도 안 되며, 2018년 법 개정 전까지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의 운전이 금지되는 나라였다.[4] 대학 졸업과 직업은 허용되긴 하지만 학교에 등록하거나 직업을 구하거나 해외 여행을 가는 등 기본 생활 영위에 대해서도 남편이나 아버지, 남자 형제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여성들은 낯선 남성과 대화는 물론 함께 자리를 하는 것도 금기시된다. 그래서 쇼핑몰이나 거리같은 공공장소에서 남성과 여성이 나란히 있는데 왠지 부부가 아닌 것 같으면 여지없이 종교경찰이 나타나 신분증 제시를 요구한다. 만약 부부가 아닐 경우 자국인은 철창행에 처해지며, 외국인은 추방을 당한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해석하고 적용해서 살인, 강간, 마약 밀수뿐만 아니라 간통, 배교와 같은 범죄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고 있으며, 18살 미만 청소년 범죄자들에 대해서도 사형 집행을 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형집행 대부분은 참수형으로 이뤄지며, 이들 중 일부는 화형을 당하기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범죄를 예방한다는 등의 구실로 사형당한 시체의 일부를 대중에게 공개하기도 한다.

다만 문제는 죄가 확실한 사람이 처벌받는 게 아니라 고문까지 하면서 죄를 뒤집어 씌워서 죽이는 사례가 있다는 점이다. 국제 엠네스티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수감자들에게 별의 별 무자비한 고문을 통해 억지로 자백을 받아내고, 사형선고를 내린다고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2014년 8월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은 두 형제를 대마초 밀수 혐의로 붙잡아 무자비한 고문을 한 뒤 자백을 받아냈는데 결국 이 형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국제 앰네스티는 사실확인을 위해 사우디 내무부와 법무부 장관들과 접촉하려 했으나 아무 답변도 듣지 못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은 이러한 일들이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앰네스티 소속 연구원들의 입국을 불허하고 있다. #

국제 인권단체인 앰네스티는 사우디에서 2015년 들어서 최소 151명이 사형됐다며 이 수치는 20년 만에 가장 많은 수준이라고 밝혔다. 또한 지난 30년 동안 이런 식으로 사형집행을 받은 범죄자 중 절반이 외국인인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국제 앰네스티는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이 사형당한 이유가 많은 사형수들이 아랍어가 서툴러 법원에서 재판상황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특히나 2012년 3월에 겨우 15살의 나이에 정부 반대 시위행렬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압둘라 알자헤르가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으며 곧 참수형을 당했다. #
 
 
 
 
 
 
 
 
 
 
 
 

5. 스포츠?[편집]

 
 
 
 
 
 
 
 
 
 
 
 
흔히 전두환3S 정책처럼 스포츠를 이용해 민중들의 눈을 돌린다고 하지만 사우디의 왕실은 사실상 북한과 비슷한 국가 체제라 그런 제도 차제가 필요 없다. 국정 운영에만 신경썼다. 왕족이 대부분 그렇듯 전통적이고, 원칙척이고, 보수적이기도 해서 예체능을 약간 광대 쯤으로 보고 경시여기는 것도 있고. 태어날 때부터 비유가 아니라 진짜 왕족인 로열패밀리이니 당연하긴 하다. 고고학은 관심이 있고 현재에도 연구를 하고 있다. 고전 도서 수집을 많이하고 수집액수가 1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6. 경제[편집]

 
 
 
 
 
 
 
 
 
 
 
 
경제 상황은 좋진 않은 상황에 처해있는데, 사우디아라비아의 재무부 발표에 따르면 사우디는 2015년에 3670억 리얄[5]에 달하는 재정적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렇게 저유가가 계속됨으로 인해 2015년 말에는 전기와 수도 등에 대한 보조금을 삭감하는 등의 긴축 정책을 실시해야 했다.

일반 민중들은 군주에 대한 평가 조차 두려워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일반 민중들을 억압하지는 않고 아껴주고 있다. 어찌보면 왕족으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인 셈.
 
 
 
 
 
 
 
 
 
 
 
 

7. 대 시아파 강경책[편집]

 
 
 
 
 
 
 
 
 
 
 
 
2015년 3월, 예멘 내전에 개입하여 사우디군을 파병, 시아파 무장단체 후티 반군과 알리 압둘라 살레 전 대통령의 친위 세력과 공습을 벌였다. 수니파 10개국이 참여하는 연합군을 결성한 뒤 '단호한 폭풍 작전'을 펼쳤는데, 이는 걸프 전쟁 이후 사우디 공군이 타국을 향해 단독으로 감행한 최초의 대규모 군사작전이기도 했다. 그렇게 막대한 돈을 써가며 후티 반군에게 밀리는 수니파 정부군을 지원하였으나 사우디군보다 장비가 열악한 후티 반군에게 패배를 거듭하며 고전하고 있었다.

2011년 아랍의 봄으로 2011년 바레인 봉기가 발생해 시아파 국민이 준동하는 등 혁명 위기에 빠진 바레인에 대한 군사개입도 선대 국왕의 대를 이어 계속하고 있다.

2016년 새해가 밝자마자 1월 2일 시아파 지도자 님르 바크르 알님르(Nimr al-Nimr)를 반(反) 정부 시위 및 테러 주도 혐의로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처형해 버렸고, 이에 분노한 이란 시아파 강경 보수파 시위대가 이에 항의해서 사우디 대사관과 총영사관을 공격해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랍의 봄 당시 시리아 내전으로 내전에 돌입한 시리아에서 살라프파 계열 알 누스라 전선이슬람주의 무장단체 아흐라르 알 샴이 주도하던 수니파 반군 연합체 정복의 군대를 사우디아라비아가 후원해 서방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1월 6일 사우디는 이란과의 국교단절을 선언했다. 이후 진행은 사우디아라비아-이란 분쟁 항목 참조.

이러한 강경한 대(對) 이란 외교 노선은 살만 국왕의 묵인 하에 무함마드 빈 살만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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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헤드 타미미
사미 유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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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산 오우다
바셈 유세프
 
 
 
 
 
 
 
 
 
 
 
 
[1] 이렇게 보면 압둘라가 오래했을 것 같지만 사실 압둘라 국왕도 81세에 즉위해서 9년 밖에 재위하지 못했다. 다만 압둘라는 전임인 이복형 파흐드가 1996년부터 와병 상태여서 집권 자체는 19년 동안 했다.[2] 심지어 옷을 갈아입고 그 옷이 어울리는지 지켜보는 것조차 금지하는데 일단 사놓고 집에 가서 입어본 뒤 마음에 안 들거나 사이즈가 다르면 환불하거나 교환을 하러 또 와야 한다.[3] 이슬람 여성의 전통 의상[4] 금지할 당시 여성운전이 허용된 오만이나 쿠웨이트 등 이웃 아랍국가 출신 여성들까지도 사우디 국경 지역에서 차를 타고 사우디로 육로 입국을 하려다가 국경 검문소의 사우디 군인들에 의해 여성의 운전을 금지하는 법규를 위반했다고 입국을 불허하기도 했다.[5] 약 114조 3860억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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