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화
최근 수정 시각:
분류
- 1955년 출생
- 울산광역시 출신 인물
- 청량초등학교 출신
- 남창중학교 출신
- 동래고등학교 출신
- 고려대학교 출신
- 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선수
- 센터백
- 스트라이커
- 미드필더
- 1978년 데뷔
- 1987년 은퇴
- 포항 스틸러스/은퇴, 이적
- 상무 축구단/전역
- 할렐루야 축구단/은퇴, 이적
- K리그1 MVP
-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 1980 AFC 아시안컵 쿠웨이트 참가 선수
- 1984 AFC 아시안컵 싱가포르 참가 선수
- 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 1978 방콕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참가 선수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 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감독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제주SK FC/역대 감독
- 포항 스틸러스/역대 감독
- 다롄 스더/역대 감독
- 경남 FC/역대 감독
- 감독 대행/축구
- AFC 챔피언스 리그 엘리트 우승 감독
- 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코치
박성화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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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화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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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화의 기타 사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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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 감독 | |||
![]() | |||
이름 | 박성화 朴成華 | Park Sung-wha | ||
출생 | |||
국적 | |||
신체 | |||
주발 | 오른발 | ||
직업 | |||
학력 | |||
소속 | 선수 | ||
감독 |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1988~1989) 현대 호랑이 (1989~1991 / 코치) 유공 코끼리 (1992 / 코치) 유공 코끼리 (1992~1994) 포항 스틸러스 (1996~2000) 대한민국 U-20 대표팀 (2001~2005) 대한민국 대표팀 (2003~2004 / 코치)[겸임] 부산 아이파크 (2007) 대한민국 U-23 대표팀 (2007~2008) 다롄 스더 (2010~2011) 미얀마 대표팀 (2011~2013) 미얀마 U-23 대표팀 (2012~2013)[겸임] 경남 FC (2015) 동래고등학교 (2018~2020) | ||
국가대표 | 107경기 26골 (대한민국 / 1975~1984) | ||
1975년 성인대표로 발탁된 후 조영증과 스토퍼-스위퍼 콤비를 이루어 1980년 AFC 아시안컵,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예선, 1984년 AFC 아시안컵 등에 출전하며 103경기 26골을 기록했다. 1979년 6월 16일에 열린 한일전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4-1 승리.) 차범근과 더불어서 유이하게 A매치 한일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선수. 하지만 아쉽게도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예선 때는 무릎 연골 부상으로 수술을 받아 국가대표팀에 들지 못했고, 동료들이 월드컵에 나가는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다.
은퇴 후 1988년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에서 지휘봉을 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1989년 현대 호랑이, 유공 코끼리에서 코치 생활을 했으며, 1992년 김정남 감독의 사퇴 이후 후임으로 3시즌 동안 유공을 지도했다.
1989년 현대 호랑이, 유공 코끼리에서 코치 생활을 했으며, 1992년 김정남 감독의 사퇴 이후 후임으로 3시즌 동안 유공을 지도했다.
1996년 친정팀 포항 스틸러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성적을 내기 시작하였다. 1996년 FA컵 우승, 아디다스컵 준우승, 1997년 프로스펙스컵 준우승,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 아시아 슈퍼컵 준우승, 그리고 1998년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 아시아 슈퍼컵 준우승 등 수많은 타이틀을 거머쥐며 지도력을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2000년 여름 들어 성적 부진으로 사임했다.
하지만 2000년 여름 들어 성적 부진으로 사임했다.
2001년 대한민국 U-20 청소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02년 AFC U-20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였으며, 지도력을 인정받아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부임하자 수석 코치로 선임되어 청소년 대표팀 감독과 대표팀 수석 코치를 겸직하였다.[6] 이후 코엘류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경질되자 감독 대행을 맡아 후임 감독인 조 본프레레 감독이 선임되기 전까지 4경기[7]를 지휘하였다. 그 후 국가대표팀 감독 대행직을 사직하였고, 청소년팀 감독직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아래는 대표팀 감독 대행으로서의 전적
아래는 대표팀 감독 대행으로서의 전적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 | ▶ | |||
번호 | 포지션 | 이름 | 생년월일(나이)[8] | U-20[9] | 소속팀[10] | 비고 |
1 | GK | 1983년 06월 28일 (20세) | 19(-4) | |||
2 | DF | 1984년 07월 29일 (19세) | 7(0) | |||
3 | DF | 1983년 11월 11일 (20세) | 12(0) | |||
4 | DF | 1983년 07월 29일 (20세) | 15(0) | |||
5 | DF | 1984년 02월 21일 (19세) | 19(2) | |||
6 | DF | 1985년 02월 16일 (18세) | 7(0) | |||
7 | MF | 1983년 09월 01일 (20세) | 20(3) | |||
8 | MF | 1984년 10월 22일 (19세) | 4(0) | |||
9 | FW | 1984년 04월 23일 (19세) | 21(15) | |||
11 | MF | 1983년 04월 17일 (20세) | 7(1) | |||
13 | MF | 1984년 03월 29일 (19세) | 6(2) | |||
15 | MF | 1985년 07월 10일 (18세) | 5(0) | |||
16 | MF | 1984년 09월 28일 (19세) | 6(0) | |||
17 | DF | 임유환 | 1983년 12월 02일 (19세) | 14(0) | ||
19 | DF | 1983년 04월 25일 (20세) | 9(0) | |||
20 | DF | 1983년 03월 09일 (20세) | 6(0) | |||
감독 | ||||||
2003년 U-20 월드컵에서 미국, 파라과이, 독일과 함께 F조에 편성되었다. 1차전에는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독일을 맞아 51분 이호진, 70분 이종민의 골을 앞세워 2-0으로 승리하였다. 이후 2차전 파라과이전에서 0-1로 패했고, 3차전 미국전에서도 0-2로 패했지만 16강은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전에서 0-2로 뒤지자 선수들이 아예 대놓고 볼을 뒤로 돌렸다. 조 3위만 해도 16강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역시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기에 관중들은 이 짜고치는 담합 경기를 보고 야유를 퍼부었다. 그렇게 16강에서 만난 팀이 하필 일본이었다. 최성국이 39분 선제골을 넣으며 AFC U-20 축구 선수권 대회에 이어 무난히 이기고, 8강에 진출하는 듯 싶었으나 82분 사카타에게 동점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결국 연장에 돌입하였고, 105분에 또 사카타에게 골을 먹히며[15] 1-2로 패하면서 16강에서 탈락하였다. 이 패배 이후 "세계의 벽은 높았다"는 역사에 남을 인터뷰[16]를 남겼다.
마냥 세계의 벽이 높았다고 하기엔 이 대회에 출전한 선수 중에서 김영광, 오범석, 김치우, 김진규, 이호, 정조국, 최성국, 조원희, 박주영, 김동현 등 이후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되어 활약한 선수가 무더기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 명단에서 라리가 2호와 3호도 나왔다. 어떻게 보면 황금세대로 볼 수 있었으나, 졸전을 거듭하며 16강에 그쳤다.
마냥 세계의 벽이 높았다고 하기엔 이 대회에 출전한 선수 중에서 김영광, 오범석, 김치우, 김진규, 이호, 정조국, 최성국, 조원희, 박주영, 김동현 등 이후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되어 활약한 선수가 무더기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 명단에서 라리가 2호와 3호도 나왔다. 어떻게 보면 황금세대로 볼 수 있었으나, 졸전을 거듭하며 16강에 그쳤다.
번호 | 포지션 | 이름 | 생년월일(나이)[17] | U-20[18] | 소속팀[19] | 비고 |
1 | GK | 1986년 12월 26일 (18세) | 21(-16) | |||
2 | DF | 1986년 01월 07일 (19세) | 21(0) | |||
3 | DF | 1985년 09월 17일 (19세) | 19(0) | |||
4 | DF | 1985년 12월 18일 (19세) | 24(0) | |||
5 | DF | 1986년 12월 15일 (18세) | 23(0) | |||
6 | DF | 1985년 02월 16일 (20세) | 23(2) | |||
8 | MF | 1985년 02월 28일 (20세) | 29(5) | 주장 | ||
9 | MF | 1985년 07월 24일 (19세) | 16(2) | |||
10 | FW | 1985년 07월 10일 (19세) | 23(17) | |||
11 | FW | 1985년 04월 11일 (20세) | 9(3) | |||
12 | GK | 1985년 01월 04일 (20세) | 5(-5) | |||
13 | MF | 1986년 07월 18일 (18세) | 1(0) | |||
14 | MF | 1987년 06월 24일 (17세) | 21(1) | |||
15 | MF | 황규환 | 1986년 06월 18일 (18세) | 11(0) | ||
16 | FW | 1985년 04월 03일 (20세) | 6(1) | |||
17 | DF | 1985년 07월 25일 (19세) | 6(0) | |||
18 | FW | 1985년 03월 14일 (20세) | 23(8) | |||
19 | FW | 1987년 03월 27일 (18세) | 15(4) | |||
20 | DF | 1986년 04월 25일 (19세) | 21(3) | |||
21 | GK | 김대호 | 1986년 04월 15일 (19세) | 5(-2) | ||
감독 | ||||||
이후 2004년 AFC U-20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다시 한번 우승하며 2005년 U-20 월드컵에 진출하였다. 이번에는 브라질, 나이지리아, 스위스와 F조에 속했다. 1차전 스위스를 맞아 신영록이 25분 선제골을 넣었으나 불과 3분만에 안티치에게 동점골을 허용하고, 33분 폰란텐에게 역전 골을 허용하며 1-2로 패하였다. 2차전 나이지리아전은 대역전승을 일궈냈다. 18분 아부에게 선제골을 허용하고 0-1로 끌려갔고, 시간은 계속 흘러 지는 듯 하였다. 그런데 89분이 되어 박주영이 동점골을 넣었고, 3분뒤 백지훈이 역전골을 넣으며 2-1로 승리하였다. 2차전을 이기며 16강 진출에 희망을 가졌으나 3차전에서 브라질에게 0-2로 패하면서 또다시 조3위로 내려앉았다. 각 조 3위간 순위결정에서 6개조에서 5위를 차지하며 이번에는 16강 진출에도 실패하였다. 이 실패로 박성화 감독은 청대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지난 대회에서 월반하여 출전한 김진규와 박주영을 제외하면 2003년 때보다 추후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선수가 눈에 띄게 적어져 2년 전보단 전력이 많이 감소하였다. 선수단도 평균 19.0세로 젊은 편이었다. 하지만 당시 괴물로 불렸었던 박주영이 있었고, 비록 선수단 연령은 어려도 선수단에 포함된 21명의 선수들이 U-20 경기를 평균 16.8경기를 출전하여 많은 경기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많은 축구팬들이 기대감을 갖기엔 충분했었다. 그러나 박주영은 나이지리아전을 제외하면 2005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국가대표팀에 입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괴물같은 퍼포먼스를 본선에서 보이지 못했고, 기대했던 박주영이 부진하니 이를 해결해 줄 선수마저도 없었다. 한편 정성룡과 이근호와 같이 꾸준하게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한 선수가 이 때 엔트리에 들었었지만, 두 선수는 당시 유망주에 불과하여 본선에선 기용되지 않았다.[21]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 대회에서 실패하였음은 분명하지만, 이 대회 준우승 팀인 나이지리아에 승리했다는 점은 나름의 위안거리이다.
한편 이 무렵 축구협회에 수비전술에 대한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일반적으로 재미없고 뻥축구 스타일의 무전술 축구를 한다고 비판하던 축구팬들의 비판적인 시각, 편견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어서 놀라게 했다. 칼럼만 읽어보면 이론적으로는 정말 명장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 [박성화 칼럼] "수비전술에 대해 논한다"① [박성화 칼럼] “수비전술에 대해 논한다”②
지난 대회에서 월반하여 출전한 김진규와 박주영을 제외하면 2003년 때보다 추후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선수가 눈에 띄게 적어져 2년 전보단 전력이 많이 감소하였다. 선수단도 평균 19.0세로 젊은 편이었다. 하지만 당시 괴물로 불렸었던 박주영이 있었고, 비록 선수단 연령은 어려도 선수단에 포함된 21명의 선수들이 U-20 경기를 평균 16.8경기를 출전하여 많은 경기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많은 축구팬들이 기대감을 갖기엔 충분했었다. 그러나 박주영은 나이지리아전을 제외하면 2005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국가대표팀에 입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괴물같은 퍼포먼스를 본선에서 보이지 못했고, 기대했던 박주영이 부진하니 이를 해결해 줄 선수마저도 없었다. 한편 정성룡과 이근호와 같이 꾸준하게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한 선수가 이 때 엔트리에 들었었지만, 두 선수는 당시 유망주에 불과하여 본선에선 기용되지 않았다.[21]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 대회에서 실패하였음은 분명하지만, 이 대회 준우승 팀인 나이지리아에 승리했다는 점은 나름의 위안거리이다.
한편 이 무렵 축구협회에 수비전술에 대한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일반적으로 재미없고 뻥축구 스타일의 무전술 축구를 한다고 비판하던 축구팬들의 비판적인 시각, 편견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어서 놀라게 했다. 칼럼만 읽어보면 이론적으로는 정말 명장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 [박성화 칼럼] "수비전술에 대해 논한다"① [박성화 칼럼] “수비전술에 대해 논한다”②
2007년 7월 중순 부산 아이파크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부산 아이파크 감독이 된지 불과 17일만에 물러나며 핌 베어백 감독의 사퇴 후 공백이었던 올림픽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2001~2005년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으며 해당 연령대 선수들을 많이 알고 있는 그가 제일 적합하다는 판단이 있었다.
박성화가 갑작스럽게 떠나버린 자리는 김판곤이 감독 대행으로 하반기를 지휘했고, 시즌 종료 이후 황선홍을 정식 감독으로 선임했다. 이 과정에 대하여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꽤 말이 많았다. 이에 대해선 본인 의지가 아니라 축구협회에서 사실상 결정해두고 답정너 스타일로 오라고 압력을 넣고 강권해서 마지 못해 갔다는 설도 있다. ‘박성화호’ 후다닥 출범 왜?… 박감독도 “내 의지 아니다”
박성화 감독과 대표팀 코치를 같이 했던 최강희 감독도 훗날 2011년 축구협회의 강권에 가까운 설득으로 전북 현대 모터스 감독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겸임하는 전례에 없는 상황을 몸소 겪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부임한지 단 2주만에 부산 감독을 그만두고 떠나는 모양새가 그다지 좋지 않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2024년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경질되면서 후임 대표팀 감독 선임 절차가 과거 최강희 감독을 빼내오던 방식처럼 흘러갈 모양새가 되어가고 있어 우려가 있었고,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박성화호에서 수석 코치를 지내기도 했던 홍명보가 2024년 7월 울산 HD FC감독으로 시즌 중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제75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논란거리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홍명보호(성인 2기)/선임 과정 참조.
박성화가 갑작스럽게 떠나버린 자리는 김판곤이 감독 대행으로 하반기를 지휘했고, 시즌 종료 이후 황선홍을 정식 감독으로 선임했다. 이 과정에 대하여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꽤 말이 많았다. 이에 대해선 본인 의지가 아니라 축구협회에서 사실상 결정해두고 답정너 스타일로 오라고 압력을 넣고 강권해서 마지 못해 갔다는 설도 있다. ‘박성화호’ 후다닥 출범 왜?… 박감독도 “내 의지 아니다”
박성화 감독과 대표팀 코치를 같이 했던 최강희 감독도 훗날 2011년 축구협회의 강권에 가까운 설득으로 전북 현대 모터스 감독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겸임하는 전례에 없는 상황을 몸소 겪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부임한지 단 2주만에 부산 감독을 그만두고 떠나는 모양새가 그다지 좋지 않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2024년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경질되면서 후임 대표팀 감독 선임 절차가 과거 최강희 감독을 빼내오던 방식처럼 흘러갈 모양새가 되어가고 있어 우려가 있었고,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박성화호에서 수석 코치를 지내기도 했던 홍명보가 2024년 7월 울산 HD FC감독으로 시즌 중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제75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논란거리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홍명보호(성인 2기)/선임 과정 참조.
한편 2008 베이징 올림픽의 남자축구 최종예선에서는 우즈벡, 바레인, 시리아와 한 조가 된 상태였다. 최종예선에서는 무조건 조 1위를 해야만 본선에 진출한다. 초반 3경기에선 모두 이기며 잘 나갔지만, 바레인이 나머지 경기들을 다 이기며 바짝 쫓아왔고, 시리아 원정과 우즈벡 원정에서 무득점으로 비겨 결국 마지막 홈경기 바레인과의 경기는 패하는 쪽은 무조건 끝장이 나는 단두대 매치로 벌어졌다.[22] 결과는 여기서도 또 0-0 무승부. 그나마 한국은 12점, 바레인은 11점, 단 1점 차이로 어렵사리 본선에 진출했다. 사실 바레인이 시리아와 원정에서 이겨놓고 홈에서 비겼기에 망정이었지 만일 그 경기도 잡았으면 무조건 바레인에게 이겼어야 본선에 진출하고 비겨도 승점에서 뒤져(이렇게 되면 바레인이 승점 13점, 한국은 12점) 무패로 탈락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하여간 그렇게 본선엔 진출하긴 했지만, 하도 실망스러운 경기력에 축구팬들이 크게 실망하며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기성용의 그 유명한 답답하면 너희들이 뛰어보던지 사건이 터졌다. 본선에서는 이탈리아, 카메룬, 온두라스와 D조에 편성되게 되었다. 1차전 카메룬과의 경기는 박주영이 선제골을 넣었으나 지키지 못하고 1-1로 비겼다. 2차전 이탈리아전에서 0-3으로 대패하며 순식간에 8강 진출에 암울한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3차전에서 김동진의 골로 0-1로 이겼지만[23] 2승 1무 이탈리아, 1승 2무 카메룬에 밀려 조 3위, 대회 10위로 8강 진출에 실패하였다. 탈락 이후 올림픽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박성화는 안 그래도 한해 전에 부산 감독에 선임돼 놓고 2주만에 올림픽 대표팀으로 느닷없이 떠나버리면서 부산 팬들에게는 단단히 찍힌 상태였는데, 그렇게 부임한 올림픽 대표팀마저도 실패하면서 결과적으로 더 욕을 먹었다. 실제로 올림픽 직후인 2008년 9월 요르단과의 국가대표팀 평가전은 상대가 주목할 만한 팀이 아니란 점을 감안해도 서울에 있는 상암구장에서 하는데도 6만 이상의 수용규모에 불과 16,533명만 찾아 비어 있는 관중석이 굉장히 많았다. 이후 북한과의 중립지역 경기에서 1-1로 비기고 박지성이 주장을 맡은 아랍에미리트와의 경기에서 4-1로 낙승을 거두며 분위기를 쇄신한 2008년 10월 이전까지는 최종예선에서 사우디와 이란에게 밀리며 한국 축구가 꼼짝없이 망하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가 가득했다. 이로 인하여 박성화 본인도 한동안 한국 축구계에서 활동하기 힘들어졌다.
2010년 다롄 스더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내지 못하였고, 2011년 물러났다. 이후 미얀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2012년부터는 미얀마 U-22 대표팀도 함께 지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2013년 12월 어이없는 실수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상황은 이렇다.
당시 미얀마에서 열린 27회 동남아시안게임에서 미얀마는 2승 1무 승점 7점 골득실 +5을 기록하며 조 2위에 있었다. 조 3위 인도네시아는 1승 1무 1패로 승점 4점 골득실 -2를 기록하고 있었고, 이변이 없는 한 조 2위 자리를 지켜 4강 진출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경기인 두 팀 간의 맞대결이 남았는데, 통상적으로는 FIFA 대회는 승점이 같을 경우 골득실이 우선시된다. 하지만 이 대회는 FIFA 주관 대회와 달리 유로 대회처럼 승자승이 골득실보다 우선시되는 대회였고, 박성화 감독은 이 부분을 잘못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이끄는 팀이 참가한 대회의 규칙도 몰랐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미얀마 축협이나 국대 코치진 등이 담합해서 박성화를 몰아내기 위해 일부러 규정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거나 잘못 알려주지 않았나 하는 의혹도 있다. 주전을 대거 뺐음에도 경기 종료 순간까지 박성화 감독에게 아무도 말을 안 해 준 듯한 상황이기에 더더욱. 하지만 감독 스스로가 규정을 숙지했다면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니 결국은 의미없는 책임전가일 뿐이다. 꼭꼭 숨겨진 것도 아니고 인터넷 검색만 해도 찾을수 있는 정보이니. 그리고 설령 정말로 득실차만 유지해도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가정해도, 대놓고 승패는 상관없단 식으로 홈에서 주전 빼고 뛰는 것도 미얀마 축구팬들 입장에선 기분 좋을 일은 아니다.
결국 박성화 감독은 대패하지만 않으면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주력 선수들은 체력 보전을 위해 엔트리에서 대거 제외시켰고, 이 착각은 경기 종료 시점까지 이어지면서 경기는 0:1로 패배한 후 승자승 전적에 따라 조 3위로 밀려나 탈락했다. 박성화 감독은 심지어 4강 진출이 확정된 것으로 착각하며 기뻐하기까지 했고, 자국에서 열린 대회에서 어이없게 4강행이 날아간 미얀마의 축구팬과 관계자들은 분노하며 소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박성화 감독은 경기 종료 후에야 상황을 인지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본인이 착각했음을 인정했으며, 당연하게도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당시 미얀마에서 열린 27회 동남아시안게임에서 미얀마는 2승 1무 승점 7점 골득실 +5을 기록하며 조 2위에 있었다. 조 3위 인도네시아는 1승 1무 1패로 승점 4점 골득실 -2를 기록하고 있었고, 이변이 없는 한 조 2위 자리를 지켜 4강 진출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경기인 두 팀 간의 맞대결이 남았는데, 통상적으로는 FIFA 대회는 승점이 같을 경우 골득실이 우선시된다. 하지만 이 대회는 FIFA 주관 대회와 달리 유로 대회처럼 승자승이 골득실보다 우선시되는 대회였고, 박성화 감독은 이 부분을 잘못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이끄는 팀이 참가한 대회의 규칙도 몰랐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미얀마 축협이나 국대 코치진 등이 담합해서 박성화를 몰아내기 위해 일부러 규정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거나 잘못 알려주지 않았나 하는 의혹도 있다. 주전을 대거 뺐음에도 경기 종료 순간까지 박성화 감독에게 아무도 말을 안 해 준 듯한 상황이기에 더더욱. 하지만 감독 스스로가 규정을 숙지했다면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니 결국은 의미없는 책임전가일 뿐이다. 꼭꼭 숨겨진 것도 아니고 인터넷 검색만 해도 찾을수 있는 정보이니. 그리고 설령 정말로 득실차만 유지해도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가정해도, 대놓고 승패는 상관없단 식으로 홈에서 주전 빼고 뛰는 것도 미얀마 축구팬들 입장에선 기분 좋을 일은 아니다.
결국 박성화 감독은 대패하지만 않으면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주력 선수들은 체력 보전을 위해 엔트리에서 대거 제외시켰고, 이 착각은 경기 종료 시점까지 이어지면서 경기는 0:1로 패배한 후 승자승 전적에 따라 조 3위로 밀려나 탈락했다. 박성화 감독은 심지어 4강 진출이 확정된 것으로 착각하며 기뻐하기까지 했고, 자국에서 열린 대회에서 어이없게 4강행이 날아간 미얀마의 축구팬과 관계자들은 분노하며 소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박성화 감독은 경기 종료 후에야 상황을 인지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본인이 착각했음을 인정했으며, 당연하게도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2014년 12월 26일 경남 FC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2015 시즌 충주 험멜, 안산 경찰청과 꼴지다툼을하며 경남 팬들에게 실컷 까이는중. 그러다 같은 해 11월 13일 경질 통보를 받으며 남은 경기를 치르고 물러나게 되었다. 후임은 그 유명한 김종부.
하지만 경남의 부진한 성적은 단지 박성화 감독만의 지도력 문제만이 아니라 구단 운영진 측의 제대로 된 지원 부재 탓이라는 말이 종종 나왔고[24] 그 우려대로 성적이 좋지 않자 박성화 감독 측에서 이미 스스로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날 준비를 하며 잔여연봉에 대한 합의서를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구단에서 일방적으로 경질했으며 구단에서 마련해준 집을 11월 안으로 비우라는 등 매몰차게 대우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더 충격적인 주장을 했는데 시즌 중 승리수당 지급을 일방적으로 하지 않으려 했고 심지어 팀의 주득점원으로 활약한 외국인 선수 스토야노비치의 수당 옵션인 시즌 10골 보너스를 주지 않으려고 9골째 넣자 더 이상 출장을 못하게 하고 내보냈다고 폭로를 하며 법적 싸움도 불사할 것임을 천명했다. 실제로 스토야노비치는 정말로 10월 중순을 마지막으로 팀에서 나간 상태여서 경남 FC는 축구계에서 비판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남의 부진한 성적은 단지 박성화 감독만의 지도력 문제만이 아니라 구단 운영진 측의 제대로 된 지원 부재 탓이라는 말이 종종 나왔고[24] 그 우려대로 성적이 좋지 않자 박성화 감독 측에서 이미 스스로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날 준비를 하며 잔여연봉에 대한 합의서를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구단에서 일방적으로 경질했으며 구단에서 마련해준 집을 11월 안으로 비우라는 등 매몰차게 대우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더 충격적인 주장을 했는데 시즌 중 승리수당 지급을 일방적으로 하지 않으려 했고 심지어 팀의 주득점원으로 활약한 외국인 선수 스토야노비치의 수당 옵션인 시즌 10골 보너스를 주지 않으려고 9골째 넣자 더 이상 출장을 못하게 하고 내보냈다고 폭로를 하며 법적 싸움도 불사할 것임을 천명했다. 실제로 스토야노비치는 정말로 10월 중순을 마지막으로 팀에서 나간 상태여서 경남 FC는 축구계에서 비판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1] 중앙 공격수 , 수비형 미드필더[겸임] 2.1 2.2 [4] 스토퍼뿐만 아니라 미드필더, 중앙 공격수로도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었다.[5] 할레루야에 있는 동안 박상인과의 콤비가 좋아 둘이 많은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고 한다.[6] 이 당시 최강희 코치와 함께 대놓고 코엘류 감독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선수들을 지도하는 듯 월권을 행사해서 국가대표팀을 개판으로 만들어 놨다.[7] 그중에는 베트남과의 월드컵 예선전이 한 경기 포함되어 있었다.[8] 당시 나이[9] 대회 개막 기준이며, (괄호) 안은 골키퍼인 경우 실점이고 필드플레이어인 경우 득점이다.[10] 당시 소속[영구제명] 11.1 11.2 11.3 11.4 11.5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15] 이 당시까진 골든골이 있었기 때문에, 실점 후 바로 경기가 끝났다.[16] KBS 스포츠9 2003년 12월 9일[17] 당시 나이[18] 대회 개막 기준이며, (괄호) 안은 골키퍼인 경우 실점이고 필드플레이어인 경우 득점이다.[19] 당시 소속[21] 당시 이근호와 정성룡은 각각 박주영과 차기석의 백업이었다. 위 표의 출전 기록을 살펴보면 동 포지션의 다른 선수에 비해 출전 기록이 확연히 적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22] 다만 당시 상황은 바레인이 좀 더 암울했는데, 한국은 그나마 무재배를 해도 북경행 티켓을 거머쥐지만, 바레인은 닥치고 이겨야만 북경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23] 이기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골 결정력에서 답답한 모습을 보이며 경기를 시청하던 한국인들의 혈압을 올라가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이미 카메룬도 못 이기고 이탈리아에게 참패한 상황에서 8강 진출 실패는 사실상 확정적이었다. 한편 같은 시간 벌어진 이탈리아와 카메룬의 경기는 서로 안정적으로 8강으로 가는 길을 추구하며 설렁설렁 경기하며 사이좋게 올라갔다. 그리고 설령 기적적으로 올라갔어도 8강 상대는 하필 브라질이었다.[24] 사실 2014 시즌에 강등된 후 해체설까지 나돌다가 간신히 해체는 면했지만 긴축을 하는 등 지원부재와 부진한 성적은 어느 정도 예견된 거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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