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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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서울

Football Club Seoul

정식 명칭

FC 서울 프로축구단

법인명

GS스포츠

구단 형태

기업구단

소속 리그

대한민국 K리그1

창단

1983년 12월 22일[1][2]

연고지

서울특별시

구단명 변천

럭키금성 황소 (1983~1990)
LG 치타스 (1991~1995)
안양 LG 치타스 (1996~2003)
FC 서울 (2004~현재)

연고지 변천

충청도[3] (1983~1989)
서울특별시 (1990~1995)
경기도 안양시 (1996~2003)
서울특별시 (2004~)

홈 구장

서울월드컵경기장
(66,704명 수용)

구단 훈련장

GS 챔피언스 파크

모기업

GS그룹

구단주

허창수 (GS그룹 회장)

대표이사

엄태진

단장

강명원[4]

감독

최용수

주장

고요한

부주장

이웅희

마스코트

파일:FCseoul_Mascot_SSID.png

씨드

워드마크

파일:external/s20.postimg.org/1_ENGLISH_SIGNATURE_white_bg_Horizontal.png

용품 스폰서

르꼬끄스포르티브

셔츠 프린팅

앞: GS SHOP[5], KIXX[6]
뒤: KiXX[7]

상징색

빨간색 , 검정색 , 금색

공식 웹 사이트

파일:external/s20.postimg.org/1_EMBLEM_white_bg.png / 파일:트위터 아이콘.pn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pn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png / 파일:유튜브 아이콘.png

메인 스폰서

파일:external/www.criteo.com/logo_gs-shop-gif.gif

유니폼 스폰서

파일:external/upload.inven.co.kr/i3561102759.png

우승 기록

K리그1
(6회)

1985, 1990, 2000, 2010, 2012, 2016

FA컵
(2회)

1998, 2015

K리그 리그컵
(2회)

2006, 2010

K리그 수퍼컵
(1회)

2001

전국축구선수권대회[8]
(1회)

1988

클럽 기록

2010 K리그 올해의 베스트팀
2011 K리그 올해의 페어플레이
2012 K리그 올해의 베스트팀
2013 ACL 페어플레이
2014 K리그 올해의 페어플레이
2014 FA컵 페어플레이
2015 FA컵 페어플레이
2017 K리그 올해의 페어플레이

유소년 시스템

U-18 팀

서울 오산고등학교

U-16 팀

서울 오산고등학교/오산중학교

U-14 팀

서울 오산중학교

U-12 팀

FC서울 U-12

Soul of Seoul, FC SEOUL

1. 소개2. 역사
2.1. 지역 연고제 미시행기 (1984년 ~ 86년)2.2. 광역 지역 연고제 시행기 (1987년 ~ 89년)2.3. 도시 지역 연고제 시행기 (1990년 ~ 95년)2.4.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1996년 ~ 2003년)2.5. 서울월드컵경기장 시대 (2004년 ~ )
3. 역대 엠블럼4. 색상 일람5. 유소년 시스템6. 이모저모
6.1. 경기력 면에서6.2. 흥행 면에서
7. 라이벌8. 시즌별 일람9. 역대 감독10. 선수단11. 유니폼12. 사건사고13. 응원14. 짠돌이 프런트15. 그 외16. 관련 문서17. 둘러보기

1. 소개[편집]

한국 프로 스포츠 단일 경기 최다 관중 기록[9]을 달성한 K리그 최고의 인기 구단.

2010년 부터 리그 우승을 총 3번이나 차지했던 강팀이지만, 프런트의 능력 부족으로 현재 고통을 겪고있는 구단

하지만 복잡한 연고지 이전의 역사로 비판을 받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구단.

2. 역사[편집]

FC 서울의 연고지 역사

기간

1984 ~ 1989
(6년)

1990 ~ 1995
(6년)

1996 ~ 2003
(8년)

2004 ~ 현재

연고지

충청도[10]

서울특별시 (동대문)

안양시

서울특별시 (상암)

2.1. 지역 연고제 미시행기 (1984년 ~ 86년)[편집]

1983년 슈퍼리그가 출범하고 이듬해 인 1984년에 충청도를 연고로 럭키금성 황소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어 리그에 참여했다. 본래 모기업인 럭키금성그룹은 창단 준비때부터 서울 연고를 희망하고 있었지만[11][12][13] 당시 유공 코끼리 축구단(현 제주 유나이티드)이 이미 서울 연고[14]였기 때문에 이는 실패로 돌아갔고 대한축구협회에 의해 충청도 광역연고가 배정되었다. 충청도 광역연고 1984년 리그에 참가하였지만 1983년~86년 까지의 기간은 정부 규제로 인해 프로축구에서 홈 앤드 어웨이 시스템의 지역연고제를 시행하지 않은 기간으로써, 명목상의 연고지만 존제할뿐 모든 구단이 전국 9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중립경기만 하던 시기이다.

2.2. 광역 지역 연고제 시행기 (1987년 ~ 89년)[편집]

프로축구는 1987년부터 광역 연고제를 도입하여 모든 구단이 각자의 연고지에서 홈경기를 하도록 하였다. 사실상 이 시기부터 프로축구에 연고지 개념이 정착되기 시작하였으며, 대부분의 경기가 각 구단의 연고지에서 치러졌으나 몇몇 경기는 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주 연고지는 원래 대전이었지만 대전한밭운동장이 88 올림픽에 사용되면서 사용이 불가능해지면서 1988년부터 럭키금성 황소의 홈 경기는 청주에서 많이 개최되었다.

광역 연고제 시행기의 FC 서울(럭키금성 황소) 홈경기 개최지

연도

연고지 내 개최 횟수

연고지 외 개최 횟수

연고지 내 개최 비율

1987년

청주 6회
대전 6회
천안 3회

잠실 1회

93.8% (15/16)

1988년

청주 8회
천안 3회

동대문 1회

91.7% (11/12)

1989년

청주 10회
천안 3회

잠실 4회
전주 2회
광주 1회

65% (13/20)

총계

청주 24회
천안 9회
대전 6회

잠실 5회
전주 2회
광주 1회
동대문 1회

81.3% (39/48)

2.3. 도시 지역 연고제 시행기 (1990년 ~ 95년)[편집]

1988년 초부터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추진중이었으며 1990년에 도시 지역 연고제가 시행됨에 따라 서울로 첫 번째 연고지 이전을 하여 동대문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1991년도에 모기업의 명칭 변경에 따라 구단명을 LG 치타스로 변경하였다.

도시 연고제 시행기의 FC 서울(럭키금성 황소/LG 치타스) 홈경기 개최지 (정규리그만 계산)

연도

연고지 내 개최 횟수

연고지 외 개최 횟수

연고지 내 개최 비율

1990년

동대문 11회

제주 1회
마산 1회
구미 1회
천안 1회

73.3% (11/15)

1991년

동대문 15회

부산 1회
구미 1회
공주 1회
청주 1회
마산 1회

75% (15/20)

1992년

동대문 11회

여수 1회
청주 1회
구미 1회
마산 1회

73.3% (11/15)[15]

1993년

동대문 9회
잠실 1회

여수 1회
구미 1회
창원 1회
공주 1회
청주 1회

66.7% (10/15)

1994년

동대문 9회

창원 1회
평택 1회
수원 1회
구미 1회
제천 1회
여수 1회

60% (9/15)

1995년

동대문 8회

원주 1회
수원 1회
안동 1회
문경 1회
공주 1회
영주 1회

57.1% (8/14)

총계

동대문 63회
잠실 1회

30회

68.1% (64/94)

도시 지역 연고제를 시행하며 연고지 내 홈경기 개최 비율이 70%대 밑으로 하락했는데 이는 당시 동대문운동장을 3개 구단이 사용함에 따라 원활한 홈 경기 개최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대문운동장은 서울지역 기후 특성상 잔디 보호 때문에 남부지역과 달리 3월에 리그가 개막하더라도 4월 말이 되어서야 경기장 사용이 가능했다. 또한 국가대표팀 경기와 프로 이외의 국내 대회 결승전과 같은 주요 경기들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동대문운동장은 연간 최대 경기 횟수를 제한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대우, 현대, 포철과 같은 남부 지방 연고팀의 연고지 내 홈경기 비율이 90퍼센트 이상인데 반해 서울 연고의 일화, LG, 유공은 더 많은 비율의 지방 순회 경기를 치러야 했으며, 3개 구단 중 LG가 가장 많은 지방 순회경기를 개최하였다. 참고로 이러한 지방 순회 경기가 특수한 경우를 빼고 완전히 없어진 것은 2002년 월드컵 이후 각 구단의 경기장 시설 인프라가 완비된 이후이다.

2.4.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1996년 ~ 2003년)[편집]

2002 월드컵 유치와 이를 위한 지방 축구 활성화라는 명분을 앞세운 프로축구연맹에 의해 서울 연고지 구단들을 모두 없애는 방안이 추진되었고 1995년 2월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회에서 강제로 의결[16] 되었으며 이 후 계속해서 서울 연고팀들이 연고지 잔류를 위해 저항했지만 1995년 11월 청와대의 서울 연고 3팀 연고지 이전 지침이 하달되면서 1996년 시행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에 의해 일화 천마, 유공 코끼리등과 함께 강압적으로 서울 연고지에서 쫓겨나 안양시로 다시 연고지를 옮기고 팀명도 안양 LG 치타스로 바꾼다. 1995년 1월 김기복 사무총장 인터뷰 기사-월간축구, 1995년 2월 이사회 직전 김기복 사무총장 인터뷰기사-스포츠신문, 청와대 개입 관련 기사 LG 구단은 축구전용구장 건설을 노리고 도봉구를 답사하는 등 어떻게든 서울연고를 지키려 용을 썼으나 소용없었다.LG의 서울사수의지를 담은 신문기사. 이 때 서울 구단들이 받아든 선택지는 서울에 동대문 아닌 곳에 신구장을 건설하고 서울 연고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서울을 떠나느냐였는데 LG, 유공, 일화 모두 연고지 이전을 선택하고, 이 신구장 건설 조건부 서울연고 허가는 추후에라도 축구전용구장을 건설할 경우 서울로의 연고 복귀를 허용한다라는 단서 조항으로 이어진다.[17]

안양 시대의 FC 서울(안양 LG 치타스) 홈경기 개최지 (정규리그만 계산)

연도

연고지 내 개최 횟수

연고지 외 개최 횟수

연고지 내 개최 비율

1996년

3회

동대문 10회
원주 1회
진주 1회
문경 1회

18.8% (3/16)

1997년

7회

진주 1회
제천 1회

77.8% (7/9)

1998년

9회

없음

100% (9/9)

1999년

12회

창원 1회
동대문 1회

85.7% (12/14)

2000년

13회

없음

100% (13/13)

2001년

4회

목동 9회

30.8% (4/13)

2002년

14회

없음

100% (14/14)

2003년

21회

창원 1회

95.5% (21/22)

총계

83회

27회

75.5% (83/110)

안양 연고 원년인 1996년과 안양 종합 운동장 개보수 문제로 인해 9경기를 목동 종합 운동장에서 치러야했던 2001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홈경기를 안양에서 치렀다.

2.5. 서울월드컵경기장 시대 (2004년 ~ )[편집]

안양으로 연고를 옮긴지 4년째인 2000년부터 안양 LG 치타스는 서울로의 연고이전 의사를 공식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다.[18][19] 이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이 끝난 뒤 수도 서울에 축구단이 없는 것에 대해 수도에 축구단이 있을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일차적으로 시민구단 형태의 서울 유나이티드를 창단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서울시 측에서는 신생팀 창단에 따르는 비용을 들어 난색을 표하였고[20], 당초 KT, 금호아시아나그룹, 한화그룹, 신한은행, 우리은행 등의 대기업들을 유치해서 신규 서울 연고팀을 만들기 위해 축구계에서 다각도로 유치 노력을 하였으나 과도한 서울 입성금 등 여러가지 이유로 대기업들이 참여 의사를 철회하면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2003년에 이어서 계속해서 서울월드컵경기장이 활용되지 못할 것을 우려한 서울시에서 서울 연고팀 창단을 희망하는 대기업을 모집하는 신청까지 받았지만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한편 당시 서울시와 서울시장 이명박은 그래도 두 팀 중에서 부산 역시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시장에서 두 번째로 큰 빅마켓인데 서울 연고팀을 만들기 위해 부산팀이 없어지는 것보다는 과거에 서울 연고 시절이 있고 서울 근접 수도권 팀인 안양 LG가 오는 것이 한국 프로축구 발전을 위해 낫다는 의견을 피력하며 안양 LG의 손을 들어주기도 하였다.기사-서울시, 안양LG 연고구단 선정 그 후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신규팀으로 서울 연고팀 창단이 불가능 하다고 판단하여 기존 구단이 서울로 연고지를 옮겨서 서울 연고팀을 만드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하였으며 전 구단에 2월 25일까지 서울 연고지 이전 의향서를 받았다. 이에 안양 LG 치타스부산 아이콘스가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 의향서를 마감일인 25일 제출하였으며 3월 10일 부산 아이콘스가 연고지 이전 신청을 철회하여 2004년 3월 11일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회에서 안양 LG의 서울 연고복귀가 만장일치로 통과하였다.[21][22][23][24] 전용구장 건설비용을을 75억으로 낮췄네 어쩌네 하는데 다른 대기업들과 구단들은 그 돈 내기 싫어서 전부 어떻게 공짜로 쓸수 없을까 생각만하고 있었다. GS그룹만이 75억 내고서라도 들어가려 했던게 중요하다. 조건 낮췄다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은 떠날 생각 없던 구단들을 정부권력까지 동원해 내쫒으며 돌아오고 싶으면 전용구장 건립하고 돌아오라고 했던 과정 자체가 비정상적인 패악질이었던 점은 거론하지 않는다.

그리고 LG그룹이 2004년 LG와 GS그룹으로 분할을 시작하면서 LG가 야구단을, GS가 축구단을 가져가게 되면서 2004년 6월 1일 GS 스포츠가 공식 출범하여 현재의 모기업은 GS이다.

구단 측에서는 1996 한국프로축구연맹과 정부가 2002 월드컵 유치를 위해 전국적인 축구 열기를 확산시킨다는 명목으로 시행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강제로 안양으로 연고를 옮긴 축구단이 서울로 연고지 복귀를 한 것으로 해석 하고 있다. 한편 철저한 유럽식 연고제를 주장하던 타팀 서포터와 팀을 잃게 된 안양 서포터즈의 원한은 북패라는 비칭을 만들고 이른바 패륜논쟁이란 K리그가 지속되는 내내 이어질 갈등을 촉발시켰다.

2004년 이전의 개략적인 역사는 FC 서울/럭키금성과 LG 시절 문서에서 볼 수 있다.

2018년 구단 역사상 최초로 하위 스플릿에 배정 되었다. 2016년 수원이 하위스플릿에서 양민학살로 승점을 벌어 7위로 시즌을 마무리 하면서 마지막 자존심 만은 세웠던 적이 있어서, FC 서울도 이와 유사하게 B스플릿 상위권으로 마무리할 전망이다. 다만, 진짜로 강등될 경우 FC 안양 과의 피눈물 더비(...),서울 이랜드와의 서울 더비, 수원 FC와의 슈퍼매치(...)가 예정되 있어 흥행이나 스토리 면에서는 나브지 않다는 전망.

3. 역대 엠블럼[편집]

파일:external/oi65.tinypic.com/2vx0pz4.png

파일:LG 치타스 앰블럼.jpg

파일:FC서울-안양LG치타스-엠블럼.jpg

파일:AnyangLGCheetahs2.png

수정중

파일:안양 LG 02-03 앰블럼.jpg

파일:external/s20.postimg.org/4_EMBLEM_grey_bg.png

럭키금성 황소
(1983 ~ 1990)

LG 치타스 /
안양 LG 치타스
(1991 ~ 1996)

안양 LG 치타스
(1997 ~
1999.07)

안양 LG 치타스
(1999.07 ~
2000)

안양 LG
치타스
(2001)

안양 LG
치타스
(2002 ~ 2003)

FC 서울
(2004 ~ 현재)

Lucky-Goldstar FC

LG Cheetahs /
Anyang LG

Anyang LG
Cheetahs

Anyang LG
Cheetahs

Anyang LG
Cheetahs

Anyang LG
Cheetahs

FC Seoul

4. 색상 일람[편집]

  • 색상 일람이 공홈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로고파일을 다운로드받으면 같이 있는 메모장 파일 안에 적혀 있다.

파일:FCseoul_logo_greybg.png FC 서울 색상일람

상징색

RGB
(헥스 코드)

CMYK

Pantone

Red

R181 G25 B26
(#b5191a)

C0 M100 Y100 K10

Pantone 1795c

Black

R0 G0 B0
(#000000)

C0 M0 Y0 K100

Pantone black c

Gold

R163 G136 B72
(#a38848)

C30 M40 Y100 K0

Pantone 873c

5. 유소년 시스템[편집]

유소년 시스템

U-18 팀

서울 오산고등학교

U-16 팀

서울 오산고등학교/오산중학교

U-14 팀

서울 오산중학교

U-12 팀

Future of FC Seoul

2013년 fos 정책을 도입하면서 대한민국 최대규모의 유소년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오산학원에 산하 유스팀을 직접 창단하며 보다 끈끈한 육성을 보여주고 있다. 2016년 fos 출신 차범근 축구상 대상자인 서재민이 오산중으로 올라오며 인재도 나오는듯 하고 오산중학교 2016년 전국대회 우승, 오산고등학교 2017년 K리그 주니어 후반기 리그 A조 우승 등 유스 명문 팀들 속에서도 확실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현재 팀 내에선 U-23 대표 오산고 출신 황현수, 윤승원, 황기욱이 활약 중.

6. 이모저모[편집]

6.1. 경기력 면에서[편집]

전북과 함께 2000년대 후반에 떠오른 신흥강호. 2000년대 초반까진 성수울포에 밀려 강호 이미지는 없었고 하위권이었던 시절이 길었다. 3차례 우승을 거두긴 했으나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 시절이라 시즌별로 경기력 변동이 심했다. 85년은 프로팀과 실업팀이 혼재한 형태였고(프로 6팀, 실업 2팀) 86년 추계리그 우승으로 강팀으로 남나 싶더니 87년 5개 팀 중 5위, 88년 5개 팀 중 4위를 기록하며 심한 기복을 보였고 팀이 6개로 늘어난 89년 2위에 이어 1990년 우승을 차지했으나 다음해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으며 92년 3위, 93년 2위를 제외하면 90년대 내내 하위권에 머물렀다. 2000년에 그룹의 대대적인 투자로 우승을 차지했으나 다음해부터 지속적으로 하락했다.(1->2->4->8)

확고부동한 강팀으로 자리잡은건 세뇰 귀네슈-넬로 빙가다 시기로 모기업 GS그룹의 풍족한 지원, 프런트의 착실한 플랜, 서울 프리미엄[25]에 힘입어 강호로 급부상했다.

2007~2009년 귀네슈 감독 시절에는 이청용, 기성용을 중심으로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준수한 미드필드 진을 필두로한 빠르고 짧은 패스축구를 구사했다. 경기 당 한번씩은 꼭 공을 받지 않고 흘리거나 다이렉트로 뒤로 차주는 플레이를 펼쳐보이는게 특징. 빠른 패스와 공수전환으로 전방에서 부터 압박해 치고 올라가기 때문에 K리그 전체에서 오밀조밀하고 재밌는 축구를 보여주었다. 때문에 서울이 K리그의 아스널 같다는 평가와 함께 많은 축구팬들을 매료시켰다. 그 시절 국가대표급 중앙 수비진을 보유했지만 한때 중앙 수비수들의 실책으로 인한 실점이 많은 편이었으며, 젊은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스쿼드는 패기넘치고 창의적인 전술을 펼치는 데에는 큰 장점이었지만 반대로 분위기에 쉽게 휩쓸려 경기력 기복이 심해질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었다. 이을용, 김한윤 등 노장선수들도 굉장히 거칠고 쉽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베테랑 선배로서 모범을 많이 보여주지 못하였다. 특히 2008, 2009년 시즌을 무관으로 보낸 것은 이 점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2010 시즌에는 베테랑들이 많이 합류하고 기존의 젊은 선수들과 환상의 조화를 이루어 조직력을 쇄신하면서 귀네슈 감독 때의 문제는 거의 사라졌다. 그 해 홈경기는 개막전인 전북 전을 제외하고 모두 승리하였고 시즌 내내 훌륭한 경기력을 이어가면서 컵대회와 K리그 더블 우승을 일구어내었다.

빙가다 감독이 1년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황보관이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는데 2011년 시즌 초반부터 극심한 부진을 겪게되면서 K리그 최단기간 부임이란 불명예를 안고 자진사퇴하게 된다. 그 해 4월 부터 수석 코치였던 최용수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시즌을 책임졌는데 하위권이었던 리그 성적을 3위로 마무리하고 조별리그 탈락위기였던 AFC 챔피언스리그도 8강까지 이끌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시즌 도중 2010년까지 벤치멤버였던 고명진, 고요한 등을 스타 플레이어로 키우면서 팬들에게 지지를 얻고 2012년 정식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2012년에는 2011년 검증했던 데얀몰리나(극강의 경기력을 보여준 이 둘의 조합은 '데몰리션'으로 불리움)의 공격 조합과 하대성고명진, 최현태 등이 이루는 안정적인 중원에, 미드필더에서 오른쪽 측면 수비수로 보직 변경에 성공한 고요한 등의 맹활약으로 K리그 역대 최다 승점으로 2년만에 우승컵을 탈환에 성공한다. 하지만 최용수 감독 본인이 고집하는 주전 선수들만 기용하면서 김현성 같은 유망주들이 기회를 얻지 못했고, 수원에게 패배하는 징크스가 계속되면서 팬들에게 시즌내내 질타를 받기도 했다.

2013년을 마지막으로 데얀과 하대성이 떠나고 몰리나의 기량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아디가 은퇴하게 된다. 대체 선수 또한 마땅치가 않았던게 데얀의 대체자로 영입된 하파에우 코스타는 뚜껑을 열어보니 먹튀 용병이었고 데얀의 그늘에 가려져 온 김현성, 박희성도 최근 주전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부진을 거듭했다. 2014년 월드컵 브레이크 기간을 거쳐 포백을 버리고 완전히 스리백으로 전환, 공격보다는 실리를 챙기는 수비 지향적 축구를 하게되었다. 이러한 수비 위주 전술이 자리잡고 경기 속도도 느려지면서 귀네슈 시절 재미있는 패스 축구의 팀 컬러가 희석됐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또한 2011년부터 슬로우 스타터라는 오명을 들었다. 시즌 개막부터 5월까지는 골 가뭄에 시달리면서 하위권에 머물지만 6월부터 서서히 경기력이 회복되어 7, 8월부터는 상위권으로 복귀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물론 상위권으로 복귀해도 초반에 승점을 많이 쌓지 못해 리그 1, 2위는 못하고 3, 4위정도에 머물면서 다음해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따내는데에만 그쳤다. 2011년의 슬로우 스타팅과 2013년 이후의 슬로우 스타팅은 좀 다른데 2011년에는 감독이 황보관이라 누가봐도 초반에 부진할만 했지만 2013시즌에는 압도적으로 치고나가 우승을 차지한 2012년의 전력이 대부분 남아있는데도 크게 부진했고 이 현상이 2015년까지 이어졌다.[26]

2016년 시즌을 앞두고 2010년에 버금가는 대규모 영입을 했는데 이적시장 계의 큰 손 전북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스쿼드를 갖추었다.[27] 그리고 기대했던 대로 매 경기 골 폭풍을 몰아치면서 K리그, AFC 챔피언스 리그 모두 선전하면서 2016년에는 슬로우 스타터 오명도 씻어내는데 성공했다.

2016년 서울의 스리백은 2015년까지의 스리백과 다른 굉장히 공격적이었고 파괴적인 전술이었다. 하지만 최용수 3-5-2의 핵심 엔진 역할을 수행하던 신진호가 입대하고 6월부터 주세종, 고요한, 아드리아노, 윤주태 등 주축 선수들이 부상이나 징계로 줄줄이 출장할 수 없게 되어 기대와 달리 매우 혹독한 여름을 보냈다. 게다가 최용수가 거액의 연봉을 받으며 장쑤 쑤닝으로 떠나고 후임 감독으로 영입된 황선홍은 전술이 새로 자리 잡는 동안 전체적으로 팀이 어수선해져 3연패를 하는 등 우승권과 멀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서서히 전술이 녹아들면서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고 황선홍 감독이 시행착오를 거쳐 어느정도 팀을 완성한 스플릿 라운드 들어선 무패행진을 달리더니 38라운드에서 시즌 내내 고전했던 전북을 잡아내고 우승을 차지했다.

2017년은 유상훈,고광민,아드리아노,다카하기 등 팀 주전들이 군입대,이적으로 팀을 나가면서 팀 전력이 약해졌다.그러나 서울 프런트는 선수영입에 돈을 쓰지 않으면서 결국 작년보다 약해진 상태로 시즌을 시작했다.[28] 물론 선수 영입을 안한건 아니지만 들어온 선수들이 나간 선수들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고 팬들이 기대한 선수들은 부상으로 시즌 절반을 날려먹어 선수영입한 효과가 없이 나간 선수들 공백만 남긴채 시즌을 시작했다.

최용수 시기에는 패스웍과 점유율 중심으로 공격 지역에서도 볼 소유하는데 신경을 많이 쓰는 대신 투쟁심과 압박강도가 약한 팀이었고[29] 이거때문에 전북처럼 압박강도가 강하고 역습이 위력적인 팀에게 고전했는데 황선홍 부임 이후 황선홍 재임기 포항처럼 전체적인 압박강도가 많이 올라갔고 자연히 파울개수도 늘었다.

6.2. 흥행 면에서[편집]

팀 운영, 마케팅 여러 면에서 K리그에서 제일 적극적인 구단이기도 하다.[30] 2005년 박주영을 내세워 스타 마케팅을 실시했고 다양한 팬 친화적인 이벤트를 선보이면서 광활해 보이던 서울월드컵경기장 좌석이 서서히 채워지기 시작했고, 빅매치 시에는 4~5만명의 관중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구단 웹 사이트를 비롯해 페이스북,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여러 SNS를 적극 활용하고 있고 페이스북은 K리그 최초로 좋아요 10만명을 돌파했다.

2012년 조사된 전 세계 축구클럽 브랜드 가치평가에서 62위를 차지했으며, K리그 클럽 가운데서는 단연 1위였다. 2015년 9월 1일 아시아 축구 연맹이 발표한 클럽 랭킹에서는 89.665점으로 4위에 이름을 올렸다.

K리그 관중 동원 실적에서도 몇 년째 상위권을 놓치지 않고 있는데 2010~2012년 3년 연속 K리그 평균관중 1위를 차지했다. 2013년에는 총 관중수 1위를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게 내줬지만 이는 관중 동원 전략을 무료표를 줄이고 객단가를 높이는 방향으로 잡았기 때문으로, 실제로 2013년 유료 관중 비율(85%)와 객단가(6452원)에서는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총 입장 수익 또한 20억원을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고 이는 2013년 K리그 클래식 전체 입장 수익중 1/4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2015년 10월 25일 K리그 최초 6년 연속 300,000 관중 돌파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또한 2015 시즌 K리그 최초로 객단가[31] 9,000원을 넘었다. 비공개된 2위 구단(6,058원)과의 격차가 크며, 프로야구 객단가 수준에 도달한 사실상 유일한 K리그 구단.[32] 유료관중 숫자와 입장수입 역시 K리그 1위이다. 2016년부턴 전 구단 최초로 100만원짜리 시즌권을 출시했다[33]

  • FC 서울 팬파크 : 2016년은 마케팅 면에 있어서 다시 없을 역대급 시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홈 개막전을 앞두고 2월 28일 경기장 앞에 FC 서울 팬파크라는 공식 팬 샵을 오픈했다. FC 서울 유니폼, 선수단, 일반 의류는 물론 응원도구에 예전에 품절된 머플러까지 판매하고 서울이 수상한 트로피도 전시되어 있다. 홈경기 날 외에도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영업하기 때문에 그동안 FC 서울 물품을 오프라인으로는 홈경기 당일밖에 구매할 수 밖에 없었던 불편함을 해소해 주었다. 자세한 설명은 문서 참조.

  • FC 서울 팬카페 : 2016년 7월 30일에 팬 파크 옆에 커피숍 FC 서울 팬카페를 개장했다. 연중무휴로 운영되기 때문에 서울 팬 뿐만 아니라 월드컵경기장을 방문하는 일반인들도 많이 방문할 듯하다.

  • FC 서울 푸드파크 : 또한 경기 전후로 관객들이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FC 서울 푸드파크를 개장했다. 경기 종료 후 약 1시간 반 동안 음식 주문을 받는다. 메뉴 종류는 경기마다 달라지나 피자, 스테이크등 일부 품목은 변함없이 계속 판매중이다. 아사히 맥주의 경우 경기 종료 후에만 판매한다.


2016년 시즌에는 10,287원으로 K리그 클래식 최초로 객단가 만원을 돌파했다. 2015년의 9,485원보다 800원가량 높아진 금액이다. 평균 관중(18,007명)과 리그 입장수입(35억)에서도 전체 1위를 차지했다. FA컵과 AFC 챔피언스리그 입장수입까지 합친 전체 입장수입은 50억 가량이다.

2018년 전북과 함께 유이하게 평균 관중이 1만명이 넘는 구단이다.

7. 라이벌[편집]

축구 팀들 중 사이가 좋은 팀들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수도 서울특별시를 연고로 하고 있어 K리그에서는 흥행 면에서 따라올 팀이 없다는 점과 상술한 복잡한 연고지 이전의 역사 때문에 FC 서울은 K리그 대부분의 팀들이 반쯤 왕따시키는 공공의 적 포지션이었다. 2016년 전까지는. 2016년, K리그 전체를 뒤흔든 전북 현대 모터스 심판매수 사건이 터지고난 후에는 이 포지션이 전북에게로 상당 부분 넘어간 상태.

7.1. 수원 삼성 블루윙즈[편집]

  • 슈퍼매치

  • 명실상부한 현재 FC 서울 최대의 앙숙


경기 내외를 가리지 않고 제일 치열하게 다투는 팀이 바로 수원이다. 그들 말로는 "서울을 존재하지 않는 구단으로 취급한다."고 하지만 하는 짓을 보면 천상 라이벌(...). 웹툰작가 샤다라빠는 이 두팀의 관계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서로를 라이벌로 인정하지 않는 라이벌이라고 표현했다. 그럼 부천과 안양은?현재 서울과의 라이벌 구도 형성 과정을 살펴 보면 FC 서울의 연고 복귀 당시 K리그 서포터 집단 가운데 세력이 크면서 강성했던 그랑블루가 극렬한 반대와 비난을 퍼부어 댄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실제로 그랑블루는 패륜송을 만들어 부를 정도로 서울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을 해왔고 그것이 양 팀 서포터들 간의 앙금으로 남아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다.

물론 슈퍼매치가 사실상 과거 안양 LG와의 라이벌 관계가 이어져온 것이지만, 수원 입장에서는 서울을 라이벌로 인정한다면, 안양 LG와 서울을 동일한 구단으로 보고 안양 시절 역사를 서울 역사의 일부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프렌테 트리콜로는 서울을 라이벌로 칭하는 언론 보도등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을 하며 'FC GS', '난지도', '마포 GS'등으로 조롱하며 논다.[34]

당연히 서울 팬들에게도 상당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켜서 양 팀 서포터 간에 여러 차례의 사건과 충돌이 벌어져왔다. 대표적으로는 수원 팬들이 서울월드컵경기장에 불을 지르고 안양 LG팬을 사칭하며 추태를 보여준 일명 서울월드컵경기장 방화사건이랑, 2군 경기에서 한 서울 팬이 안정환에게 심각한 인격모독적인 발언을 했던 유명한 권오크 사건이 있다.

최근 들어 물리적 충돌은 최대한 서로 피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온라인에서는 여전히 신경전이 치열한데 슈퍼매치가 다가오면 양 팀 팬들이 게시판에서 서로를 강하게 도발한다.[35] 2010년에는 수원 원정에서 수원 서포터 중 몇몇이 장외 서포팅을 하고 욕설을 하면서 PVC 파이프로 사람을 찌르는 행위도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보듯이, 양 팀 팬들은 서로를 라이벌을 넘어 무조건 박살 내야할 상대 수준으로 보고 있다.

2012년 까지 전적에서 서울이 약세를 보였던 거의 유일한 팀이다. 2008년 챔피언 결정전에서 우승을 넘겨주고 윤성효 시절에는 수원에게 9연속 무승 (2무 7패)의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2013년 서정원 감독 부임 후 이전까지 절대적 열세였던 분위기에서 반전하여, 2014년 4월 27일 K리그 클래식 10라운드 수원 원정경기에서 2008년 10월 29일 이후 5년만에 승리를 거두는 등 13, 14, 15, 16시즌 도합 15전 8승 4무 3패(2016년 8월 기준)으로 속수무책인 옛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차범근의 장기집권과 윤성효의 중도경질로 수원 육성체계가 무너진 상황이라 한동안 수원의 열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박주영은 2007년 3월 21일 열린 슈퍼매치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고[36] 슈퍼매치 단일 경기에서 최다골 기록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깨지지 않고 있다가 2015년 11월 7일에 윤주태가 4골을 터트리면서 8년만에 깨지게 되었다.

2016년을 앞두고 두텁게 전력을 보강한 서울과 달리 수원은 차범근 시절부터 육성체계를 무너뜨리고 돈으로만 성적을 내왔던 부작용이 차곡차곡 쌓이다 터져서 단기간에 수습하는게 어려워져 2016년 슈퍼매치는 서울이 상당히 유리해질 것으로 보였으나 4월, 6월 2경기는 1대 1 무승부로 끝났지만 8월 13일 경기에서는 윤일록의 결승골로 서울이 승리하였다. 하프타임 때 서울의 초대가수로 온 전인권과 '걱정말아요 그대'를 부르는 시간을 갖는 도중 프렌테 트리콜로 쪽에서 패륜송으로 훼방을 놓으면서 트러블이 일어나기도 했다.

수원이 하위스플릿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2016 K리그 클래식의 슈퍼매치는 3경기로 끝났지만, FA컵에서 서울과 수원이 결승에서 격돌하면서 2경기가 추가되었다. 이 경기에선 1승 1패씩 주고받은 다음 승부차기에서 수원이 승리해 양 팀은 17시즌 개막전에서 맞붙게 되었다.

그 이후 K리그 역사에 있어 오래도록 회자될 만한 이적이 발생한다. 바로 서울이 이상호를 영입한 것이다. 북패짜식에서 개랑짜식으로 변화함. .수원과의 홈 개막전, 서울은 전반 수원 이적생 김민우에게 선제골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후반 서울은 이석현을 교체투입하면서 승기를 잡았고 세트피스 혼전 상황에서 이상호의 득점 덕분에 1-1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이 후 2경기는 수원의 홈구장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진행되었다. 이 경기에서 서울은 2-1, 1-0으로 짜릿한 승리를 거두면서 현재 슈퍼매치전적 2승 1무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상호는 3차전에서 선발 출전하여 미친 활동량을 보여주며 승리에 공헌했다. 이후 수원 서포터즈석에 인사를 하러 갔는데 물병이 경기장으로 반입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후 이상호는 내심 공이 골대에 맞고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인터뷰를 해 수원 팬들한테 대차게 까였다.
그리고 그 다음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의 경기에서 2:2로 비기며 서로 아쉬운 결과를 받아들게 되었다. 서로 사이좋게 PK골을 하나씩 교환했다

하지만 1년 후 서울에서 뛰던 데얀이 수원으로 이적을 했다! 이상호보다 더 충격적인게 서울에서 MVP랑 득점왕을 먹고 레전드라고 불리는 선수인데 수원으로 이적을 하게 된 것.

7.2. 인천 유나이티드[편집]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 간의 거리가 가까운 것도 있고, 양 팀 서포터들의 충돌로도 유명하다. 실제로도 수원과 더불어 FC 서울에 가장 큰 적대감을 드러내는 구단이기도 하다. 이에 맞서 서울 팬들은 인천을 '개랑 2중대'라 폄하하기도 한다. 요즘은 매북 2중대...

지리적으로 가까운데다가 양쪽 서포터들이 K리그에서 극성으로 유명한지라 물리적 충돌사건이 꽤 많다. 한 때는 경기가 있을 때마다 최소 한 번 이상 폭행 사건이 벌어질 정도였다. 제일 유명한 것은 인천 서포터의 욕설과 도발에 서울 서포터가 철창너머의 인천 서포터들을 깃발로 찔러서 문제가 된 콕콕신 사건등, 두 구단 사이가 점점 나빠지면서 요즘은 정말로 치열해졌다. 맞붙을때마다 1년에 한번 이상은 서포터 간 충돌은 기본사항이 되었다. 게다가 2017년에 서울팬들이 인천 원정을 갈 때면 2018 경인더비 with.이랜드라는 깃발을 걸어 인천을 조롱하기도 했다.

그래서 양 팀 서포터들 중에 슈퍼매치를 언론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더비라고 폄하하고, 경인 더비야말로 진짜 더비 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37]

거의 항상 상위권에 위치하는 서울과 주로 중위권을 기록하는 인천 간의 경기이지만 맞붙으면 꽤 팽팽한 경기가 펼쳐진다. 다만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는 서울이 압도적인 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2015년 10월 31일[38]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5년 대한축구협회 FA컵 결승전에서 서울이 인천 유나이티드를 3대1로 제압하고 1998년 이후 17년만에 FA컵 우승을 들어올리면서 극적인 경인더비를 연출하였다. 2016년에는 김도훈 감독의 사퇴로 최악의 분위기였던 인천이 이기형 감독대행 체제에서 어려운 경기가 예상되던 서울전을 승리로 장식하여 자력으로 잔류를 확정짓는 발판으로 삼았다.

양 구단은 사이가 나쁘지만 의외로 선수 왕래가 활발하다는 점이 재미있다. 데얀, 이재권, 이석현, 유현(축구선수)이 인천에서 서울로 이적했고 김원식은 인천으로 임대 가서 크게 성장했다. 조수혁, 이규로, 김동석은 서울에서 인천으로 이적했다. 자금력 차이가 꽤 되는 양팀임에도 현금 20억 원+이정열, 김태진과 맞바꿔 이적한 데얀을 제외하면 인천이 손해본 이적이 없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

7.3. 전북 현대 모터스[편집]

  •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

  • 향후 K리그의 흥행을 책임질 빅 카드

티아라 더비 러비더비

서울과 전북은 2009년부터 2012년까지 4년간 서로 2번씩 리그 우승을 양분했고 이후에도 상위권에서 경쟁하고 있다. 우승을 향한 길목에서 가장 큰 경쟁자인 셈. 전북 전은 항상 리그 우승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일명 승점 6점짜리 경기가 되며 이에 따라 경기가 굉장히 과열되곤 한다. 서울이 열세였던 수원과 달리 이 쪽은 서울이 대체적으로 강세를 보였다. 반면 수원은 전북에게 약세. 서울 < 수원 < 전북 < 서울의 구도가 꽤 오랫동안 이어져오고 있었지만 2013년 이후론 깨졌다.[39] 2016년에는 북과 서울을 줄여서 말하는 별명인 에서 따와 전설이나 설전 등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까지 대중적으로 정착된 이름은 아니다. 대중화되려면 언론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2010년 전북을 상대로 한 서울의 홈 개막전에서 초대가수인 티아라가 전북의 유니폼을 연상시키는 초록색 의상을 입고 하프타임 공연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또 공교롭게도 이 경기는 서울의 0대 1 패. 결국 티아라가 서울에 공개 사과하였으나 서울팬들의 감정은 쉽게 해소 되지 않았다. 이 사건이후 한 동안 두 팀간의 경기는 티아라 더비로 불렸다.

2011년 7월 3일, 후반기 리그를 시작하는 16라운드에서 전북은 FC 서울을 홈에서 상대하였다. 전북이 2대 0으로 앞서다가 후반 2대 2로 동점이 되자 분을 이기지 못한 전북 서포터스들이 그라운드를 가로 질러 원정 서포터석으로 달려가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까 보이면서 추태를 부리는 한편 돌을 던져서 한 팬의 머리에 맞는 등 원정 팬들을 위협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FC 서울 원정버스를 포위하고 출발을 못하게 막았으며 일부는 고속도로 상에서 위협운전까지 하였다.

서울이 본격적으로 수비 위주 축구를 했던 2014년에 최강희 감독이 서울같은 팀은 공격 축구를 해야 한다고 서울의 스타일을 비난하고 최용수 감독은 상대 팀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받아치면서 사이가 더욱 안 좋아졌다. 디시인사이드 FC 서울 갤러리에선 전북 최강희 감독을 찬양하는 척 까는 게 일상.

2016 시즌을 앞두고 그런 최강희 감독의 말을 비웃기라도 한듯 대규모 영입을 해서 전북에 뒤지지 않는 선수진을 갖췄으나 막상 전적은 3경기 연속 3패. 그것도 홈에서 2대 3, 1대 3의 완패를 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40] 그리고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중국 을 이기고 올라온 양 팀이 동아시아의 대표를 가리는 자존심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4강 1차전에서는 1대 4로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으며, 4강 2차전에서는 상대한 지 5경기 만에 승리를 거뒀으나 격차가 이미 크게 벌어진 뒤라 결승 진출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스플릿 리그에서 양 팀은 37라운드까지 3승 1무로 똑같은 전적을 올리고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개막전과 똑같이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즌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던 전북을 무너뜨리면서 4년만에 전북이 보는 앞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41]

국내축구를 발칵 뒤집히게 했던 전북 현대 모터스 심판매수 사건때 가장 강하게 비판하며 추가징계를 요구하는 서포터 연대 성명을 주도하고 걸개와 9분간 침묵 서포팅을 주도한게 FC 서울의 수호신이고[42] 그런 수호신을 지원해준게 FC 서울 구단이라[43] 전북팬들과 충돌이 더욱 잦아졌다. 서울이 2016 시즌 극적인 역전 우승을 차지하고 전북팬들이 보는 앞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려 앞으로 팬들과의 사이는 더욱 악화될 예정.[44]

7.4. 포항 스틸러스[편집]

포항 스틸러스는 창단 이래로 경상북도 포항에서 터를 잡고 있으며 전통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리그에서 누구보다 강한 클럽이기 때문에 연고이전 논란에 대해서도 반감이 크다. 포항 팬들은 서울 전만 되면 "족보없는 축구는 가라"라는 걸개를 걸 정도다.[45][46] 게다가, 포항으로 입단을 약속한 박주영이 뜬금없이 서울에서 데뷔를 하면서 골이 더 깊어졌다. 팀 컬러가 동일한 검빨이라는 것[47] 조차 싫어할 정도이다. 인천 유나이티드와 마찬가지로 상암에서는 서울이 압도적인 승률을 보이고 있고 스틸야드에서는 압도적으로 승률이 낮다.

이후 박주영 사건외엔 접점이 없던 두 팀에 재미난 스토리가 생겼는데, 현역시절 한국 공격진을 이끌었던 황선홍 감독과 최용수 감독의 라이벌 구도다. 2011년부터 친정팀 포항의 지휘봉을 잡으며 훌륭한 성적을 내고 있고, 최용수 감독도 2011년 4월 감독 대행으로 부임하고 하위권으로 떨어진 팀을 점점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면서 명감독으로도 자존심 대결이 이어지고 있다.

2014 시즌 두 팀은 한 시즌에 무려 6번이나 만났다. 리그 3전, FA컵 1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2전. 전적은 1승 4무 1패, 승부가 났던 두 경기 모두 1대 0 한골차이 승부일만큼 박빙이지만, 속내를 보면 4무 가운데 3경기는 토너먼트 경기였고 ACL 1차전을 제외한 2경기 모두 승부차기 혈투 끝에 서울이 이겼다. 특히 김용대의 부상을 틈타 주전으로 발돋움한 유상훈이 매경기 좋은 모습을 보였는데, 먼저 경기였던 FA컵에선 승부차기에서 한차례 선방을 보여 승리를 이끈 데 이어 ACL 경기에선 상대 키커 3명을 다 막는 정신나간 활약을 보여주며 승리로 이끌었다. 재밌는건 유상훈이 포항 전에만 5경기나 출전했는데 단 한 차례도 지지 않았다는 점이다.[48] 특히 단 2실점만을 허용하고, 승부차기 선방도 4차례나 해내는 등 새로운 포항 킬러로 떠올랐다.

2016년 6월 중에 최용수 감독이 갑작스레 중국으로 떠나고 후임으로 황선홍 감독이 선임되었다. 최용수 감독 VS 황선홍 감독의 라이벌 관계 이후로 또 하나의 재미있는 스토리가 나올 듯 하다. 또 2017년 6월 19일. 이명주의 서울 영입도 확정.

7.5. FC 안양[편집]

  • K리그 사상 전례없이 위험한 더비

2013시즌부터 안양 시의회와 안양 축구 팬들의 주도로 FC 안양이 창단되어 K리그 챌린지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당연히 창단때부터 지속적으로 서울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심을 내비치고 있다. 어서 빨리 서울과 만나 연고이전의 원한을 갚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중. 물론 자기들을 증오한다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 서울 팬들도 안양을 마찬가지로 싫어한다.

당장 리그에서 만날 일은 없다. 서울은 클래식 상위권이고 안양은 챌린지 중하위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FA컵에서 만나게 되거나 안양이 승격하거나 서울이 강등되어 경기가 벌어지면, 안양 LG시절부터 K리그에서 가장 폭력적인 서포터로 악명을 떨쳤던 A.S.U. RED와, 역시 사고 경력이 화려한 수호신간의 폭력 사태가 우려되며[49] 슈퍼매치 이상으로 많은 경찰력이 동원될 것이다.

그런데 2017년 FA컵 추첨으로 그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안양이 3라운드를 이기고 올라오면 바로 안양과의 경기가 성사된다. 심지어 안양의 3라운드 상대는 호남대학교이다. 만약 호남대가 안양을 잡는 이변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 더비는 성사된다. 그리고 2017년 3월 29일 안양이 호남대를 꺾고, 마침내 두 팀의 유래없는 매치가 성사되었다. 4월 19일 열린 첫 더비에선 1.5군을 가동시킨 서울이 전력으로 나선 안양을 2-0으로 가볍게 꺾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전력차는 분명했다.

이러한 적대감의 근본적인 원인인 연고지 문제에 대해선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참조.

7.6. 서울 이랜드 FC[편집]

  • 서울 더비

2015년 서울 동남권에 이랜드 그룹이 새로 팀을 창단하면서 급부상한 라이벌 후보. 지리적으로도 서로 정 반대에 있기 때문에[50] 사실상 서울시의 축구팬들을 양분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일단 두 팀 다 서울특별시라는 최상의 입지에, 두 구단의 모기업이 GS그룹이랜드그룹이라는 국내 유수의 재벌들이라는 점, 거기에 팀의 상징색 또한 각각 빨간색파란색경평전[51]이라는 서로 정반대의 색깔이라는 점까지 더해져 성사될 경우 팬들의 기대가 상당히 높은 더비이다.[52]

이랜드가 15시즌 리그에 참여해 돌풍을 일으킬 때만해도 금방 더비가 성사될 줄 알았으나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15시즌 승격실패 이후 이랜드의 긍정적인 기류가 채 2년을 못가 소진되고 모기업의 투자감소와 기업 이미지 하락으로 17시즌 챌린지 하위권으로 떨어지며 기약이 없어지고 있다. 더하여 아무리 챌린지 라지만 서울에 자리잡고도 3년째 관중동원이 지지부진해서 FC 서울 프런트가 마케팅을 잘한거지 서울 끼고 있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교훈만 알려주고 있다.

아직까지는 만날 일이 없어서인지 특별히 나쁜 관계는 아니다. 같은 서울이면서 리그가 다르다보니 두 팀을 다 응원하는 서울 시민들도 있다. 팬덤의 격차는 무척 큰 편인데, FC 서울과 서울 이랜드 FC가 서울에 자리잡은 세월 차이가 10년에 달하고, 서울 이랜드 FC는 홈구장인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의 일반석을 쓰지 않고 별도의 가변좌석을 써서 관중을 많이 모으기 힘든데다 마케팅도 지지부진하기 때문.

2016년 부활한 2군 리그인 R리그에 FC 서울과 서울 이랜드 FC가 함께 참여했고, 조까지 같은 조로 편성되면서 1군이 아닌 2군에서 서울 더비가 먼저 열리게 되었다. 첫 경기는 3월 29일 낮에 열렸으며, 서울 이랜드 FC가 1:0으로 이겼다.

그러나 2018년 서울의 끝없는 부진으로 하위스플릿 추락, 거기에 하위스플릿 팀들도 막판 경기력 상승을 하는 팀들이라 강등위험이 크다. 자칫하면 2019년 K리그2에서 서울 더비를 볼판이다.

8. 시즌별 일람[편집]

9. 역대 감독[편집]

파일:FCseoul_logo_blackbg.png FC서울 역대 감독

구분

국적

이름

기간

1대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박세학

1984 ~ 1987

2대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고재욱

1988 ~ 1993

3대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조영증

1994 ~ 1996

4대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박병주

1997 ~ 1998

5대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조광래

1999 ~ 2004

6대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이장수

2005 ~ 2006

7대

파일:터키 국기.png

세뇰 귀네슈

2007 ~ 2009

8대

파일:포르투갈 국기.png

넬로 빙가다

2010

9대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황보관

2011 ~ 2011.04

대행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최용수

2011.04 ~ 2012

10대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최용수

2012 ~ 2016.06

11대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황선홍

2016.06 ~ 2018.04.30

대행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이을용

2018.04.30 ~ 2018.10.20

12대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최용수

2018.10.20 ~현재

10. 선수단[편집]

파일:FCseoul_logo_redbg.png FC 서울 2018 시즌 스쿼드

등번호

이름

포지션

국적

생년월일

비고

1

유현

GK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4년 8월 1일

2

황현수

D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5년 7월 22일

3

이웅희

D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0년 4월 7일

부주장

4

김동우

D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8년 2월 5일

6

김성준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8년 4월 8일

7

이상호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7년 5월 9일

8

신진호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8년 9월 7일

9

안델손

FW

파일:브라질 국기.png

1993년 9월 15일

10

박주영

FW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5년 7월 10일

11

에반드로

FW

파일:브라질 국기.png

1987년 9월 26일

13

고요한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8년 3월 10일

파일:CAPTAIN.png

14

김한길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5년 6월 21일

15

김원식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1년 11월 5일

16

하대성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5년 3월 2일

17

신광훈

D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7년 3월 18일

18

윤석영

D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0년 2월 13일

19

심상민

D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3년 5월 21일

20

박준영

D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5년 3월 15일

21

양한빈

GK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1년 8월 30일

22

윤승원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5년 2월 11일

24

정현철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3년 4월 26일

25

박민규

D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5년 8월 10일

26

김남춘

D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9년 4월 19일

27

신성재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7년 1월 27일

28

황기욱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6년 6월 10일

29

박희성

FW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8년 7월 8일

30

정진욱

GK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7년 5월 28일

31

손무빈

GK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8년 5월 23일

32

조영욱

FW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9년 2월 5일

36

박성민

FW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8년 12월 2일

37

송진형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7년 8월 13일

38

윤종규

D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8년 3월 20일

40

김원균

D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2년 5월 1일

41

유상훈

GK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9년 5월 25일

47

김우홍

FW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5년 1월 14일

50

박동진

D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4년 12월 10일

55

곽태휘

D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1년 7월 8일

72

정원진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4년 8월 10일

77

윤주태

FW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0년 6월 22일

99

보얀 마티치

FW

파일:세르비아 국기.png

1991년 12월 22일

11. 유니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FC 서울/유니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 사건사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FC 서울/사건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응원[편집]

2018 시즌 FC 서울 응원단

파일:external/www.fcseoul.com/resources/images/fanzone/pic_cheergroup_01.jpg

박소현, 서현숙, 강훈 응원단장[53], MC휘(장용휘), 이나경, 천온유
이주아, 김다정, 도정은, 박소진, 김도희, 김지은

장내 아나운서

김두봉, 고경섭


FC 서울/응원가, 수호신(서포터즈) 문서 참조.

하프타임이 끝나고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올 때 전 관중들이 핸드폰 플래시를 키고 전인권걱정말아요 그대부르는 시간을 갖는다.

14. 짠돌이 프런트[편집]

프런트: 우리 목표는 매년 우승하는 게 아닙니다. 돈 주고 사오는 건 1년에 한 명만.
자체 샐러리 캡 실시 중

서울이 돈을 안 쓰거나 가난한 구단은 아니다. 최악의 겨울 이적시장을 보냈다고 일컬어지는 2017 시즌에도 서울의 운영비 총액은 380억으로 전북에 이어 리그 2위였다. K리그에서 가장 공격적인 투자를 하는 전북도 서울을 운영비로 넘어선 건 AFC 챔피언스 리그를 노리고 돈을 아낌없이 떼려부은 2016년부터였다. 문제는 선수단 전력 강화 비용, 선수 영입 자금과 연봉 총액. 선수단 전력강화에 큰 돈 쓰는 걸 정말 정말 꺼린다. 빈민이 돈 아끼는 건 그저 생존 투쟁이고 자린고비란 말은 여유가 있는데도 안 쓰는 사람들에게 붙는다는 걸 상기하면 서울은 리그에서 그 누구도 못 따라올 자린고비 구단이다.

서울은 리그에서 운영비 대비 연봉 총액이 가장 낮은 구단이다. 연봉 총액 자체가 낮진 않다. 서울의 연봉 총액(93억 8,694만 원)은 2017 시즌에도 전북 다음으로 2위였다.[54] 하지만 연봉 총액 3, 4위인 제주(81억 7,901만 원)와 수원(78억 5,929만 원)은 시즌 운영비가 각각 220억, 270억으로 서울보다 169억, 110억 적었다. 100억 이상 많이 쓴 운영비에 대비하면 93억인 서울의 연봉 총액은 굉장히 낮은 편이다. 당장 연봉 총액 1위인 전북의 연봉 총액은 156억 6,197만 원으로 이것만으로도 63억 가까이 차이가 난다.[55] 2017 시즌 뿐만 아니라 2014~2016 시즌을 비교해 봐도 서울이 평균 운영비 376억 원, 평균 연봉 총액이 83억 원인 반면 우승 경쟁자였던 평균 운영비 369억 원, 평균 연봉총액이 128억 원이었으로 연봉 총액에서 차이가 컸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모기업에 부담을 심하게 주는 구단도 아니다. K리그 최고 인기 구단인 서울은 관중 수입과 광고 수입, 상품 판매 수입, 어디까지나 투자 사업이라서 수익사업인 FOS 등으로 매년 100억 이상의 자체 수익을 내며 2010년대 K리그에서 자생률이 가장 높은 구단이다. 자생력으로 서울에 비빌 구단은 이미 K리그에는 없고[56] 평관이나 객단가 등 수치로만 놓고 보면 유일하게 야구단들과 비교하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선수단 페이롤 증가를 신경질적으로 싫어한다. 연봉 인상에 생각 이상으로 인색하다는 말이 기자들 사이에선 공공연히 나오고 그래서 리딩 클럽이 이러면 안 된다는 주장이 일각에선 나오기도 한다. 2017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협상 마무리만 남겨놓고 연봉 아주 조금 올려주는게 싫어서 오르샤를 놓치고 마우링요를 영입해서 외인 농사 자체를 망쳤다.

선수 이적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인당 10억 이상 쓰지 않는다. 선수를 끼워넣든, 흥정을 하든 어떻게든 해서 그 이하로 맞춘다. 이 원칙을 깼을 수도 있는 사람은 리그 레전드 반열에 오른 특급 외인 마우리시오 몰리나 뿐이다. 이적료가 정확하게 공개되지 않아 10억에서 최대 15억까지 추정되기 때문. 그 외에는 얄짤없다. 2008 시즌 앞두고 영입된 데얀은 김태진과 이정열 2명을 붙여 10억에 딱 맞춰 영입했고 2010 시즌 앞두고 영입된 김용대도 선수 붙여서 깎으려고 했으나 성남이 현금 트레이드를 고집하자 현금 트레이드를 했는데 12억 부르는 걸 어떻게든 깎아서 10억에 맞췄다. 게다가 이적료가 공개된 영입 사례만 쳤을 때 2013 시즌 앞두고 윤일록을 10억에 영입한 게 현재로선 마지막 10억 투자다. 그나마 K리그가 전반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모양새라서 2010년대 초반에는 그래도 강력한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중반대에는 아직 기량이 괜찮았던 노장들을 영입해서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후로는 5~6억 쓰는 것조차 극도로 꺼리고 있으며 시민구단 프런트들이 서울보다 훨씬 발 빠르게 뛰어다니고, 영입도 적극적으로 한다. 국내 선수는 5~6억, 외인은 10억을 마지노선으로 정해놓고 중하위권 주전, 준주전급 유망주를 3~4억 정도의 싼 가격 혹은 트레이드로 데려오거나(그나마도 1~2명) 아예 이적료가 안 드는 FA를 노렸다. 그리고 이 FA에 대한 집착이 제대로 사달을 낸 게 2017 시즌. 전성기 지난 30대 FA를 이적료 안 든다고 대거 영입하는 바람에 페이롤은 93억이 되었는데 선수단이 93억 값을 했냐면 전혀... 못하거나 아예 뛰지도 못하면서 연봉만 많이 받는 자원이 속출했고 여기에 연봉 더 주기 싫어서 버티다 외인 농사까지 망해 시즌을 말아먹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아먹고 맞이한 2018 시즌에도 영입 방침에 전혀 변화를 주지 않았다. 부자 클럽이 주축 선수를 뜯어가 약소 클럽이 눈물 빼는 상황, 적어도 FC 서울에선 안 나온다.

기자들 사이에선 히로시마 도요 카프처럼 구단 내부에 불문율로 리그 제도에 없는 샐러리 캡을 정해놓았다는 말까지 나온다. 옵션 제외하고 순수 연봉으로 쳐서 국내선수는 3억 5천, 외국인은 10억 선으로 알려져 있다.

모기업도 대기업이고, 운영비도 많이 쓰고, 돈도 잘 버는데, 그 돈이 선수단에 가는 게 아니라면? 돈이 전부 마케팅을 비롯한 다른 데로 가는 것이다. 덕분에 구단 인지도나 흥행은 잘 되고 자생률도 높지만 성적이 아쉽게 나올 수밖에 없고 성적을 원하는 팬들 입장에선 지지리 궁상이 따로 없다. 매 시즌 우승을 노린다고 프런트에서 말은 그렇게 하지만 중국, 일본, 중동까지 볼 것도 없이 전북보다 선수단에 투자하는 비용이 40~60억 이상 적으니 현실적으로 상대가 될리가...

선수영입에 소극적이고 FA를 안 잡고 마케팅에만 돈을 퍼붓는 이 짠돌이 기질은 여자 배구단 GS칼텍스 서울 KIXX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으며 축구보다 인재풀이 좁은 여자 배구 특성상 성적이 중하위권에 머물고있다.

비싼 돈 들여 운영하면서 이렇게 운영되는 이유는 구단주 의중도 크겠지만[57] GS그룹의 구성이 원인으로 주목된다. GS는 LG에서 상호 합의하에 분리되어 나온 그룹인데 LG그룹처럼 국제적으로 먹힐 사업이 없다. 사업 분야를 살펴보면 GS칼텍스정유산업, GS건설ㆍGS기공의 건설산업, GS리테일GS홈쇼핑유통산업으로 전부 철저한 내수사업이다. 모기업이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수원 삼성 블루윙즈나 수출 집약적 사업인 자동차 사업을 하는 전북 현대 모터스와 달리 FC 서울은 아챔 우승해봐야 모기업에 국물 한 방울 안 떨어진다. 마케팅에 투자해서 자체 수익 증가시켜 구단 자생력을 높이는 건 본사 부담도 줄고 일석이조니 기꺼이 하지만 전북처럼 이적료 턱턱 던지고 선수단 연봉에 백수십억씩 때려 박으며 성적낼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은 서울 연고 구단인 서울 이랜드 FC가 성공해서 FC 서울의 파이를 흔들었다면 위기의식이라도 느꼈겠지만 다들 알다시피 처참한 성적(2부 리그 꼴찌)과 폭망한 흥행, 거기에 모기업 이랜드그룹의 사정까지 안 좋아 K리그2에서 승격은 기약이 없다.

그것도 모자라, 팀의 레전드 데얀을 은퇴시키려 했고, 계약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으려고 해서 데얀이 FC 서울의 최대 라이벌인 수원 삼성으로 이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5. 그 외[편집]

유니폼 어깨 부분에 패치를 다른 K리그 팀보다 많이 붙인다. 보통 K리그와 지역 연고 패치 2개를 붙이는게 기본인데 여기에 GS그룹의 계열사 패치 2개를 추가해서 4개가 들어간다.

세뇰 귀네슈 감독 시절 터키어 통역사로 JTBC 비정상회담의 전 출연자이자 흑역사 에네스 카야가 일한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2007년부터 2012년까지 동북고 축구부를 유스팀으로 운영했고, 박주영이 교생 실습을 온 적도 있다. 2012년 계약이 만료된 이후 현재는 오산중학교와 오산고등학교에 유스팀을 운영하고 있다. 구단 유소년 팀 '리틀 FC 서울'도 2012년 말부터 '퓨처 오브 FC 서울'로 이름을 바꾸고 더 박차를 가해서 운영하고 있다. 이 FOS(Future of FC Seoul의 약자)는 전문적으로 유스를 육성하는게 아니라 유소년레포츠에 더 가까운데 만단위로 회원을 끌어모아 잠재적인 팬을 늘리고 수익을 창출해 구단 자생률을 높이려는 장기 프로젝트로 서울 각지에 30개가 넘는 구장을 확보해 야심차게 진행중이다. 현 회원수는 5~6천선.

팀 정책적으로 젊은 선수들의 국외 진출을 장려하고 있으며 외국 진출에 성공한 선수들이 대체로 제법 큰 업적을 남기고 있다. 김동진, 박주영, 이청용, 기성용이 대표적인 예. 이들은 이후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국가대표로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2015년 8월 28일 손흥민토트넘 핫스퍼로 이적함에 따라, FC 서울 소속으로만 K리거 시절을 보낸 기성용, 이청용과 더불어 FC 서울 U-18에 적을 둔 적이 있는 손흥민까지 한국인 프리미어리거 3인이 FC 서울 출신으로 채워지게 되었다.[58] 손흥민 본인도 "K리그 클래식에서 뛴다면 서울에서 뛰고 싶다"고 하는 등 서울에 애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손흥민 10대1 인터뷰 FC서울 볼보이였던 손흥민 “청용이형 보며 프로 꿈 키웠죠” 단, 이적에 따른 연대기여금은 손흥민이 뛰던 당시 유스팀이었던 동북고의 손에 쥐어졌다.

하나같이 서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고 실력만으로도 K리그의 역사에 길이 남을 역대급 레전드 에 가려진 감이 있지만, 외국인 선수 영입의 굴곡사가 많았다. 많은 서울팬들의 사랑을 받던 히칼도가 떠난 이후 생긴 히칼도의 저주는 유명하다. 2008년 무삼파와 제이훈, 2009년 케빈과 안데르손, 2010년 에스테베즈까지 3년 연속 실패를 거듭했다. 2009년까지 제 값을 해준 외국인 선수는 히칼도, 아디, 데얀 뿐이었고 이 중에서 데얀은 인천에서 이미 실력이 검증된 선수였다. 이 징크스는 2010시즌 임대 영입된 제파로프가 맹활약하면서 깨지게 됐다. 이후 2011년 마우리시오 몰리나, 2012년에는 세르히오 에스쿠데로가 들어오면서 안정적인 외국인 4인방을 형성하면서 2013년까지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2013년이 끝나고 아디는 은퇴하고 코치로 전업, 데얀은 중국으로 이적, 몰리나의 부진으로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데얀의 대체자로 데려온 하파엘[59][60]은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한채 6개월만에 임대 이적했으며,[61] 성남 출신 에벨톤을 데려와 공격진을 보강했지만 초반에만 조금 반짝하고 역시 마찬가지로 골 가뭄에 시달렸다. 히칼도의 저주에 이은 10번의 저주 그나마 아디의 뒤를 잇는 수비수 오스마르는 팀의 중심이 되어 좋은 활약을 선보이고 있다. [62] 2015년 몰리나도 말년에 노익장으로 거듭나며 부활했고, 새로 들어온 다카하기와 대전에서 새로 합류한 아드리아노도 훌륭한 플레이로 팀을 이끌고 있으며 2016년에는 몰리나가 떠난 대신 데얀이 돌아오면서 용병 수난사도 끝나게 된 줄 알았으나..

시작은 다카하기로 FC 도쿄의 하대성과 트레이드 됬는데 하대성은 현재 부상으로 2시즌을 날려먹고 있고, 대체 용병(아시아쿼터)로 영입된 이란 출신 칼레드는 아무런 활약 없이 인스타 그램에서 황선홍을 디스하며 리그를 떠났고 데얀은 최대 앙숙인 수원 삼성으로 떠나 제2의서정원이 되었고 최후의 보루인 오스마르 또한 임대 후 완전이적 조건으로 J리그 세레소 오사카로 팀을 옮겼다. 또한, 중국으로 떠났던 아드리아노는 서울이 아닌 전북으로 복귀하여 서울 팬들은 또한번 절망하게 된다. 2018년 시즌 용병들은 처참한 상황인데, 대구에서 영입한 에반드로의 경우 기본적인 볼터치에 문제가 있고 우람한 체격과 달리 몸싸움이 약한 것처럼 보여지며 우당탕탕 드리블에 연계능력 부족 등 총체적 난국이다. 히로시마에서 영입한 안델손은 골 결정력이 부족하고 독단적인 플레이를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플레이 성향 때문에 주장인 고요한과 경기중 심한 언쟁을 하였고 그후 인스타 그램의 서울관련 사진을 삭제하는 유치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현재는 복구함) 또한, 중국으로 떠났던 자일을 영입할 것이라는 썰이 돌았으나 영입은 없었고 대신 제2의 데얀, 제리치를 꿈꾸며 동유럽에서 보얀 마티치라는 타켓형 스트라이커를 영입하였다. 기대를 모았던 마티치는 현재 활약이 매우 미미하고 고대앙리 박희성(1년에 한골 넣는 공격수)에게 조차 밀리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K리그 역대 최다 승점을 안겨준 데얀, 마우리시오 몰리나의 데몰리션과 욘스가 떠나기전 한시적이었지만 아챔에서 극강의 포스를 보여줬던 데얀, 박주영, 아드리아노의 아데박과 비교할때 현재의 안델손, 에반드로, 마티치의 공격진은 꿈도 희망도 없어보인다. 유일한 희망은 신예 조영욱.

서포터즈 수호신은 수원의 프렌테 트리콜로에 이은 K리그에서 가장 거대한 서포터즈이다. 초반에 클린 서포팅을 모토로 삼고, 소모임 위주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유지해 K리그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지만 여러가지 사고가 터지면서 마찬가지로 좋지 않는 눈초리를 받고있다. 흑역사로는 위에 서술한 것처럼 안정환 도발 사건등이 있는데, 수원과의 2군 경기에서 한 서울팬이 수원 소속이던 안정환과 가족을 타겟으로 인격모독적인 발언과 욕설을 했던 사건이다. 분개한 안정환은 경기 도중에 관중석으로 뛰어 올라갔다가 퇴장을 당했으며, 언론에도 보도되며 서울 서포터들이 한동안 많은 비난을 받았다. 특히, 내부 강경파 리더격 소모임인 타나토스는 명실상부한 K리그 서포터즈계의 공공의 적.

2011년까지 아디다스에서 용품 후원을 받았으나 2012년 부터는 르꼬끄스포르티브와 함께하고 있다. 르꼬끄와 연계해서 전국 각 르꼬끄 매장에서 유니콤과 트레이닝복 등 각종 상품을 판매하고있다. 계약할 때 4년간 80억원 이는 축구 뿐만 아니라 국내 스포츠 사상 최대 규모이다.

KBS2 우리동네 예체능 2014년 8월 12일 방송분에 최용수 감독을 비롯해 조광래 전 감독, 이을용, 이민성 등이 FC 서울 올드 스타로서 출연했다. FC 서울 팬이라면 여러모로 즐거운 장면들이 많은 방송. 다시보기

GS그룹 산하에 있는 관계로, 웹 사이트 회원으로 가입하면 FC 서울 GS&포인트 카드를 우편으로 배송해 준다. GS25나 GS 주유소에서 적립용으로 쏠쏠하게 쓸 수 있다. 그리고 신한카드와 제휴해서 유소년 축구사랑 카드도 출시했다. 신용/체크 둘 다 발급이 가능하다.

바이어 04 레버쿠젠하고 친선경기도 한적이 있다. 아무래도 FC서울이나 바이어 04 레버쿠젠이나 둘다 LG에서 후원을 해줘서일지 잘모르겠지만 K리그중에서 제일 프리미어리그인 FC서울이 당시 잘나가고 있던 유럽 분데스리가 프리미어리그 삼총사중에 하나인 그 레버쿠젠이랑 친선경기했는게 묘하게 아이러니하다.

16. 관련 문서[편집]

17. 둘러보기[편집]

[1] K리그 웹 사이트 공식 구단 소개.[2] 전신인 럭키금성 황소의 창단년도이며, 이 역사를 인정해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공식 기록상 FC서울의 창단년도 역시 1983년이다. 간혹 엠블럼에 2004년이 있다고 2004년을 창단연도로 왜곡하기도 하지만 부천 FC 1995 등 다른 구단들과 마찬가지로 구단 역사에서 의미 깊은 연도일 뿐 1983년만이 구단, 한국프로축구연맹 등등에 공인된 공식 창단연도이다. 엠블럼에 별이 없는걸 빌미로 삼아 양심에 찔려 별을 안 단다는 꼬투리 잡기도 있었는데 역대 엠블럼을 보면 85년 첫 우승이래 별을 달았던건 안양LG 시절 02~03 단 2년이다.[3] 1983년부터 1986년까지는 순회 경기 시절로 형식상으로만 연고가 있던 때이다.[4] GS칼텍스 서울 KIXX 단장 겸임[5] 홈, ACL, 민트색 골키퍼 유니폼, GS홈쇼핑의 브랜드 네임[6] 리그 어웨이, 분홍색 골키퍼 유니폼[7] GS칼텍스의 상품 브랜드[8] 대한축구협회 FA컵의 전신 격인 대회.[9] 2010년 5월 5일 쏘나타 K리그 2010 10라운드 FC 서울 vs 성남. 60,747명[10] 충청지역 광역연고 대전, 청주, 천안 포함이며 1984년부터 1986년까지는 모든 구단이 전국투어방식으로 경기를 하던 시절이라 실질적인 충청도 연고 기간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3년간이다.[11] # 경향신문, 1980년 03월 19일자[12] 구단 창단 주체가 창단을 희망하고 추진해 온 연고지에 자리잡지 못하고 연맹에 의해 연고지가 배정되는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기업이 흥행과 홍배에 유리한 서울 연고를 희망하기때문에 연고지 분배를 하는 협회/연맹은 조정을 할 수밖에 없다. KBL이 1996년 출범할 때 초기 서울을 공동 연고지로 묶은 것도 같은 이유. 이는 야구 등의 타 종목도 마찬가지여서, 창단 당시 서울로 가고 싶어했던 OB에게 차후에 보내준다는 조건으로 임시로 충청도로 보냈다던가,해태의 리그참가가 확정되자 그때까지 서울을 고집하던 롯데가 제과 라이벌로써 부산을 승낙한것 등.(당시 KBO에서는 각 분야별로 1개 기업씩 참가하도록 계획 했지만,실업야구팀가지 가진 롯데는 서울이 아니면 안된다며 버티고 있다가 호남지역을 맡을 기업이 없어서 난항을 겪던중 해태가 맡게 되자 부산경남 연고지를 승낙해서 제과 기업의 라이벌전이 생성 되었다.[13] 특히 애초에 연고 구단이 있는 지역에 추가 연고권을 내주는 건 기존 구단에 대한 권리 침해이므로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다. 국내 야구의 경우에도 SK가 현대에게 (인천), 다시 현대가 두산과 LG에게 연고권 침해 보상을 지불한 전례가 있다. [14] 정확히는 서울+인천+경기 연고. 서울만을 연고로 한 최초의 프로축구 팀은 일화였다. [15] 당시 홈에서 같은 팀을 3번 만나도록 대진이 짜여졌는데 LG vs 일화 경기가 2회, 일화 vs LG 경기가 4회로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홈 경기 개최 횟수 기록 상으로 LG 14회, 일화 16회, 타 구단 15회로 기록되어 있다. 같은 연고지를 사용하던 두 팀간의 경기이므로 기록 입력에 오류라고 판단하여 LG의 홈 경기 개최 횟수를 하나 늘려 15회로 계산하였다.[16] 이사회는 각 구단 구단주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LG 포함 서울 연고구단의 구단주들 역시 의결과정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이사회 의결당시 서울 연고구단들의 반대가 있었다는 정황은 리그베다 시절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문서 토론에서 제시된 자료들로 입증되었다. 대표적인 자료들은 1995년 1월 당시 사무총장인 김기복 사무총장이 원래 1994년 12월에 의결되어야 하지만 서울 연고 3개팀 특히 LG의 반대가 심해서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는 인터뷰를 하였으며 1995년 2월 이사회 바로 직전 계속해서 서울 연고 3개팀의 반대가 있을시 다수결로라도 강제로 통과시키겠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와 관련된 당시 월간축구와 스포츠 기사들은 나무위키 토론창에 있는 리그 시절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의 강제성 vs 자발성 토론 문서에 자세히 나와있다. [17] 경기장 건설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과 기간, 조건 등을 고려해볼때 사실상 구단 입장에서 서울에 남는 것이 불가능한 조항이며 '시키는대로 나가라'라는 표현을 돌려한 것에 불과했다. 당시 포스코가 순수 모기업 자금으로만 이미 전용구장을 두 곳이나(포항, 광양) 지은 전례가 있지만 모두 포스코 공장 내 부지로 지방과 서울의 경기장 부지 매입비부터 차원이 다르다. 또한 LG그룹에서 1994년 뚝섬 돔 경기장 건설을 계획중이었던 것으로 서울 시내 축구전용구장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돔구장은 1993년 115만4308명의 관중을 모은 LG 트윈스와 당시 400만 이상 총관중을 기록한 프로야구 1차 전성기 시절 인기를 뒤에 엎고 추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기를 뒤에 엎고도 프로야구 홈경기만으로는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레저 시설등을 갖춘 복합 스포츠 타운을 계획하였다. 하물며 기업구단 단독으로 서울 시내에 축구만 할 수 있는 축구전용구장을 짓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고 1990년대에 기업구단 단독으로 축구전용구장을 짓는 것이 가능하고 단지 의지의 문제라면 현재는 그래도 그때보다는 프로축구가 인기가 올라간 상태로 서울의 이랜드가 단독으로 축구전용구장을 지을 수도 있는데 아예 엄두도 못내고 있다. 또한 경기장 인프라 구축은 해당 구단이 직접 구장 건설을 하면 더할나위 없이 좋지만 축구전용구장을 짓지 못 한다고 해서 연고지에서 강제로 축출할 정당성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당성이 있다면 지금도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 현대산업개발과 이랜드에게 축구전용구장 안 지으면 부산과 서울이라는 빅마켓 연고지 구단으로 투자를 안 한고있고 자격이 없다며 강제로 축출하는 방법을 쓰면 되는데 왜 이런 방법이 거론조차 안 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에 이런 비상식적인 행정이 가능했던 것은 2002년 월드컵 유치라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기업인 구단의 이익은 무시되고 희생해도 된다는 분위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18] # 베스트일레븐 2000년 5월호[19] # 베스트일레븐 2000년 6월호[20] 당시 운영중이던 서울시청 축구단조차 "남자축구는 이미 활성화될 대로 활성화되었으니 대신 여자축구를 육성하겠다"는 괴랄한 명분을 들어 해체시킬 정도였으니 당시 서울시가 축구에 쓰는 돈을 얼마나 아까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실상은 전혀 다르다. 서울시립대 재학생으로 구성된 특이한 팀이었던 서울시청 축구단은 1999년을 끝으로 체육 특기자 제도가 개정되면서 더는 체육 특기생을 받지 못해 겨우 연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해당 내용은 그럴싸하게 갖다 붙인 명분이었을 뿐.) 애초에 한국의 시민구단은 축구 잘 모로는 지자체가 적자를 감수하고 운영하는 지자체 구단이다. 인천, 대구, 대전, 광주 등 대도시에 열악한 시민구단들 집어넣는 바람에 팀은 팀대로 수시로 흔들리고 서울 유나이티드로 서울 연고 K리그 구단을 만들었으면 가장 큰 서울 시장을 날려먹는 결과가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21] 당시 YTN 뉴스 보도 전문 - 한국프로축구연맹은 부산아이콘스의 연고지 이전신청 철회에 따라 긴급 이사회를 열고 안양LG의 서울 연고복귀를 만장일치로 최종 승인했습니다. 지난 1995년 이후 9년만에 서울로 복귀하는 LG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적 시민구단으로 거듭나기 위해 유명선수 영입과 구단의 수익구조 개선에 힘쓰겠다고 밝혔습니다. LG는 앞으로 서울시와 연고협약을 체결한 뒤 다음달 3일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부산 아이콘스와 K리그 개막전을 갖습니다.[22] # 안양 LG 치타스의 연고이전 공고문[23] FC 서울은 서울월드컵경기장으로 연고를 옮기며 서울 연고 입성비(사실 상암의 서울월드컵경기장 사용료 명목이었지만 점차 서울 연고구단의 입성비처럼 의미가 변질되었다.)의 반액뿐인 75억원을 납부하였다. 위에 언급된 축구전용구장 건설시 서울로의 연고 복귀를 허용하겠다는 당초의 조항을 백지화한 것.[24] 당초 서울시에서 책정한 서울 월드컵 경기장 건설비 중 서울 연고 프로구단의 분담금은 총 150억이므로 나머지 75억원을 납부하는 또 다른 팀이 나오고, 그 구단이 서울 월드컵 경기장을 홈 구장으로 결정한다면 서울 월드컵 경기장은 2팀이 사용하는 구장이 된다.[25] 서울특별시는 생활여건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편해 선수들에게 메리트로 작용하고 인구도 제일 많아서 관중몰이에도 유리하다. 홈구장인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아시아 최대의 축구전용구장이다. 사실상 K리그 전 구단 중에 최상의 조건을 갖고 있는 셈이다.[26] 이게 제일 심했던 시즌이 2013년, 2015년이었다. 2013년에는 4월 말까지 강등권에 위치할 정도였고, 2015년 초반에는 리그-아챔 통틀어 경기당 득점이 0점 아니면 1점만 나와서 2진법 축구, 디지털 축구란 비아냥을 들어야했다.[27] 다만 돈을 후하게 쓰는 전북과 달리 대부분 자유계약을 통한 영입이다.[28] 아드리아노를 팔아서 얻은 40억을 얻었음에도 돈을 쓰는게 아까워 실력있는 선수들을 데려오지 못해 팬들에 불만을 샀다.[29] 그래서 파울도 리그에서 가장 적은 팀이었다. 반대로 파울이 많은 구단은 전북. 공격수를 많으면 4명, 5명까지 넣는 특성상 후방에 넓은 공간이 발생하고 이걸 중원에서 거친 압박으로 메운다. 그래서 파울개수도 많고 부상을 초래할 수 있는 악질적인 반칙이나 교묘한 눈속임도 많다.[30] 마케팅에 투입하는 인원 부터가 타팀과 3~5배 차이가 난다. 또한 채용, 연수과정도 철저해서 스포츠마케팅 전공한 고학력자들을 채용해 현장에서 철저하게 굴리면서 학습시킨다고 한다.[31] 티켓 1장당 평균 매입 금액. 즉 티켓 1장의 가치라고 볼 수 있고, 공짜표가 적다는 의미도 된다.[32] 비수도권 구단 중엔 가장 높은 전북의 객단가와 비교해도 5,000원 차이난다.[33] 최고가는 인천 유나이티드가 출시한 1100만원짜리 시즌권[34] 상기한 서울의 비칭은 수원 서포터들로부터 시작된 명칭들이다.물론 수원보다 FC 안양 서포터들이 더 싫어할테지만.[35] 아이러브사커같은 커뮤니티는 슈퍼매치를 전후하여 이러한 도발전으로 여러 명의 서울 팬과 수원 팬들이 활동 정지를 당한다.[36] 하우젠컵 경기로 박주영의 해트트릭과 정조국의 골로 코너킥 상황에서 마토가 한골을 넣는데 그친 수원을 4-1로 격파했다.[37] 다만 이것은 서울과 수원이 서로를 라이벌이라고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로 싫어하기 때문이고, 실제로는 분위기로 보나 뭘로 보나 슈퍼매치가 더 격렬하고 관심을 끄는 매치이다. 게다가 경인더비도 처음에는 서포터들에게 언론이 만들어준 더비라는 소리를 들었다. 인천 관중동원력이 수원보다 훨씬 약한데도 지금의 위상을 갖춘데는 언론의 지원사격 덕이 컸다.[38] 할로윈데이이자 차두리의 은퇴경기.[39] 여담으로 서울, 전북, 수원의 팀컬러와 이러한 상성이 절묘하게 포켓몬스터와 맞아떨어져서 관심을 끌었다. 빨간색 서울은 불꽃 타입, 초록색 전북은 풀 타입, 파란색 수원은 물 타입에 대응된다. 때문에 2012년까진 K리그의 파이리/꼬부기/이상해씨로 불렸다.[40] 2대 3는 스코어로만 보면 박빙의 경기처럼 보이지만, 1대 3 상황에서 오스마르가 종료 직전에 넣은 골 때문에 점수만 2대 3이었지 경기 내용은 열세였다.[41] 여담으로 전북은 유난히 홈에서 치뤄지는 결승전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2010 시즌 서울과의 포스코컵 결승전, 2011년 알 사드와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2013 시즌 포항과의 FA컵 결승전, 그리고 사실상 결승전과 다름 없었던 서울과의 2016 시즌 리그 38라운드까지 전부 안방에서 원정팀의 우승을 지켜봐야만 했다.[42] 팟캐스트 전서사에서 수호신 의장이 밝힌바에 의하면 제일 적극적으로 호응해준건 의외로 사이 안좋은 포항 서포터였다고. 포항, 울산, 부산 등 영남쪽에서 호응이 좋았다고 한다.[43] 침묵 서포팅은 상대 서포터와 협의하면 봐준다는 조건을 달며 전광팬에 해당 사안에 대한 안내를 해줬고 걸개는 부정에 항의하는 표현의 자유는 허용하되 정치적 의견이 들어간 걸개는 안되는 규정을 감안해 글귀 수위를 조절하는걸로 수락했다.[44] 심지어 평생의 라이벌 수원마저 서울의 우승을 축하해줬다.[45] 모기업 회장님이 축구광으로 부지내에 전용구장까지 지어줄 정도다보니 K리그 초창기 멤버들중 연고이전과 일절 상관없는 유일한 팀이다. 부산은 연고이전 시도를 했다 실패한 케이스.[46] 여담으로 연고이전을 강하게 반대하며 서울에 온갖 비칭을 가져다 붙인 수원은 서울을 비롯한 팀들이 10년 넘게 구르며 만든 리그 판에 들어온 후발주자이고 이것이 서울팬들이 수원을 더욱 아니꼽게 보는 이유이다.[47] FC 서울은 세로 줄무늬이며 포항은 가로 줄무늬이다.[48] 1승 4무, 4무 가운데 2경기는 승부차기 승[49] 팀을 불문하고 서포터중에는 이런 충돌을 미화하거나 바라는 사람들도 꽤 있는데 상식적으로 무슨 사정이 있건 폭력은 범죄고 리그의 흥행을 떨어뜨리는 요소이며 강성 서포터들이 동경해 마지 않는 유럽 땅에선 심각한 사회 문제로 자리잡은지 오래이다. 부디 착각하지 말자.[50] FC 서울은 서북권, 서울 이랜드 FC는 동남권을 주요 팬 베이스로 삼고 있다. 홈 경기장이 각각 상암(마포구)과 잠실(송파구)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51] 정확히는 남색이다.[52] 그리고 두팀의 홈경기장은 우리나라의 큰 스포츠 이벤트가 열린 곳이다. 서울 이랜드의 잠실종합운동장은 86 아시안게임, 88 서울 올림픽이 열린곳이며, FC 서울의 서울월드컵경기장은 2002 한일월드컵 개막전 프랑스 대 세네갈전, 준결승전 한국 대 독일전이 열린곳이다.[53] E석 응원단장. 현재 KBL 서울 SK 나이츠, WKBL 부천 KEB하나은행의 응원단장도 맡고 있다.[54] 참고로 이 중에서 13억이 데얀의 연봉이었다. K리그에서 4번째(데얀 앞에는 김신욱, 김진수, 에두만 있었다.)로 비싼 선수였던 데얀이 연봉을 깎을 생각을 안 했던 것도 재계약 포기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55] 실제로는 차이가 더 난다. 각종 재정 통계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 K리그는 리그 종료일 기준 등록 선수만으로 각 구단별 연봉 총액을 계산하는데 이러면 여름 이적시장에서 떠난 선수는 분명히 뛰었는데 연봉 총액 계산에선 빠진다. 2017년 여름 전북에서 세레소로 이적한 김보경은 전북에서 거액 연봉을 받았음에도 시즌 후에 내놓은 연봉 총액 합계에서 빠졌다.[56] 서울을 제외한 다른 구단들은 자체 수입이 아니라 이적료 수입에 기대는지라 한두 해 반짝 자생률 올라갔다 다시 원상 복구되는 패턴이 반복된다.[57] 허창수 구단주는 경기 끝나면 관중수부터 확인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58] 다만 손흥민은 프로팀 데뷔가 아닌 동북고 시절 1년만 재학하고 바로 함부르크 SV으로 넘어간 사례라 만 FC서울 출신 프리미어리거로 인정하고 손흥민은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59] 영입했을때부터 가루 단위로 까였다. K리그 최고의 공격수에 몬테네그로 대표팀까지 했던 데얀을 대체한다는게 고작 브라질 하부리그에서 반짝 활약한 무명선수를 데리고 왔으니 팬들 입장에선 기가 막힐 노릇.[60] 게다가 그 시기에 하필 옆나라에선 대형스타 디에고 포를란을 영입한 바람에 더욱 비교당했다. 게다가 그 전에 불가리아 대표팀 공격수 출신 보지노프가 서울 이적설이 나와서 많은 기대감을 줬지만 루머로 끝난 바람에 아쉬움이 매우 컸다.[61] 그래도 체격이 탄탄하고 좋으니 믿어보자는 의견도 많았지만 FA컵에서 2군을 내보낸 인천을 상대로 선발로 나왔음에도 OME급 플레이를 보여주는 바람에 결국 그를 감싸주는 팬들마저도 등을 돌렸다. 그리고 하파엘 사진은 FC 서울 갤러리에서 혐짤, 금지짤로 통하게 되었다.[62] 2016 시즌에는 FC 서울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주장까지 맡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재계약 안하냐 현기증 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