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남(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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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1943년 출생
- 자성군 출신 인물
- 실향민
- 서울은로초등학교 출신
- 보성중학교(서울) 출신
- 한양과학기술고등학교 출신
- 고려대학교 출신
- 해병대 출신
- 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선수
- 센터백
- 1967년 데뷔
- 1974년 은퇴
- 양지 축구단/은퇴, 이적
- KEB외환은행
- 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1964 도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1970 방콕 아시안 게임 참가 선수
- 1970 방콕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 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코치
- 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감독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감독 대행/축구
- 제주SK FC/역대 감독
- 산둥 타이산/역대 감독
- 칭다오 하이뉴/역대 감독
- 울산 HD FC/역대 감독
-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참가 감독
- AFC 아시안컵 준우승 감독
- 대한민국의 축구 행정가
- K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
김정남의 역임 직책 | ||||||||||||||||||||
김정남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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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의 기타 사항 | ||||||||||||||||||||
대한민국의 前 축구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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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정남 金正男 | Kim Jung-nam | |
출생 | ||
국적 | ||
신체 | ||
주발 | 오른발 | |
직업 | ||
학력 | ||
소속 | 선수 | |
감독 | 한일은행 축구단 (1974~1976 / 코치) 대한민국 U-20 대표팀 (1974 /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1974~1976 / 코치) 포항제철 축구단 (1976~1980 /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1977~1978 / 코치) → 대한민국 대표팀 (1977 / 감독 대행) 대한민국 대표팀 (1980~1982 / 감독 대행) 유공 코끼리 (1982~1985 /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1984 /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1985~1986) 유공 코끼리 (1985~1992) 대한민국 대표팀 (1988) 산둥 루넝 타이산 (1998) 칭다오 이중하이뉴 (1999) 울산 현대 호랑이-울산 현대 (2000~2008) | |
행정 | ||
국가대표 | ||
병역 | ||
은로초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했으며 당시 좁은 골목에서 공놀이를 하고 연습하곤 했다. 이 덕택에 키핑과 기술이 좋아서 두각을 드러내 보성중학교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학원 축구는 1부, 2부가 나뉘어 있었는데 보성중은 2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고 싶었기에 축구 명문 한양공고로 진학하게 된다. 원래는 공격수였으나 경쟁에 밀려서 미드필더나 풀백을 하게 되었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게다가 한양공고가 운동장도 좁은 편이라 3:3, 4:4 등 소규모 인원의 보충 훈련을 즐겨 하며 계속 수비력과 기술이 발달했다. 어느 날 주전 선수가 아파서 대신 경기에 출장하게 된 이후 주전을 꿰차게 되었고 이후 승승장구하게 된다.
한양공고 3학년이던 1962년 임국찬, 박인선, 나윤식, 주민환 등과 함께 4월 태국에서 열린 제4회 AFC U-19 챔피언십에 참가했고,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8월에 대표팀의 일원으로 메르데카컵에도 참가하게 됐다.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고 싶었기에 축구 명문 한양공고로 진학하게 된다. 원래는 공격수였으나 경쟁에 밀려서 미드필더나 풀백을 하게 되었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게다가 한양공고가 운동장도 좁은 편이라 3:3, 4:4 등 소규모 인원의 보충 훈련을 즐겨 하며 계속 수비력과 기술이 발달했다. 어느 날 주전 선수가 아파서 대신 경기에 출장하게 된 이후 주전을 꿰차게 되었고 이후 승승장구하게 된다.
한양공고 3학년이던 1962년 임국찬, 박인선, 나윤식, 주민환 등과 함께 4월 태국에서 열린 제4회 AFC U-19 챔피언십에 참가했고,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8월에 대표팀의 일원으로 메르데카컵에도 참가하게 됐다.
고려대학교 축구부 63학번으로 진학했고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A대표팀에서도 활약하기 시작한 김정남은 1964년 도쿄 올림픽을 통해 세계의 벽과 마주하게 됐다. 한국은 동구권의 강호 체코 슬로바키아와 세계 최강 브라질, 중동의 아랍공화국과 경기를 치렀고, 처절한 아픔을 맛봤다. 체코와의 첫 번째 경기에서 1-6으로 대패했고, 이어 브라질전에서 0-4패, 그리고 아랍공화국에 0-10으로 참패하면서 쓸쓸히 귀국해야 했다.


도쿄 올림픽을 경험으로 한층 성숙해진 김정남은 대표팀의 일원으로 메르데카배와 킹스컵 등에서 수비의 중심 역할을 맡았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1966년부터는 '아시아 최고의 수비 듀오'로 평가받았던 김호와의 만남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최고의 호흡을 보여주면서 견고한 수비망을 구축, 아시아 무대를 호령했다. 김정남이 스위퍼 역할을 맡으면서 냉정하고 침착하게 뒤에서 커버 플레이를 하면, 앞에서는 열정적인 김호가 스토퍼로서 상대 공격수를 무력화시켰다.

도쿄 올림픽을 경험으로 한층 성숙해진 김정남은 대표팀의 일원으로 메르데카배와 킹스컵 등에서 수비의 중심 역할을 맡았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1966년부터는 '아시아 최고의 수비 듀오'로 평가받았던 김호와의 만남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최고의 호흡을 보여주면서 견고한 수비망을 구축, 아시아 무대를 호령했다. 김정남이 스위퍼 역할을 맡으면서 냉정하고 침착하게 뒤에서 커버 플레이를 하면, 앞에서는 열정적인 김호가 스토퍼로서 상대 공격수를 무력화시켰다.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축구는 아시아의 강자로 자리매김했지만, 이상하게도 세계로 나가는 길목에서 번번이 발목을 잡히곤 했다. 1965년 열렸던 잉글랜드 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는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던 북한이 두려워 아예 불참했고, 67년에는 일본에 골득실에서 밀리며 멕시코 올림픽 진출에 실패했다. 이어 1969년에는 호주의 벽에 막혀 멕시코 월드컵 진출이 좌절됐다. 1970년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쉬움이 남는 시기였다.
그 와중에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 신화를 달성했고, 이에 자극받은 한국 정부는 최고의 엘리트 팀인 양지를 창단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김정남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1966년에 해병대에 입대했고, 67년 1월에 창단한 양지 팀에 입단하게 됐다. 멤버 면에서 사실상 대표팀과 다름없었던 양지는 최고의 지원을 통해 전력 강화를 꾀했고, 심지어 105일간의 유럽 원정까지 떠났다.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김정남은 잦은 부상으로 고생했다. 결국 그것으로 인해 김정남은 1971년에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외환은행에서는 선수 생활을 계속했던 그에게 당시 장덕진 KFA 회장은 호주 유학을 권유했고, 김정남도 지도자 교육을 받는다는 생각에 호주로 떠났으나 알고 보니 플레잉 코치였다고.
1972년 외환은행으로 돌아와 선수 생활을 연장하다가 1974년에 은퇴한다.
그 와중에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 신화를 달성했고, 이에 자극받은 한국 정부는 최고의 엘리트 팀인 양지를 창단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김정남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1966년에 해병대에 입대했고, 67년 1월에 창단한 양지 팀에 입단하게 됐다. 멤버 면에서 사실상 대표팀과 다름없었던 양지는 최고의 지원을 통해 전력 강화를 꾀했고, 심지어 105일간의 유럽 원정까지 떠났다.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김정남은 잦은 부상으로 고생했다. 결국 그것으로 인해 김정남은 1971년에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외환은행에서는 선수 생활을 계속했던 그에게 당시 장덕진 KFA 회장은 호주 유학을 권유했고, 김정남도 지도자 교육을 받는다는 생각에 호주로 떠났으나 알고 보니 플레잉 코치였다고.
1972년 외환은행으로 돌아와 선수 생활을 연장하다가 1974년에 은퇴한다.
1960~1970년대 한국 최고 수비수였다.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수비를 했으며 원래 공격수였는데 경쟁자에 밀려서 미드필더나 풀백을 했다고 하며 풀백보다 센터백이었을 때 더 뛰어났다. 스토퍼와 스위퍼 체계로 인해 본인이 스위퍼, 센터백 듀오였던 김호가 스토퍼 역할을 했으며 당시 최고의 센터백 듀오였다. 뛰어난 수비력과 좋은 키핑력,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선수 은퇴 후 실업 구단인 한일은행 축구단의 코치로 있다가 1975년 은퇴하자마자 U-19 대표팀 코치로 발탁되면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1975년 함흥철 감독 밑에서 대표팀 코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몬트리올 올림픽 예선 탈락 후 잠시 국가대표 팀을 떠났다. 후임으론 문정식 감독과 박경화 코치. 김정남은 포철 코치로 부임해 한홍기를 보좌한다.
78 월드컵이 끝난 후 개최된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함흥철 감독을 보좌하여 북한과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79년 3월 함흥철 감독과 함께 대표팀을 떠났다.
이 시기 이미 전술적인 부분은 김정남이 담당했다고 한다.
이 시기 이미 전술적인 부분은 김정남이 담당했다고 한다.
3.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기[편집]
1982년 12월 이종환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서 유공의 창단 초대 코치로 부임했다.
유공 코치였음에도 84 아시안컵 및 86 월드컵 1차 예선에 대표팀 코치로서 문정식 감독을 보좌하긴 했다.
1985년 7월, 유공의 제2대 감독으로 취임한다. 이후 88년까지 5위부터 3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특히 이 시절 노수진, 조윤환, 최윤겸, 정종수, 이광종, 김봉길 등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5]
유공의 감독으로 다시 복귀한 1989 시즌 초 약체로 꼽히던 유공을 강팀으로 변모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토록 갈망하던 유공의 창단 첫 우승을 거머쥐었고 리그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는 유공-부천 SK-제주 유나이티드-SK FC로 이어지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의 K리그 우승 기록이다.
그러나 1992 시즌 개막 후 7경기에서 1승 6패로 최하위로 추락한 유공은 김정남 감독을 총감독으로 승격시켜 벤치에서 물러나게 하는 한편 함흥철 고문과 박성화 코치를 중심으로 구단이 새롭게 재편되며 그대로 떠났다.
1985년 7월, 유공의 제2대 감독으로 취임한다. 이후 88년까지 5위부터 3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특히 이 시절 노수진, 조윤환, 최윤겸, 정종수, 이광종, 김봉길 등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5]
유공의 감독으로 다시 복귀한 1989 시즌 초 약체로 꼽히던 유공을 강팀으로 변모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토록 갈망하던 유공의 창단 첫 우승을 거머쥐었고 리그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는 유공-부천 SK-제주 유나이티드-SK FC로 이어지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의 K리그 우승 기록이다.
그러나 1992 시즌 개막 후 7경기에서 1승 6패로 최하위로 추락한 유공은 김정남 감독을 총감독으로 승격시켜 벤치에서 물러나게 하는 한편 함흥철 고문과 박성화 코치를 중심으로 구단이 새롭게 재편되며 그대로 떠났다.
3.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기[편집]
2010년 11월, AFC 황금공로상을 수상했다.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 38인을 선정해 해당 상을 시상했고 국내 지도자는 김정남을 비롯해 10명의 지도자가 수상했다.
2023년 K리그 출범 40주년을 맞아 탄생한 K리그 명예의 전당의 초대 헌액자 6인[6] 중 유일한 지도자 부문으로 선정됐다. 다만 최근에는 고령으로 건강이 나빠진 탓인지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는 본인이 참석하지 못하고 손자를 대신 보냈다.
2023년 K리그 출범 40주년을 맞아 탄생한 K리그 명예의 전당의 초대 헌액자 6인[6] 중 유일한 지도자 부문으로 선정됐다. 다만 최근에는 고령으로 건강이 나빠진 탓인지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는 본인이 참석하지 못하고 손자를 대신 보냈다.
유공 감독에서 내려온 93년부터 98년 초까지 대한축구협회에서 전무로 일하며 두 번의 월드컵 진출에 기여했다. 이후 중국에서 돌아온 뒤 1999년 중반부터 2000년 중반까지 기술 고문직을 역임했다.
2008년 12월, 울산 감독직을 사임한 후 울산 현대 기술 고문, 한국프로축구연맹 기술 고문 등을 거쳤다.
2010년 2월, 박규남의 후임으로 한국프로축구연맹 부회장으로 선임돼 곽정환 회장을 보좌했고 이후 부총재직으로 직책이 변경된 뒤 정몽규 총재와 함께 일했다. 임기 동안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승강제를 도입했고 광주를 비롯해 안양, 수원 FC, 부천 등 수많은 시도민 구단의 창단을 유도해 현재까지의 K리그 기틀을 닦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한국OB축구회 회장직 출마를 위해 2013년 12월 31일 부로 사임했고 2014년 1월 16일, 유효표 21표 중 12표를 획득해 한국OB축구회 13대 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2016년 재선임돼 14대 회장도 역임했다.
2008년 12월, 울산 감독직을 사임한 후 울산 현대 기술 고문, 한국프로축구연맹 기술 고문 등을 거쳤다.
2010년 2월, 박규남의 후임으로 한국프로축구연맹 부회장으로 선임돼 곽정환 회장을 보좌했고 이후 부총재직으로 직책이 변경된 뒤 정몽규 총재와 함께 일했다. 임기 동안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승강제를 도입했고 광주를 비롯해 안양, 수원 FC, 부천 등 수많은 시도민 구단의 창단을 유도해 현재까지의 K리그 기틀을 닦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한국OB축구회 회장직 출마를 위해 2013년 12월 31일 부로 사임했고 2014년 1월 16일, 유효표 21표 중 12표를 획득해 한국OB축구회 13대 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2016년 재선임돼 14대 회장도 역임했다.
- 축구계는 영어 구사가 가능한 인물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영어를 잘 하는 축구인으로 이름이 나 있다.
- 인터뷰나 언행을 보면 상당히 부드럽고 겸손하고 신사적인 언행을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냉철하고 분석적으로 축구를 바라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호와의 라이벌 관계는 크게 신경 쓰이는 부분인지 2000년대에 접어들고도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납득이 안 가는 판정에 거세게 항의를 하다 퇴장을 당하고 벌금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사실 젊었을 때는 엄청 다혈질적인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바뀌었다고 한다.
- 시대를 대표하는 축구인이라면서 국가대표 경기수가 의외로 60~70경기밖에 되지 않는데, 사실 외국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찾는 축구 팬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늘어난 것이다. 아마도 자료 미비로 인해 상당수 경기의 존재가 묻혀 있어서 피파에 의해 A매치로 인정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 당시는 외국의 구단이나 브라질 무슨무슨 주의 대표팀, 혹은 대표팀 2진을 상대로 경기를 자주 치르다 보니 A매치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 이천수가 자신의 유튜브에서 가장 좋아하는 축구 감독으로 뽑은 적이 있다. 이유는 자기 한테 아무 말 안 해서... 물론 그만큼 매니지먼트 능력이 뛰어난 감독이란 걸 재밌게 풀려고 말한 거고 실제로 속칭 잡아야 하는 애 안 잡아도 되는 애를 구별해서 개별적인 매니지먼트를 정말 잘했고 선수단 사이의 불만도 잘 관리했다고 했다.
1956년 ~ 현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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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생일] [2] 링크[3] 참고 자료.[4] (1964년 올림픽 예선, 본선 3경기. 1967년, 1971년 올림픽 예선 7경기 포함)[5] 다만, 1985년 3월부터 1986년 11월까지, 그리고 1988년 7월부터 10월까지 월드컵과 올림픽 감독으로 인해 대표팀에 끌려가며 유공에서 지휘를 잠시 멈추기도 했다.[6] 최순호, 홍명보, 신태용, 이동국, 김정남, 박태준[7] 배구에도 비슷한 사례로 이재영, 이다영이 있다. 이 두 사람 모두 국가대표를 동시에 뛴 바 있고 이 두 선수의 어머니는 1988 올림픽 배구 국가대표로 활동했던 김경희다. 다만 이들은 배구계를 넘어 대한민국 예체능계 전체를 흔든 대형 사건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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