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진(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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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축구협회 회장

최치환(27대~30대)

장덕진(31~32대)

고태진(33대~34대)

농수산부 장관

최각규(29대)

장덕진(30대)

이희일(31대)


張德鎭
1934년 6월 27일 ~ 2017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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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년시절2.2. 관료/정치인/축구인 시절2.3. 고구려/발해 고토 개발사업2.4. 말년시절
3. 가족관계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고시 3관왕. 제31~32대 대한축구협회 회장 역임. 제30대 농수산부 장관 역임.

2. 생애[편집]

2.1. 초년시절[편집]

1934년 강원도 춘천군에서 태어났다.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1960년부터 1962년에 걸쳐 3대 고시인 고등고시 사법과, 행정과, 외무과를 대한민국 최초로[1] 모두 패스했다. 당시에는 고시 합격인원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2] 이것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다.[3]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2.2. 관료/정치인/축구인 시절[편집]

1969년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재임하면서 대한축구협회 이사직을 겸했다.[4] 1969년 당시만 하더라도 축구선수들은 실업팀이 없어 먹고 살기 막막한 상황이었는데,[5] 직접 발벗고 나서서 1969년 3월 조흥은행과 산업은행, 신탁은행, 제일은행 축구팀 등이 연이어 창단을 선언하게 하였다. 그때 무려 9개의 금융단 축구팀이 생겨 약 2백여 명의 선수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6]

1969년에는 재무부 재정차관보로 승진하였다. 재무부 사무관으로 들어온 후 7년만에 이재국장을 거쳐 재정차관보까지 승진한 셈이다.

1970년에는 박정희의 명령으로 대한축구협회장이 되어 한 달만에 축구발전기금 1억 원을 모았다.[7]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상비군으로 1진 ‘청룡’과 2진 ‘백호’를 구성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코치도 초빙하고, 국가대표 상비군 전용 숙소를 건설해 대표팀 경기력 향상에 집중했다.[8] 대표 선수들에게 상해 보험을 들게 하여, 대표팀 상비군과 청소년 대표 53명이 동방해상 보험회사와 상해보험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한국 스포츠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축구 원로 중 생계가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축구인원호연금제’를 실시했다. 1년에 12만 원씩 세 명에게 36만 원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점차 그 대상과 지급액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1970년 4월에는 ‘월간축구’를 발행했다.[9] 1970년 한 해 동안 무려 368개 초등학교 축구팀이 생기고 마을 단위로는 321개 팀이 생겨났다. 주말 축구교실도 28개 학교에서 시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 일본 축구 기자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은 크라머 코치의 충고를 보수적인 협회가 받아들이지 않아서 큰 문제다. 하지만 한국은 젊은 협회장이 신진대사 역할을 확실히 하고 있다. 부럽다.” 그 후 아시아 축구 연맹(AFC) 부회장에 선출되면서 아시아 전체가 주목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취임하자 마자 축구 국가대표 상비군은 1970년 메르데카컵 우승, 킹스컵 우승, 아시안 게임 금메달[10] 등의 성과를 달성했다. 1971년에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하였다.[11] 제1회 박스컵에서 한국은 버마와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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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에는 정계로 진출하여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었다.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후보 박정훈을 꺾고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서울에서 당선된 유일한 여당 국회의원이었다. 이 때 신민당 총재 유진산이 영등포구 갑 지역구를 포기하면서 진산 파동이 일어났다.

국회의원이 된 후, 1972년 10월 국회에서 국민체육진흥기금법을 입법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국민체육진흥재단 설립도 이뤄냈다. 국민체육진흥기금은 선수와 지도자를 발굴하고 키우는데 쓰이기 시작했고 은퇴한 경기인의 생활 보조금으로도 지급됐다.

1973년 8월에는 농수산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차관 발령을 받았다. 1975년 12월부터 1977년 12월까지는 경제기획원 차관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77년 12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농수산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겨우 44세의 젊은 나이에 장관이 된 것이다.

2.3. 고구려/발해 고토 개발사업[편집]

1979년 박정희가 살해된 후 한동안 야인생활을 하다가, 1984년부터 농업진흥공사 이사장을 역임했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는 고려대학교 교우회장 직도 함께 맡았다. 교우회장으로서 워낙 억척이었기 때문에, 김준엽 고대 총장에게서 '미스터 고려대학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8년 중국 등소평의 아들 등업방과 만나 만주 삼강평원 일대[12]에 대규모 농장을 만들기로 하고, 옛 고구려, 발해의 고토를 재개발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988년 12월에는 중국 헤이룽장성 정부와 삼강평원 개발 관련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당시 중국은 미수교국이었으므로, 한국의 공기업이 중국의 토지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장덕진은 농업진흥공사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1990년 1월 대륙종합개발을 설립하였고, 오로지 삼강평원의 개발에 자기 모든 것을 걸기 시작했다. 개인 자격으로 헤이룽장성 정부와 각각 31억 1647만 원씩을 출자해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중국 하얼빈시 삼강평원 일대 3만8000㏊를 임대하여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13] 1991년 중국 국가계획위원회와 한국은행은 대륙개발의 삼강평원 개발 투자를 승인했다.

그러나 토지에서 물이 잘 빠지지 않아 추가로 대수로를 만들어야 하게 되는 등 개발사업은 매년 어려움을 겪었다. 거기에다 1996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의 결과로 대한민국의 쌀시장이 개방되고 미국 등지의 값싼 쌀이 우리나라에 밀려들어올 것으로 예상되자, 삼강평원개발의 경제성이 의문시되었다. 당시 대학교수들은 삼강평원 땅이 동토(凍土)라면서 한여름에도 30cm만 파면 얼음이 나온다고 일본 고문서까지 동원하여 삼강평원개발에 반대하였다.

결국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은 삼강평원 개발을 위한 한국수출입은행의 2200만 달러 대출을 중단시켰다. 거기에 1997년 외환 위기까지 닥침으로써 삼강평원 개발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과 열정과 노력을 투입하고 있던 장덕진의 꿈은 좌절되었고, 장덕진은 무려 210억 원의 부채를 짊어진 채 폐인이 되고 말았다. 소년등과(少年登科)의 저주란 말인가?[14]

2.4. 말년시절[편집]

2005년 대한축구협회는 ‘명예의 전당’을 만들면서 장덕진을 가장 먼저 그 후보로 올려 놓았다. 하지만 선정위원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장덕진은 이를 고사했다. 결국 장덕진을 제외하고 김용식, 홍덕영, 김화집, 이회택, 차범근, 거스 히딩크, 정몽준 등 7명만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3. 가족관계[편집]

육영수 여사의 언니인 육인순의 첫째 사위, 즉 박정희의 처조카사위이다. 홍종욱 전 국회의원의 조카사위(그러니까 홍종욱이 장덕진에게 처삼촌)이기도 하다.

그의 손아랫동서는 한승수 전 국무총리, 윤석민 전 대한선주 회장[15]이고, 처남은 홍세표 외환은행장이다.[16]

TV조선 부장인 장원준(1967년생)이 그의 아들이다. 장원준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였으며, 그의 아내는 SBS 선임기자 한수진이다.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은 그의 처조카사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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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에 앞서 1958~59년 고등고시 행정·재무·사법 3과를 합격한 신오철 변호사가 있긴 했으나, 당시 고등고시 행정과와 재무과는 거의 비슷한 직렬이었으므로, 신오철을 진정한 고시 3관왕으로 보기는 어렵다.[2] 1960년대 초반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인원이 50명 정도였다.[3] "만약 대통령도 시험으로 될 수 있다면, 난 대통령도 자신 있다"는 말을 한 것으로 당시에 소문이 자자했으나,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한다.[4] 당시 그는 재무부 이재국에 팀을 만들어 4년 동안 공격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골프보다도 축구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5] 소속팀이 없으니 월급을 받을 곳도 없고 지금처럼 선수들이 좋은 경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집중할 수 없던 때였다. 그저 군 팀에서 뛰거나 대표팀 발탁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6] 이 팀들은 1983년 프로축구가 출범하기 전까지 한국 축구를 이끄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7] 그때까지 생계가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던 축구인들에게 1억 원은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그가 정말 1억 원을 모아오자 모두들 놀랐다고 한다.[8] 그때 시작된 국가대표 상비군 제도는 1990년대까지 이어져 대표팀 경기력 향상의 뿌리가 됐다.[9] 지금의 ‘베스트 일레븐’이라는 축구 전문 잡지다. 1996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다.[10]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금메달이었다.[11]박스컵’이라고도 불리었다. 1975년까지는 아시아 국가만이 참가하는 대회였지만 1975년부터는 브라질 주리그 대표들도 대회에 나서는 등 규모는 점차 커졌다. 이 대회는 이후 ‘코리아컵’으로 이름을 바꿔 1999년까지 성대하게 열렸다.[12] 만주의 우수리강, 송화강, 흑룡강이 만나는 삼각주 지역을 말한다. 이곳의 토양은 세 개의 강물이 수천 년 동안 상류에서 실어 나른 퇴적층과 유기물들이 혼합된 비옥한 옥토로 유명하다. 유럽 동부의 우크라이나, 미국 중서부 평야 지대와 함께 세계 3대 흑토(黑土) 지대로서 유기물질이 일반 토양보다 6배나 많아 농업의 최적지로 꼽힌다. 이곳은 과거에 고구려, 발해의 근거지로서, 고구려, 발해가 동북아의 강국으로 군림하는 데 기반이 되어준 땅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삼강평원'은 거대한 북쪽 황무지라는 뜻에서 ‘북대황(北大荒)’이라고도 불린다.[13] 계약기간은 40년에, 연간 1140만 원(당시 환율 기준)의 토지임대료를 내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14] 송나라 때 학자 정이(程頤)는 누구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불행일 수 있다며 인간의 세 가지 불행을 지적하고 있다. 첫 번째 불행은 소년등과(少年登科)인데, 어린 시절 너무 빨리 과거에 급제하여 일찍 출세를 하면 교만해지고, 나머지 평생이 내리막길이 되기 쉬워 불행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불행은 석부형제지세(席父兄弟之勢), 즉 위세가 대단한 부모 형제를 만나서 그 권세를 끼고 사는 것인데, 이것도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남들에게서 낙하산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기 쉬운 데다, 평생 부모 형제와 비교 당할 수밖에 없어 불행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 번째 불행은 유고재능문장(有高才能文章)인데, 뛰어난 재주와 문장력을 가지면, 그 재주와 능력을 믿고 글을 잘못 써서 만인의 지탄을 받고 패가망신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15] 윤석민은 장덕진의 고대법대 4년 후배이다.[16] 육인순의 맏사위 장덕진과 둘째 사위 한승수, 그리고 장남 홍세표 셋 다 춘천고등학교를 나왔다. 홍세표는 장덕진의 춘천고-고려대 1년 후배이며, 나중에 한미은행장과 외환은행장을 역임했다. 한승수는 장덕진의 춘천고 2년 후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