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성(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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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주성 (金鑄城 / Kim Joo-Sung)

생년월일

1966년 1월 17일 (52세)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출신지

강원도 양양군

포지션

윙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센터백, 스위퍼

신장

175cm

유스팀

중앙고등학교 (1980~1982)
조선대학교 (1983~1986)

소속팀

대우 로얄즈(1987~1992)
VfL 보훔(1992~1994)
부산 대우 로얄즈(1994~1999)

국가대표

76경기 14골

스태프

부산 아이콘스(2000 / 코치)

부산 아이파크 영구결번

No.16 김주성

파일:K리그 클래식 시그니처 문구 로고 없는거.png 신인상

1986년

1987년

1988년

함현기
(현대 호랑이)

김주성
(대우 로얄즈)

황보관
(유공 코끼리)

파일:K리그 클래식 시그니처 문구 로고 없는거.png MVP

1996년

1997년

1998년

김현석
(울산 현대 호랑이)

김주성
(부산 대우 로얄즈)

고종수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89~1991년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

아흐메드 라드히(알 라시드)

김주성(대우 로얄즈)

미우라 카즈요시(베르디 가와사키)

1987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최상국

FW
정해원

FW
김주성

MF
김삼수

MF
노수진

MF
이흥실

DF
구상범

DF
최기봉

DF
정용환

DF
박경훈

GK
김풍주

1991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이기근

FW
고정운

MF
김현석

MF
이영진

MF
김주성

MF
최강희

MF
이상윤

DF
정용환

DF
박현용

DF
테드

GK
김풍주

1996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라데

FW
세르게이

MF
신태용

MF
바데아

MF
홍명보

MF
하석주

MF
김현석

DF
윤성효

DF
김주성

DF
허기태

GK
김병지

1997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마니치

FW
스카첸코

MF
김현석

MF
신진원

MF
김인완

MF
이진행

MF
정재권

DF
김주성

DF
마시엘

DF
안익수

GK
신범철

1999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안정환

FW
샤샤

MF
서정원

MF
고종수

MF
데니스

MF
고정운

DF
강철

DF
김주성

DF
마시엘

DF
신홍기

GK
이운재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FW
황선홍

FW
최순호

MF
김주성

MF
신태용

MF
유상철

MF
서정원

DF
최강희

DF
김태영

DF
홍명보

DF
박경훈

GK
신의손




1. 소개2. 선수시절3. 은퇴 이후4. 여담

1. 소개[편집]

삼손

부산의 레전드 오브 레전드

중앙고등학교-조선대학교 출신. 삼손, 야생마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키는 지금 기준으로 별로 크지 않았지만[1] 폭발적인 스피드와 현란한 개인기가 돋보인 선수였으며 오른발잡이였지만 왼발을 능숙하게 쓸 수 있었다.

2. 선수시절[편집]

선수시절엔 3회 연속으로 아시아 올해의 선수에 선정될 만큼 대단한 실력의 선수였다. 워낙 출중했기 때문에 서울지역의 유수의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으나, 다른 축구부 동료 4명을 같이 받아주는 조건으로 조선대학교를 선택한 의리파. 당시 조선대 학생들 사이에서 김주성은 교내에 있는 돌계단을 공을 차면서 하루에 수십번씩 오르락내리락하던 미친놈으로 유명했다. 축구부 학생인건 알았지만 누군지는 몰랐던 무명시절의 이야기. 결국 김주성이 스타 플레이어가 되고 나서야 학생들은 그제서야 그 때 그 학생인걸 알았다고.

부산 대우 로얄스의 레전드이자 K리그 최초로 구단 영구결번(16번)이 지정된 선수였다. 1986년 월드컵에 출전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는데, 그때의 별명이 아시아의 삼손. 야생마였다. 많은 기대를 모았던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해서, 망했어요. 이래서 국내용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이후 도하의 기적도 겪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도 출전했다. 86, 90에 이은 세번째 월드컵 출전. 팬들은 전성기 머리를 휘날리며 필드를 달리던 '야생마' 김주성을 기대했지만 전성기 때 공격적인 롤이 아닌 수비적인 롤의 미드필더로 주로 뛰었다. 참고로 이때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머리도 잘랐다. 1992년-1994년의 초반에는, 독일 VfL 보훔에서 뛰기도 했다.

보훔 진출에 대해서 동남아와 주로 싸우던 김주성에게 세계의 벽은 높았다 비슷한 드립을 치는 사람도 있으나 일단 김주성 자신의 말에 따르면 해외진출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당시에는 메달을 따도 5년간 진출금지였기 때문에 상당히 늦은 나이에 진출했고, 처음 갔을 때는 확실히 본인도 어느 정도 어리벙벙했으며 출전을 많이 못했다고 하나 2부리그로 강등된 2번째 시즌에서는 10월의 2. 분데스리가 베스트 11에 선정되기도 하는 등 어느 정도 자리를 확고히 잡았다고 하며 보훔은 1위로 1년만에 재승격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1부로 돌아온 보훔이 다시 공격수들을 사들이며 기회를 주지 않았다. 김주성 본인은 인종차별적 대우를 얘기하나 선수 본인의 증언인 만큼 신빙성에서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고, 단지 김주성이 적응하고 보니까 선수 생각으로는 경쟁을 할 만한데 왜 기회를 주지 않았는가 선수로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도가 안전한 해석일 것이다. 물론 인종차별적인 대접이 있었고 그로 인해 출장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다만 김주성의 인터뷰에서 비교적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한국 특유의 공동체 문화에 익숙한 한국 축구선수들이 해외진출할 때 개인주의를 겪으며 좀 정신력이 약해지게 되는데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점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주성의 선배인 조영증 같은 경우는 미국 진출해서 프로로서의 마음가짐이나 영어 인맥 등 여러 가지를 잘 배워왔다고 기꺼운 마음을 표시하나 김주성의 경우는 은퇴를 생각했다고 하듯이, 또는 김주성과 가까운 후배인 이동국 안정환도 결국 이런 멘탈에서 해외진출의 성패가 갈린 점이 크듯이 해외진출은 여전히 실력보다도 적응이 더 큰 관건으로 작용한다. 당장 김주성도 열심히 버티고 어필하고 선수들과 친목질하다 보면 안정환처럼 팀 사정에 따라 기회를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결국 독일 진출했을 때의 이동국처럼 생각대로 잘 안 풀리는데 국내에서 강하게 오퍼한다고 그냥 돌아온 것이다.물론 이동국은 독일 시절 경쟁자들이 너무 강하긴 했다.

이후 대우에서 10연패를 하는 등 사정이 안 좋다고 강력하게 오퍼를 해서 당시 30이 가까운 김주성은 그냥 돌아왔다고 한다. 박지성 은퇴 이후 2010년대의 해외파들이 손흥민을 제외하면 결국 김주성보다 리그에서의 실적이 크게 나은 레벨이 아니다. 늦은 나이의 진출, 축구계가 더 개방적이 되어가는 것, 선수생명이 늘어나는 것, 정보가 늘어난 것, 무릎이 안 좋은 상태에서 진출을 감행했던 것 등등을 따지면 뭐 동남아에서 뛰던 김주성 세계의 벽을 느껴 이런 얘기는 좀 어렵다. 차범근이야 늦은 나이에 진출했어도 휩쓸었지만 그건 차범근이고.

이후 돌아와 다시 친정팀인 부산 아이파크(당시 대우 로얄즈)에서 뛰었다. 공격수였던 그가 복귀해서는 스위퍼로 뛰었는데 무릎 부상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원래 독일 진출 전부터 아픈 걸 그냥 참고 뛰었는데 다시 한 번 더 부상을 당하고 못 참겠어서 병원을 가 보니 인대가 끊어져 있어서 수비수로 전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국가대표로 다시 뽑힐 정도로 완벽하게 포지션 변화에 성공하며 역시 김주성이란 소리를 들었다. 다만 이시기에 이란에게 2:6 대패 참사를 겪었던 적도 있다. 이 경기는 미드필더로 뛰었는데, 그마저도 전반전만 뛰고 교체되었는데 2:1로 이기고 있었다. 김주성이 나간 후반전에 5골을 쳐먹은 것(...) 물론 김주성 한 명이 빠졌다고 저런 대패를 한 것은 아니지만 소위 식스투 참패에서 김주성의 지분이 큰 것은 분명히 아니다. 당시 소속팀인 포항에서 박성화 감독에 의해 중앙미드필더로 활약하던 홍명보와 대우에서 스위퍼로 포지션체인지에 성공한 김주성이 둘 다 아까웠던 박종환은 리그에서처럼 홍명보를 미드필더로 올리고 김주성을 스위퍼로 썼다. 하지만 예선에서의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고 결국 박종환은 이란과의 8강전에서 홍명보를 스위퍼로 김주성을 미드필더로 원상복귀 시켰다. 그리고 김주성의 어시스트로 신태용이 두번째 골을 넣는 등 전반에만 2:1로 앞서나가며 성공하는 듯 했지만 결국 결과는 6:2로 대패. 사실 팀전체의 컨디션이 하향세였고 공격의 핵인 황선홍마저 바로 전 경기인 쿠웨이트전에서 상대의 악랄한 반칙으로 인한 부상으로 결장해서 대책이 없긴 했다.

유상철과 함께 K리그 역사상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위치에서 베스트 일레븐을 수상한 단 둘 뿐인 선수이며 K리그 역사상 단 4명 있었던 수비수 MVP 중 한 명으로 현재까진 마지막이다. K리그 MVP는 까놓고말해 최우수 공격수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공격수 편향이 심하다. 신인상도 그런 면이 강하긴 하지만 MVP만큼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서울의 아디는 리그 역대급 수비수였고 팀의 우승에 큰 지분을 차지했음에도 눈에 띄는 스탯이 없어서 2010년 MVP 경쟁에서 김은중에게 밀렸다.

다만 이건 97년까지의 이야기고 은퇴 직전인 98년부턴 그냥 짬밥 앞세워 위험한 파울을 쏟아내고 심판에게 항의 많이하는 선수였다. 골수 부산팬들이 성토하는 데니스의 목밟기 사건도 따지고보면 김주성의 '내가 선배인데 꼽냐? XX야'식 더티 플레이에서 비롯되었다. 샤다라빠의 K리그 카툰에는 김주성 목밟은 데니스를 부산이 영입하니 부산 서포터 때려치고 부산교통공사 응원한다는 팬이 등장한적이 있는데 팬심에 눈이 멀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데니스의 행동은 잘못이지만 지저분한 걸로 치자면 그날 경기 내내 더티 플레이를 쏟아냈던 김주성이 결코 못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후에 열린 중국과의 평가전(3:0 승)이다. 하지만 이 경기는 K리그 대표 선발과 C리그 대표 선발의 경기였기 때문에 정식 A매치는 아니고 기록에도 남지 않았다.

또한, 아시아 올해의 선수를 3연속 수상한 유일한 선수.(89' 90' 91' IFFHS 선정 )[2]

선수로는 이회택-차범근-최순호를 잇는 한국축구의 에이스이자 전설적인 선수.

3. 은퇴 이후[편집]

은퇴 후 2000년부산 아이콘스에서 유소년 코치를 맡았으나 단 1년 만에 그만두었으며, 그 이후로는 현장에 나서지 않고 있다. 2001년 초부터 MBC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살짝 화제가 되었지만 같은 시기에 그것도 같은 MBC에서 해설을 하기 시작한 차범근에게 묻혔다(...). 실제로 친선 경기 같은건 죄다 차범근에게 배정되었기 때문에 2001년에는 컨페더레이션스컵의 타팀간 경기말곤 중계한 적이 없었고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도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지는 타팀간의 경기를 주로 중계했다. 그러다가 차범근수원 삼성의 감독으로 부임한 200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메인 해설위원으로 활약했는데, 2004 아테네 올림픽유로 2004, 그리고 2006 독일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등의 굵직한 경기를 도맡았다.

차범근의 해설위원 활동 시기에 좀 묻혀서 그렇지 해설 자체는 매우 좋았는데, 스타 플레이어 출신답게 경기의 맥을 상당히 잘 짚었고 상황분석이 뛰어났다.[3] 뿐만 아니라 골이 터졌을 때의 반응도 차범근에 비해 감정을 적절하게 실었던지라 제법 재밌다는 반응이 있기도..... 어록은 "A에 대한 B"라는 특유의 말버릇인데, 이를테면 슈팅에 대한 세기, 패스에 대한 정확성, 수비수에 대한 몸싸움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연결사를 에 대한으로 대체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가 2005년대한축구협회의 국제부장을 맡게 되면서 해설 활동은 없는 상태. 참고로 2006 FIFA 월드컵 독일MBC 해설위원은.....

2011년 3월에는 동아시아 축구 연맹(EAFF)의 사무총장으로 내정됐다.

2012 런던 올림픽 때에는 사무총장을 맡은 상태였는데 일본과의 준결승전 당시 발생한 독도 세리모니 문제 때 일본에 굴욕적인 사과 문서를 보낸 당사자로 지목 받았다. 국회에서 조중연 회장까지 책임이 올라가지 않기 위해서인지 먼저 보내고 후에 보고했다는 식으로 증언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 굴욕이라 축협과 함께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독도 세레머니 사과 문제를 조금 설명하자면 물론 대한민국 정서상 사과문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건 맞다. 독도는 당연히 한국의 땅이고 그걸 수십년씩 망언과 도발을 해대는 일본에게 세레머니한 것을 사과했다는게 국민들이 분노할 만도 하다. 그러나 좀더 현실적인 안목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 국제 간의 문제가 어디 우리나라 하나의 정서만으로 해결될 일인가. 수많은 스포츠 협회를 보면 전혀 관련 없는 분들이, 대신 돈줄을 두둑한 양반들이 회장이나 부회장 혹은 다른 중임을 맡고 있는 것을 흔히 볼수있다. 이는 스포츠 자체가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금맥이므로, 그러한 재력가, 권력가들이 앞다투어 자리싸움을 하고 암흑속의 힘겨루기와 비리 등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도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더구나 그전에 IOC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김운용 위원장도 위원장 자리를 상실하여 IOC내에 파워게임에서 거의 힘이 없다시피한 한국이 눈치를 보며 다소 맥아리를 못추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더 보태자면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는 대한빙상협회가 오심으로 뺏긴 김연아의 금메달을 되찾으려는 의욕조차 없었던 것은, 물론 욕 먹어야 마땅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당시 아폴로 안톤 오노의 헐리우드 액션으로 분노한 대한민국 선수단이 올림픽을 보이콧하려 한 것도 다 든든한 빽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

9월 14일 배임혐의로 기소됐다. 실망스럽습니다

4. 여담[편집]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2010606350001300_P2.jpg
현역시절엔 긴 머리 때문에 아시아의 삼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행정가가 된 지금은 당연히 머리를 깎았다. 40대가 된지 오래여서 그런지 머리숱도 적어졌다.

파일:seibuh.png
세이부 컵 축구[4]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김주성은 사용을 허락하는 대가로 많지는 않지만 계약금을 받았다고 한다.

현역 시절 말년에 중앙수비수로 보직변경하고 나서 뛰던 시절에 이성남에게 축구화로 머리를 구타당한 적이 있다. 하필이면 그 머리를 밟는 장면이 KBS로 전국 중계가 되고 있었기에 데니스는 빼도박도 못하고 중징계 크리 당첨. 이성남 항목 참조.

90년대부터 축구를 봐왔던 사람들에겐 농구선수 김주성보다 이 항목의 김주성이 보다 친숙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김주성 부장님은 지금까지 열성팬들과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고 한다.

여담으로 안정환과 연관이 많은 선수이다. 안정환은 어릴 적 자신의 우상이자 롤모델이었던 선수로 김주성을 꼽았으며, 안정환이 프로 데뷔 초기에 머리를 길렀던 이유도 김주성을 닮고 싶었던 마음에 긴 머리 헤어스타일을 따라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안정환이 같은 대우에 입단을 해서 몇 시즌동안 같이 뛰게 되었고, 당시 신인 선수였던 안정환에게 팀의 레전드 선수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김주성은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었을 듯.

그런데 안정환은 김주성이 자신의 롤모델이기도 하지만, 가장 무서웠던 선배로 꼽기도 했다. 안정환은 자신이 부산 대우의 에이스가 되었던 시절, 당시 여자친구[5]와 서울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멋대로 팀 훈련을 빠지고 다음날 복귀했는데, 이 일에 대해 선배들에게 호된 질책을 받을 때 누구보다도 김주성이 가장 크게 혼을 냈다고 한다. 아마 자신을 동경하여 긴 머리 헤어스타일까지 따라할 정도로 자신을 닮고 싶어했던 기특한 후배에게 더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정환이 마리텔에 출연하여 했던 이야기에 따르면, 훈련 중 무심결에 뒤쪽으로 을 뱉었는데 하필이면 그 때 바람이 불어서 그 침이 옆에 있던 김주성의 얼굴에 맞는 바람에 그에게 죽빵을 맞은 적이 있다.[6] 거기에 김주성은 당시 후배들이 뭔가 잘못하면 상의 탈의를 하게 한 다음 벽에 팔을 벌린 채 붙어 있게 시킨 뒤 등에다 다트를 던져 꽂아넣는 똥군기를 과시했는데, 안정환 역시 본인도 많이 당했으며 아직도 등에 다트를 맞았던 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안정환의 말로는 크게 다치지 않도록 위에서 아래로 던지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던지는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근데 그렇게 아래에서 위로 던져도 꽂힌다고는 했다. 여담으로 97년 도쿄대첩의 결승골 주인공으로 유명한 이민성도 당시 부산 대우 소속이었는데, 이민성은 숙소에서 안정환과 같은 방을 쓰던 당시 안정환이 잘 때 심하게 코를 곤다는 이유로 두들겨 패서 눈 근처에 멍이 들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잘못해서 혼나는 건 그렇다 쳐도 너무 정도가 심하다 볼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이런 게 당연시되는 시기였음은 감안할 수밖에 없다.

또한 CF에 출연하여 '스피드가 기술입니다'라는 광고카피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1] 당시 기준으로 175cm 정도면 평균 이상에 속한다.[2] 단, 이때 수상은 AFC 올해의 선수로 바뀌기 직전의 일이다.[3] 일례로 2002 월드컵 16강전 일본-터키전에서는 터키의 위미트 다발라가 일본 수비진이 우왕좌왕하던 사이 잽싸게 헤딩으로 골을 터뜨렸는데 이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캐치해냈다.[4] 8,90년대 동네마다 있던 오락실 대부분의 게임제목으로 김주성과 붉은악마라는 타이틀이 쓰였다. 나이지긋하신 형님, 삼촌들에게 물어보라. 이 게임에서 김주성이 나온 것은 한국-일본 버전이고, 다른 국제 버전에서는 한국과 일본, 미국 대신 스페인프랑스, 네덜란드가 들어간다.[5] 지금의 아내인 이혜원 씨.[6] 그러나 안정환은 김주성을 너무나 존경했기에 맞아도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고 오히려 영광스러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