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스틸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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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teelers_1.png

포항 스틸러스

Pohang Steelers

정식 명칭

포항 스틸러스 축구단 (Football Club Pohang Steelers)

법인명

㈜포항스틸러스

창단일

1973년 4월 1일 [1]

창립자

박태준[2]

구단형태

기업구단[3]

소속 리그

K리그1 (K League 1)

연고지

경상북도 포항시

홈 구장

대구시민운동장 (1987)[4]
포항종합운동장 (1987~1990, 2013[5])
포항스틸야드 (1990~ / 25,000명 수용)[6]
광양축구전용구장 (1993~1994)[7]

라이벌

울산 현대 - 동해안 더비

구단명 변천

포항제철 축구단 (1973~1982)
포항제철 돌핀스 (1983~1984)
포항제철 아톰즈 (1985~1995)
포항 아톰즈 (1995~1996)
포항 스틸러스 (1997~)

연고지 변천

경상북도 포항시 (1973~)[8]

모기업

포스코

대표이사

양흥열

단장

장영복

감독

최순호

주장

김광석

부주장

김승대

공식 웹 사이트 및 소셜 미디어

파일:Steelers_1.pn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pn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png 파일:유튜브 아이콘.png 파일:카카오톡 로고.png

마스코트

파일:Steelers_20th_Retro.png

파일:Steelers_mascot_1.png

20주년 레트로 로고

쇠돌이, 쇠순이

상징색

검은색, 빨간색, 시안블루

우승 기록

K리그1
(5회, ★★★★★)

1986, 1988, 1992, 2007, 2013[9]

FA컵
(4회 / 최다 우승)

1996, 2008, 2012, 2013

K리그 리그컵
(2회)

1993, 2009

★★★
AFC 챔피언스 리그
(3회 / 최다 우승)

1997, 1998, 2009

클럽 기록[10]

최다 출장

김광석 - 321경기[11]

최다 공격포인트

황진성 - 150 (47득점 58도움)

최다 득점

라데 - 55득점

최다 도움

황진성 - 58도움

연속경기 공격포인트

이명주 - 10경기 (2014.03.15~2014.05.10)

최고령 경기출장

김기동 - 39세 9개월 18일 (2011.10.30)

최연소 경기출장

최문식 - 18세 2개월 19일 (1989.03.25)

2018 시즌 유니폼 킷

파일:2018포항_홈.jpg

파일:2018포항_어웨이.jpg

파일:2018포항_서드.jpg

파일:2018포항_GK홈.jpg

파일:2018포항_GK어웨이.jpg


(BACK TO THE ORIGINAL)

어웨이
(THE SEA OF CYAN BLUE)

서드
(THE BLAST FURNACE)

골키퍼 홈
(THE CHERRY BLOSSOM)

골키퍼 어웨이
(THE FORSYTHIA)

메인 스폰서

유니폼 메이커

파일:SWs27OU.jpg

파일:astore_logo.jpg

★ ★ ★ ★ ★
WE ARE STEELERS


1. 개요2. 연혁3. 유소년 시스템4. 상세 경력5. 선수단6. 역사
6.1. 2009년 이전6.2. 영광의 2009년6.3. 2010년, 다시 찾아온 암흑기6.4. 2011년, 아쉬움이 컸던 황선홍호의 출항6.5. 2012년,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스틸러스6.6. 2013년, 황선 대원군과 최초의 더블(리그+FA컵) 우승6.7. 2014년. 쇄국 축구의 몰락6.8. 2015년, 개항. 그리고 황선홍호의 마지막 시즌6.9. 2016년, 최진철호의 침몰, 다시 돌아온 최순호6.10. 2017년, 희망을 본 전반기. 숙제를 남긴 후반기6.11. 2018년, 대격변. 침몰할듯 침몰하지 않는 강철방주
7. 스틸타카와 스틸러스 웨이8. 전통과 인기, 그리고 응원가 영일만 친구9. 블레즈(BLEDS)10. 라이벌과 주요 더비
10.1. 동해안 더비울산 현대10.2. 서로 다른 검빨, 그리고 박주영과 황선홍. FC 서울10.3. 축구수도? 혹은 수포동맹? 수원 삼성 블루윙즈10.4. 클래식 라이벌, 성남 FC10.5. 제철가 형제, 전남 드래곤즈
11. 스토리
11.1. 클럽하우스11.2. 선수 육성과 FA의 악연11.3. 퐁당퐁당 홀짝 징크스11.4. 숨겨진 골키퍼 명가11.5. 스틸러스?
12. 역대 감독13. 레전드/프런트/선수명단
13.1. 주요 백넘버
14. 유니폼15. 과거 엠블럼16. 비하인드

1. 개요[편집]

WE ARE STEELERS

AFC 챔피언스 리그FA컵 최다 우승 팀

K리그에 명문이 있다면 바로 포항이다.[12]

2. 연혁[편집]

K리그 클래식 소속의 프로축구단. 연고지는 경상북도 포항시이다. 애칭은 강철전사.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 된 프로 축구 클럽[13]이며 한국 축구의 레전드들의 산실. 45년의 역사와 함께 K리그 5회 우승(1986, 1988, 1992, 2007, 2013)[14], 대한축구협회 FA컵 최다 우승(1995, 2008, 2012, 2013)과 AFC 챔피언스 리그(1997, 1998, 2009)에서도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의 강호이다. ACL 우승자격으로 나간 2009년 FIFA 클럽 월드컵에서는 FC 바르셀로나, 에스투디안테스에 이어 3위에 올랐다.

이렇듯 찬란했던 과거 덕에 전통을 가진 명문 구단으로서 인정은 받지만, 2016 시즌부터 중하위권으로 성적이 내려앉은 이후로 현 시점에서 강팀이라고 부르기엔 매우 부족한 실력을 갖고 있다.[15] 밥 먹듯 출전하던 ACL은 어느덧 꿈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렸으며, 현실적으로 상위 스플릿 진출을 목표로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스쿼드 역시 전성기의 포항에 비하면 정말 어지간한 시민구단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쇠약해졌다. 코칭 스태프 역시 명장 황선홍을 떠나보낸 이후로 줄곧 삼류 감독들만 데려오며 전술적으로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업 외적인 곳에 그룹의 돈을 쓰는 것을 싫어하는 외국 주주들 눈치를 안 보던 1990년대에는 나름대로 갑부 구단이었으나, 포스코의 외국 주주의 비중이 50%를 넘어선 2000년대 이후로는 자금 지원을 빵빵하게 받는 수도권 구단에 비해 항상 부족한 예산에 시달리고 해마다 키워둔 선수들을 빼앗기는 등 조금 안습한 상황. 하지만 팬들에겐 짠돌이라고 욕먹는 모기업 포스코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지원을 하는 데다[16] 이미 1990년 중반부터 체계를 다진 포철동초-포철중-포철공고/포철고로 이어지는 유소년 클럽의 힘으로 꾸준히 선수들을 발굴. 그래서 전성기 시절엔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 상위권 팀들에 비해 전혀 밀리지 않는 성적을 보여주기도 했다.

유망주 위주의 선수단 구성도 그렇고, 화려한 패스 축구의 팀 컬러도 그렇고, 여러모로 K리그의 아스날. 심지어 한준희 축구 해설 위원은 이런 포항을 아스날에 빗대어 "포스날"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진짜로 구단에 돈이 없어 외부 영입은 못하고 유스에만 몰빵하면서 팀의 주축이 죄다 어린 선수들로 채워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스 몰빵이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내며 2014년에는 포항 U-18 팀이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맨체스터 시티 유스를 2:1로 잡아버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경기 영상).

파일:attachment/아톰즈.jpg

사진 좌측부터 포항 스틸러스의 90년대 전성기를 상징하는 황선홍, 홍명보, 라데[17]

1973년 포항종합제철 소속 실업 축구단으로 창단했다. 1984년 슈퍼 리그가 출범하면서 포항제철 돌핀즈로 이름을 바꾸며 프로로 전환. 다음 해인 1985년 포항제철 아톰즈라는 이름으로 다시 변경했으나, 1995년에 포항프로축구(주)라는 독립법인으로 출범하면서 팀명도 '포항 아톰즈'가 되었다. 1996년까지 데즈카 오사무철완 아톰 캐릭터를 저작권료도 지불하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일본 문화가 개방되지도 않았고[18]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기 때문에(80년대라는 걸 주목하자!)[19] 포항제철에서는 별 생각 없이 강철의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는 아톰을 마스코트로 삼고 팀명까지 아톰즈로 유지했던 것이다. 이 당시 포항은 일본 원정경기에서 아톰이 그려진 열쇠고리를 자팀의 기념품이라며 일본 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후 국민들의 저작권 개념이 잡힐 적에야 뒤늦게 문제제기가 되었고, 구단 측이 부랴부랴 팀명 공모전을 열어 1997년 팀명을 바꾸게 된다. 새 팀명은 NFL피츠버그 스틸러스[20]를 참고로 하여 포항 스틸러스가 되었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전국에 퍼져 있는 팬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때문에 지방구단이지만 원정 경기에서도 일방적으로 꿇리진 않는다. 다른 팀 보다 서포터가 약함에도 서울, 수원, 전북과의 빅 매치에선 원정 거리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의 포항 팬들이 집결하여 원정석 1층을 점령하다시피 하는 진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성적 역시 1973년 창단 때부터 강호였으며 몇 차례 암흑기가 있기도 했으나 꼬박꼬박 6강에는 들어갔고, 정규 리그 우승 횟수는 5회로 7회인 성남 FC와 6회인 FC 서울에 이어 리그 3위. 그 외 준우승과 플레이오프 탈락이 은근히 많다. 지역 라이벌인 울산보다는 우승 횟수가 많고 준우승 횟수가 적은 게 위안이라면 위안.

3. 유소년 시스템[편집]

유소년 시스템

U-18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2004~2012)[21][22]

포항제철고등학교
(2013~현재)

U-15

포항제철중학교

U-12

포항제철초등학교
(육성반)

포항제철초등학교
(보급반)


그 외에 직접 운영하지는 않지만 포항항도중, 포항여전고(두 팀 모두 여자축구다)의 유니폼은 포항 스틸러스의 것을 그대로 쓴다. 그리고 직접 산하 유스는 아니지만 우선지명한 선수들을 영남대학교 축구부에 진학시켜 경험을 쌓게 한 다음 프로로 데뷔시키기도 한다. 신진호, 이명주, 김승대, 손준호, 김준수,정원진, 이상기 등이 이런 과정을 거쳐 포항에 데뷔하여 활약했다.

4. 상세 경력[편집]

기 타 기 록

2009 FIFA 클럽 월드컵: 3위

AFC 챔피언스 리그 K리그 출전 횟수 공동 2위(10회)[23]

클 럽 수 상

2009 AFC 선정 올해의 아시아 최고 클럽

실업 축구 당시 우승기록 [24]

제22회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1974)
제12회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리그 우승(1975)
제14회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준우승(1977)
제32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現 대한축구협회 FA컵) 준우승(1977)
제18회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리그 우승(1981)
1982 코리안 리그(제19회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우승

5. 선수단[편집]

포항 스틸러스 2018 시즌 선수단 엔트리

번호

이름

영문 이름

주포지션

국적

생년월일

1

류원우

RYU, Won-Woo

GK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0년 8월 5일

2

국태정

GUK, Tae Jeong

LB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5년 9월 13일

3

김광석

KIM, Kwang Suk

CB/SW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3년 2월 12일

4

알레망

Rafael Berger / Alemão

DF

파일:브라질 국기.png 파일:독일 국기.png

1986년 7월 14일

5

하창래

HA, Chang Rae

D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4년 10월 16일

6

채프만

Connor Edward Chapman

DF

파일:호주 국기.png 파일:슬로베니아 국기.png

1994년 10월 31일

7

이석현

LEE, Seokhyun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0년 6월 13일

8

김현솔

KIM, Hyun-Sol[A]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파일:파라과이 국기.png 파일:브라질 국기.png

1991년 5월 17일

9

이후권

LEE, Hoo-Gwon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0년 10월 30일

10

레오 가말류

Leo Gamalho

FW

파일:브라질 국기.png

1986년 1월 30일

11

이광혁

LEE, Gwang-Hyeok

LWF/RW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5년 9월 11일

12

김승대

KIM, Seung-Dae

WF/ST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1년 4월 1일

13

김도형

KIM, Dohyung

FW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0년 10월 6일

14

김지민

KIM, Jimin

WF/ST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3년 6월 5일

15

이광준

LEE, Gwang-Jun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6년 1월 8일

16

송승민

SONG, Seung-Min

FW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2년 1월 11일

17

강상우

KANG, Sang-Woo

LWF/LB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3년 10월 7일

18

이근호

LEE, Geun-Ho

ST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6년 5월 21일

19

이상기

LEE, Sang-Gi

RW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6년 5월 7일

20

우찬양

WOO, Chan-Yang

LB/RB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7년 4월 27일

21

이승원

Lee, Seung-Won

GK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5년 6월 22일

22

양태렬

YANG, Tae-Ryeol

CM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5년 5월 25일

24

배슬기

BAE, Seul Gi

CB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85년 6월 9일

25

유지하

YOO, Ji-Ha

CB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9년 6월 1일

26

박성우

PARK, Sung-U

FB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5년 10월 11일

27

이승모

LEE, Seung-Mo

CDM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8년 3월 30일

28

이상수

LEE, Sang-Su

CB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9년 3월 8일

29

송민규

SONG, Min-Gyu

W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9년 9월 12일

31

강현무

KANG, Hyeon-Mu

GK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5년 3월 13일

41

김로만

Kim, Roman

GK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6년 8월 3일

55

하명래

HA, Myeong-Rae

GK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9년 5월 5일

77

이진현

LEE, Jin-Hyun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7년 8월 26일

88

권기표

KWON, Gi-Pyo

M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7년 6월 26일

97

이래준

LEE, Rae-Jun

CDM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7년 3월 19일

99

성현준

SEONG, Hyeon-Jun

WF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1999년 8월 31일

[A] 중남미 지역에서 쓰는 이름은 Francisco Hyun Sol Kim이다.

6. 역사[편집]

6.1. 2009년 이전[편집]

1973년, 대한중석(現 대구텍) 축구단이 해체되자 포항제철(現 포스코)이 선수단을 흡수하여 포항제철 축구단을 창단했다. 초대 감독은 한홍기 감독이었고 이회택 등 13명이 창단 멤버였다. 창단 2년차에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25]에서 성균관대학교를 꺾고 우승을 하였고 이후에도 1975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리그 우승, 1981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리그 우승,1982년 코리언리그(전국실업축구연맹전) 우승 등 아마추어 축구계의 강자로 이름을 떨쳤다.

1983년 수퍼리그가 창설되면서 코리언리그 우승팀인 포항이 수퍼리그로 넘어와 팀 이름을 포항제철 돌고래로 변경하고 K리그 원년멤버팀이 되었으며 원년멤버팀 중에서 모기업,연고지가 한번도 바뀌지 않은 유일한 클럽으로 남아있다.[26] 1985년에는 팀 이름을 포항제철 아톰즈로 바꾸고 12년동안 팀을 이끌었던 한홍기 감독이 부단장으로 승격, 후임으로 최은택 감독이 선임되어 1986년 프로화 이후 첫 리그 우승을 맛보게 된다. 최은택 감독이 우승 이후 한양대 감독으로 돌아가고 이회택이 3대 감독으로 선임되어 1988년 2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1990년 한국 최초의 축구전용구장인 포항 스틸야드를 완공하여 1991년부터 홈 구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홈 구장을 옮긴지 2년만인 1992년 세번째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부산 대우 로얄즈에 이어서 2번째로 리그 3번째 우승을 달성하는 팀이 되었다.그리고 15년동안 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다. 1995년에 포철에서 독립해 포항프로축구(주)[27]로 출범한 후 팀명도 '포항 아톰즈'로 바꾸어 시민구단임을 표방했다.

포항 아톰즈/1996년
포항 스틸러스/1997년
포항 스틸러스/1998년
포항 스틸러스/1999년
이후에도 90년대 중반 한국 축구의 강호로서 축구계를 호령했으나 주축 멤버(황선홍, 홍명보, 라데, 최문식, 박창현 등)들이 이적, 은퇴 등으로 떠나고 2000년대 중반까지 기나긴 침체기를 겪는다. 매년 4강,6강은 꼬박꼬박 들면서도 이때부터 이어진 FA 삽질기와 플레이오프에서 이어지는 불운(울산, 수원) 등으로 무려 15년 동안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는 아픔을 겪는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FA컵 우승,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에서 2연속 우승을 하는 등 리그에서만 암흑기라는 말이지 그 이외에는... 타 팀들에게는 배부른 소리일 뿐

2003년에 법인명도 팀명과 동일하게 바꾼 후 2004년 K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2005년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이 포항 스틸러스에 부임, 2007년에 리그 5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경남, 울산, 수원, 성남을 차례로 꺾으며 4번째 우승 컵을 들어올렸다. 포항으로서는 악연 많은 3인방(울산, 수원, 성남)을 모조리 꺾고 올라가서 15년 만에 우승 컵을 들어올리는 대감격을 누렸고 상대편 팀들은 "어떻게 리그 5위가 최종적으로 우승하냐! 이건 무효야!(...)"하면서 한동안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28] 특히 성남 팬들은 아직도 2007년만 생각하면 이를 간다. 당시 한 시즌 정규 리그 경기당 승점 최고 기록을 새로 달성하며[29] 리그 1위를 차지했는데...[30]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6강 PO를 처음 도입할 때 1주일마다 한 번씩 경기를 갖게 하여 휴식일을 너무 길게 정해 놓은 것이[31] 상위 팀들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5위였던 포항의 경기 감각만 올려준 셈이었다.

이후 2008년은 시즌 4위로 마치고 2007년 K리그 우승 자격으로 출전한 AFC 챔피언스 리그(이하 ACL)에서도 조별 예선 탈락하는 불운을 겪지만, FA컵 우승으로 2009년 ACL에 참가한다.

6.2. 영광의 2009년[편집]

조별리그에서 가와사키 프론탈레, 센트럴코스트 메리너스, 텐진 테다와 만난다.
1차전 vs 센트럴(A) 0:0 무
2차전 vs 가와사키(H) 1:1 무
3차전 vs 텐진(H) 1:0 승
4차전 vs 텐진(A) 0:0 무
5차전 vs 센트럴(H) 3:2 승
6차전 vs 가와사키(A) : 2:0 승

도합 3승 3무로 무난하게 조 1위를 차지하고 16강에 올라간다

ACL 16강전에서 호주의 뉴캐슬 유나이티드 제츠를 홈으로 불러 6:0으로 털어먹은 다음, ACL 8강 1차전에선 우즈베키스탄의 FC 분요드코르에 1:3으로 패배. 이후 홈에서 벌어진 8강 2차전에서 답답한 경기력으로 전반전을 0:0으로 마쳤으나 후반 시작과 함께 김재성의 추격골을 시작으로 데닐손의 멀티골로 순식간에 3:0으로 역전했으나 후반 종료 직전에 1골을 내주면서 3:1로 정규 시간을 끝내고,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스테보의 결승골로 대역전극을 펄쳐서 4강에 오른다.[32] 이후 FC 서울을 꺾고 4강에 오른 움 살랄을 제치고 결승에 오른 뒤 결승에서 K리그 팀들을 매년 탈탈 털어먹던 강호 알 이티하드를 물리치고 11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면서 AFC 챔피언스 리그 최다 우승팀이 되었다.

그리고 2009 피스컵 코리아(컵 대회) 결승 2차전에선 당시 황선홍 감독이 팀을 맡고 있던 부산 아이파크를 5:1로 꺾고 우승했다. 참고로 결승 경기가 벌어진 9월 16일 이전, 9월 13일 경기에서는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정규 리그 경기에서 8:1로 승리했다.[33] 3일 간격으로 16골을 몰아 넣으며 제대로 깡패짓을 했다. 그리고 서로 감독이 바뀐 2010년엔 제주에게 제대로 복수를 당한다.

정규 시즌을 2위로 마치고 2009 피스컵 코리아(리그컵 대회) 우승,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2개의 우승 컵을 들어올린 후 2위 자리에서 준플레이오프 승자를 기다렸지만, 2007년 악몽을 안겼던 성남 일화에게 플레이오프에서 0:1로 패배하면서 ACL 우승을 포함한 더블에는 실패했다. 이날 경기로 시즌 홈 무패 기록이 깨지는 동시에 시즌 내내 성남에 이기지 못하면서 울산과 악연을 맺고 있던 포항은 성남과도 확실한 라이벌, 악연 관계를 형성했다.

2009년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인해 벌어들인 수입이 짭짤하다. 상금 150만 달러에 챔피언스 리그 스폰서인 도요타로부터 축하금 2만 달러, 게다가 페어 플레이 상까지 받으며 2만 달러를 챙겨 결승전 하루에만 154만 달러를 챙겼다. 게다가 조별 리그와 토너먼트에서 약 50만 달러를 받았고 12월에 치뤄진 FIFA 클럽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하며 250만 달러를 가져가 2009년 상금으로만 450만 달러(약 52억 원) 넘게 벌어들였다.

2009년 UAE에서 열린 클럽 월드컵 8강전에서도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특유의 공격 축구와 끈끈한 수비를 앞세워 아프리카 콩고의 마젬베를 상대로 2:1 역전승을 올렸다. 4강에서 에스투디안테스와 대결했지만 카드가 난무하는 심판 성향과 상대의 빠른 축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생긴 거친 플레이로 인해 골키퍼 신화용을 포함 세 명이 퇴장당하며 1:2로 패배했다.[34] 아틀란테 FC와의 3, 4위전에서는 전반적으로 밀리는 경기를 펼쳤으나 1:1로 경기 종료, 결국 승부차기 끝에 4:3으로 이기고 3위로 대회를 마쳤다. 상금은 250만 달러(약 30억 원). 데닐손은 4골로 득점왕에 올랐으며 4골은 역대 FIFA 클럽 월드컵 최고 기록이다.

6.3. 2010년, 다시 찾아온 암흑기[편집]

6.4. 2011년, 아쉬움이 컸던 황선홍호의 출항[편집]

6.5. 2012년,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스틸러스[편집]

6.6. 2013년, 황선 대원군과 최초의 더블(리그+FA컵) 우승[편집]

6.7. 2014년. 쇄국 축구의 몰락[편집]

6.8. 2015년, 개항. 그리고 황선홍호의 마지막 시즌[편집]

6.9. 2016년, 최진철호의 침몰, 다시 돌아온 최순호[편집]

6.10. 2017년, 희망을 본 전반기. 숙제를 남긴 후반기[편집]

6.11. 2018년, 대격변. 침몰할듯 침몰하지 않는 강철방주[편집]

7. 스틸타카와 스틸러스 웨이[편집]

포항 고유의 특징이 있다면 바로 미드필더의 세밀한 패스에 이은 호쾌한 공격 축구다. 해외 축구 팬들에게 K리그는 뻥 축구에 시간끌고 수비 축구라는 고정관념을 한 방에 날려버렸으며, 심지어는 야구 팬들은 야구 중계 안 해준다고 생떼질하러 왔다가 포항 축구를 보고 'K리그도 재미있네?' 하고 K리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남들이 뻥축 시전하고 있을 때 포항은 유스 시절부터 패스 축구를 가르쳐 왔고 2000년대 중반 이후 패스 축구가 팀 스타일이 됐다.

보통 K리그 팀들의 악폐습이 1골 넣으면 바로 잠그고 쓸데없이 심판 잡고 늘어지거나 경기 템포를 늦추는 것이었지만, 포항은 그런 짓 하면 이겨도 구단에서 수당을 안 준다. 이것이 09 시즌부터 도입된 그 유명한 Steelers-Way로 ▲실제 경기시간(Playing Time)을 5분 이상 늘리고 ▲경기 매너를 지키며 ▲심판의 권위를 존중하고 판정을 겸허히 수용하는 동시에 ▲포항 선수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겠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포항의 경기를 보면 1골 넣어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2005년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이 부임하고 가장 먼저 선수들에게 지시한 것이 백 패스 금지[35]였고, 당시 뻥 축구와 고리타분한 전술(예: 원정은 무승부가 목표. 앞서고 있는 경기는 후반에 무조건 수비수 교체하고 잠그기)로 정체되어 있던 K리그에 새 바람을 몰고 오며 "파리아스 매직"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다. 파리아스 감독은 이러한 공격 축구로 2007년 K리그 우승, 2008년 FA컵 우승, 2009년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리그컵 우승을 일구어 내며 언론의 찬사를 받는데 이 시절 포항의 경기는 성적도 잘 나오고 결정적으로 경기가 재미있었다. 이기든 지든 기본 3골부터 시작하는 경기가 많고, 2009년 9월 13일 제주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2009 K리그 22라운드에서 제주 유나이티드를 8-1로 꺾어 한국 프로 축구 역대 한 경기 최다 골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파리아스 재임 시절에는 이러한 공격 성향이 너무 강해서 후반 막판 어이없는 실점으로 무를 캐는 경기도 많았는데, 2011년 후임으로 황선홍 감독 취임 이후 2011년, 2012년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미드필더와 수비를 정비하면서 "2014년 현재 K리그 최강의 패스 게임"을 구사하는 팀으로 거듭났다. 특히 2012 시즌 중반, 당시 유로 2012에서 화제가 되던 스페인 국가 대표 팀의 제로 톱(4-6-0) 전술을 장착하는가 하면, 황선홍 감독은 상황에 따라서 원 톱, 투 톱까지 자유롭게 용병술을 구사하며 상대 팀들을 농락하고 있다. 이러한 패스 플레이에 감탄한 축구 팬과 언론들이 붙인 별명이 FC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에서 따온 스틸타카다.

그러나 스틸타카란 용어는 문외한에 가까운 기자들이 패스축구 = 티키타카라는 인식 때문에 붙인 별명이기 때문에 실제로 포항이 바르셀로나 식의 점유율 축구를 구사하는 건 아니다. 자세한 사항은 티키타카 문서를 읽고 티키타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 알겠지만, 간단히 말해 티키타카에서 패스는 공을 오래 가지고 있기 위한 수단이지만 포항의 전술에서 패스는 그저 상대방 문전에 빨리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애초에 패스의 목적 자체가 다르다. 필요하다면 장신 타겟맨 전방에 박아놓고 길게 연결하는 뻥축구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36]

오히려 포항과 유사한 팀 컬러를 가진 해외의 유명팀을 꼽으라면 아스날 FC가 적당할 것이다. 아스날도 아스날 축구를 안 본느 사람들에게는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와 비슷한 스타일의 경기를 한다는 오해를 사는 것 역시 비슷하다. (...) 물론 세세하게 따지면 포항과 아스날의 전술이 똑같을 리 없다.

물론 공격축구 자체는 90년대에 황선홍-라데 시절부터 유명했던 포항이지만 파리아스 감독 이전에는 감독 바뀌면 스타일도 바뀌는 팀이었다. 박성화 감독과 최순호 감독 재임기가 대표적인데 이중 최순호 감독 재임기는 리그 꼴찌까지 떨어져 본 유일한 시기이기 때문에[37] 준우승으로 거뒀음에도 포항 팬들에게는 엄청난 흑역사이다.

파리아스 이후 '스틸타카'로 지칭되는 공격적인 패싱 축구가 포항의 팀컬러로 완전히 정착했고 황선홍을 거쳐 최순호 감독에게까지 이어진다.[38] 역사가 짧고 부침이 많은 K리그 팀들에게 명문 칭호를 붙일수 있느냐는 논란거리지만 만약 K리그에 명문이 있다면 그건 포항[39]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발언은 괜히 나온게 아니다.

그리고 특이점으로 바르셀로나처럼 1군부터 유스까지 전술을 통일시킴으로써 성장한 선수가 1군에 올라갔을때 빠르게 전술에 적응하도록 유도하며 이는 1군팀과 유스팀의 결속력을 다지게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다만, 어릴때부터 너무 포항 전술에 적응된 나머지 선수가 다른 팀으로 나가면 큰 활약을 못하거나 폭망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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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2010 시즌에는 스틸러스 웨이를 계승한 "아름다운 축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적이 있다.??:어서 와서 한잔 해 이제 포항 선수들 입에 장미꽃 하나씩만 물려주면 완벽 다른 구단들도 2010 시즌 개막 전에 스틸러스 웨이를 참고하여 K리그 5분 더(5 minutes more, 이하 5mm) 캠페인을 벌이기로 합의하여 포항의 스틸러스 웨이를 다른 팀들에게서도 볼 수 있게 되었으나... 파리아스 감독의 후임으로 데려온 모 감독전혀 아름답지 않은 축구를 펼치는 바람에 11 시즌부터는 다시 스틸러스 웨이라고 부르고 있다.

8. 전통과 인기, 그리고 응원가 영일만 친구[편집]







승전시 부르는 응원가는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40][41] 4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인구 50만의 경상북도 1970년대부터 포항시민과 갖은 애환을 같이 나눈 구단이기도 하다.

영국의 오래된 축구 팀들이 그러하듯이,[42] 공업 도시인 포항의 포항 스틸러스 역시 포항 제철소와 그와 관련된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축구 팀인 데다[43] 80년대와 90년대에는 포항시에서 유일한 유흥거리라고는 매주 열리는 축구 경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인기가 정말로 대단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구 30만이던 시절부터 평균 관중 1만 이상을 찍고 있었으니 그저 할 말이 없을 정도.

1989년 개막전에서는 지방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개막전 관중 4만을 찍기도 했다.[44] 다만 90년대 후반 암흑기가 도래하면서 팬들이 떨어져 나가는가 싶었는데 세르지오 파리아스라는 걸출한 명장 덕에 예전의 인기를 다시 회복했다. 정작 그 주인공은 배신해서 이미 떠나고 없지만. 심지어 2005년까지는 코레일에서 통근열차괴동역 너머에 있는 제철역(포스코 내에 있는 포스코 전용역)까지 가서 근처 포항 스틸러스 홈 구장으로 가는 관중들을 수송하기도 했었다.[45] 대한민국 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구단 응원 열차였던 셈이다.

2008년 기준으로 관중 점유율과 연고지 인구 대비 관중 수가 상당히 높은데, 전자는 형제 구단인 전남에 이어서 리그 내 2위고 후자는 리그 내 3위다. 포항 인구가 50만이라는 걸 감안하면 포항의 평균 관중 1만은 수도권 팀들이 평균 관중 2만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2009 시즌 파리아스 감독으로 부활한 이후 2010 시즌 암흑기를 보내면서 팬들이 떨어져 나가나 싶었지만 2011 시즌 현역 시절 포항의 레전드 황선홍 감독의 귀환과 함께 꾸준히 리그 3위권의 성적을 찍어주면서 다시 폭발적으로 팬이 증가. 매주 포항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홈구장인 포항 스틸야드 주변은 밀려드는 차량과 사람에 발 디딜 곳이 없다. 더욱이 대부분 구단 서포터스만이 열성적인 응원을 보내는 타 구단에 비해 포항은 서포터, 일반 시민 가리지 않고 응원 열기가 대단하다. 심지어는 2016 시즌 구단 최악의 암흑기를 보내며 2부 리그 강등 문턱까지 갔음에도, 2017년 홈 개막전에서는 홈구장인 포항 스틸야드 매진을 기록했다.

90년대에는 하프 타임마다 해병대 의장대가 사열 시범을 보였고 꼬마 팬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 포항 팬들로선 아쉬운 부분 중 하나. 대신 이후 해병대 응원대가 스틸야드 한 편에 자리잡게 되면서 해병대 응원이 새로운 명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

9. 블레즈(BLEDS)[편집]

지방 구단인지라 얼마 없는 TV 중계도 잘 안 되는데 이 처사에 열받은 한 서포터가 스틸러스 TV라는 인터넷 중계 방송국을 개국했다. 이제는 구단에서도 은근히 공식 중계 팀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링크). 빅 매치일 때는 방송 채널을 4개 이상 돌리는데도 언제나 꽉 찬 방이다. 흠좀무.

여러모로 공중파 중계에서 K리그 팬으로서는 포항과 붙은 자신의 팀을 응원하기 위해 이 방송을 찾아오기도 하지만, "원래 취지는 어디까지나 포항 스틸러스를 위한 방송국"이므로 편파 해설은 당연히 각오해야 한다. 타 팀 팬이 중계를 듣고 있으면 노골적인 편파 해설로 인해 정신이 멍해질 것이다.

그나마 2009 시즌 후반부터는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선전과 포항 스틸러스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케이블 스포츠 채널을 중심으로 중계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2010 시즌부터는 구단 자체 중계 명칭을 스틸러스 TV로 정하면서 자연스레 개명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결국 2010년 4월 BLEDS로 개명했다. 이름의 유래는 당연히 BLACK+RED+LED. 그렇게 근근히 중계를 해 오다가 2012 시즌부터 골 많이 나고 재미있는 포항 경기를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중계를 하자 블레즈에서 중계를 하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SPOTV나 중계가 없을 때는 블레즈에서 자체 편성하여 중계를 하고 있으며, 중계시에는 경고 누적이나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한 선수 or 유망주들을 객원 해설로 초대하여 중계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10. 라이벌과 주요 더비[편집]

공식 라이벌은 울산 현대 축구단. 그리고 그 외 라이벌로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성남 FC, FC 서울 등이 있다.

10.1. 동해안 더비울산 현대[편집]

FIFA에서 공인한 K리그 클래식 2대 더비 중 하나인 동해안 더비의 라이벌. 같은 동해안에 위치한 팀이기도 하고 포항과 울산의 묘한 지역감정[46]때문에 서로 제발 좀 그만 만나게 해달라고 팬들이 사정사정할 정도로 악연이 깊은 라이벌이기도 하다.

늘 중요한 경기마다 만나서 서로의 발목을 잡았으며 대표적인 것이 바로 98년 플레이오프 2차전. 당시 울산 소속이던 김병지에게 헤딩골을 허용. 1승 1패로 동률에서 승부차기 패배로 통한의 준우승을 한 경기. 이 경기는 K리그를 말할때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경기중 하나다.[47] 2008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승부차기를 앞두고 골키퍼를 그 경기가 데뷔전인 신인 김승규로 교체한 울산에 통한의 승부차기 패배를 하기도 했다. 두 팀모두 리그 3~6위권의 고만고만한 전력을 갖추고 있다보니 PO만 했다하면 마주하는 경우가 많은지라, 포항 팬도 울산 팬도 정규시즌이라면 모를까 PO에서는 제발 좀 안 만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그 해의 서로의 전력이 어떻게 차이가 나든 동해안 더비는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결과를 불러오는 지라..

덤으로 포항이 애지중지 키운 오범석FIFA 제소 직전까지 가는 다툼 끝에 러시아로 떠나고선 하필 울산으로 복귀하는 바람에 최근들어 사이는 더 안 좋아졌다. 게다가 하필이면 복귀전 상대가 포항이었고 그날 포항은 종료직전에 동점골을 먹는 바람에 리그 최다 연승 기록도 깨졌으니...그걸로 모자라 2011 시즌 직전에는 포항에 있던 설기현 울산으로 이적했다. 포항과 울산의 질긴 악연은 현재진행형.

재미있는 것은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팬들과 달리 구단끼리는 서로 친분(?)이 있는지 시즌이 끝나면 선수 스와핑이적이 꽤 활발한 편. 포항은 호시탐탐 울산의 주전선수를 노리고 있고, 울산은 역으로 포항의 유망주나 포항에서 버린 선수를 잘 주워 가는 편이다. 구단 스태프나 고위층에선 크게 신경 안 쓰는 듯. 하지만 팬들은 예외. 서로 사이가 얼마나 나쁘냐면 더비 경기가 끝난 후에는 서포터들끼리의 충돌이 100% 일어난다. 서로에게 쓰레기통을 던지거나(…) 시비가 붙어서 주먹다짐을 하거나(…)

그리고 2013 시즌, 포항레전드 세제믿윤 덕에[48] 세계 최초로 단일 리그에서 라이벌 관계의 1, 2위 팀이 최종전에서 만나서 이긴 팀이 모두 가져가는 희대의 매치업이 성사됐고 후반 추가시간에 김원일라스트 미닛 골을 넣으면서 포항 팬들은 환호를, 울산 팬들은 절망을 맛보았다. 심지어 경기 장소가 울산의 홈인 울산문수축구경기장. 이걸 보고 마라카낭의 비극이 떠오른다면 그건 기분 탓이다 그리고 2013-2014 시즌 라 리가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결과는 반대

10.2. 서로 다른 검빨, 그리고 박주영과 황선홍. FC 서울[편집]

울산 다음으로 사이 나쁜 클럽.

FC 서울와 유니폼 색깔이 같고 줄무늬 방향만 다른데(포항-가로/서울-세로) 타 팀팬들은 이를 두고 검빨 동맹이라고 자주 불렀다. 이 말 처음 나오던 시절 포항의 서울전 전적이 안좋았기에 서울 싫어하는 타 팀 팬들이 어느정도 비아냥을 담아 동맹이라 불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당사자들은 이 말 싫어한다. 박주영 계약파동으로 인해 포항팬들은 이미 서울 하면 이를 갈게 되었거니와, 박태준 회장의 축구사랑에 힘입어 한 연고지에서 40년 동안 터를 잡으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프로 구단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포항인지라 다른 팀도 아닌 서울과 엮이는걸 굉장히 기분 나빠했다. 당사자들은 검빨이란 말 대신 서로 고철과 패륜으로 부르며 깐다. 언론에서는 이 명칭이 꽤 그럴싸하다고 보는지 2015년 이후 양 팀의 대결을 검빨더비라 칭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07~08년엔 포항이 상당히 밀리는 모습을 보였으나 09년부터 균형을 잡아서 포항은 상암에서 약세를 보이고 서울은 스틸야드에서 밀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포항은 2006년 8월 이후 상암에서 승리가 없었으나 2014년 4월 9라운드 원정에서 1:0 승리를 거두면서 지긋지긋한 상암 징크스를 털어냈다. 그러나 14년 7월에는 FA컵, 8월에는 아챔에서 서울과 상암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벌여 고배를 마시면서 서울과의 악연은 계속되고 있다. 이 2014 시즌에는 유독 자주 부딪쳐서 한 시즌만에 6번이나 만났다. 리그 3전, FA컵 1전, ACL 2전. 전적은 1승 4무 1패, 승부가 났던 두 경기 모두 1대 0 한골차이 승부일만큼 박빙이지만, 속내를 보면 4무 가운데 3경기는 토너먼트 경기였고 ACL 1차전을 제외한 2경기 모두 승부차기 혈투 끝에 서울이 이겼다.

두 팀의 감독들도 흥미로운 스토리를 뽑아냈는데 바로 현역시절 한국 공격진을 이끌었던 황선홍 감독과 최용수 감독의 라이벌 구도다. 리그와 토너먼트에서 자주 부딪치고 리그 승률은 포항이 나쁘지 않은데 FA컵과 아챔같은 토너먼트에서 서울에게 일격을 맞고 탈락하는 구도가 14~15시즌(14시즌에는 아챔과 FA컵, 15시즌에는 FA컵) 연달아 발생하니 황선홍 감독은 14시즌 이후 최용수 감독만 생각하면 화가 난다는(인간적으로 싫어한다는건 아니고) 인터뷰를 남기며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사를 누차 피력했고 최용수 감독도 특유의 너스레로 화답하면서 라이벌 구도가 생겨났다. 황선홍 감독이 15시즌을 마지막으로 물러나면서 흐지부지 되나 했는데 후임 최진철 감독이 역시 최용수는 이기겠다고 단언했고 실제로 첫 대결에서 승리했다.

그런데 2016년 6월 FC 서울의 최용수 감독이 돌연 중국 장쑤 쑤닝으로 떠나고 지난시즌까지 포항의 감독으로 치열하게 부딪쳤던, 포항팬들이 누구보다 사랑했던 황선홍 감독이 FC 서울 감독으로 부임했다. 잘키우는 유스들은 물론이고 이제는 감독도 빼앗기네.... [49]

2016년부터 이상하게 포항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거나 유망주로 각광받던 선수가 서울행을 택하고 있다. 2016년 신진호, 2017년 신광훈이명주, 2018년 정원진.[50]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일부 서울 팬들은 족보없는 축구는 가라더니 스스로 나서서 족보를 다 팔아치우고 있다고 비꼬기도 한다.

10.3. 축구수도? 혹은 수포동맹? 수원 삼성 블루윙즈[편집]

수원에 대한 감정도 별로 안 좋은데, 울산과 마찬가지로 플레이오프 악연도 많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팀이라는 자부심에 사는 포항 팬들은 "축구 수도 수원"이라는 말 자체를 아주 싫어한다. 이건 포항 외에 서울이나 다른 축구 팬들도 마찬가지. 그래서인지 포항은 홈에서 수원과 경기할 때는 압도적인 결과를 보여주는데 2004년 이후 포항에서 치러진 수원전에서 포항은 단 1패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홈에서 내준 실점조차도 10년 동안 단 5실점뿐이다. 이 정도의 학살은 다른 라이벌 관계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였는데 2014년 상황이 역전되어 4전 3패했다. 원정에서 4대1로 지는가 하면 다음 원정때는 한점차 리드를 84분 88분에 골은 먹으면서 패배하고...마지막 라운드에는 10년 된 홈 징크스마저 깨지며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잃었다.

여담으로, 같은 삼성스포츠 소속인 삼성 라이온즈가 2012년부터 포항 야구장을 제 2구장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스포츠팀이라고는 포항 스틸러스 하나밖에 없었던 포항시의 새 식구가 되었다. 다만 삼성의 주 연고지는 포항이 아닌 대구인지라, 서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기 바쁜 수원 삼성 블루윙즈 팬덤과 달리 삼성 라이온즈 팬덤과의 사이는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은 편.[51] 2017년에는 10년 넘게 포항에서 함께 뛴 로컬보이 신화용이 수원으로 가게 되었고 이적 후 첫 맞대결에서 수원이 1:0으로 이기기도 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수원과 포항은 줄곧 같은 스플릿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2012년부터 2015년까지는 상위스플릿에, 2016년은 하위스플릿에서 만났다. 이 때문에 팬들은 수포동맹이라고 불리기까지 했지만 2017년 들어서 수원이 상위 포항이 하위로 가면서 수포동맹이 깨졌다.

10.4. 클래식 라이벌, 성남 FC[편집]

공식 라이벌은 아니지만 인연 질긴 팀을 꼽으라면 성남 FC가 있다. 역시 K리그 명승부 중 하나인 1995년 챔피언 결정전, 11월 11일 포항전용구장에서 벌어진 2차전은 양 팀이 선제골(포항)-추가 골(포항)-추격 골(일화)-동점 골(일화)-역전 골(일화)-재역전 골(포항)으로 이어졌고 당시 득점은 황선홍, 신태용(각 2골). 라데, 고정운(1골)으로 K리그 올드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명경기다.[52] 중립구장인 안양종합경기장에서 개최된 최종전에서는 포항이 3차전 연장 골든골을 이상윤에게 허용하며 성남이 3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2007년에는 포항이 복수(포항 우승). 이후 2009년까지 포항이 성남을 탈탈 털다가[53] 2009년에는 다시 성남이 복수를(성남이 결승 진출)하며 클래식 더비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2009, 2010년에는 성남이 포항을 털더니 그 뒤로는 2011년 FA컵에서 1회, 2014년 리그 1회를 제외하면 포항이 성남을 쉴새없이 털고 있다.

이런 역사 때문에 90년대 한국프로축구를 기억하는 올드비들이 특별히 이렇게 부르고 있다. 다만 언론이나 신규 팬층이 이둘의 관계에 주목하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2017시즌 부터 성남이 2부 리그로 강등되어서 다시 리그에서 만나기도 힘들어진 상황.

울산과 달리 프런트와 팬들 모두 사이가 나쁘지 않은 편이다.

10.5. 제철가 형제, 전남 드래곤즈[편집]

전남과도 라이벌리가 있는데, 이는 포항과 전남이 같은 계열사(전남은 포스코 광양 제철소)라서 시즌이 끝나면 서로의 선수와 스태프를 스왑(?)함으로써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남이 창단되기 전에는 포항이 광양의 축구열기를 고조시킨다는 명분으로 이벤트성 홈경기를 한 적도 있다. 언론에서는 어떻게든 제철가 더비, 형제 더비로 이름을 붙이려 하지만 양 팀 팬들의 반응은 시큰둥. 오히려 서로 맞붙지 않는 경기에서는 형제(?) 팀을 서로 응원해주기도 한다. 다만, 일단 라이벌 의식은 있는 데다가 전남의 축구 스타일이 포항에게는 쥐약인 스타일이라 난타전이 나오거나 전남이 토나오는 전방 압박으로 인한 한 골 싸움이 나오거나 하는 양상이 펼쳐진다.

11. 스토리[편집]

11.1. 클럽하우스[편집]

파일:attachment/songra.jpg

송라 클럽하우스

준공 연도

2001년

위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하송리 85-14번지

건설 비용

약 120억 원(2001년 기준)

시설

연면적 1,232평(지하 1층, 지상 3층/객실 53실)
천연 잔디 구장 2개소
인조 잔디 구장 2개소
기타 선수 편의 시설


이 한마디로 정리된다. 한국프로축구 최초의 클럽하우스.

1, 2군의 모든 선수들에게 1인 1실을 지급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객실을 보유하고 있으며 야간 조명이 달린 천연 잔디, 인조 잔디 구장이 2개소씩 있다. K리그 팀 중 가장 오래된 클럽하우스지만 지금봐도 꿀리지 않는 최고급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11.2. 선수 육성과 FA의 악연[편집]

서술했듯이 유소년 육성에 관해서는 한국 최고의 클럽이나 유난히 FA 및 외부 영입 쪽은 결과가 상당히 좋지 않다. 자세한 것은 포항 스틸러스/선수 육성과 FA의 악연 참고.

11.3. 퐁당퐁당 홀짝 징크스[편집]

감독 관련해 5대 감독 박성화 시절(1996~2000)부터 정말 특이한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박성화부터 역대 감독들 성적과 내용을 보면 마치 물수제비 뜨듯 퐁당퐁당 거리며 성공과 실패가 반복된다. 박성화부터 홀수 감독들은 좋은 평가를 받고, 짝수 감독은 예외없이 망했다.

징크스의 시작점인 박성화 감독은 전성기인 1990년대에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아 2000년대 이후 입문한 팬들이 그 전성기를 잘 모르고 2007년 부산 감독을 맡았다가 올림픽 대표팀으로 빠져나가버린 이후의 행적 때문에[54] 과소평가 받지만 포항에서의 박성화는 리그 우승만 없었다뿐이지 1996년 FA컵 우승, 1997년, 1998년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2연패를 이룩한 탁월한 전략가이자 명장이었다. 포항의 AFC 챔피언스리그 3회 우승중 2번을 만들어주어 지금 포항이 당당하게 아시아의 명문 소리를 할 수 있게된건 박성화 감독의 공이다.[55]

6대 감독 최순호부터 본격적인 징크스가 발휘된다. 성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우승은 못했지만 2001년과 2002년의 FA컵 준우승, 2004년 리그 준우승을 기록했다. 이 당시 최순호 감독이 구사한 심심한 수비축구에 관중이 많이 줄었고 팀컬러를 잃었다는 서포터즈의 반발도 심했다. 결정적으로 2004년 후기리그에서 꼴찌를 하면서 여론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서포터즈가 감독퇴진 플래카드를 내거는 내홍이 있었고 2004년 챔피언 결정전에서 수원에게 승부차기로 패해 준우승에 머무르자 최순호 감독은 재계약에 실패하고 팀을 떠나야 했다.

7대 감독은 구단 최초 외국인 감독인 브라질인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이었다. 파리아스 감독은 최순호 감독 시기 실종되었던 공격축구 기조를 되찾고, 특유의 브라질색을 팀에 입혔다. 2년의 담금질을 거쳐 6강 플레이오프 제도 하에서 치뤄진 2007년 플레이메이커 따바레즈와 박원재, 최효진 양날개를 앞세워 리그5위에서 경남, 울산, 수원, 성남을 모두 깨부수고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2008년부턴 완전히 꽃피운 파리아스식 공격축구로 2008년 FA컵 우승, 2009년 리그컵과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리그 최초로 감독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2009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그 당시 K리그 팬들에게 공포의 대명사였던 사우디의 알 이티하드 꺾고 이룩한 것이라 더욱 의의가 컸다. 이 시기부터 특유의 빠른 패스웍에 기반한 공격축구 스타일을 정립했고 대외적으로 유스 잘키우는 구단이란 이미지를 굳히게 된다. 공격축구야 그전에도 했지만 엄밀히 말해 감독 취향따라 축구스타일도 바뀌는 팀이었다. 바르셀로나처럼 그 팀하면 생각나는 고유의 스타일이 형성된건 파리아스 부터다.

지방중소도시에서 지내는게 썩 편하지만은 않았던 파리아스 감독은 중동 오일머니의 유혹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알 아흘리로 떠나고 포항은 새로운 외인감독 레모스 올리베이라를 8대 감독으로 선임한다. 레모스 감독은 아름다운 축구라는 슬로건을 내밀며 야심차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팬들도 올해는 우승이 힘들거 같다며 마음을 너그럽게 먹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너무 심각했다. 일단 2009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이후 공백이 크긴 했다. 외인 공격수 데닐손과 스테보와 믿음직한 날개 최효진이 떠났고, 그들을 대체해야할 설기현과 모따는 각각 부상과 부진으로 한사람 몫을 못해줬다. 하지만 레모스 감독은 그런거 감안하더라도 너무 못했다. 함량미달 공격수인 알렉산드로에 대한 전폭적인 신임, AFC 예선전 치루려고 리그를 2군으로 다 채우는 기괴한 로테이션, 아무런 색깔이 전술, 공격에는 공백이 생겼어도 중원은 파리아스 시절과 거의 같음에도 전임 감독 시기의 패싱게임 실종 등등. 문제가 너무 많았다.

2009년 8-1로 이겼던 제주에 2-5로 깨지는 팬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포항 구단은 2010년 5월 10일 구단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하고 레모스 감독의 경질을 발표한다. 포항 팬들은 이 시절을 흑역사로 여긴다.

2010 시즌을 박창현 대행체제로 마치고 선임된 9대 감독은 전남에서의 코치 생활과 3년간의 부산 감독생활로 어느정도 지도자 경험을 쌓은 상태였던 황선홍 감독이었다. 황선홍 감독은 기존의 공격축구에 균형을 더해 스틸타카를 완성한다. 2011년, 2012년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미드필더와 수비를 정비해 중원에서의 강한 압박,[56] 공수겸장의 측면 자원, 점유율을 포기하는 대신 빠르고 세밀한 패스웍, 장신 타겟맨을 활용한 킥 앤 러쉬로의 자연스러운 전환이 모두 더해진 강력한 팀을 완성했다. 이를 통해 2012년 FA컵 우승, 2013년 K리그와 FA컵 더블이라는 성과를 이룩했다. 2013년 더블은 외인 선수 없이 이뤄낸 성과라 큰 화제가 되었다.

황선홍 감독은 2015년을 마지막으로 휴식을 갖기 위해 팀을 떠났고 10대 감독으로 U-17에서 어느정도 성과를 낸 최진철이 선임되었다. U-17에서 보여준 선수비 후역습 전술과 포항의 스틸타카가 안맞아서 걱정이 많았는데 그대로 적중했다. 이해에는 보드진의 형편없는 지원까지 더해져 팀이 하위스플릿으로 굴러떨어졌다. 하위 스플릿으로 떨어져 강등권과 승점 4점차까지 추락하게 되자 결국 최감독은 사임을 표명했다.

최진철 감독의 후임으로 팬들은 김병수 감독을 원했지만, 최순호 감독이 오더니 17시즌과 18시즌을 모두 말아먹으며 이 징크스도 나쁜 쪽으로의 끝이 보이고 있다.

11.4. 숨겨진 골키퍼 명가[편집]

아랫 동네에 가려서 그렇지만 포항은 전통적으로 골키퍼 걱정이 없는 골키퍼 명가였다. 80년대에는 조병득, 90년대에는 박철우[57]와 김이섭, 2000년대에는 김병지정성룡신화용[58], 2010년대에는 신화용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강현무, 이준희, 김로만 같은 유망한 키퍼들이 끊임없이 경쟁중이거나 경쟁을 못 이기고 다른 팀으로 떠나갔다. 심지어 김병지 이후로는 포항 유스가 주전 키퍼 자리를 내준적은 울산 현대에서 온 김지혁이 주전이던 08년이 유일하며 그나마도 김지혁이 상무 입대 후 승부조작에 연루, 제명되어 오래 가지 못했다. 2018 시즌에도 K리그 챌린지에서 수준급으로 활약했던 류원우가 영입되었지만 역시 유스 출신 키퍼인 강현무에 밀려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11.5. 스틸러스?[편집]

원래는 포항 아톰즈 시절, 포항 서포터즈 클럽의 이름이 '스틸러스'였다. 포항제철과 철강에서 오는 이미지를 인격명사화 한 단어였는데...

구단측에서 향후에 '아톰'이라는 일본 만화 캐릭터가 불러 일으키는 여러가지 어른들의 사정으로, 기존 팀명과 마스코트를 변경해야만 하는 시점이 왔고...

구단에서 서포터즈 클럽의 '스틸러스'라는 이름이 좋아서 그대로 받아 쓰면서, 양자의 명칭이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당시 서포터즈 클럽은 '마린스'라는 이름으로 명칭변경을 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스틸야드, 그리고 스틸러스. 이 두가지 명칭 모두가 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름인 것이다.

12. 역대 감독[편집]

역대

이름

재임 기간

비고

초대

한홍기

1983년[59] ~ 1984년

2대

최은택

1985년 ~ 1986년

구단 최초 우승 감독

3대

이회택

1987년 ~ 1992년

재임 도중 국가대표 감독 차출

대행

김순기

1989년

대행

조윤옥

1989년 ~ 1990년

4대

허정무

1993년 ~ 1995년

재임 도중 국가대표 감독 차출

대행

김순기

1994년

5대

박성화

1996년 ~2000년

시즌 중 사임

6대

최순호

2000년 ~ 2004년

7대

세르지오 파리아스

2005년 ~ 2009년

구단 최초 외국인 감독

8대

레모스 올리베이라

2010년

시즌 중 사임

대행

박창현

2010년

9대

황선홍

2011년 ~ 2015년

10대

최진철

2016년

시즌 중 사임

11대

최순호

2016년 ~ 현재

13. 레전드/프런트/선수명단[편집]

13.1. 주요 백넘버[편집]

  • 6: 김기동의 백넘버이다.
    다른 백넘버에 비해 최신이라 인지도가 떨어진다.

  • 9: 황지수의 백넘버이다.
    황지수의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임을 생각하면 9번의 통상적인 의미[60]와는 많이 안 맞는 번호이지만 팀의 노익장이자 원 클럽 맨으로서 좋은 활약을 보여준 황지수였기에 상징성이 큰 백넘버이다. 2018년부터 성남에서 이적해온 수비형 미드필더 이후권의 백넘버가 되었다.

  • 17: 박태하의 백넘버이다. 특히 017광고에 출연하여 최초로 이동통신사 광고를 찍은 현역선수에 당첨됐고 그에 걸맞는 활약으로 전설로 기록된 백넘버이다.
    이 번호도 통상적인 의미와 다른 번호로 포항에서는 풀백을 상징하는 번호다.[61] 후계자들 중 신광훈이 제일 유명하다. 2017시즌초 강상우가 후계자 포스를 보여주고 있다

  • 18: 선수 및 감독으로서도 팀의 전설인 황선홍의 백넘버다.
    주로 스트라이커원톱에게 하사하는 백넘버로 포항에서 18번이 가지는 의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7번과 비슷한데 비교대상이 K리그 역사상 최고의 외인선수와 함께K리그 역사상 최강의 투톱을 이루신 분못하면 나노 단위로 까이는 (...) 백넘버다. 원 주인께 감독 하는 동안 직접 하사받아서 사용하던 고무열이 현장 평가보다 더 많이 까이는 이유가 이 백넘버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라고 봐도 무방하다. 2017시즌까지 양동현이 원톱다운 면모를 선보이며 이 번호의 주인노릇을 톡톡히 했다.[62]
    양동현이 이적한 후 프로에 데뷔한 연세대 출신 이근호[63]의 백넘버가 되었다.

  • 20: 홍명보-이동국으로 이어진 백넘버이다.
    다만 이 번호는 홍명보의 먹튀 사건과 이동국의 EPL 실패 이후 성남 이적 등으로 인해 의미가 많이 퇴색된 상태로 이전만큼 네임밸류가 있는 선수가 달지는 않는다. 그나마 가장 유명한 선수가 신형민. 2018년에는 유스팀 출신인 우찬양이 이 번호를 달며 다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14. 유니폼[편집]

15. 과거 엠블럼[편집]

파일:attachment/포항 스틸러스/pohang1.jpg[64]

파일:attachment/포항 스틸러스/pohang2.jpg

1983~1984년 사용

1985~1996년 사용

파일:attachment/포항 스틸러스/pohang3.jpg

파일:attachment/포항 스틸러스/pohang4.jpg

1997~1998년 사용[65]

1999~2003년 사용

16. 비하인드[편집]

  • 2009년 파리아스 감독이 있을 때 워낙 깡패짓을 많이 해서 부산, 제주, 광주, 경남, 강원까지 포항에게 복수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쯤되면 자타공인 K리그 공공의 적. 끝판대장님은 이미 사우디로 떠나고 없는데! 결국 2010 시즌에는 감독 하나 잘못 바꾼 죄로 부산, 제주, 경남에게 제대로 털렸다. 특히 제주에겐 홈에서 2:5로 대패하면서 결국 이 경기 이후 시즌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올리베이라 감독이 경질되기도.

  • 2012 시즌에 들어선 위의 악연 관계는 거의 청산되었고 現 포항 감독인 황선홍의 이전 감독 팀이었던 부산 아이파크와의 악연만 남은 상태. 사실 이것도 2011 시즌 초기 부산에 부임한 안익수 감독이 일종의 부산 선수들 군기 잡는 용도로 일부러 전임 감독인 황선홍 감독과 부산 선수들 사이의 악연을 부추긴 거라 2012 시즌에 들어선 많이 시들해진 상태다.

  • 2007 시즌부터 6시즌 동안 유니폼 제조 스폰서를 맡은 이탈리아 카파(Kappa)와 계약을 끝내고 2013 시즌부터는 국내 브랜드 아테미(Atemi)와 유니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2015년 부터 험멜과 계약중.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 대표 팀 감독인 알레한드로 사베야가 상당히 많이 존경하는 팀이다. 2009년에 클럽 월드컵에서 사베야는 에스투디안테스를 이끌고 포항 스틸러스와 맞붙게 되었는데 경기 직전 인터뷰에서 포항 스틸러스에 대한 온갖 칭찬으로 인터뷰를 도배했다. 물론 립 서비스성 발언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치부하기에는 엄청난 극찬이었다. #

  • 리그베다 위키 부터 나무 위키까지 이용자 중에 포항 팬이 많은지 국내 프로/아마 모든 축구 팀을 통틀어 해당 위키 작성 항목/문서내용이 제일 많다. 경기 결과 역시 그 날 바로바로 업데이트될 정도로 팬들이 돌아가며 관리에 신경 쓰고 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늦어지고 있다 명주 떠나고 부터였다...느려진게... 이번시즌은 업댓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 2017년 4월에 기념 교통카드를 출시했는데, 뜬금없이 티머니가 아닌 캐시비로 내놓았다. 그것도 L.포인트가 달린 단일권종형이다. 10가지 도안으로 나왔고 가격은 1장당 3,000원이며, 스틸러스 샵에서 판매 중이다. 비회원도 주문 가능.


[1] 프로화는 1983년[2] 포항 응원단이 흔드는 깃발에 머플러를 한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이 사람이 박태준회장이다.[3] 정확히는 포스코와 그 협력업체 2개사가 컨소시엄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4] 슈퍼리그 출범 후 1983년부터 1986년까지는 정부 규제로 구단들의 연고지에서 홈경기를 개최 못하고 전국투어방식으로 리그를 진행했지만 1987년부터 규제가 풀려 홈 앤드 어웨이 시스템으로 변경되어 광역연고지인 대구/경북 연고지에서 홈경기를 개최하였고 이때 주연고지인 대구시민운동장에서 홈경기 개최.[5] 스틸야드 잔디 보수공사로 스플릿 기간에 사용[6] 입석 기준. 좌석은 18,000석이다.[7] 전남 드래곤즈 창단 이전에 제2 홈구장으로 사용[8] 광역연고에서 도시연고로 변경된 것 이 외에는 창단 후 한 번도 연고지 변경이 없었다.[9] 이 해 FA컵 우승을 포함하여 K리그 최초의 "리그 우승 + FA컵 우승" 더블을 달성했다. 더욱이 외국인 용병 없이 국내 선수로만 달성한 진기록이기도 하다.[10] 포항 소속일 때만을 기준 / 스틸야드넷을 참고하여 작성함[11] 2018시즌 K리그1 19R 전남 드래곤즈와의 경기까지 기준, 이후 출전시마다 계속 갱신됨[12] 명문이란 칭호를 K리그 구단들이 쓸 수 있느냐는 문제는 큰 논쟁거리지만 쓸 수 있다면 포항밖에 없다. K리그에 소속된 프로구단중 가장 오래된 역사(44년)를 지니고 있는데다, 같은 원년구단인 제주와 이듬해 참여한 서울과 달리 연고지를 한번도 떠나지 않았고 역시 원년 멤버인 부산이 2000년대 이후 몰락한 것과 달리 꾸준히 성적을 내고있다. 같은 동해안 라이벌인 울산과는 리그(5회<->2회)와 FA컵(4회<->1회), ACL(3회<->1회) 우승횟수가 넘사벽 차이이며 전북처럼 리그의 해악이 될만한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성남은? 강등됐잖아[13] 실업 축구까지 포함한다면 대전 코레일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축구 클럽.[14] 1980년대, 90년대, 00년대, 10년대 모두 우승을 맛보았다.[15] 강팀과 명문은 엄연히 구분되는 표현이다. 예시를 들자면 맨체스터 시티 FC가 현 시점에서 세계적인 강팀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과거의 역사는 상당히 초라했던 것을 근거로 축구팬들은 맨시티를 명문 클럽으로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유럽 내에서 손꼽히는 전통과 실력을 자랑하던 AC 밀란은 2010년대를 기점으로 이탈리아 내에서도 중위권으로 나가떨어진 후, 아무도 그들을 강팀으로 보지 않고 있다.[16] 지원이라는 게 딱 외국인 용병 1~2명 사 와서 1년 써먹을 수 있을 정도의 지원이다. 그나마 파리아스 시절에는 이것도 없어서 직접 ACL에 나가서 우승하고 벌어온 상금으로 선수들 연봉을 올려줘야했다.[17] 1995년 시즌 때 사진으로, 구단 법인화 기념으로 제작한 한 시즌 특별 유니폼이다. 동해의 일출을 상징한 유니폼. 포항 스틸러스의 아이덴티티인 검빨 가로줄무늬 유니폼과 신세기통신이 유니폼 스폰서를 한 시즌 그 사이에 잠깐 입은, 상당히 희소한 유니폼이다.[18] 이 때문에 그 당시 어린이들과 시민들 사이에서는 아톰이 일본 만화 캐릭터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19] 표절의 대명사인 로보트 태권 V가 국산 애니메이션의 희망이자 본좌로 대접받았던 시절이다.[20] 피츠버그도 US스틸의 본사가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제철도시였다.[21] 공식적으로는 2004년부터 유스팀으로서의 체계가 완비됐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포항의 유스팀 기능을 해 왔으며 실질적인 시작은 1980년대로 올라간다.[22] 2011년에 포철공고가 마이스터고로 지정되면서 2012년 말까지 모든 운동부를 폐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2012년을 끝으로 포항공고 야구부와 더불어 포항 유스 팀 기능은 포항제철고등학교로 모두 이관되었다.[23] 수원 삼성이 11회로 최다 출전 타이틀은 가져갔으며, 전북 현대는 10회로 포항과 동일[24] 1983년 프로 전환 이후에도 포항이 우승한 기록은 있으나 그것은 프로인 스틸러스가 아니라 별개로 존재했던 실업 축구 팀의 기록이다.[25] 아마추어 성인 축구 대회로 1952년부터 2009년까지 매년 상반기에 개최되었다. 2009년을 끝으로 폐지.[26] 초대 챔피언인 할렐루야는 1985 시즌을 끝으로 프로에서 실업구단으로 전환하여 1998년에 해체되었고 국민은행도 1984 시즌 이후 실업구단으로 전환하여 1997년 해체됐다. 남아있던 팀인 대우 로얄즈는 모기업이 대우에서 현대산업개발로 바뀌었으며 유공 코끼리는 2번의 연고이전을 했다.[27] 포철, 삼일, 우리프로덕션 등 포항지역 향토기업들이 출자함.[28] 한편으로는 이 해에 열린 아시안컵에 우성용(당시 울산), 이운재(당시 수원), 김상식(당시 성남)이 음주 파동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켜 정의구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오죽하면 수원과의 경기에서 서포터들은 운재야 술값은 누가 냈노! 라는 걸개를 걸다가 경찰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29] 26경기 55점, 경기당 2.12점으로 현재 최고 기록은 2012년 FC 서울이 가지고 있다. 44경기 96점, 경기당 2.18점.[30] 다만 성남도 2009년 플레이오프에서 리그 4위로 챔피언 결정전까지 올라간 경력이 있지만 우승을 못했으니 아무 의미가 없다...[31] 2008년부터는 휴식일을 짧게 바꿨다.[32] 참고로 이 당시 분요드코르는 우즈베키스탄 국대급 수준의 멤버에 히바우두라는 거물 용병이 더해졌고, 여기에 감독에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를 임명하는 등 아시아판 갈락티코를 추진하고 있던 강팀이었다.[33] 이는 K리그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34] 비록 패배했지만 에스투디안테스는 결승전에서 FC 바르셀로나를 경기 내내 몰아붙여 쩔쩔매게 할 정도로 강한 팀이었으므로 포항 입장에서는 충분히 자존심을 세웠다고 할 만하다.[35] 쓸때없이 백패스하거나 빌드업 과정에서도 백패스를 한 선수는 바로 교체 되었을 정도[36] 황선홍 감독 본인부터 부산 시절 정성훈, 포항와선 배천석, 박성호 등 매시즌 장신 타겟 스트라이커를 한명 이상은 기용했다. 2011년에는 슈바를 쓰긴 했지만 제대로 된 활약을 못해 플레이오프에서 제대로 피를 봤다.[37] 이때는 전후기 리그 제도라 성적을 따로 계산했기에 전체 꼴찌는 아니었다. 2004년 후기 리그만 꼴찌였는데 전기리그에 벌어놓은게 있어 플레이오프에 나갈수 있었고 수원과 승부차기까지간 끝에 준우승했다. 포항의 추락이 워낙 커서 그렇지 전기리그에 잘한 팀이 후기리그에 퍼진다는 문제점은 전후기리그 시행되는 내내 지적되던 문제점이다. 초호화멤버를 자랑했던 성남 일화조차 전후기리그로 치뤄진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6시즌 전기리그 우승 이후 후기리그에서 힘 빠진게 눈에 보여서 말이 많았다.[38] 유럽에도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처럼 그 팀하면 생각나는 팀 컬러가 확연해서 그거 거스르면 수뇌부가 알아서 컷하는 팀이있고 첼시나 인테르처럼 감독이랑 선수들이 그때그때 알아서 하는 팀이 있는데 K리그에선 전자가 드문편이다. 니포축구로 K리그에 센세이션을 불러왔던 부천 SK는 모기업의 무관심속에 제주로 연고이전하는 와중에 니폼니시 시절 쌓아둔 자원까지 날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했고 수원은 김호 감독이 세심히 구축한 시스템을 차범근이 다 날리고 자기 맘대로 팀 컬러 뜯어고치는 바람에 역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리그 최고인기구단 서울은 딱 감독이랑 선수들이 그때그때 알아서 하는 유형이라 감독 바뀌면 스타일도 바뀐다. 최강희 감독 이래 닥공축구라는 특유의 스타일을 구축한 전북은 2016년 이후 명문이 아니라 K리그 최악의 수치가 되었다.[39] 2007년 포항 우승 이후 포항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온 말이다.[40] 롯데 자이언츠의 '부산 갈매기' '돌아와요 부산항에', KIA 타이거즈의 '남행열차' SK 와이번스의 '연안부두'와 비슷한 포지션의 노래다.[41] 사실 기아에는 목포의 눈물도 있지만 이 곡은 해태 타이거즈를 상징하는 면이 더 강한데다, 너무 오래된 노래다 보니 젊은 팬들이 가사를 전혀 모르는 탓에 현재는 거의 틀지않는다.[42] 아스날, 맨유 등등 1800년대 후반~1900년대 초반에 창설된 대부분의 축구 팀은 그 지역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거나 노동자들을 위한 축구 클럽에서 시작되었다.[43] 이 때문에 포스코에서는 자사의 협력 업체들한테까지 포항 스틸러스의 티켓을 많이 뿌리는 편이다. 야빠와 안티 국축 팬들은 이를 공짜 표라며 헐뜯지만 기업의 지역 사회 환원 취지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봐야 할 부분. 그리고 이렇게 자사와 계열사에 표를 뿌리는 건, 야구나 기타 스포츠 모두 마찬가지이다. 제철소 노동자들에게는 아예 복지 카드에서 차감하는 형식으로 제공한다.[44] 이때는 포항 공설 운동장을 홈으로 쓰고 있었다.[45] 포항역-양학동역(이 운행 계통이 없어지면서 같이 폐역되었다)-효자역(방향 변경)-괴동역 통과-제철역 순으로 운행했다. 원래 포스코 직원용이었으나 포항 스틸러스의 홈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었다. 그러나 2005년 이후 폐지되었다.[46] 두 도시 모두 영남을 대표하는 공업 도시인데다, 포항 포스코에서 생산된 철강제품은 울산의 현대자동차 및 중공업에 쓰이는데, 현대가 당진에 제철소를 마련하기 전에는 포스코에서 부르는데로 원자재인 강판 값을 지불했기 때문에 서로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47] 이 경기에서 눈부신 선방을 기록한 김병지는 이후 포항으로 소속을 옮겨 2004년 결승전에 포항 소속으로 출전했지만 승부차기를 실축함으로서 한 번 더 포항에 준우승을 남겼다. 스파이[48] 바로 직전 경기인 부산vs울산의 경기에서 윤성효부산김신욱하피냐를 경고누적으로 최종전 출장 불가로 묶어버린 데다가, 후반 44분에 역전골을 넣고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최종전에서 포항이 순위를 뒤집을 수 있게 되었다. 경기후 포항 페북에 효멘의 포항 선수시절 사진을 올라왔을 정도로 포항팬들에게 찬양을 받은 사건.[49] 하지만 문제는 황선홍이 서울에 가면서 프런트와 함께 삽질을 하는 중이다.[50] 정원진의 경우 이석현과의 트레이드로 이적했다.[51] 포항에서 거리상 가장 가까운 프로야구구단이 삼성라이온즈이기 때문에 포항 야구팬들 대부분은 삼성라이온즈 팬이다. [52] 이날 황선홍이 발리슛을 골로 연결시킨 뒤 스틸야드 철망을 붙잡고 격렬하게 골 세레머니를 했는데 이 장면을 기억하는 이들이 꽤 많다. 그리고 2012년 FA컵에서 우승한 뒤 이 세레머니를 재현했다.[53] 심지어는 2군 내보내고도 포항이 이긴 경기가 있을 정도(...)[54] 2008년 올림픽 당시 축구장 물채워라 말이 나오게 한걸로 유명한데 이탈리아에 지고, 카메룬과 비기고, 온두라스에 승리한건 그냥 이길팀한테 이기고, 질팀한테 지고, 비길팀한테 비긴것일 뿐 이다. 그전에 맡았던 청소년 대표팀도 마찬가지. 2002 세대와 축협의 유스투자가 맞물려 성과가 나기 시작한건 2010년대 이후의 일이다.(2012세대가 그 첫세대이다.)[55] 준우승도 꽤 많이 했는데 1996년 아디다스컵 준우승, 1997년 프로스펙스컵, 아시아 슈퍼컵 준우승, 1998년 아시아 슈퍼컵 준우승을 했다.[56] 젠틀한 이미지와 달리 황선홍 축구는 거칠고 파울도 많이 나오는 편이다. 물론 닥공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빈공간 메운다고 거친 파울 쏟아내고 그와 비례해 판정시비도 쏟아낸 전북 수준은 아니지만. 반대로 파울이 적었던 감독은 황선홍, 최강희보다 경기 템포를 느리게 가져가는 최용수.[57] 동시대 최인영에게 가려진 선수였지만 미국 월드컵까지 부동의 국가대표 넘버2 골키퍼였다.[58] 심지어 정성룡과 신화용은 활동 시기가 아예 겹쳐서 키퍼 로테이션을 돌았다.[59] 실업 시절까지 확장하면 1973년.[60] 9번은 보통 팀의 주전 공격수에게 부여된다.[61] 17번은 보통 윙 포워드 아니면 윙어들이 사용한다.[62] 양동현은 부산시절 황선홍 감독에게 18번 배번을 받은 적이 있다[63] 96년생, 강원FC의 이근호와 동명이인이다.[64] 공 가운데에 있는 마크는 포스코가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일 적 사용하던 회사 CI다.[65] 일부 수정해서 2017~2018 세컨드 로고로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