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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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타 BN: কলকাতা HI: कोलकाता EN: Kolkata(Calcutta)[1] | ||
국가 | ||
상위 행정 구역 | 콜카타 지구 | |
면적 | 206.08km² | |
인구 | 6,112,000명 | |
광역권 인구 | 15,635,000명 | |
기후 | ||
공용어 | ||
종교 | ||
시간대 | UTC +5:30 (IST) | |
지역번호 | 033 | |
우편번호 | 700 000 ~ 700 999 | |
차량번호 | WB-01 ~ WB-10 | |
웹사이트 | ||
17세기까지 칼리 여신 숭배의 본산지인 강 하구의 작은 마을이었으나,[2] 1690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이곳에 상관을 세우면서 도시로 발전했다. 또 1772년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의 수도가 되어 엄청난 발전을 구가했고, 인도 제국이 세워진 후에도 인도 제국의 수도[3]이자 인도 제1의 도시로 기능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지금은 콜카타보다 인구가 훨씬 많아진 뭄바이나, 광역권 인구에서 콜카타를 추월한 델리조차 1950년대까지는 콜카타보다 인구가 훨씬 적었다. 콜카타가 인도 전체의 수도라기엔 좀 동쪽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이 시절엔 방글라데시나 미얀마도 인도 제국 소속이었으므로 아주 동쪽에 크게 치우친 위치는 아니었다.
그러다 1911년 영국이 인도 제국의 수도를 델리로 이전하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이는 인도의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이 강했는데, 당시 콜카타는 찬드라 보스(출생지는 현재 인도 오디샤 주의 쿠탁이지만 주 활동지는 콜카타였다.) 같은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하는 그야말로 인도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도시였기에,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홑뜨려놓을 목적으로 수도를 이전한 것이다.


▲ 1996년의 콜카타 #
거기다 수백만 명이 아사한 벵골 대기근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고 캘커타에 살던 수많은 무슬림들이 캘커타를 등지고 방글라데시로 이주하게 된 계기인 다이렉트 액션 데이 등을 겪으며 심각한 인구유출로 인해 급격히 쇠락한데다, 방글라데시와 미얀마가 독립해 인도와 별개 나라가 되면서 교통의 요충지 역할도 약화되어 현재는 인도 7위권 수준의 도시로(광역권 인구는 3위 유지중) 위상이 추락하게 되었다. 여튼 이런 역사에서 알 수 있듯, 영국에 의해 건설된 도시이고, 250여년 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도시들에 비해 영국색이 강하고, 영국색이 강한 건축물들이 도시에 많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2011년 기준 인구 450만의 대도시다. 광역권 인구까지 더하면 1,500만에 달하는데 이는 뭄바이, 델리에 이어 세번째 규모다. 놀라운건 도시권이라고는 하지만 면적이 1,800km2밖에 안되는 곳이라 도시권과 접한 지역들을 합치면 3,500만명까지 올라간다.[4] 참고로 1,800km2는 서울특별시 면적의 3배다.
과거 인도 예술의 메카는 서벵골 지역인데다, 서벵골 중심 도시이다보니 유명한 문학인이나 영화감독을 배출한 곳이다.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영화 감독 사티야지트 레이가 이 도시 출신이다. 때문에 전후 인도 영화를 이끌었던 중심 도시기도 하다.[5] 그 외에도 출신지는 아니지만, 영화감독 리트윅 가탁과 타핀 신하, 므리날 센, 인도의 소설가인 사라트 찬드라 차토파디아야가 이 도시에서 살았다. 사라트가 쓴 소설인 데브다스 역시 캘커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한 테레사 수녀가 이 도시에서 활동했었다.
콜카타시에는 인도에서 유일한 차이나타운이 있는데, 이곳은 18세기 말 광둥 출신 중국인 무역상들이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던 영국 동인도 회사의 허가를 받아 사탕수수 농장과 제당공장을 운영했던 사람들이 정착한 곳으로 일제가 중국대륙을 침략한 1930~40년대에는 이를 피해 인도로 넘어온 중국인이 몰리면서 1950년대 까지는 전성기를 맞았으나 1962년부터 발발한 중국-인도 국경분쟁 등으로 양국의 관계가 나빠지자 축소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화교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중국 요리를 판매하는 식당들을 찾아볼 수 있기는 하다. 다만 한국의 중국집들과 마찬가지로 대다수 중국요리 식당의 경영자와 요리사들은 인도 현지인이다. 진짜 화교가 경영하는 중국집은 찾기 힘들다.[6]
그러다 1911년 영국이 인도 제국의 수도를 델리로 이전하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이는 인도의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이 강했는데, 당시 콜카타는 찬드라 보스(출생지는 현재 인도 오디샤 주의 쿠탁이지만 주 활동지는 콜카타였다.) 같은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하는 그야말로 인도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도시였기에,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홑뜨려놓을 목적으로 수도를 이전한 것이다.

▲ 1996년의 콜카타 #
거기다 수백만 명이 아사한 벵골 대기근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고 캘커타에 살던 수많은 무슬림들이 캘커타를 등지고 방글라데시로 이주하게 된 계기인 다이렉트 액션 데이 등을 겪으며 심각한 인구유출로 인해 급격히 쇠락한데다, 방글라데시와 미얀마가 독립해 인도와 별개 나라가 되면서 교통의 요충지 역할도 약화되어 현재는 인도 7위권 수준의 도시로(광역권 인구는 3위 유지중) 위상이 추락하게 되었다. 여튼 이런 역사에서 알 수 있듯, 영국에 의해 건설된 도시이고, 250여년 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도시들에 비해 영국색이 강하고, 영국색이 강한 건축물들이 도시에 많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2011년 기준 인구 450만의 대도시다. 광역권 인구까지 더하면 1,500만에 달하는데 이는 뭄바이, 델리에 이어 세번째 규모다. 놀라운건 도시권이라고는 하지만 면적이 1,800km2밖에 안되는 곳이라 도시권과 접한 지역들을 합치면 3,500만명까지 올라간다.[4] 참고로 1,800km2는 서울특별시 면적의 3배다.
과거 인도 예술의 메카는 서벵골 지역인데다, 서벵골 중심 도시이다보니 유명한 문학인이나 영화감독을 배출한 곳이다.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영화 감독 사티야지트 레이가 이 도시 출신이다. 때문에 전후 인도 영화를 이끌었던 중심 도시기도 하다.[5] 그 외에도 출신지는 아니지만, 영화감독 리트윅 가탁과 타핀 신하, 므리날 센, 인도의 소설가인 사라트 찬드라 차토파디아야가 이 도시에서 살았다. 사라트가 쓴 소설인 데브다스 역시 캘커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한 테레사 수녀가 이 도시에서 활동했었다.
콜카타시에는 인도에서 유일한 차이나타운이 있는데, 이곳은 18세기 말 광둥 출신 중국인 무역상들이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던 영국 동인도 회사의 허가를 받아 사탕수수 농장과 제당공장을 운영했던 사람들이 정착한 곳으로 일제가 중국대륙을 침략한 1930~40년대에는 이를 피해 인도로 넘어온 중국인이 몰리면서 1950년대 까지는 전성기를 맞았으나 1962년부터 발발한 중국-인도 국경분쟁 등으로 양국의 관계가 나빠지자 축소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화교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중국 요리를 판매하는 식당들을 찾아볼 수 있기는 하다. 다만 한국의 중국집들과 마찬가지로 대다수 중국요리 식당의 경영자와 요리사들은 인도 현지인이다. 진짜 화교가 경영하는 중국집은 찾기 힘들다.[6]
원래 콜카타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영국 동인도 회사가 벵골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면서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1690년 동인도 회사의 관리였던 조비 차노크이 이곳에 상업적 기반을 마련한 이후 캘커타는 곧 요새와 무역항으로 발전했으며 특히 1696년 포트 윌리엄이 세워지면서 영국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18세기 초반 무굴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자 영국은 캘커타를 기반으로 벵골 전역을 장악했지만, 이에 반발한 벵골 토후국들이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벌였지만, 1757년 6월 23일 플라시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서 오히려 영국의 지배가 확고해졌다. 1757년 벵골을 정복한 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산 아편 생산 및 수출에 대한 독점권을 추구했다. 이 회사는 지역 상인들로부터, 그리고 나중에는 농부들로부터 직접 아편을 구매하여 캘커타 경매장에서 판매했다. 그곳에서 많은 아편이 외국 상인들에 의해 중국 광저우로 밀수되었고, 결국 제1차 아편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영국령 인도 시대에 캘커타는 대영제국의 두 번째 도시였으며, 영국 자유주의, 유럽의 세기말적 퇴폐주의, 무굴 제국의 보수주의, 토착 부흥주의가 혼합된 "바부 문화"로 유명했다. 이로 인해 벵골 르네상스가 촉진되었고, 이 사상은 인도 전역으로 퍼져 인도 독립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캘커타를 사실상 인도의 행정 수도로 삼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영국령 인도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다 캘커타는 이후 영국 식민 지배 체제의 상징적 수도가 되었으며 세관 법원 은행 대학 등 근대적 제도와 시설이 집중되었고 철도와 항만이 발달하면서 인도 내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로 불렸다 그러나 동시에 이 도시는 식민 지배의 착취와 불평등의 상징이기도 했는데 영국인 거주 지역과 인도인 거주 지역이 철저히 분리되었고 빈곤과 부유가 극명히 대비되는 양상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커타 대학을 비롯한 고등 교육 기관들이 세워지면서 서구적 학문과 과학이 인도 지식인 계층에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배출되어 점차 독립 운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래서 영국은 힌두교도와 무슬림들을 이간질시키기 위해 1905년 영국은 벵골 분할령을 단행하여 캘커타를 중심으로 한 벵골 민족주의 세력을 분열시키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전국적인 반영 운동과 스와데시 운동을 촉발시켰고 캘커타는 정치적 저항의 중심지로서 위상을 강화했다. 결국 영국은 벵골 지역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지인 캘커타에 수도를 두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래서 과거 무굴 제국의 수도였던 델리로 영국령 인도의 수도를 이전하였다.[7] 결국 1911년 델리 대관식에서 조지 5세가 직접 수도 이전을 발표했고, 이후 영국은 뉴델리를 새로 설계해 인도의 제국 수도로 삼았다.
인도 분단 때 발생한 극심한 폭력으로 인해 벵골과 특히 콜카타의 인구 통계가 바뀌었다. 많은 수의 무슬림이 동파키스탄 으로 떠났고 수십만 명의 힌두교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독립 이후에도 이 도시는 오랜 식민지적 구조와 난민 문제, 산업 쇠퇴, 빈곤으로 인해 ‘슬럼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지니게 되었지만 동시에 인도의 문학 예술 학문 정치 활동의 중심지로서 여전히 중요한 위상을 유지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공산당과 좌파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하게 자리 잡았고 특히 1977년부터 2011년까지 서벵골 주는 좌파 전선 정부의 장기 집권이 이루어졌다. 최근 수십 년간 캘커타는 콜카타라는 원래의 벵골어 이름을 회복하며 문화적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으며 정보기술 산업과 서비스업의 성장, 도시 재개발 등을 통해 과거의 쇠퇴 이미지를 벗어나려 하고 있다.
영국령 인도 시대에 캘커타는 대영제국의 두 번째 도시였으며, 영국 자유주의, 유럽의 세기말적 퇴폐주의, 무굴 제국의 보수주의, 토착 부흥주의가 혼합된 "바부 문화"로 유명했다. 이로 인해 벵골 르네상스가 촉진되었고, 이 사상은 인도 전역으로 퍼져 인도 독립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캘커타를 사실상 인도의 행정 수도로 삼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영국령 인도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다 캘커타는 이후 영국 식민 지배 체제의 상징적 수도가 되었으며 세관 법원 은행 대학 등 근대적 제도와 시설이 집중되었고 철도와 항만이 발달하면서 인도 내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로 불렸다 그러나 동시에 이 도시는 식민 지배의 착취와 불평등의 상징이기도 했는데 영국인 거주 지역과 인도인 거주 지역이 철저히 분리되었고 빈곤과 부유가 극명히 대비되는 양상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커타 대학을 비롯한 고등 교육 기관들이 세워지면서 서구적 학문과 과학이 인도 지식인 계층에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배출되어 점차 독립 운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래서 영국은 힌두교도와 무슬림들을 이간질시키기 위해 1905년 영국은 벵골 분할령을 단행하여 캘커타를 중심으로 한 벵골 민족주의 세력을 분열시키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전국적인 반영 운동과 스와데시 운동을 촉발시켰고 캘커타는 정치적 저항의 중심지로서 위상을 강화했다. 결국 영국은 벵골 지역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지인 캘커타에 수도를 두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래서 과거 무굴 제국의 수도였던 델리로 영국령 인도의 수도를 이전하였다.[7] 결국 1911년 델리 대관식에서 조지 5세가 직접 수도 이전을 발표했고, 이후 영국은 뉴델리를 새로 설계해 인도의 제국 수도로 삼았다.
인도 분단 때 발생한 극심한 폭력으로 인해 벵골과 특히 콜카타의 인구 통계가 바뀌었다. 많은 수의 무슬림이 동파키스탄 으로 떠났고 수십만 명의 힌두교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독립 이후에도 이 도시는 오랜 식민지적 구조와 난민 문제, 산업 쇠퇴, 빈곤으로 인해 ‘슬럼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지니게 되었지만 동시에 인도의 문학 예술 학문 정치 활동의 중심지로서 여전히 중요한 위상을 유지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공산당과 좌파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하게 자리 잡았고 특히 1977년부터 2011년까지 서벵골 주는 좌파 전선 정부의 장기 집권이 이루어졌다. 최근 수십 년간 캘커타는 콜카타라는 원래의 벵골어 이름을 회복하며 문화적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으며 정보기술 산업과 서비스업의 성장, 도시 재개발 등을 통해 과거의 쇠퇴 이미지를 벗어나려 하고 있다.
콜카타는 동북부 인도의 상업 및 금융 중심지이다. 식민지 시기에는 벵골의 비옥한 농업 생산물이 영국으로 수출되면서 캘커타가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황마 산업은 캘커타를 대표하는 경제 기반이었고,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황마 제품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생산·가공되었지. 또한 항만을 통한 무역과 은행업, 보험업이 발전하면서 ‘인도의 금융 수도’라는 별칭도 얻었다. 캘커타 항은 인도 동부와 북동부의 관문 역할을 하며 석탄, 철광석, 공산품 등을 대규모로 취급했고, 제철·화학·기계 산업도 주변 지역에 자리잡았다.
도시철도망 자체는 잘 깔린 도시로, 콜카타 지하철, 콜카타 노면전차, 콜카타 교외철도가 있다. 콜카타 시내와 그 근교를 다니는 교외철도망은 인도에서 가장 잘 깔려있다. 콜카타 지하철의 경우에는 인도에서 가장 일찍 개통한 지하철이지만 콜카타 교외철도망이 너무 잘 깔려있는 반대급부로 비교적 부실한 편이다. 콜카타 노면전차는 인도에서 유일하게 꾸준히 운영한 노면전차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물론 콜카타 지하철 및 교외철도망이 확장되어가면서 노선을 축소해놓고있는 중이다.
도시 동쪽에는 1995년 덤덤 국제공항(Dum Dum Int'l Airport)에서 인도의 독립운동가 찬드라 보스의 이름을 따서 명칭이 변경된 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 국제공항(Netaji Subhash Chandra Bose Int'l Airport)이 있어서 인접국인 방글라데시, 부탄 그리고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로 가는 국제선을 탈 수 있다.
6개의 주요 철도역이 있고 시내 곳곳에 교외철도가 다니는 조그마한 철도역이 있으니 구글지도를 참조하고 이용하자.
- 인도 국립도서관 (National Library of India) : 1891년 캘커타에 있는 여러 비서관 도서관을 통합하여 설립된 도서관으로 250만 권이 넘는 도서와 기록을 소장하고 있어 인도 최대 규모이다.
- 인도 박물관 (Indian Museum) : 세계에서 9번째로 오래된 박물관이며, 소장품 규모로 볼 때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박물관이다. 1814년 인도 콜카타에 있는 벵골 아시아 학회에 의해 설립되었다.
- 마블 팰리스 (Marble Palace) : 19세기 캘커타에서 가장 잘 보존되고 우아한 저택 중 하나로 예술 작품 수집에 열정을 가진 부유한 벵골 상인 라자 라젠드라 멀릭이 지었다. 이 집은 그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라자 라젠드라 멀릭 바하두르의 가족이 거주하고 있다.
- 빅토리아 기념관 (Victoria Memorial) : 1906년에서 1921년 사이에 영국령 인도 제국에 의해 건설된 대리석 기념물로 빅토리아 여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디자인은 인도-사라센 스타일 로 영국과 무굴 제국의 요소와 베네치아, 이집트, 데카니 건축의 영향을 섞었다.
- 세인트 폴 대성당 (St. Paul's Cathedral) : 1847년에 완공된 콜카타에서 가장 큰 성당이자 아시아 최초의 성공회 대성당으로 대성당의 건축 디자인은 인도 기후에 맞춰 설계된 고딕 건축 양식인 인도-고딕 스타일로 지었다.
- 티푸 술탄 모스크 (Tipu Sultan Mosque) : 마이소르의 유명한 통치자 티푸 술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모스크로 1842년 티푸 술탄의 막내아들인 굴람 모하메드 왕자에 의해 건립었다.
- 마더 테레사 수녀의 집 (Mother House) : 마더 테레사가 설립한 자선 수도회인 사랑의 선교회의 본부이자 활동 거점으로 그녀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또 다른 주인공인 니콜라이가 연합군 5만명을 이 도시에서 포위시켜 준장에서 소장으로 고속승진 했다.
부두 원정 목적지 중 하나로 등장한다.
[1] 전자는 콜카타로 개명된 현재의 영어표기로 주로 쓰이고 후자는 캘커타로 쓰이던 때의 영어표기이다.[2] 캘커타라는 이름이 칼리 여신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도 있다.[3] 여름에는 수도 기능이 잠시 심라로 옮겨졌다. 심라에 뜬금없이 영국 총독 관저 건물이 남아있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4] 콜카타가 속한 서벵골주는 인구밀도가 무지하게 높은곳이다.[5] 사티야지트의 대표작인 외로운 아내도 타고르의 소설을 원작으로 콜커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6] 홍콩반점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식당 하나는 확실했다.[7] 델리는 과거 무굴 제국과 그 이전 여러 인도 제국들의 수도였던 곳으로, 인도 전통 왕조의 권위를 이어받는 ‘제국의 심장’ 같은 이미지가 있어서 자신들의 제국적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전한 것도 있다.[8] 힌디어와 우르두어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듯 이 두 언어는 소통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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