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도 국경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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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Sino-Indian War of 1962, Sino-Indian Border Conflict of 1962
한자 (중국어): 中印戰爭(중인전쟁), 中印边境战争, 中印边界自卫反击战(간체자) / 中印邊境戰爭, 中印邊界自衛反擊戰(정체자)
힌디어: भारत-चीन युद्ध (Bhārat-Chīn Yuddha)

중국-인도 국경분쟁

냉전 시기 영토분쟁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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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동 대기 중인 인도군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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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중인 인도군 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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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을 떠나는 티베트인 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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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을 도수운반하는 인도군 병사들

날짜

1962년 10월 20일 ~ 1962년 11월 21일

장소

아크사이친, 아루나찰프라데시[1]

교전국

파일:external/ae5671fcd4fe1e46b94690491a5ff4c7b058c7e138fd06d0310a643fea353327.png 인도 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the_People's_Republic_of_China.svg.png 중국

지휘관

⊙ 정치 지도자
파일:external/ae5671fcd4fe1e46b94690491a5ff4c7b058c7e138fd06d0310a643fea353327.png 자와할랄 네루
파일:external/ae5671fcd4fe1e46b94690491a5ff4c7b058c7e138fd06d0310a643fea353327.png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
파일:external/ae5671fcd4fe1e46b94690491a5ff4c7b058c7e138fd06d0310a643fea353327.png V.K. 크리슈나 메논

⊙ 군사 지휘관
파일:external/ae5671fcd4fe1e46b94690491a5ff4c7b058c7e138fd06d0310a643fea353327.png 프란 나트 타파
파일:external/ae5671fcd4fe1e46b94690491a5ff4c7b058c7e138fd06d0310a643fea353327.png 브리지 모한 카울

⊙ 정치 지도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the_People's_Republic_of_China.svg.png 마오쩌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the_People's_Republic_of_China.svg.png 저우언라이

⊙ 군사 지휘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the_People's_Republic_of_China.svg.png 린뱌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the_People's_Republic_of_China.svg.png 장궈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the_People's_Republic_of_China.svg.png 뤄루이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the_People's_Republic_of_China.svg.png 류보청

결과

중국의 결정적 승리

영향

아크사이친 내 인도군 초소 제거
아크사이친의 중국 실효 지배

병력

1만 명 - 1만 2천 명

8만 명

피해규모

전사 1,383명
부상 1,047명
실종 1,696명
포로 3,968명

전사 722명
부상 1,69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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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카슈미르 면적의 14% 정도 되는 아크사이친, 우측은 아루나찰프라데시

1. 개관2. 배경3. 전쟁의 양상4. 전쟁의 여파5. 2017년 재충돌

1. 개관[편집]

중국인도의 역사상 최초의 충돌.

1962년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중국인도 사이에 벌어진 전쟁. 편의상 중인전쟁으로 불린다.

사단 규모의 병력이 동원된 명백한 전쟁임에도 국경분쟁 정도로 칭해지는 이유는 비교적 속전속결로 끝난 이유도 있지만, 당시 중국과 인도 모두 대외적 이미지 차원에서 이것을 크게 비화시키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양국의 복잡한 역사적, 지리적 이해관계가 맞물려 터진 사건이며, 당사국그 사람들이 27억이나 된다는 게 함정들에게는 현대사에서 중요한 비중으로 다뤄지는 데 비해 타국에서는 중국-베트남 전쟁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전쟁 중 하나이다.

2. 배경[편집]

영토 문제의 발단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국을 차지하던 청나라인도 제국을 지배하던 영국아편전쟁의 결과로 홍콩을 할양하는 조건에서 영토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청은 열강이 더 이상 자국의 땅을 넘보는 것을 원치 않았고, 영국도 필요 이상 중국을 침범하면 이 알토란 같은 땅을 넘보는 다른 열강들과 복잡한 대립각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문제가 되는 티베트 땅은 자원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양국 모두에게 큰 가치는 없었다.

이후 청이 신해혁명을 통해 무너진 기회를 틈타 영국은 1914년 맥마흔 라인을 선포하여 일방적으로 영국령 인도 제국의 국경선을 선언하였다. 청나라의 추가적인 영토 확장을 저지한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과 인도의 관계는 두고두고 불편한 앙금으로 지속된다. 게다가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켜 준 뒤에도 이 라인을 인증했고, 중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인도는 독립과정에서 종교간 대립으로 인해서 전쟁 끝에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권의 파키스탄으로 분열하여 별개의 국가로 출범한다. 이슬람권인 파키스탄이 소련과 친밀한 관계를 보이자, 비동맹주의를 내걸고 미-소간의 냉전에서 중립적 태도를 내건 인도에서는 국방에 대한 불안이 고조되었다.

비슷한 시기, 중일전쟁 종전 직후부터 중국은 국민당중국공산당 간의 국공내전에 빠져들었고, 4년간의 내전 끝에 중공이 승리하여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가 될 때까지는 아직 자국 내 안정을 찾기 힘든 상태였다.

이후 6.25 전쟁에 참전하여 UN군을 몰아붙이는 저력을 발휘해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동시에 1951년 인민해방군을 동원해서 티베트를 무력병합하였다. 1920년대 이래 사실상 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티베트의 토착 정권은 인민해방군의 침공 이후 중국공산당과의 17개조 합의를 통해서 자치권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지역 대표로 베이징에서 열리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직접 출석해서 마오쩌둥과 만나는 등 한동안은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국내외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불안정한 국경을 확정지을 필요를 느꼈다.

한편으로 1950년대 흐루쇼프의 집권 소련과 공산주의 노선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 중소관계는 악화일로 치닫다가, 1959년 완전히 파탄난다. 일부 밀덕들이 소련-중국 국경분쟁을 중인전쟁에 앞선 일로 주장하고 있으나, 소련과 중국이 직접적으로 무력을 사용해 충돌한 것은 1969년으로, 중인전쟁보다 훨씬 이후에 벌어졌다.

이에 따라 소련은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인도에 접근한다. 1960년에는 소련 군사고문단이 중국에서 철수하고, 대신 인도에 소련 군사고문단이 파견된다. 이렇듯 친소 노선을 걸으며 맥마흔 조약에 따른 국경선을 확정하려는 인도와 중국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게 된다.

당시 중국과 인도 모두 정부수립 10년이 안 된 신생 국가로서 불안정한 국내외 사정을 어떻게든 타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도 양국의 직접적인 감정적 앙금은 두 나라 사이에 위치한 티베트로부터 비화되었다. 일부 중까 성향의 밀덕들이 지속적으로 장제스중국국민당은 티베트의 독립을 용인했는데 마오쩌둥중국공산당이 무력병합했다는 식으로 나무위키에 터무니 없는 역사왜곡을 써놓고 있지만,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티베트의 독립을 인정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당시 중화민국은 청나라의 모든 영토를 이어받았다는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중화민국 항목에 있는 영토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심지어 중화민국은 티베트 영토를 한 점이라도 뺏기기 싫어서 원주민인 티베트도 승인한 맥마흔 라인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이후에 오랜 기간 동안 티베트는 사실상 독립 상태였고, 장제스 국민당 정권이나 지방군벌은 티베트 지역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토착세력들은 영국을 등에 업고 국제 사회로부터 독립국가로 인정받기를 원했던 것이고. 자세한 사항은 티베트 문서 참고.

즉 장제스 국민당 정권은 국부천대 이후까지도 티베트는 물론 이거니와 오래전에 통치권을 상실한 몽골의 독립도 인정하지 않았다.

청나라에서는 티베트를 반자치령으로 용인했고, 20세기 초반 중국의 혼란기에 반독립상태로 있던 티베트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일단 달라이 라마는 중국과 협정을 맺고 자치권을 보장받는 대신 중국의 영토임을 인정하게 된다.

인도 또한 1948년 직후, 같은 신생국의 입장에서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의 티베트 종주권을 인정한다. 곧이어 1954년에 '중국의 티베트 지역과 인도 사이의 무역과 교섭'을 체결함으로 이 문제는 공식적으로 문서화되었다.

1960년에는 중국에서 벌인 2년간의 대약진 운동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고 중소결렬로 중국에 대한 소련의 기술, 군사적 지원이 완전히 끊기면서 중국은 위기에 빠진다. 상대적으로 인도의 입김은 더욱 강해져갔다.

그리고 1960년대 들어 본격적인 냉전이 도래하면서 중동,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역할이 부각되었고, 중국과 인도는 제3세계 국가들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반제국주의를 표방한 중국은 1961년 비동맹회의 참여를 거부했는데, 이것은 중국이 노리던 제3세계의 종주국 자리를 포기하고 독자 행동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에는 비동맹회의가 곧 제3세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3. 전쟁의 양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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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1959년에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중국 공산당 정권의 종교탄압과 티베트문화말살 정책에 반발하면서 인도로 피신해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 수립으로 두 국가간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어 갔다. 이로 말미암아 8월에 중국군과 소규모 총격전이 일어났으며, 10월에는 중국군이 인도 경찰 9명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당시 중국은 대약진 운동의 부진으로 인한 내부 혼란 수습 및 미국, 소련과의 불편한 역학관계 때문에 또 다른 비상사태가 터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또한 10월2일 소련의 흐루시쵸프는 마오쩌둥과의 회담에서 인도 정부를 옹호하며 개입했다. 결국 이 사태는 당시 양국의 지도자인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네루 인도 총리간의 회담을 통해 당장 전쟁으로 비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양국은 11월 7일 관할선을 정해두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했다고 하지만 국경선의 최종합의에는 실패했다.

따라서 문제는 해결되긴커녕 오히려 복잡해져만 갔다. 중국이 예상 외로 소극적 입장으로 나서자 인도는 자신감을 얻었다. 당시 친소적 중립이었던 인도는 친미 성향을 보였던 파키스탄과 반소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한 중국 사이의 밀월 관계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참에 자국의 군사력을 떨쳐 파키스탄을 비롯한 주변국에 엄포를 놓으려고 했다. 인도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당시 미국은 인도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소련은 중국의 영향력 감소와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 여론 형성을 위해 인도에 호의적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즉, 인도 입장에서는 중국에 대한 위협을 증강시키는 동시에 파키스탄을 압박하기에는 최적의 외교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1961년, 인도 해군은 파키스탄과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 영국으로부터 항공모함 '비크란트'를 인도받았다. 이같은 아시아 국가 초유의 항공모함 도입을 보더라도 당시 인도가 얼마나 해군력 증강에 의욕적이었는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런데 비크란트의 인도는 어디까지나 인도양의 바다를 끼고 있는 파키스탄의 해군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이며, 전투행동반경에서 벗어난 티베트 등지 내륙 지역의 분쟁에는 대응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경항모로써 중인전쟁 때는 전혀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결과만 말한다면, 이때 도입한 항공모함 비크란트는 인도의 기대에 부응하여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현존 파키스탄 해군의 절반을 격침시키고 벵골만을 봉쇄하여 방글라데시를 해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Tariq Ali (1983). Can Pakistan Survive? The Death of a State. Penguin Books Ltd. ISBN 978-0-14-022401-6.) 문제는 정작 인도가 해군에 투자한 직후 쳐들어 온 나라가 하필 내륙의 중국이었다는 것이지만

1962년 봄, 소련군 군사고문단의 협력을 얻은 인도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본격적으로 맥마흔 라인에 육군 부대들을 전진배치했다. 인민해방군 육군의 전투 태세 또한 보다 견고해졌다. 하지만 인도는 정말 중국이 전쟁을 감행할 지 예측하지 못하였다.

1962년 8월에 와서도 인도 군부의 D. K. 팔리트 여단장은 근미래에 중국과의 전쟁 가능성은 배제해도 된다고 주장했다.(Swaminathan South Asia Analysis Group Lessons of 1962: A stock taking after 40 years.)

대부분의 서방측 군사전문가들은 인도군의 우세를 예상하였다. 일단 보급로부터가 차이가 났는데, 티벳을 관할하는 청두(성도)군구의 수도이자 보급기지인 청두와 분쟁지는 거리가 3,000㎞인데다가 도로는 거의 없었고, 날씨가 나쁘면 아예 그런 도로도 불통되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중국군의 보급은 등짐과 야크에 의존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인도의 수도 뉴델리로부터 분쟁지는 수백 ㎞밖에 안떨어져 있었는데다가 양호한 도로가 구비되어 있었다. 결국 인민해방군은 중화기는 꿈도 못꾸고 가지고 있는 지원화력은 박격포 정도였으며, 뿐만 아니라 티벳지역에는 당시 인민해방군 공군 기지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군은 제공권도 장악할 수 없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인도도 방심하고 있었다.

인도 측이 방심한 가운데, 중국의 전쟁 준비는 은밀하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인도군도 방심했다고 할 수 없는 게 북상하던 인도군에는 인도군 최정예 혹은 최강으로 꼽히던 제7여단, 제4사단에 구르카나 시크 부대 등 정예 부대가 많았다. 단지 인도 정부의 생각과 다르게 중국의 전투 의지가 매우 높아서 인도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력을 투입했다.

10월 6일 중국의 마오쩌둥 및 수뇌부는 인도와의 동부 국경과 서부 국경에서 동시에 조정된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동부 전선을 주공으로 결정했다. 10월 8일 중국의 청두와 란저우 군구로부터 티베트에 정예 부대를 파견하였고, 10월 16일 중국의 리우보청(劉伯承) 원수가 수립한 중인전쟁 계획이 승인받았다. 그리고 10월 18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중인전쟁 개전을 최종 결정했다.

마침내 10월 20일에는 1,000km에 이르는 국경의 전 방면으로 중국의 주력군이 침공을 개시하면서 바야흐로 1개월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8~9만 명의 병력을 동원, 규모면에서도 국경수비대의 소규모 교전을 벗어난 정규군간의 정면 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미처 전쟁을 예측하지 못한 인도군은 겨우 1~1.2만 병력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었다.

동부 전선에서는 중국군 3개 연대가 남카추 강으로 진격하여 겨우 인도군 1개 대대, 그것도 병력이 완편되지 않은 인도군에게 야간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압도했다. 다급한 인도군은 부탄으로 도주하기도 했다. 23일의 중국군 대공세는 인도군의 정확한 포격에 일시 고착되어 제4시크 연대가 3일간 저지하였으나 중국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포위하자 결국 후퇴한다.

이후 중국군은 산악 통로로 접근하여 인도군 1만 명의 보급로를 끊고 인도군에게 막대한 사상자를 내게 하고, 휴전이 발표되었을 당시, 아삼 북동 국경으로부터 50km들어간 테즈푸르까지 진격한 후 전쟁을 중단했다.

한편 서부 전선에서는 중국군의 거대한 규모를 감지한 인도군 이 거의 저항하지 않고 전방 초소를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눈이 내리는 매우 추운 겨울 날씨 가운데, 잠무-카슈미르 주에서 중국군은 중포와 기관총의 화력 지원을 통해 쿠마온 연대의 샤이탄 싱 소령이 이끄는 C중대원 123명이 지키던 해발 5,000미터 고도에 위치한 레장 라 진지를 점령했다. 싱 소령의 시신은 나중에 맹추위에 얼어붙은 상태로 발견된다. 반격을 위해 인도군이 더 많은 병력을 불러모으는 동안, 중국군의 일방적인 휴전 포고로 전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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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사박물관에 전시된 중인분쟁 당시의 인민해방군 육군 보병 군장. 10년전의 한국전쟁에 비해 달라진 점은 일단 전투복 색이 한국전 때의 황토색 계열에서 올리브색으로 바뀌었고, AK-47이 도입되었다. 이 AK-47은 소련제 정품인데 1950년대 말 중국이 식량으로 AK-47을 비롯한 무기 라이센스비를 지불했다가 그만 대약진운동과 겹쳐 참극을 빚었다...

철저히 전쟁 준비를 거친 중국군의 장비와 훈련 수준은 인도군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존 키건의 <세계전쟁사>에는 "중국군이 티벳 지방에서 1년 이상 고산지대 적응훈련을 마친 상태였던 반면에 인도군은 고산지대 적응훈련을 받지도 않은 부대를 투입했다."고 나온다.

게다가 중국군 지휘관들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6.25 전쟁을 거치며 실전경험이 많았고, 특히 6.25 전쟁 때는 초강대국 미국의 압도적인 제공권을 위에 두고도 산악지대에서 수없는 기동전을 치러본 적이 있었다.

병력은 물론 전술, 지형적으로도 우위를 점했던 중국은 은밀하고도 철저한 기습에 성공하여 파죽지세로 인도 영내를 향해 밀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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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전쟁에서 중국 공군은 B-29를 복제한 소련제 Tu-4를 가지고 폭격기, 정찰기, 수송기, 심지어는 조기경보기로 사용했다. 히말라야 지역에서 제대로 수송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 짝퉁 B-29는 큰 활약을 했고, 덕분에 아마도 이 전쟁은 최후로 B-29가 활약한 전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나마, 중국 육군의 공세 시기에 인도 육군도 1개 중대의 선전로 최소한의 체면치례는 했다. 실질적으로 관구사령부라고 봐도 무방한 육군 쿠마온 연대(Kumaon Regiment) 13대대 C중대가 선전의 주인공이다. C중대원 123명은 전멸(중대원 88%에 해당하는 109명이 전사하고 생존자 14명 중 9명이 중상을 입은 상태로 투항)할 때까지 저항, 중국군에게 이 전쟁에서 발생한 피해의 1/3인 500여 명의 사상자를 강요한 것으로 공인되었고 중대장 샤이탄 싱 육군소령은 인도의 국민 영웅이 되었다. 인도 측 주장은 1천 명 이상 사살이고하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인도군은 이후에 제대로 된 저항을 보여주지 못한 채 무력하게 패퇴하였다.

출처 확인이 필요한 카더라 통신으로, 중국군이 인도군 3개 육군 여단을 박살내며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인도에서 1개 육군 여단이 증파되어 온다는 첩보가 날아들었고, 그 여단이 청 말기에 베이징에 쳐들어와 원명원을 불사른 8국 연합군 부대 중 하나의 후신이라는 소식을 접한 마오쩌둥이 "100년을 묵힌 치욕이다. 무조건 전멸시켜라!"는 지시를 하달,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신빙성이 의심된다.

역사적으로 원명원은 1860년 2차 아편전쟁 때 불탔고, 여기에는 막 영국 육군에 편입된 옛 동인도회사의 인도인 부대들이 참가했다. 즉, 100년짜리 원한이라는 말 자체는 맞다. 문제는 8국 연합군 운운한 부분이다. 8국 연합군이 투입된 전쟁은 의화단 사건이며 이 때는 1900년이라 100년짜리 원한 운운하기에는 시간이 안 맞다. 게다가 이 때 불탄 것은 원명원이 아니라 이화원이다.

아무튼 개전 7일만에 중국군은 파죽지세로 160㎞를 진군했고, 인도 동북부 아삼 지방의 브라마푸트라 평원까지 진출한다.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중국은 전과 마찬가지로 이 국경분쟁을 본격적인 전쟁으로 확대할 뜻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은 전략적 요충지인 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도 양국의 충돌 격화를 말리고 있었다. 자칫하면 양국과 이해관계로 얽힌 제3세계 국가들끼리도 대립이 일어나 3차 세계대전이 날 판이었다.

중국 정부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고려하여,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정치적 판단 하에 인도에 휴전을 제의했다. 하지만 인도 정부는 그 제의를 거부했고, 그에 따라 중국군은 11월 18일 대대적인 공세를 재개하여 인도 정부를 압박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중국군은 뉴델리의 20㎞ 근방까지 진주해 있었다는 프로파간다도 있지만 사실 전쟁 막바지까지 여전히 전투는 변두리에서 진행 중이었다. 인도 영내 깊숙히 밀린 건 사실이지만, 인도도 중국 못지 않은 거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다. 국경에서 좀 밀렸다고 수도 함락 위기까지는 아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인도의 네루 총리는 비동맹주의를 잠깐 잊고 비밀리에 미국에게 중국을 폭격해 줄 것을 요청한다. 상당히 친소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던 인도가 말이다! 미국은 위와 같은 이유로 태평양에 있던 미 해군 항공모함 전단을 인도양으로 급파한다.

이는 소련 지도부에도 곧바로 전달되지만, 놀랍게도 소련은 인도를 이해해 주었다. 게다가 소련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 인도에게 군사적 원조를 지속할 정도였다. 소련에게 있어서도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테고. 스탈린도 그러하였고 그 후계자도 중국을 소련의 우방으로 생각하지 않고 잠재적 적국이라 믿었다. 마오쩌둥도 역시 중국이 소련의 위성국으로 취급되는 걸 원치 않았고 저우언라이를 필두로 미소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신생 독립국들의 리더로서 국제정치 에서 한 축을 담당하려 했다. 그리고 흐루시초프가 표방하던 수정주의를 중국에선 대놓고 반동이라 욕했고 소련도 거기에 모든 지원을 끊는걸로 답했다. 이런 살얼음 판 같은 두 공산 대국의 관계는 결국 완전히 깨지고 중국은 원래 최대의 적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중국은 전쟁에서는 이겼음에도 오히려 대외적으로 불안해지는 상황을 우려했는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군대를 모두 철수한다. 심지어 붙잡은 인도군 포로를 조건없이 모두 석방하고, 무기와 차량, 탄약 등의 모든 압류한 장비들을 돌려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중국-인도 국경선 전초기지를 기존 위치에서 20㎞ 후방으로 재배치, 인도와 더 이상의 국경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것으로 중국-인도 양국간의 전쟁은 일단락을 짓는다.

그러나 아직도 인도와 중국의 국경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과제 중 하나이며,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인도와 중국 국경카슈미르 주처럼 미확정(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더불어 중국은 악사이친 주를 비롯한 인도 영토를 손에 넣딘 했다. 그런데 정작 인도에서는 여길 중국에게 빼앗기고도 1년 넘도록 몰랐을 정도로 외면하던 땅이었다. 황무지 투성이라 사람이 안 살았기 때문이었다. 면적은 33,500㎢로 남한 면적 1/3 정도지만 평균적으로 해발 5,000m 정도의 그야말로 고지대로 인구는 없다. 1년의 대부분 기간 동안 기온은 영하이며 강수량이 없다시피 한 지역이다.

하지만 중국은 아루나찰프라데시를 돌려주면 악사이친을 돌려준다고 하지만 인도가 지배하는 아루나찰프라데시 주를 돌려줄 마음이 없다고 못박았다. 이곳은 면적이 남한 면적과 비슷하며 악사이친과 달리 꽤 풍요로운 땅이라 인구는 악사이친과 비교하면 정말로 가득한 곳이다.

게다가 시킴이나 같이 티베트계들이 살던 작은 나라들이나 지역들이 티베트가 중국에게 먹히는 걸 보고 인도가 반강제적으로 합병해버리면서 여길 자국 땅으로 여기는 중국 속을 더 긁어버린다. 비슷한 처지의 부탄은 아예 노골적인 반중, 친인도 나라가 되었다.

중국은 일단 공세를 멈추고, 더 확전하지 않았다. 일단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과 소련을 적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불리한 처지였다. 또한 이 시점에선 유엔 승인국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중화민국이 중국의 정통정부로 대외적으로 인정받고 있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국가나 제3세계 국가를 제외하고는 미승인국 취급이었다. 다만 인도 공화국은 분쟁 당시 중국 신정부를 승인한 상태였다.

1958년에는 중화민국과의 진먼 포격전, 소련과는 이념대립(실질적으로 누가 공산주의 국가들의 수장이 되는가 하는 싸움)때문에 첨예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내부적으로는 1958년부터 무리하게 시작한 대약진 운동으로 식량난을 겪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서 인도와의 국경분쟁을 확대시킬 수 없던 입장이었다. 또한 위에서 지적했듯이 히말라야 산맥을 2000km씩 끼고 있어 등짐과 야크에 의존한 보급이 어려웠기 때문에 더이상의 공세도 지속하기 어려웠다.

국수주의적 중국 네티즌들은 중국 정부를 다 삼킨 고기를 다시 뱉어내는 호구 정도로 인식하고 깐다. 어쨌든 승리를 거둔 시점에서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현실을 정확히 판단해 멈춘 것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현명한 일이었다.

4. 전쟁의 여파[편집]

1965년 미 국방부 평가에 의하면 인도 육군의 피해는

전사 1,300: 이 안에는 심지어 여단장준장 계급의 장교도 포함되어 있다.
실종 1,600,
부상 1,000,
포로 4,000: 이보다 적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간주하는 보고서도 있다.

...를 낸 명백한 졸전이었다. 심지어 부대 자체가 해체된 경우가 많아서 매우 위험했다. http://wiki.dcinside.com/wiki/%EC%A4%91%EC%9D%B8%EC%A0%84%EC%9F%81

반면, 중국 육군은 전사 700, 부상 1,600, 포로 0의 가벼운 피해를 입으며 승리했다.

인도 육군은 영국 육군의 일원으로 1, 2차 대전에 참전하여 "현대전"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으며 이후 파키스탄과의 전쟁과 대립을 통해 지속적으로 국지전에 참여한 베테랑 군대였다. 하지만 군대 편성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상대적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군단, 집단군 등의 운용을 습득하여 전술적 기량이 보다 뛰어났다.

이와 같은 교환비는 중국군이 초기에 방어 포지션에서 적지 않은 손실을 인도군에게 강요한 후, 충분한 준비를 거쳐 확고한 수적 우위를 점한 채 공세를 가한 덕분이었다.

당시 서로 3개 사단씩을 투입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인도군이 투입한 병력은 2~3개 대대로 이뤄진 여단 단위로 분산되어 운용되었고 그마저도 3개 여단 이상은 일시에 투입되지 못했으나, 중국군은 개전 초기에 일시에 강화된 2~3개 사단을 집중 투입하는 전형적인 기동전을 구사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다음으로, 국제적인 여건에서 냉전 구도를 초월한 미국, 소련, 중국의 새로운 이해관계가 정립되었다. 인도는 이 전쟁에서 미국에게 직접적인 군사지원을 요청, 미국과 동맹관계를 만들 하였으나, 중국이 일찍 발을 빼면서 동맹 관계까지는 가진 않았다. 중국이 일부러 미국과 적이 되는 상황을 피하려 철수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얼마 후 발발한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은 보란듯이 북베트남을 지원해 미국과 대립각을 형성했다.

동맹관계로까지는 가지 않았으나 인도는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는 미국, 소련의 정책과 이해를 같이 하여 일정한 협력을 얻었다. (단, 소련의 군사지원단은 전쟁이 터진 1962년 철수했다).

파키스탄은 기존에 친미적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중국-인도 국경분쟁에 미국이 항공모함을 파견하여 인도를 도우려고 한 점과 그럼에도 친소 중립을 유지하던 인도에게 소련이 계속 군사지원을 하는 모습을 보며 외교적 역량 부족을 실감했다. 그 반작용으로 중국과 파키스탄은 보다 굳건한 밀월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중국-인도 국경분쟁 이후 인도는 중국-파키스탄이라는 적대국의 연맹과 국경을 맞대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인도가 방글라데시를 적극적으로 우군에 끌어들인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파키스탄은 인도가 졸전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전력에 자신감을 얻었고, 중국을 끌어들인 여세를 몰아 1965년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도발한다. 이 전쟁은 나중에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는 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도 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중국-인도 양국 사이에 끼어있는 네팔부탄은 완충지대로 자리잡아 중계국으로서의 입지가 상승했으며, 덕분에 티베트처럼 어느 한 나라의 영향력에 휩쓸리는 것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네팔은 마오이즘을 표방하는 친중국파와 힌두교를 내세우는 친인도파간의 분쟁으로 인해 현재도 내부사정이 상당히 혼란한 편이다. 사정이 복잡하긴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중국과 인도의 대리전쟁을 수행한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중국에 흡수된 티베트는 인도의 선전에 한 줌의 기대를 걸었으나 보기 좋게 무산되었고, 그 결과 중국은 티베트를 점유함에 있어서 어떠한 주변국의 도전도 단호히 물리치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티베트는 여전히 중국령이며,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정부 역시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1979년에 있었던 중국-베트남 전쟁은 중국-인도 국경분쟁과 유사한 성격을 보여주는데, 문화대혁명과 베트남 전쟁 이후 혼란한 상태에 있던 중국-베트남간 국경선을 정리하기 위해 중국군이 먼저 도발해 일어났다. 하지만 초기 중국군의 호언장담과 달리 베트남의 저항은 실로 완강했고, 급기야 중국군은 먼저 공격해 놓고 깨져서 철수하는 추태를 부렸다. 그야말로 중국-인도 국경분쟁과 비교될만한 점이며, 전쟁 결과 중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을 도와주고도 뒤에 가서는 욕을 먹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한편, 중국과의 전쟁을 통해 긴 국경선을 기존의 재래식 군대로 방어하는 데 한계를 느낀 인도 정부는 군대의 기계화에 박차를 가한다. 비록 안습하긴 하지만 인도는 2차대전 이후 아시아에서 항모를 가장 많이 그리고 효과적으로 굴린 나라이며, 현재 아시아에서 사실상 가장 오랜 기간동안 항모를 운용한 국가다.

인도는 항공모함과 전차군단의 전력화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1998년 최종결전병기인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여 현재는 인도, 중국, 파키스탄 모두 핵무기 보유국이다. 다만 중국이 공식적인 핵 보유국의 지위를 갖고 있는 것과 달리,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보유하였으나 비공식 핵 보유국 지위에 아직 머물러 있다.

만약 다시 한번 중국과 인도간에 국경선을 확정짓기 위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때야말로 헬게이트가 구현될지도 모른다.

인도에서 쿠미온 연대의 활약을 다룬 영화를 제작한 바 있다. 차마 이겼다고 하기 어려운 일인지라 남녀 주인공이 수만의 중국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죽으면서 서로 손을 맞잡는다. 여기서 중국군은 네팔인을 분장시켰는지 꽤 그럴듯하다. 얼굴도 아리안이 아닌 완전 중국인스럽다. 그리고 이후 인도군의 낙하산 기록영화 부대 투하 장면과 함께 갑자기 끝. 정신승리

5. 2017년 재충돌[편집]

[1] 당시에는 북동 변경 특별 행정 구역(North East Frontier Agency, 약칭 NEPA)라는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