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위스카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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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łyskawica Pistolet maszynowy Błyskawica 브위스카비차 기관단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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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otten Weapons의 리뷰 영상 |
1942년 국내군 소속 기술자인 바츠와프 자브로트니(Wacław Zawrotny)와 세베린 비엘라니에르(Seweryn Wielanier)의 동료들이 스텐의 개량형 총기의 개발을 시작한다.[3] 기본 설계는 스텐으로 격발 방식은 스텐과 MP40처럼 개방 노리쇠 방식이었지만 접이식 개머리판과 탄창 삽입 방향은 독일의 MP40을 참고하여 설계했다. 예를 들어 자동 재장전 방식은 MP40을 본뜬 단순 블로우백 방식이었다. 또한 MP40의 탄창을 노획하거나 구입하여 사용할 수 있게 설계했다. 사용 탄약은 9×19mm 파라벨룸탄이었으며, 격침(擊針)은 노리쇠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독립한 상태였다.
하지만 시제품이 만들어진 시기가 1943년 9월로 상당히 늦었고[4], 제조 수량도 700정밖에 안 되었다. 5정의 시제품을 실험한 뒤 국내군에서는 1천여 정을 주문하고 이후 추가로 300여 정을 주문했지만 1944년 7월까지 바르샤바의 비밀공장에서 리샤르트 비아워스토츠키(Ryszard Białostocki)의 감독 하에 600여 정만이 생산되었다.[5] 이후 바르샤바 봉기 당시 40정이 추가로 생산되고 바르샤바 바깥에서도 소량이 생산되었다.
하지만 시제품이 만들어진 시기가 1943년 9월로 상당히 늦었고[4], 제조 수량도 700정밖에 안 되었다. 5정의 시제품을 실험한 뒤 국내군에서는 1천여 정을 주문하고 이후 추가로 300여 정을 주문했지만 1944년 7월까지 바르샤바의 비밀공장에서 리샤르트 비아워스토츠키(Ryszard Białostocki)의 감독 하에 600여 정만이 생산되었다.[5] 이후 바르샤바 봉기 당시 40정이 추가로 생산되고 바르샤바 바깥에서도 소량이 생산되었다.
하지만 무장이 빈약한 국내군 입장에서는 40만 명이 넘어가는 인원 중 제대로 무장한 인원은 3만 2천여 명에 불과했고, 바르샤바 봉기의 경우는 전체 인원 중 4%만이 제대로 무장한 상황이었다. 기실 폴란드 저항조직의 장비 문제는 전쟁 내내 국내군의 골칫거리로 작용했으며, 부패한 독일군이나 친독 동맹군에게 돈을 주고 무기를 구입하거나 심지어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패잔병들이 묻어둔 폴란드 총기와 수류탄을 파내어 썼다.[6] 무엇보다도 스텐 기관단총은 독일 점령지 내에서 유일하게 대량생산된 화기였다. 700여 정이 그리 적은 숫자는 아니다.
- 스나이퍼 엘리트 V2 - 생피에르 DLC로 추가되었다.
- 스나이퍼 엘리트 III - 동부전선 DLC로 추가되었다.
- Hearts of Iron IV - 폴란드 무기 최종 티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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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폴란드에는 수많은 반(反)나치 저항조직이 난립했고, 이 중 가장 강성한 세력이 폴란드 국내군이었다.[2] 빌노(현 빌뉴스)에 위치해 있던 라디오 공장으로, 독소 폴란드 점령 이후 소련이 공장 설비를 민스크로 뜯어갔다.[3] 이 때문에 브위스카비차를 '폴란드 스텐'(Polski Sten)이라고도 한다.[4] 그나마도 11월이 되어서야 폴란드 각지의 비밀공장으로 제작도가 보내졌다.[5] 1942년부터 1944년까지 11,000여 정의 스텐 Mk.II가 폴란드로 반입되었다.[6] 그나마도 1944년에 이 무기들을 파내어 쓸 때는 전체의 30% 정도만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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