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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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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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한의 5대손인 도(濤)는 소과(제술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진사가 되었고, 홍건적의 침공 후인 1362년 공민왕이 행궁을 청주로 옮기고 그곳에서 실시한 문과친시(文科親試)에서 을과 제2위(2/33)로 급제하여 출사하였다.[5] 급제 후 전주사록(全州司錄)[6]에 보임하였고, 다섯 번 관직을 옮겨 정언(正言)[7]이 되었는데, 어떤 일을 간언하다 파직되었다. 1370년 8월 명 과거 응시생을 선출할 때에 이숭인(李崇仁)[파견불발], 박실(朴實), 권근(權近)[파견불발], 유백유(柳伯濡)와 함께 선출되었다. 이후 박실, 유백유와 하정사 권균(權鈞)을 따라 경사(京師)에 들어갔고 1371년 명 제과에 급제했다.[10] 김도는 전체 급제자 120명 중 25위, 유일한 외국인으로 급제하여 동창부(東昌府) 안구현승(安丘縣丞)을 제수받았으나, 중국어를 할 줄 모르고 고향에 노친이 있다는 이유로 관직을 고사하고 고려로 귀국했다. 후에 우사간(右司諫)·예문응교(藝文應敎)로 발탁하였고, 여러 번 옮겨 성균사예(成均司藝)가 되었다. 그가 귀국하자 공민왕이 친히 "나복산인김도장원(蘿蔔山人金濤長源)"[11] 여덟 글자를 써 내렸다. 이를 영화롭게 여긴 사람들이 도가 살던 곳을 팔자동(八字洞)[12]이라 불렀다. 이후 우왕(禑王) 때 우사의(右司議), 좌부대언(左副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로 승진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되었다. 환관의 정치관여를 금할 것을 청하는 글을 도당(都堂)에 올렸으며, 또한 왕에게 김흥경(金興慶)[13]과 그 일당을 내쫓고 유신(維新)의 정교(政敎)를 펼 것을 상소하였다. 김흥경이 홍륜 등의 공민왕 시해 음모를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결국 김흥경은 언양(彦陽)으로 귀양을 갔다.[14] 우사의 재임시절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의 사주를 받아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속명(金續命)을 탄핵하여 유배시키기도 했는데, 후에 홍중선(洪仲宣 혹은 洪仲善)과 더불어 반대 세력을 비판하자 이인임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마침 1379년 김도의 가노가 연경궁(延慶宮) 옛 터의 돌을 훔치다 걸리자 일로 그를 미워하던 이인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고, 같은 해 7월에 양백연(楊伯淵)의 옥사에 연루되어 효수되었다.
고려 말의 문신 백문보(白文寶)의 <담암선생집(淡庵逸集)> 권일(卷一)에는 김도와 김도가 명 제과에 급제하여 글씨 여덟 자를 하사받은 일을 칭송한 시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말의 문신 백문보(白文寶)의 <담암선생집(淡庵逸集)> 권일(卷一)에는 김도와 김도가 명 제과에 급제하여 글씨 여덟 자를 하사받은 일을 칭송한 시가 전해지고 있다.
金君早志學김군[15]은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菜根誠可餐뿌리[18]는 참으로 먹을 만하여라立心貴堅固마음가짐 몹시 견고했으니事無爲之艱하기 어려운 일이 없었다네回也居陋巷不過食一簞한 대바구니 밥을 먹었을 뿐이지만夫子謂賢哉공자께서 어질다 하셨고學至鑽仰間학문은 찬앙[20]의 경지에 이르렀다네長源才混混장원[21]의 재주는 흘러 넘치는 듯하여聖門必觀瀾성문[22]에 있었다면 반드시 물결을 보였으리라中朝高捷科顯赫躡華班혁혁히 빛나는 반열에 올랐다네所進有如此나아간 바가 이와 같으니誰不擊節歎어느 누가 무릎 치며 탄복치 않으리오?吾君大書字九重垂寵頒구중궁궐에서 은총으로 내려 주시니銀鉤光星日아름다운 글씨[24]는 별과 해처럼 빛나千載爲盛觀천년의 성대한 완상물이 되리라臣拜頌至寶신하는 지극한 보배에 절하며 칭송하고子孫傳所慳자손은 길이길이 전하며 아낄지어다
[1] 1370년 명 과거 응시생 선발 때 1347년생인 이숭인과 1352년생인 권근이 합격했음에도 나이 스물다섯이 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명에 가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합격한 김도는 명에 갔다. 또 장남인 김자지는 1367년생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1340년대 초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2] 동복 오씨(同福 吳氏) 오련(吳璉)의 딸[3] 구 죽산 안씨(舊 竹山 安氏) 안수제(安受禔)의 딸[4] 정필(鄭弼)의 처[5] 공민왕(恭愍王) 11년(1362) 임인(壬寅) 임인방(壬寅榜) 을과(乙科) 2위(2/33) 함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동방이라 하는데 김도의 동방으로는 이숭인, 설장수, 정도전 등이 있다.[6] 사록은 고려시대에 삼경(三京) · 대도호부(大都護府) · 목(牧) · 부(府) 등 대읍(大邑)에 설치된 외관직이며, 고을의 장관인 유수(留守) · 사(使)의 행정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참고로 이 당시의 전주는 전주목(全州牧)이었고, 목사(牧使)가 파견되었다.[7] 사간원의 정 6품 관직[파견불발] 8.1 8.2 이숭인과 권근은 나이가 25살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견하지 않았다.[10] 『해동역사(海東繹史)』학예(學禮)에는 한국인으로서 중국에서 등과한 사람을 당나라 시대부터 원나라 시대까지 열기한 후, 황명과자(皇明科者)는 김도 한 사람 뿐이라고 했다. 이전 중국 왕조에서는 오소도, 오광찬, 최언위 등 과거에 급제한 한반도 출신이 있었지만, 명나라 때에는 고려 사람인 김도가 과거에 급제한 것이 유일한 사례라는 것이다.[11] 나복산인은 도의 호, 장원은 도의 자이다. 여담으로 도의 이름과 자를 지어준 이가 목은 이색이라고 한다.[12] 팔자동은 개성에 있는데, 부군면 통폐합으로 북부면, 동부면, 남부면, 서부면이 송도면으로 병합되고 팔자동리는 원정/모토마치(元町), 동본정/히가시혼마치(東本町, 동본정)으로 분할·개편되기 전까지 개성군 북부면(北部面) 팔자동리(八字洞里)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었다. 여담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원정, 동본정은 각각 선죽동, 동흥동으로 개칭되었다.[13] 김취려의 증손으로, 공민왕의 총애를 받던 무신이였다. 그러나 자제위를 총괄하며 노국대장공주 사후 성적으로 방종해진 공민왕의 후비 겁간 지시에 가담했고, 관리들을 업신여겨 구타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던 인물이었다.[14] 처형되었다는 말도 있다. 둘 다일 수도 있고.[15] 김도를 가리킨다.[16] 현재의 전라남도 순천시, 화순군 일원에 있는 모후산의 옛 이름이라 전해진다. 화순군 동복면은 동복 오씨(同福 吳氏)의 관향인데, 김도의 어머니가 동복 오씨다. 또, 나복(蘿葍)은 동복(同福)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17] 무를 가리키는 한자 표현이다.[18] '채근'은 채소의 뿌리를 이르는 말이지만, 보잘것 없는 음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박주산채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19] 공자의 애제자.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대바구니 밥을 먹은 안회와 나복을 먹은 김도를 견주며 도 또한 공자의 문하에 들었다면 크게 되었을 재주를 지녔다며 도를 치켜세우고 있다.[20] 학덕 등을 우러러 떠받드는 것을 말한다.[21] 김도의 자.[22] 공자의 문하(門下)를 말한다. 공문(孔門)이라고도 한다.[23] 중국 조정. 명나라.[24] 은구(銀鉤)는 원래는 은으로 만든 고리를 의미하지만, 아름답게 쓴 글씨를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25] 성균관의 정4품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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