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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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역사
[세가(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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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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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靖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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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134·135·136·137권열전
45·46권
[ 지(志)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후비·종실·공주 열전(列傳)]
원정왕후 김씨 · 원화왕후 최씨 · 원성태후 김씨 · 원혜태후 김씨 · 원용왕후 유씨 · 원목왕후 서씨 · 원평왕후 김씨 · 원순숙비 김씨 · 원질귀비 왕씨 · 귀비 유씨 · 궁인 한씨 · 궁인 이씨 · 궁인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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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왕후 한씨 · 용의왕후 한씨 · 용목왕후 이씨 · 용절덕비 김씨 · 연창궁주 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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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상군 왕방 · 낙랑후 왕경 · 개성후 왕개 · 도애공주
인평왕후 김씨 · 인예순덕태후 이씨 · 인경현비 이씨 · 인절현비 이씨 · 인목덕비 김씨
대각국사 왕후 · 상안공 왕수 · 도생승통 왕탱 · 금관후 왕비 · 변한후 왕음 · 낙랑후 왕침 · 총혜수좌 왕경 · 조선공 왕도 · 부여후 왕수 · 진한후 왕유 · 적경궁주 · 보령궁주
정의왕후 왕씨 · 선희왕후 김씨 · 장경궁주 이씨
정신현비 이씨 · 사숙태후 이씨 · 원신궁주 이씨
-
한산후 왕윤 · 경화왕후 · (사숙태후 소생 공주) · 수안택주
경화왕후 이씨 · 문경태후 이씨 · 문정왕후 왕씨 · 숙비 최씨
상당후 왕필 · 원명국사 징엄 · 대방공 왕보 · 대원공 왕효 · 제안후 왕서 · 통의후 왕교 · 대령궁주 · 흥수궁주 · 안수궁주 · 복령궁주
[열전(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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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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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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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리(良吏)」
「효우(孝友)」
122권
133·134·135·136·137권
고려 밀직제학(密直提學)
김도
金濤
출생
사망
장원(長源)
나복산인(蘿葍山人)
아버지 김광후(金光厚)
어머니 동복오씨(同福 吳氏)[2]
형 김완(金浣)
죽산안씨(竹山安氏)[3]
[4남 1녀]
장남 김자지(金自知)
차남 김여지(金汝知)
3남 김치지(金致知)
4남 김학지(金學知)
장녀 연안김씨(延安金氏)[4]
 
 
 
 
 
 
 
 
 
 
 
 
 
 
 
 
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고려 후기에 좌부대언, 지신사, 밀직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本貫)은 연안(延安), 자(字)는 장원(長源), 호는 나복산인(蘿葍山人)이다.
 
 
 
 
 
 
 
 
 
 
 
 
 
 
 
 
 
 
 
 
 
 
 
 

2. 생애[편집]

 
 
 
 
 
 
 
 
 
 
 
 
 
 
 
 
 
 
 
 
 
 
 
 
섬한의 5대손인 도(濤)는 소과(제술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진사가 되었고, 홍건적의 침공 후인 1362년 공민왕이 행궁을 청주로 옮기고 그곳에서 실시한 문과친시(文科親試)에서 을과 제2위(2/33)로 급제하여 출사하였다.[5] 급제 후 전주사록(全州司錄)[6]에 보임하였고, 다섯 번 관직을 옮겨 정언(正言)[7]이 되었는데, 어떤 일을 간언하다 파직되었다. 1370년 8월 명 과거 응시생을 선출할 때에 이숭인(李崇仁)[파견불발], 박실(朴實), 권근(權近)[파견불발], 유백유(柳伯濡)와 함께 선출되었다. 이후 박실, 유백유와 하정사 권균(權鈞)을 따라 경사(京師)에 들어갔고 1371년 명 제과에 급제했다.[10] 김도는 전체 급제자 120명 중 25위, 유일한 외국인으로 급제하여 동창부(東昌府) 안구현승(安丘縣丞)을 제수받았으나, 중국어를 할 줄 모르고 고향에 노친이 있다는 이유로 관직을 고사하고 고려로 귀국했다. 후에 우사간(右司諫)·예문응교(藝文應敎)로 발탁하였고, 여러 번 옮겨 성균사예(成均司藝)가 되었다. 그가 귀국하자 공민왕이 친히 "나복산인김도장원(蘿蔔山人金濤長源)"[11] 여덟 글자를 써 내렸다. 이를 영화롭게 여긴 사람들이 도가 살던 곳을 팔자동(八字洞)[12]이라 불렀다. 이후 우왕(禑王) 때 우사의(右司議), 좌부대언(左副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로 승진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되었다. 환관의 정치관여를 금할 것을 청하는 글을 도당(都堂)에 올렸으며, 또한 왕에게 김흥경(金興慶)[13]과 그 일당을 내쫓고 유신(維新)의 정교(政敎)를 펼 것을 상소하였다. 김흥경이 홍륜 공민왕 시해 음모를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결국 김흥경은 언양(彦陽)으로 귀양을 갔다.[14] 우사의 재임시절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의 사주를 받아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속명(金續命)을 탄핵하여 유배시키기도 했는데, 후에 홍중선(洪仲宣 혹은 洪仲善)과 더불어 반대 세력을 비판하자 이인임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마침 1379년 김도의 가노가 연경궁(延慶宮) 옛 터의 돌을 훔치다 걸리자 일로 그를 미워하던 이인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고, 같은 해 7월에 양백연(楊伯淵)의 옥사에 연루되어 효수되었다.

고려 말의 문신 백문보(白文寶)의 <담암선생집(淡庵逸集)> 권일(卷一)에는 김도와 김도가 명 제과에 급제하여 글씨 여덟 자를 하사받은 일을 칭송한 시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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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15]은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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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복산[16]에서 글을 읽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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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복[17]은 맛이 담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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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18]는 참으로 먹을 만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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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짐 몹시 견고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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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어려운 일이 없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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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회[19]는 더러운 거리에 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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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바구니 밥을 먹었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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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어질다 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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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찬앙[20]의 경지에 이르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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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21]의 재주는 흘러 넘치는 듯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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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22]에 있었다면 반드시 물결을 보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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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조[23]에서 높은 성적으로 급제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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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혁히 빛나는 반열에 올랐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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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간 바가 이와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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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가 무릎 치며 탄복치 않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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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임금께서 크게 글자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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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에서 은총으로 내려 주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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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글씨[24]는 별과 해처럼 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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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성대한 완상물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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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는 지극한 보배에 절하며 칭송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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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손은 길이길이 전하며 아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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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릉(공민왕)이 사예[25] 김도에게 "나복산인김도장원" 여덟자를 크게 써 내리다

[1] 1370년 명 과거 응시생 선발 때 1347년생인 이숭인과 1352년생인 권근이 합격했음에도 나이 스물다섯이 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명에 가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합격한 김도는 명에 갔다. 또 장남인 김자지는 1367년생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1340년대 초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2] 동복 오씨(同福 吳氏) 오련(吳璉)의 딸[3] 구 죽산 안씨(舊 竹山 安氏) 안수제(安受禔)의 딸[4] 정필(鄭弼)의 처[5] 공민왕(恭愍王) 11년(1362) 임인(壬寅) 임인방(壬寅榜) 을과(乙科) 2위(2/33) 함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동방이라 하는데 김도의 동방으로는 이숭인, 설장수, 정도전 등이 있다.[6] 사록은 고려시대에 삼경(三京) · 대도호부(大都護府) · 목(牧) · 부(府)대읍(大邑)에 설치된 외관직이며, 고을의 장관인 유수(留守) · (使)의 행정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참고로 이 당시의 전주전주목(全州牧)이었고, 목사(牧使)가 파견되었다.[7] 사간원의 정 6품 관직[파견불발] 8.1 8.2 이숭인과 권근은 나이가 25살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견하지 않았다.[10] 『해동역사(海東繹史)』학예(學禮)에는 한국인으로서 중국에서 등과한 사람을 당나라 시대부터 원나라 시대까지 열기한 후, 황명과자(皇明科者)는 김도 한 사람 뿐이라고 했다. 이전 중국 왕조에서는 오소도, 오광찬, 최언위 등 과거에 급제한 한반도 출신이 있었지만, 명나라 때에는 고려 사람인 김도가 과거에 급제한 것이 유일한 사례라는 것이다.[11] 나복산인은 도의 호, 장원은 도의 자이다. 여담으로 도의 이름과 자를 지어준 이가 목은 이색이라고 한다.[12] 팔자동은 개성에 있는데, 부군면 통폐합으로 북부면, 동부면, 남부면, 서부면이 송도면으로 병합되고 팔자동리는 원정/모토마치(元町), 동본정/히가시혼마치(東本町, 동본정)으로 분할·개편되기 전까지 개성군 북부면(北部面) 팔자동리(八字洞里)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었다. 여담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원정, 동본정은 각각 선죽동, 동흥동으로 개칭되었다.[13] 김취려의 증손으로, 공민왕의 총애를 받던 무신이였다. 그러나 자제위를 총괄하며 노국대장공주 사후 성적으로 방종해진 공민왕의 후비 겁간 지시에 가담했고, 관리들을 업신여겨 구타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던 인물이었다.[14] 처형되었다는 말도 있다. 둘 다일 수도 있고.[15] 김도를 가리킨다.[16] 현재의 전라남도 순천시, 화순군 일원에 있는 모후산의 옛 이름이라 전해진다. 화순군 동복면동복 오씨(同福 吳氏)의 관향인데, 김도의 어머니가 동복 오씨다. 또, 나복(蘿葍)은 동복(同福)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17] 를 가리키는 한자 표현이다.[18] '채근'은 채소의 뿌리를 이르는 말이지만, 보잘것 없는 음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박주산채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19] 공자의 애제자.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대바구니 밥을 먹은 안회와 나복을 먹은 김도를 견주며 도 또한 공자의 문하에 들었다면 크게 되었을 재주를 지녔다며 도를 치켜세우고 있다.[20] 학덕 등을 우러러 떠받드는 것을 말한다.[21] 김도의 자.[22] 공자의 문하(門下)를 말한다. 공문(孔門)이라고도 한다.[23] 정. 명나라.[24] 은구(銀鉤)는 원래는 은으로 만든 고리를 의미하지만, 아름답게 쓴 글씨를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25] 성균관의 정4품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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