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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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밀직제학 계림군(鷄林君) 문정공(文靖公) 이달충 李達衷 | |
출생 | |
사망 | |
본관 | |
초명 | 달중(達中) |
자 | 중권(仲權) |
호 | 제정(霽亭) |
봉호 | 계림군(鷄林君) |
시호 | 문정(文靖) |
부모 | |
형제 | |
1326(충숙왕 13) 성균시에 장원하였고, 동년 문과에도 급제하였다. 충숙왕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이학도감판사(吏學都監判事)가 되었다.
1352년(공민왕 1) 전리판서(典理判書), 1353년(공민왕 2)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하였다. 1358년(공민왕 7)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있던 중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나갔다.
동북면 도순문사[4]로 있을 때 젊은 날의 태조와의 일화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이달충이 동북면 도순무사의 직무를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갈 때 환조[5]가 환송을 나왔는데 환조가 주는 술은 서서 마셨으나 그 아들인 태조가 주는 술은 무릎을 꿇고 마셨다고 하며, 태조가 참으로 비범하므로 가업을 번창하게 할 것임을 예견했다고 한다.[6]
1359년(공민왕 8) 다시 호부상서가 되었다. 1366년(공민왕 15) 왕이 이달충을 이름난 선비라 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에 발탁하였다. 후에 계림부윤(鷄林府尹)에 임명되었고, 1385년(우왕 11) 계림군(鷄林君)으로 있던 중 죽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348년(충목왕 4) 이학도감판사(吏學都監判事)가 되었다.
1352년(공민왕 1) 전리판서(典理判書), 1353년(공민왕 2)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하였다. 1358년(공민왕 7)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있던 중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나갔다.
동북면 도순문사[4]로 있을 때 젊은 날의 태조와의 일화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이달충이 동북면 도순무사의 직무를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갈 때 환조[5]가 환송을 나왔는데 환조가 주는 술은 서서 마셨으나 그 아들인 태조가 주는 술은 무릎을 꿇고 마셨다고 하며, 태조가 참으로 비범하므로 가업을 번창하게 할 것임을 예견했다고 한다.[6]
1359년(공민왕 8) 다시 호부상서가 되었다. 1366년(공민왕 15) 왕이 이달충을 이름난 선비라 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에 발탁하였다. 후에 계림부윤(鷄林府尹)에 임명되었고, 1385년(우왕 11) 계림군(鷄林君)으로 있던 중 죽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 죽성군(竹城君) 첨의찬성사.[2] 죽산 박씨. [3]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 이재명이 국당공파-제정공파에 속한다.[4] 都巡問使. 원래 군사관계의 임무를 띠고 재추(宰樞: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재신(宰臣)과 중추원(中樞院)의 추밀(樞密))로서 임명되어 지방에 파견되던 임시관직이었으나, 양계(兩界)에 있어서는 공민왕 후년까지 그 지방장관의 임무를 맡고 있던 존무사(存撫使)의 민사적 업무까지 흡수하여 군사, 민사를 모두 관장하는 지방장관이 되었다. 서북면의 도순무사는 평양윤(平壤尹)을 겸하고 동북면의 도순무사는 화령윤(和寧尹)을 겸하였다. 1389년(공양왕 1) 도절제사(都節制使)로 고쳐졌다.[5] 이자춘. 이성계의 부친.[6] 고려사 권112, 열전25 이달충, 태조실록 1권, 총서 32번째 기사. 용비어천가 제28장.[7] 이제현은 이달충의 부친 이천의 사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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