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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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전쟁
麗蒙戰爭

시기

1231년(고종 19년) ~ 1259년 (고종 46년)

장소

한반도 전역

원인

강동성 전투 이후, 고려와 몽골의 관계 악화.

교전국

고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Royal_flag_of_Goryeo_%28Bong-gi%29.svg.png

몽골 제국

지휘관

박서
김경손
김윤후
대집성
최춘명
이자성
채송년 등

살리타이
탕우타이
자랄타이
예케
아모간 등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2만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고려, 무인정권 붕괴 및 몽골과 강화 체결.

영향

몽골의 내정 간섭으로 고려의 정치·경제 파탄.
고려 중기 이전의 문화재 대량 소멸.


1. 개요2. 배경3. 제1차 침입4. 제2차 침입5. 제3차 침입6. 휴식기7. 제4차 침입8. 제5차 침입9. 제6차 침입10. 제7차 침입
10.1. 제7차 침입 - 몽골의 상륙 작전10.2. 제8차 침입10.3. 제9차 침입
11. 후일담12. 여몽전쟁에 대한 비판/비난
12.1. 반론
13. 결과1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231년(고종 19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9차례에 걸친 몽골고려 침입으로 촉발된 전쟁으로 '대몽항쟁', '항몽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조선에선 병자호란이 조선 최대의 굴욕이라면 고려는 여몽전쟁이 전쟁사상 최대 굴욕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최씨 무신정권의 전횡까지 합쳐지며 병자호란보다 더 비참한 항쟁이었다.[1]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 이전 최고의 난세였다.[2][3] 덕분에 고려시대에 치른 대외 전쟁들 중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전쟁이며 고려사를 간략히 설명할 때 다른 침입은 생략해도 여몽전쟁 하나는 짚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파일:여몽전쟁교과서.jpg

2. 배경[편집]

칭기즈 칸의 주도 하에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하며 유목민족의 기상을 드높였다. 서역을 정리하자 몽골 제국은 중원으로 눈을 돌렸고 1차 목표는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금나라였다. 몽골은 남송과 연합하여 금을 남북으로 공격하니 금은 멸망하였다. 이 때 거란 잔당의 일부는 금나라가 망해가는 틈을 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 다시 몽골에 쫓기게 되어 1216년(고종 4년), 갈 곳 없어진 거란의 잔당들은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에 몽골은 여진족의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거란의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고려에 들어왔다. 고려도 거란 잔당 소탕을 위해 군사를 동원, 몽골 - 동진 연합군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의 잔당들을 소탕하였다. 이것이 강동성 전투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으니….

몽골은 이를 계기로 고려에 큰 은혜나 베푼 듯이 행동하였고, 해마다 고려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 몽골 사신들은 고려에 들어와 깽판을 부렸다.[4] 이러니 고려에선 당연히 반몽 정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흘러 1225년(고종 12년)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구유(저고여, 箸告與)가 귀국하던 도중 국경에서 자객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골에서는 고려의 소행이라 주장, 고려에선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5]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져 결국 국교 단절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몽골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였다.[6][7]

3. 제1차 침입[편집]

일시 : 1231년 음력 8월 ~ 1232년 음력 3월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를 치기위해 배후의 위협을 미리 차단을 하기를 원했고 이에 권황제 살리타이(撒禮塔)에게 군사 3만을 주어 고려를 침략하였다.[8]

몽골군은 음력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철주 등을 단숨에 함락시키고 남하, 고려군은 이에 맞서 자주·동선역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안북성 전투에서 희대의 패착을 거두며 전황이 급속도로 불리해졌다. 귀주에서 혈전 속에 그 지역을 수비하던 박서, 김경손 등의 맹활약으로 1만명의 북로군을 귀주에 묶어두며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황에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몽골군이 수도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할 수 없이 살리타이가 보낸 권항사(勸降使)를 만나고 왕족인 회안군 왕정을 적진에 보내어(사실상 인질) 강화를 맺었고 제1차 침입은 종료된다.

최우 무신정권의 몽골에 대한 대항은 자신들의 수하를 시켜 서북방면의 다루가치를 제거하려는 것이 전부였고 이마저도 대부분 실패했고 몽골의 잔인한 보복을 두려워한 농민들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항전은 농민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제1차 침입 때는 관악산의 초적들이 항복하여 몽골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지광수 등이 지휘한 충주 노예군의 항쟁은 특히 유명하였다. 또한 농민들도 몽골군에 완강히 저항하자 이에 몽골군은 곡식을 불태우고 잔인한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리하여 농촌은 황폐해 갔고 인구는 감소됐으며, 뿐만 아니라 황룡사의 구층탑과 부인사 소장의 대장경이 불타는 등 문화재가 소실된 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4. 제2차 침입[편집]

일시 : 1232년 음력 8월 ~ 1232년 음력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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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한 전황에서 고려는 잠시라도 피하고자 몽골과 강화를 했지만 이는 고려의 작전상 후퇴였고 당시 집권자인 무신정권최우는 앞으로 있을 몽골의 침략에 대비해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 천도를 단행하였다.[9] 결국 1232년(고종 19년) 음력 6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몽골과의 장기 항전 태세에 돌입하자 몽골은 살리타이를 다시 내세워 침입해 결국 서경홍복원[10]을 앞세워 개경을 함락시킨 후 남경(南京, 서울)을 공격, 한강을 넘어 계속 남하하였다. 초원에서 자란 유목민족의 특성상 해전에 약한 몽골[11]은 강화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고려는 거절하였다. 이에 열받은 몽골군은 다시 남하하여 처인부곡을 공격하다가 김윤후라는 스님[12][13]에 의해 수장 살리타이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바람에 퇴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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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 출처

한편 몽골군이 철수하자 최우는 계획대로 때를 틈타 북계병마사 민희(閔曦)에게 가병 3천을 주어 앞서 배반한 역적 홍복원을 토벌하고, 홍복원의 가족을 사로잡았으며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이 2차 침입 때 많은 문화재가 불타 사라졌고, 부인사에 소장되어있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좀 어이없는 사건도 하나 있었다. 충주성 전투에서 성을 수비하던 관리들이 도주하자 양민과 노비들이 남아서 성을 지켰는데, 문제는 몽골군이 철수한 후 돌아온 관리들이 성안의 재물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백성들을 처벌하는 병크를 저지른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스타크래프트 원조네[14]

  • 전투

    • 광주성 전투(1232년 11월 중순 ~ 12월 / 지휘관 : 이세화)

    • 처인성 전투(1232년 12월 16일)

5. 제3차 침입[편집]

일시: 1235년 윤달 7월 ~ 1239년 4월

몽골군에 의해 초토화된 고려 강역

금나라가 1234년에 멸망하자, 몽골은 1235년(고종 22년)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탕우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공격케 하였다. 몽골은 여러 차례 타격을 받으면서도 4년간에 걸쳐 고려 영토 전역을 유린했다. 경주 (동경)에까지 당도해 그 유명한 황룡사를 불질러버리는 등 고려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 웅거하여 저항하였고 부처의 힘을 빌어 난국을 타개하고자 '대장경'의 재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육지에선 몽골군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결국 1238년 겨울, 고려 조정에서 몽골에게 강화를 제의했고, 몽골은 고려 고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1239년 봄에 철수하였다.

철수 후 고려는 약조를 이행하지 않다가 몽골의 협박 독촉으로 왕의 신병을 이유로 입조가 불가능함을 알렸다. 그 대신 왕족인 신안공 왕전(新安公 王佺)을 왕의 아우라 속여서 칭하여 몽골에 보냈다. 그리고 2년 후인 1241년(고종 28년)에 신안공 왕전의 사촌 형인 영녕공 왕준(永寧公 王綧)을 왕자로 가장시켜 또 한 번 사기를 쳐서 몽골에 볼모로 보냈다

  • 전투

    • 제2차 자모산성 전투 (1236년 7월 18일 ~ 1236년 8월 13일 / 지휘관 : 최경후, 김지저, 김명회)

    • 개주 전투 (1236년 7월 / 지휘관 : 희경, 명준)

    • 정주 전투 (1236년 7월 / 지휘관 : 광대)

    • 온주군 전투 (1236년 9월 / 지휘관 : 현려)

    • 죽주 전투 (1236년 9월 / 지휘관 : 송문주)

    • 고란사 전투 (1236년 10월 / 지휘관 : 전공렬)

    • 효가동 전투 (1236년 12월 / 지휘관 : 박인걸)

6. 휴식기[편집]

1239년부터 1247년까지는 몽골의 침입이 없었다.
그러나....

7. 제4차 침입[편집]

일시 : 1247년 윤달 7월 ~ 1248년 3월

오고타이 칸(원 태종)의 대를 이어 구유크 칸(원 정종)이 즉위하자 몽골은 고려의 입조와 강화도에서의 출륙을 조건으로 아모간(阿母侃)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구유크 칸이 곧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고려의 선철군 후입조를 받아들이고 철군하였다. 1249년 2월에야 구유크의 사망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고, 최우는 어차피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 없었기에 뻗대다가 그 해 11월 사망하고 만다. 뒤를 이어 최항이 권력자가 된다.

8. 제5차 침입[편집]

일시 : 1253년 7월 ~ 1254년 1월

후계 분쟁이 끝나고 몽케 칸(헌종)이 즉위하게 되자 1253년(고종 40년) 예케(한자 : 야굴也窟 또는 也古)를 시켜 고려에 대거 침입하였다.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를 굳게 지키니 몽골은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9월부터 10월 초까지 동주(東州 : 철원)·춘주(春州 : 춘천)·양근(楊根 : 양평)·양주(襄州 : 양양) 등을 공격한 다음 충주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충주성엔 21년 전의 그 김윤후가 있었다. 충주성은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으며 한달 이상 시간을 끌었다. 이 사건으로 충주는 국원경으로 승격된다. 이때 (11월) 돌연 예케는 병을 이유로 귀국하였는데, 도중 개경에서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다.

그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고종은 강화도를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예케의 사신과 회견하였으며[15], 한편 충주성 전투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부 지방에 있던 몽골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고 있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淐, 혹은 안경공 강)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완전히 철병하였다. 안경공 창은 1254년 8월에 귀국했다.

  • 전투

    • 충주성 전투(1253년 10월 중순 ~ 12월 말 / 지휘관 : 김윤후)

9. 제6차 침입[편집]

일시 : 1254년 7월 ~ 1254년 12월

그러나 몽케 칸(원 헌종)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치 않았고, 최항을 대동한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면서 1254년(고종 41년) 음력 7월 자랄타이(한자 : 차라대車羅大 또는 札剋兒帶)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케 하였다.

몽케 칸은 안경공 창을 만났는데 처음에는 안경공이 그 전에 인질로 간 영녕공 준의 동생이라고 여겨서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런데 민칭(閔偁)이란 자가 사실을 고발해서 영녕공이 고려의 왕자가 아니라 친척임을 알았다. 물론 영녕공은 자기가 국왕의 친자가 아닌 줄은 몰랐다고 박박 우겼으며(....)막장드라마, 그와 함께 온 참지정사 최린도 '왕의 친자는 아니지만 왕의 사랑하는 자식(愛子)이니 그게 왕의 아들이라는 뜻임'이라며 콤비로 우겼다(...). 당연히 몽케 칸은 증거를 가져오라며 그 전에 고려에서 몽골에게 보낸 표문을 읽어 보았는데 정말로 표문에도 친자식(親子)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식(愛子)라고 쓰여져 있었다. 즉 거짓말은 하지 않은 것. 몽케 칸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불문에 부친 채 넘어가야 했다.[출처:] 잘도 빠져나갔다

한편 몽골은 수군을 동원하기 시작했다(1254년 2월, 하동군의 갈도 약탈).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원의 앞잡이 이현(추밀원 부사)을 바다에 던져 죽여버리니 휴전은 깨질 수밖에 없었다.

자랄타이는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것이 이른바 다인철소 전투 혹은 유학산성 전투로, 이 전투 역시 중앙군 없이 향리인 지씨와 어씨진짜로 이것밖에 역사서에 기록이 없다의 지휘 아래 몽골군을 막아냈다. 이 일로 다인철소는 익안현으로 승격하고 다인철소의 천민들도 모두 면천되었다. 이에 자랄타이는 다시 우회해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계속 남하하여 지리산까지 내려가 진주를 앞에 두었다. 이때 자랄타이는 돌연 몽케 칸의 명으로 군을 개경으로 돌이켰는데, 이때 이 짧은 5개월 사이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하여 《고려사》에는 포로가 20만 6천 8백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하였다.

  • 전투

    • 충주 다인철소 전투(1254년 9월 ~ 10월 )

    • 상주산성 전투(1254년 10월 / 홍지대사가 몽골군 장수를 활로 쏘아 죽임 처인성 어게인.)

10. 제7차 침입[편집]

일시 : 1255년 9월 ~ 1259년 3월

몽골군의 장기 주둔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다. 사실상 6차 침입 이후의 연속 전쟁에 가까웠다. 경우에 따라 6차 침입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10.1. 제7차 침입 - 몽골의 상륙 작전[편집]

일시 : 1255년 9월 ~ 1256년 6월
이듬해 몽골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하여 대거 침입하여, 전라도 전역을 쑥밭으로 만들고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도(강화도)에 돌입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마침 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몽골은 서경으로 일시 철수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의 산발적인 습격은 끊이지 않았고, 전쟁은 계속 되었다.

  • 전투

    • 대원령 전투 (1255년 10월)[17]

    • 조도 해전 (1255년 10월) - 몽골이 본격적인 수군 운용을 시작한 전투. 그러나 지역 해적에게 (...) 패했다.

    • 아주 해전 (1256년 3월 / 지휘관 : 충주도 순문사 한취) - 고려의 첫 해전 패전. 한취와 고려 수군의 함선 9척이 전멸.

    • 3차 충주성 전투 → 대림산성 전투 → 덕주산성 전투(1256년 중순) - 위기에 몰린 고려 민간인들이 월악산까지 숨어들었고 결국 기상 악화로 몽골군 별동대 후퇴

    • 온수현 전투 (1256년 6월 / 지휘관 : 이천) - 수군 200명의 상륙 작전. 몽골군 수십명을 죽이고 주민들을 구출함.

    • 압해도 해전 (1256년 6월) - 자랄타이의 군대를 압해도(현 신안군)의 주민(해적)들이 포차[18]를 실은 전함으로 철수시킴. 유구한 전통의 화력 덕후.

    • 애도 전투 (1256년 10월) - 몽골군의 애도(현 고흥군) 상륙에 별초군이 도륙한 사건이다.

10.2. 제8차 침입[편집]

일시 : 1257년 5월 ~ 1257년 10월

1257년(고종 44년)에는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게 되자 몽골은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케 하였다. 그사이 최항이 죽고 최의가 집권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257년 5월이었다.

그간 정부는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서,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했다. 1257년 10월에 몽골군은 선 철군 후 입조의 설득에 따라 철수하게 되었다.[19]

하지만 최의는 그런 것 따위는 생각도 안하고 전횡을 부렸다가 결국 다음해 김준 일파에게 살해당한다.

10.3. 제9차 침입[편집]

일시 : 1258년 4월 ~ 1259년 3월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약속했던 고려 태자가 오지 않자, 김준이 정권을 잡은 지 한 달만에 몽골군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앞세워 제9차 침입을 개시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김준도 몽골군에 대한 최씨 정권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하여 항전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1259년 3월, 고려는 여러 차례 몽골군과의 전투 끝에 몽골과 강화를 맺게 되어 몽골과의 전쟁이 끝나게 된다.

11. 후일담[편집]

1260년 고려와 몽골은 강화를 맺었으나 조정 의견 불일치로 출륙(개경 환도)만큼은 계속 지연되었다. 1259년 음력 6월 고종이 죽었고, 칸이 된 쿠빌라이를 만나고 온 태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다. 원종은 몽골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어 복속을 거듭 표시하였으나,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권자가 된 김준의 반대로 강화도에서 나올 수 없었다.

심지어 김준을 살해하고 새 집권자가 된 임연은 1269년 6월 강화를 반대하여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창을 임시 즉위시키니 이것이 영종 (후의 시호)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몽골의 압력으로 11월 물러나고, 임연 역시 몽골의 재침공을 두려워하다 등창으로 죽는다. 임유무 역시 출륙을 반대하지만 몽골의 군사적 뒷받침을 받은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 12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난지 100년만에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강화를 맺은지 10년만에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그러나 일부 배중손, 김통정 등 고려의 무신들이 환도에 극렬 반대하여 삼별초의 난으로 이어졌으나, 1273년 제주도에서 여몽 연합군에 의해 김통정이 살해되면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2. 여몽전쟁에 대한 비판/비난[편집]

그 동안 국사 교과서에서는 고려가 30년 동안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몽골제국의 침략을 막아낸 자주성이 매우 강한 나라로 묘사하며 마치 고려가 치열하게 40년 동안 몽골과 대결한 것처럼 서술했지만 이는 엄밀하게 말해서 역사 왜곡이다. 국사 교과서만 보면 당시 고려의 최씨 정권이 마치 주도적으로 대몽 항쟁을 한 것처럼 나와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국사 교과서가 아니라 고려사를 보아야 제대로 된 역사를 알 수 있다.

당시 고려의 최씨 정권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정권을 사수하는 것에만 급급했을 뿐, 조금도 나라를 위하는 모습이 없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급하게 사신을 보내서 항복하겠다고 하고 몽골 측에서 항복을 이행할 때 지켜야 할 조건들을 제시하며 믿고 철군하면 언제 항복했냐는 듯 모든 합의 내용을 파기하고 다시 버티는 식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렇다고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 중앙의 군사들을 보내서 막은 것도 아니었다. 몽골군과 항쟁한 것은 지방의 성에 버티고 있던 소수의 고려군과 민중들 뿐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조차 이 지경은 아니었다.[20] 최소한 선조는 중앙 정규군도 전선에 투입하여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짱박아 두진 않았다.[21]

최씨 정권은 대몽 항쟁에 있어서 주도적으로 몽골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운 적이 전혀 없었고 그저 강화도에 틀어박혀 항복만 대책 없이 무기한으로 연기했을 뿐이었다. 오히려 강화도에다 갖가지 나무들을 실어와서 넓은 원림을 조성하고 넓은 집을 지었으며 격구를 구경하며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걸핏하면 잔치를 벌여서 사치 부리기에 바빴다. 백성들이 몽골군에게 잡혀 죽든 말든 약탈당하든 말든 아무런 신경도 안 썼던 게 최씨 정권이었다. 이렇게 백성들과 철저하게 유리되어 있었던 최씨 정권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대몽 항쟁에서 널리 회자되는 박서김경손귀주성 전투도 수천 명에 불과한 고려 지방군이 이루어낸 것이고 승려 김윤후살리타이를 사살한 것으로 유명한 처인성 전투도 고려의 민중들과 몇 안 되는 지방군이 이루어낸 업적이다. 70일 동안 몽골군과 치열하게 싸웠던 충주성 전투 또한 민중들과 소수의 지방군이 해낸 것이었다. 12세기 때만 하더라도 고려에는 30만 이상이나 되는 정규군이 분명히 있었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십만의 중앙군은 전쟁에 거의 나서지 않았고 강화도 주변에서 최씨 정권을 엄호하는 역할만 했다. 게다가 더 문제는 고려 중앙군인 2군 6위 체제가 사실상 최씨 무신 정권 때 유명무실화되면서 고려의 중앙군이라는 것 자체가 장부 숫자의 형태로만 존속되거나 최씨 정권의 사병 집단이나 삼별초로만 운용되는 실정이었다. 경호 부대만 있지, 전투 부대는 아예 존재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 형태를 자초하여 고려가 대몽 항쟁기 때 정규군이 제대로 힘도 못 쓰는 상황이 연출되게 한 것이다.[23] 게다가 유명무실한 정규군과 삼별초 및 최씨 정권 사병 집단이 힘을 합쳐서 조직적으로 대항해도 이길까 말까 한 전개에서 서로 따로놀고 앉아 있었다. 국지전에서 성과를 보였다는 삼별초의 행동만 보더라도 최소한 정규군인 중앙군이나 지방군을 협조 체계가 전혀 이루어진 형태가 아닌 전투를 치루는 모습만 보더라도 최씨 무신 정권이 얼마나 고려의 국방력을 파괴했는지 여실하게 증명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더 큰 문제인 건 그 삼별초의 활동이 그저 최씨 정권의 행정력을 지속적으로 장악하기위한 목적이 강하지, 몽골이라는 외세와 싸우기 위해서 싸운게 아니라는 점이다. 더욱이 산성방호별감이라는, 현지 사정은 전혀 모르는 햇병아리들을 보내서 죽으라고 하고 앉아 있는 형태이니 본토가 제대로 된 조직력을 갖추거나 연계되는 작전을 고려군이 과거 대규모 전면전과 달리 할 수 없었던 것도 한 몫을 단단히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봉 최씨 가문 하나 사병 집단 때문에 정규군이 완전히 와해되어서 존재하지를 않으니 지방군도 유명무실한 형태에서 고려로서는 대항할 군사 조직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군사력이 더 그 지경인 데다가 사실 생각이 있다면 과거 고구려처럼 침공 세력의 배후 세력과 연계하여 압박 전략을 하는 외교 정치적 행보가 전혀 없다. 고려가 몽골의 배후를 노릴 수 있는 남송과 연계하는 외교적 행보라도 했어야 하나 고려의 최씨 정권은 단 한 번도 그럴 여력을 보이려고 한 적이 없다. 중국 역대 통일 왕조 중 군사력이 가장 약한 나라였다는 남송은(금나라에 화북 지방을 뺏긴 순간부터 반쪽이 되긴 했지만) 국력에서 몽골에 비해 현격한 열세를 보였지만, 그래도 국운을 걸고 치열하게 맞서 싸웠으며 결국 45년 간의 항전 끝에 1279년에 남송의 황제 이하 전원이 바닷물에 투신 자살을 하면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오히려 남송이야말로 진정으로 수십 년 동안 항전했다고 할 만 하지, 고려의 경우는 항전도 아니고 항복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국가가 전혀 백성들을 돌보지 않으니 1250년대에 들면 아예 고려의 백성들이 몽골군을 환영하기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반박에서는 고려가 송과의 외교 단절된지 오래이기 때문에 안한게 맞다고 하는데 외교와 같은 국제 정치 문제에서 특히 안보적으로 공동의 적을 두고 있는 입장이라면 충분히 단절된 상황에서라도 협력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하게 만드는 것이 외교력 투사이자 정치력 투사인 것이나 고려는 그러한 노력 자체가 없었다. 송으로서도 당시 고려와 연계하여 2중 전선을 취했어도 몽골을 오히려 방어적으로 억제할수 있는 기반적 발판이 되는 현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가 큰 사항이다. 남송보다 훨씬 먼 중앙 아시아를 상대로도 외교전을 펼쳐서 고구려는 1차 고당 전쟁에서 당나라가 물러날수 밖에 없게 만들었고 고려 때 서희와 같은 고려 - 거란 전쟁 당시에도 송과의 압박 형태로 거란의 요나라가 철수 할 수 밖에 없게 만든 걸 감안하면 아무것도 안한 최씨 무신 정권의 대몽 항쟁에서의 외교력 부재는 심각한 사항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이다.[24]

몽골이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고 부마국으로 두었던 것도 고려의 자주성이 강해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사 교과서만 보면 마치 강화도가 천해의 요새인 것처럼 인식되기 쉽지만 강화도 앞바다의 폭은 압록강의 폭과 비슷한 정도고 몽골군이 정복한 곳에는 강화도 앞바다보다 훨씬 폭이 더 넓은 강도 많았다. 강화도 앞바다도 못 건넌 몽골군이라면 황하는 어떻게 건넜고 장강은 어떻게 건넜으며 볼가 강이나 다뉴브 강은 또 어떻게 건넜는가? 더욱이 몽골군이 인도네시아 원정까지 가서 실제로 상륙한 것을 보면 해군은 한족을 동원해서라도 건넜을 것이다. 때문에 강화도는 몽골이 작정하고 들어갔다면 최소 5년은 버틸지라도 그 이상 버티긴 힘들었을 것이다.[25] 또 몽골은 남송 침공 때 배후에 고려가 있어서 그 싹을 잘라놓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지 아예 작당하고 정복할 의도로 고려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단순히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어놓고 요리해먹으려 했을 뿐이다. 이는 인도네시아 침공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베트남 침공(자세한 것은 대월항목 참조)은 정복의 의도에 가까우나 이는 베트남이 과거 중국 땅이었다는 점을 들어 침공하였으나 가까스로 막아냈다. 결국 몽골이 강화도로 안 들어간 건 고려를 정복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려사 열전 최충헌최항 편에는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이현이란 인물이 최항에게 보낸 편지 속에 몽골이 고려를 멸망시킬 의도가 없었다는 게 드러나 있다.

“제가 원나라에 두 해 동안 억류되어 있으면서 그들이 하는 일을 살펴보니, 전에 듣던 소문과 판이하게 달라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도리어 만물의 생명을 사랑하고 아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와 올해에 내린 조서에서 제시한 조건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 어째서 육지로 나와서 맞이하지 않습니까? 원나라의 황제께서 노하여, ‘너희 나라는 짐이 인명을 아끼고 보호하는 뜻을 모르니 군대를 보내 죄를 묻는다.’고 합니다. 나라에서 만약 왕업을 존속시키려고 한다면, 어찌 한두 사람을 육지로 내보내 항복하는 것을 주저합니까? 지금 동궁(東宮)이나 안경공(安慶公) 같은 종실이 육지로 나와 영접하면서 사정을 잘 이야기한다면 군대가 거의 퇴각할 듯하니, 바라건대 공께서는 잘 생각해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몽골은 고려를 정복할 의도가 없었고 그저 항복만 하고 몽골 밑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나라를 존속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현 이전에 몽골에 인질로 갔던 영녕공 왕준 또한 같은 뜻의 편지를 최항에게 보낸 바 있다. 만약 최항이 정말로 자주성이 강한 사람이라서 몽골 밑으로 들어가기 싫었다면 응당 정규군을 보내서 몽골군과 맞서 싸우는 게 옳다. 그런데 최항은 몽골군과 싸우지도 않고 그렇다고 항복도 하지 않으면서 상황만 더욱 악화시켰다.

다시 말해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되어 존속하게 된 것은 대몽 항쟁의 결실이 아니라 애초부터 몽골이 고려를 멸망시킬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거기다 이후에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에 오르는데 고려의 원종이 지지해 준 것도 한 몫 했기에 존속할 수 있었던 것 뿐이다. 40년 간의 대몽 항쟁에 의한 결실로 고려가 존속하게 되었다는 건 그저 소설에 가깝기도 하다.

대몽 항쟁의 불꽃으로 묘사되는 삼별초의 난도 세간의 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애초에 삼별초는 무신 정권의 사병 집단이었고 1270년에 무신 정권의 최후 집권자 임유무가 숙청되면서 무신 정권이 타파되자 원종은 무신 정권의 사병 집단인 삼별초를 혁파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삼별초는 승화후 왕온을 왕위에 앉히고 별도의 정권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민심을 끌어모으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반몽 카드를 꺼내든 것 뿐이었다. 즉, 국가의 안보를 위해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정권의 안보를 위해 일어난 운동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삼별초의 난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까?

대몽 항쟁이란 것을 굳이 부각시켜야겠다면 고려의 지방군과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항전했으나 정작 정부와 중앙군은 강화도에 짱박히기만 했을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외롭게 항전하던 지방군들과 민중들도 지쳐서 결국엔 몽골군을 도리어 환영하게 되는 불행을 맞았다는 식으로 기술해야 맞을 것이다. 백성들이 내륙에서 짓밟히든 말든 아무 대책도 내놓지 않으며 강화도에 짱박혀 신나게 연회를 베풀고 격구나 관람하며 천하 태평이었던 최씨 정권을 긍정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라 할 것이다.

대몽 항쟁 당시 고려군을 살펴보면 거란 침입 당시 처절하게 맞서 싸워 대승리를 이뤘던 고려군은 온데간데 없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보다도 못한 졸전을 보여줬다. 임진왜란 당시엔 이순신의 막강한 수군 + 초기에는 두들겨 맞았으나 어느 정도 경험을 쌓고 재정비된 조선 관군 + 전라도를 막기 위해 일어난 의병 + 파병 온 명나라 군대라도 있었지, 대몽 항쟁 때는 이순신은커녕 파병해 줄 동맹국도 없었고,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의도가 없었기에 살아남았을 뿐이다. 몽골은 금나라남송을 정복할 때는 10만에서 많게는 30만 대군을 동원했으나 고려를 공격할 때는 5만 명을 넘긴 적도 없었다.[26]

뿐만 아니라 최우보다 더 답이 없던 간신배이자 권신인 최항이 집권하며 김경손을 비롯해 수 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핍박했기에 그 비판은 더욱 거세질 수 밖에 없다. 이 정도면 몽골군보다 권신인 최항과 그 수하들이 더욱 적이 되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문관들 중에 이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것이 문제이다. 정안의 경우는 자신의 재산을 전비에 충당하기보단 대장경 만드는데 많이 쏟아부을 지경이었다. 이장용의 경우는 황실의 편에 서기 급급했고 류경의 경우도 이규보처럼 무신정권의 눈치만 봤다. 애초 유승단도 강화천도를 반대한 정도면 애초에 문관들도 바깥에 나가 싸웠어야 화친을 결정하든 전쟁을 수행하든 우선 그 실상을 보고 택했을 것이다. 앞전에 조충과 김인경의 홀대로 인해 바깥에 나가 싸워도 대접받기는 틀려먹었던게 문제이나 애시당초에 무신정변을 만든 책임에는 문관들의 책임이 적지 않고, 그걸 깨닫고 전쟁에 나가서 김경손을 비롯한 장수들과 같이 싸우고 연계해야 하나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연계는 도저히 안되는 상황이었고 김경손은 결국 문관의 도움조차도 받지못한채 숙청되어야 했다. 이 전쟁 속에서 몇십년만에 군권을 쥐고 그 군권을 쥠과 동시에 황실을 기반으로 한 문관들 스스로 힘을 키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렸고, 류경이 잠시나마 실권을 쥐었으나 정작 전쟁에 참여해 군권을 쥔것이 없기에 이후 김준에게 실권을 뺏기게 된다. 결국 뒤늦게 가서야 김방경과 손을 잡아 무신정권을 붕괴시켰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스러우나 이미 몇십년동안의 전쟁으로 이미 나라가 황폐화된지 오래였다. 이렇듯 문관의 문제도 한몫을 했다. 그나마 앞전에 조충이나 김인경 등은 정숙첨이 해임되자 그 공백을 채워 강동성전투를 쉽게 풀었으나 여몽전쟁때 문관들은 조충과 김인경과 비교하면 딴판이었다. 특히나 여몽전쟁 도중 간신 열전에 실린 유일한 인물은 박훤으로 그것도 문관 출신이었고, 여몽전쟁 첫 간신 열전에 실렸는데, 대집성보다 더 간신배였는데, 최우의 공적을 크게 부풀린 인물에 그 책이 무려 대여섯권에 이르렀다. 대장경을 만드는 것을 최우가 했다던가 강화천도 이후에 최우의 실정들을 죄다 미화로 만든 것도 결론적으로 박훤이라는 간신배 덕택에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애초부터 대집성의 경우는 간신열전에 올리려고 했는데, 고려사에서 그냥 병풍 처리해버린 것도 박훤이라는 간신배가 실은 대집성보다 더했다. 신흥창을 세워 지역의 민심을 얻었다곤 하지만 문제는 최우에 빌붙으며 권세를 휘둘렀고, 권신이자 최충헌 다음의 간신배라고 불릴 최우를 망친 장본인도 바로 박훤이었다. 그 신흥창 설립도도 결과적으로 최우가 했던 온갖 민심이반 행위에 대한 면피용이었다. 애초에 최우의 의중을 빨리빨리 알아챘다. 김덕명도 본시 간신 열전에 올랐어야 하나 박훤과는 게임이 안되는 인간이었다. 여몽전쟁 시기 처음으로 간신 열전에 오른 인물이 문관이라는 점을 볼때 비록 한명이긴 하나 그 한명이 타락만봐도 문관들 역시나 문제였다.

아래는 임용한 교수가 여몽전쟁의 참상을 소개하며 당시 고려 조정의 안이한 대책을 비판한 대목이다.

…… 생산자인 농민은 굶주리고, 기생 계급인 귀족들은 호위호식하는 모순이야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는 사유 재산과 계급이 생긴 이래로 지속된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순도 지배층이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척이라도 할 때 봐주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지배층이 지배층이 될 수 있는 첫째 의무는 국방과 국가 운영이다. 그런데 지배층은 요새로 도망치고, 백성들을 향해서는 너희도 알아서 도망치라고 한다. 군대를 자기 백성에게 보내 논과 밭을 불태우고 섬이나 산성으로 강제 이주를 시킨다. 그리고는 곡식이 부족하니 너희는 술도 마시지 말고, 쌀밥도 먹지 말고, 그 쌀을 세금 수송선에 실으라고 말한다.

이것도 몽골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전쟁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착한 백성들은 감내할 수 있다. 귀족들이 좀 더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도 늘 그래왔던 것이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이 든다. 이 이상한 전쟁은 이기기 위한 전략이 없다. 상대가 지쳐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도 훌륭한 전략의 하나이기는 하다. 하지만 원나라는 지치기는 커녕 지금도 확장 일로에 있다.

물론 이런 반론도 가능하다. 그럼 강한 나라에는 무조건 굴복하라는 말이냐?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벗 삼아 벌이는 저항은 위대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땅에서 벌어진 수많은 저항은 맹목적인 것이 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국가의 정책과 저항의 논리는 다르다. 백성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전쟁, 몽골군이 물러난다고 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준다는 보장도 없는 전쟁, 사람들은 점차 궁금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는가?

대몽 항쟁 기간은 몽골군이 최초로 침공한 1231년부터 1259년까지 30여년으로 잡는다. 이 기간 내내 전쟁이 벌어진 것은 아닌데, 몽골군은 한 번 침공하면 평균 6개월 ~ 7개월 정도 돌아다녔으므로 전쟁이 벌어진 기간만 계산하면 11년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몽골과의 30년 전쟁이 과장이라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임진왜란의 경우도 7년 전쟁이지만 일본군이 내륙을 전전한 기간은 첫 해 뿐이다. 더욱이 이 전쟁은 몽골군과 전선을 형성하고 싸운 전쟁이 아니라 몽골군이 고려 땅을 짓밞고 돌아다니는 전쟁이었다. 그들의 탁월한 기동력과 약탈욕을 감안하면 대몽 전쟁은 이 땅에서 벌어진 그 어떤 전쟁보다도 길고 고통스러운 전쟁이었다. 다만 침공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일정한 형식과 주기가 있었기 때문에 강화 정부의 대몽 전략이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정부 측의 이론에 따르면, 일정 기간 동안 피하기만 하면 되었다. 일정기간만! 지배층이 솔선수범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비난하지도 말 것이다. 우리는 항구적으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몇 년에 한 번씩 가을에서 겨울 동안만 피난 생활을 하면 된다. 하지만 이 이론을 한 꺼풀만 넘기면 대몽전략의 추악한 일면이 또다시 드러난다.

그동안 우리 역사책에서는 이 전략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귀족들은 강화에서 편하게 살았지만, 산성과 섬에서 살아야 하는 백성들의 생활은 고통스러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것은 고통의 본질이 아니다. 산성과 섬으로 피난할 수 있는 주민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군현 가까이에 산성은 많다. 아니, 군현마다 가까운 산성이 없는 곳이 없다. 충주의 충주산성, 단양의 적성, 통주의 동림성, 의주의 백마산성 등 우리나라 대부분의 전략 요충이 이런 곳에 있다. 이곳에 군현의 식량을 비축하고, 주민을 잠시 집단 이주시킨다. 좋은 방법이지만 이런 성은 다 길가에 있다. 이곳에서 거주하려면 구주성 전투나 죽주산성 전투처럼 몽골군과의 전투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때 피난의 대상이 된 성은 이런 성이 아니다. 산성에는 군현과 가까운 산성이 있고, 말 그대로 산악 깊숙이 자리잡은 피난용 산성이 있다. 피난용 산성으로 우리가 제일 쉽게 접할 수 있는 성이 설악산의 권금성, 두타산의 두타산성, 월악산의 덕주산성 등이다.

하지만 이런 산성이 없는 고을이 더 많다. 있다 해도 심산유곡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며칠씩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게다가 그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고, 장기간 거주할 식량도 땔감도 없다. 평소에 식량을 비축해 놓을 수도 없으므로 들고 걸어가야 하는데, 옛날에 사람들이 한 번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양은 잘 해야 1주일치가 고작이다. 미리미리 군현의 식량을 옮겨두고 이주를 한다고 해도 이 역시 인근 고을의 일부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이야기다.

섬도 마찬가지다. 남해안과 서해안에 섬이 많은 것 같지만 작은 섬은 몇 백명을 받기도 벅차다. 큰 섬도 내륙의 주민이 한꺼번에 몰리면 감당할 수 없다. 사람들을 수송할 배도 없다. 고려 시대에 대형 전함은 50명 ~ 100여명 정도를 태웠다. 고려 수군은 그런 전함을 100척 ~ 300척 정도 보유했다. 이 배와 작은 배들을 해안 군현에 나누어 할당하고, 민간의 배까지 동원한다고 해도 한 번에 하나를 실어나를 수 있는 인원은 하루에 500명이 채 못 될 것이다. 1만 명의 주민이 좀 더 깊은 섬으로 가려면 20일이 걸린다. 물론 20일 내내 날씨가 좋다는 가정 하에서 그렇다.

결국 이론과 같은 소개 작전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섬이나 산성으로 피하라는 명령은 식량이 떨어진 병사에게 식사를 충분히 한 뒤 기운을 내서 싸우라는 명령과 똑같다. 전형적인 책임 회피 수단에 불과하다.

기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섬에 들어가 장기 거주 하는 사람은 주민 전체가 아니라 관청과 주민 일부와 군대다. 식량을 섬에서 다 조달할 수 없으므로, 세금 걷듯이 외부에서 징발하기도 한다.

김방경이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 몽고군의 침공을 당하자 여러 성의 사람들이 위도(葦島)로 들어가서 방어했다. 섬에는 10여 리쯤 되는 경작이 가능한 평지가 있었지만 조수의 피해를 우려해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방경이 둑을 쌓고 파종하게 하자 백성들이 처음에는 고통으로 여겼으나 가을에 곡식을 많이 수확해 그 덕분에 살아갈 수 있었다. 섬에는 또한 우물이 없어서 항상 육지까지 물을 길으러 가야했는데 그 때 적의 포로가 되는 일이 잦았다. 김방경이 빗물을 모아 두는 저수지를 만들자 그 걱정거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 고려사 김방경 열전

이 기록이 말해주듯 위도는 여러 군현의 사람이 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방파제를 쌓고 개간하기 전까지는 식량도 부족했고, 물은 바깥에서 조달해야 했다. 결국 국가의 행정 기구와 소관 지역의 일부 백성과 군대가 정착한 것이다. 이처럼 관청과 일부 백성, 군대가 주둔하는 섬은 몽골군은 요격하는 군사 기지도 되지만, 국가가 주변 군현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직접적 힘이며, 들어온 백성은 인질이기도 하다.

피난지에서의 장기 거주가 불가능한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먼 섬에 있는 정부에게는 세금을 내고, 가까운 섬에 있는 관청에게는 물자를 조달한다. 막상 몽골군이 닥치면 알아서 잠시 피하는 방법 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도 탁상공론이다. 몽골군의 평균 이동 속도는 하루에 50km다 이것은 평균치고, 단기간에는 하루에 100km 이상도 가능하다. 반경 100km 이내의 몽골군의 이동 상황을 누가 탐지하고, 누가 알려주며, 누가 노인과 어린이를 끌고 식량을 메고, 그들보다 빨리 안전 지대로 달려갈 수 있는가?

피난, 소개 전술, 청야 작전이라는 것도 국가가 제대로 된 방어 전선을 형성하고 방어 거점을 마련해서 전투를 할 때 가능한 이야기다. 몽골군은 이 땅을 자기 땅처럼 돌아다니고, 척후도, 경보장치도, 달아날 수단도 없는 상황에서 몽골군이 오면 그들보다 빨리 몽골군이 오지 못할 곳으로 피난하라는 이야기는, 나는 모르겠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말의 공문서식 표현에 불과하다.

앞에서 한 말을 수정해야겠다. 대몽 항쟁에는 이기기 위한 전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전술 자체가 없다. 그들이 말한 전술이란,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몽골군의 2차 침공부터는 전쟁이 사라진다. 정부군도 없고, 전선도 없고, 하다 못해 조직적인 유격 전술조차 없다. 당시의 기록이 조금만 더 충분하게 남아 있다면 누군가가 이 전쟁을 '전쟁 아닌 전쟁'이라고 기록한 문서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을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말이 아닐까? 기록을 보면 간간히 전투도 있었고, 정부는 끊임없이 장수를 파견하지 않았는가? 맞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투는 지역군이 단독으로 싸운 전투다. 최소한 주변 지역의 병사들이 소집되거나 합동 작전을 펼친 경우조차 없었다.

정부에서 장수를 파견한 경우도 있다. 이때 파견하는 장수의 명칭이 산성 방어 별감, 산성 수호 별감, 방어사 등등이다. 명칭으로 보면 전형적인 유격전 지도 방식 같다. 정부에서 장수를 파견하면 지역군을 조직해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에는 전제가 있다. 몽골군의 1차 침공 때 끝까지 싸운 성은 구주성과 자주성 두 곳 뿐이다. 막상 몽골군이 왔을때 항전 의지를 보이거나 버틸 수 있는 성은 극소수라는 것이다. 이런 형편은 정부 측 사람들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산성수호별감을 파견했다고 해서 이들이 싸우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다. 싸움을 기대한다면 군사 요충에 여러 지역의 병사들을 집결시키는 조직적인 전개가 있어야 한다. 박서의 구주성 전투도 여러 고을의 장수와 병사들이 모여 이루어낸 성과다.

간혹 야별초가 성의 군사를 지휘하여 몽골군을 물리쳤던 사례도 있지만,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의 파견 역시 전투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국가가 행정력과 지배력을 놓지 않으려는 시도다. 전술이 없고, 전쟁은 알아서 하라고 지방민에게 떠넘겼다고 해서 정부 스스로 이를 공포하고 분리 독립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던 몽골군이 이 땅에 들어와 있는 기간보다는 없는 기간이 더 많았다. 정부는 이 평화기(?)에 세금과 주민에 대한 관리권까지 포기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또한 지방군의 조직이 관리되지 않으면 반란이 일어날 위험이 크다. 실제로 전란이 길어지면서 몽골에 투항하는 지역이 늘어났고, 몽골과 접경지대에 있던 군현과 토호들은 아예 몽골의 영토로 귀속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산성보호별감은 일반 행정을 계엄 체제로 바꾼 형태에 불과하다. 그래서 더더욱 백성들은 섬이나 피난용 산성으로 자유롭게 도피할 수도 없었다. 30여년이라는 계엄 기간 동안 백성들은 산성을 쌓고, 유사시에는 성으로 이주하기도 하면서 살아야 했다. 그런 때면 국가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고 거대한 제국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몽골군이 출현하면 백성들은 자신들이 홀로 내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이 관리의 명령에 복종하고, 산성으로 마을로 옮겨다니며 살았던 것은 국가라는 조직의 협력과 지원을 기대했기 때문인데, 그것이 없다. 관리는 먼저 도망가고, 주민들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

누구는 깊은 산 속이나 섬에 들어가서 산다고 하지만 그런 기회란 적고도 희귀하다. 백성들은 삶의 현장에서 혹은 마을과 산성에서 소나기를 만나듯 탐욕스런 몽골군을 만난다.

하지만 강화도로 오면 이 모든 현상이 남의 나라 이야기다. 강도에서는 오늘도 술과 쌀밥이 부족함이 없다. 장마가 아무리 길어도 그들은 의연하다. 나라가 설마 망하기야 하겠는가? 몽골군이 눈에 보이는 곳까지 다가와도 산성의 백성들처럼 도망쳐야 할지 싸워야 할지, 항복한다고 해도 아내와 딸을 빼앗기지 않을지, 노예로 끌려가지는 않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러게 예전부터 말하지 않았는가. 몽골군이 오기 전에 우리처럼 섬이나 깊은 산중의 성으로 피신하라고.

오랑캐 종족이 완악하다지만 어떻게 물을 뛰어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누가 물에 들어가라 명령하겠느냐.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 텐데.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말고 안심하고 단잠이나 자거라. 그들은 응당 저절로 물러가리니 나라가 어찌 갑자기 무너지겠는가. ─ 동국이상국후집 권 5 고율시 89수

이 얼마나 긍정적인 인식인가! 정말 "나라가 무너지기야 하겠는가?"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만 받을 뿐이지.


전쟁과 역사, 임용한 저, pp.157 - 167


고려는 한마디로 국가 체제가 일개 한 가문의 권력 독점으로 완전 마비 + 파괴된 상황에서 최대 국난이라는 악조건에 맞서 28년 간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12.1. 반론[편집]

우선 '최씨 정권은 대몽 항쟁에 있어서 주도적으로 몽골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운 적이 전혀 없었고 그저 강화도에 틀어박혀 항복만 대책 없이 무기한으로 연기했을 뿐'이라는 주장은 과장되었다. 물론 최씨 정권이 국가적 위기상황에도 강화도에서 격구를 일삼고 향락을 누리며 백성들의 원망을 산 것은 사실이며 비판받아 마땅하나, 그들이 아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몽골의 제2차 침입 당시에 최우는 미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버티다가 총 사령관이 살해당한 몽골군이 철수하는 틈을 타 북계 병마사 민희에게 가병 3천을 주어 홍복원을 토벌하고, 홍복원의 식솔들을 사로잡았으며,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그리고 제3차 침입 때는 희경과 명준을 파견해 개주에서 몽골군을 격파했으며, 4년간 버티다가 1238년 겨울에 강화를 제의했고, 1241년 신안공 왕전의 사촌 형인 영녕공 왕준을 왕자로 가장시켜 몽골에 볼모로 보냈다. 그리고 5차 침입 때 고려 왕이 강도를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몽골 사신과 회견했으며, 고려 왕자 안경공 창을 몽골에 보내 항복을 표시했다. 또한 제7차 침입에선 1256년 6월 이천에게 수군 200명을 맡겨서 온수현에 상륙해 몽골군 수십 명을 죽이고 주민들을 구출했으며, 그 해 10월에는 애도에서 몽골군이 애도에 상륙하자 별초군을 출격시켜 몽골군을 모조리 도륙했다.

이에 대해 여몽전쟁 당시 최씨 정권의 작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한참 몽골군이 내지를 초토화 시켜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할 때 손을 놓고 있던 것' 을 비판하며 2차 전쟁 때 몽골 사령관 살리타이를 죽인 것은 최씨 정권의 업적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일반 백성과 스님들이 중심이 된 처인성 전투 덕분이었고 사령관이 죽어 전쟁이 다 끝나는 마당에야 병력을 동원하는 것을 공적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일리가 있는 주장이며, 최씨 정권이 그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도 옳다. 하지만 몽골군이 철수한 뒤 북부의 여러 주현 대부분을 회복하고 몽골에게 투항한 반역자들을 토벌하는 것은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였다. 만약 이 반역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제2의, 제3의 홍복원이 연이어 출현할 것이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지 못해 국력이 날로 쇠약해질 것이다. 따라서 몽골군이 철수한 뒤 후일을 대비해 반역자들을 토벌하고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시의적절한 조치이자 공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수 몇몇을 달랑 보내서 현지에서 알아서 하라는 걸 높게 평가해서도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사실 당시 최씨 정권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당시 고려는 여몽전쟁 초반 안북성 전투로 주력군이 야전에서 대패했기 때문에 몽골군과 제대로 된 야전을 치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뒤 주력군을 강화도에 배치시켜 몽골군의 침입을 저지하는 것을 수세적인 전략을 취했다. 만약 그 좁은 수로만 믿고 병력을 내보냈다가 방어에 구멍이 생겨서 강화도에 몽골군이 상륙하면 그 뒤는 어떡할 것인가? 그리고 당시처럼 혼란스럽고 정부의 장악력이 떨어지는 경우 강화도에서 병력을 차출해 타 지역으로 보냈다가 그 병력을 손에 쥔 사령관이 마음을 달리 먹고 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다. 가뜩이나 수도를 옮긴 뒤 본토 통제가 힘들어지는 상황인데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고려는 내란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당장 무신 정권의 대표인 최씨 정권이야말로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장본인 아닌가? 때도 난세이고 당장 자신들이 일을 벌여도 중앙에서 대응이 상당히 힘든 상황이므로 그들로서는 자신들처럼 무력을 등에 업고 몽골군의 침략을 틈타 반기를 들 자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훗날 조선도 군사력을 손에 쥔 지휘관이 반란을 도모할 것을 대비해 중앙에서 지방으로 사령관을 보내 지방군을 이끌게 하는 '제승방략' 체제를 도입한 바 있다.[27]

또한 '애초부터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의도가 없었다'는 주장은 몽골 측의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몽골 제국은 금, 호라즘 왕국, 서하, 남송, 키예프 공국. 아바스 왕조 등을 잔혹하게 짓밟았고 현지 지배층의 씨를 말린 바 있다. 금나라는 몽골인들에게 가혹한 탄압 정책을 추진해 원한을 샀고 호라즘 왕국은 몽골 상인들을 학살하고 사신들에게 수모를 줬으니 자업자득이라 쳐도 서하와 남송, 키예프 공국, 아바스 왕조는 몽골에게 이렇다 할 원한을 산 적도 없건만 완전히 소멸당했다. 심지어 서하의 경우 칭기즈칸이 자기가 죽은 후 서하 왕과 귀족들이 항복하면 몰살해버리라는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다. 이런 나라가 한 두 차례도 아니고 아홉 차례나 쳐들어온 것은 그 나라를 단순히 속국으로 삼으려고 했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이현이 최항에게 보낸 편지를 근거로 몽골에게 고려를 멸망시킬 의도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몽골 측이 적국인 고려 사신에게 자신들의 속마음을 정직하게 말해줄 리 만무하고 그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도리어 만물의 생명을 사랑하고 아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반도 전체를 피로 물든 몽골군이?

그리고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의사가 없다는 증언을 한 고려 사신 이현은 신용할 수 없는 작자다. 그는 몽골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뒤 1253년 7월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앞잡이가 되어 고려의 약점을 밝히고 이에 대한 계책을 몽골 지휘관에게 알려줬다.

"우리나라 도읍이 섬에 있어서 세금과 공물이 모두 육지에서 나옵니다. 대군이 가을이 되기 전에 들어간다면, 도성 사람들은 세금과 공물을 받지 못해 위급하게 될 겁니다."


몽골군은 이를 받아들여 고려 사람들이 가을 추수를 하기 전에 초토화시키고 강화도를 말려죽이는 작전을 펼쳤다. 게다가 그는 몽골군이 가는 곳마다 따라가면서 항복을 권유했고 몽골군이 천룡산성(충청북도 충주시)를 장악했을 땐 스스로를 달로화적이라 칭하고 주변 주민들을 통제하고 약탈을 벌였다. 특히 이 인간은 은세공품을 매우 좋아해 약탈한 은비녀만 한 상자에 가득찼다고 한다.

그러다가 몽골군이 물러날 무렵, 이현은 고려 조정이 감히 몽골에게 협조한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강화도로 돌아와 계속 관리 노릇을 하려 했다. 그러자 최항은 이현을 곧바로 체포해 그의 아들 5명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처형했다. 이때 백성들은 지나가면서 이현의 시체의 입을 걷어차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 흉악한 놈아! 몇 사람의 은과 비단을 먹어치웠느냐?"


이런 작자가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의도가 없고 평화를 사랑한다고 증언한 걸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신용할 가치가 없는 자의 증언을 믿고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의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몽골군은 황하와 양쯔 강을 건너서 금과 남송을 정벌했고 베트남을 공격할 때는 인도네시아에 함대를 상륙시킨 사실로 봐서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수전을 치르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그보다 훨씬 폭이 좁은 강화도를 공략하지 않은 것은 고려를 멸망시킬 의도가 없었다는 증거라는 주장은 지나친 단순비교이다. 물론 몽골군이 내지에서 살아서 물을 두려워하고 따라서 수전에 약하다는 건 잘못된 시각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몽고군이 황하를 건널 당시, 금나라는 거란족 등 이민족들의 대봉기, 군벌의 난립, 남송의 공격 등으로 사분오열되어버려서 몽고군의 황하 도하를 저지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양쯔강의 경우, 몽고군은 고려 침공보다 몇 배나 많은 수십 만 대군을 동원하여 먼저 사천성을 공략한 후 양쯔강 상류에 대함대를 출격시켜 하류로 진군하면서 양양성을 수 년 동안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별성을 먼저 함락한 끝에 간신히 성을 지키던 여문환의 항복을 받았고, 그 결과 남송은 버티지 못하고 패망했다. 그리고 훗날 몽골군은 인도네시아에 함대를 상륙시켜서 중국에서 내려오는 육군과 함께 베트남을 협공 공격하려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의 강화도는 그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당시 강화도는 지금 우리가 아는 강화도와는 지형이 판이하게 다르다. 당시엔 개간이 덜 되어 있어서 평야가 극히 적었고, 육지와 가까운 곳은 대개 협곡이어서 상륙이 불가능했으며, 그나마 상륙이 가능한 곳은 갯벌이어서 몽골군의 기마들이 지나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리고 강화도 앞바다의 폭이 압록강의 폭과 비슷한 정도이며 몽골군은 이보다 더한 폭의 강들을 손쉽게 건넜다고 주장하는데, 이건 '강'과 '바다'의 차이를 간과한 것이다. 우선 강은 겨울에 얼어붙지만 바다는 얼지 않는다. 그리고 당시 강화도 앞바다의 물살은 매우 거세서 배를 띄우기가 매우 힘들어서 날씨가 안 좋은 경우 보름에서 최대 1달 간 해로가 끊기기까지 할 정도였다. 게다가 고려 정부는 강화도 주변 육지에서 몽골군이 배를 제작하지 못하도록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버렸고, 강화도 주변의 수많은 섬들에 방어 시설을 건설하였으며, 몽골군이 근처에 상륙할 때마다 별초들을 파견해 때려잡았다.

또한 상륙 작전은 그리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역사상 가장 완벽한 상륙 작전이라는 칭송을 받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조차 독일군의 저항으로 연합군은 많은 인명 손실을 치렀다. 그로부터 30년 전에 벌어진 갈리폴리 상륙작전 때는 현대식 상륙 작전의 개념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아 수십 만명에 달하는 장병들이 목숨을 잃고 실패하였다. 하물며 13세기엔 오죽하겠는가? 방어시설에 주둔한 고려군과(그것도 징집병이 아닌 정예병) 수백여 척의 고려 함선들이 지형적 이점을 업고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강화도를 몽골군이 점령하는 것은 의지 부족이 아니라 능력 부족으로 봐야 한다. '몽골이 마음만 먹었다면 물에 익숙한 한족을 동원해서라도 강화도 상륙 작전을 시도하지 않았겠느냐.'라는 주장도 있는데 고려를 침공할 당시 몽골군은 금은 제압했으나 아직 남송을 제대로 제압하지도 못하던 때였으니[28] 물에 익숙한 한족을 구해서 동원하기도 힘든 상황이었고, 설령 일본 정벌 때처럼 억지로 한족을 동원해 강화도를 친다 해도 고려군도 이에 대비하여 성벽을 높이고 해군을 집중시키고 있어서 교두보 확보는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당시에 섬 하나를 공략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힘들다. 비잔티움을 공략하고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든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는 정작 강화도보다도 작은 로도스 섬을 공략하지 못했고 명군으로 칭송받는 슐레이만 1세도 700명 밖에 안되는 구호기사단 수비병이 지키고 있는 로도스 섬에서 수천~2만의 군사들을 잃으며 싸우다가 교섭을 통해 그들이 항복하고 떠나게 함으로서 간신히 로도스 섬을 공략할 수 있었다.[29] 수백 명밖에 안되는 기사단이 지키는 섬 하나를 대제국이 맹공을 퍼부었는데도 이 지경인데, 수만에 달하는 정예 병력과 수백여 척의 함대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고 평지가 별로 없고 육지와 가까운 곳은 죄다 협곡이고 그나마 상륙 지점은 대개 갯벌이라서 기마병이 지나가기가 매우 힘든 강화도는 오죽하겠는가?[30]

그리고 '고려가 몽골의 배후를 노릴 수 있는 남송과 연계하는 외교적 행보라도 취했어야 했는데 고려의 최씨 정권은 단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라는 주장 역시 억지다. 정강의 변 이후, 고려는 남송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금나라에게 신하의 예를 표했다. 남송은 이러한 고려의 태도에 격노했고, 한때는 수군을 보내 고려를 공격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31] 그 후 두 나라는 서로 국교를 단절하고 남남처럼 지낸지 오래였다. 그리고 당시 남송은 타국과의 외교 관계를 사실상 끊고 쇄국 정책을 실시하던 중이었고 몽골의 침략에 맞서는 것만으로도 벅찬 지경이니 고려를 도와줄 여력이 있을 리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사신을 보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몽골이 이를 빌미 삼아 고려를 더욱 심하게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

실질적으로 무신정권이 맺은 유일한 동맹국은 송나라가 아닌 실은 가마쿠라 막부였다. 정치적 형태도 꽤 비슷했고, 최우의 경우는 가마쿠라 막부 즉 지금의 일본과 외교에 진전을 보인 사신에 대해 특별대우를 해줬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삼별초가 지원을 받으려고 했던 곳 역시 가마쿠라 막부였다. 그래서 일본의 현재 역사 교과서에선 무신정권에 대해선 꽤 긍정적인 평을 내린다. 무신정권에서 40년 간 강화에서 몽골군과 싸워 버티고 삼별초가 도중에 일본에 서신까지 보낸 상태에서 반란을 일으킨 덕택에 가마쿠라 막부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전때 태풍과 더불어 이런 시간차 덕택에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격이 되었다. 반대로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에선 무신정권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는데, 일본은 이를 역이용해 이 시절을 미화한다.

또한 고려는 정예군이 강화도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오합지졸들과 백성들만 최전선에 있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졸전만 했을 뿐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당시 고려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1차 침입 때 중앙군이 붕괴되자 최씨 정권은 강화도에서 버티면서 때때로 몽골군과 싸우면서 상황이 안 좋아질 때 몽골에 항복 사절을 보내면서도 공을 세운 이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부락을 현으로 승격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했고, 각지의 고려 지방군은 자신들의 목숨과 주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으며, 민중은 30년간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저항했다. 이런 그들의 투쟁을 단순히 '졸전'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지나친 비하이며 후대 사람들의 허튼 말장난일 뿐이다. 몽골이 고려를 공격할 때는 5만 명을 넘긴 적도 없다지만 세계를 평정한 그 가공할 전투력을 가진 군대 5만명이 한 두 차례도 아니고 아홉 차례나 쳐들어왔고 20만여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끌려갔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그런 그들을 상대로 한 전쟁을 귀주에서 대규모 회전으로 거란군을 섬멸할 때와 단순 비교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무리가 있다. 오히려 비교를 하자면 갈라수-공험진 전투에서 대패를 당한 상황과 비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래서 고려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으로 대응했고 몽골은 그런 고려를 쉽게 이겨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조정이 백성들의 안위는 내팽개치고 졸전이나 일삼았다면 아무리 백성들이 선량하더라도 어째서 30년이나 국가를 위해 싸웠는가? 물론 막바지에 몽골군에게 앞다퉈 항복하는 일이 벌어지긴 하지만, 중세가 아니라 현대의 어느 국가라도 30년이나 지긋지긋한 전쟁이 계속되는데 지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30년 동안이나 저항을 지속했다는 것은 고려 정부가 암울한 상황에서도 그들을 통솔할 최소한의 행정 체계를 놓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술했듯이 실제로 고려사를 보면 조정에서 성공적으로 몽골군을 격퇴한 백성들에게 상을 내리고 고을을 격상시키는 사례가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전쟁 와중에 반란이 몇 차례 일어났지만 고려 정부는 이를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이로 볼때 당시 고려는 30년이나 전쟁을 치르면서 지극히 암울한 상황에 놓였음에도 끝까지 국가 시스템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왕이 끝까지 입조하지 않고 왕의 친척을 왕자라고 속인 부분에 대한 비판을 돌이켜보자. 수 양제가 고구려 영양왕에게 입조를 요구했지만 영양왕이 입조하지 않았고 이에 수 양제는 삼백 만이 넘는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했다. 위 주장의 논리대로라면 영양왕은 입조를 거부해 병란을 초래했으니 비난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대 한국인들 중 영양왕에게 "왜 입조하지 않았냐?"며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가? 춘추 전국 시대 때 초나라 왕이 진나라와 회견하러 갔다가 붙들려 진나라로 끌려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일이 있었고, 구정의 왕이 왕망의 초대를 받고 회견장으로 갔다가 살해당한 일도 있었다. 이렇듯 왕 같은 높은 신분의 사람이 함부로 타국에 갔다가 좋지 못한 꼴을 당한 사례가 역사상에 많이 있어서 왕을 비롯한 국가 최고 권력자들은 함부로 자국을 떠나지 않았다. 사대로 유명한 신라와 조선에서 왕이 직접 중국에 찾아간 예가 있는가 생각해보라. 게다가 상대는 항복한 왕을 죽이고 지배층을 모조리 학살해버리는 몽골이다.[32] 이런 몽골을 어떻게 믿고 고려에서 수천km나 떨어진 곳으로 왕이나 왕자를 보낸단 말인가? 또한 함부로 왕자를 보냈다가 몽골 제국이 그 왕자를 고려의 왕으로 삼아서 내전을 유도한다면, 그 땐 어찌 대처하겠는가?

문관들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려운 것이 알다시피 앞전 강동성 전투때 조충과 김인경은 문관 출신에 지휘관이었는데 홀대받았고, 그로 인해 아버지의 일에 불만을 품은 조숙창이 투항을 했다는 점만 봐도 문관의 홀대도 생각보다 매우 심했다. 무신정변을 일으킨 것은 분명 문관에게 적잖은 책임이 있고, 박훤이 최우에게 붙은 간신이기는 하다. 하지만 박훤을 제외한 나머지 문관들은 일반 열전에 들어있으며 박훤도 최항 형제를 죽이려고 했었다. 애초에 문관이 바깥에 나가 싸우고 군권을 틀어질 경우 전쟁이 특기가 아니라 전사할 가능성이 높고, 조충처럼 승전하더라도 홀대를 받거나 심지어는 숙청당할 위험성이 높았다. 실제로 삼별초의 난때 여러 문관들이 납치를 당해 죽을 뻔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문관들도 꽤 많았다. 더욱이 김방경과 뒤늦게나마 손을 잡아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는데 기여를 했다.

여몽전쟁의 모든 책임을 고려나 최씨 정권에게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런 식이라면 그 어느 누가 왕이든지, 어떤 집단이 권력을 잡았든지 모든 실수와 모든 행동을 꼬투리 잡아서 비난을 할 수 있으며, 누구에게나 트집 잡히지 않을 완전 무결한 존재와 집단이 되어야 한다는 건데 이건 억지이다. 아니면 전쟁초기에 박살난 주력군을 가지고 가망없는 방어전을 하다가 남송처럼 모두 옥쇄하고 장렬하게 국가 멸망을하는 것을 원하는 멸망의 미학이라도 있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그저 말 몇 개로 있어보이는 척을 하고싶은 후대의 일부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듣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어느 누군가들이 원하는 그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서인가?

여몽전쟁을 야기한 세력은 어디까지나 몽골 제국이며, 한반도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세력 역시 몽골 제국이다. 그들은 나중에 고려가 왕자를 보내는 성의를 보여줬음에도 왕의 입조를 요구하며 무분별한 파괴와 학살을 자행했다. 수많은 문화재를 파괴했으며, 수십만 고려인을 포로로 끌고 갔고 백여 년 간 고려 정치에 간섭하고 수탈하였다. 이 모든 몽골의 만행을 "최씨 정권이 대책없이 강화도에 박혀 있던 탓"이라고 간주해버리는 것은 엄연한 침략자인 몽골 제국을 미화하고 고려를 필요 이상으로 비하하는 짓이다. 고려 정부가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여몽전쟁의 발발 원인은 몽골에 있다는 기본 사실과 몽골이 한반도에서 저지른 만행, 그를 저지하려던 고려 백성과 군의 눈물겨운 투쟁의 역사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병자호란에 대한 1차적 책임은 조선이 아니라 물자가 필요하던 청나라며 그들의 몽골 못지 않았던 잔학성을 기억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3. 결과[편집]

이 해에 몽골의 군사에게 사로잡힌 남자와 여자는 무려 20만 6800여 명이다. 살육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다. 몽골군이 지나간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몽골의 병난이 있는 이래 금년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 『고려사』 권24 고종 41년 조


전쟁고려의 강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상당한 인명 손실과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덕분에 현재 몽골 침입 이전의 목조 건물은 아예 없는 상태.[33]

이런 이유로 인해 항복하러 간 훗날 원종이 되는 태자와 고려 사절에게 쿠빌라이 칸당태종도 못한 것을 자신이 해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쿠빌라이는 강력한 제위 경쟁자이자 카라코룸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인 아리크부카의 도전에 맞서기에는 명분상 취약한 상태[34]였는데, 고려는 30여년간의 장기간에 걸친 저항으로 인해 꽤 알려진 지역이었으며, 동시에 만주 지역에서 상당한 위상을 지닌 고구려의 계승 국가였으므로,[35] 고려가 자신에게 항복한 것은 자신이 대칸의 자격이 있다고 선전하기에 매우 충분하고도 합당한 명분이 되었다. 여기에 고려 공략에 동원되던 만주 지역의 동방 3왕가로 대표되는 초원 이남 지역 몽골 귀족들이 쿠빌라이에게 동조하면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대칸으로 즉위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 측면에서도 밀리지 않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공급되던 물자 운송로를 끊어서 결국 아릭 부케를 항복시킬 수 있었다.

원종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쿠빌라이 칸은 이후 원종이 임연에 의해 강제 폐위되자 원종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 왕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곧 짐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천명하며 원종이 복위되고 무신정권을 종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무신 정권이 타파되자 1270년에 고려는 정식으로 개경으로 환도하고 원종이 정식으로 카라코룸의 몽골 황궁에 입조하면서 39년 간의 여몽전쟁은 정식으로 막을 내렸다. 그 이후로 고려는 몽골에 결혼 동맹을 제안하였고[36] 몽골 측에서 받아들여 훗날의 충렬왕이 되는 세자 왕심이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 보르지긴 쿠툴룩켈미시(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면서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이 되었다.[37][38]

몽골 측에서는 속국에 육사(六事)라고 하여 항복할 때 6가지 조건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데 첫 번째가 왕자들을 인질로 보내는 입질(入質)이고 둘째는 해당 국가의 재정을 파악하는 호구 조사, 셋째는 몽골군에 식량과 조부를 바치는 것이고 넷째는 정복 사업에 군사를 제공하는 조군(助軍), 다섯째는 다루가치의 주둔, 여섯째는 몽골군의 물자 보급과 연락을 위한 역참 설치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고려에 제대로 관철된 것은 첫 번째인 입질 하나밖에 없다. 호구 조사와 조세 수납의 경우는 고려 측에서 "고려의 재정은 너무 열악해서 몽골의 재정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된다."고 하면서까지 완강하게 반대하였고 조군의 경우는 일본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 이후로 유명무실해졌다.다루가치 또한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면서 쿠빌라이 칸이 직접 다루가치를 둘 필요가 없다고 하여 사실상 1278년 이후로는 완전히 사라졌다. 역참 설치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 간섭기 속에서 몽골은 고려 국왕을 자신들의 지배 범위 속에 두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관제 개혁, 군사 기구 개혁 등 상부 구조 지배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하부 구조에까지는 철저하게 관철되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이 몽골은 고려의 호구 조사를 실시하지도 못했고 그로 인해 고려의 호구와 군사의 내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또 고려의 경제적 기반인 노비 제도를 개혁하려 했으나 이 역시 고려 측의 완강한 반대로 불발되었다. 따라서 정치사만 놓고 보면 고려는 원나라에 철저하게 종속적이었으나 노비 제도 개혁, 조세, 호구 등 사회 하부 구조에 대한 원나라의 지배는 제한적인 것에 불과했다. 관직 제도와 왕실의 호칭 역시 천자국에서 제후국에 걸맞게 격하되었긴 했지만 그 역시 고려가 유지해 왔던 근본적인 틀이 백지화된 게 아니라 제후국에 걸맞은 것으로 부분 수정되었을 뿐이다.

다만 일본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일본 원정을 위해 몽골 측에서 전진 기지격으로 세웠던 정동행성이 점차 내정 간섭 기구로 변질이 되며 고려를 더욱 옥죄는 계기가 되었고 몽골의 입김에 따라 국왕이 폐위되고 복위되는 이른바 중조 현상도 2번이나 나타났다. 그리고 국왕의 시호에 항상 忠자를 붙여야 했다. 여몽전쟁 이후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우호적이긴 했지만 불평등한 관계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몽전쟁 이후 고려의 영토도 상실되었는데 먼저 1233년에 고려의 역적 홍복원이 귀주를 비롯한 서경 도호 40여 성을 들어다 몽골에 갖다바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몽골은 이 지역을 심양로(瀋陽路)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1258년에 고려의 역적 조휘탁청 등이 화주 일대를 몽골에 갖다 바쳤고 이 땅에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다. 또 1270년에 고려의 역적 최탄과 이연령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 서경의 부, 주, 현, 진 60성을 들어 몽골에다 갖다 바쳤고 그 탓에 자비령에서 고려와 몽골의 국경이 형성되었다. 몽골은 이 지역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39] 마지막으로 삼별초의 난이 평정된 후 1273년에 몽골은 탐라에 탐라 총관부를 설치하여 목마장을 경영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지역들은 몽골이 강제로 빼앗았다기보다는 고려의 역적들이 스스로 갖다 바친 땅들이라고 할 수 있다. 동녕부는 1290년에 반환되었고 탐라 총관부는 1301년에 반환되었으며[40] 쌍성총관부공민왕 때인 1356년에 무력으로 되찾아왔다.[41]

또한 원 간섭기가 이어지면서 원의 세력을 등에 진 이른바 권문 세족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고려 전기부터 있던 문벌 귀족 일부와 무신 집권기에 성장한 가문, 그리고 몽골어 통역관으로 출세하는 등 원나라와의 친선 관계를 통해 새로 등장한 가문으로 구성되었는데, 권문 세족은 막강한 원의 힘을 앞세워 백성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만들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았으며 각종 폐단을 일삼았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고려사나 동국병감과 동국통감 등에서 이 전쟁의 기록을 했다고 하지만 생각만큼 이 당시 참혹했던 전쟁 기록이 구체적이지 않았던 것이 매우 안타깝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의 경우는 난중일기와 징비록, 선조 실록과 선조 수정 실록 등으로 생각만큼 구체적이었던 것과 달리 이 전쟁에서는 이러한 전쟁을 담은 일기나 실록이 생각만큼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때의 일을 누군가가 일기나 사략 형식으로 더 구체적으로 담지 못한게 매우 안타깝기만 하다. 병자호란 즉 조청전쟁의 경우는 여러 일기가 쏟아질만큼 여몽전쟁보단 짦은 전쟁이었지만 여러 일기가 쏟아질 만큼 당시 기록들이 여럿 있다. 이와 관련된 야사록도 여럿 쏟아졌다.

14. 관련 문서[편집]

[1] 병자호란은 3개월여의 기간에 신하국으로 그쳤으나 여몽전쟁은 28~39년의 기간에 걸치고 부마국이 되어 왕족에 이방인의 피가 섞여버리고, 묘호(○조/○종)도 이후로 다시는 쓰지 못하고 충 자 돌림 시호(충○왕)를 이용해야 했다. 대한제국이 망한 뒤에도 묘호는 고종, 순종 등 마지막 군주까지 올릴 수 있었는데...[2] 실은 한국뿐만 아니라 근대 이전 동아시아 국가가 겪은 최악의 난세였다. 송나라는 아예 쓸려나가고, 일본은 근대 이전 외침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시절이다. 러시아도 아예 전 국토가 짓밟혀 도시국가들이 박살났고, 농노제의 근간이 탄생되었으며, 이슬람 국가들도 대다수 몽골에게 정복되거나 큰 피해를 입어 한동안 재기불능이었다.물론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왕조가 승리하며 이집트및 북아프리카 일대의 이슬람권은 보호되었지만.[3] 그래도 동유럽이나 송나라보단 상황이 괜찮았다. 비록 패전했지만 간섭으로 그쳤기 때문. 다른 나라들은 그냥 말 그대로 개털렸다.[4] 대표적인 사신의 깽판으로 신원사에 기록된 포리대완의 일을 들 수 있다. 포리대완은 사신으로 왔을 때 관 앞에서 들어가지 않고 임금이 나와서 맞이하라고 꼬장을 부렸고, 다음 날 왕 앞에서 조서를 직접 임금에게 쥐어줬다.(신원사에 의하면 이때 고려의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고 나온다.) 포리대완의 의도가 어땠던 고려 입장에선 무례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5] 저구유 살해 사건 내막에 금나라가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6] 물론 저구유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몽골이라면 치를 떨던 고려의 민중들은 좋아했다. 하지만 정부에선….[7] 최우 입장에선 사신의 피살로 언제 터질대 모르는 역모를 차단하고, 민중들의 반란을 외부 문제로 돌린 셈이다. 즉 최우가 주도한 암살설도 제기된다. 실제로 최우는 이후 다루가치들을 죽였는데, 이 과정에서 몇명을 놓치는 실수를 범해 다시 재침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보면 권신이었던 최우가 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8] 참고로 이때 몽고의 주력군 10만은 금나라를 향해 진출하고 있었다.[9] 이 때 최우는 천도에 반대하는 반대파들을 죽여버렸다. 대표적으로 김세충이다. 야별초(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은 대표적인 천도 반대파였는데 성을 지킬 수 있다면서도 정작 성을 지킬 계책에 대해 말하지 못해 최우에게 처형된다.[10] '고려의 배반자'로 성문을 열어 몽골군에 협조한 역적이다. 그의 아들 홍다구도 몽골에서 출세하여 고려로 파견와서 김방경을 고문하고 내정에 간섭하는 등 부원배짓을 일삼았다. 부자가 쌍으로 개쌍놈들.[11] 내륙 중의 내륙이자 장난이 아닌 추위를 자랑하는 몽골은 전통적으로 물에 대한 금기가 대단했다. 빨래 안 하는 것은 기본이고(워낙 기후가 건조해서 몸의 분비물이 적다고 한다), 고인 물에 오줌을 누면 사형.(...) 1999년 발간된 '신현덕의 몽골 풍속기' 참조.[12] 이설(異說)이 있다.[13] 이후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되었고 김윤후는 장수가 되었다.[14] 스타크래프트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15] 이때 강화 성벽을 헐라는 몽골의 요구에 송나라 해적들이 강화도를 털어요ㅜㅜ 라며 나중에 하겠다며 박박 우겼다. 점령지에 달로화적(다루가치)을 두고 1만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도 반대했다(...)[출처:] 고려사 열전12권 최유청 중 부 최린 부분[17] 충주성을 지나쳐 근처의 대원령(계립령, 하늘재)를 지나다가 다인철소 천민들의 습격으로 후퇴했다. 이로 인해 다인철소의 천민들은 모두 익안현으로 승격해 일반 백성이 되었다.[18] 여기서 말하는 포차는 투석기다.[19] 고종이 연로하여 목표는 고려 태자의 입조로 낮춰졌다.[20] 임진왜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조선에서 일본군과의 싸움을 주도한 것은 육군, 수군 모두 의병들이 아니라 관군들이었다.[21] 다만 이것은 전부터 이어져온 병력의 사유화가 가장 큰 문제였다. 즉 국가를 최전선에서 지켜야 할 병력들을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는 수단으로 사용해 버렸고, 이것은 결국 고려군의 질적 하락을 가져왔다.[22] 북송의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 병력 수가 30만이었는데 고려 때에는 그보다 2배가 더 늘었다고 적혀 있다. 고려사만 보아도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킬 때 동원한 병력 수가 10만이었고, 여요전쟁강조가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요 성종의 40만 대군을 막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자 강감찬이 20만 대군으로 방어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윤관 장군이 여진 정벌 때 17만 대군을 동원한 기록, 고려 말에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정세운이 20만 대군으로 홍건적을 소탕한 기록들을 보면 고려는 걸핏하면 10만, 20만 이상의 대병력을 동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3] 이 때문에 삼별초의 반란 때 고려 조정은 정규군을 신규 재편성해야 하는 초유의 군사 제도 재건 사태가 벌어진다.[24] 가령 예를 들자면 조선 시대에 해양 세력인 일본이 쳐들어왔을 때 대륙 세력인 명나라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대륙 세력인 몽골의 침략 때는 일본의 막부 혹은 최소한 일본 서부의 지방 영주들과 동맹 교섭을 시도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가 털리면 일본 서부 지역이 다음 타겟이 될 것이 뻔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으니까. 즉, 당시 고려는 남송, 일본의 막부, 지방 영주들 등 교섭의 여지가 있는 대상이 상당히 많았으나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25] 이 부분은 이견이 있을수도 있음. 강화도의 요새로서의 진정한 강점은 해협의 폭이 아니라 육지와 강화도를 잇는 거대한 갯벌 밭이었다. 현대의 강화도는 그 갯벌을 간척해서 여러 섬을 이어 만든 것으로 당시의 모습과 비교할수 없음. 이 뻘밭 때문에 배로 공격할수도 없고 보병이 들어가도 고슴도치 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26] 물론 몽골은 주력 전선을 서쪽과 남쪽으로 잡았기 때문에 고려 공세에 대군을 투입하지 않았다.[27] 사실 이는 고려, 조선뿐 아니라 당시 모든 국가의 딜레마인데 대규모 정예군을 중앙에 배치하면 국경이 취약해지고 반대로 국경에 배치하면 군권을 쥔 장수가 반역을 꾀할 수도 있다. 당나라는 지방 절도사들이 군권을 쥔 후자의 경우였고 때문에 각지 절도사들에 의해 찢겨진 것을 거울삼아 북송은 이를 거울삼아 중앙군을 지나치게 비대화시켰고 결과는 요와 서하에게 시달리다가 정강의 변으로 멸망했다.[28] 위에서 언급한 양양 공성전이 몽골이 마지막으로 고려를 침입한 지 몇 년 후이다.[29] 당시 슐레이만 1세의 오스만군은 8만~11만 5천 명이었고 400여 척의 함선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수비 측은 기사 703명에 주민들을 모두 포함해서 6703명이었다고 한다. (출처 - 위키백과) [30] 수백년 뒤 병자호란 때 너무 어이없이 강화도가 함락당한 것 때문에 이런 잘못된 인식이 형성된 것도 있다. 하지만 병자호란의 졸전은 김경징장신이라는 두 겁쟁이의 도주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31] 황잠선이라는 자가 남송 고종에게 그렇게 주장했다고 한다. 당연히 당시 남송의 상황으로 절대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32] 세계 각지에서 처음부터 싸우지 않고 순순히 항복해버리는 나라는 몽골이 그대로 받아주었지만, 고려는 이미 여러 번 항전 의사를 밝혔기에 이런 경우 몽골은 대체로 가혹하게 정벌하였다.[33] 물론 몽골군이 다 태운 건 아니고 이후에 소실된 건축물들도 꽤 있다. 하지만 황룡사 등 지금 볼 수 없는 건축물의 상당수를 몽골군이 태운 것은 사실이다. 그나마 신라 시대에 제작된 해인사 목조 비로자나불 등의 유물들이 일부라도 남아있는게 다행.[34] 몽케의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몽케조차 혼낼 정도로 그동안 보여준 유목민의 전통에서 동떨어진 행태로 인해 워낙 명분에서 밀려서 몽골 귀족들의 지지가 없다보니 자파만으로는 대칸 선출 회의인 쿠릴타이조차 열 형편이 아니었다.[35] 다만 이에 대해서는 쿠빌라이의 고려 왕조에 대한 교묘한 이간책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려 왕조는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국가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 이전의 삼한(여기서 삼한이란 고려, 후백제, 신라의 후삼국을 의미하지만 넓게 보아서 후기 신라 이래의 고구려, 백제에 대한 '삼한 일통' 의식의 연장이기도 했다)을 통합해 세워진 나라이기도 했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을 자처하는 나라라면 이는 거꾸로 보아서 옛 고구려가 아니었던 백제나 신라, 나아가 제주(탐라)는 지금의 고려 왕조와는 별 상관이 없지 않느냐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으며, 제주 (탐라) 지배에 대한 고려의 권리를 희석시키고 나아가 고려 내부에서의 백제나 신라 옛 지방 세력들의 분리 의식을 획책하려고 했다는 것. 이미 고려 고종 때에 '제주'라는 이름이 있었던 제주도를 굳이 '탐라'라고 옛 이름대로 부르거나 혹은 아예 '백제'라고 부른 것도 제주가 고려와는 애초부터 별개의 존재이자 오래된 독립 왕국이었던 역사를 들춰내면서 그것을 탐라에 대한 고려의 지배권 주장이나 탐라 지배 개입을 차단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다는 것이다.(출처 : 김일우 <고려 시대 탐라사 연구>) 어떻게 생각하면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제1조에 일본이 "조선은 자주 독립국이다"라는 조항을 넣은 것도 전통적으로 중국 왕조에 조공을 바치고 형식적으로 그 신하국임을 자처해 온 조선에 청나라가 개입할 여지를 미리 차단해 두려는(조공을 받는 중국 입장에서는 필요할 경우 조선의 요청에 따라 조선에 지원을 할 의무 비슷한 것이 있었으므로) 일본의 의도가 있었다는 해석과도 비슷하다.[36] 흔히 몽골이 먼저 고려에 왕자들을 몽골에 장가 보내라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사에는 분명히 원종이 먼저 몽골과 사돈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7] 과거에는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는 고려 측에서 최소한의 자주성이라도 보장받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다. 왜냐하면 충렬왕은 칸의 사위가 되는데 몽골에서는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할 때 쿠릴타이라는 회의를 통해서 결정한다. 여기엔 칸의 사위도 참석할 수 있으므로 고려의 발언권을 높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38] 몽골의 부마국의 위치로 자주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국사책과 인터넷의 몽골제국 강역 지도부분에 우리나라는 마치 독립국처럼몽골의 지배영역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나온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고려는 몽골제국의 지배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지도에 몽골제국 강역을 표시를 한다면 몽골제국이 붉은색이면 한반도 지역은 분홍색으로 나타내는게 객관적인 시선이다.)[39] 최탄은 서경유수(西京留守) 최년(崔年), 판관(判官) 유찬(柳粲), 사록(司錄) 조영불(曹英紱), 용주(龍州) 수령 유희량(庾希亮), 영주(靈州) 수령 목덕창(睦德昌), 철주(鐵州) 수령 김정화(金鼎和), 선주(宣州) 수령 김의(金義), 자주(慈州) 수령 김륜(金潤)을 죽였고 그 나머지 각 성의 원리(員吏)들도 다 적에게 살해당했으며 성주(成州) 수령 최군(崔群)은 부하의 손에 죽었다. 김정화의 처는 대경(大卿) 이덕재(李德材)의 딸로, 처음 고을로 들어올 때 그 미색을 뽐내느라 얼굴을 가리지 않았으므로 그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적이 김정화를 기둥에 묶어놓고 보는 앞에서 강간했다. 김의는 사람됨이 굳세었는데 적이 술을 부으라 하니 분을 못이겨 스스로 목매어 자결했다.[40] 그러나 그 뒤에도 실질적인 지배권은 여전히 탐라 현지에서 목장을 관리하던 몽골인 세력들이 쥐고 있었다. 탐라가 완전히 고려에 귀속된 것은 1374년 탐라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을 진압하고 나면서부터의 일이다.[41] 동녕부와 탐라는 반환되고 쌍성 총관부는 반환하지 않아 무력으로 탈환해야 했던 이유를 세조 구제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려의 고유한 풍속을 헤치지 않겠다는 것인데 동녕부와 탐라는 세조 구제를 선포한 이후에 넘어갔지만 쌍성 총관부는 그전에 넘어갔기 때문.[42] 1168년 ~ 1232년. 이규보와 쌍벽을 이룬 문인이자 과거 급제 동기지만 세자 시절부터 고종의 스승이었던 근왕파였다. 이를 바탕으로 재상(첨지정사 參知政事)에 올랐다. 최우의 강화 천도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나 석연찮게 2개월 이후 사망한다. 반면 천도에 적극 찬성한 이규보는 그의 뒤를 이어 재상직에 오른다.[43] 대월 이씨 왕조의 마지막 왕자로, 왕국의 멸망을 피해 고려로 피신한 그 이용상이 맞다. 화산 이씨 족보에 수록되어 있는 화산군 본전과 옹진군 관청에 있었다는 수항문기적비에서 화산군 이용상의 대몽 항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44] 東眞으로 13세기에 있던 국가였다. 금나라 장수였던 포선만노가 세운 국가. 몽골 사신인 저고여 피살 사건의 배후로 추정된다.[45] 정확히는 잔당[46] 여몽전쟁의 단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