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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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국조 · 의조 · 세조 · 대종 · 안종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발해
후삼국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묘호

없음

시호

고려

헌효대왕
(獻孝大王)

충혜왕
(忠惠王)

성씨

왕(王)

고려

정(禎)

몽골식

부다시리
(寶塔失里)

왕비

덕녕공주(德寧公主)[1], 희비(禧妃)

왕자

왕흔(王昕), 왕저(王胝)

부왕

충숙왕

모후

공원왕후(恭元王后)

능호

영릉(永陵)

생몰년도

음력

1315년 1월 18일 ~ 1344년 1월 15일

양력

1315년 2월 22일 ~ 1344년 1월 30일 (28세 총 10570일)

재위 기간

음력

1330년 2월 초하루 임오일 ~ 1332 2월 갑자일 (1년)

양력

재위 기간
(복위 후)

음력

1339년 3월 계미일 ~ 1343년 12월 계축일[2] (4년)

양력


1. 개요2. 시호의 의미3. 생애
3.1. 막장 행보3.2. 폐위와 최후
4. 업적5. 재평가?6. 사냥왕7. 가계도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9. 기타

1. 개요[편집]

연산군봉상왕을 뛰어넘는 한국사 최악의 폭군.

고려의 제28대 국왕.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혜헌효대왕(忠惠獻孝大王). 휘는 정(禎). 몽골식 이름은 부다시리(寶塔失里). 충숙왕공원왕후 홍씨의 장남으로, 공민왕의 형이다.

연산군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면이 있지만 막장성이 그 유명한 연산군과 존속살해범 봉상왕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연산군은 세자 시절에는 '비교적' 평범했을 뿐더러[3] 즉위 초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왕이었던 편이였. 그 이후의 악행에 대하여서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어머니 때문에 비뚤어졌거나[4] 정신이상을 겪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고, 봉상왕은 그냥 의심에 미쳐 광인이 괸 기록이 있지만. 충혜왕은 꼬꼬마 세자 시절부터 막장이었다. 정말이지 답이 없다. 그야말로 막장 원탑.

2. 시호의 의미[편집]

충혜왕이라는 시호는 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다.

'충혜왕'이란 시호가 어째서 붙었냐면, 우선 '충'은 원 간섭기에 재위했던 왕들한테 '니네는 부하니까 우리한테 충성해라'는 의도로 몽골이 내린 글자이고[5], 뒤의 혜 자는 이 왕의 행실상 좋은 시호를 줄 수는 없으니 마지못한 기분으로 은혜 혜(惠) 자를 썼다고 한다.

굳이 충혜왕 뿐만 아니라 한국이든 중국이든 시호에 '은혜 혜' 자가 들어간 군주는 심각하게 무능했거나 싸이코패스였거나 적어도 둘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혜공왕이라든가...진혜제라든가...[6] 사실 충혜왕이 저지른 막장 짓을 보면 해릉양왕을 연상시키는데 대체 왜 시호에 양(煬)이 안 들어갔나 싶을 지경이다.

원래 군주의 시호는 군주가 죽고나서 다음 군주가 짧은 기간 안에 정해서 올리는데 고려사 충혜왕 세가에 따르면 충혜왕은 죽은지 13년이 지나서야 공민왕이 꼴에 자기 형이라고 '헌효대왕' 시호를 줬고 23년이 지나서 1367년에 원이 '충혜왕'이란 시호를 줬다. 즉 워낙에 노답 수준의 행보를 보여 10년이 넘도록 시호가 없었던 것.

3. 생애[편집]

3.1. 막장 행보[편집]

막장 행각으로는 훗날 등장하는 조선연산군조차 한수 접어야 할 정도로 비교 불가 수준의 개막장 군주

성에 관련된 욕구를 주체 못하는 인물이었지만, 사람을 마구 죽이는 유욱 같은 사이코패스 살인마 왕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 빼곤 좋게 봐줄 점이 하나도 없는 성범죄자다.

세자 시절부터 막장끼가 보여 절 지붕 위의 새를 잡는답시고 을 불지르고 튀었다거나[7] 불량배들과 어울려 걸핏하면 여자겁탈하거나 을 즐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부왕인 충숙왕으로부터 "예끼 이놈! 너는 왜 망나니 같은 행실만 하느냐!"라고 욕까지 들은 적이 있다. 이후 즉위식을 치르러 고려로 오다가 마침 원나라로 가던 부왕과 황주에서 마주쳤는데, 화려한 옷차림으로 길 위에서 호례(胡禮), 즉 몽골에서 하던 대로 인사하는 아들에게 "네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디서 나한테 호례를 행하느냐? 그리고 옷은 또 뭐가 그렇게 사치스러우냐?"라고 꾸짖는 충숙왕의 서슬에 놀라서 울며 물러났다고.

아버지 충숙왕도 막장이라 신하의 아내를 뺏고 하는 등의 일로 폐위되었다가 복위된 것과는 달리,[8] 충혜왕은 진짜 정치를 못한다는 이유로 왕 자리에서 잠깐 쫓겨났다가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왕위에 복위된 경우다. 충혜왕은 왕이 되자마자 여색을 지나치게 즐겼고 정사에는 관심없고 내시들과 씨름이나 즐겼으며, 심지어 그가 궁궐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주춧돌 밑에 아이를 묻는다"는 소문이 돌아 민심이 크게 흉흉해졌다.[9]

연산군처럼 여자는 신하의 아내든 뭐든 이쁘면 다라는 식으로 마구 겁탈을 했다. 이 막장 행각이 절정에 달한 때는 장인의 후처와 부왕의 후처(즉, 장모와 새어머니)들을 강간했다.

5월 병인일, 왕이 그 장인인 삼사좌사 홍융의 계실 황씨(黃氏)를 간음했다.
5월 경오일, 왕이 서모인 수비 권씨(權氏)와 정을 통했다.
5월 환관 유성의 처 인씨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왕이 구천우, 강윤충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유성더러 술을 올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유성이 왕에게 "전하께오서는 곧 복위하실 것이니 백성들을 잘 다독거리고 아낌없이 상을 내리소서."라고 진언했다. 왕의 속내가 그 처를 꾀어내는데 있는 것도 모르고, 유성은 왕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다고 착각하여 행동거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몰래 비웃었다.
8월 갑오일, 경화공주(慶華公主)가 왕을 초대해 잔치를 열었는데 술자리가 파했으나 왕이 취한 체하며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날이 저물자 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정을 통했다.


이 인간이 겁탈한 충숙왕의 아내는 2명으로 한 명은 수비 권씨(壽妃權氏), 다른 한 명은 당시 충숙왕의 정비(正妃)격인 위치에 있었던 경화공주(慶華公主)[10][11]였는데 경화공주를 범할 때 모양이 진짜 막장이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주를 위해 향연을 베풀었고 공주도 그 답례로 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가 끝나자 충혜왕은 경화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저항하는 경화공주를 송명리[12] 등의 아랫사람들을 시켜 사지를 묶고 범했다. 연산군은 그래도 계모(성종의 정비 정현왕후 윤씨 등.)를 강간하진 않았다.[13]

또 경화공주가 원통하여 참지 못하고 원나라로 돌아가려고 말을 사려 했는데, 충혜왕이 말 시장을 못 열게 하여 말을 팔지 못하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어 사신을 보내 원나라에 뇌물을 바치고 국새의 반환을 요청했는데 그때 그에게 욕을 본 경화공주의 밀고로 조적 등 심왕 일파가 국새를 영안궁에 감춘 뒤 군사 1,000명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충혜왕은 이를 평정했다(!). 그 뒤 경화공주를 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만호 임숙의 집에 유폐시킨다. 이 개막장짓이 발각된 것은 얼마 후의 일로, 원나라에서 국새를 가지고 온 사신 두린이 경화공주를 알현할 때였다. 두린은 황제가 하사한 술을 경화공주에게 바쳤는데, 경화공주는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수치심에 울기만 했다. 이에 다른 수하들을 모두 물리고 난 후에야 경화공주는 자신이 당한 수치를 두린에게 말하게 되고 두린 일행은 충혜왕을 원으로 압송한다. 충혜왕은 원으로 끌려가 투옥되었다가 자신을 고발한 환관이 실각하자 다시 복위했는데 그의 입지가 원나라에서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배짱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이것 외의 기록들은 링크를 참고하자.#

3.2. 폐위와 최후[편집]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환관 고용보와 기황후의 오빠이자 부원배 노릇을 하던 기철원나라 황제에 청을 넣어, 원나라사신을 파견해 충혜왕을 호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둘이 한국사 탑클래스를 달리는 유명한 간신배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충혜왕의 막장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 사실 간신배라고 해도 어쨌든 국가 통치의 임무를 맡은 만큼,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왕이 그냥 무능하기만 해야지 사람이기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곤란했기 때문. 그러나 의외로 눈치는 빠른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계속 출두를 거부, 결국 원나라 사신은 충혜왕을 속여 그를 정동행성 내로 유인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처음부터 폐위시킬 생각으로 유인한 거니 보자마자 원나라 사신은 왕에게 무엄하게도(?) 발길질을 했고, 환관 고용보는 이를 본체만체하였으며, 원나라 사신의 호위병들은 압송이란 이유로 주위에 칼부림까지 해 사상자가 속출했다.[14] 이날이 1343년 11월 22일(음력) 갑신(甲申)일, 1343년 12월 9일(양력)이었다. 이에 따라 직무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어 왕권이 정지되었다. 시종을 드는 사람이 없어 왕이 직접 짐을 들고 압송되었다.

결국 원나라로 압송되는 도중에도, 지방 수령에게[15] 추워서 이불을 달라고 했는데 그 관리는 "네가 잘못해서 못 주겠다!!"라는 식으로 거절당하는 등 굴욕을 겪는다. 물론 뒤에 그 관리는 처벌을 받게 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 관리를 처벌한 사람이, 원에서 충혜왕을 잡아오라는 명을 받고 고려에 와서 충혜왕을 직접 구타하기까지 했던 타치(朶赤)라는 몽골인이었다. 안균이 그에게 와서 '왕이 폐위된 주제에 자기 잘못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내 이불을 빼앗으려 한다'고 일러바치자, 타치는 "너한테 여기를 다스리게 해준 사람이 누구더냐? 네가 모시는 왕이 추위를 못 견뎌서 이불을 찾는데 네가 주지 않는 게 신하의 도리냐?"라며 쇠자로 초죽음이 되도록 때렸다. 충혜왕 입장에서는 물론 병 주고 약 주고다.

순제는 충혜왕에게 '그대의 죄는 너무나 커서 그대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들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지만(雖以爾血,啖天下之狗,猶爲不足), 짐은 살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귀양을 보낸다'는 식으로 말해서 주눅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즉 시체를 갈갈이 찢어서 온 사방에 흩뿌려도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죄인이라는 뜻이다. 보통 이런 류의 발언은 역성혁명을 하려다 실패한 인물에게나 하는 것인데다, 당시 몽골인들이 땅에 피를 흘리는 처형 방식을 극도로 금기시한 것을 감안한다면 충혜왕의 행동들에 대해 원나라 조정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충혜왕은 티베트귀양간 할아버지 충선왕처럼 원나라에 의해 귀양을 간 2번째 고려 왕이 되었다. 그러나 원나라 내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유배된 거였고 나중에라도 이용 가치가 있었던 충선왕과 달리, 충혜왕은 막장이라서 유배된 거였기에 그는 빨리 죽어줄수록 고려원나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었다. 그 때문인지 게양현(揭陽縣)[16]으로 귀양가는 도중 악양현(岳陽縣)[17]에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비명횡사하였다. 항간에는 을 잘못 먹고 체해 급사했다는 설이 있었으며 일설에는 원나라에 의해 독을 탄 술을 마시고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었다. 갑자기 사망한 걸 보면 원나라에서 손을 쓴 게 확실해 보이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백성들이 기쁨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고.

王傳車疾驅 艱楚萬狀 未至揭陽 薨于岳陽縣。或云遇鴆。或云食橘而殂。國人聞之 莫有悲之者 小民至有欣躍 以爲復見更生之日。初 宮中及道路 歌曰 阿也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至是 人解之曰 岳陽亡故之難 今日去 何時還。
유배지로 데려가는 함거(檻車)가 너무 빨리 달리는 통에 왕은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게양까지 가지 못하고 병자일에 악양현에서 죽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짐독(鴆毒)으로 독살되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을 먹고 죽었다고도 말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지체 낮은 백성들 가운데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기뻐 날뛰는 자까지 있었다. 그에 앞서 민간에 "아야마고지나(阿也麻古之那) 이제 가면 언제 오냐?"라는 참요가 유행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어떤 사람이 이 노래의 앞구절을 "악양망고지난(岳陽亡故之難)"으로 풀이해 "악양에서 죽을 재난을 만났으니 오늘 가면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고려사절요》 권25 충혜왕 갑신 5년(1344년)

 
그의 유해는 먼 타국 땅이 아닌 고려 땅에 묻혔다. 공교롭게도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그 달에 경화공주가 한 많은 삶을 마쳤다.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날을 정확히 알기 어려워 경화공주가 원수가 죽은 꼴은 보고 저승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린 두 아들이 각각 충목왕충정왕으로 즉위하는데, 둘 다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그것이 고려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

여러모로 진정한 막장 군주. 마지막으로 《고려사》에 기록된 사관의 글을 보자.

王性游俠 好酒色 耽于遊畋 荒淫無度 聞人妻妾之美 無親貴賤 皆納之後宮 幾百餘。於財利 分析絲毫 常事經營 群小爭進計畫 奪人土田奴婢 盡屬寶興庫 良馬以充內廐。給布回回家 取其利 令椎牛進肉 日十五斤。新宮之役 張旗設鼓 親登墻督之。宮成 徵漆諸道 丹雘之輸 後期者 徵布倍蓰。吏緣爲姦 百姓愁怨。群小得志 忠直見斥 一有直言者 必加誅戮 人人畏罪 莫敢言者。
왕은 성품이 호협하고 주색을 좋아했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해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으면 친소와 귀천에 관계없이 모조리 후궁으로 들이는 바람에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 또한 재물에 관계되는 것이면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따져 항상 이익을 올리려 하니, 군소배들이 다투어 계략을 올려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켰으며 궁중의 마굿간을 준마로 채웠다. 또 회회(回回) 사람[18]들에게 베를 주고 그에 대한 이자[19]를 챙겼으며 를 도축[20]해 그 고기를 날마다 15근씩 바치게 했다. 새 궁궐을 지을 때에는 깃발을 벌여 놓고 북을 설치한 다음 친히 담에 올라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독려했다. 궁궐이 완성되자 각 도에서 옻칠을 거두어 들였으며, 단청을 올릴 물감을 기한보다 늦게 가져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보다 몇 배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했다.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백성들을 가렴주구했으며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싸였다. 군소배들은 출세하고 충직한 사람들은 쫓겨났으며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면 반드시 사형해버리니, 사람들이 처형당할까 두려워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고려사》 충혜왕 세가 총서

4. 업적[편집]

한국사를 통틀어서 최악 수준의 막장 군주지만 나름대로의 업적은 존재한다. 그 업적이란 장사에 매우 밝아서 고려에서 난 물품의 유통망을 장악하고 실크로드를 통해 온갖 상인들과 거래해서 돈을 번 것. 하지만 업적이라 보기도 사실 뭐한것이 그 장사 밑천은 모두 백성들을 수탈해서 나온 물자들이고, 그렇게 번 돈은 원나라 권력층에 뇌물을 뿌려서 자신의 입지를 지탱하고 여자를 찾아다니는 데 썼으며, 후궁도 무려 100명이 넘게 두었다고 한다.[21]

5. 재평가?[편집]

최근 정치 운영과 개혁 정책을 분석한 결과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하는 53권짜리 한국사 중 『제19권 고려후기 정치경제편』에 역대 충자 돌림 왕들의 개혁 정치 항목을 보면 충혜왕의 경우 정치 운영과 개혁 정책 내용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음행을 일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 운영과 정책 시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 왕은 상업 활동의 진흥과 유통 구조의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했고, 사급전의 혁파 등 토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22] 더불어 각종 세목을 신설해 권력층을 견제하였다.[23] 원의 간섭으로 폐위당한 경험이 있어 악소배를 비롯한 측근 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24] 왕권 강화를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 세력인 기철, 고용보와 대립하게 되었다.

충혜왕의 개혁 시도는 전방위적으로 친원파들을 압박하는 것[25]이었고 고려 정국은 충혜왕파 대 친원파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충혜왕은 고용보 등에 의해 체포당하여 원에 압송되었고 곧 악양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했다. 기철 등 부원 세력은 충혜왕의 왕권 강화로 위축당하자 왕을 체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위기 국면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원으로서도 충혜왕의 개혁 정치가 원나라의 고려 종속 정책에서 일정한 수준 벗어난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충혜왕의 폐위에는 원의 고려에 대한 종속 정책과 부원 세력의 정치적 이해 관계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원은 충목왕 즉위 후 충혜왕 대의 정치를 전면 부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왕의 폐위에 대한 고려 정치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표방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사 제19권 고려후기 정치경제편』


그가 이런 권력을 개인의 폭정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했으면 고려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권문세족을 짓누르고 획득한 재정이나 권력을 백성을 위해서 썼다면 지지가 높았겠지만, 왕과 신흥 세력인 악소배들이 깽판치는데 사용해 버렸으니 백성들 입장에선 왕이나 권문세족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26] 그가 폐위된 것도 결국 자신의 행실로 인한 빌미를 제공한 탓이라고 본다면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다.

그의 이런 성향은 어찌보면 증조할아버지인 충렬왕이나 아버지 충숙왕 같이 시대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충렬왕이나 충숙왕의 경우에도 원나라의 압박이나 권문세족의 견제로 제대로 왕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고 이 왕들의 경우에도 정사를 멀리하고 사냥이나 여색에 빠져드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충혜왕은 어린 시절부터 원에 있으면서 그곳의 퇴폐한 풍속에 빠져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제왕학이나 정치적 자제력을 그에게 교육시켜 줄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는 것. 후대의 왕인 우왕도 어렸을 때부터 권신의 압박 때문에 이런 루트에 빠지는데 그때 큰아버지 충혜왕과 비교되는 건 의미심장한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 과한 행적이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사에 실린 충혜왕에 대한 사신의 논평도 이와 비슷한 논지다.

충혜왕은 영리한 재능을 나쁜 데에 썼으니, 악소배들을 가까이하고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결국 안으로는 부왕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위로는 천자로부터 벌을 받아 죄수의 몸으로 유배가는 도중 객사한 것도 마땅한 일이었다.
오직 늙은 신하 이조년[27]만이 간곡히 충언을 올렸으나 그 말마저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는가?

6. 사냥왕[편집]

재위 원년

정월

임진일

왕이 강음(江陰)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2월

갑인일

왕이 서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무오일

공주의 생일을 맞아 연경궁(延慶宮)에서 잔치를 열었다.

을숙일

왕이 해주(海州)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3월

임인일

왕이 강음(江陰)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4월

신유일

왕이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계미일

왕이 폐행(嬖幸)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해
물놀이와 격구(擊毬)를 구경했다.

신축일

왕이 폐행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하여 물놀이를 구경했다.

6월

기미일

왕이 광덕사(廣德寺)에 행차해 물놀이를 구경했다.

7월

병자일

왕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했다.

8월

병인일

왕이 마제산(馬堤山)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10월

계해일

왕이 도성 서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병인일

왕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했다.

재위 2년

정월

병술일

밤에 왕이 폐인(嬖人) 양선(梁宣), 송명리(宋明理)
등을 데리고 평복 차림으로 몰래 거리를 쏘다녔다.[28]

2월

정미일

왕이 서해도(西海道)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재위 원년 당시 사냥 기록이다. 이게 고려사 충혜왕 원년 기록과 2년째 기록의 전부.[29] 참고로 사냥이라고 해서 그냥 활 하나 쥐어잡고 아무 산이나 가서 짐승 쏴잡는 수준을 생각하며, 그 정도 취미 생활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평민이나 지배 계층이라도 어지간한 집안의 사람이라면 그렇겠지만, 국왕이 사냥을 나가며 경호를 담당할 많은 호위병, 국왕과 신하들과 병사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여러 요리사, 식재료와 사냥 도구 및 기타 비품을 운반할 짐꾼, 사냥터에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경계를 설 경비병, 사냥감을 찾거나 몰아야 하는 몰이꾼 등 최소 수백명의 수행원이 필요하다. 그 많은 인원이 움직이고 숙식하려면 당연히 급료, 물품 등의 경비가 장난아니게 든다. 조선 시대에 그려진 사냥 풍속도를 보면 알겠지만 사냥이란건 사실상 당시의 워크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말인즉 왕이 사냥을 자주 갔다는 것은 그만큼 낭비가 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 중간에 왕 노릇 한 거라곤 4월 경인일에 끌려간 고려 국민들을 돌려달라는 글을 써서 보내기는 했다. 이마저도 돌아와서는 사냥 다닌 기록보다 궁 내에 강간, 살인 등의 기록이 늘어났다. 이건 뭐...

7. 가계도[편집]

  • 1비 덕녕공주(? ~ 1375년)

    • 1남 충목왕 왕흔(1337년 ~ 1348년) (재위 1344년 ~ 1348년)

    • 1녀 장녕공주(長寧公主, ? ~ ?) : 원나라 황족에게 시집갔다가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가 명나라에게 점령되는 혼란의 와중에 실종되었다. 그러자 숙부인 공민왕은 신하들을 시켜 장녕공주를 찾게 했다. 그 후 명나라 태조 홍무제(주원장)가 장녕공주를 찾아 고려로 돌려보냈고, 공민왕은 장녕공주를 그 어머니인 덕녕공주와 살게 했다.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덕녕공주와 살다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 2비 희비 윤씨(禧妃尹氏, ? ~ ?) : 아버지는 윤계종(尹繼宗), 어머니는 여흥 민씨이다. 외사촌동생 민제조선 태종의 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아버지이다.

  • 후궁 은천옹주 임씨(銀川翁主林氏, ? ~ ?) : 충혜왕과 비슷한 성품으로, 충혜왕의 비위를 잘 맞추어 총애를 받았다(마치 연산군장녹수의 관계처럼). 사치가 심했다고 한다. 본래 상인의 딸로 태어나서 충혜왕을 만나기 전에는 사기 그릇을 파는 일을 했기때문에, 사람들이 사기옹주(沙器翁主)라고 비꼬아 불렀다. 충혜왕이 폐위되어 원나라로 끌려간 후 은천옹주도 궁에서 쫓겨났다.

    • 3남 석기(? ~ 1375년) : 부모가 몰락하고 이복형 충정왕이 즉위한 후에 승려가 되라는 명을 받고 여러 을 떠돌았다. 나중에 숙부 공민왕이 즉위하자 역모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는 과정에서 공민왕의 명령으로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는데...놀랍게도 살아남아 결혼까지 하여 아들을 하나 낳고 숨어 살았다. 하지만 다시 조카인 우왕이 즉위한 후에 석기와 그의 아들의 존재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코에이의 원조비사 정발판 시나리오 3에서 충숙왕 자식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정발판 자체가 시대가 뒤틀려서 크게 상관은 없다. 능력치는 방탕하고 무능한 군주였던 것을 반영한 것인지 정치력이 D이고 전반적으로 별로이지만 그래도 왕자라 나중에 충숙왕을 죽이고 동생인 공민왕을 군주로 하는 플레이를 할 때 정복지의 군주로 잘 써먹을 수 있다.

  • SBS 드라마 신의에서 잠시 등장한다. 다만 이 드라마는 퓨전 드라마이고 공민왕 시절이 배경인지라 크게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적이 짧고 굵게 표현된다. 대낮부터 기녀들을 끼고 술판과 춤판을 벌이던 충혜왕은 고려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최전방에서 싸워온 적월대 부대의 유일한 여인인 단백을 발견하고 “어명이니 옷을 남김없이 벗어보라”며 추태를 부렸다. 이를 대장 문치우가 막아서자 충혜왕은 드디어 본심을 드러낸다. “너희들도 똑똑히 봤지? 저것들이 저렇게 방자하다. 백성들이 임금인 나보다 저것들을 더 믿는다 했어!” 외치며 마지막 속옷을 벗지 않는 단백을 향해 칼을 겨눴지만, 문치우가 단백 대신 왕의 칼을 맞았다. 이 일로 문치우는 죽고 단백은 충격으로 자살하며, 문치우의 제자이자 단백의 연인이었던 최영은 삶의 의욕을 잃게 된다.

파일:attachment/충혜왕/취작주인공.png

  • 인터넷에 떠도는 것 중 고려 왕들의 어진을 상상해서 그린 작품들이 있다. 이 중 누가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충혜왕 영정이라고 그려진 그림이 있는데, 왠지 모 야겜의 남자 주인공과 닮았다. 그런데 30살에 죽었는데 심히 늙어보이는 얼굴이다.

9. 기타[편집]

  • 아무래도 막장 이미지가 연산군하고 비슷했는지 이런저런 가상 대담도 존재한다. 그리고 소드마스터 척준경과 함께 온라인에서 화제거리가 되어 유명해진 고려인이다.

  • 대부분의 한국사 교재에서 충혜왕 부분은 거의 나오지 않으며, 한두 교재에서 간단히 '폭정을 한 왕'이라고 나오는 정도. 앞의 충렬왕, 충선왕이나 더 이후의 왕인 공민왕이 많이 나온다. 굳이 충혜왕의 업적을 찾는다면 편민조례추변도감을 설치해 개혁을 시도했다 딱 이 정도 나온다. 이것도 상급자용.

  • 충혜왕 때와 관련된 <고려사>의 기록 중에 우리나라에 만두가 고려 시대에 전래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료가 있는데, 문제는 이 기록이란 게 어떤 사람이 만두가 먹고 싶어 궁중 주방에 침투해 만두를 먹다 걸려 처벌받았다는 기록. 다만 이 때의 만두는 상화라는 것으로, 고기나 야채로 된 속이 들어가는 쟈오쯔(교자)가 아니라 만터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 기황후 속에서 복위 횟수며, 사망 시기며 전부 왕유와 충혜왕이 비슷하여 충혜왕을 기반으로 왕유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1]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4대손. 정순숙의공주(貞順淑儀公主)라고도 한다.[2] 고려사에서는 충혜왕이 사망한 날까지 재위한 것으로 분류한 뒤 유년 칭원법을 적용하여 충혜왕 후5년 기록까지 있지만 충혜왕 후5년에는 왕이 2월에 죽었다는 기록과 사관의 평이 기록되어 있다. 1343년 음력 11월에 재판을 받기 위해 원나라로 끌려갔으며, 1343년 12월 계축일에 게양현으로 유배 판결을 받고 이듬해 초 사망하였다. 여기서는 죄를 지어서 유배가 확정된 시점까지를 재위 기간으로 분류한다.[3] 아버지 성종이 궁내에서 기르던 사슴에게 폭력을 가해 꾸지람을 들었다가 즉위 후 그 사슴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세자 시절 엄격했던 스승을 즉위 후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정사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어도 최소한 충혜왕에 비하면 평범한 수준이다.[4] 그런데, 이미 세자 시절부터 친모인 폐비 윤씨의 존재와, 그녀의 죽음에 대하여 어느정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친모를 둘러싼 궁궐 내부의 기류도 눈치채고 있었다는 걸 암시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즉, 어느날 갑자기 생모의 존재와 최후를 뒤늦게 안 건 아니라는 뜻.[5] 공민왕과 후대는 제외.[6] 다만, 혜공왕은 진혜제나 충혜왕에 비교하는 것이 실례이다. 인성이 안 좋은 것은 당연히 아니고 정치적으로 "무능"했다기보단 "무력"하기에 가깝다. 정권 초기엔 소년군주라 휘둘리며 막 성인이 된 직후에도 섭정을 맡기는 둥의 모습을 보이나 5묘에 자신의 직계인 성덕왕, 경덕왕을 두어 정통성을 입증하고 개혁의지와 함께 무열왕, 문무왕의 정치 계승을 꿈꿨으며 국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연재해나 김지중의 난, 본인의 여성스러운 성격으로 인한 신하들의 공격 등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7] 당시 불교고려국교였다. 국가에서 잘못한 절이나 승려를 처벌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런 거랑은 얘기가 다르니 논외. 애초에 저건 국교 개념이 없는 현대 기준으로도 막장이다.[8] 충숙왕은 1비인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를 칼로 물 베기 끝에 때려(?) 살해한 경력도 있다. 물론 와전되었지만, 충숙왕이 때리긴 때렸고, 복국장공주가 그거 맞고 난 뒤 사망하기는 했는데, 이미 복국장공주는 고려로 시집왔을 때 지병이 악화된 상태였다고. 폐위된 후 망나니 아들 덕택에(?) 다시 보위에 오른다.[9] 하지만 이런 류의 소문은 최충헌 집권시에도 일어났다. 지도자의 폭정에 대한 백성들의 공포의식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10] 성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휘는 백안홀도(바얀 쿠투그)로 알려져 있다.[11] 충숙왕은 복국장공주 사후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와 혼인했는데, 조국장공주도 요절했고, 이후 혼인한 게 경화공주다. 조국장공주와 경화공주와는 복국장공주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혼인한 것이기 때문에(복국장공주와 조국장공주는 원나라 황족이다. 경화공주의 경우, 원래 귀족인데 황족의 양녀가 되어 공주로 책봉된 후 충숙왕과 혼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식으로 표현하자면, 경화공주는 2번째 계비에 해당한다.[12] 이 인간도 간신이었지만 나중에 임시로 고려의 국정을 맡은 원나라의 환관 고용보와의 친분으로 무사했다.[13] 큰어머니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강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사실 여부에 대해 약간 논란이 있다. 정연왕후의 경우 어린시절 자신을 돌봐준 새어머니인데다 어린시절엔 자신의 친어머니에 대한 사실조차 모르고 정연왕후를 친모처럼 따랐다고 한다.[14] 호위하는 근위병들이 있고 압송을 저지하려는 것이 뻔하기 때문에 칼부림이 일어나고 사상자가 속출하는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15] 기록에는 지금의 평안남도 숙주(肅州)의 지방관을 맡고 있던 안균(安鈞)으로 되어 있다.[16]중국 광둥성 지에양시, 원 황족의 유배지로 쓰였던 곳이었다.[17] 현 중국 후난성 웨양시[18] 무슬림을 뜻한다.[19] 참고로 이슬람교에서는 이자를 죄악으로 본다. 수쿠크 참조. 다만, 실물자산의 이자니만큼 꼭 이슬람교에서 죄악시하는 이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단지 수쿠크를 이자라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20] 이슬람식 도축법은 할랄 푸드를 참고. 악행을 열거하는 내용 중에 왜 뜬금없이 소고기 얘기가 나오나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농경 사회에서 고기 먹자고 소를 도축한다는게 어떤 의미인지는 조선시대만 봐도 답이 나온다.[21] 물론 여자를 밝혀도 그래도 최소한의 개념은 있었는지 뒷한 최영도 아무도 안 보는데서 했다고 했다.[22] 고려 후기에 친원파 권문세족이 전국의 땅을 집어먹은 상태에서 왕들은 토지개혁 부문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걸 건드리는 건 기존 권력층한테 "한번 겨루어볼래?"라고 파이트 신청하는 거랑 다를게 없다.[23] 당시 권문세족 농장은 면세 면역이었다.[24] 이 부분이 진짜 독특한건데 우리 역사상 왕권 강화할 때 임협집단을 이용하는 경우는 없다. 보통 기존 권력 집단과 타협 흡수하거나, 시종 공신들을 낙하산으로 투하한 다음 권력을 밀어줘서 거물을 만들거나, 통혼을 통해 처가빽을 만들거나 친가빽을 만들어 동원하지 천한 건달, 조직들을 끌어들여 왕권 강화한 건 충혜왕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한고제와 명 태조 주원장의 사례가 있긴 한데, 그 쪽은 아예 출신이 임협집단이니 같이 시작한 인재들도 그 쪽 출신인 것이었다.[25] 쉽게 말해 기존 친원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과 유통 구조를 탈취하고, 토지를 집어먹는 수단을 없앴으며, 보란듯이 권문세족들에게만 적용되는 세금을 걷는 데다 자기들하고 통혼 같은 걸로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왕이었다. 때마침 친원파들의 음행이 심하다 하니 왕이 그들을 제거할 명분은 충분했다.[26] 물론 어느 정도 그에게 불리한 기록만 남았을 공산도 있지만, 저 재평가 역시 남은 기록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27] 유명 시조 다정가를 지은 그 인물. 이인임의 할아버지.[28] 夜 王率嬖人梁宣宋明理等 微行。쏘다녔다는 건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서 돌아다녔다가 아니라 그냥 놀러 나간 거다.[29] 2년째 기록에는 왕이 끌려가서 잡혀간 후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지만 왕으로써 한 역할은 저게 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