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대장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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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역대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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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경창궁주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정화궁주

충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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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비
정비
조비


齊國大長公主
1259년 7월 19일 ~ 1297년 6월 11일

고려의 제25대 왕 충렬왕의 제1비. 제국대장공주 이외에 원성공주, 제국공주[1]로도 불리는데 장목왕후(莊穆王后)로도 불린다.

1. 개요2. 생애3. 사망4. 제국대장공주가 등장한 작품

1. 개요[편집]

고려 최초의 이방인 왕비[2]
왕 위의 왕비

몽골에 대한 고려의 항복 이후 최초로 맞이한 원나라 공주 출신의 왕비로 유명하다. 참고로 후대의 고려 왕들은 원의 부마로서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긴 했지만, 그 중 진짜 황제의 딸인 공주는 제국대장공주 뿐이다.[3] 다른 공주들은 모두 방계 출신이었으니, 제국대장공주의 권세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원나라 황제인 쿠빌라이 칸후궁 아속진가돈(阿速眞可敦)의 딸로, 증조할아버지는 칭기즈 칸이다. 성은 보르지긴(孛儿支斤, 패아지근), 이름은 쿠틀룩 켈미쉬(忽都魯揭里迷失, 홀도로게리미실)이다.

고려 태자와 원나라 공주의 혼인 이야기는 1269년(원종 10년)에 처음 나타나지만, 이듬해 원나라에 입조한 원종이 혼인을 청하자 세조가 이를 거절하였다. 이후 1271년 왕이 다시 청혼표(請婚表)를 올리고 세조의 허락을 얻었으며, 충렬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인 1274년 5월에 혼인하였다.

제국대장공주와 충렬왕과의 혼인은, 한국 왕실과 몽골 왕실과의 최초의 결혼 사례이다. 충렬왕과의 결혼 후 원성공주(元成公主)로 봉해졌다.

1294년 음력 6월 29일 조카인 원나라 성종으로부터 안평공주(安平公主)에 봉해졌고, 이후 무종 때 제국대장공주로 추봉되었다. 또한 개경에 묘련사(妙蓮寺)를 세워 원찰(願刹)[4]로 삼았는데, 여기에 묘련사 출신의 이권이 개입하는 등 불교를 혹신하여 불사(佛事)에 재정을 낭비함이 많았다고 한다.

2. 생애[편집]

16세 때인 1274년(원종 15년) 음력 5월 11일 원나라에 입조해 있던 39세의 세자 심(諶, 충렬왕)과 혼인하였으며, 그 해 음력 6월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원래 충렬왕은 1260년(원종 원년) 이미 신종의 손자 시안공 왕인의 딸(정화궁주)와 결혼하고 왕씨는 이미 태자비로 책봉된 상태였으나, 왕씨보다 14년이나 늦게 혼인한 제국대장공주가 상국인 원나라공주라는 이유로 제1비의 위치를 차지했다.

제국대장공주는 이 해 음력 10월 충렬왕을 따라서 고려에 들어왔는데, 충렬왕은 원나라 식으로 변발을 하지 않은 신료들을 꾸짖기까지 하였다. 1275년(충렬왕 원년) 제국공주가 거처하는 궁(宮)과 전(殿)을 각각 경(敬)과 원성(元成)이라 하였다. 이밖에 부(府)를 응선(膺善)이라 하고 안동(安東) 경산부(京山府)를 탕목읍(湯沐邑)[5]으로 삼아 관속을 두었다. 그녀는 원성전(元成殿)과 응선부(膺善府)를 중심으로 잣과 인삼, 은, 모시를 원나라의 강남에 수출하였으며, 경기도 광주의 흙을 가져와 강화에서 직접 도자기를 굽도록 하여 질 좋은 도자기를 수출하기도 하는 등 사사로운 경제 활동을 통해 많은 재산을 모았다.

고려원나라부마국이 되면서 그 영향으로 1275년(충렬왕 1년) 고려의 관제는 모두 한 단계 격하된 형태로 개편되었다. 이때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합쳐져 첨의부가 되었고, 중추원은 밀직사로, 어사대는 감찰사로, 이부와 예부가 합쳐져 전리사가 되었다.

제국대장공주는 고려로 시집오면서 원나라에서 자신의 시종들을 그대로 데리고 왔는데, 이들은 고려에 들어온 후에도 계속해서 몽고 풍습을 유지하면서 고려에 몽고 풍습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밖에 연회를 즐기기를 좋아하였는데, 제국공주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연회를 즐기는 경우가 있었다. 또 제국공주와 친분이 있으면 큰 죄를 지어도 금방 풀려나곤 하였다. 조인규는 국가 재물을 횡령하고 죄 없는 사람을 무고했음에도 단지 제국공주와 친분이 있어 귀양에서 금방 풀려나고, 훗날 감찰대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가끔은 왕비다운 행동을 할 때도 있었다. 즉, 잦은 사냥을 나가며 국고를 낭비하고 민폐를 끼치던 충렬왕에게 사냥을 중지하고 국사에 힘쓸 것을 간하는 등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으며, 성격도 매우 엄하고 밝아 자신의 측근들 중 잘못을 하는 자가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혼인 다음해인 1275년(충렬왕 원년) 음력 9월 30일 사판궁(沙坂宮)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훗날의 충선왕이다. 그녀는 2남 1녀를 낳았지만 대부분이 요절해, 성년이 된 건 장남인 충선왕 뿐이다. 이 해 음력 12월, 제국공주가 아들을 낳은 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이 연회에서 충렬왕은 명령을 내려 제국공주와 정화궁주의 자리가 같은 위치에 놓이게 했는데, 제국공주는 이를 자신과 정화궁주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분노하여 결국 정화궁주의 자리를 옮기게 만들었다. 잠시 후 정화궁주가 무릎을 꿇고 제국공주에게 술잔을 올리자 충렬왕이 돌아보면서 눈짓을 하였는데, 제국공주는 이를 두고 "어째서 나를 흘겨보십니까? 정화궁주가 나에게 꿇어 앉아 그러는 것입니까?"라며 쏘아붙여서 연회가 곧바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다른 자리도 아니고 기껏 왕자를 낳고 자신을 위해 열린 연회에서 자신보다 지위도 낮은 전 여자랑 같은 위치에 앉게 한다면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충렬왕이 이 때 매를 많이 적립한 듯.

1276년(충렬왕 2년) 음력 5월에는 충렬왕과 제국공주가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그런데 제국공주가 흥왕사에 있는 금탑을 궁내로 뺏어오고, 그 금탑의 장식은 제국공주를 따라 고려로 들어왔던 시종 홀라대(忽刺歹), 삼가(三哥)이 훔쳐가는 일이 있었다. 제국공주는 원래 이것을 해체하여 사적으로 쓰고자 했는데, 충렬왕이 이를 못하게 했지만 제국공주가 말을 듣지 않자 충렬왕이 울었다.(...)[6] 얼마 후 충렬왕과 제국공주가 다시 흥왕사에 흥차하였는데, 흥왕사의 승려들이 금탑을 돌려달라고 애걸하였지만 제국공주는 이를 거부하였다.

같은 해 음력 12월에는 어떤 이가 당시 고려에 다루가치로 와 있던 석말천구(石抹天衢)의 관사에 한 익명서를 투입하는 일이 있었다. 익명서를 투입한 자는 익명서를 투입한 후 곧 "옷이 있거든 입고 밥이 있거든 먹어 다른 이의 소득이 되게 하지 말라."고 외쳤다. 익명서가 투입된 다음날 석말천구가 이러한 사실을 충렬왕과 제국공주에게 고하였는데, 그 익명서에는 "정화궁주가 왕의 총애를 잃자 여자 무당을 시켜 제국공주를 저주하게 하고 있다. 또 제안공을 비롯한 43명이 불궤한 짓을 도모하여 다시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한다." 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분개한 제국공주는 정화궁주를 나장(螺匠)에 가두고 그녀의 부고를 봉쇄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유경(柳璥)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 제국공주가 감동하고 깨닫는 것이 있어서 정화궁주 등을 모두 석방시켰다.

1277년(충렬왕 3년) 음력 7월에는 충렬왕과 제국공주가 천효사(天孝寺)에 갔는데, 제국공주가 시종들이 적다며 도로 돌아오는 바람에 충렬왕도 돌아와야 했다. 이때 제국공주는 충렬왕을 지팡이로 구타하였고, 제국공주의 화가 조금 풀려 다시 천효사에 갔는데, 이때는 충렬왕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며 또 충렬왕에게 욕을 하고 때리기도 하였다.

같은 해 음력 7월 29일에는 원종의 제2비인 경창궁주와 그 아들 순안공 왕종이 저주를 행한다는 무고가 올라왔다. 당시 저주의 내용은 경창궁주가 자신의 아들 순안공이 제국공주에게 장가들어 왕위에 오르려 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충렬왕은 대신들을 시켜 경창궁주를 국문하고 순안공에 대해서는 친국까지 하였으나, 대신들이 경창궁주 모자를 용서하기를 청하여 충렬왕은 이들의 재산을 적몰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도 대신들이 재산의 적몰 또한 상국인 원나라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 방침대로 하기로 하였으나, 제국공주가 이러한 절차를 생략하고 재산을 적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이들의 재산은 제국공주에게 몰수되었다.[7] 이후 원나라의 지시에 의해 1277년(충렬왕 3년) 음력 9월 16일 경창궁주가 폐위되어 서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였고, 순안공은 구음도(仇音島)라는 섬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한편 1281년(충렬왕 7년) 음력 3월 20일 원 세조가 충렬왕을 부마국왕(駙馬國王)으로 정식 책봉하였다.

1282년(충렬왕 8년) 음력 8월에는 원 세조충렬왕에게 옛 송나라의 의관인 연덕신(鍊德新)을 하사하였는데, 연덕신이 정력이 강해지는 약인 조양환(助陽丸)을 만들어 바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고려의 천문가인 오윤부(伍允孚)가 '이 약은 왕의 몸에 좋지 못하니, 삼한의 자손을 번성하지 못하게 할 사람은 바로 이 자다.'라고 하였고, 정말 충렬왕이 그 약을 먹은 후 결혼 초 해마다 태기를 보이던 제국공주는 다시는 임신을 하지 못하였다.

한편 오윤부는 충렬왕이 태묘에 새로운 신위를 모시면서 이에 제사를 지낼 때, 제국공주가 함께 제사에 참여하겠다는 것을 "태묘는 조상의 신령이 있는 곳"이라고 주장하여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제국공주가 새 궁궐의 신축 공사를 벌이자 하늘에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음을 들어, 제국공주에게 궁궐 공사를 중단하고 덕을 닦을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제국공주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다시 궁궐 신축을 벌이는데, 이때 제국공주는 오윤부에게 택일을 명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여 삭탈관직을 당하였다.

1296년, 원나라에 가 있던 아들 충선왕쿠빌라이 칸의 증손녀 계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

3. 사망[편집]

1297년(충렬왕 23년) 제국공주는 수강궁 향각에 있으면서 시종에게 활짝 핀 작약을 하나 꺾어오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이 작약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고 흐느끼더니, 얼마 후인 음력 5월 9일 병이 들었다. 3일 후인 음력 5월 12일 충렬왕과 제국공주는 현성사(賢聖寺)에 행차하였는데, 제국공주는 음력 5월 21일 현성사에서 3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능은 고릉(高陵)이며, 같은 해 9월에 장목인명왕후(莊穆仁明王后)의 시호를, 이어 정민장선인명태후(貞敏莊宣仁明太后)의 시호를 받았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 음력 8월 14일에는 아들 충선왕에 의해 인명태후(仁明太后)로 추존되었다. 한편 1310년(충선왕 2년) 충선왕과 친분이 있는 인물이며, 그녀에겐 조카 손자가 되는 원무종 카이샨이 그녀를 황고 제국대장공주(皇姑 齊國大長公主)에 추봉하였고, 이 해 음력 9월 충렬왕과 함께 태묘에 부묘되었다.

제국공주가 사망하고 약 2달이 지난 1297년(충렬왕 23년) 음력 7월 27일, 충선왕은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 것은 임금의 총애를 투기하는 자들의 소치"라 하여 충렬왕후궁 무비(無比)를 살해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가둔 후, 예쁜 과부 하나(훗날의 숙창원비)를 충렬왕에게 바쳤다. 충격을 받은 충렬왕은 충선왕에게 양위하고 태상왕으로 물러나게 된다. 무덤이 있다면 공민왕에 의해 파헤쳐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있으나 제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의 증조할머니다. 아무리 공민왕이 몽골을 극혐하지만 증조할머니의 묘를 파해쳤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4. 제국대장공주가 등장한 작품[편집]

  • 2017년 MBC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 배우 : 장영남 (작중 이름 표기는 원성공주)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원래 이름인 보르지긴 쿠투그 베키(Borjigin Khutugh Beki)로 표기되며 1238년 ~ 1303년 사이로 연도를 맞추면 등장한다. steamapps/common/Crusader Kings II/history/mongol.txt에서도 Daughter of Kublai Khan, mother of Chungseon of Korea이라는 추가 설명이 붙어 있다.


[1] '대장공주'는 왕의 고모, 즉 (아들에서 아들로 대가 이어졌다면) 2대 전의 왕의 딸을 의미한다.[2] 진실이 불분명하나 허황옥도 일단 기록상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전해지므로 한반도 최초는 아님[3] 계국대장공주의 아버지는 사후에 황제로 추존되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계국대장공주 사후 남동생인 예순테무르가 황제로 즉위한 후의 일이었다.[4] 창건주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특별히 건립하는 [5] 탕목이란 목욕물 데우는데 쓰는 땔감을 말하는데 결국 목욕하는데 드는 비용을 말한다. 중국에선 왕이나 세력가의 딸이 시집갈 때 목욕비에 보태 쓰라는 명목으로 한 재산 두둑히 떼어주었다. 물론 목욕 비용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이고 실제로는 품위 유지비 또는 비자금 성격의 재산이었다. 고려에서도 제국공주의 품위 유지비나 비자금 용도로 경상북도 안동 및 그 일대를 탕목읍, 즉 목욕 비용 충당하기 위한 지역으로 제국대장공주의 사유지 비슷하게 삼았고, 이재에 밝았던 제국대장공주는 자기 탕목읍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6] 충렬왕이 못 하게 하자 공주가 울었다는 해석도 있는데 잘못된 내용이다. 울었던 사람은 분명히 공주가 아니라 왕이다.[7] 그래서 이 저주 사건이 제국공주 쪽에서 꾸민 음모라는 소문이 돌았다. 즉, 재물 욕심 많은 공주가 경창궁주 모자의 재산을 노리고 사건을 꾸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