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종(고려)

최근 수정 시각:

묘호

의종(毅宗)

시호

강과장효대왕
(剛果莊孝大王)

능묘

희릉(禧陵)

왕(王)

철(徹)(어릴 적 이름)/현(晛)

일승(日升)

절일

하청절(河淸節)

왕후

장경왕후(莊敬王后), 장선왕후(莊宣王后)

부왕

고려 인종

모후

공예왕후(恭睿王后)

생몰년도

음력

1127년 4월 11일 ~ 1173년 10월 1일

양력

1127년 5월 23일 ~ 1173년 11월 7일
(만 46세 5개월)

재위기간

음력

1146년 2월 28일 ~ 1170년 9월 기묘일

양력

1146년 4월 10일 ~ 1170년 10월 13일
(만 24년 6개월)


1. 소개2. 생애
2.1. 태자 시절2.2. 실패한 개혁가?2.3. 비참한 최후
3. 평가4. 트라비아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소개[편집]

고려가 본격적으로 막장화된 계기를 만든 암군 중의 암군.[1]

고려의 제18대 국왕. 묘호는 의종(毅宗), 시호는 강과장효대왕(剛果莊孝大王). 휘는 현(晛). 자는 일승(日升). 인종의 장남이다.

2. 생애[편집]

2.1. 태자 시절[편집]

의종이 태자로 있을 때 국왕(인종)은 태자가 장차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왕후 임씨도 둘째 아들 왕경(王暻)을 사랑해 그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태자(훗날 의종)의 스승 정습명(鄭襲明)이 충성으로 태자를 가르치고 보호해 폐위되지 않았다.

- 『고려사』 권96 정습명 열전


어릴 때부터 놀기를 좋아하여 부모가 걱정했다. 의종의 모후 공예왕후 임씨는 차남 대령후 왕경을 총애하여 인종에게 태자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인종은 반대했으나, 태자를 바꾸려고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당대에 강직한 신하로 이름이 높았던 정습명[2]의 만류로 그대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양녕대군 왕위 계승 성공판 그러나 왕위에 오르고도 정습명은 의종이 풍류를 즐기는 것을 간언하다가 의종의 미움을 사고 결국 1151년, 향년 57세로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 혹은 홧병으로 죽고 말았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의종의 미움을 사 버림을 받고 죽었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

이것에 반론을 하자면 공예왕후도 정상적인 왕비가 아닌 게, 애초부터 해몽으로 뽑힌 왕비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대령후를 밀어 후사문제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정작 무신정권이 터지자 대령후보단 이후 명종을 찾았고 의종 때도 의종이 크게 울어재끼니 그제서야 대령후를 찾지 않고 의종을 찾았다. 그의 외척 임원후는 왕 가까이에 올라가 일방적 신임을 받고 각종 특혜를 받자 이에 문신들의 엄청난 비난이 쏟았졌다. 실제로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임원후는 빠질 정도로 김부식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헌애왕후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이자겸의 횡포를 보고도 여전히 외척과 왕비의 권력도 드높았다.

젊은 시절부터 놀자판의 기질이 있다고 고려사에 기록은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사람 자체만 보면 대단한 엄친아암군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백하팔인급의 인물은 아니다. 의종은 힘이 세서 강궁을 잘 다루었고 방 안에 촛불을 켜 놓고 활시위를 당겨 촛불을 꺼버리는 묘기를 선보인 기록도 남아있다. 또한 기마술과 격구에도 두루 능했던 무인형 군주였으며 수박희라는 일종의 격투기를 좋아하여 무인들의 수박희 경기를 자주 즐겨 감상했다. 그리고 풍류를 즐긴 군주답게 음악과 시문 등 예술적 감각도 뛰어났다. 비슷한 예술가 타입 군주였던 공민왕이 무예에는 그다지 소질을 보이지 못했고, 오히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에게 말 타는 법을 배우기 이전에는 말을 탈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듯 의종은 무예에도 뛰어났다. 연산군 순한 맛 이 사람이 생각난다

2.2. 실패한 개혁가?[편집]

즉위 초 의종은 인종 시대의 잦은 내란으로 인해 실추된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는데 권력을 휘두르는 문벌귀족들의 견제를 위해 환관과 측근 세력을 양성했으며 특히 무신들을 중용하여 이 때 무신정변의 주역들로 유명한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같은 이들이 발탁되었다. 재위 직후 불교·음양설·선풍(仙風)을 중요시하고 유교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 전형적인 중국형(?) 반관료 암군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1154년 창건한 중흥사, 1158년 연백주(백주)에 창건한 중흥궁은 고려 왕실을 중흥(重興)하겠다는 의종의 의지가 드러난다는 평가도 있으나 이 역시 왕실의 재력을 바탕으로 추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러한 의종의 시도는 실세 권력을 잡고 있던 김부식 일파를 중심으로 한 당대의 세력가였던 문벌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종전대로 문신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무신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또한 이들과 문신들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인종 시대에 잔치 중 용춤을 추던 정중부의 수염을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중이 태워먹었다는 일화가 유명한데, 이 장면도 이러한 당시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가기 위해 오문(五門) 앞에 도착했다.… 왕은 무신들이 실망하지 않게 위로하기 위해 수박희(手搏戱)를 하게 했다. 내시 한뢰(韓賴)는 (왕을 호위하는) 무신들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다. 마침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희를 하다 힘이 부쳐 달아나자, 그의 뺨을 치고 비웃었다. 내시 임종식·이복기 등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정중부 등은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이렇게 욕을 보이는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왕이 정중부를 달랬다.

- 『고려사』 권128 정중부 열전


또한 무신 정변 당일에는 종5품의 젊은 문신이었던 기거주 한뢰가 종3품이 되는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일이 있었을 정도. 종3품이면 고려시대 무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이니, 현대로 치자면 웬 중앙정부 외청 산하 인재개발원 과장 나부랭이가 공식석상에서 합참 수뇌부 인사의 싸대기를 날렸는데, 주변 공무원들 모두가 별 대수롭지 않은 일마냥 웃고 넘기려는 상황을 생각하면 비슷한 분위기가 된다. 이는 그 당시 무신들이 문신들에 비해 얼마나 홀대받고 있었는지를 나타낸다. 흔히 이 사건이 무신정변의 원인이라고들 하는데, 이 사건과 정변은 같은 날에 일어났으므로 원인이 될 수 없다. 정변 자체는 이 일과 상관없이 사전에 왕이 보현원에 가면 결행하기로 모의된 것으로 이 일이 없었어도 일어났을 일이다. 다만 정변 후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던 한뢰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은 이 일이 원인으로 보인다.

결국 말년에는 문신들 및 환관들과 어울려 항락과 사치를 즐겨 백성들이 왕을 원망하기도 했다. 머리카락 잘라 팔아서 공사판에서 일하는 남편과 동료들의 점심을 마련한 여인 이야기의 배경이 바로 의종 시대다. 이 이야기 또한 당시 백성들의 삶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건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의종 21년 3월조에 나와 있는 이야기로 중미정이라는 정자를 지을 때 실린 이야기다. 잦은 연회로 국고가 탕진되어 인종 때까지 그럭저럭 유지되던 고려의 태평성대가 무너지게 되었다.

2.3. 비참한 최후[편집]

밤이 되어 왕의 수레가 보현원에 도착했다. 이고·이의방은 왕의 명령을 가짜로 만들어 (친위군사인) 순검군을 집합시켰다. 왕이 숙소에 들어가자, 이들은 임종식·이복기·한뢰 등을 죽였다. 왕을 호위한 관료들과 환관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정중부는 왕을 개경으로 돌려보냈다.

- 『고려사』 권19 의종 24년(1170) 8월


결국 이러던 중 마침내 1170년 음력 8월, 의종은 보현원에 행차했는데, 이때 그 동안 문신 우대 정책에 불만을 품은 무인 이고, 이의방, 정중부 등은 문신들을 싸그리 몰살시켰다. 이 때 제거된 문신의 수는 대략 50여명이었다고 한다. 한편 무신들이 문신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는 동안 우리의 왕 의종은 뭘 하고 있었느냐면, 그 살육의 현장에서 정작 의종 본인은 태연하게 평소처럼 술에 취해서 악사들의 음악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고 한다.[3]

그리고 무신들은 개경에 입성한다. 무신들은 입성 후 바로 의종을 폐위시키진 않는다. 그러나 의종이 총애하던 환관[4] 정변 시작 3일 후 왕광취를 비롯한 환관세력들이 반 무신정변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제압하고, 이 배후에 의종이 있다 생각해 의종을 폐위시키고 동생 명종을 옹립하여 고려의 정국을 장악했다. 이것이 바로 무신정권의 시작으로 무신 집권기는 1270년 마지막 실권자 임유무가 살해되기까지 정확히 100년간 지속되었다.

쫓겨난 의종은 거제도에 유폐되었다. 1173년, 무인 정권에 반발하며 의종의 복위를 꾀한 김보당의 난이 일어났으나 이의민에게 진압되고, 이 때문에 계림[5]으로 또다시 옮겨져 유폐되었다. 원래 의종은 거제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경주 지역을 거점으로 벌어져서 동경의 난이라고 불린 김보당의 난 동안 경주로 옮겨온 거다. 즉, 직접 가담. 김보당의 난이 실패하자 동경은 경주로 격하되었고, 의종은 그대로 유폐되었다. 그 뒤 곧 찾아온 이의민에게 글자 그대로 끔살페이탈리티당했다. 향년 47세. 얼마나 끔찍하게 죽었는지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이러하다.

"전왕을 끌어내서 곤원사의 북쪽 못가에 이르러 술 두어 잔을 드리고, 의민이 등뼈를 부러뜨리니 손대는 대로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의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 박존위[6]가 담요로 싸고 2개의 가마솥을 마주 합하여 그 속에 넣어 못 속에 던졌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티끌과 모래가 날아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고 떠들며 흩어졌다. 절의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자가 있어서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렸다."

아마 기록으로만 미뤄 보면 고려사 아니 한국사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7] 공민왕과 더불어 가장 참혹하게 살해당한 임금 중 한 명일 것이다. 이의민의 등뼈 꺾기에 온몸의 가 부러져 죽었고, 그 시체를 담요로 감싸고 가마솥 2개를 합쳐서 연못 속으로 시체는 버렸다는 소리. 후덜덜스님에게까지 외면받는 불쌍한 클라스 하고는 반대로 말하자면 상당한 용력을 가지고 있던 무장급 의종을 접어서 죽인 이의민이 어느 정도의 인간흉기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천민 출신인 이의민을 무신으로 발탁하여 출세시킨 것은 바로 의종 자신이었다. 그나마 전 부호장(副戶長) 필인(弼仁)이라는 사람이 시신을 수습해 관을 짜서 물가에 묻어 주었고, 친동생인 명종이 그를 희릉(禧陵)에 안장하였다.


의종에게는 1남 3녀가 있었다. 외아들이자 태자였던 효령태자 왕홍[8]은 유배되었다가 의종 시해 후에 어떻게 됐는지 기록이 없는데, 정황상 피살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절요에는 금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 사신이 김돈중의 관상을 봐 주었다는 말을 듣고 의종이 자신의 관상도 봐 달라고 하면서 수명을 물었는데, 사신은 "왕께서는 수명이 셀 수 없을만큼 길고 기셔서, 조정의 노소 신료들 다 죽고 난 뒤에야 임천지환[任川之患]이 생길 듯 합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결국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가 되어버렸다.

3. 평가[편집]

의종은 환관 무리와 놀러 다니는 일로 날을 보내어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국정은 어지럽고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문신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고, 무신을 혹사하고 천대한 결과 마침내 무신의 대란(大亂)을 도발케 했다.
- 김상기, 『고려시대사』

사신(史臣) 유승단(兪升旦)이 말한다. "불행하게도 의종은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들을 좌우에 두고 재를 올리고 기도하는데 재물을 기울여 탕진했다. 정치에 쏟아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酒色)에 빠져, 풍월을 읊는 것으로 정치를 대신했다. 이로써 점차 무신의 노여움이 쌓여 화(禍: 정변)가 일어났다."

- 『고려사절요』 권11 의종 24년 8월 사평(史評)


흔히 이렇듯 항락에만 몰두하다가 자신도 비참한 운명을 맞았고 무신 정변으로 고려의 혼란을 초래한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다가 험한 난관에 부딪혀 좌절하고 만 비운의 군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 문종 이후의 왕들이 괜찮은 주변 여건에다 내부적으로 안정기라서 대체로 명군 소리까지 듣는 것에 비해서, 의종은 무신 정권의 시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역사와 당시 상황을 기록하는 문신들에게 최악의 평가를 받은 측면도 있다.

사실 비운의 군주 소리를 듣기엔 25년이란 재위 기간은 결코 짧은 것도 아니다. 고려 왕조의 평균 재위기간이 유독 짧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의종은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보다 훨씬 오래 살았고 또 오래 재위했다. 되려 이런 자기 정치 길게 한 임금이 정변에 그렇게 무방비 했다니 그렇기에 그 긴 재위 기간은 분명히 재평가받을 여지는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무신 집권과 고려의 국정 혼란을 초래한 책임은 피할 수 없는 인물로, 특히 무신 집권기 이후 몽골의 침입 때까지 고려가 개판으로 돌아가는데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해 버렸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들다.

4. 트라비아[편집]

초하루 임자일. 왕이 대관전(大觀殿)에서 신년 하례를 받고는 친히 신료가 올리는 하례의 표문을 지어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해 정월이 돌아오니 만물이 새로우며 궁전에 봄이 돌아오니 용안에는 기쁨이 가득하나이다. 우주의 이치를 체득하시어 은혜를 널리 펴시고 모든 복록을 한 몸에 모으사 조화를 크게 만드시니 이야말로 성인의 도가 길이 이어나갈 시초이자 만물을 생장하게 하는 기운이 퍼지는 처음이로소이다.
공손히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요(堯)임금의 성스러운 밝음과 순(舜)임금의 지혜로운 총명을 한 몸에 지니셨으니, 온갖 복록이 모여들어 쉼 없이 나날이 새로워지며, 다달이 끊임없이 무궁한 천수를 누리시리이다. 어진 덕이 가득하시니 만물이 제 자리를 찾고, 전쟁을 끝내고 문교(文敎)를 펴시니 이야말로 무궁한 경사로소이다. 이제 태평성대를 맞이하여 닥쳐올 경사가 더욱 융성하리니, 님 계신 대궐에서 신령스런 상서를 옹위하고 남산 같이 창성한 국운을 보위하리이다.
천하의 나라들이 분주히 달려와 옥과 비단을 다투어 바치옵고, 사방의 신민들이 뒤질세라 산넘고 물건너 모여드옵니다. 이 좋은 날에 하례를 받으시니 복을 더욱 크게 받으시리이다. 하물며 요즘 바쁜 정무의 여가에 부지런히 신하들을 접견하시고 글하는 신하들과 더불어 즐겨 문장과 사육변려문을 훌륭히 지어내시며, 신하들의 자리에 오셔서 시(詩)·서(書)·경(經)·사(史)의 오묘한 글들을 강론하시나이다. 북쪽 금나라 사신은 술잔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동쪽 일본국[日域] 사절은 보물을 바치며 황제라 부르나이다.
하늘 신령께서 늘 몰래 도우시니 복록과 경사가 강물처럼 불어나고, 세상에 다시없는 새로운 상서가 열리니 군왕께서 통일을 이루심을 보겠나이다. 신하들은 찬미를 바치옵고 그 위업은 청사에 빛나리니, 인민이 생겨난 이래로 오늘 같이 성대한 날은 다시 없으리이다. 저희들은 이 성대를 만나 밝은 임금의 은택을 흠뻑 받으니 천자[萬乘]와 같은 위엄을 우러러 보며 대궐로 달려 왔사옵니다. 여섯 왕조의 음악[六樂]과 아홉 곡의 연주[九奏]는 모두 간자(簡子)가 들었던 천상의 음악에 견줄만 하나, 또한 만세를 세 번 불러 한나라 무제가 들었던 것과 같은 축수를 아니 바칠 수 있겠나이까?”
이 글을 두고 백관이 하례하는 표문을 올렸다.. -의종 24년 1월 1일


간단히 요약하면, 의종이 직접 "하례는 이렇게 쓰는거야!"라고 예시문을 썼는데 이를
1. 님은 레전드 OF 레전드 클라스가 다름요, 순임금 합친 레벨임. 2. 세상의 모든 나라와 신민이 님 앞에서 조공함. 3. 님은 존나 똑똑함. 4. 금나라도 님한테 만수무강하라고 빔. 5. 일본은 님을 황제라 부름. 6. 님같은 성군을 만난 우리는 겁나 축복받은거임. 7. 폐하 만세!!
..로 요약할 수 있다.
한편 의종은 이런 자뻑짓을 한 후 반년도 안되어 폐위를 당하고, 이를 후대 조선에선 "임금이란 작자가 자뻑만 하고 살았으니 망할 만 했다"라며 대차게 깠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파일:external/img.kbs.co.kr/b_0125.jpg

  •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김규철이 배역을 맡아, 똘기어리면서도 한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정신이 붕괴하는 의종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무신정변이 발생하는 첫 화에선 그저 흥청망청 노는 것만 좋아하는 암군으로 등장한다. 무비의 언급에 의하면 처음의 의종은 성군이 되고자 했으나, 그가 등용한 문신들이 의종의 시야를 흐리게만들면서 결국 의종이 타락해버렸다고 한다. 차별 등으로 인해 분노가 극에 달해있던 무인들은 미리 정변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정중부는 소장파 무신들에게 만약 의종이 황궁으로 돌아간다면 정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웠고, 수상함을 느낀 김돈중이 황궁으로 돌아갈 것을 건의하나 의종은 이를 무시하고 보현원에 놀러가버린다. 이후 역사대로 무신정변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의종이 총애하던 한뢰는 의종앞에서 이의방의 철퇴에 참교육을 당하고 만다.
    2화에서 의종은 환관들에게 무신들을 척결하라는 혈서를 내리는데, 이의방 일파는 밀고자 덕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만반의 준비를하고 황궁에 들어선다. 희대의 무력굇수들에게 환관들은 일방적으로 박살나버리고, 주동자인 왕광취는 이의방의 철퇴에 참교육을 당하고 만다. 왕광취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절명한 직후, 이의방은 의종앞에 대놓고 왕광취의 머리통을 내던지고 "황제는 폐위되셨소이다!"를 외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의종의 삼단 비명 고음
    이의방에게 삿대질을 당한 뒤, 궁에 유폐되는데, 이의방 일파가 대놓고 궁전앞에서 환관들을 고문했고, 그 비명소리가 내부에 까지 들려오자 멘탈이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폐위가 결정된 후엔 군기감에 유폐되는데, 거기선 이광정 따위에게도 멸시당하고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궁궐 밖으로 끌려나갈 때 의종은 대신들과 장군들을 향해 "짐은 반드시 황도로 돌아올 것이다. 짐이 돌아와서 다시 용상에 앉는 날 여기 있는 네놈들의 간을 내어 씹어먹을 것이다. 네놈들의 목을 자르고 불에 태워버릴 것이다!"하는 살벌한 대사를 퍼부으며 재기를 다짐했다. 그러나 형벌이 결정되고 무비와 함께 거제현으로 유배를 떠나는데, 백성들 사이에서도 별로 평판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유배 도중 백성들에게 돌을 맞기까지 한다. 이때 두경승이 찾아와 의종에게 절을 올렸고, 당시 의종을 호송하던 이의민은 두경승의 인물됨을 눈여겨본다. 거제현에선 와신상담을 하듯이 생선 내장을 생으로 씹어먹는 충공깽스런 모습도 보이며, 황궁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린다. 그 와중에 김보당 일파가 찾아와 의종을 보위에 올릴 것을 약속한다.
    얼마 후, 의종 폐위와 관련하여 금나라와 외교분쟁이 벌어지자, 혼란을 이용해 왕조를 갈아치우고자 했던 이고 일파는 의종을 살해하고자 결사대를 파견했고, 때마침 무비를 걱정하던 이의방도 이의민을 몰래 거제현으로 보낸다. 이고의 부하들이 거제현에 도착할때 쯤 악몽을 꾼 무비는 그 날 밤 의종을 데리고 산속으로 도주하였고, 덕분에 이고의 부하들은 의종을 찾지 못하고 때마침 도착한 이의민에게 끔살당하고 만다. 무비는 의종을 버리고 이의민과 함께 거제현을 떠나는데, 뒤늦게 무비를 발견한 의종은 무비를 애타게 외치지만, 무비는 의종에게 자신을 잊으라고 말하며 떠난다. 이 때쯤 의종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의종은 어머니인 공예태후에게 버림받고, 수많은 신하들에게 폐위당한지라 멘탈에 금이 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무비가 의종과 함께 한 지라 무비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런 무비마저도 의종을 져버리자 의종은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야 만다. 한참 후 송유인이 병사들을 이끌고 거제현에 찾아왔을때, 의종은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선 무비를 부르짖으며 온 곳을 쏘아다니는 안습한 모습을 보인다.
    이후 섬을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소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 섬의 지도를 그리기 위한 것이었다. 의종은 김보당 일파에게 지도를 전달했고, 반란군은 이를 이용해 손쉽게 주둔군을 박살내 의종을 데려간다.
    김보당의 난 때 경주 호족들과 야합하여 김보당과 개경을 협공하고자 하였으나 김보당은 붙잡혀 참수되고 이의민에게 경주를 장악당하며, 이의민이 거제현으로 다시 데려가겠다고 하자 한때 자신의 은덕으로 천민에서 벗어난 그에게 이별주를 청하며 부월무를 보여달라고 한다. 이 때 이의민이 추는 부월무가 압권. 그 후에 계곡을 바라보며 "떠날 때가 됐구나"[10]라고 말하며, 그 직후 역사대로 이의방의 밀명을 받은 이의민에게 등뼈가 으스러져 죽는다. 그리고 의종은 훗날 환생하여 자신을 죽인 이의민가 된다 카더라.
    금강야차로 악명 높은 이의민에게도 의종 시해는 엄청난 일이어서 그런지, 이의민은 한동안 악몽을 꾼다. 책사인 두두을 말로는 의종의 원혼이 성불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아서 그런거라고. 한편 김보당의 난 당시에는 어떻게 형님을 죽일 수 있겠느냐고 울먹이던 명종은, 먼 훗날 이의민 정권때는 이르러서는 의종시해를 '어쨌든 국가과 황실을 위해서 할 수 밖에 없었던 필요악'으로 인정한다. 의종이 시해당하면서 황실이 안정 되고, 명종의 정통성이 확립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KBS 1TV <역사저널 그날> 2015년 3월 29일 67회에 <드라마 속 역사인물 시리즈 제 4탄 천민 이의민 왕을 꿈꾸다>라는 제목으로 이의민을 다뤘다. 정중부에게 오늘 일을 잊으라며 술을 따라준 장면이 나왔는데, 정중부는 의종이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술을 쏟아버렸다.


[1] 물론 고려 역사에서 의종 말고도 암군들이 있긴 하지만, 무신정권의 발단을 제공하여 고려를 막장국가로 전락시킨 건 의종이다.[2] 정몽주의 조상.[3]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무신들에 의해 유폐되지만, 무신정변의 리더 격인 정중부의 배려 차원으로 술을 마시고 악사들의 연주를 해주는 걸로 각색된다. 그리고 기록처럼 마냥 태연하게 술을 마시지는 않고 술에 취해서 내가 왕이라며 낄낄거리며 웃다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서러워서) 바로 자리에 쓰러져 통곡하는 걸로 각색한다.[4] 조선시대엔 환관과 내시가 똑같은 의미로 거세한 자들을 가리키나, 고려시대엔 내시는 신하 중 왕의 총애를 받는 몇몇 자, 환관은 거세한 자들을 의미한다.[5] 지금의 경주.[6] 이사람은 훗날 조위총의 난 때, 반란군 세력권인 운중도에서 "내가 왕을 죽였다"고 자랑질하다가 지역주민들에게 살해당한다.[7] 중국에서도 뼈가 꺾여 죽은 군주가 있었는데, 바로 춘추시대 때의 노나라 환공으로, 제나라 양공의 지시로 팽생에 의해 뼈가 꺾여 끔살당했다.[8] 왕기라고도 함.[任川之患] 물가에 다다라서 생기는 고민.[10] 어쩌면 죽음을 예견한 것일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