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펠리페 곤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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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국 제3대 총리 펠리페 곤살레스 마르케스 Felipe González Márquez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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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국적 | ||
임기 | 제3대 총리 | |
서명 | ||
1942년 세비야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0년대 세비야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였으며 이후 노동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당시 스페인은 프랑코 정권 하에서 좌파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그는 여러 노동조직에서 활동하였고 프랑스에서 망명 활동을 하던 스페인 사회노동당에도 가입했다. 그는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사회노동당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1974년에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서기장직에 올랐다.
1977년 스페인이 민주화되자 귀국하여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선거를 이끌었다. 1977년 스페인 총선거에서 사회노동당은 전체 2위의 득표를 하였으며 350석중 118석을 확보하였다.
1977년 스페인이 민주화되자 귀국하여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선거를 이끌었다. 1977년 스페인 총선거에서 사회노동당은 전체 2위의 득표를 하였으며 350석중 118석을 확보하였다.
1979년 총선에서는 아돌포 수아레스 총리가 이끄는 민주중도연합에 밀려 집권에 실패했지만 제1야당 지위는 유지했다. 이후 수아레스가 1981년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레오폴도 칼보소텔로 정부를 거치는 동안 민주중도연합이 내분으로 급속히 무너지면서 정치 구도도 크게 바뀌었다. 결국 1982년 총선에서 사회노동당은 48.1%를 득표하고 전체 350석 가운데 20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고, 당수였던 펠리페 곤살레스가 총리에 취임했다. 이로써 스페인 내전 종전 이후 처음으로 사회주의 계열 정권이 들어섰다.
집권 초부터 민주화 이후 새로 자리 잡은 정치질서를 안정시키는 한편, 사회와 경제 전반의 현대화를 추진했는데 이후 선거를 거듭할수록 사회노동당의 의석은 줄어들었지만 곤살레스 개인에 대한 지지는 상당 기간 이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네 차례 연속 총리를 맡으며 약 14년 동안 집권했다.
대외적으로는 이전 정부에서 시작된 유럽 공동체(EC) 가입 협상을 마무리했다. 스페인은 1977년 가입을 신청하고 1979년부터 협상을 진행해 왔으며, 곤살레스 총리 아래서 협상이 마무리되면서 1986년 1월 1일 포르투갈과 함께 유럽 공동체에 가입했다.
국내에서는 복지 확대와 사회기반시설 확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전국 고속도로망을 넓히고 교육개혁을 통해 의무교육 연령을 16세까지 높였다. 또한 가톨릭 교회의 강한 반대에도 1985년 제한적인 낙태를 허용했으며, 주 40시간 노동제를 정착시키고 법정 유급휴가를 30일까지 확대했다.
경제정책에서는 기존의 사회주의 노선에만 머무르지 않고 시장경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집권 초기에는 경쟁력이 떨어진 중공업을 중심으로 산업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이후 공기업 민영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도 추진했다. 1984년 노동시장 개혁 이후 기간제 고용이 크게 늘면서 비정규직 비중이 높아졌고, 1988년에는 민영 텔레비전 방송을 허용해 1990년부터 민영 방송국들이 잇따라 개국했다.
이러한 개혁과 유럽 공동체 가입을 바탕으로 스페인 경제는 1980년대 후반 빠르게 성장했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는 연평균 4% 안팎의 성장세를 기록했지만 고용 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베이비붐 세대의 노동시장 진입과 여성의 경제활동 증가가 겹치면서 실업률은 집권 기간 내내 두 자릿수에 머물렀고, 1992년을 전후해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한때 20%를 넘어서기도 했다.
대신 실업급여를 인상하고 지급 대상을 넓히는 등 사회안전망을 강화해 고실업에 따른 불만을 줄이려 했고, 고속도로와 교육을 비롯한 사회기반시설 확충, 복지 강화, 유럽 공동체 가입 이후의 생활수준 향상도 높은 실업률에도 정부와 사회노동당이 장기간 지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꼽힌다.
그러나 장기 집권이 이어지면서 사회노동당의 지지 기반도 점차 약해졌다. 1993년 총선에서는 전체 350석 가운데 159석을 얻는 데 그쳐 처음으로 단독 과반을 잃었다.[4] 곤살레스는 총리 선출 투표에서 181표를 얻어 다시 집권했지만, 이후에는 카탈루냐의 집중과 연합을 비롯한 지역주의 정당들의 협조에 의존해야 했다.
집권 4기에는 경기침체와 높은 실업률,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이 겹치면서 정권의 지지세가 빠르게 약해졌다. 사회노동당 정부 관계자들을 둘러싼 부패 의혹도 잇따라 불거졌으며, 내무부 관계자들이 ETA 대원들을 불법적으로 납치하고 스페인판 더러운 전쟁 사건까지 터지면서 정부의 도덕성도 큰 타격을 입었다.
당내에서는 곤살레스를 대신할 새로운 총리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곤살레스의 인지도와 정치력, 당내 영향력은 여전히 강했고 마땅한 대안도 없었다.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던 하비에르 솔라나 역시 1995년 NATO 사무총장에 취임하면서 국내 정치를 떠났다. 결국 사회노동당은 다시 곤살레스를 내세워 1996년 총선를 치렀다.
사회노동당은 예상보다 선전했지만 141석을 얻는 데 그쳐 156석을 차지한 인민당에 패배했다. 인민당 역시 단독 과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는 집중과 연합과 바스크 국민당, 카나리아 연합 등 지역주의 정당들의 협조를 받아 총리에 선출됐다. 이에 곤살레스는 약 14년에 걸친 집권을 마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인 1997년에는 사회노동당 대표직도 호아킨 알무니아에게 넘겼다. 이후에도 한동안 하원의원으로 활동했지만 당내 정치의 전면에서는 물러났으며, 2004년 의원직을 내려놓으면서 의정활동도 마무리했다.
집권 초부터 민주화 이후 새로 자리 잡은 정치질서를 안정시키는 한편, 사회와 경제 전반의 현대화를 추진했는데 이후 선거를 거듭할수록 사회노동당의 의석은 줄어들었지만 곤살레스 개인에 대한 지지는 상당 기간 이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네 차례 연속 총리를 맡으며 약 14년 동안 집권했다.
대외적으로는 이전 정부에서 시작된 유럽 공동체(EC) 가입 협상을 마무리했다. 스페인은 1977년 가입을 신청하고 1979년부터 협상을 진행해 왔으며, 곤살레스 총리 아래서 협상이 마무리되면서 1986년 1월 1일 포르투갈과 함께 유럽 공동체에 가입했다.
국내에서는 복지 확대와 사회기반시설 확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전국 고속도로망을 넓히고 교육개혁을 통해 의무교육 연령을 16세까지 높였다. 또한 가톨릭 교회의 강한 반대에도 1985년 제한적인 낙태를 허용했으며, 주 40시간 노동제를 정착시키고 법정 유급휴가를 30일까지 확대했다.
경제정책에서는 기존의 사회주의 노선에만 머무르지 않고 시장경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집권 초기에는 경쟁력이 떨어진 중공업을 중심으로 산업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이후 공기업 민영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도 추진했다. 1984년 노동시장 개혁 이후 기간제 고용이 크게 늘면서 비정규직 비중이 높아졌고, 1988년에는 민영 텔레비전 방송을 허용해 1990년부터 민영 방송국들이 잇따라 개국했다.
이러한 개혁과 유럽 공동체 가입을 바탕으로 스페인 경제는 1980년대 후반 빠르게 성장했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는 연평균 4% 안팎의 성장세를 기록했지만 고용 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베이비붐 세대의 노동시장 진입과 여성의 경제활동 증가가 겹치면서 실업률은 집권 기간 내내 두 자릿수에 머물렀고, 1992년을 전후해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한때 20%를 넘어서기도 했다.
대신 실업급여를 인상하고 지급 대상을 넓히는 등 사회안전망을 강화해 고실업에 따른 불만을 줄이려 했고, 고속도로와 교육을 비롯한 사회기반시설 확충, 복지 강화, 유럽 공동체 가입 이후의 생활수준 향상도 높은 실업률에도 정부와 사회노동당이 장기간 지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꼽힌다.
그러나 장기 집권이 이어지면서 사회노동당의 지지 기반도 점차 약해졌다. 1993년 총선에서는 전체 350석 가운데 159석을 얻는 데 그쳐 처음으로 단독 과반을 잃었다.[4] 곤살레스는 총리 선출 투표에서 181표를 얻어 다시 집권했지만, 이후에는 카탈루냐의 집중과 연합을 비롯한 지역주의 정당들의 협조에 의존해야 했다.
집권 4기에는 경기침체와 높은 실업률,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이 겹치면서 정권의 지지세가 빠르게 약해졌다. 사회노동당 정부 관계자들을 둘러싼 부패 의혹도 잇따라 불거졌으며, 내무부 관계자들이 ETA 대원들을 불법적으로 납치하고 스페인판 더러운 전쟁 사건까지 터지면서 정부의 도덕성도 큰 타격을 입었다.
당내에서는 곤살레스를 대신할 새로운 총리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곤살레스의 인지도와 정치력, 당내 영향력은 여전히 강했고 마땅한 대안도 없었다.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던 하비에르 솔라나 역시 1995년 NATO 사무총장에 취임하면서 국내 정치를 떠났다. 결국 사회노동당은 다시 곤살레스를 내세워 1996년 총선를 치렀다.
사회노동당은 예상보다 선전했지만 141석을 얻는 데 그쳐 156석을 차지한 인민당에 패배했다. 인민당 역시 단독 과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는 집중과 연합과 바스크 국민당, 카나리아 연합 등 지역주의 정당들의 협조를 받아 총리에 선출됐다. 이에 곤살레스는 약 14년에 걸친 집권을 마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인 1997년에는 사회노동당 대표직도 호아킨 알무니아에게 넘겼다. 이후에도 한동안 하원의원으로 활동했지만 당내 정치의 전면에서는 물러났으며, 2004년 의원직을 내려놓으면서 의정활동도 마무리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국내외 현안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며 정치적 영향력을 이어갔다. 국제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는데, 1996년에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의장 특별대표 자격으로 옛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해 지방선거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을 조사했다. 당시 야권이 승리한 지방선거 결과를 세르비아 당국이 무효로 돌리자 현지 상황을 조사한 뒤 선거 결과를 인정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후에도 코소보 사태를 비롯한 옛 유고슬라비아 문제에 관여하는 등 외교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당내 문에서는 비교적 중도·온건파에 가까운 원로로서 사회노동당이 다시 왼쪽으로 기울거나 급진좌파 및 지역주의 정당들과 손잡는 문제를 놓고 당 지도부와 여러 차례 다른 목소리를 냈다. 특히 2014년 유럽의회 선거를 계기로 포데모스가 급부상하자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곤살레스는 포데모스의 정치·경제 노선을 베네수엘라식 좌파 정치에 빗대며 스페인과 유럽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비판했고, 이후에도 사회노동당이 포데모스와 가까워지는 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성향은 페드로 산체스가 사회노동당을 이끌면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곤살레스는 산체스가 당을 보다 왼쪽으로 이끌고 포데모스를 비롯한 급진좌파 세력과 협력하는 데 비판적이었으며, 카탈루냐 분리주의 정당들의 지원에 의존해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도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카탈루냐 독립 문제에서는 자결권을 협상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며 중앙정부가 보다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20년 포데모스와의 연정 구성 협상이 타결된 후로도 계속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포데모스와의 연정 자체뿐만 아니라 카탈루냐·바스크 지역 정당들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는 국정 운영을 문제 삼았으며, 사회노동당이 중도층에서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산체스 체제에서는 급진좌파와의 연정과 지역주의 정당과의 협력이 본격화된 점을 경계하며 퇴임 이후에도 당의 노선과 국가 현안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당내 문에서는 비교적 중도·온건파에 가까운 원로로서 사회노동당이 다시 왼쪽으로 기울거나 급진좌파 및 지역주의 정당들과 손잡는 문제를 놓고 당 지도부와 여러 차례 다른 목소리를 냈다. 특히 2014년 유럽의회 선거를 계기로 포데모스가 급부상하자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곤살레스는 포데모스의 정치·경제 노선을 베네수엘라식 좌파 정치에 빗대며 스페인과 유럽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비판했고, 이후에도 사회노동당이 포데모스와 가까워지는 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성향은 페드로 산체스가 사회노동당을 이끌면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곤살레스는 산체스가 당을 보다 왼쪽으로 이끌고 포데모스를 비롯한 급진좌파 세력과 협력하는 데 비판적이었으며, 카탈루냐 분리주의 정당들의 지원에 의존해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도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카탈루냐 독립 문제에서는 자결권을 협상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며 중앙정부가 보다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20년 포데모스와의 연정 구성 협상이 타결된 후로도 계속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포데모스와의 연정 자체뿐만 아니라 카탈루냐·바스크 지역 정당들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는 국정 운영을 문제 삼았으며, 사회노동당이 중도층에서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산체스 체제에서는 급진좌파와의 연정과 지역주의 정당과의 협력이 본격화된 점을 경계하며 퇴임 이후에도 당의 노선과 국가 현안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곤잘레스 총리를 둘러싼 가장 큰 논란 가운데 하나는 집권 당시 ETA에 맞서 활동한 반테러 조직 GAL과의 관계다. GAL은 곤살레스 내각 시기인 1983년부터 1987년까지 주로 프랑스령 바스크 지역에서 활동하며 ETA 조직원과 관련 인사들을 불법적으로 납치·고문·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ETA와 관계없는 민간인까지 피해를 입으면서, 곤살레스 내각이 이러한 불법 대테러 활동을 묵인하거나 지원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같은 의혹은 곤살레스 내각의 고위 인사들이 실제로 GAL 활동에 관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더욱 커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3년 발생한 세군도 마레이 납치 사건이다. GAL은 마레이를 ETA 조직원으로 잘못 판단해 납치한 뒤 열흘 동안 감금했다. 이후 수사 과정에서 곤살레스 내각의 내무부장관이었던 호세 바리오누에보와 국가안보 분야 고위직을 지낸 라파엘 베라 등이 사건에 관여한 사실이 드러났고, 두 사람은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따라 곤살레스 내각의 내무부 고위층이 GAL의 불법 활동에 관여했다는 사실 자체는 법적으로 확인됐다. 다만 곤살레스 본인이 GAL의 창설이나 개별 작전을 직접 지시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곤살레스 역시 자신이 GAL을 조직하거나 지휘했다는 의혹을 줄곧 부인했다.
그러나 내각 핵심 인사들이 잇따라 GAL 사건에 연루되면서, 곤살레스가 이러한 활동을 전혀 몰랐을 수 있느냐는 의문은 집권 후반기 내내 따라다녔다. 특히 1995년에는 사회노동당의 전직 고위 인사였던 리카르도 가르시아 담보레네아가 곤살레스가 ETA에 맞선 비밀작전을 승인했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곤살레스는 이를 부인했지만, GAL 사건은 이미 곤살레스 내각 전체의 책임 문제로 번진 뒤였다.
퇴임 이후에도 개입 의혹은 이어졌다. 2020년에는 1984년에 작성된 미국 중앙정보국(CIA) 보고서가 스페인에서 다시 주목받으면서 논란이 재점화됐다. 해당 문서에는 곤살레스가 ETA에 맞서기 위한 비밀조직 구성에 동의했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만 이 문서는 2020년에 처음 공개된 자료가 아니었고, 당시 CIA가 수집한 정보를 정리한 보고서였을 뿐 곤살레스의 직접 지시를 법적으로 입증한 자료도 아니었다.
따라서 곤살레스가 직접 GAL을 만들거나 지휘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의 집권기에 내무부를 비롯한 국가기관의 고위 관계자들이 GAL의 불법 활동에 관여했고 공적 자금까지 사용한 사실이 드러난 만큼, 당시 총리였던 곤살레스에게 정치적 책임이 있다는 비판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곤잘레스가 GAL의 존재와 활동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논란으로 남아 있다.
GAL 사건은 곤살레스의 집권 후반기에도 큰 부담이 됐다. 1980년대 후반부터 관련 의혹이 이어졌고, 1990년대 들어 내각 관계자들의 부패 사건까지 잇따라 터지면서 곤살레스 내각의 도덕성도 크게 흔들렸다. 여기에 경기침체와 높은 실업률,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까지 겹치면서 사회노동당의 지지세도 약해졌다. 이러한 악재는 결국 1996년 총선에서 사회노동당이 인민당에 정권을 넘겨주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의혹은 곤살레스 내각의 고위 인사들이 실제로 GAL 활동에 관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더욱 커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3년 발생한 세군도 마레이 납치 사건이다. GAL은 마레이를 ETA 조직원으로 잘못 판단해 납치한 뒤 열흘 동안 감금했다. 이후 수사 과정에서 곤살레스 내각의 내무부장관이었던 호세 바리오누에보와 국가안보 분야 고위직을 지낸 라파엘 베라 등이 사건에 관여한 사실이 드러났고, 두 사람은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따라 곤살레스 내각의 내무부 고위층이 GAL의 불법 활동에 관여했다는 사실 자체는 법적으로 확인됐다. 다만 곤살레스 본인이 GAL의 창설이나 개별 작전을 직접 지시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곤살레스 역시 자신이 GAL을 조직하거나 지휘했다는 의혹을 줄곧 부인했다.
그러나 내각 핵심 인사들이 잇따라 GAL 사건에 연루되면서, 곤살레스가 이러한 활동을 전혀 몰랐을 수 있느냐는 의문은 집권 후반기 내내 따라다녔다. 특히 1995년에는 사회노동당의 전직 고위 인사였던 리카르도 가르시아 담보레네아가 곤살레스가 ETA에 맞선 비밀작전을 승인했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곤살레스는 이를 부인했지만, GAL 사건은 이미 곤살레스 내각 전체의 책임 문제로 번진 뒤였다.
퇴임 이후에도 개입 의혹은 이어졌다. 2020년에는 1984년에 작성된 미국 중앙정보국(CIA) 보고서가 스페인에서 다시 주목받으면서 논란이 재점화됐다. 해당 문서에는 곤살레스가 ETA에 맞서기 위한 비밀조직 구성에 동의했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만 이 문서는 2020년에 처음 공개된 자료가 아니었고, 당시 CIA가 수집한 정보를 정리한 보고서였을 뿐 곤살레스의 직접 지시를 법적으로 입증한 자료도 아니었다.
따라서 곤살레스가 직접 GAL을 만들거나 지휘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의 집권기에 내무부를 비롯한 국가기관의 고위 관계자들이 GAL의 불법 활동에 관여했고 공적 자금까지 사용한 사실이 드러난 만큼, 당시 총리였던 곤살레스에게 정치적 책임이 있다는 비판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곤잘레스가 GAL의 존재와 활동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논란으로 남아 있다.
GAL 사건은 곤살레스의 집권 후반기에도 큰 부담이 됐다. 1980년대 후반부터 관련 의혹이 이어졌고, 1990년대 들어 내각 관계자들의 부패 사건까지 잇따라 터지면서 곤살레스 내각의 도덕성도 크게 흔들렸다. 여기에 경기침체와 높은 실업률,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까지 겹치면서 사회노동당의 지지세도 약해졌다. 이러한 악재는 결국 1996년 총선에서 사회노동당이 인민당에 정권을 넘겨주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 특이하게 취미가 분재 가꾸기라고 한다. 총리 시절에는 지중해에서 나는 나무들을 몇 개씩 길렀으며, 총리직을 사임한 이후 그는 이를 모두 왕립 식물원에 기증했다.
- 현재 생존 중인 스페인 전직 총리 중, 최고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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