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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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표기

UED

GD 366년

월야의 프로마쥬

AL 605년

1. 개요2. 주요 이슈
2.1. 실종된 개혁의지, 1996년 문민정부2.2. 전-노 심판2.3. 여의도 지하철 시대의 개막2.4. 정보인권 침해의 해, 1996년2.5. 서태지와 아이들 공식 해체, 그리고 서기회의 정신 계승2.6. 하루아침에 난리가 난 말레이시아
3. 사건
3.1. 실제3.2. 가상
4. 탄생
4.1. 실존 인물4.2. 가상 인물
5. 사망
5.1. 실존 인물
5.1.1. 1월5.1.2. 2월5.1.3. 3월5.1.4. 4월5.1.5. 5월5.1.6. 6월5.1.7. 7월5.1.8. 8월5.1.9. 9월5.1.10. 10월5.1.11. 11월5.1.12. 12월5.1.13. 일자 불명
5.2. 가상 인물
6. 데뷔
6.1. 가수6.2. 만화계6.3. 스포츠6.4. 배우6.5. 예능인
7. 은퇴
7.1. 가수7.2. 스포츠
8. 베스트셀러

1. 개요[편집]


1996년 mbc에서 보도된 연도별 10대 뉴스이다.

문민정부에서 그나마 좋았던 해[1] 하지만 일본에는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그리고 1990년대 들어 비틀대던 학생 운동권이 연세대 사태로 KO펀치를 맞아 몰락 테크를 타기 시작했다. 종신 정년제, 연공 서열제가 유지되던 당초의 관행과는 달리 기업들이 능력별 진급제를 도입하고 명예 퇴직을 권유하는 일이 많아져 '명퇴 증후군', '실직 증후군'이라는 유행어가 생겨나는 등 다가올 경제 위기가 예고되기도 했다.

한국의 마지막 벨 에포크를 상징하는 해. 초대형 사고 없이 무사히 잘 넘어갔다. 하지만 무역수지 적자가 200억 달러를 돌파하여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는 등 경제에 잇달아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했고 결국 이듬해에 크게 터지고 말았다.

PC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Windows 95 덕분에.[2] 오오 찬양하라! 또한 김영삼 대통령은 그해 10월 14일부터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보화 5대 목표'를 발표하기도 했다.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보화 5대 목표

1.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가 협력하는 열린사회
"정보를 가진 자"와 "정보를 못 가진 자"의 격차를 해소, 모든 국민들이 정보와 지식을 공유해 차별없이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보접근에 있어서의 기회균등을 보장하려는 것이다.

2. 인간중심의 가치를 창조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는 사회
인간이 자연을 보다 지혜롭게 이용하고 자연파괴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정보기술을 활용한다.

3. 전통문화가 발전적으로 전파되고 계승되는 문화사회
정보사회에서는 문화의 교류가 그 어느때보다도 빠르게 진행될 것이며 세계 각국의 새로운 정보시스템들은 자국의 문화를 전파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활용될 것이므로 우리도 정보화를 통해 우리의 우수한 문화자원을 정보자원으로 적극 개발,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4. 투명하고 공정한 정보민주주의 사회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적기에 제공하는 것이 정보민주주의 구현의 실체다. 정보민주주의에서는 열려 있는 전자공간을 통해 국민들의 알 권리, 의사표현의 자유, 신념의 자유 등이 보다 확실히 보장될 수 있다.

5. 인류공동번영에 기여하는 아시아의 정보중심국가
APII를 제창, 실현시킨 데 이어 앞으로도 아시아지역의 이해증진과 공동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적극적인 국제협력을 추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진보진영 입장에서 1996년은 '통신사상 암흑의 해'라 불릴 정도로 공권력에 의한 사이버 공간 단속이 가장 심했다. 이는 아래에 후술.

이 해 대한민국 최초의 온라인 그래픽 게임바람의 나라가 1996년 4월 5일부터 정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다.[3]

국민학교의 명칭이 공식적으로 초등학교로 바뀐 첫 해이다. 정확히는 대한민국 교육 학사일정이 시작되는 3월 1일부터이다. 간혹 83년생들이 "나 초등학교 졸업했뜸."이라고 우기기도 하는데, 안타깝지만 83년생들은 이미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정 믿기지 않는다면, 졸업장을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분명 국민학교라고 찍혀 있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이 사상 최초로 아시아 국가인 한국일본에서 공동개최를 하기로 확정되었다(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이 당시 양국에서는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 경쟁으로 열기가 달아오르기도 했다. 또 독도 영유권 및 일본 정치인의 망언 문제 등으로 한일관계가 어느 때보다 격랑을 맞았던 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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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9월 18일, 북한이 일으킨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긴장과 불안을 탔다. 특히 강릉시를 비롯한 영동지방은 야간 통금제도를 시행했다. 무장공비는 11월 5일에 가서야 완전히 소탕되었는데 작전초기 매일 4만명의 인원이 동원되는 등 11월 5일, 소탕까지 무려 2백만명 정도의 (예비군 포함)병력이 투입되었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문제점 분석

공비 소탕과정에서 희생된 사망자는 무려 14명이다. 이 가운데 10명은 군인이었다. 2명의 군인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뿐만 아니라 육군에서 14명이 교전중 부상을 당하는 등 부상자도 속출했다. 민간인 희생자 4명은 공비 소탕작전 와중에 버섯을 캐러갔다가 변을 당했다. 9월 23일 새벽에는 버섯을 캐러 갔던 농부가 육군의 오인 사격으로 숨졌고 북한이 보복을 선언한 직후인 지난달 9일에는 진부령 탑동리에서 버섯을 따러 나섰던 민간인 3명이 공비들에게 살해당했다. 강릉 무장공비사건 인명피해상황

인디펜던스 데이 등의 개봉으로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에서만 역대 한 해 흥행 수입과 관객 수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기도 하여 94년의 기록을 경신했다. 다시 한번, 95년 영화 지못미.

이 해 태어난 사람은 교육적인 고통이 극심했던 세대가 되었다. 중학교때는 수학(산포도 등이 추가)과 영어가 개정되었고 고2까지 집중이수제를 했고 폐지되었을땐 이미 고3(...). 아이고 의미 없다 그리고 고3때는 스포츠 행사가 껴있던데다가[4] 역사상 최악의 물수능이자 막장 수능를 치른 세대가 되었다. 그리고 남자는 이 세대까지는 극심한 입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래도 이 해 초등학교 입학한 세대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경제, 교육, 취업, 그리고 남자는 국방면에서 최악이라...이 해는 태어날때부터 최악이었다
한편 국제연합은 이 해를 '빈곤퇴치의 해'로 지정했고,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이 해를 문학의 해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박노해, 황석영, 김하기, 진관 스님 등 양심있는 작가들이 이미 구속되었거나 새로 구속되었기 때문에 재야 계열에선 '문학 탄압의 해'로 꼽히기도 했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1996년 올해의 한자는 '食(먹을 식)'이었다.

어째 언급이 잘 안 됐는데 이 해는 병자년이였다. 1976년 병진년보다도 더 묻힌 감이 있다.

경기도 용인군용인시로 승격된 해이기도 하다. 또한 용인에 위치한 자연농원도 이때 에버랜드로 개명되었으며 캐리비안 베이도 개장했다.

2. 주요 이슈[편집]

2.1. 실종된 개혁의지, 1996년 문민정부[편집]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한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보수회귀로 차기 재집권의 기회를 마련코자 했다. 그는 지방선거가 끝난 3주일 뒤 7월 20일에 민자당 당무위원과 상근 당직 초청 조찬에서 "1996년에 있을 15대 국회의원 총선에선 후보자 공천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내가 직접 챙기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김영삼 대통령이 당을 직접 장악해 차기 대권 구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이후 김영삼은 이를 실행해 당명도 12월 6일부터 '신한국당'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1996년 4월 11일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과반수에 미달했음에도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이처럼 '안정 위에 중단', '중단 위에 개혁'을 외치던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 의지는 국민들의 불신 속에서 이미 물 건너갔고, 대신 김영삼 정부의 행태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변질되어 그해 6월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 강제연행 사건, 8월 한총련의 연세대 사태와 11월 27일 평택 에바다농아원 농성 강제진압, 12월 안기부법 및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특히 연세대 사태 당시 범민련-범청학련이 주최한 범민족대회 및 통일대축전 남측행사 때 김영삼 정부가 퍼부은 강경진압은 과거 전두환이나 노태우 때나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한총련의 과격성에 비판적이었던 시민들마저 김영삼이 해도 너무한다며 등을 돌리기도 했다.

또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은 기습적으로 임시국회를 소집해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날 본회의에는 신한국당 157명 중 외유중인 김윤환 고문과 야당의 감시를 받고 있던 김수한 국회의장을 뺀 155명 전원이 참석했다. 이에 야당은 반발해 국회 농성에 들어갔으며, 민주노총도 다음날부터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김영삼 정부 몰락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2.2. 전-노 심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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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8월 6일, 서울지검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구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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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2월 16일, 전두환과 노태우는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으로 감형되는데 전두환 前 대통령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노태우 前 대통령에게는 징역 17년이 선고한다. 그렇지만 항소심 선고에서 눈에 띄는 건 6.29 이전의 정부를 내란에 의한 정부라고 규정한 것이다. 서울고법 형사 1부는 이날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전두환 피고인에게 군 형법상 반란죄와 내란죄, 뇌물수수죄 등을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노태우 피고인에 대해서도 같은 죄목으로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또 전두환, 노태우 두 피고인이 재임 중 기업체 등으로부터 뇌물로 거둬들인 2,205억 원과 2,628억 원을 각각 추징했다. 재판부는 이와 함께 황영시, 허화평, 이봉 피고인에게 반란 중요임무 종사죄 등을 적용해 각각 징역 8년을, 그리고 정호용, 이희성, 주영복 피고인에게는 징역 7년을 각각 선고했다. 또 허삼수, 유성 피고인에게는 징역 6년, 최세창 피고인에게는 징역 5년 그리고 차규헌, 장세동, 신윤희, 박종규 피고인에게는 각각 징역 3년6월이 선고되는 등 대부분 1심보다 낮은 형량이 선고됐다.
한편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던 박준병 피고인에 대해서는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1심에서 유죄를 받은 15명 가운데 전두환 피고인에 대해서는 사형에서 무기로, 노태우 피고인에 대해서도 징역 22년6월에서 17년으로 감형하는 등 형을 낮췄지만 주영복 피고인의 경우에만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은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고 5.17 내란을 통해 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등 힘으로 정권을 탈취한 사실이 인정되지만 6.29 선언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한 점 등을 참작해 형량을 낮춘다고 밝혔다.[5] 항소심 재판부는 전두환·노태우 두 피고인의 1심 판결은 물론, 검찰 공소사실의 대부분을 인정했으나 두 피고인에 대한 양형에는 관대했다. 권성 재판장은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하극상의 패역으로 군의 기강을 파괴했다고 전두환 피고인을 질타했다. 5.17과 관련해서는 내란을 일으켜 힘으로 권력을 탈취하면서 많은 사람을 살상하고 군사통치의 종식을 기대하는 국민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고 판결했다. 노태우 피고인에 대해서는 분수에 맞지 않게 시종 전두환의 뒤를 따라 영화를 누렸다고 비판했다. 이날 항소심 재판부는 이처럼 전·노 두 피고인의 죄를 따지는데 엄격했다. 쟁점이었던 국헌문란의 폭동 종료시점을 87년 6.29 선언으로 판단해 5공의 정통성을 사법적 판단으로 부인하는 과감함도 보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양형에는 관대함을 보였다. 권력의 상실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정치문화로부터 탈피하는 일은 쿠데타를 응징하는 것에 못지않게 필요하다는 이유 등을 들어 전두환 피고인의 형을 줄여주었다. 前 피고인을 감형한 만큼 노태우 피고에 대한 형도 줄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선고는 실무적인 사법적 판단보다는 고도의 정치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어 논란을 빚었다.[6]


당시 전두환 노태우의 감형에 대해 mbc와 갤럽이 국민들에게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결과를 보면
전두환.노태우 감형 판결과 사면 여부 관련 여론조사 결과
- 전두환씨 감형(551명 전화조사)
부적절했다: 47.9%, 적절했다: 44%, 모르겠다: 8.0%
- 6.29가 감형요인?
잘못한일: 50.1%, 잘한일: 32.9%, 모르겠다: 17.0%
- 노태우씨 감형

부적절했다: 57.4%, 적절했다: 32.8%, 모르겠다: 9.8%

- 6.29가 내란종료 시점

옳다: 56.4%, 옳지 못하다: 26.8%, 모르겠다: 16.7%

- 전두환.노태우씨 사면 가능성

사면될 것: 42.2%, 사면 안될것: 40.5%, 모르겠다: 17.3%

- 항소심에 대한 시각

정치적 재판: 65.5%, 그렇지 않다: 20.9%, 모르겠다: 13.6%

- 실형받은 재벌도 감형

부적절했다: 48.8%, 적절했다: 40.4%


문화방송한국갤럽이 당시 전국의 성인남녀 551명을 전화 여론 조사한 결과 전두환 씨 감형에 대해 적절했다는 대답이 44%, 부적절하다는 대답이 47.9%로 찬반이 엇갈렸다. 전 씨가 6.29 선언을 주도했다는 주장이 사실일 경우 감형이 잘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32.9%만이 잘한 일이라고 답 해 6.29가 감형요인이라고는 보지 않는 경향이 우세했다. 노태우 씨의 감형에 대해서는 32.8%만이 적절하다고 답했고, 부적절하다는 답변은 57.4%로 노 씨에 대한 국민정서가 전 씨에 비해 더 비판적이었다. 또 6.29를 내란종료 시점으로 규정한 재판부의 판단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각이 56.4%로 우세했다. 전·노 두 사람이 김영삼 대통령 임기 안에 사면될 것이라 는 전망은 42.2%,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은 40.5%로 엇비슷했다. 아울러 이번 항소심 재판이 현 정권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정치적 재판이라는 시각에 대해서는 65.5%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서는 1심에서 실형 선고를 받은 재벌총수들을 집행유예로 감형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국민들이 다소 많았다.[7]



결국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듬해인 1997년 대선에서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의 3후보의 뜻에 따라 김영삼대통령과의 협의로 1997년 12월 22일 사면되었다.[8] 반면 5공 정권 당시 간첩조작 사건으로 구속된 함주명, 김성만 등 장기복역 시국사범(양심수)들은 거의 석방이 안 되어 희비가 엇갈렸다.[9]

2.3. 여의도 지하철 시대의 개막[편집]

그 동안 1~4호선 노선에서 제외되었던 서울 여의도 지역이 서울 지하철 5호선의 부분 개통으로 본격적인 여의도 지하철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서울 강서권 지역도 지하철 시대가 개막됨으로서 기존 지하철 노선에서 제외되었던 서울 여의도와 강서권 지역이 역세권 지역에 포함되어 지하철로 갈 수 있는 시대가 개막되어 여의도 직장인들의 출근길을 하루아침에 바꿔놓았다.

2.4. 정보인권 침해의 해, 1996년[편집]

당시 진보/재야계열을 비롯한 일반 네티즌 입장에서 1996년은 '통신사상 암흑의 해'라 불릴 정도로 공권력에 의한 사이버 공간 단속이 가장 심했다. 그해 4월에는 15대 총선을 즈음해 검찰이 PC통신 게시판에서 특정 후보들을 비방한 20여명을 불구속 입건한 것을 비롯해 8월에는 나우누리에 있던 한총련 CUG를 경찰이 나우누리 본사를 압수수색해 강제로 폐쇄했고, 9월에는 경찰이 강릉 무장공비 사건 조작설을 PC통신 게시판에 유포한 유저들에 대해 수사를 착수하여 10월에는 <그들이 무장공비인가>를 올린 윤모씨를 구속한 바 있었다. 이 사태로 인해 PC통신 상에서 시사와 관련된 게시글 수가 감소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현상은 이듬해에 열린 15대 총선 당시 선거법의 엄중 적용 당시에도 발생했다.

이러한 공권력의 사이버공간 검열 움직임에 네티즌들은 PC통신 게시판에 같은 시기에 미국의 네티즌들이 통신품위법에 항의하기 위한 '블루리본운동'을 본따 '하얀리본(▷◁)'을 달아 끈질기게 항의했다. 어쩌면 이는 요즘 말하는 '온라인 시위'의 시초격이기도 하다.

2.5. 서태지와 아이들 공식 해체, 그리고 서기회의 정신 계승[편집]

이 해 서태지 팬들에게는 가슴 아픈 한 해이기도 하였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공식 해체를 선언하였던 해여서 서태지 팬들과 젊은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90년대 가요계를 풍미하며 기성문화를 거부하고 개성있고 파격적인 공세로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그들이었기 떄문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는 그 당시만 했어도 충격이자 이변적인 일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관련 기자회견은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었는데 90년대 신세대 문화를 이끌어왔고 가요계를 이끌어왔던 그들이었기에 해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고 해체에 슬픔을 느끼는 팬들도 많았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한 이후 90년대 후반에 들어서 H.O.T라는 신성 아이돌 그룹이 이들의 바톤을 이어받아 가요계를 주름잡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1세대 아이돌들의 전성기가 개막되었다.

세간에서는 이들 서태지와 아이들을 잠정적인 아이돌 그룹이라고도 보고 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기 이전인 80년대까지는 아이돌 그룹도 없고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파격적인 그룹도 없었던데다가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90년대 후반에서 1세대 아이돌 그룹이 탄생한 것을 봐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국 아이돌 그룹의 선조가 아닌가하는 추측도 내놨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 아이돌 그룹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하는 그런 짐작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태지보이스는 사라져도 그들이 남긴 자유와 도전정신은 죽지 않았다. 이들이 은퇴한 지 두어 달 뒤인 1996년 3월,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이하 서기회)'가 발족되었다. 전국적으로 13,000여 명을 둔 이 단체의 회장인 강민경은 서기회가 팬클럽이 아닌 서태지의 뜻을 이어받은 문화단체라 하여 "맹목적인 열광이 아닙니다. 서기회 회원들은 모두 '태지보이스 팬답게 행동하자'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라고 밝혔다.

이들의 활동은 1996~1997년 겨울을 강타한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정국 때 PC통신상의 활동에서 드러났다.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얘기하는 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정신'이라는 믿음으로 블랙리본 내걸기를 제안했고, 사회문제란인 '시대유감'과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는가'란 토론방에서 10~20대의 젊은 회원들이 총파업 지지글을 올리는 등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 나우누리의 서태지와 아이들 팬클럽도 "태지보이스가 그렇게 부르짖던 자유와 도전은 모두 민주주의 아래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에 우리는 비민주적이고 국민을 기만한 노동법/안기부법 개악을 개탄하며 민주주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여 '근조 민주주의'라고 적힌 검은 리본을 내걸었다.

한편 같은 해 7월 30일에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도 당사 총재실에서 서기회가 준비한 영상 콘서트 축하 메시지를 녹화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좋은 의미에서 우리나라 신세대의 대표적 존재로 보며 소중히 생각한다"며 "서태지와 아이들은 은퇴했지만 예술인이란 대중의 사람으로 대중이 원하면 하루 속히 복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특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대표곡 <발해를 꿈꾸며>에서 "언젠가 우리 작은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갈려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가 있을까"란 가사를 외우며 "이런 가사는 정말 감동적"이라 평했다.

2.6. 하루아침에 난리가 난 말레이시아[편집]

한편 말레이시아에서는 국민 가수인 시티 누르할리자정규 1집을 내고 데뷔한 시기이다. 이 때 말레이시아 가요계는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지아나 제인이나 파우지아흐 라티프를 비롯한 기존의 인기 가수들에게 한방의 K.O를 날렸고, 시티는 이후 현재까지 말레이시아 가요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쥔 독재자가 되었다. 대한민국 가요계가 가수들의 자살 및 그룹 해체 등으로 슬픔에 잠겨있던 판에 말레이시아에서는 되려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3. 사건[편집]

3.1. 실제[편집]

3.2. 가상[편집]

4. 탄생[편집]

4.1. 실존 인물[편집]


4.2. 가상 인물[편집]

5. 사망[편집]

5.1. 실존 인물[편집]

5.1.1. 1월[편집]

5.1.2. 2월[편집]

5.1.3. 3월[편집]

5.1.4. 4월[편집]

5.1.5. 5월[편집]

5.1.6. 6월[편집]

  • 6월 9일 - 조지 번스: 미국의 원로 희극배우

  • 6월 16일 - 프랭키 사카이: 일본의 희극배우

  • 6월 23일 -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그리스의 전 총리

  • 6월 27일 - 앨버트 R. 브로콜리: 영화 007 시리즈 제작자

  • 6월 30일 - 박시춘: <신라의 달밤>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국민적인 대중음악 작곡가

5.1.7. 7월[편집]

5.1.8. 8월[편집]

5.1.9. 9월[편집]

5.1.10. 10월[편집]

  • 10월 3일 - 김말룡: 대한민국의 원로 노동운동가, 정치인

  • 10월 16일 - 르네 라코스트: 프랑스의 테니스 선수이자 라코스테의 창업주

  • 10월 19일

  • 10월 22일

    • 박정훈 이교: 강원도의 한 교도소에서 경비교도대로 복무하다 선임들의 가혹행위로 자살한 군 가혹행위 피해자. 2007년에 순직 결정이 내려짐.

    • 매튜 하딩: 첼시 FC의 전 부회장. 그를 죽음을 기리기 위해 스탬포드 브릿지에 그의 이름을 딴 관중석이 만들어졌다.

  • 10월 23일 - 안두희: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백범 김구암살

5.1.11. 11월[편집]

5.1.12. 12월[편집]

5.1.13. 일자 불명[편집]

  • 김경언: 1950~60년대에 <의사 까불이>, <칠성이> 등의 명랑만화를 다량으로 내 이름을 날린 만화가

5.2. 가상 인물[편집]

6. 데뷔[편집]

6.1. 가수[편집]

6.2. 만화계[편집]

  • 공성술 - <어느 날>

  • 권교정 - <헬무트>

  • 김나경 - <빨강머리 앤>

  • 김도하 - <엔젤하트>

  • 김수용 - <나간다 우라팡>

  • 김영희 - <해피앤딩 만들기>

  • 류기영, 문정후 - <용비불패>

  • 문희석 - <무적 10단>

  • 박시백 - <한겨레그림판>

  • 설이, 이철희 - <미인방>

  • 손은호 - <퇴마전사 아론>

  • 시마부쿠로 미츠토시 - <凄絶!!タコス駅西口>

  • 심재봉

  • 심혜진 - <왕의 바다>

  • 유상모 - <마스터즈>

  • 윤성남 - <나쁜 만화>

  • 윤인완 - <데자뷰(스토리 담당)>

  • 이원희 - <엑스트라>

  • 이장원 - <비너스의 꿈>

  • 이재용 - <춘추만평(연세춘추)>

  • 이정호

  • 이지유 - <나딘 밴드>

  • 임재원 - <영캅스>

  • 정태권 - 일요신문 시사만평

  • 천계영 - <탤런트>

  • 쿠보 타이토 - <ULTRA UNHOLY HEARTED MACHINE>

  • 한두영 - <악의 꽃>

  • 황정호 - <심판자>

6.3. 스포츠[편집]

6.4. 배우[편집]

6.5. 예능인[편집]

7. 은퇴[편집]

7.1. 가수[편집]

7.2. 스포츠[편집]

8. 베스트셀러[편집]

  • 아버지 - 김정현 저.

  •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박영규 저.

  •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 장승수 저.

  • 축제 - 이청준 저.

  • 좀머 씨 이야기 -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

  •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저.

[1]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사고 퍼레이드가 있었고 이듬해에는 나라가 부도났다.[2] Windows 95 한국 정발일은 1995년 11월 28일. 물론 2000년국민PC가 대중화한 것에 비하면 느린 보급 속도이긴 했지만.. 사실 PC 자체는 1993년에 정발된 한글 윈도우 3.1 이후 보급되긴 했다.[3] 출처: 대한민국 IT사 100(김중태 著)[4] 그런데 그 스포츠 행사들이 전체적으로 망했고 스포츠에 관심이 없다면 큰 타격은 없다.[5] 전두환.노태우 피고인 무기와 17년으로 감형,mbc 뉴스[6] 항소심 재판부, 전두환.노태우 피고인 벌 관대,mbc뉴스[7] 전두환 노태우 사면 여론조사 mbc뉴스[8] 뒤바뀐 영욕 18년의 드라마, 동아일보[9] 상기한 양심수인 함주명과 김성만의 경우는 그 다음해인 1998년에 사면으로 풀려난다.[10] 당시 가요톱10에서는 김건모의 5주 연속 골든컵 수상을 눈 앞에서 저지시키기도 했다![11] 현재는 택시 기사를 하고 있다.[12] 1994년 개정 당시 제외된 불고지죄와 찬양고무죄 수사조항을 부활시켰다.[13] 종전의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통합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노사협의회법을 대체하기 위한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을 통칭함.[14] 정리해고제 도입과 제3자 개입금지 조항 삭제, 복수노조 허용을 골자로 했다.[15] 이른바 “크리스마스 날치기”, “크리스마스 대파업” 사건으로 PC통신에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한다”라는 뜻으로 근조 문자(▶◀)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때 통신연대와 정보연대 SING 등 정보통신운동가들은 '총파업 통신지원단'을 만들어 투쟁활동을 지원하며 투쟁속보를 올리고 당시 고립 상태인 민주노총 지도부와의 채팅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온라인상에 총파업 지지 여론을 확산시켰다.[16] 당시 소위.[17] 프로젝트 시작 년도가 2010년.[18]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등장인물들 중 유일하게 정확한 생년월일이 밝혀진 인물이다![19] 작 중 연도가 정확히 밝혀진 애니메이션판 한정.[20] 설정상 봉지은과 동갑이지만 '인생 봉지은 마무리' 편에서 준희로 개명된다. 작가 설정 오류인듯[21] '인생 봉지은 4'편에서 봉지은이 초등학교 5학년일 때 방우리 나이가 12살이다.[22] 봉지은과 같은 학번인 15학번으로 봉지은과 동갑이다.[23] 신작 기준으로 1996년생이지만 원작에서는 1961년생이다.[24] 그의 사망으로 최종적으로 봄, 여름만 다룬 채 <에스키모와의 100일>이란 제목으로 결정되어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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