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르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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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르투
비아이니리 | Biainili
우라르투 지도
기원전 743년, 사르두리 2세의 우라르투
기원전 860년 ~ 기원전 590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위치
수도
수구니아
아르자슈쿤
투슈파 (기원전 832년 이후)
정치체제
국가원수
언어
민족
종교
 
 
 
 
 
 
 
 
 
 
 
 
 
 
 
 
언어별 명칭
Biai/Biainili
Վանի թագավորություն
Urartu
 
 
 
 
 
 
 
 
 
 
 
 
 
 
 
 
 
 
 
 
 
 
 
 

1. 개요2. 국호3. 역사
3.1. 기원3.2. 투슈파 시대3.3. 최전성기3.4. 시련 및 쇠퇴3.5. 멸망
4. 언어와 민족5. 정치6. 경제7. 종교8. 역대 군주9. 창작물에서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우라르투(Urartu)는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오늘날의 아르메니아고원 일대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우라르투인의 나라이다.

널리 알려진 '우라르투'라는 명칭은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그들을 가리켜 부른 이름이고, 이들 스스로는 '비아이(Biai)' 혹은 '비아이니리(Biainili)'라고 칭했다. 초창기의 강역은 반 호수 일대에 국한되었지만, 연이은 명군들의 통치로 전성기를 맞이하여 아르메니아고원 전역을 장악하였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노릴 정도로 성장하여 아시리아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올랐다. 그러나 기원전 7세기경 사르곤 2세의 공격으로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때마침 이란고원으로 남하한 인도유럽어족 아리아인 계열의 메디아인스키타이인과 충돌하면서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이후 강력한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한 메디아 왕국의 침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그들에게 합병되었다.

우라르투는 아르메니아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적인 정치집단으로, 다른 오리엔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역사에서 잊혀져 있었던 고대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아르메니아의 문화적 기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에는 1940년대 이후 중동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규모가 확대되면서 비로소 그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현재까지도 유적 발굴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2. 국호[편집]

 
 
 
 
 
 
 
 
 
 
 
 
 
 
 
 
 
 
 
 
 
 
 
 
앞에서도 설명했듯 우라르투인들이 스스로를 자칭했던 이름은 우라르투가 아니라 비아이니리(Biainili)이다. 우라르투어로 '비아이나(Biaina)'는 그들의 중심지였던 반 호수 주변 지역을 의미하고, 뒤의 '-ili'는 복수형/장소를 나타내는 접미사이므로, 번역하자면 "반 호수의 땅" 또는 "반 호수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1]

오히려 이들과 적대했던 아시리아에서 사용했던 명칭이 바로 우라르투(Urartu)인데, 아카드어로 "높은 곳" 혹은 "산악 지대"를 의미한다. 아시리아인들의 시각에서는 우라르투인들이 북쪽의 험준한 아르메니아고원에서 살고 있었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 명칭이 널려 알려져 이 왕국을 가리키는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다.[2][3]

그외에도 '비아이니리'를 현대어식으로 의역하여 부르는 명칭인 반 왕국(Kingdom of Van)도 있고,[4] 아시리아 기록에서 등장하는 나이리(Nairi) 등의 이름도 우라르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곧잘 사용된다. 특히 후자는 초기 우라르투 군주들이 스스로를 '나이리의 왕'으로 칭했다는 점에서 우라르투와 혼용되기도 한다.[5]
 
 
 
 
 
 
 
 
 
 
 
 
 
 
 
 
 
 
 
 
 
 
 
 

3. 역사[편집]

 
 
 
 
 
 
 
 
 
 
 
 
 
 
 
 
 
 
 
 
 
 
 
 
 
 
 
 
 
 
 
 
 
 
 
 
 
 
 
 
 
 
 
 
 
 
 
 
우라르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1274년경 아시리아의 국왕 샬마네세르 1세의 비문에서 등장한다. 이 비문은 아르메니아고원의 소왕국들과 부족들의 느슨한 연맹체였던 나이리를 구성하는 국가 중 하나로 우루아트리(Uruatri)를 언급하며, 샬마네세르 1세가 이들을 정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우루아트리는 반호 주변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나이리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나이리의 구성국들은 신아시리아에게 번번이 침공당하고 자원을 약탈당했다. 이러한 아시리아의 끊임없는 침략과 가혹한 조공 요구는 흩어져 있던 후르리계 부족들이 생존을 위해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다.
아라메 휘하의 우라르투
아라메 휘하의 우라르투
기원전 9세기에 이르러 우라르투는 신아시리아 제국에 대항하는 북방의 적으로써 아시리아 비문에 다시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아시리아의 끈임없는 침공 이후 흩어져 있던 나이리의 부족과 국가들은 우라르투의 국왕 아라메(기원전 858~844년경)의 통치 아래 통일 왕국으로 거듭났다. 아라메는 처음에는 수구니아(Sugunia), 이후에는 아르자슈쿤(Arzashkun)을 수도로 삼았으나, 이 두 도시 모두 신아시리아의 황제 샬마네세르 3세에 의해 함락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3.2. 투슈파 시대[편집]

 
 
 
 
 
 
 
 
 
 
 
 
 
 
 
 
 
 
 
 
 
 
 
 
기원전 9세기 전반, 아시리아가 수십 년간 일시적인 정체기에 빠진 사이 우라르투는 급격히 성장하여 아시리아를 짓누르고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였다. 루티프리의 아들 사르두리 1세(재위 기원전 834~828년경)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남쪽에서 쳐들어온 샬마네세르 3세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며, 국가의 군사력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수도를 반 호수 연안의 투슈파[6]로 옮겼다.

사르두리 1세는 이곳에서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당시 선진 제국이었던 아시리아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쐐기 문자(설형 문자)의 도입이다. 그는 투슈파의 거대한 바위벽에 자신의 업적을 새겼는데, 특이하게도 초기 비문들은 자국어가 아닌 아카드어(아시리아어)로 작성되었다. 이는 주변 강대국들에게 자신들이 더 이상 단순한 약탈 대상이 아닌, 대등한 문명국임을 선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아들 이슈푸이니(재위 기원전 828~810년경)는 이웃 나라 만나이 왕국의 도시 무사시르(Musasir)[7]를 합병하여 왕국의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로 삼았고, 우라르투의 주신인 칼디(Khaldi, Haldi) 숭배를 도입하였다. 또한 이슈푸이니는 이전 왕들이 아카드어로 기록을 남겼던 것과 달리, 우라르투어로 기록을 남긴 최초의 왕이었다. 그는 아들 사르두리 2세를 부왕으로 임명하기도 했으며, 이후 아시리아의 샴시-아다드 5세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슈푸이니와 함께 공동 섭정이었으며 그의 후계자인 메누아(재위 기원전 800~785년경)는 왕국을 크게 확장하고 광범위한 지역에 비문을 남겼다. 특히 이슈푸이니와 메누아의 공동 통치 기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가리키던 명칭을 '나이리'에서 '비아이니리(Bianili)'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3.3. 최전성기[편집]

 
 
 
 
 
 
 
 
 
 
 
 
 
 
 
 
 
 
 
 
 
 
 
 
터키 반 1
에 남아있는 우라르투 왕성 유적
우라르투의 군사적 위세는 메누아의 아들 아르기슈티 1세(재위 기원전 785~760년경) 치세에 정점에 달하며 고대 근동의 가장 강력한 왕국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아라스강세반호를 따라 더 많은 영토를 추가하였고, 아시리아 샬마네세르 4세의 원정을 좌절시켰다. 특히 기원전 782년에는 오늘날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의 기원이 되는 예레부니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하티(Hatti)와 수파니(Supani) 지역에서 잡아온 6,600명의 전쟁 포로들을 이 도시에 정착시켰다.

아르기슈티 1세의 뒤를 이은 사르두리 2세 치세 전반기의 전성기 시절 우라르투 왕국은 북쪽으로는 아라스강과 세반 호수를 넘어 오늘날의 아르메니아와 조지아 남부(흑해 연안 인근)까지, 서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 발원지, 동쪽으로는 타브리즈우르미아 호수 너머, 남쪽으로는 티그리스강 발원지까지 뻗어 있었다. 우라르투는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핵심 무역로를 장악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세련된 금속 세공 기술과 독특한 건축 문화를 발전시켰다.

황금기 우라르투 군사력의 핵심은 기마대였다. 아르메니아고원의 광활한 초원에서 사육된 말들은 나이리 시절부터 근동 지역에서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았다. 훗날 아시리아인들이 사르두리 2세를 패배시킨 뒤 기록한 글에서 "우라르투의 말들은 남쪽(아시리아)의 그 어떤 말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며 감탄할 정도였다. 이러한 기마 전력은 험준한 산악 지형을 넘나들며 제국을 방어하고 확장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즉위 첫해(기원전 745년)에 우라르투의 사르두리 2세를 패배시키면서 우라르투는 점차 몰락하기 시작한다. 또한 북쪽에서 내려온 새로운 위협인 유목 민족들로 인해 거대한 시련에 직면했다.
 
 
 
 
 
 
 
 
 
 
 
 
 
 
 
 
 
 
 
 
 
 
 
 

3.4. 시련 및 쇠퇴[편집]

 
 
 
 
 
 
 
 
 
 
 
 
 
 
 
 
 
 
 
 
 
 
 
 
기원전 714년, 우라르투 왕국은 북방 유목 민족인 키메르의 습격과 아시리아의 강력한 군주 사르곤 2세의 원정으로 인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사르곤 2세는 우르미아 호수 인근에서 우라르투의 국왕 루사 1세를 참패시켰으며, 우라르투의 종교적 성지였던 무사시르의 중앙 신전을 약탈하였다. 자신의 왕국과 성소가 유린당한 것에 절망한 루사 1세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루사 1세의 아들 아르기슈티 2세(재위 기원전 714~685년경)는 키메르에게 맞서 왕국의 입지를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비록 더 이상 아시리아를 위협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기원전 705년 아시리아의 새 왕 센나케립과 평화 협정을 맺으면서 안정을 찾았다. 이 평화 체제는 그의 아들 루사 2세(재위 기원전 685~645년경) 시대까지 이어지며 우라르투에 다시 한번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루사 2세는 대규모 신도시들을 건설하고 행정을 정비하며 왕국의 마지막 황금기를 장식했다.

그러나 루사 2세의 사후, 우라르투는 북방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키메르와 스키타이 침략자들의 공격으로 급격히 약화되었다. 사방에서 가해지는 압박을 견디지 못한 우라르투는 결국 숙적이었던 아시리아에 의존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루사 2세의 아들인 사르두리 3세(재위 BC 645~635년경)가 당시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을 향해 자신을 낮추어 "아버지"라고 부른 기록은, 한때 아시리아와 패권을 다투던 우라르투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준다.
 
 
 
 
 
 
 
 
 
 
 
 
 
 
 
 
 
 
 
 
 
 
 
 
 
 
 
 
 
 
 
 
 
 
 
 
 
 
 
 
 
 
 
 
 
 
 
 
금석문 기록에 따르면, 사르두리 3세의 뒤를 이어 루사 3세와 그의 아들 루사 4세가 차례로 즉위하여 왕국의 마지막을 지켰다. 여기서 루사 3세의 부친인 에리메나(Erimena)의 정체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635년부터 620년까지 실제로 왕으로서 다스렸다고 보기도 하지만, 루사 3세가 기존 왕통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세운 가문의 시조이며 에리메나 본인은 왕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러한 불분명한 계보는 당시 우라르투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의 증거이다.

기원전 612년, 메디아의 국왕 키악사레스신바빌로니아나보폴라사르스키타이 세력과 손을 잡고, 내전으로 심하게 약화된 아시리아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아시리아라는 방벽이 사라지자 메디아의 다음 타겟은 자연스럽게 우라르투로 향했다. 기원전 590년경, 메디아 군대는 우라르투의 요새로 이루어진 수도 투슈파를 점령하였고, 이로써 독립국으로서 우라르투의 주권은 사실상 종말하게 되었다.

다만 우라르투의 최종적인 소멸 시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우라르투의 잔존 세력이 기원전 6세기 중반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 의해 최종적으로 정복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투슈파를 비롯한 수많은 우라르투 요새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강력한 화재 및 파괴의 흔적은 이 왕국이 평화적이지 않게 무너졌음을 시사하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4. 언어와 민족[편집]

 
 
 
 
 
 
 
 
 
 
 
 
 
 
 
 
 
 
 
 
 
 
 
 
우라르투어는 왕국의 중심지였던 반호 인근에서 주로 사용되었기에, 지명을 따서 반어(Vannic)라고도 불린다. 이 언어는 우라르투 왕국의 공용어이자 지배 계층의 언어였음이 확실하나, 당시 피지배 계층의 구성과 그들이 사용한 언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여전히 활발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우라르투어는 메소포타미아의 미탄니에서 사용되었던 후르리어와 함께 후르리우라르투어족[8]을 이룬다. 후르리어는 적어도 기원전 2천년기 이전부터 문증되며, 우라르투어는 우라르투 왕국이 존속하던 때인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문증된다.

우라르투어 기록은 주로 아시리아에서 도입된 쐐기 문자를 사용하여 바위벽이나 점토판, 금속 유물 등에 새겨졌다. 초기 왕들은 아카드어를 기록 언어로 사용했지만, 점차 우라르투어 고유의 문법과 표현을 쐐기 문자를 이용해 독자적인 기록을 시작했다. 또한, 비문 외에 상형문자와 유사한 독자적인 기호 체계도 일부 유물에서 발견되었다.

우라르투 왕국을 건국하고 통치한 주도 세력이 우라르투인이었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피지배 계층까지 모두 우라르투인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피지배 계층이 우라르투인과 다른 민족이었다면, 그들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아르메니아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각에서는 우라르투 왕국이 다민족 국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왕국의 멸망 이후 우라르투어는 급격히 소멸한 반면, 원시 아르메니아어가 그 자리를 즉각적으로 대체한 점은 이미 왕국 존속 당시에 일반 민중 사이에서 아르메니아어가 널리 쓰이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증거로 꼽힌다. 즉, 우라르투어는 왕실과 행정 중심의 상층어였고, 아르메니아어는 민중들이 쓰는 기층어로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5. 정치[편집]

 
 
 
 
 
 
 
 
 
 
 
 
 
 
 
 
 
 
 
 
 
 
 
 
우라르투의 정치는 종교와 밀착된 신권정치였다. 국왕은 우라르투의 주신인 칼디(Khaldi, Haldi)의 지상 대리인이자 최고 제사장으로 군림하였고 모든 정복 전쟁과 대규모 국책 사업은 "칼디 신의 명령"이라는 명분 하에 수행되었으며, 왕들은 비문을 통해 자신의 승리가 신의 가호 덕분임을 선포하였다. 신권정치를 통해 우라르투는 나이리의 산악 부족들을 결속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웃한 아시리아바빌로니아와는 달리, 우라르투는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이 실질적으로 미미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제국들에서는 사원이 방대한 토지와 자원을 소유하며 국가 안의 독립적인 주체로 기능했던 것과 반대로 모든 도시가 왕실의 직할 재산으로 간주되었다.

당시 근동 지역의 초강대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정치체제와 아주 닮았다. 국왕은 자신을 "위대하고 강력한 우라르투의 왕"이라 칭하며 아시리아식 전제군주제를 모델로 삼았다. 그리고 우라르투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전국을 여러 개의 주로 나누었으며 국왕이 직접 임명한 지방 총독들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총독은 각 지역의 요새에 상주하며 조공, 군사 소집, 그리고 관개 시설을 관리했다. 또한 우라르투는 요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지형적 특성상 평지의 대도시보다는 험준한 바위산 위에 견고한 요새를 짓고 그 안에 행정 시설, 무기고, 식량 저장고를 집중시키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6. 경제[편집]

 
 
 
 
 
 
 
 
 
 
 
 
 
 
 
 
 
 
 
 
 
 
 
 
메누아 운하
메누아 운하(Menua Canal)
우라르투 경제의 근간은 농업이었으나, 강수량이 적고 지형이 험준한 고원지대에서 농경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인공적인 물 관리가 필수적이었다. 이슈푸이니, 메누아, 아르기슈티 1세, 사르두리 2세, 루사 1세를 비롯한 우라르투의 왕들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운하와 저수지, 지하 수로를 건설하는 데 집중했다. 특히 메누아 시대 때 건설한 70km 길이의 '메누아 운하(Menua Canal)'[9]는 우라르투의 수도 투슈파에 모든 물을 공급했고, 몇 차례의 복원을 걸쳐 오늘날까지도 일부가 사용될 정도이다. 이러한 수리 시설을 통해 보리, , 참깨 등의 작물이 대량으로 재배되었으며, 이는 척박한 고원 지대를 곡창지대로 탈바꿈시켰다.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도 우라르투의 관개시설에 감탄했는데, 정작 사르곤 2세는 기원전 714년 아시리아-우라르투 전쟁 중에 우라르투 관개 시스템을 파괴했다. 그는 우라르투를 침공하면서 우라르투의 관개시설을 조사했다. 예레부니 주변에서 발견된 편지에서 그는 지하 석관의 사용에 대해 언급하였다. 특히 루사 2세가 건설한 수도 투슈파의 교외 지역인 루사히닐리(Rusahinili)의 우라르투 관개 시설은 인공 호수와 지하 운하 및 파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19세기 후반 운하의 보수 전까지 기능했지만 그 설계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루사 1세가 점토판에 이에 대해 쓴 설명은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

우라르투에서는 농업이 상당히 발달했다. 대부분의 경작 도구는 철로 만들어졌고 위 관개시설 덕분에 고원에서도 농사가 잘 지어질 수 있었다. 주요 작물은 , 보리, 호밀, 기장, 참깨, 렌틸병아리콩이었다. 우라르투 쐐기 문자 표에는 스펠트밀의 재배에 대한 내용이 기록돼 있기도 하다. 곡물은 을 굽고 맥주양조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참깨는 식물성 오일으로 가공되었다. 기후와 관개 시스템 덕분에 포도 재배와 양조가 발달했고 사과, 자두, 석류, 복숭아, 체리, 호두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산악 지형의 광활한 목초지를 활용한 축산업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탱했다. , , 염소 등은 식량, 의복을 위해 사육됐고 주변국과의 무역에서 화폐로도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우라르투는 나이리 시절부터 고대 근동에서 최고의 사육지로 명성이 높았다. 우르미아 호수 인근에서 사육된 우라르투의 군마들은 체력이 뛰어나고 영리하여 아시리아 왕들조차 탐을 냈다고 한다. 미탄니처럼 전차병으로 유명했다.

아르기슈티 1세 시기 우라르투는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캅카스를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에 위치하여 중계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화폐 대신 물물교환을 기반으로 이들은 금속 제품과 와인, 말을 팔고 부족한 원자재와 사치품을 들여왔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전쟁에 매우 취약했는데, 기원전 714년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가 우라르투의 관개 시설을 집중적으로 파괴하고 수많은 와인 저장고를 약탈하면서 국가는 아주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결국 우라르투는 경제적으로 쇠퇴하게 된다.
 
 
 
 
 
 
 
 
 
 
 
 
 
 
 
 
 
 
 
 
 
 
 
 

7. 종교[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우라르투 신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우라르투의 종교, 우라르투 신화는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통합을 도왔다. 후르리, 아카드, 하야사-아지, 히타이트의 다양한 신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전쟁의 신 칼디, 폭풍의 신 테이스파스, 태양신 시비니를 주축으로 하는 거대한 다신교 체제를 구축하였다. 특히 주신인 칼디는 제국의 수호신이자 왕실의 상징으로서 숭배되었는데, 국왕은 자신을 칼디의 지상 대리인이자 최고 제사장으로 규정하여 모든 전쟁 및 사업을 "칼디의 명령"에 따른 신성한 일으로 선포함으로써 산악 지대에 흩어져 있던 여러 부족을 하나로 통합했다. 이러한 종교 시설은 주로 요새 내부에 위치하여 철저히 국왕의 통제 하에 운영되었다. 신전이 독립적이었던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우라르투 종교는 왕실에 부속된 이데올로기적 도구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8. 역대 군주[편집]

 
 
 
 
 
 
 
 
 
 
 
 
 
 
 
 
 
 
 
 
 
 
 
 

9. 창작물에서[편집]

 
 
 
 
 
 
 
 
 
 
 
 
 
 
 
 
 
 
 
 
 
 
 
 
  • 토탈 워: 파라오: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이민족으로 등장한다. 해당 지역에서 현지 용병으로 고용할 수도 있다.
 
 
 
 
 
 
 
 
 
 
 
 
 
 
 
 
 
 
 
 
 
 
 
 

10.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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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비아이나'라는 명칭은 훗날 이 지역의 이름인 '(Van)'의 어원이 되었다.[2] 다만 기원전 13세기 샬마네세르 1세의 기록에서 "우라트리를 정복했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3] 히브리어로 음차된 명칭이 '아이라랏' 혹은 '아라랏'으로,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아라랏산이 이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그리고 구약성경예레미야서 51장 27절에는 "땅에 기를 세우며 열방 중에 나팔을 불어서 열국을 예비시켜 그를 치며 아라랏과 민니와 아스그나스 나라를 불러모아 그를 치며 대장을 세우고 그를 치되 사나운 황충 같이 그 말들을 몰아오게 하라"라는 구절이 있기도 하다.출처[4] 아르메니아어로 우라르투를 부르는 표현이 '반 왕국(Վանի թագավորություն)'이기도 하다.[5] 본디 나이리는 아르메니아 지역에 있던 부족 연맹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우라르투 역시 나이리의 일원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어쨌든 우라르투가 이들을 통합하고 나아가 중앙집권 국가로 거듭나면서 '나이리'라는 이름은 점차 희석되었고, 대신 앞서 나왔던 '비아이니리'라는 국호가 정착되었다.[6]튀르키예.[7] 고대 후르리인들의 성소이자 고대 근동의 핵심 종교 도시였다.[8] 이 어족이 카르트벨리어족이나 엘람어, 북캅카스어족과 동계라는 가설이 존재한다. 특히 북캅카스어족과 동계라는 설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재구한 북동캅카스조어에는 사과나 배 등과 같은 농업 관련 어휘들이 자주 보여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위치한 이 왕국의 후르리우라르투어족과 연결시켜보려 하지만 주류 학계에서는 이를 회의적으로 보고 해당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9] 샤미람 운하(Shamiram Canal)로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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