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석

최근 수정 시각:
18
편집
IP 우회 수단(프록시 서버, VPN, Tor 등)이나 IDC 대역 IP로 접속하셨습니다. (#30172495)
(VPN이나 iCloud의 비공개 릴레이를 사용 중인 경우 나타날 수 있습니다.)
잘못된 IDC 대역 차단이라고 생각하시는 경우 게시판에 문의하시길 바랍니다.
토론역사
 
 
 
 
 
 
 
 
 
 
 
 
 
 
 
 
 
 
 
 
 
 
 
 
 
다른 뜻 아이콘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박영석(동명이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펼치기 · 접기 ]
청룡장 부장

1976
양정모
레슬링
1977
고상돈
산악
1984
김성집
역도
1984
서향순
양궁
1985
필립 마운트배튼
승마(행정)
1986
이건희
레슬링(행정)
1986
최윤희
수영
1988
현정화
탁구
1989
정몽구
양궁(행정)
1992
황영조
마라톤
1997
정몽준
축구(행정)
2001
심권호
레슬링
2001
엄홍길
산악
2002
손기정
마라톤
2002
박영석
산악
2006
김일
프로레슬링
2008
박세우
빙상(지도자)
2010
박세리
골프
2016
김연아
피겨 스케이팅
2016
김정환
펜싱
2017
기보배
양궁
2019
구본길
펜싱
2020
박승희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2021
김홍빈
산악
2022
손흥민
축구
2022
김아랑
쇼트트랙
2022
설기관
보디빌딩
2024
김준호
펜싱
2026
이상혁
e스포츠
[ 펼치기 · 접기 ]
박영석
2001년, 세계 7번째
엄홍길
2001년, 세계 8번째
한왕용
2003년, 세계 11번째
김재수
2011년, 세계 27번째
김창호
2013년, 세계 31번째
김미곤
2018년, 세계 41번째
김홍빈
2021년, 세계 44번째
†표시는 사망을 의미
인류 최초 산악 그랜드슬램 달성
박영석
朴英碩 | Young Seok Park
external/www.kye...
출생
사망
2011년 10월 18일 (향년 47세)
가족
배우자 홍경희, 장남 박성우, 차남 박성민
학력
숭의국민학교 (졸업)
동북중학교 (졸업)
오산고등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동국대학교 대학원 (체육교육학 / 석사)
종교
등반 경력
인류 최초 산악 그랜드슬램 달성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개척
그 외 여러 기록 달성
직업
링크
 
 
 
 
 
 
 
 
 
 
 
 
 
 
 
 
 
 
 
 
 
 
 
 
 

1. 개요2. 어린 시절3. 산악인의 삶4. 실종 및 사망 처리5. 여담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external/www.kbm...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입구에 붙어 있는 히말라야 14좌 완등 기념 부조
대한민국산악인. 세계 최초로 탐험가 그랜드슬램 / 산악 그랜드슬램의 위업을 달성했다.
 
 
 
 
 
 
 
 
 
 
 
 
 
 
 
 
 
 
 
 
 
 
 
 
 
 
 
 
 
 
 
 
 
 
 
 
 
 
 
 

2. 어린 시절[편집]

 
 
 
 
 
 
 
 
 
 
 
 
 
 
 
 
 
 
 
 
 
 
 
 
 
 
 
 
 
 
 
 
 
 
 
 
 
 
 
 
그가 산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친구 때문이었다. 어릴 때 친구 집이 설악산에서 산나물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를 했는데 그 친구 따라 우연히 대청봉에 올랐다가 산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방학 때마다 설악산을 찾았다.
 
 
 
 
 
 
 
 
 
 
 
 
 
 
 
 
 
 
 
 
 
 
 
 
 
 
 
 
 
 
 
 
 
 
 
 
 
 
 
 

3. 산악인의 삶[편집]

 
 
 
 
 
 
 
 
 
 
 
 
 
 
 
 
 
 
 
 
 
 
 
 
 
 
 
 
 
 
 
 
 
 
 
 
 
 
 
 
그러다가 1980년 동국대 마나슬루 원정대가 등정에 성공하는 장면을 보고 산악인이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1983년 동국대 체육교육과에 진학, 산악부에 들어갔다.

1993년 아시아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한 것을 시작으로 온갖 각종 기록을 세우며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2004년 세계 최단 기록으로 무보급 남극점 도달에 성공, 이듬해 북극점에 도달해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그가 거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세계 최초 6개월간 최단 등정 히말라야 8,000m급 5개봉 등정
  • 세계 최초 1년간 히말라야 8,000m급 최다등정 (6개봉) 달성 (기네스북 등재)
  • 아시아 최초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1993년 달성)
  • 동계 랑탕 리룽 세계초등 (1989년 등정)
  • 세계 최단기간 무보급 남극점 도달 (2004.1.12.)
  • 북극점 도달 (2005.4.30.)
  • 인류 최초 산악 그랜드 슬램 달성 (2005.4.30.) (기네스북 등재)
  • 단일팀 세계 최초 에베레스트 횡단 등반 성공 (2006.5.11.)
  • 2007 중국 사천성 희조피크 세계초등
  • 2009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 루트(새로운 등반길로) 등정

게다가 그는 등정주의가 아닌 등로주의, 즉 새로운 산악길을 만들고 그만큼 험하디 험한 산길로 가며 도전하던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겪었는데 1994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도중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떨어졌지만 몸에 묶은 로프 덕에 살아났다. 이때 얼굴을 빙벽에 부딪혀 얼굴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당했는데, 붕대로 대충 고정시키고 내려오다가 너무 고통스러워 후배에게 차라리 크레바스에 밀어넣어 죽게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1995년에는 눈사태로 파묻혔다가 살아났고,[3] 1997년 다울라기리에서는 크레바스에 빠졌다가 겨우 나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4] 이런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겪고도 평생 산악인으로 살았고 최후까지 산에 오르다 죽었으니 산을 엄청 사랑했던 인물이었던 건 틀림없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방침을 가장 중요시하던 그는 선배 엄홍길과 더불어 전설적인 산악인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 걸러 들어야 할 것이 박영석이 실제로는 상업주의, 마케팅주의적 면모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영석은 막대한 스폰서쉽을 기반으로 대규모 원정대를 꾸리고 노멀루트로 산소와 고정로프를 사용하는 극지법으로 등반했다.[5] 14좌 등반에 있어서 산소통을 5개 (칸첸중가, K2 -동영상 41분 45초 참고)나 사용하여 (신동아 609호. 2010년 5월 18일자) 2025년 현재 시점에서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사용량이며 14좌 완등 당시에는 압도적인 1위였다. 박영석의 14좌 완등 이전 완등자는 7명인데 이들이 사용한 산소통 횟수를 모두 합쳐도 박영석의 횟수보다 적다(...). 즉 박영석 자신이야 말로 정상사냥꾼, 등정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은 장본인이다. 박영석 이전의 14좌 완등자들인 메스너, 쿠쿠츠카, 로레탕, 카르솔리오, 비엘리키, 오이아르자발, 마티니 중 메스너, 로레탕, 오이아르자발은 무산소로 완등했고 쿠쿠츠카, 카르솔리오[6], 비엘리키는 1번, 마티니만 2번이다. [7]

2003년 2월 11일 KBS 김동건의 리얼토크 41분 45초부터

2000년대 이후에는 14좌 완등 자체가 그리 명예로운 타이틀도 아니며 무산소 완등자만 어느 정도 높게 평가 받는다. 성과주의와 마케팅주의에만 매달려 기업과 유착해 막대한 스폰싱을 받아 그를 기반으로 대규모 원정대를 꾸려 고정로프와 산소통을 사용하여 정상을 오르고 그 성과를 등반을 잘 모르는 일반인을 대상으로한 마케팅에 활용하는 형태, 즉 '등반의 순수성'을 상실한 것이 한국 산악계의 오랜 문제점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박영석, 엄홍길, 김재수, 한왕용과 같은 소위 14좌 완등자들이 있다.

실제 한국 산악계, 더 나아가 해외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들은 위에 열거된 14좌 완등자들이 아니라 유학재, 박정헌, 정승권, 최석문, 김창호, 임덕용, 남선우와 같이 신루트 개척, 초등, 단독 등반, 동계 등반의 기록을 남긴 등반가들이다. 이들이 과연 일반인들에게 얼마나 알려져있는가?

가셔브룸 4봉의 빛나는 벽의 중앙립 루트가 개척되었을 때 국내 언론의 반응은 8,000m도 안되는 산을 등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반응이 나왔다. 반면 해외에서는 쿨러닝에 비유하며 산악 후진국[8]에서 세계 최고의 업적을 세웠다고 칭찬했다.
 
 
 
 
 
 
 
 
 
 
 
 
 
 
 
 
 
 
 
 
 
 
 
 
 
 
 
 
 
 
 
 
 
 
 
 
 
 
 
 

4. 실종 및 사망 처리[편집]

 
 
 
 
 
 
 
 
 
 
 
 
 
 
 
 
 
 
 
 
 
 
 
 
 
 
 
 
 
 
 
 
 
 
 
 
 
 
 
 
2011년 10월 18일, 후배인 강기석(33) & 신동민(37)과 함께 안나푸르나에 한국인 경로(코리안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등반하던 중 연락이 두절됐다. 눈사태에 휘말린 것으로 추정되며, 수색대가 실종 예상 지역을 수색했으나 흔적을 찾지 못했다.[9] 결국 행방불명으로 인한 인정 사망 처리됐다. 이에 따라 대한산악연맹은 10월 30일 위령제를 지냈다.[10] 훗날 눈이 녹는 등의 지형 변화로 인해 눈에 묻힌 박영석과 휘하 대원들의 시신이 밖으로 드러나고, 지나가던 등산가들이 발견해주지 않는 한 영원히 안나푸르나에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KBS에서 당시 동행 취재해서 출국[11]부터 실종 상황까지 함께 하게 되었는데 이는 나중에 '박영석, 안나푸르나 마지막 10일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로 방송됐다. [KBS 스페셜] 박영석 대장, 안나푸르나 마지막 10일의 기록
 
 
 
 
 
 
 
 
 
 
 
 
 
 
 
 
 
 
 
 
 
 
 
 
 
 
 
 
 
 
 
 
 
 
 
 
 
 
 
 

5. 여담[편집]

 
 
 
 
 
 
 
 
 
 
 
 
 
 
 
 
 
 
 
 
 
 
 
 
 
 
 
 
 
 
 
 
 
 
 
 
 
 
 
 
external/www.cam...
  • 상단부에 있는 히말라야 14좌 완등 부조의 제막식 사진.[12] 이 부조는 박영석이 살아있을 당시[13]에 제작된 것이라,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도서관 개축 기념 겸해서 붙여놓은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실종사고 이후로는 동악인들의 성지 비슷한 곳이 되었다.
  • 허영만과 매우 친해서 허영만 만화 식객이나 부자사전에서도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허영만과 친구들이 추진한 바다 여행을 그린 책자 <집 나가면 생고생 그래도 나간다>(2010)에서도 나왔는데 이 책에선 8천미터 산도 여러번 자유롭게 오고간 자신이 바다에서 배멀미하던 것에 기겁하던 이야기를 담기도 했다. 허영만과 함께 한 힐링 캠핑 - 뉴질랜드 캠퍼밴 여행에도 일행의 한 명으로 나오며, 허영만 원작의 영화 타짜에도 허영만 본인과 함께 카메오로 출연했다. 그만큼 허영만과 형님아우하며 친하게 지냈기에 그의 실종 및 사망 보도에 허영만이 직접 실종 장소를 찾았고, 끝내 수색에 실패하자 안타까워하며 명복을 빌었다. 식객(만화) 복어 편에서는 허영만과 박영석이 황복을 먹다가 '히말라야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파주에서 복어 먹다가 죽었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웃을 일'이라고[14] 농담을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대사에 담겨진 '산사나이는 산에서 죽어야지 제대로지~'란 느낌으로 박영석이 안나푸르나에서 삶을 마감한 것.
  • 선배인 엄홍길도 명복을 빌면서 "산악인으로서 언젠가 맞이할 일이자 각오할 일[15]이지만 어린 녀석이 먼저 가다니..."라고 회고했다.
  • 그의 죽음에 대하여 등산업계의 무리한 마케팅 경영이 죽게 만들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기사 속에서 인터뷰의 당사자로 나오는 박기성 산악평론클럽 대표는 기사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며 모교인 동국대학교 산악부 홈페이지에 '기사로 심려를 끼쳐드린 사람이 동국산악회 선후배들께 사죄합니다'라는 사과문을 게재하였다.[16] 사과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본인은 히말라야 거벽등반 경험이 없기 때문에, 현지 상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단지 친하게 지내는 산악계 후배가 미디어오늘과 이번 참사에 관한 인터뷰를 한다기에 동행을 했을 뿐인데, 정작 기사에서는 메인 인터뷰이였던 후배 산악인은 유령처럼 사라졌고 <미디어오늘> 기자는 "들은 대로 썼을 뿐"이라 하니 혼자서 덤터기를 쓰는 처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디어오늘 기자에게 기사가 나가기 전에 미리 보여달라는 요구를 하였으나[17], 끝내 보여주지 않았고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을 기회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들어있다. 기사의 내용 자체는 기업체와 언론의 이벤트 마케팅에 휘둘리는 산악계 현실에 대한 비판[18]이지만, 과정은 상당히 부적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 2016년 8월 박영석의 차남인 박성민씨가 포함된 수색대가 안나푸르나로 출발하였으나, 끝내 시신을 찾지 못했다. #
  • 2021년 7월, 1999년 박영석과 함께 등반하다가 실종된 허승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
  • 요리 실력이 출중했다. 사실상 대원들에게 있어 그의 인기 비결이기도 한다. 원정 때마다 건조한 식재료들을 바리바리 챙기기도 했으며 어릴 때 꿈이 요리사였던 만큼 요리를 취미로 삼았다. 그가 만든 요리는 대표적으로 짬뽕, 김치말이국수, 오징어순대, 홍어회 등 못하는 요리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짬뽕은 원정 때마다 요리했다고.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1] 2005년 불기 2549년 부처님오신날불자대상을 수상했다.[2] 도메인 작동 안 됨[3]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4] 크레바스에 떨어지기 직전 고정이 되어있는지 알 수 없는 2개의 고리를 발견하고 그 중 하나에 자신의 로프를 연결하였다. 그 직후 크레바스에 빠졌는데 운이 좋게도 연결한 고리가 고정된 고리였다.[5] 이는 엄홍길, 오은선, 김재수 대장과 같이 한국에서 추앙받는 산악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으나 박영석의 경우 좀 달라서 기본적으로 알파인 방식을 선호했고 캠프를 만들고 오르락 내리락한 건 맞으나 C1, C2를 베이스로 C3.4를 생략하거나 C2.3.4 전부 생략하고 한번에 올라가는 세미 알파인 방식을 사용했다.[6] 그것도 하산시에만 소지[7] 그러나, 정작 박영석 본인은 14좌 등반에 있어 산소통 사용을 K2와 칸첸중가 2번만 사용 하였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8] 1970, 1980년대도 아니고 1997년이다. 이때 까지도 한국은 등산 후진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9] 경사면에 다 쓴 로프가 놓여져 있었기에 벽에서 추락한 것은 아니었고, 김창호 대장이 그 밑으로 펼쳐진 크레바스를 수색했으나 눈 말고 다른 무언가가 떨어진 흔적은 없었다. 이를 통해 박영석 대장의 등반대는 벽을 내려와서 크레바스까지 잘 통과했으나 그 이후의 설산 평원인 플라토를 건너다가 눈사태에 휘말려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10] 애초에 고산에서 실종되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고 사망으로 직결되는 거나 마찬가지다.[11] 출국장에서 걱정에 눈물을 쏟는 아내에게 '울지 마라. 내가 뭐 죽으러 가는 거냐'라며 짐짓 큰 소리를 치는 장면이 나온다. 가족들을 안심시키려 했던 말이 현실이 되어버린 안타까운 장면.[12]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에도 박물관을 들어가기 전 1층에 있다.[13] 2006년 3월 21일에 부조식이 있었다.[14] 식사중 황복의 알을 계속 먹자 식당 주인이 중독사고를 우려하여 알을 담긴 접시를 뺏어 버렸다.[15] 엄홍길 문서에 나와 있듯이 그도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음을 알 수 있다. 아예 한국을 나갈 때 유서를 쓰고 간다고 할 정도.[16] 자유게시판에서 글쓴이 박기성으로 검색하면 나온다.[17] 사실 기사가 나가기 전에 미리 보여달라는 요구를 하면 들어주는 기자는 거의 없다. 인터뷰 후에 다시 유선상으로 팩트체크를 하면 모를까. 사전검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18] 이전에도 오은선고미영의 여성 세계 최초 14좌 완봉 경쟁이 있었는데, 블랙야크 대 코오롱의 스폰서 대결이 과열되면서 9년 동안 3개봉을 등정하던 것을 1년에 4개봉씩 등정하는 오버페이스를 벌이게 되었다. 결국 오은선은 칸첸중가 미등정 논란으로 산악계에서 생매장당하고, 고미영 씨는 추락사하자 해당 기사와 똑같은 내용의 비판이 산악계 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