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히딩크

최근 수정 시각:

거스 히딩크의 역임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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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딕 아드보카트
(1992~1994)

거스 히딩크
(1994~1998)

프랑크 레이카르트
(1998~2000)

루이 판 할
(2012~2014)

거스 히딩크
(2014~2015)

다니 블린트
(2015~2017)
(감독대행: 프레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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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허정무호 (1기)
(1998 ~ 2000)

히딩크호
(2001 ~ 2002)

코엘류호
(2003 ~ 2004)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허정무
(1998~2000)
(감독대행: 박항서)

거스 히딩크
(2001~2002)
(감독대행: 김호곤)

움베르투 코엘류
(2003 ~ 2004)
(감독대행: 박성화)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알렉산드르 보로듀크
(2005~2006)

거스 히딩크
(2006~2010)

딕 아드보카트
(2010~2012)


발렌시아 CF 역대 감독

빅토르 에스파라고
(1988~1991)

거스 히딩크
(1991~1993)

엑토르 누녜즈
(1993~1994)

호세 마누엘 리엘로
(1994)

거스 히딩크
(1994)

카를루스 아르베르투 파헤이라
(1994~1995)


레알 마드리드 CF 역대 감독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1]
(1998)

거스 히딩크
(1998~1999)

존 토샥
(1999)


첼시 FC 역대 감독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2008~2009)

거스 히딩크
(2009)

카를로 안첼로티
(2009~2011)

주제 무리뉴
(2013~2015)

거스 히딩크
(2015~2016)

안토니오 콘테
(2016~)

거스 히딩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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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사커 선정 2002 올해의 감독

거스 히딩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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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휘스 히딩크[2])
(Guus Hiddink)

출생

1946년 11월 8일 (71세)
네덜란드 헬데를란트 주 파르세벌트 시

국적

네덜란드

신체

182cm

포지션

미드필더

소속

선수

데 그라프샤프 (1967 - 1970)
PSV 아인트호벤 (1970 - 1972)
데 그라프샤프 (1972 - 1976)
NEC 네이메헌 (1977 - 1981)
워싱턴 디플로매츠 (1978 / 임대)[3]
새너제이 어스퀘이크스 (1980)[4]
데 그라프샤프 (1981 - 1982)

감독

데 그라프샤프 (1982 - 1984 / 수석코치)
PSV 아인트호벤 (1984 - 1987 / 수석코치)
PSV 아인트호벤 (1987 - 1990)
페네르바흐체 SK (1990 - 1991)
발렌시아 CF (1991 - 1994)
네덜란드 대표팀 (1994 - 1998)
레알 마드리드 CF (1998 - 1999)[5]
레알 베티스 (2000)[6]
대한민국 대표팀 (2001.01 - 2002.07)
PSV 아인트호벤 (2002.08 - 2006)
호주 대표팀 (2005 - 2006)
러시아 대표팀 (2006 - 2010)
첼시 FC (2009)[7]
터키 대표팀 (2010 - 2011)
FC 안지 마하치칼라 (2012 - 2013)[8]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 (2014 - 2015)
첼시 FC (2015 - 2016)[9]

국가
대표

없음.


1. 개요2. 선수 커리어3. 감독 커리어4. 과학 징크스5. 한국과의 관계
5.1. 한국에서의 위상과 평가5.2. 한국에 대한 애정5.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 재부임설
6. 탈세 흑역사7. 트리비아8. 감독 기록
8.1. 리그 기록8.2. 대회 기록

1. 개요[편집]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외국인 감독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감독

네덜란드 출신의 전 축구선수, 축구 감독. 네덜란드특명전권공사.[10]

Guus Hiddink. 네덜란드어 발음으로는 휘스 히딩크에 가깝지만[11] 본인의 요청으로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거스' 히딩크라 표기한다. 다만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당시 '휘스' 또는 '후스' 히딩크라고 표기하던 언론도 있긴 했다. 한국팬들은 그가 부진할 때 '오대영'이라 부르다가, 그가 4강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보여주고 나자 '구국의 명장 희동구'라고 칭송했다. 참고로 중화권에서는 후이딩커(暉定克)이라고 표기했다.[12]

히딩크의 가문은 고향인 파셰펠트에서 수백년간 뿌리를 내린 명성이 있는 집안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 게트 히딩크는 2차 대전 당시 겉으론 시청 공무원직을 수행하며 암암리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는데,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진 않았지만 유태인들을 숨겨주거나 배식표를 빼돌려 그들의 끼니를 해결해 주었고, 독일군이 배급하는 식량을 빼돌려 레지스탕스의 군량을 조달했으며, 적지에 떨어진 미군 조종사들을 중립국으로 피신시키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아이젠하워로부터 감사장을 전달받았다.

6명의 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난 히딩크는 어린 시절 개구쟁이로 학교 수업을 자주 땡땡이를 치곤 했다고 한다. 사냥을 좋아하는 외할아버지가 부추겼다고 하는데, 덕분에 외할아버지로부터 모험심이나 결단력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아예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입수한 적도 있었다.[13] 아무튼 이런 개구쟁이다 보니 공차는 걸 좋아해서 결국 축구선수가 되었다.

선수 시절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감독으로서는 맡는 팀마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결과를 내놓았다. 이를 두고 히딩크 매직이라 한다. 20세 연하의 흑인 엘리자베스 피나스가 여자 친구이다.[14][15] 여자친구 때문에 신문선에게 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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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감독 시절.

대한민국 감독 시절.

2. 선수 커리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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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는 처음부터 프로선수가 되고자 다른 선수들처럼 유스팀에 입단해서 프로선수가 된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 스포츠 전문대학(CIOS)에 입학하여 지도자를 목표로 했다고 한다. CIOS 졸업 후 2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16] 데 그라프샤프의 코치로 부임했지만 나이도 스물이고 기량도 괜찮았기 때문에 감독이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해 곧바로 수락했다고 한다.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

1960년대 당시,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아약스PSV같은 강팀을 제외하곤 급료도 부족한 편이어서 선수들 대부분이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훈련하는 투잡을 뛰었다고 하는데 히딩크는 코치직을 겸임하고 있었으므로, 오전에 유소년을 지도하고 오후에 팀 훈련에 참가했다고 한다. 더불어 야간에 체육 전문대학에 입학하여, 체육교사 준비도 같이 했다고. 3시즌 동안 데 그랴프샤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PSV로 이적하였는데 주전 경쟁이 심하여 제대로 출전하지도 못했다. 다시 데 그랴프샤프로 이적했고, 후에 나이메이건으로 이적했다.

나이메이건 시절에는 체육교사와 선수를 겸임했는데 특수학교에서 장애아들을 지도하면서 얻은 경험[17]이 훗날 감독 생활을 할 때 많은 도움[18]이 됐다고 한다. 나이메이건 시절에는 시즌 종료 후 즉, 5월부터 다음 시즌이 시작되는 9월 즈음까지 미국에 잠시 임대되어 미국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당시 룸메이트가 조지 베스트였다고. 나이메이건에서 은퇴 후 다시 데 그라프샤프로 돌아와 코치 생활을 시작했지만 선수가 부족한 탓에 감독의 부탁으로 1시즌 더 선수생활을 하게 됐다. 포지션은 리베로. 하지만 1981/82 시즌을 끝으로 완전하게 은퇴한다.

3. 감독 커리어[편집]

3.1. PSV 아인트호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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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감독이 되자마자 트레블

히딩크의 클럽 커리어 최전성기

은퇴 후 1982년 데 그라프샤프에서 수석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 히딩크는 1984년 PSV 아인트호벤 수석코치로 부임했고,[19] 1986/87 시즌 도중, 감독이 선수들과의 불화로 해임되자 감독 대행을 맡아 당 시즌에 바로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그 후, 정식감독으로 취임하여 맞이한 1987/88시즌에 에레디비시, KNVB컵, 유러피언컵[20]을 모두 우승함으로써 유러피언 트레블을 달성하였다.[21] 그 후로도 리그 우승을 두 번 더 달성하며 아인트호벤 역사에 있어 전설적인 감독이 되었다. 100년이 훨씬 넘는 축구 역사에서 유러피언 트레블을 이룬 여덟명의 감독 중 한명.[22]

그 뒤 1990년 터키페네르바흐체 SK로, 이듬해에는 스페인 발렌시아 C.F.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나 이 두 팀에서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고, 1994년 12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부임한다. 당시 연봉 문제로 네덜란드 축구협회와 갈등이 있어서 무산될 뻔하였지만 어찌 저찌 잘 해결되서 결국 취임하였다.[23]

3.2.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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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월드컵에서 로날드 쿠만(당시 수석코치)과 함께

4강 징크스의 시작.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맡은 그는 선수들을 휘어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가했고, 그 예로 항명을 했던 에드가 다비즈는 유로 1996 대회 도중에 쫓겨났다.[24] 물론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25] 그러나 이 때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탈락했다. 특히 당시 조별 예선에서 웸블리에서 7만 6천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홈팀 잉글랜드에 4:1로 굴욕적인 대패를 당하였기 때문에[26] 네덜란드 국민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기도 했었다.[27]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조별 예선에서 우리나라 국대를 5:0 떡실신시켰던 경력이 있다.[28][29] 사실 조별 예선에서는 벨기에멕시코에는 비겼을 정도로 고전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아르헨티나를 격파해 4강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며 오렌지 군단의 우승이 보이는 듯 했으나 브라질과의 승부차기에서 패배한 뒤 크로아티아와의 3, 4위 전에서도 패배하며 4위로 마감하였다. 이후 감독직 사임.

당시 네덜란드의 전력으로 유로 8강 ㅡ 월드컵 4위는 사실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다. 이후 유로 2000을 지휘했던 프랑크 레이카르트도 4강에서 그치자 바로 사임했을 정도. 하지만 그 뒤에도 쭉 결승을 못 갔던 걸 보면 그게 한계였을지도 모른다[30]

3.3. 레알 마드리드, 레알 베티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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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의 첫 번째 흑역사.

1998년 유프 하인케스가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에서 사임한 후 6월 17일에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가 후임 감독으로 취임했지만, 코칭 스태프와의 갈등으로 22일만인 7월 9일 사퇴하였다. 이에 레알 마드리드 수뇌부는 마침 네덜란드 대표팀을 그만둔 히딩크를 7월 15일 정식 감독으로 임명한다. 팀 역사상 두번째로 [31] 도요타 인터컨티넨탈 컵[32]을 들어올렸지만 그게 전부였다.[33] 히딩크 감독 자서전 마이 웨이에는 수뇌부와의 갈등 때문에 본인 스스로 사임한 걸로 나와있다. 물론 수뇌부와의 마찰이 심하기는 했다.[34] 그러나 부임 기간 동안의 성적도 19승 4무 11패로 팀에 걸맞지 않은 성적이었고[35] 무엇보다 엘 클라시코에서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에게 3-0으로 완패를 당해 일곱 달 만에 경질당한 것이다. 이 때의 안좋은 기억 때문인지 당시 바르셀로나 감독이었던 루이스 판 할에게는 라이벌 의식을 강하게 느껴서 2002 월드컵 지역예선 때 네덜란드가 충격적으로 탈락하자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그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을 가하기도 했으며 이후로는 판 할과의 대결에서 진 일이 없다.

그 뒤 무직으로 지내다가 2000년 2월 5일 강등 위기에 빠져있던 레알 베티스의 감독으로 갑작스럽게 부임한다. 그러나 이 시절은 정말 흑역사 오브 흑역사로, 2월 5일 발렌시아전 3-1 패배를 시작으로 4월 30일 마요르카전 4-0 패배 때까지 무려 1승 6무 6패[36]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고 짤리고 히딩크가 떠난 뒤 팀은 남은 세 경기에서 2승 1패[37]를 기록하며 선전하긴 했지만 결국 18위를 기록하며 17위와는 승점 단 3점 차이로 강등되었다. 물론 골득실에서 심하게 밀리긴 했는데 히딩크가 승점만 잘 쌓았으면 강등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때 함께 강등당한 팀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19위)와 세비야 FC(20위)였는데 특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경우 유명한 선수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구단주 헤수스 힐의 방만한 운영으로 인해 선수단 주급이 체납당하는 일로 인해 선수단의 분위기가 난장판이 되어 강등당해 충격이 더 컸다. 당시 베티스의 리그 상황

자서전 마이 웨이에서는 팀이 이미 엉망이라서 자신이 할 수 있는게 없다고 말했지만 당시 레알 베티스는 두꺼운 스쿼드는 아니어도 스페인 국가대표팀의 스트라이커 알폰소와 역시 스페인 대표팀의 미드필더 오테로, 브라질 국가대표였던 데니우손, 루마니아 국가대표 수비수 율리안 필리페스쿠, 아약스에서 챔스 우승 경력이 있고 나이지리아 대표팀의 전성시대의 일원이었던 피니디 조지 같은 어느 정도 충분히 해볼만한 성적을 낼 수 있는 선수들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시즌이 끝나고 강등팀 소속인 알폰소가 유로 2000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두 골을 넣어 극적인 4-3 승리로 스페인을 8강에 진출시키는데 공헌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선수들이 한물 간 경우도 아니었고 오히려 한창 때라면 한창 때인 선수들이었다. 물론 아무리 이름값 높은 선수들이 있어도 이미 분위기가 나빠 자신감이 무너진 팀을 이끄는게 쉽지는 않고, 그리고 얼마 뒤에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아 스스로 증명했듯이 이름값 높은 선수들만으로 하는게 축구는 아니지만. 애초에 자서전이라는 책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흑역사나 실수는 변명이나 간단히 넘어가거나 아예 언급 자체를 안하는 경우가 많다.

그 뒤 남아공 대표팀, 나이지리아 대표팀셀틱 FC에서도 감독직 제안이 왔지만, 뜻밖에도 대한민국 대표팀의 감독직을 수락한다. 가삼현 축구협회 국제국장[38]"이미 알려진 강팀을 이끌고 성적내는 것과, 한국팀을 이끌고 성적 내는 것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며, 설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39]

3.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편집]

히딩크 국가대표 커리어 최전성기 시절
자세한 건 히딩크호 항목 참조바람.

3.5. PSV 아인트호벤 시즌 2[편집]

히딩크가 원했던 행선지는 고향 PSV. 2002년 8월 1일 그는 아인트호벤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02/03, 04/05, 05/06시즌 에레디비시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2003년 요한 크루이프 실드, 2005년 KNVB 베이커에서 우승하였다.

04/05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팀을 4강에 올려놓았다. 홈구장인 필립스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AC 밀란과의 4강 2차전에서 90분까지 통합 2:2로 팽팽하게 버티고 있었는데,[40] 연장전에서 승리만 한다면 이스탄불에서 리버풀과 격돌할 기회가 주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저리 타임에 암브로시니에게 골을 허용하면서 꿈은 산산조각나버렸고, 뒤늦은 코쿠의 골과 박지성의 선제골은 부질없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성적은 2000년대 들어와서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의 2002년 UEFA컵 우승과 더불어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최고의 성적이다.[41] 그리고 더불어 그가 아인트호벤에서 기록한 리그 6회 우승 - KNVB 베이커 4회 우승 - 요한 크루이프 실드[43] 1회 우승 - UEFA 유러피언컵 1회 우승은 60-70년대 아약스의 황금기를 이끈 리누스 미켈스의 리그 4회 - 컵 대회 3회 - 유러피언컵 1회 우승을 뛰어넘는 독보적인 기록이다.

3.6.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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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묻히지만, 사커루도 히딩크 전과 후로 나뉜다.

2005년 7월 22일 히딩크는 호주 국가대표팀 감독이 된다. 특이하게도 그는 독일 월드컵 전까지 호주 국대팀과 PSV의 감독을 동시에 맡았다. 그렇게 투잡을 뛰면서도 PSV는 05/06 에레디비시에에서 우승했다. 우승 직후 그는 PSV를 떠나 호주 국대에 집중했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는 팀을 16강에 진출시켰다. 이때 호주는 일본과의 경기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1골을 빼앗기지만, 그 뒤 3골을 연이어 넣으면서 승리한다. 그리고 나서 그가 한 말은 "정의가 승리했다."였다.

16강전에서 이탈리아에게 0:1로 패배했을 때 당한 실점이 바로 루카스 닐이 파비오 그로소를 넘어뜨렸다는 이유로 받은 PK였는데 이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그로소는 호주가 반칙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슬로우 카메라로 볼 경우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탈리아 현지에서조차 이것을 "토티의 존재하지 않는 페널티킥"이라 부르며 찜찜한 판정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 안드레아 피를로의 자서전에서 이 내용이 그대로 등장한다.) 이는 마테라치의 퇴장에 대한 보상판정이라는 평도 있다.

PSV 감독을 하고 있을 2005년 당시 호주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마크 슈워처, 팀 케이힐, 해리 큐얼, 마크 비두카 등 최고의 황금라인을 자랑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팀이었지만 플레이오프의 벽에 막혀 번번히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히딩크에게 감독 제안을 하게 된다. 하지만 PSV 계약기간이 남아있어 협상이 쉽지 않았는데 결국 PSV와 공동감독 형식으로 2006 독일월드컵까지 1년 계약을 하는 것으로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호주 감독직을 수락하고 플레이오프에서 우루과이를 승부차기 끝에 물리쳐 32년만에 본선 진출을 성공시키고[44] 너무도 짧은 기간에 겸임감독 형식이라 상대적으로 집중도가 떨어졌는데도 국제대회 경험이 없던 호주를 16강에 이끈 것만 해도 상당히 우수한 기록이었다.

2014년 현재까지도 호주가 다시 이런 성적을 못 내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호주 역시 2006년 독일월드컵이 끝나고 계약 연장을 제시했지만, 이미 러시아와 계약을 먼저 체결하는 바람에 불발되고 아쉽게 호주 감독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이 때 32년만의 월드컵 진출 - 호주의 유일한 월드컵 16강이라는 성적 덕분에 호주에서도 그의 평가가 아주 호의적이라고 한다. 우루과이를 꺾고 월드컵에 진출했을때 한국의 2002년급으로 히딩크 수상 임명 등의 인기를 얻었을 정도.

3.7.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첼시 FC 감독대행[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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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2008에서 안드레이 아르샤빈과 함께

2006년 6월 히딩크는 러시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는다. 유로 2008 예선에서 크로아티아, 잉글랜드와 한 조가 되어 힘겨운 조편성이었고, 러시아는 최종전 전 경기에서 이스라엘에 져 탈락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최종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되는 잉글랜드가 홈에서 크로아티아에 2-3으로 패하고 러시아는 안도라 원정에서 1-0으로 이기면서 가까스로 본선행에 성공하였다.[45] 유로 2008에서는 러시아를 4강에 올려놓는 쾌거를 이룩한다. 한국의 4강 진출만큼이나 대단한 업적. 조별 예선에서 스페인에게 1:4로 개관광당할 때까지만 해도 진출이 어려워 보였으나 그리스, 스웨덴을 연파하여 8강에 진출한 뒤 조국 네덜란드를 3:1로 관광보내며[46] 4강까지 진출한다. 그러나 4강에서 다시 만난 스페인에게 또 0:3으로 떡실신. 이때 스페인이 2008~2010년까지의 무적함대의 효시였으니 이상할 것도 없지만...

러시아 국가대표팀 부임 중 첼시 구단주 로만과의 친분으로 2009년에 경질된 스콜라리 감독에 이어 임시로 감독대행을 하게 된다.

2008/09 챔피언스리그에서 리버풀 FC를 꺾고 4강에 안착했다. 그리고 FC 바르셀로나와의 오심으로 얼룩진 준결승 2차전에서 후반 인저리타임에 결승골을 얻어맞고 결승 진출 좌절.

그러나 히딩크의 잉글랜드 고별전인 FA컵 결승에서 에버튼을 상대로 2:1의 멋진 역전 드라마를 쓰며 결국 징크스를[47]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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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자세한 것은 첼시 히딩크 항목으로.

월드컵 남미 지역 예선에서 아르헨티나가 마라도나를 감독으로 부임시키자마자 볼리비아에게 1-6으로 패배를 당한 것을 기점으로 유례없는 부진의 늪에 빠졌다. 이에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는 히딩크에게 마라도나와의 공동감독을 제의했다. 히딩크는 이에 대해 마음에 들어하는 발언을 했으나 러시아와의 계약기간을 지켜야 해서 거절했다. 관련 기사 (스포츠서울) 후일담으로 히딩크 영입에 실패한 아르헨티나는 곤살로 이과인을 엔트리에 포함시키고서야 간신히 본선에 진출했다.

3.8. 2009년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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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안지 마하치칼라 감독시절

2009년 러시아 대표팀의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본선 진출을 달성하지 못하자 자진 사퇴했다. 그의 거취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사 중 하나였고, 여기저기서 루머가 흘러나왔다. 그 중 가장 압권인 루머는 바로 북한 대표팀의 감독을 맡는다는 것. 2002년에 같은 문화권인 대한민국 대표팀도 맡았기에 북한 대표팀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지 않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대한민국 네티즌들의 반응은.

남한 감독 시절: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북한 감독 시절: 나는 정말로 배가 고프다.

한번만 져도 아오지 탄광행.


결국 히딩크 감독의 북한 대표팀 부임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 외 여러 국가로부터 감독부임설이 솔솔 나왔다. 아프리카 지역 예선에서 튀니지를 간신히 제치고 올라온 나이지리아의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설도 돌았다. 나이지리아는 한국과 같은 조가 됐으니 만약 성사됐으면 적장으로 재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딩크는 다 된 밥(이미 본선에 오른 나라)에 숟갈 하나 얹기 민망했던지 고사하고, 월드컵 본선진출에 실패한 터키와 4년 계약을 맺었다.

2010년 6월 남아공 월드컵 경기 중 한국이 아르헨티나에 4대1로 깨지자 인터넷에 '히딩크의 쓴소리'로 알려진 글이 올라와 큰 관심을 모으고 정식 기사화까지 되었다. 그러나 문제의 글은 나중에 낚시글로 판명났다. 낚시와 오보의 합작 (시사인)

2010년 12월 무승 행진으로 위기에 빠진 첼시 FC의 구원투수로 또 거론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현재 UEFA 유로 예선 경기가 내년 중반까지 딱 1경기 뿐이라, 터키의 양해를 얻고 2중 감독도 가능하다는 분석. 그런데 터키축구협회장이 첼시와 히딩크에게 "터키가 자기 마음대로 왔다가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라는 경고를 했다. 터키 축구협회장 경고 (스포탈코리아) 히딩크 본인도 첼시와 협상한 적이 없다고 말했고, 히딩크 첼시 협상 부인 (뉴시스) 2011년 6월 22일 첼시는 안드레 비야스 보아스를 새로운 감독으로 계약했다. 결국 별 일이 없는 한 터키 감독으로 있을 듯.

2011년 6월 11일,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은 히딩크에게 유럽무대에서 감독을 은퇴한 후에 한국 축구의 명예감독을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히딩크는 곧바로 수락했다. 히딩크 명예감독 수락 (이데일리)

유로 2012 독일 원정에서 3-0으로 대팍 깨지긴 했지만 벨기에오스트리아 정도는 어렵지 않을 듯 싶었는데 뜻밖에도 약체인 아제르바이잔 원정에서 1-0으로 패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참고로 아제르바이잔은 조 꼴찌인 카자흐스탄과 1승 1패를 주고 받았으며 조 4위로 꼴지에서 겨우 벗어난 팀이다. 그나마 아제르바이잔이 벨기에와도 안방 경기에서 1-1로 비겨 벨기에의 탈락에 기여하긴 했지만. 조 1위로 본선에 올라간 독일에게 2패를 당한데다 아제르바이잔 경기 패배로 터키가 조 3위로 추락했는데 마지막 10차전 경기에서 독일이 벨기에를 이기고 터키가 아제르바이잔을 1-0으로 겨우 잡으면서 조 2위로 역전,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내 크로아티아와 대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11월 11일에 벌어진 플레이오프 1차전, 터키 안방 경기임에도 크로아티아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면서 슛팅수에서도 크게 뒤진 터키는 3:0 대패를 당해 비난을 듣었고 원정에선 0:0으로 비기면서 허무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날부로 터키 감독을 사임했다.

그가 터키를 맡아 UEFA 유로에 임한 것은 부담감이 큰 일이었는데, 유로 2008 대회에서 터키는 자국감독 파티흐 테림의 지휘 아래 대회 첫 4강에 올랐었기 때문이다. 사실 터키의 유로 성적은 들쑥날쑥인데 워낙에 축구강호나 안방경기에서 위력을 펼치는 상대들이 판치는 유럽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터키는 96년 대회에서야 처음으로 유로에 참가하여 꼴찌로 탈락하더니만 유로 2000에는 첫 8강, 유로 2004에서는 플레이오프에서 라트비아에게 탈락, 유로 2008에는 4강에 올랐다. 과연 히딩크가 터키를 유로 본선에 2회 연속 진출시킬 것인지 그리고 진출시킨다면 전 대회에서 거둔 4강 성적을 넘어설 수 있을지 관심을 모았는데 유로 본선 탈락과 같이 사임하면서 아쉽게 끝을 맺고 말았다.

2011년 11월에 난데없이 한국 국대 감독으로 히딩크가 재계약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누군가의 엉터리 트위터 글이었다. 히딩크 한국 복귀 헛소문 판명 (골닷컴)

2011년 11월 15일에 벌어진 월드컵 3차예선 5차전 경기 레바논 원정 완패로 조광래가 비난당하는 와중에 히딩크를 다시 불러오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12월 7일 조광래가 해임되면서 감독으로 돌아오나 했지만 축구협회에서는 고트비, 최강희, 홍명보를 알아보다가 무산되자 김호곤을 올리고 있다는 정보가 나오는 등 히딩크에 대해선 별 말이 없는 상태.

결국 최강희가 감독이 되면서 한국에 다시 올 일은 없어졌다. 더불어 첼시가 리그 4강 진입이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보야스 감독의 후임으로 또 그가 거론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러다가 2012년 2월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FC 안지 마하치칼라 감독으로 2년 계약을 맺었다. 첫 해 리그 성적은 5위로 안지가 펑펑 들인 돈에 견주면 좀 아쉬운 결과였지만 시즌 중반에 감독을 맡았기 때문인지 구단주는 유로파리그 진출이라도 해낸 것에 만족한다며 두둑한 보너스를 지급했다.

그리고 한국시간으로 2012년 11월 28일, 네덜란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2/13 리그를 마지막으로 사령탑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은퇴 후 무엇을 할지 정하지 못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지는 않을 것"이라며 "유소년이나 코치들을 지도하거나 축구 선수들의 인생 설계를 도와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로써 안지가 그의 감독직 마지막 커리어가 되었다.

올림픽 감독을 성공적으로 끝낸 홍명보의 코치 연수를 도와주기 위해 그를 안지로 초청하였다. 홍명보가 안지에서 받던 코치 연수는 시즌 종료와 함께 일정이 모두 끝났다. 사실상 히딩크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고 이전부터 홍명보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루머도 이를 계기로 사라졌다.[48]

2012/13 시즌에는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에서 3위에 머물러 2위까지 받는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얻지 못했고, 컵대회 결승에서는 CSKA 모스크바에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유로파 리그에서는 8강에서 탈락했다. 이 때문에 일부 안지 팬들은 감독을 교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헌데 은퇴를 번복하고 안지에서 1년을 더 한단다. 인터뷰에서 서툰 러시아말로 "пока ещё я голоден"(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를 말하면서 배고파서 1년 더 감독을 한다고 밝혔다. 히딩크 배고픔의 유통기한 (스포탈코리아)

파리 생제르맹 FC에서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떠날 게 확실시된 안첼로티에 이은 새로운 감독으로 바로 히딩크를 영입하려 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안지에 잔류하기로 결정한 듯. 히딩크 안지 잔류 선언 (풋볼리스트)

아마 안지에서의 될듯말듯했던 미묘한 성적이 아쉬웠던 모양.(리그 3위로 챔스 진출권 놓침, 컵대회 결승 승부차기 패)

그런데 7월22일 갑자기 안지 감독을 사임했다.

2013년 10월 호주에서 7년만에 다시 국대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 일본 국대 감독을 맡기도 한 홀거 오지크를 감독으로 영입한 호주 국대팀은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냈지만 이후 가진 브라질, 프랑스와 친선경기에서 0:6으로 나란히 참패하자 오지크 감독을 해임하면서 감독직이 비었기 때문이다. 일부 외신에서 히딩크와 알렉스 퍼거슨을 호주 국대 후보로 올렸다고 하는데 퍼거슨은 가능성이 낮은 상황.만약 맡았다면 다시 한번 조국 네덜란드와 격돌하게 되었겠지만 10월 23일, 예상을 깨고 호주 축구협회는 그리스(터키계 조상도 있는)계 호주 축구감독인 엔제 포스테코글루를 국대감독으로 임명했다.

3.9.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시즌 2[편집]

히딩크의 두 번째 흑역사.

2014년 3월 1일, 16년만에 네덜란드 감독으로 복귀할 것을 밝혔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이 끝나면 사임하는 루이스 반 할 감독에 이어 감독을 맡아 유로 2016 대회까지 맡을 예정. 전임 감독인 반 할이 월드컵 3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냈기에 부담이 꽤 클듯하다. 첫 경기 대진이 묘한데, 상대가 이탈리아다. 비록 2006년 월드컵에서 호주를 무너뜨리며 복수를 했지만 2002년의 그 충격과 공포를 이탈리아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데,결국 이탈리아에 2:0으로 지고 말았다.

유로 2016 예선에선 체코와 원정경기에서 1:2로 패했다. 2010년대 들어서 유럽에서 약체나 중위권팀이 고춧가루를 날리거나 발목을 잡는 상황이 꽤나 많이 벌어지고 있기에 일방적으로 까기도 뭣하다. 웨일스도 안도라 따위에 2:1로 신승하고, 에딘 제코의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는 키프로스에 역전패를 당했다, 심지어 포르투갈은 알바니아에 0:1의 충격패를 먹는 이변이 벌어졌다.

그렇게 한두번 있는 이변이라고 다들 생각했는데 10월 14일 아이슬란드전에서 0:2 패배를 당하면서 부임 이후 1승3패로 매우 안 좋은 시작을 보이고 있다. 벌써부터 경질설이 나오고 있는 중. 약체팀들에게 잇달아 발목을 잡혔다는 것이 결정적이다. 악화된 자국의 여론과는 반대로 한국의 축구팬들은 한일월드컵의 영웅인 그가 2002년의 6월 처럼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해 이 위기를 극복하기를 염원하며 응원하고 있는 중. 네덜란드의 한 매체에서는 이를 두고 '히딩크 퇴물 다됐는데 아직도 한국에서는 신이네요'라고 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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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일전에도 불구하고 2014년 11월 13일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치러진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2-3으로 패배했다. 히딩크는 11월 16일에 있을 라트비아와의 유로 2016 예선에서 패배하면 감독직에서 사퇴하겠다고 선언하며 배수의 진을 쳤다. 결과는 부임 후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며 6-0으로 대승을 거두면서 한숨돌리게 되었다. 다만 http://sports.news.nate.com/view/20141117n02694

2015년 3월 28일 유로 2016 예선 터키와의 홈 경기에서 0-1로 밀리고있다가 추가시간 극적인 동점골로 1-1 무승부를 만들어 겨우겨우 비겼다. 물론 에이스인 아르옌 로벤의 부재가 컸다고는 하지만 예선 일정의 절반인 5경기를 치른 가운데 네덜란드의 순위는 현재 조 3위로 2위인 아이슬란드에는 승점 5점차로 뒤쳐져있고 조 4위인 터키에는 2점차로 앞서고 있다. 본선이 24강으로 확대된 유로 2016의 경우에는 예선 조 1, 2위가 본선에 가고 조 3위가 플레이오프에 가는 방식이긴 하지만 그 네덜란드가 3위자리도 간당간당한 상황이니 네덜란드 팬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기력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전술적으로도 미드필더 싸움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는 등 현대축구의 흐름을 완전히 따라가지 못했다.

결국 2015년 6월 30일, 네덜란드 축구협회는 히딩크의 사임을 발표 하였다.

사퇴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 감독 제안을 받았다는 보도가 있었고, 레스터시티 감독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 하지만 레스터시티는 전 그리스 대표팀 감독인 라니에리 감독을 선임했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재택 근무로 한국 대표팀을 맡고 싶다고 했던 베르트 판 마르베이크를 선임하였다.

한편 히딩크를 내친 네덜란드는 이후 홈경기에서 아이슬란드에 0-1로 패하고, 터키 원정에서 0-3으로 패했고, 체코와의 홈경기에서 마저 3:2로 패하면서 32년만에 유로예선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맞이하였다.네덜란드 언론에서는 이번에도 이게 다 히딩크 때문이다라며 히딩크를 까고 있다. 애초에 여론과 팬들 모두가 반대하였었던 히딩크의 재선임을 밀어붙인 네덜란드 축구협회가 무리수[49]를 둔건데, 네덜란드 축구의 이번 참사의 책임을 히딩크 한 사람이 짊어진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50],

그 이후 몇개월 쉬다가 15-16 시즌 성적 부진과 팀내 불화로 경질된 조세 무리뉴의 뒤를 이어 다시한번 첼시 FC의 임시 소방수로 돌아올 가능성이 유력해졌다. 한국 날짜 12월 18일에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3.10. 첼시 FC 감독대행 시즌 2[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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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국시간 12월 19일, 첼시 FC의 단기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약 6년여 만에 또 감독대행으로 첼시에 돌아오게 되었다.

첼시와 히딩크간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진 단기계약이다. 첼시는 시즌 중반에 거물급 감독이 움직일리 없기 때문에 15-16시즌까지만 맡아줄 단기 소방수가 필요했고 히딩크는 네덜란드 국대에서의 부진을 뒤로하고 명예회복하기위해 고심중이었는데 첼시 정도면 단기 소방수라도 나쁘지 않다.

부임한 후 첫 경기인 왓포드 FC와의 리그 홈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물론 왓포드가 현재 리그 순위 7위일 정도로 만만치 않은 팀이기는 하나 홈에서 열린 경기였고 실제로 스코어 2:2에서 후반 80분경 페널티킥 찬스를 잡았음에도 그 찬스를 살리지 못하여 무승부로 만족해야만 했기에 아쉬운 결과였다.

다음 경기는 역시 분위기가 안좋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리그 OT 원정 경기였는데 디에고 코스타의 경고누적으로 인한 결장으로 제로톱 전략을 들고나왔고, 0:0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그리고 크리스탈 팰리스 리그 원정에서 초반 에당 아자르가 교체되는 악재가 있었으나 좋은 역습으로 3:0으로 승리하며 첼시 복귀 후 첫승을 신고했다.

그 뒤 FA컵 3라운드를 통과했으나 리그 홈 경기에서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FC와 2:2, 에버튼 FC와 3:3으로 무를 캤다. 부임후 리그에서 1승 4무의 성적을 기록중.

강등권과는 슬금슬금 멀어지고 있지만, 어차피 유로파까지 승점 10점차 라는 것은 여전하다. 리그는 강등 안 당하는 선에서 마무리 하고 유로파나 챔스에 나가고 싶으면 FA컵이나 챔스 우승에 목숨을 거는 것이 현명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히딩크 감독도 리그보다 이 쪽에 더 집중하는 상황.

다음 리그 경기는 리그 1위였던 아스날 FC 원정이었는데 전반 디에고 코스타의 결승골을 잘 지켜내며 1:0 승리를 거뒀다. FA컵 4라운드에서 MK 돈스를 5:1로 시원하게 격파하면서 5라운드에 진출했다. 2016년 2월 1일 기준 부임후 모든 경기에서 4승 4무로 무패를 이어나가고 있긴 하지만 그가 기자회견에서 목표로 공언했던 챔피언스리그와 FA컵 우승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가 중요할듯 하다.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파리 생제르맹을, FA컵 16강에서 맨체스터 시티라는 강호들을 만나기 때문.

근데 다음 리그 경기인 왓포드 원정에서 또 0:0 무를 캤다. 그리고 맨유와 펼친 리그 홈 경기에서 커트 주마가 부상으로 실려나가는 악재에 선제골을 먹히고, 상대편 수문장 다비드 데 헤아의 미칠듯한 선방에 막히며 무패 행진이 깨질 위기였으나 귀신같이 추가시간에 터진 디에고 코스타의 동점골로 다시 한번 1:1 무를 캤다. 다음 리그 경기에선 뉴캐슬을 5:1로 대파했다. 망해가던 팀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중.

파리 생제르맹과의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원정 경기에서 2-1로 패배하며 12경기 무패 행진이 종료되었다. 홈앤어웨이 토너먼트의 특성과 파리와 첼시의 전력차를 생각해봤을때 첼시에게 불리해도 마냥 나쁜 결과는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매우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바로 저번 14/15 시즌에서는 파리가 원정에서 경기 초반 퇴장당해 10명으로 싸웠는데도 오히려 첼시를 상대로 주도권을 잡아 결국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원정 다득점으로 올라간적이 있었기에 2차전이 홈이라도 승리를 장담하긴 어렵다. 다만 그 전시즌인 13/14 시즌때 첼시가 원정에서 3-1로 패배하고 홈에서 2-0으로 이겨 올라간 적도 있기에 뚜껑은 열어봐야 알겠지만.

그나마 홈에서 열린 FA컵 16강 맨체스터 시티전은 맨시티가 빡빡한 일정때문에 유스 + 1.5군 위주로 편성한 라인업을 냈고 그 라인업을 상대로 5:1 대승을 거두며 8강으로 진출했다.

성적과는 별개로 한국에서의 첼시에 대한 이미지가 공공의 적에서 히딩크 부임 이후로 열심히 하는 중위권으로 변했는데, 역시 히딩크의 덕이 크다. 첼시는 강등권이다, 그냥 망해버려라 이런 분위기가 팽배했으나 이제는 히딩크 감독님을 믿는다, 역시 히딩크 라는 반응이 많다. 한국 축구팬들의 히딩크에게 가지고 있는 신뢰와 애정의 크기를 알 수 있는 부분.

맨시티전 이후 리그 사우스햄튼 원정, 노리치 시티 원정을 전부 2:1 승리로 장식했지만 스토크 시티에게 홈에서 아쉬운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나마 스토크 시티와의 홈 경기는 다가올 중요한 경기에 대한 체력 안배로 디에고 코스타를 명단 제외시키고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교체 출전 시켰지만. 어쨌든 스토크 시티전을 마치고 이제 첼시의 15/16 시즌 농사가 걸린 매우 중요한 한 주가 기다리고 있다.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파리 생제르맹과의 홈 경기와 FA컵 8강 에버튼과의 원정 경기가 있는데 어떤 결과를 낼지가 관심사.

파리 생제르맹과의 챔스 16강 2차전 홈 경기에서 1-2로 패배하며 탈락, 그나마 아주 실낱같이 남아있던 다음 시즌 챔스 진출 가능성도 사실상 사라졌다. 그나마 FA컵이 남아있긴 한데 문제는 디에고 코스타에당 아자르가 2차전 경기중 부상으로 교체되었다는것. 특히 코스타의 부상은 매우 뼈아프다.

그나마 코스타는 출전했지만 결국 로멜루 루카쿠에게 멀티골을 허용하며 에버튼에게 2-0으로 패배, FA컵 우승의 꿈마저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코스타는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 무대 첫번째 퇴장을 당했다.

4월 10일 스완지 시티 AFC 원정에서 0-1로 부임 후 첫번째 리그 패배를 당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끈 첼시 FC/2015-16 시즌에 대해서는 팬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으나, 무리뉴 감독의 경질 당시 팀의 상황과 분위기로 볼 때 최악의 경우 강등이라는 단어가 결코 비현실적인 상황이 아니었던 만큼, 적어도 팀을 중위권에라도 안착시키고 안토니오 콘테에게 안정적으로 바톤을 넘긴 것 만으로도 최소한의 임무는 달성했다고 보는 평가가 많다. 그의 개인적인 커리어에 있어서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겪은 아픔을 씻어내고 그의 기나긴 감독 커리어에 마무리를 달성했다는 점에서, 팀과 감독 모두에게 있어서 서로 나쁘지 않은 결말을 맺게 되었다.

15-16 시즌 이후부터는 첼시에서 유망주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영국 스포츠전문 매체 스카이스포츠는 23일(한국시간) 히딩크 감독이 고문 직함으로 다음 시즌에도 첼시에서 일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첼시가 유럽 각 팀으로 임대한 30여명의 유망주를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할 예정.

4. 과학 징크스[편집]

히딩크의 징크스는 4강을 넘지 못한다는 것과 독일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맨날 못넘는건 아니지만 PSV 아인트호벤 트레블 시절을 빼면 사실이다. 그래서 축구계의 락라인에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네덜란드 : 4위[51]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한국 : 4위[52]

  • 2004-2005 UEFA 챔피언스리그 PSV : 4강 [53]

  • EURO 2008 러시아 : 4강[54]

  • 2008-2009 UEFA 챔피언스리그 첼시 : 4강[55]


위의 사례처럼 그가 이끈 팀들은 요상하게도 이전과 비교하자면 엄청난 성적을 내기는 하는데, 결국 4강을 넘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있었다. 그가 팀을 맡을 때마다 과연 징크스는 깨질지 아니면 계속될 것인지에 대해 호사가들이 주목하고는 했다. 물론 4강도 누구나 쉽게 거두는 성적이 아니라면서 징크스 운운하기 전에 그 성과부터 알아주자는 의견도 많지만.

그러나 징크스를 논하기에 앞서 그가 맡은 팀들은 4강에 들거라고는 예상도 못할 약체팀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약체팀을 단숨에 4강팀까지 업그레이드 시키는 걸 보면 오히려 대단한 일이다. 월드컵에서 1승도 못 거두던 대한민국은? 소련 시절 유로 우승도 했지만 유로 1988 준우승 이후로 월드컵이나 UEFA 유로 토너먼트도 못 넘던 유럽에서 중위권이던 러시아는? 그리고 2000년대와서 에레디비시에 리그로서 유일무이한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을 거둔 PSV 아인트호벤은? 오히려 4강을 간 것은 칭송하면 모를까. 유일하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1998년 당시 대단한 전력으로 손꼽히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도 4강에 머무른 것 정도.[56] 그리고 08-09 시즌의 첼시도 그 전의 감독이었던 스콜라리 감독 시기에 팀 내 분위기 장악 실패, 특색없는 전술, 의아한 용병술 등으로 리그 성적이 서서히 내려가던 시기에 히딩크가 갑작스럽게 부임하면서 챔피언스리그 4강, FA컵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도 당시 유럽 최강의 팀이었던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가 이끄는 팀은 독일을 상대로 연전연패한다는 점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지휘했을 때는 4강 징크스와 독일 징크스가 동시에 적용이 된 사례로, 준결승에서 패했는데 그 상대가 독일이였다. 2010년 월드컵 때는 러시아 감독을 했었는데 그때도 독일에게 패해 플레이오프로 밀려났고 슬로베니아에게 2차전에서 패해 탈락하게 된다. 그리고 터키에서도 독일을 상대로 유로 예선에서 2연패(0-3, 1-3)를 당했다.[57]

히딩크에겐 터키에 대한 징크스도 있는데 1998 FIFA 월드컵 예선 당시 네덜란드는 예선에서 조 1위(6승 1무 1패)이긴 했지만 같은 조의 터키에게 1무 1패(0:0,0:1)를 당했었다. 그나마 터키는 역시 같은 조에 있던 벨기에에게 덜미를 잡혀 아쉽게 탈락했는데, 이 때 터키가 벨기에를 이겼더라면 터키와 한국이 1998 FIFA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와 같은 조에서 만날 뻔 했다. 그리고 2002 FIFA 월드컵 3, 4위전에서도 터키에게 지는 등 국대 감독으로서 터키를 이겨본 적이 없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번 유로 2016 예선에서도 터키와의 홈 경기에서 1:1로 겨우겨우 비겼다.

이것 때문에 감독의 역량 평가에서 "잘하는 감독"이라기 보다 "못하는 팀 살리는 감독"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다.

5. 한국과의 관계[편집]

5.1. 한국에서의 위상과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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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종목을 막론하고,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의 부동의 No.1 감독

너무나 많은 것을 이루어 놓고 떠난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국민 감독, 최고의 레전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세 번의 5:0 패배를 만든 분.[58][59]

한국 축구 역사상 많다 못해 지나친 성과인 4강 신화 덕분에 그의 한국내에서의 인기는 넘사벽으로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인기있는 감독.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레전드라고 일컫어지는 인물들중 유일한 외국인 레전드이며 KFA 명예의 전당 최초의 7인 중 1인이다. 명실상부한 국민 감독으로서의 입지가 1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탄탄하며 그 어떤 한국 감독보다도 훨씬 인기가 좋다. 그에 대한 한국 축구팬들의 애정과 그리움은 아직까지도 식을줄을 모르고 있을 정도로 그의 한국내 입지는 그야말로 언터쳐블이라 해도 무방하다. 여기에 대한 반작용인지 일본에는 히딩크 감독의 안티가 많다. 게다가 2006년 호주 대표팀을 맡아 일본을 박살냈으니, 싫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가 탈세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자 2ch 등지에선 축제 분위기였다가 오래가지 않아 풀려나니 도로 실망했던 적도 있다.

물론 위에도 서술했듯 처음부터 이런 평가를 받은건 아니었고 웬 외국인 감독 하나가 굴러들어와선 개최국 망신 다 시키겠다며 어마어마한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월드컵에서 우리는 분명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모든 것은 그 때에 알게 될 것이다.라며 준비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어떠한 비판도 수용할 것이라 하여 더더욱 언론을 벙찌게 만들었다. 거기다 언론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비판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도 자신은 6월을 기다려 왔고 세계 유명 축구팀들이 비웃어도 반박할 필요 없이 월드컵에서 보여주면 된다며 무한한 자신감을 표출했다.

특히 "개최국으로서 16강만 넘으면 체면치레 하는거다."라며 대부분의 여론이 히딩크에게 16강 진출을 두고두고 강조할 때도 "한국 국민들이 원하는 16강은 나의 바람이 아니다. 내게는 그 이상의 바람이 있다."며 야망을 드러내었다. 당시엔 조별 예선이나 통과하고 그런 말해라는 반응이 많았지만 정말로 16강을 통과해 버리고, 이후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라는 초절정 명언과 그에 걸맞는 성적까지 겹쳐지자 꿈을 현실로 만든 남자라며 붉은 악마들의 정신적 지주로 등극했다.

감독으로서 히딩크가 평가한 한국축구의 문제점은 공격수는 많으나 수비수의 자원이 부족한 것, 그리고 정신력이었다고 한다. [60] 훈련중에도 전술적, 기술적 실수는 문제삼지 않았으나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선수가 가장 싫다며 선수들의 정신력에 많은 비판과 조율을 요구했다.

한국 선수들이 기술은 유럽보다 딸리지만 붉은 전사 투혼만은 살아있다라고 생각했던 세간의 평가와는 정반대되던 셈. 그는 한국 축구의 기술이 유럽에 비교해서도 훌륭한 수준이라고 평가했으며 특히 양발잡이들이 많다는 점을 놀라워 했다고 한다. 히딩크는 한국선수들의 승리에 대한 의지는 제법 높게 평가했지만 그마저도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보여주는 그 무시무시한 승부근성에 비교해보면 부족하다고 말하였다.

특히 히딩크가 가장 혹평했던 것은 한국선수들이 공만 잡으면 지나치게 흥분하여 오히려 골 결정력에 방해가 되는 것과 어린 선수들이 고참 선수들을 무서워 해 기가 눌려있다는 것. 특히 한국 특유의 선후배간 위계질서를 가장 좋지 않게 보아 "그라운드에서는 반드시 나이를 막론하고 반말을 쓰고 위계질서에 관계없이 서로간에 대화를 하며 경기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며 모든 선수들이 훈련 중 반말을 쓰게 하고 존댓말을 쓰는 사람은 월드컵 안 데려가겠다고 으름장을 놨다고 한다.[61][62]

히딩크는 이런 수직적 관계가 축구의 창의성을 말살한다고 보았고 선배가 잘못을 하면 후배라도 반드시 지적하고 수정하라는 철학을 강조했다. 당시 몇몇 고참 선수들은 한국의 유교적 정서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고 혹평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대부분의 경우 대표팀과 축구계에 존재하는 위계질서나 권위의식을 타파하기 위한 신선한 시도였고, 결과적으로 20대 초반의 이천수, 박지성 등의 선수들이 기죽지 않고 활약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더불어 수비수 자원의 부족 및 유소년 발굴 시스템의 안일함 등등 제 3자인 외국인 감독의 시각에서 한국 축구 및 국가 대표팀의 문제점에 대해 냉철하게 분석, 지적했다는 점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 외에도 기존에 주목받지 못하던 선수들을 기용 및 발굴해 호평을 받았는데 미리 선발된 선수 외에 선발되지 못한 쪽에도 더 좋은 선수가 많을테니 잔뜩 추천하고 계속 뒤져보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63] 그리고 해외에서 잘 나가던 선수들보다 한국에 오래 머물고 있어 경기력이 다듬어져 있던 국내 선수들의 체력 등을 더높이 평가했다고. 이 당시에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스타 선수였던 이동국은 탈락한 반면 신참에다 당시 아무런 기대도 받지 못하던 박지성이 최종 엔트리에 합류하여 이 월드컵의 또 다른 스타가 된다. 박지성 본인에겐 히딩크가 축구인생의 은인이었던 셈.

아무튼 2002년 월드컵으로 히딩크는 내리막길 감독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났고 대한민국 내에선 국민영웅 대접을 받았다. 월드컵 시작하기 전에 오대영 감독이라고 그렇게 까대던 국내 언론들도 그를 거의 한국 축구의 성자로 떠받들며 매일 같이 찬양 일색이었다[64]. 혹자는 만약 독일을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더라면 국내에 히딩크를 숭배하는 종교가 하나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하기도. 근데 농담으로 안 들려서 더 무서워...[65]

2002 월드컵은 홍명보 등 고참들이 안정적인 기량을 보이고 이영표등 수비수들의 활약도 돋보였던데다 그 어려운 세대 교체마저도 완벽하게 이루어내면서 4강 진출이란 성과를 이룩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리즈 시절이었다. 동시에 히딩크 본인에게도 전성기이자 인생역전 그 자체였다 할수 있다[66].

이런 4강 신화의 업적을 인정받아, 히딩크 감독은 2003년 2월 25일 취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 문화 체육 학술 인사로 초청받아 참석하기도 했다.

5.2. 한국에 대한 애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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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재단을 통해 한국 축구의 발전에 꾸준히 기여중인 거스 히딩크.[67]

한국 팀을 박살 낸 뒤 한국 국대 감독을 맡고나서 인생역전을 이루어낸 만큼 한국에 대해선 당연히 애정어린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68] 월드컵 이후 PSV 아인트호벤 감독으로 떠나기 전 인터뷰에서 한국과 정이 많이 들어 떠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이 참가할 큰 대회도 당분간 열리지 않을 것 같고 여기서 서로 헤어지는게 좋은 이별이 될 것 같다고 말하였다. 2012년 방한 후 기자회견장에서 수많은 기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자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월드컵 전 2002년 5월에 한 인터뷰 역시도 화제가 됐는데, 단순히 이번 월드컵 무대만을 위해 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한국축구가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춘 강력한 팀으로 가는 길에 작은 기여를 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또한 한국 선수들의 첫인상에 대해선 착하고 순수하며 의지가 강해 그들을 매우 사랑한다고 애정을 드러내기도.

더불어 "과거의 한국축구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변방의 소속팀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속한 나라이며 내가 이끌고 있는 우리의 나라이다. 비록 국적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그 문화의 차이가 다르지만 내가 선택한 나라, 또한 가능성이 있는 나라이다. 남들이 뭐라 떠들든 나는 내가 생각한 길을 갈 것이며 궁극적으로 이는 성공으로 이어질 것으로 확신한다."며 비난여론에 대응하고 감독으로서 책임감을 드러냈다.

이렇듯 히딩크는 대한민국에 대해 유독 각별한 애정을 표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단순한 립 서비스라고 볼 수 없다. 대한민국 대표팀을 맡지 않았더라면 자기 자신도 자칫 한물간 3류 감독 신세가 될 수 있었기 때문.[69] 거기에 각종 상금과 CF[70] 출연료 등으로 거액의 돈까지 벌어들인데다 한국에서는 거의 "한국 축구의 은인" 이라며 감독 인생 동안 받아본 적이 없을 만큼의 영웅 대접을 다 받았으니 대한민국 활동을 통해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고 할 수 있다. 히딩크 본인도 이때가 자신의 Career high였다며 그리워하는 발언을 후에 남기기도 했고 특히 인천국제공항에 존재하는 외국 국가원수 전용 비밀 출입문인 더블 게이트를 이용하는 국가 원수급 대접을 받아본[71] 인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생각보다 한국에서의 위상은 훨씬 더 대단하다.

심지어 그를 한국으로 귀화시켜 '희동구'라는 한국 이름을 주고 상암 희씨의 시조로 삼자는 애정어린 농담까지 돌아다녔을 정도. 월드컵 직전에 돌아다녔던 유머 중에는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시, 8강 진출시...등으로 국민 반응을 예측한 것이 있었다. 해당 유머에 따르면 8강 진출시 정몽준 당시 축구협회장과 히딩크 감독이 원내 1위 정당을 설립, 4강 진출시 헌법개정으로 히딩크 감독 대통령 취임 등등. 동아일보 기사...어? 물론 이는 그 빛나는 성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찌됐든간에 성과가 나왔기에 이 정도의 대접을 받을수 있었던 것. 실제로 2002년 7월 명예국민 지위가 수여되었다.

여담으로 만화가 허영만관상을 소재로 한 만화 에서 히딩크를 다루며, 수재민 연금으로 겨우 5천만원(!?)을 냈다고 비판한 관상가 인터뷰를 실은적이 있다. 사실, 네덜란드 사람들은 1945년 전후 2차례의 불경기를 겪으며 근검절약이 몸에 배었다.[72] 히딩크가 그 정도 액수를 '쾌척'한 것이 대단한 것이다. 게다가 2010년대 들어 5천만원은 살짝 적어보이지만 IMF 구조조정 사태 터지고 얼마 안지난 상황에서 당시 5천만원이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사실 자발적으로 하는 기부에 "한국에서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는데 적어도 얼마 이상은 내야된다"라는 기준을 부여하는 것도 우습긴 하다. 하지만 조세 피난처를 이용해 탈세한 혐의가 인정돼 유죄판정을 받은 만큼 짠돌이임은 확실하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 2002 월드컵 10주년 기념 올스타전에 초청되었을 때도 "한국 사람을 세계 곳곳에서 만날 때마다 언제나 환영받는 느낌이 떠오른다."며 "한국에 그동안 여러 번 와서 2번째 고향 같다."라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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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올스타전 경기에서 박지성이 골을 넣고 포르투갈 전에서의 그 유명한 세레머니 포즈를 취하며 달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어퍼컷 모션을 취하며 포옹, 10년전의 명장면을 재현하여 많은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한국 축구선수들 및 인사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평이 대부분이고 이 월드컵으로 스타가 된 한국 선수들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아직까지도 교류가 활발하다. 이당시 거미손 골키퍼로 이름을 떨친 이운재가 힐링캠프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2년전부터는 홍명보, 박지성, 안정환, 이운재 등과 함께 2002 월드컵 계모임을 시작해 얼굴을 보고있다고 한다. 회장은 홍명보. 홍명보가 자신의 팀으로 와 지도자 연수를 받을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이영표, 박지성의 경우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팀으로 데려가 해외 진출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등 신경도 많이 쓰는 편이다.

선수들의 히딩크에 대한 인상은 호랑이처럼 엄하지만 할아버지처럼 푸근했다고 한다. 특히 선수들에게 주눅들지 말라며 자신감을 심어준 것과 끝까지 믿어준 것에 감사한다는 평이 많은 등, 정신적인 면에서 선수들을 지탱해 준 것에 대한 감사도 많이 받았다. 심지어 월드컵에 출전도 못해보고 2002년 당시 벤치신세를 지켰던 선수인 윤정환 역시도 당시에는 벤치 신세로 만들어 서운했지만 그럼에도 히딩크에게서 정말 많이 배웠다며 자신의 평생에 가장 존경하는 감독이자 롤모델로 히딩크를 뽑았다. 선수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하고 냉정한 분석력이 있으며 선수에게 끊임없이 다가서려 하는 면모를 특히 존경한다고.

이 중 박지성과는 말할 필요도 없이 서로 최고의 은사-제자라고 치켜세울 정도로 한국 선수들 중에서도 가장 총애하여 아직까지도 둘은 축구팬들에게 모범적인 사제지간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박지성이 아인트호벤을 떠날때 히딩크가 만류하며 섭섭해했다는 이야기가 나와[73] 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아니냐 했지만 이후 박지성이 맨유에서 힘든 적응기를 겪자 언론을 통해 박지성은 훌륭한 선수이고 더많은 기회를 받을 가치가 있다며 그를 끊임없이 옹호해주는등 변함없는 애정을 과시했다. 아직까지도 볼때마다 너무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제자라고 각별하게 생각할 정도.

박지성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이 여러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히딩크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현한 바 있으며 항상 히딩크를 자신의 축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왔다. 박지성이 자서전에 쓴 내용에 따르면 부상당한 그에게 정신력이 훌륭한 선수라고 찾아와 칭찬을 해준것이 자신의 남은 인생을 바꿔주었다고 할 정도. 그만큼 히딩크 감독에게 심적으로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무명 선수와 다를바없는 박지성을 히딩크가 월드컵 전부터 끊임없이 칭찬하고 언론의 비난세례를 받아가면서까지 그를 기용하고 지지해주었던 점을 생각하면 둘이 서로를 각별하게 최고라고 칭찬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박지성이 은퇴하기 전 히딩크에게 미리 통보를 했는데 흔쾌히 지지해줬다고 한다.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씨 역시 박지성에게 히딩크는 그의 재능을 알아봐 준 감독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연락을 자주 하고 잊을 수 없는 감독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 고마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기도.. 그리고 은퇴식에서 박지성은 인생 최고의 감독으로 히딩크를 꼽으며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감사하고 있다고 인사했다.

한국 요리는 그다지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갈비생선전 외에는 좋아하는 한국 요리가 없다고 한다. 그 중에서는 산낙지를 매우 질색하였다고 한다.[74] 그래도 한국이 결승에 진출하면 먹겠다고 말한 적은 있었다.[75] 의외로 마늘은 스테미너에 좋다고 해서 좋아했는데, 선수들과 고깃집에 갔더니 외국 사람은 마늘 싫어할 거라 생각한 주인이 안 주는 바람에 따로 요청하기도 했다고. 물론 생마늘을 쌈장에 찍어먹는 스타일이 아니라 고기랑 같이 구워먹는걸 즐겼으며 이는 자서전에서도 언급되었다.

2014년 1월 5일, 무릎 관절 수술과 복부지방제거, 이마거상수술을 받기 위해서 방한 예정이라고 한다. 기사 연인 엘리자베스도 따라왔다고. 이후 홍명보 감독을 포함한 축협 간부들이 총출동하여 병문안을 가는 진풍경이 나왔고 히딩크 감독도 한국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첫 경기 러시아전을 최소한 비겨야 할 것이라는 조언을 하였다. 그리고 정말로 비겼다.

한국이 처참하게 월드컵을 마무리한 후에 올스타전과 박지성 결혼 때문에 방문했을 때는 한국 팬들이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투의 인터뷰를 했다. 정 아니면 자신이 했던 것처럼 장기 합숙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하다고.[76]

2014년 연말에 네덜란드 국왕과 함께 방한했다. 경제 사절단 담당 특사 자격으로 왔고, 양국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도 배석이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무릎이 좋지 않아 한국에서 줄기세포 치료를 받았다. 상태가 심각해서 한동안 휠체어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현재는 골프칠 때 카트 타지 않아도 될 정도로 회복을 했다고. 여러모로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2016년 10월 한국 방문에서는 미친 포텐을 터트리고 있는 손흥민에 대해서 프리미어리거 수준을 넘었다고 호평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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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 재부임설[편집]

자세한 내용은 2017년 히딩크 감독 선임 논란 문서 참조.

2017년 9월 6일 YTN 단독 뉴스에 따르자면 지난 6월 슈틸리케 감독이 사임할 당시 관계자를 통해 "한국 국민들이 원한다면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을 용의가 있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다고 한다. "히딩크, 한국민이 원한다면 국대 맡을 의사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축구협회 측에서는 몸값이 너무 비싸 선임할 수 없다며 히딩크의 한국 국대 감독 재선임 문제를 일축했다. 의향 있다는 히딩크, 협회는 "몸값 못 맞춰"

실제 한국팀 국가대표 감독을 맡게 될지는 미지수이나 적어도 한국을 향한 히딩크의 애정이 각별함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측근을 통해 "연봉과 상관없다"[77], "슈틸리케보다 적게 받아도 상관없다." 등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그런데 정작 이 소문들을 흘린 당사자로 추정되는 히딩크 재단 노제호 사무총장은, 히딩크가 6월 당시에 대표팀을 맡을 의향이 있다고 듣기는 했으나 자신이 축협에 이걸 전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본선 탈락할지도 모르는 대표팀을 히딩크에게 맡길 수 없다고... 관련기사

9월 14일, 히딩크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이 원한다면 어떤 역할과 자리라도 맡겠다"면서 3개월 전, 그러니까 지난 6월 대리인을 통해 한국 감독직을 맡을 의사가 있다는 것을 축구협회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호곤 위원장은 이에 대해 "어떤 연락도 받은 적이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입장을 발표한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이 발언은 거짓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히딩크 재단은 "히딩크 감독이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관심이 높으니 기술위가 남은 최종예선 두 경기를 맡을 임시 감독을 뽑고 월드컵 본선 감독은 본선 진출 확정 후 지원자 중에서 뽑는 게 어떻겠냐"고 김호곤 위원장에게 제안했으며, 해당 내용이 담긴 문자를 공개했다. 히딩크 재단에 따르면 히딩크 측의 이런 제안에 대해 김호곤 위원장이 "본선에 올라간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반응했다고 밝혔다.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052&aid=0001058935 같은 날 터진 축구협회 횡령사건과 김호곤 위원장의 거짓말 논란으로 인해 축구협회에 대한 불만 여론이 커지는 가운데, 히딩크의 재부임설 문제가 단순한 대표팀 감독 선임의 문제를 넘어서 축구협회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 요구로 점차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6. 탈세 흑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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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년 FIFA 월드컵 당시 한국에서 벌어들인 광고 수입과 인세를 실제보다 적게 신고했다는 혐의와 월드컵 직후 조세 피난처로 알려진 벨기에 아셀에 집을 얻은 뒤 거주지 허위 신고를 해 17억 가량의 세금을 탈루한 혐의[78]로 인해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이던 2006년 7월 탈세 혐의로 네덜란드 검찰에 의해 법정에 기소되었다. 이후 2007년 1월과 2월 각각 1, 2차 공판에 나서 본인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6개월 집행유예와 벌금 4만 5천 유로(약 5천 500만원)를 선고받았다. 김호곤 : "히딩크 그 인간 돈만 아는 xx"

히딩크 입장에서는 그나마 실형을 모면한 것이 다행스러운 점이라는 입장이었으나, 이로 인해 그동안 국제 축구계에서 쌓아온 명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히딩크의 커리어에 있어서 상당한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이후 히딩크는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첼시 FC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부정적인 시선들을 어느 정도 거두는 데 성공했으나, 히딩크에 대한 비판이 나올 때마다 끊임없이 거론되는 사례로 남게 되었다.

7. 트리비아[편집]

8. 감독 기록[편집]

8.1. 리그 기록[편집]

연도

구단

순위

경기

승점

1987/88

PSV아인트호벤

1

34

27

5

2

117

28

59[79]

1988/89

PSV아인트호벤

1

34

24

5

5

78

31

53

1989/90

PSV아인트호벤

2

34

20

8

6

94

36

48

1990/91

페네르바흐체

5

30

12

8

10

53

53

44

1991/92

발렌시아

4

38

20

7

11

63

42

47

1992/93

발렌시아

4

38

19

10

9

60

33

48

1993/94

발렌시아

7

38

14

12

12

55

50

40

1998/99

레알 마드리드[80]

7

24

11

4

9

46

39

37

1999/00

레알 베티스[81]

18

13

1

6

6

8

19

9

2002/03

PSV아인트호벤

1

34

26

6

2

87

20

84

2003/04

PSV아인트호벤

2

34

23

5

6

92

30

74

2004/05

PSV아인트호벤

1

34

27

6

1

89

18

87

2005/06

PSV아인트호벤

1

34

26

6

2

71

23

84

2008/09

첼시[82]

3

13

11

1

1

24

15

34

2011/12

안지 마하치칼라[83]

5

44

19

13

12

54

42

70

2012/13

안지 마하치칼라

3

30

15

8

7

45

34

53

8.2. 대회 기록[편집]


[1] 1998년 유프 하인케스가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에서 사임한 후 6월 17일에 후임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코칭 스태프와의 갈등으로 인해 22일만에(7월 9일) 사퇴했고 6일 후인 7월 15일 거스 히딩크가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취임하였다.[2] 국립국어원에 따라 표기하면 "휘스"가 맞지만, 본인이 "거스"라고 불러달라고 했다.[3] 워싱턴 디플로매츠는 시즌 종료 후부터 새 시즌 개막 전까지 임대를 다녀왔다.[4] 새너제이 어스퀘이크스도 역시 시즌 종료 후부터 새 시즌 개막 전까지 임대를 다녀왔다.[5] 시즌 중 경질.[6] 시즌 도중 부임 뒤 성적부진으로 경질.[7] 시즌 도중 부임.[8] 시즌 도중 부임.[9] 2015년 12월 19일에 부임.[10] 네덜란드에서 대한민국으로 고위층이 방문할 때에 히딩크가 꼭 배석하게 된다. 더구나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이래로 한국 축구계는 네덜란드 축구계와 매우 가깝게 지내게 되는데, 그가 1등 공신이라고 할 만하다.[11] 가깝다고 했지 절대 같다고 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어의 g는 무성 연구개 마찰음(/x/ 발음이다)으로 무성 성문 마찰접근음인 한국어의 ㅎ과는 다른 음이 난다. 다만 국립국어원에서는 네덜란드어의 g를 ㅎ로 표기할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유학 경험자의 말에 의하면 히딩크의 고향으로 가서 '거스 히딩크'란 사람을 아냐고 물어보니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고 한다.[12] 2016년 12월 현재는 시딩커(希丁克)라고 표기한다.[13] 아버지가 학교 교장이었는데 히딩크가 땡땡이를 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혼낸 적은 없다고 한다. 장인이 자기 아들이랑 놀고 싶다는데 혼낼 수야 없으니.[14]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수리남 출신으로, 네덜란드의 흑인들은 퀴라소 등지가 아닌 이상 대개 수리남 출신이라고 보면 된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수리남 사람들을 자국인으로 여길정도로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클라렌스 세도르프 등이 수리남 출신.[15]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히딩크는 결혼도 했고, 장성한 아들도 있다. 하지만 부인과는 별거중이고 여자친구를 데리고 다닌 것. 이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을 날린 기자들을 향해 "머리통을 발로 차 버리고 싶다"며 불쾌한 감정을 보이기도 했다.[16] 여담으로 농구와 야구 지도자 자격증도 함께 취득했다고 한다.[17]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칼을 들고 교실에 들어온 아이도 있었는데, 따끔하게 타일러서 충공깽한 사태를 막아냈다고.[18] 장애 때문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니 자연히 심리전에 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슈퍼스타들을 휘어잡은 것이나, 한국와서 안정환, 홍명보 등 스타급 선수들을 길들일 때도 유효했다고. 이러한 심리전은 상대팀을 위축시키기도 했는데, 1998년 당시 한국대표팀이 연습장에 도착한 걸 보고도 무시하고 30분 넘게 연습을 이어간 사례나 2002년 천하의 이탈리아를 생까고 8강전을 준비한다며 태연히 스페인과 아일랜드의 16강 경기를 관전하러 간 일 등등. 심리전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괜히 지장이니 명장이니 소리를 듣는게 아니다![19] 이때 1년만 일찍 부임했더라면 선수시절의 허정무와 만났을 뻔 했다.(허정무는 PSV 아인트호벤에서 80~83 시즌까지 뛰었다.)[20]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격인 대회. 각 리그 우승팀들이 토너먼트로 겨루는 방식이었다. 현재 챔피언스 리그의 각종 기록들은 유러피언컵 시절을 포함하고 있다.[21] 아인트호벤은 이후로 다시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오르지 못했다.[22] 나머지 일곱 명은 셀틱 시절의 요크 스타인, 아약스 시절의 이스트반 코박스, 맨유 시절의 알렉스 퍼거슨, FC 바르셀로나 시절의 펩 과르디올라, 루이스 엔리케, 인터 밀란 시절의 조세 무리뉴, 바이에른 뮌헨 시절의 유프 하인케스.[23] 협회 측에서는 명예로운 자리라며 연봉을 많이 줄수 없다고 고수했다고 한다. 결국 기존 연봉보다 100%인상으로 합의를 봤다는 듯.[24] "Hiddink should stop putting his head in some players' asses."(히딩크는 몇몇 선수들한테 병신같은 짓을 하는 걸 그만둬야 한다.)라는 말을 라디오에서 했기 때문에...[25] 다시 돌아오기까지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이 당시의 일화로는 다비즈를 쫓아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히딩크는 다비즈를 발탁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기 위해 다비즈와 따로 카페에서 만났는데, 다비즈는 전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히딩크는 "에드가. 커피값은 내가 내겠네."라며 주저 없이 다비즈를 남겨두고 그냥 일어나 나갔다고 한다. 그 이후 오랫동안 다비즈를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고서야 다시 발탁하였다.[26] 그 당시 잉글랜드는 이 대회에서 4강에 올랐다. 참고로 잉글랜드가 유로에서 4강 이상 올라간 건 이 대회가 유일하고, 월드컵까지 합쳐서 메이저대회 4강은 3회에 불과하다.[27] 분노한 네덜란드 국민들은 전임 감독이었던 딕 아드보카트를 다시 데려오라며 아우성을 쳤었다고 한다. 훗날에 다시 네덜란드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아드보카트는 유로2004 예선에서 체코에 밀려 플레이오프로 떨어진 후 스코틀랜드를 만나 원정서 1:0으로 패배하는 졸전을 펼치다 간신히 진출한 본선에서 결국엔 4강에 올랐으나 본선에서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끔찍한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요한 크루이프, 마르코 판 바스턴 등 레전드들에게 이것은 네덜란드 축구가 아니라고 미친듯이 까인 끝에 결국 판바스턴에게 지휘봉을 넘겨야 했다. 물론 스코틀랜드에 졌을 때 네덜란드 국민들은 히딩크를 다시 데려오라며 난리를 쳤다고 한다.[28] 훗날 인터뷰에서 경기 전 우리나라 선수들의 긴장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눈빛을 보고 대승을 확신했다고 한다. 2002년 이전 월드컵만 나가면 쫄아서 자멸했다던 많은 국대선수들의 인터뷰와 일맥상통한 이야기다.[29] 일부러 쫄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한국과 네덜란드는 같은 연습장을 썼는데, 한국대표팀이 도착한 후에도 히딩크는 일부러 훈련을 계속했다. 그것도 슈팅훈련을 했다고 한다.저런놈들이랑 붙어야 해? 그런데 30분이 넘도록 한국쪽에서 아무런 항의가 없어서 '얘들이 단단히 쫄았구나...'라고 확신했다고. 당시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죄다 순박해 빠져서 그랬지, 만약 이천수기성용같은 한 성질하는 선수들이 있었다면 역효과가 났을지 모른다......라고 하기에는 이 당시 두 팀의 전력 자체가 굉장히 큰 상태였기 때문에 점수차만 적게 났을 확률이 더 높았을 것이다.[30] 이 무렵 유럽 축구 최강은 엄연히 프랑스였고,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보다 살짝 아래로 평가받았다. 이 점을 감안하면 아주 납득못할 성적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우승 경쟁이 될만한 성적이었던거도 사실이라.....한국이 아시안 컵에서 4강에 그치면 감독 생명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생각하자. 냉정히 생각해서 한국이 아시아에서 꽤 강하다고 해도 우승을 장담할 정도로 독보적인 건 아닌 것도 사실이다.[31] 1960년이후 38년만 [32] 현재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33] 이 대회를 치루기 전에 우승하면 콧수염을 자르겠다고 공약하였고, 우승 하였기 때문에 잘랐다고 한다.[34] 수뇌부의 아들을 기용하라는 압박에 빡친 나머지 "이 팀은 좀 더 프로다운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듣고 노한 회장 로렌조 산즈는 바로 짤랐다.[35] 자서전 마이 웨이에는 거의 1년동안 지휘하면서 성적도 매우 좋았다고 언급을 했는데 실제로 리그 성적은...아래에서 나올 베티스에서의 흑역사와 마찬가지로 도요타컵 우승을 제외한 흑역사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듯 하다.[36] 리그 성적만 포함한 수치. 놀랍게도 저 유일한 리그 1승은 판 할의 바르셀로나에게 거둔 거다. 저 패배가 발목을 잡았는지 바르셀로나는 승점 5점 차이로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 밀리며 우승을 하지 못한다. 히딩크의 작은 복수라고 볼 수 있을 듯.[37] 바야돌리드와 누만시아와의 원정 두 경기에서 이기고 홈경기에서 1패를 했는데 그 1패의 상대가 레알 마드리드였다.[38] 현대중공업에서 국제수주업무를 맡다가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이 축구협회장으로 취임하자 같이 따라 들어온 인물. 17년간 대한축구협회의 국제협력업무를 담당하다가 정몽준의 퇴임이후 현대중공업으로 돌아갔다. 히딩크 감독 이후에도 움베르투 코엘류, 딕 아드보카트, 그리고 코치 압신 고트비까지, 3명의 외국인 지도자 영입을 성사시켰다.[39] 핌 베어백 감독은 원래 히딩크 감독 선임 당시, 네덜란드 축구협회에서 수석코치로 추천해준 인물이다. 부드러우면서도 사리분별이 명확하기 때문에, 다혈질의 히딩크를 보좌할 수 있을 거라고.[40] AC 밀란의 홈구장 산 시로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는 2:0으로 패했다[41] 당시 에레디비시에서 주목할만한 팀은 3강(아약스, PSV, 페예노르트), 3중(헤렌벤, AZ 알크마르, 트벤테) 정도. 00/01부터 07/08 시즌까지 PSV가 리그 우승을 못했던 건 두번 뿐이며, 그나마 그 두번은 AFC 아약스가 거둔 것이다. 게다가 챔피언스 리그에선 아인트호벤 말고는 다들 고전했으며 아약스는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동네북되고[42] 심지어 유로파리그에서도 고전하고, 새롭게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강호로 떠오른 트벤테와 알크마르조차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동네북이 됐던 걸 생각하면 이 때 거둔 아인트호벤의 4강은 엄청난 성적임을 알 수 있다.참고로 2000년대 와서 에레디비시 구단으로서 챔피언스리그 8강 이상을 가본 건 이때 아인트호벤 뿐이다. 2010년대 와서도 에레디비시 구단으로 챔피언스리그 16강만 가도 영광인 상황이니 말 다했다. 2013-14 시즌만 해도 아약스가 유로파 리그에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게 1:6으로 참패하며 털린 걸 봐도...[42] 그것도 체코나 더 하위 랭킹으로 평가받던 팀에게 연이어 패했다.[43] EPL의 커뮤니티 쉴드와 마찬가지로 에레디비시 우승팀과 KNVB 베이커 우승팀이 격돌하는 단판제 대회[44] 이것이 1954년 이후 1986년까지 본선에 못 올라왔던 우리와 공통점. 그 이후 지금까지 연속 진출하는 것도.[45] 당시 잉글랜드를 이끌던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은 예선 탈락의 책임을 지고 경질당했다. 나중에 뉴캐슬 감독이 된 후에도 히딩크가 임시 감독을 맡은 첼시에 1-5로 대패를 당한다.[46] 이 때 히딩크는 경기전 언론에서 "조국의 역적이 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정도로 자신이 있었다는 것.[47] 아인트호벤 외 다른 클럽팀에선 우승을 거둔 게 없던 징크스.[48] 히딩크가 한국 대표팀 감독시절 밀당을 통한 길들이기를 가장 많이 한 선수가 홍명보였기 때문에 대표팀 터줏대감이었던 홍명보가 이를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다는 루머가 많이 돌았다.[49] 로날드 쿠만은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를 강력히 원했었고, 네덜란드의 축구팬들과 여론에서도 쿠만의 감독 취임을 바랬었다. 하지만 KNVB의 선택은 페예노르트서 좋은 성과를 거두면서 다수의 대표팀 선수를 배출한 쿠만을 제쳐두고 커리어의 말년을 보내고 있는 히딩크를 감독으로 선임하였고, 안 그래도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쿠만에게 감독이 아닌 수석코치 자리를 제의하며 또 다시 굴욕을 주었다. 이로 인해 유력한 후보였던 쿠만은 KNVB와 완전히 척을 지고 말았고 이후 사우스햄튼 FC로 떠났다.[50] 유로 본선 참가 팀이 16개 팀이던 시절에도 네덜란드 정도 되는 팀이 본선에 못 올라간다는건 크나큰 망신이자 굴욕인데 하물며 유로 2016 부터는 본선 참가팀이 24팀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50여개 정도 되는 나라들 중에서 절반에도 못 들어갔다는 이야기다.[51] 브라질과의 4강전에서 1-1 무승부를 거두고 승부차기에서 2-4로 패. 3,4위전에서 크로아티아에 1-2 패.[52] 독일과의 4강전에서 0-1로 패. 3,4위전에서 터키에 2-3으로 패.[53] AC 밀란과의 4강 1차전 원정 경기에서 0-2로 패, 2차전 홈 경기에서 3-1 승으로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탈락.[54] 스페인과의 4강전에서 0-3 패.[55] FC 바르셀로나와의 1차전 원정 경기에서 0-0 무승부, 2차전 홈 경기에서 1-1 무승부로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탈락. 특히 2차전 홈 경기는 역사에 남을 만한 오심 경기로 불린다.[56]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에 소속된 선수들을 보면, 프랑크 데 부어, 데니스 베르캄프. 마크 오베르마스, 파트릭 클루이베르트,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 에드빈 판 데르 사르 등으로 네임벨류만 봐도 매우 유명한 선수들이 즐비했다. 한 마디로 역대급 토탈 스쿼드를 구축했던 시기.[57] 참고로 터키는 유로 2000 대회 예선에서는 독일을 상대로 1-0으로 안방에서 이겼고 원정에선 비겼다. 물론 당시 독일은 녹슨 전차라고 하여 한물 간 것으로 평가받던 때였지만. 결국 유로 본선에서 포르투갈루마니아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독일은 1무 2패로 허무하게 탈락하고 반대로 터키는 다른 조(이탈리아,벨기에,스웨덴)에서 1승 1무 1패로 유로 8강에 첫 진출하는 대조를 보였다.[58] 감독으로 부임했을 당시 5:0 경기 때문이 오대영 감독이란 별명이 붙긴 했지만 98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국대의 감독을 맡을 당시 한국을 5:0으로 발라버린 경기 역시 아직까지도 많은 한국인들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어 이 5:0이라는 숫자가 '축구경기에서의 참패'를 뜻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수치가 되었다. 괜히 참담한 대표팀 실력을 볼 때마다 '5:0으로 지는 것 아니야?'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긴 감독.[59] 덕분에 차범근의 다큐도중 차범근과 만나서 담소를 나누다 98년도 네덜란드 국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차범근이 "그때 저희를 참 힘들게 하셨어요"라고 농담을 던지자 미안하다고 너스레를 떨며 격하게 편집을 요구했다. 이 당시 차범근 감독은 히딩크의 네덜란드에 발려서 대회 도중 경질되는 흑역사를 맞았기 때문. 한때 적으로 맞섰던 두 어르신들이 서로 땀을 닦아주며 미안하다고 오버액션을 날리는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다.[60] 놀랍게도 이 부분은 2010년대의 한국축구에도 어느 정도 들어맞는 편이다.[61] 이 당시 하늘같은 선배들은 황당해 하고 후배들은 당황하며 모든 사람들이 쭈뼛거리는 와중에 김남일이 걸어오며 "명보야, 밥먹자!!"를 외쳐 분위기가 풀어졌다는 전설이 있지만 김남일 본인은 강력히 부인하게되어 전설로 남게되었다. 사실은 이천수 선수가 한 말이라고. 본인도 시인했다.[62] 한편, 이 사례는 의외로 경영학에서 자주 인용된다. 특히 다문화 이해를 중시하는 경영 기법(Inter-cultural Management)에서는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종종 인용되는 사례다.[63] 최진철을 발탁하면서 "왜 여태 안뽑았느냐?"고 말한 일화가 있다.[64] 한국축구 사상 첫 월드컵 승리를 선사했을 뿐 아니라, 포르투갈, 이탈리아와 같은 강호를 꺾고 4강까지 진출시킨 업적은 무슨 말을 해도 부족하다. 당장 아시아 국가들 중 유일한 월드컵 4강진출이라는 점과, 최종성적 역시 아시아 최초의 4위였다는 점 역시 엄청난 업적이다. 4위로 마쳤기에 망정이지 만에 하나 우승이나 준우승으로 끝냈다면 한국축구는 엄청난 부담감을 갖고 차기 대회를 준비했어야 했었을지도 모른다.[65] 농담이 아니고 실제로 당시 개그로 나돌던 유머 중에 그와 관련된 유머가 돌기도 했다.[66] 괜히 박지성이 2002년 한일 월드컵 대 포르투갈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후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포옹을 한 것이 아니다. 축구선수로서 대성하기 어렵다는 평가에, 프로선수 경력마저 해외, 그것도 일본의 프로리그팀에서 뛰던 그를 발탁시켜 인생 역전을 만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외국인 감독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는 은인이나 다름없다. 아니, 그 이전 자기를 믿어준 소수 지도자들의 명예를 지원해준 백락이나 다름없다.[67] 허정무/거스히딩크축구재단에서 훈련받은 박재민이라는 선수가 나이키 모스트 원티드의 한국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68] 2002년 월드컵 후 중국이나 태국에서 러브콜을 날렸지만, 생깠다. 일본의 경우 2006년 호주대표팀을 맡으면서 밟아 놓아 한국팬들을 또 한번 즐겁게 해 주었다.(거기다 정의는 승리했다는 드립까지!) 하지만 북한의 경우는 예외로, 한국과 한민족이라는 정서를 알았던지, 기회가 된다면 북한 대표팀을 맡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69] 실제 히딩크 영입때 찾아간 가삼현씨가 히딩크를 설득하면서 "한국 말고는 당신이 갈 곳이 더 이상 없다."라는 말로 설득했다고.협박 같은데? 앞서 말했다시피 이 때 히딩크는 레알 베티스에서 실패한 후 야인으로 차츰 잊혀져 가는 중이었다. 잉글랜드 대표팀을 맡았던 에릭손 감독이 빌빌 거리다 중국 리그에서 감독하는걸 히딩크가 경험할 수도 있었던 것. 그리고 지금은 이 사람이 진짜 그렇게 될 위기에 처했다... [70] 출연한 광고 중에 "하늘만큼 땅만큼"이라고 말하는 모 보험사 광고가 있었다.[71] 국가원수급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보낸 특사급 인물과 각 국제기구 단체장이나 대통령 초청 특별 인물 방한시에도 더블 게이트를 통과하여 입국하였다. 예를 들면 IOC 위원 이라든가.[72] 히딩크 부모세대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물자공출로, 히딩크 또래의 세대들은 네덜란드병석유파동의 2연타로 10대, 30대 시절을 어렵게 살아온 경우가 대부분이다.[73] 이 때 히딩크는 박지성이 맨유에서 벤치멤버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를 했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로만 아브라모비치 소유팀인 첼시로 나중에 같이 가자면서 만류했다. 그러나 박지성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명문은 첼시가 아닌 맨유라면서 이적을 강행.[74] 사실 이건 히딩크가 유난스러운게 아니라 아랍 및 아시아 각지, 오세아니아, 중남미, 북중미에 이르기까지 산낙지에 대하여 굉장히 질색하는 사람들이 많다.[75] 당시 대표팀 코디네이터였던 얀 룰프스는 다리 한짝을 잘라먹긴 했다. 전설의 명장 조 본프레레의 경우 김치로 밥을 비벼먹을 정도로 음식 적응을 잘 했지만 해삼에게는 백기를 들었다고.[76] 하지만 과거 FC 코리아와 같은 합숙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다.[77] 리피 이전에 중국 대표팀 감독 제의를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한다. 참고로 리피의 연봉은 약 200억원[78] 여자친구 엘리자베스가 주로 암스테르담에 기거했던데다 히딩크 본인은 해외팀 및 원정팀과의 경기로 인해 실제로 이 집에 거주했던 적이 거의 없었던 사실이 밝혀졌다.[79] 당시에는 승리 시 승점이 2점이었다.[80] 해고 당시 성적[81] 중도 부임 후 시즌 종료 성적[82] 중도 부임 후 시즌 종료 성적[83] 중도 부임 후 시즌 종료 성적[84] 당시 명칭은 유러피언 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