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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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추존 존령 이한 | 李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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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의 묘 조경단(肇慶壇) | |
출생 | |
사망 | |
능묘 | 조경묘(肇慶廟)[1]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 |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신라 사공(司空)의 직급을 받았다고 한다.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 10세 후손[2]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해 이자연을 낳았다고 한다.[3] 《태조대왕실록》, 《증보문헌비고》 등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2세 후손[4]이다. 이성계뿐만 아니라 그 전에 무신정권의 제1대 집권자로 유명한 이의방의 선조이기도 하며, 이성계는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의 직계 후손이다.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선대 조상들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중국 당나라 황실에서 기원했다는 설[5]과 신라의 토착 성씨인 경주 이씨에서 분적(分籍)했다는 설[6] 등이 있다.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선대 조상들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중국 당나라 황실에서 기원했다는 설[5]과 신라의 토착 성씨인 경주 이씨에서 분적(分籍)했다는 설[6] 등이 있다.
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건대, 본디 나온 곳은 경주 이씨이다.《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신이 삼가 선원의 기원을 살펴보건대, 전주의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서, 사공 휘 이한은 신라에 벼슬하여...《태조실록》 4권(태조 2년 9월 18일 경신 2번째 기사)
《태조실록》 5권(태조 3년 2월 19일 기축 1번째 기사)
토성(土姓)이 9이니, 이(李)·최(崔)·유(柳)·박(朴)·전(全)·유(庾)·한(韓)·백(白)이요...《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 전주부-
세종실록 151권의 기록은 전주 이씨가 전주를 본관으로 한 토착 성씨[8]임을 의미하는 것일 뿐,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에 나오는 경주 이씨 기원 기사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즉, 적어도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전주 이씨는 경주 이씨에서 기원한 전주의 명망있는 집안이라는 것이 된다.[9] 최소한 조선 왕실에서는 자신들이 다른 이씨들과 같은 뿌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역대 왕후들과 부마들 중 본관을 불문하고 이(李)씨들이 전혀 없다는 점이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10]
한편 1388년 위화도 회군 이전에 세워진 이자춘신도비에서는 전주 이씨의 역사를 고려시대 초기[11]의 아간(6등급) 이광희(李光禧)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광희 이하로는 실존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 이광희의 위로 이한-이자연-이천상의 3대가 추가되는데, 《인천 이씨 족보》에서 퍼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자연은 이한의 아들이고, 시중을 지냈다는 기록이 같다. 《인천 이씨 족보》에서 이자연의 동생으로 '이자상'(李子祥)이 있는데 《전주 이씨 족보》에 이자연의 아들로 이천상(李天祥)이 있으며, 이름은 다르지만 복야를 지냈다는 기록이 같다.
고려 제25대 충렬왕이 익조 이행리에게 사족(士族) 가문 출신이라고 언급한 점이나 예전부터 전주 이씨 가문이 계속해서 고려 조정에 음서로 출사한 점, 그리고 고려라는 나라가 철저하게 세습 문벌귀족들이 주도하는 나라였으며, 그들끼리의 이너서클 내에서만 끼리끼리 혼사가 이루어진 점 등을 보면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모 집안이기도 한 곡산 강씨(신덕왕후), 고려 왕조 창건 때 삼한벽상공신 한란을 배출하기도 한 청주 한씨(신의왕후) 그리고 경주 김씨(정안왕후), 여흥 민씨(원경왕후), 개성 왕씨(이방번의 처) 등 명문 귀족 가문들과 개경 왕씨 왕가까지 모두 포함한 유수한 기득권 가문들과 지속적으로 혼인해온 전주 이씨 가문도 신원은 확실하게 보증된 기존 귀족 가문이었고, 더 나아가 고려 왕조의 혈통을 문제삼아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명분으로 왕씨의 고려를 무너뜨리며 일어섰으니 더 말할 건 없지만 왕가로 일어서자 그 격을 더 높이기 위해 당시 최대 명문가인 인천 이씨 가계를 일부 도용한 걸로 추정된다.
[1] 조선 영조 47년.[2] 조선왕조실록에서는 十世, 十世孫, 十代孫으로 혼용하였다. 그러나 각각 10세, 10세 후손, 10대 후손으로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10세, 9세손, 9대손으로 사용한다. 태종 무열왕은 시조 김알지의 16세(15대손)이고, 김은의는 시조 26세(25대손)이다.[3] 이 기록은 신뢰하기 어렵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생년은 603년이므로, 이한이 제35대 경덕왕 연간에 활동한 인물이라면 기껏해야 4~5세손이 최대이다. 게다가 경덕왕 시대의 사람의 아들이 170년 후인 제56대 경순왕 시대의 사람이다.[4] 二十二世孫. 시조 22세인 후손이라는 의미로 봐야 한다. 이성계는 이한의 22세 또는 21세손(21대손)이다. 아래 태조실록 3년 기사 번역문에서 원문의 二十二代祖를 22대조라 하지 않고 22대 조상이라 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이한은 이성계의 21대조이다[5] 연대 작가 미상의《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에 의하면 우리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이요, 자는 견성이시다. 공은 원래 중국에 살았었는데 하늘이 낸 성스런 인물로 남보다 총명하시고 재질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는데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나웠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그래서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서려 있다’라고 하였다.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략을 받아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들어오니 그때가 18세였다. 이렇게 어리셨는데도 문장이 비범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탁월한 재능과 더불어 기품이 널리 떨쳤다. 우리나라로 오신 지 얼마 안 되어 명성이 조정에까지 떨쳐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사공에 임명하니 정치를 하신 지 1년 만에 나라가 태평하여 온갖 벼슬아치들이 다 화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즐겼다.』[6] 실제로 《경주 이씨 대종보》를 보면, 시조 이알평에서 중시조인 소판공 이거명 사이의 실전 세계를 부록으로 수록하면서, 중간에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실전 세계는 경주 이씨에서 분적한 합천 이씨의 조선 말기에 발견된 족보를 근거로 한 것이다. 다만, 경주 이씨 대종회에서는 신뢰성 문제로 실전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즉, 실전 세계는 조선 말기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알평에서부터 이거명까지의 36대에 이르는 경주 이씨 계보가 어느 날 갑자기 무더기로 발견된 점, 이희두(李禧斗)의 동생으로 '이진두'를 거명하며 '두'(斗)라는 동일 항렬자를 쓰고 있는 점, 동일 항렬자를 쓰는 것은 조선 말기 당시 족보 제작이 유행하면서 정착되었다는 점 등에서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7] 명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쥐어 보낸 문서 속 내용. 그러니까 중국 황제에게 보낸 서찰의 일종이며, 따라서 화자 신(臣, 신하)은 조선 태조가 스스로 낮추어 부른 것이다. 참조 또한 여기에 나오는 '조선'은 당연히 고조선이다.[8] '토성'(土姓)이라는 것이 그 지역에 뿌리내린 성씨라는 의미일 뿐, 꼭 그 지역에서 기원했다는 의미로는 확정할 수 없다.[9] 망조(亡朝)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조차 총 서너 번, 40여 년이 걸리도록 꼼꼼하게 개수한 세종의 성정상 태조 당대의 구술보다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기록에 좀 더 힘이 실린다.[10] 건국 이전인 추존 목조 이안사의 효공왕후(평창 이씨), 왕족 대우를 받기 이전에 은언군의 첩으로 들어간 전계대원군의 생모 전산군부인 전주 이씨, 그리고 망국 이후에 일본의 법제에 따라 남편의 호적에 편입한 이방자 여사 정도만이 이씨이다.[11] 고려시대 초기에는 태조 왕건이 신라 및 태봉의 제도를 섞어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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