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나르 노르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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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나르 노르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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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AS 로마 로고(2016~20...

24대

AC 밀란 주장
오메로 토뇬
(1953~1954)
군나르 노르달
(1954~1956)
군나르 노르달의 기타 정보
스웨덴의 前 축구인
MV5BNTIzOTMwMWMt...
이름
군나르 노르달
Gunnar Nordahl
본명
닐스 군나르 노르달
Nils Gunnar Nordahl
출생
1921년 10월 8일
스웨덴 발데마르스비크
사망
1995년 9월 15일 (향년 72세)
이탈리아 쿠카로몬페라토
국적
신체
188cm | 체중 90kg
직업
축구선수(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회르네포르스 IF (1937~1940)
데게르포르스 IF (1940~1944)
IFK 노르셰핑 (1944~1949)
AC 밀란 (1949~1956)
AS 로마 (1956~1958)
감독
AS 로마 (1958 / 선수 겸 감독)
AS 로마 (1958~1959)
칼스타드 BIK (1959~1961)
데게르포르스 IF (1961~1964)
IFK 노르셰핑 (1967~1970)
IF 사브 (1971~1973)
IK 슬레이프너 (1974)
외스테르스 IF (1975~1976)
AIK 포트볼 (1977~1978)
IFK 노르셰핑 (1979~1980)
국가대표
33경기 43골[1] (스웨덴 / 1942~1948)
가족관계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
4.1. 장점4.2. 약점4.3. 총평
5. 기록

 
 
 
 
 
 
 
 
 
 
 
 
 
 
 
 
 
 
 
 
 
 
 
 
 
 
 
 
 
 
 
 
 
 
 
 
 
 
 
 

1. 개요[편집]

 
 
 
 
 
 
 
 
 
 
 
 
 
 
 
 
 
 
 
 
 
 
 
 
 
 
 
 
 
 
 
 
 
 
 
 
 
 
 
 
스웨덴의 前 축구선수.

요즘 축구팬들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스웨덴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즐라탄 이전에 군나르 노르달이 존재했다. 커리어의 전성기는 세리에 A의 AC 밀란에서 보냈으며, 세리에 A 역대 최다 득점 3위에 랭크되어 있다. [2] 또한 곤살로 이과인 이전에, 세리에 A 한 시즌 최다 골[3] 기록 보유자이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세리에 A 역대 최다 득점왕 기록(5회)과 세리에 A 외국인 최다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다. 스웨덴과 북유럽, AC 밀란과 세리에 A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가운데 한 명이었던 셈이다. 스웨덴 국가대표로서는 군나르 그렌, 닐스 리드홀름 등과 함께 ‘그레-놀-리(Gre-No-Li)’ 삼총사라 불리며 당대 최고의 3각 편대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2. 클럽 경력[편집]

 
 
 
 
 
 
 
 
 
 
 
 
 
 
 
 
 
 
 
 
 
 
 
 
 
 
 
 
 
 
 
 
 
 
 
 
 
 
 
 
 
 
 
 
 
 
 
 
 
 
 
 
 
 
 
 
 
 
 
 
 
 
 
 
 
 
 
 
 
 
 
 
1940년 스웨덴의 데거포스 IF에서 데뷔하였고, 1944년에는 노르쾨핑으로 팀을 옮겨 활약했다. 두 팀을 거치며 알스 베스칸 4회 우승과 스웨덴 컵 2회 우승을 이뤄냈다. 그 과정에서 4차례의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스웨덴 삼총사
전설의 ‘그레-놀-리(Gre-No-Li)’ 삼총사
1948 런던 올림픽에서 맹활약한 것을 계기로, 1949년부터 은사 체이즐레르 러요시가 지휘하던 세리에 AAC 밀란으로 이적하였다. AC 밀란 소속으로 2차례의 리그 우승과 2차례의 라틴컵[4] 우승을 이뤄냈고, 무려 5차례의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유로피언 컵의 경우, 그가 AC 밀란에 있던 마지막 해인 1955/56 시즌에 처음 시작된 데다가, ' 저승사자 군단 ' 레알 마드리드 CF가 최초의 개최 시기부터 5년 연속 우승을 독식을 하였기에,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5] 1955/56 시즌까지 AC 밀란에서 뛰면서 현재까지 구단 역대 최다 득점자로 랭크되어 있고, AC 밀란 명예의 전당에도 등재되어 있다. 이후 1956/57 시즌 부로 AS 로마로 이적하였고, 1957/58 시즌까지 뛴 후 현역에서 은퇴했다. 두 팀을 거치면서 291경기에 나서 225골을 터뜨렸고, 현재까지 세리에 A 역대 득점 3위에 랭크되어 있다.
 
 
 
 
 
 
 
 
 
 
 
 
 
 
 
 
 
 
 
 
 
 
 
 
 
 
 
 
 
 
 
 
 
 
 
 
 
 
 
 
 
 
 
 
 
 
 
 
 
 
 
 
 
 
 
 
 
 
 
 
 
 
 
 
 
 
 
 
 
 
 
 
 
 
 
 
 
 
 
 
국가대표로서는 1942년부터 차출되어 1948년까지 뛰었고, 33경기에 나서서 43골을 터뜨리는 등, 경기당 1골을 넘어선 괴물 같은 득점력을 선보였다. 이러한 활약 속에서 1948 런던 올림픽에서는 득점왕과 대회 우승을 동시에 이뤄냈고, 이것이 세리에 A의 AC 밀란으로 이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스웨덴의 규정상, 프로 팀이 소속으로는 국가대표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었고[6], 프로 축구 팀인 AC 밀란으로 이적한 1949년부터는 국가대표로 차출되지 못했고, 1958년 스웨덴 자국에서 개최된 월드컵에서는 활약하지 않아 조국이 준우승하는 것을, 필드 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던 아쉬움이 있다.[7]
 
 
 
 
 
 
 
 
 
 
 
 
 
 
 
 
 
 
 
 
 
 
 
 
 
 
 
 
 
 
 
 
 
 
 
 
 
 
 
 

4. 플레이 스타일[편집]

 
 
 
 
 
 
 
 
 
 
 
 
 
 
 
 
 
 
 
 
 
 
 
 
 
 
 
 
 
 
 
 
 
 
 
 
 
 
 
 


그는 1949년부터 1956년까지 밀란에서 활약하며 공식전 268경기 221골(리그 257경기 210골)을 기록했고, 세리에 A 득점왕(카포카논니에레)을 무려 다섯 차례 차지했다. 특히 경기당 득점률은 오늘날까지도 세리에 A 역사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며, 당시 밀란 공격의 상징이자 1950년대 'Gre-No-Li'[8] 트리오의 핵심이었다.

노르달의 플레이스타일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현대적인 피지컬 스트라이커의 원형原型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화려한 드리블이나 섬세한 발기술로 승부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대신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폭발적인 슈팅, 골문 앞에서의 냉정함을 무기로 수비수를 정면으로 무너뜨리는 유형이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비교하면 엘링 홀란드, 디디에 드록바,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장점을 적절히 섞어 놓은 듯한 스타일에 가까웠으며,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수준의 운동 능력을 갖춘 공격수였다. 이탈리아 축구계에서는 지금도 그를 돌파형 센터포워드(Centravanti di sfondamento)의 원형으로 평가한다.
 
 
 
 
 
 
 
 
 
 
 
 
 
 
 
 
 
 
 
 
 
 
 
 
 
 
 
 
 
 
 
 
 
 
 
 
 
 
 
 
 
 
 
 
 
 
 
 
 
 
 
 
 
 
 
 
 
 
 
 
 
 
 
 
 
 
 
 
 
 
 
 
 
 
 
 
 
 
 
 
노르달의 가장 큰 무기는 단연 압도적인 피지컬이었다. 키는 약 188cm에, 몸무게 90kg으로 현대 기준으로도 준수한 체격에, 상체와 하체 모두 엄청난 근력과 균형 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상대 수비수가 몸을 붙여도 쉽게 밀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몸싸움으로 수비를 떼어낸 뒤 그대로 슈팅까지 연결하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그는 등을 지고 공을 받은 뒤 몸으로 상대를 버텨내는 능력, 소위 말하는 '등딱'이 뛰어났고, 높은 균형감각 덕에 짧은 순간의 방향 전환만으로도 슈팅 각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당시 수비수들은 노르달을 막기 위해 두 명 이상이 달라붙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는 이를 힘과 균형감각으로 극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노르달은 단순히 힘만 좋은 공격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은 순간적인 가속력과 직선적인 스프린트 능력이다. 그는 장거리 드리블러는 아니었지만, 박스 근처에서 공을 잡은 뒤 첫 두세 걸음이 매우 빨랐다. 이 폭발적인 스타트 덕분에 수비수보다 먼저 공간을 선점했고, 일단 앞서 나가면 피지컬까지 활용해 쉽게 공을 빼앗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정적인 타깃맨이라기보다, 공간으로 뛰어들어 힘과 속도를 함께 사용하는 다이내믹한 스트라이커였다.

슈팅 능력은 그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였다. 노르달은 양발 모두 강력한 슈팅을 구사할 수 있었지만 특히 오른발의 위력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슈팅 동작이 크지 않았고, 어떤 자세에서도 강한 임팩트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박스 안에서는 짧은 준비 동작만으로도 골망을 흔들었으며, 박스 밖에서도 강력한 중거리 슈팅으로 골을 만들어냈다. 그의 슈팅은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우 낮고 빠르게 깔리는 경우가 많아 골키퍼가 반응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뛰어난 헤딩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크로스 상황에서도 절대적인 위협이었다. 힘, 타점, 타이밍이 모두 뛰어나 공중볼에서도 상대 수비를 압도했다.

골 결정력은 말 그대로 전설적인 수준이었다. 그는 복잡한 기술보다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하는 공격수였다. 박스 안에서는 불필요한 터치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공이 오는 순간 즉시 슈팅으로 연결했다. 또한 골문 앞에서의 위치 선정이 매우 뛰어나 세컨드 볼과 흘러나오는 공에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오늘날 포처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선수 중 한 명이었지만, 단순히 박스 안에서만 기다리는 공격수는 아니었다. 필요할 때는 직접 수비를 등지고 공을 받아 공격의 출발점 역할도 수행했다.

그의 전술적인 가치 역시 상당히 높았다. 당시 밀란은 군나르 그렌닐스 리드홀름이라는 뛰어난 창조형 플레이메이커 선수들이 공격의 템포를 조율했고, 노르달은 그들이 만들어낸 기회를 가장 확실하게 마무리하는 피니셔의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단순한 마무리만 담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수비수를 끌어내는 디코이 런을 통해 공간을 만들었고, 자신의 강한 피지컬을 이용해 동료들에게 패스 길을 열어주는 플레이도 자주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레놀리' 트리오는 단순히 개인 기량이 뛰어난 세 선수의 조합이 아니라, 역할 분담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공격 조합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1949-50시즌 밀란은 리그 118골이라는 당시 세리에 A 기록을 세웠는데, 노르달은 그 중심에서 35골을 기록하며 공격을 이끌었다.

노르달의 또 다른 강점은 정신력이었다. 그는 몸싸움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레슬링 급의 거친 수비가 일상이던 1950년대 세리에 A에서도 끝까지 골을 노렸다. 상대 수비와의 충돌을 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더욱 강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투지와 집중력은 중요한 경기일수록 더욱 빛났고, 밀란 팬들이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약점도 존재했다. 노르달은 뛰어난 드리블러는 아니었다. 좁은 공간에서 여러 명을 연속으로 제치는 유형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화려한 개인기나 창조적인 패스 능력도 최고 수준은 아니었다. 또한 활동 범위가 매우 넓은 현대식 폴스 나인과 같은 선수도 아니었다. 그는 공격 전개를 위해 중원까지 깊게 내려오기보다는 상대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전형적인 센터 포워드였다. 따라서 팀이 그에게 적절한 패스를 공급하지 못하면 영향력이 다소 감소하고, 덩달아 존재감도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일단 공이 위험 지역에 도달하는 순간에는 누구보다도 치명적인 존재가 되었다. 일단 그것만으로 1인분어치 적립
 
 
 
 
 
 
 
 
 
 
 
 
 
 
 
 
 
 
 
 
 
 
 
 
 
 
 
 
 
 
 
 
 
 
 
 
 
 
 
 
 
 
 
 
 
 
 
 
 
 
 
 
 
 
 
 
 
 
 
 
 
 
 
 
 
 
 
 
 
 
 
 
 
 
 
 
 
 
 
 
종합하면 군나르 노르달은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스트라이커도, 박스 안에서만 기다리는 골잡이도 아니었다. 그는 압도적인 피지컬, 뛰어난 순간 가속력, 강력한 슈팅, 정확한 위치 선정, 그리고 높은 득점 감각을 모두 갖춘 완성형 센터 포워드이자 파워 포워드였다. 오늘날 축구에서는 홀란드의 폭발력과 드록바의 피지컬, 비에리의 골 결정력을 연상시키는 요소를 동시에 갖춘 선수로 비유할 수 있으며, 현대 축구에 등장했더라도 정상급 스트라이커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공격수였다. 특히 AC 밀란 역사에서 그는 단순히 많은 골을 넣은 선수가 아니라, 센터 포워드라는 포지션의 교과서를 제시한 선수이자 이후 수십 년간 밀란의 모든 스트라이커들의 비교 대상이 될 만큼 상징적인 존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5. 기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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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국적
1
Gunnar Nordahl
스웨덴 국기
221
2
Andriy Shevchenko
우크라이나 국기
175
3
Gianni Rivera
이탈리아 국기
164
4
José Altafini
이탈리아 국기
161
5
Aldo Boffi
이탈리아 국기
136
6
Filippo Inzaghi
이탈리아 국기
126
7
Marco van Basten
네덜란드 국기
125
8
Giuseppe Santagostino
이탈리아 국기
106
9
Kaká
브라질 국기
104
10
Pierino Prati
이탈리아 국기
102
 
 
 
 
 
 
 
 
 
 
 
 
 
 
 
 
 
 
 
 
 
 
 
 
 
 
 
 
 
 
 
 
 
 
 
 
 
 
 
 
 
 
 
 
 
 
 
 
 
 
 
 
 
 
 
 
 
 
 
 
 
 
 
 
 
 
 
 
 
 
 
 
  • 1948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
 
 
 
 
 
 
 
 
 
 
 
 
 
 
 
 
 
 
 
 
 
 
 
 
 
 
 
 
 
 
 
 
 
 
 
 
 
 
 
 

5.4. 주요 개인 수상[편집]

 
 
 
 
 
 
 
 
 
 
 
 
 
 
 
 
 
 
 
 
 
 
 
 
 
 
 
 
 
 
 
 
 
 
 
 
 
 
 
 
  • 스웨덴 알스벤스칸 득점왕 5회
  • 이탈리아 세리에 A 득점왕 5회
  • 1947년 스웨덴 올해의 선수
  • 1948년 런던 올림픽 득점왕
  • AC 밀란 명예의 전당
 
 
 
 
 
 
 
 
 
 
 
 
 
 
 
 
 
 
 
 
 
 
 
 
 
 
 
 
 
 
 
 
 
 
 
 
 
 
 
 
[1] 대표팀 역대 득점 3위.[2] 291경기 225골. 1위는 실비오 피올라, 2위는 프란체스코 토티 [3] 35골[4] 1949년부터 1957년까지 개최된 대회로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프로팀이 1팀씩 출전해서 겨루는 방식이었는데 챔피언스 리그가 출범하기 전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던 유럽 대항전 대회였다.[5] 그가 떠난 이후 AC 밀란이 1957/58 시즌에 유로피언 컵 결승까지 진출하여 준우승을 이뤄냈던 점을 생각해 보면, 그가 조금만 더 AC 밀란에 남아있었더라면 최소 준우승은 경험했을 가능성이 높다.[6] 1948년에 그가 뛰었던 스웨덴 리그는 아마추어 리그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올림픽 출전이 가능했다.[7] 다만 군나르 그렌, 닐스 리드홀름 등 그의 스웨덴 국가대표 동료들은, 군나르 노르달과 같은 세리에 A의 AC 밀란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58 스웨덴 월드컵에 참가하여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이 두 선수는 프로 축구 팀인 세리에 A의 AC 밀란에서 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로 차출되었는데, 이는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이 너무 약체화된 것에 위기감을 느낀 스웨덴 축구 협회의 규정 변경을 통한 것이었다. 참고로 군나르 그렌은 1958년 당시 스웨덴 2부리그에서 뛰고 있었다.[8] 그레놀리, '그렌-노르달-리드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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