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지 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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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 리바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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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 리바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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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前 축구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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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이지 리바 Luigi Riva | ||
출생 | |||
이탈리아 왕국 레지우노 | |||
사망 | |||
국적 | |||
신체 | |||
주발 | 왼발 | ||
직업 | |||
소속팀 | |||
행정가 | |||
국가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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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63 시즌 3부 리그 소속의 레냐노에서 프로로 데뷔했으며 어린 나이임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줘 1년만에 칼리아리 칼초로 이적했다. 당시 2부 리그 소속이었던 칼리아리에서 리바는 주전 공격수로 나서며 팀의 승격을 이끌었고 세리에 A에서 첫 시즌 32경기 9골을 넣으며 존재감을 알렸다. 리바는 1975-76 시즌 은퇴하기 전까지 칼리아리에서만 활약했으며 비교적 약팀에 불과했던 칼리아리에서 득점왕을 4차례나 차지했다.
1968-69 시즌 리그에서만 20골을 작렬한 리바는 팀을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인 2위에 안착시켰다. 이어지는1969-70 시즌 21골로 득점왕을 차지한 리바와 30경기에서 11골만을 허용한 짠물 수비로 칼리아리는 구단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1970년 거함 유벤투스가 리바의 영입을 원했으나 본인이 거절했고 1975-76 시즌 밀란과의 경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칼리아리 자체가 워낙에 별볼일이 없는 클럽이기 때문에 칼리아리에서만 헌신한 리바의 클럽 커리어 역시 다른 역대급 공격수들에 비해 초라한 편이다.[4]
1968-69 시즌 리그에서만 20골을 작렬한 리바는 팀을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인 2위에 안착시켰다. 이어지는1969-70 시즌 21골로 득점왕을 차지한 리바와 30경기에서 11골만을 허용한 짠물 수비로 칼리아리는 구단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1970년 거함 유벤투스가 리바의 영입을 원했으나 본인이 거절했고 1975-76 시즌 밀란과의 경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칼리아리 자체가 워낙에 별볼일이 없는 클럽이기 때문에 칼리아리에서만 헌신한 리바의 클럽 커리어 역시 다른 역대급 공격수들에 비해 초라한 편이다.[4]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상위 호환격인 선수로 강력한 왼발 피니시가 주무기였다. 거기에 오른발도 못쓰는 편은 아니었고 몸싸움, 헤더 능력, 슈팅 테크닉 등 뭐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공격수였다. 거기에 주력까지 빠르니 수비수들 입장에서는 공포의 대상. 괜히 천둥번개란 별명을 가진게 아니다.
은퇴 이후 칼리아리의 경영진에 합류했고 2006 독일 월드컵 때는 이탈리아 대표팀 기술 고문을 맡기도 했다.
2005년 은퇴한지 30년이 지난 시점, 칼리아리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던 리바를 기리기 위해 그가 현역 시절 달았던 등번호인 11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6]
2019년부터는 새로이 팀을 인수한 톰마소 지울리니 회장에 의해 명예 회장으로 선임되며 구단 레전드에 걸맞은 대우를 받고 있다.
2005년 은퇴한지 30년이 지난 시점, 칼리아리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던 리바를 기리기 위해 그가 현역 시절 달았던 등번호인 11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6]
2019년부터는 새로이 팀을 인수한 톰마소 지울리니 회장에 의해 명예 회장으로 선임되며 구단 레전드에 걸맞은 대우를 받고 있다.
- 세리에 A: 1969-70
- 발롱도르 2위: 1969; 3위: 1970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68
- 세리에 A 득점왕: 1966-67, 1968-69, 1969-70, 1972-73
-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1964-65, 1968-69, 1969-70
- 월드 사커 월드 XI: 1971
- FUWO 유럽 올해의 팀: 1969, 1970
- Sport Ideal 유럽 XI: 1973
- 골든풋: 2005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1
- 이탈리아 스포츠 명예의 전당: 2015
- 칼리아리 칼초 명예의 전당
- 칼리아리 칼초 올타임 XI
- 글로브 사커 어워즈 특별 공로상: 2024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3등급: 1991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2등급: 2000
[1] 윙어 , 세컨드 스트라이커 도 가능하다[2]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3] 그의 등번호 11번은 구단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4] 그나마 함부르크 SV에서만 뛴 우베 젤러 정도가 우승이 거의 없음에도 역대급 공격수 취급을 받는다.[5] 이마저 다른 강팀의 최고 득점자가 기본적으로 50골 이상 기록한 것에 비해서 턱없이 모자란다. 이 기록은 월드컵 진출 3회 이하(없으면 볼드체)인 유럽 팀 중에서 슬로베니아의 즐라트코 자호비치, 이스라엘의 에란 자하비와 동률이고, 몰타의 마이클 미프수드(42),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에딘 제코(74), 북마케도니아의 고란 판데프(38), 북아일랜드의 데이비드 힐리(36), 아일랜드의 로비 킨(68), 에스토니아의 안드레스 오페르(38), 우크라이나의 안드리 셰브첸코(48), 웨일스의 가레스 베일(41), 튀르키예의 하칸 쉬퀴르(51), 핀란드의 테무 푸키(43)보다 낮은 기록이다. 수비가 특징인 이탈리아 축구 특성 상 고득점 경기가 거의 없고 뚜렷한 판타지스타가 부재한 탓이 크다.[6] 인테르의 전설적인 선수인 자친토 파케티의 등번호 3번도 구단주였던 그가 사망한 이후 결번처리 되었다.[7] 유로 1968 예선-키프러스전 해트트릭, 1970년 월드컵 예선-웨일스전 해트트릭, 1974년 월드컵 예선-룩셈부르크전 4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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