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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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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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능파각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유형문화유산) |
통일신라 경덕왕 치세인 742년에 3명의 신성한 승려가 창건하고,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문의 개산조[4] '혜철국사(慧徹國師)'가 머물렀다. 혜철이 태안사에 머무르던 846년에 도선국사가 그의 밑에서 수학하며 명성을 얻기도 했다.
이후 고려 태조 때에 이르러 그의 제자이자 동리산문의 제3조[5]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가 태안사를 132칸의 대형사찰로 중창하고[6] 동리산문의 본산으로 삼으면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때는 화엄사, 송광사 등 전남광주통합특별시의 내로라하는 사찰들이 모두 태안사의 말사로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송광사가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불교개혁운동의 일종인 '수선사(修禪社) 결사운동'의 중심사찰이 되어 태안사의 아래에서 떨어져 나가자 점차 쇠락하기 시작한다. 고려 고종 때인 1223년에는 당시 집권자 최우의 지원 아래 절을 중수했다.
조선 초에 들어서는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물렀고 그 덕에 효령대군의 원당[7]이 되어 조정의 지원을 받았다. 때문에 숭유억불 기조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문제없이 절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숙종 때인 1683년 정심(定心)스님이 다시금 절을 중창하였고, 1684년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으며, 1737년에는 절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능파각이 지어졌다.
6.25 전쟁 때는 빨치산 토벌의 중심지가 되는 바람에 전쟁의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국군의 방화로 인해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 15채가 불타버리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며, 현재의 전각 상당수는 중창불사를 통해 복구한 것이다. #
이후 고려 태조 때에 이르러 그의 제자이자 동리산문의 제3조[5]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가 태안사를 132칸의 대형사찰로 중창하고[6] 동리산문의 본산으로 삼으면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때는 화엄사, 송광사 등 전남광주통합특별시의 내로라하는 사찰들이 모두 태안사의 말사로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송광사가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불교개혁운동의 일종인 '수선사(修禪社) 결사운동'의 중심사찰이 되어 태안사의 아래에서 떨어져 나가자 점차 쇠락하기 시작한다. 고려 고종 때인 1223년에는 당시 집권자 최우의 지원 아래 절을 중수했다.
조선 초에 들어서는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물렀고 그 덕에 효령대군의 원당[7]이 되어 조정의 지원을 받았다. 때문에 숭유억불 기조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문제없이 절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숙종 때인 1683년 정심(定心)스님이 다시금 절을 중창하였고, 1684년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으며, 1737년에는 절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능파각이 지어졌다.
6.25 전쟁 때는 빨치산 토벌의 중심지가 되는 바람에 전쟁의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국군의 방화로 인해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 15채가 불타버리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며, 현재의 전각 상당수는 중창불사를 통해 복구한 것이다. #
-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 - 대한민국 국보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 - 대한민국 보물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대한민국 보물
- 곡성 태안사 청동 대바라 - 대한민국 보물
- 곡성 태안사 동종 - 대한민국 보물
- 태안사능파각 -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시도유형문화유산
- 태안사일주문 -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시도유형문화유산
- 태안사삼층석탑 -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문화유산자료
- 태안사 -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문화유산자료
- 원각선원 - 금강선원이라고도 한다. 1900년대 초 경허스님이 개원했으나 6.25 때 파괴되었다가 1972년 범룡스님이 재건하여 수행처로 쓰이고 있다.
- 봉서암
- 성기암
- 명적암
- 봉천암
- 가은암
- 금선암
- 삼일암
- 도현암
- 1925년에 육당 최남선이 다녀가며 “신라 이래의 이름 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서 선종(禪宗)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 같다." 라면서 극찬한 곳이다.
- 1908년 태안사의 승려 정봉체(鄭奉替)는 근처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신정우에게 군자금을 모집해 전달해 준 적이 있다.
- 절 입구 근처에는 한국전쟁 당시 태안사 인근에서 북한군과 교전하다 전사한 경찰들을 추모하는 충혼탑이 있다. 1950년 8월 6일 당시 곡성경찰서의 임시 주둔지였던 태안사를 북한군 1개 연대가 포위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때 남제평 경감이 이끄는 47명의 경찰들이 이들을 맞이하여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전원이 산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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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3]⠀
⠀[목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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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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