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홍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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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本紀)]
※ 48권 ~ 105권은 志에 해당. 106권 ~ 113권은 表에 해당. 원사 문서 참고 [열전(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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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 원나라의 명장 회양헌무왕(淮陽獻武王) 장홍범(張弘範) | ||
작호 | 회양왕(淮陽王) | |
시호 | 헌무(獻武) | |
본관 | 순천(順天) 장씨 | |
이름 | 홍범(弘範) | |
자 | 중주(仲疇) | |
생몰년 | 1238년 ~ 1280년 | |
출신지 | ||
장홍범이 20살이었을 때, 순천로(順天路)를 다스리고 있던 그의 형 장홍략(張弘略)은 한창 남송 정벌을 준비하고 있던 몽케 칸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장홍범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순천로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에 따라 장홍범이 명확한 판결과 엄격한 질서를 바탕으로 순천로를 다스리니 순천로의 사람들이 그에게 모두 복종하였다고 전해진다.
1262년 2월, 산동(山東) 중남부 일대를 다스리던 한인 군벌 이단(李璮)이 반란을 일으켜서 제남(濟南)을 탈취하자 장홍범은 행군총관(行軍總官)으로서 친왕(親王) 카비치(合必赤)가 이끄는 토벌군에 종군하였다.
이때 그는 제남성의 서쪽 언덕에 군영을 설치하였는데, 이단이 군대를 보내서 토벌군의 다른 장수들이 세운 군영들을 공격해왔지만 장홍범의 군영은 지세가 험하고 군사들의 수도 적었으므로 공격받지 않았다. 이에 장홍범이 군사들을 시켜서 보루를 쌓고 밤중에 몰래 해자를 깊게 파서 함정을 만들었다.
과연 다음날이 되자 이단이 군대를 보내서 장홍범이 쌓은 보루를 공격해왔으나 그들은 대부분이 보루를 공격하기도 전에 해자에 빠져버렸고, 해자에서 겨우 빠져나온 반란군들은 열려져 있는 보루의 동문으로 돌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문으로 들어오자마자 장홍범의 복병에 전멸당하였고, 그들을 이끌던 두 장수도 장홍범에게 생포되었다.
1262년 2월, 산동(山東) 중남부 일대를 다스리던 한인 군벌 이단(李璮)이 반란을 일으켜서 제남(濟南)을 탈취하자 장홍범은 행군총관(行軍總官)으로서 친왕(親王) 카비치(合必赤)가 이끄는 토벌군에 종군하였다.
이때 그는 제남성의 서쪽 언덕에 군영을 설치하였는데, 이단이 군대를 보내서 토벌군의 다른 장수들이 세운 군영들을 공격해왔지만 장홍범의 군영은 지세가 험하고 군사들의 수도 적었으므로 공격받지 않았다. 이에 장홍범이 군사들을 시켜서 보루를 쌓고 밤중에 몰래 해자를 깊게 파서 함정을 만들었다.
과연 다음날이 되자 이단이 군대를 보내서 장홍범이 쌓은 보루를 공격해왔으나 그들은 대부분이 보루를 공격하기도 전에 해자에 빠져버렸고, 해자에서 겨우 빠져나온 반란군들은 열려져 있는 보루의 동문으로 돌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문으로 들어오자마자 장홍범의 복병에 전멸당하였고, 그들을 이끌던 두 장수도 장홍범에게 생포되었다.
이단이 토벌당한 후에 몽골 조정에서는 이단의 반란을 징계하기 위해 다른 한인 제후들의 세력을 축소시키려고 하였는데, 그 방법의 일환으로 조정에서 한인 대번(大番)들의 자제들과 관련자들의 관직을 박탈하였다. 그러나 장유가 대번이었으므로 장홍범은 장홍략과 함께 징계 대상자가 되어서 관직과 병권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장홍략 형제의 남다른 능력과 공적을 아까워했던 쿠빌라이 칸이 두 사람을 다시 기용하려 하였고, 결국 징계가 행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264년에 형제가 나란히 조정으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장홍범은 순천로관민총관(順天路管民總管)에 임명되었고, 금호부(金虎符)를 하사받아 패용하였다.
1265년, 관직이 대명총관(大名總管)으로 옮겨지니 그에 따라 장홍범이 대명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가 부임하였을 때 대명에서 큰 홍수가 발생하여 민가의 대부분이 파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게 되자 장홍범은 임의로 백성들의 세금을 면제하였지만 조정의 고관들 중에 그의 행동을 전횡(專橫)으로 여기고 고발한 자가 있었다.
결국 장홍범은 조정으로 소환되었고, 조정 대신들은 그의 처벌을 논하였으나 그는 당당한 태도로 쿠빌라이 칸에게 알현을 요청하였다. 쿠빌라이 칸이 요청을 들어주자 장홍범은 관청의 창고가 턱없이 작은 규모인 것과 대명 백성들의 열악한 상황을 이유로 들면서 해명하였고, 이를 납득한 쿠빌라이 칸은 조정 대신들의 뜻을 꺾고 일을 불문에 부쳤다.
그러나 장홍략 형제의 남다른 능력과 공적을 아까워했던 쿠빌라이 칸이 두 사람을 다시 기용하려 하였고, 결국 징계가 행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264년에 형제가 나란히 조정으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장홍범은 순천로관민총관(順天路管民總管)에 임명되었고, 금호부(金虎符)를 하사받아 패용하였다.
1265년, 관직이 대명총관(大名總管)으로 옮겨지니 그에 따라 장홍범이 대명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가 부임하였을 때 대명에서 큰 홍수가 발생하여 민가의 대부분이 파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게 되자 장홍범은 임의로 백성들의 세금을 면제하였지만 조정의 고관들 중에 그의 행동을 전횡(專橫)으로 여기고 고발한 자가 있었다.
결국 장홍범은 조정으로 소환되었고, 조정 대신들은 그의 처벌을 논하였으나 그는 당당한 태도로 쿠빌라이 칸에게 알현을 요청하였다. 쿠빌라이 칸이 요청을 들어주자 장홍범은 관청의 창고가 턱없이 작은 규모인 것과 대명 백성들의 열악한 상황을 이유로 들면서 해명하였고, 이를 납득한 쿠빌라이 칸은 조정 대신들의 뜻을 꺾고 일을 불문에 부쳤다.
* 해당 전쟁에 대해 더욱 상세히 알고 싶다면 양양 공방전 문서를 참조할 것
1268년, 몽골 제국의 대군이 양양(襄陽)을 공격하자 그 이듬해에 쿠빌라이 칸이 조서를 내려서 장홍범의 관직을 익도치내등로행군만호(益都淄萊等路行軍萬戶)로 바꾸었고, 그에게 양양 공격에 합류할 것을 명령하였다.
양양에 도착한 장홍범은 몽골군의 총대장 아술(阿術)에게 계책을 바치는 한편 1천 군사를 이끌고 만산(萬山)에 요새를 쌓았으며, 요새를 쌓은 직후에 양양 방면에서 남송군이 공격해오자 그들을 격퇴하였다.
1271년, 장홍범은 일자성(一字城)을 축조하여 양양과 번성(樊城)을 잇는 통로를 차단하였고, 번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그 외성(外城)을 파괴하였다. 그로부터 1년 남짓이 지난 1273년 1월, 장홍범이 몽골군의 선두에서 정예병들을 이끌고 번성의 내성(內城)을 공격하였고, 결국 번성이 함락되었다. 그 후 채 1달도 지나지 않아서 양양의 수장(守將) 여문환(呂文煥)이 성을 바치고 투항해오니 마침내 양양도 무너졌다.
1268년, 몽골 제국의 대군이 양양(襄陽)을 공격하자 그 이듬해에 쿠빌라이 칸이 조서를 내려서 장홍범의 관직을 익도치내등로행군만호(益都淄萊等路行軍萬戶)로 바꾸었고, 그에게 양양 공격에 합류할 것을 명령하였다.
양양에 도착한 장홍범은 몽골군의 총대장 아술(阿術)에게 계책을 바치는 한편 1천 군사를 이끌고 만산(萬山)에 요새를 쌓았으며, 요새를 쌓은 직후에 양양 방면에서 남송군이 공격해오자 그들을 격퇴하였다.
1271년, 장홍범은 일자성(一字城)을 축조하여 양양과 번성(樊城)을 잇는 통로를 차단하였고, 번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그 외성(外城)을 파괴하였다. 그로부터 1년 남짓이 지난 1273년 1월, 장홍범이 몽골군의 선두에서 정예병들을 이끌고 번성의 내성(內城)을 공격하였고, 결국 번성이 함락되었다. 그 후 채 1달도 지나지 않아서 양양의 수장(守將) 여문환(呂文煥)이 성을 바치고 투항해오니 마침내 양양도 무너졌다.
1274년 가을 9월, 쿠빌라이 칸이 백안(伯顔)을 정벌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20만 대군을 내어주면서 양양에서부터 진격하게 하니 장홍범은 정벌군의 좌익(左翼)에 배속되었으며, 군대를 이끌고 영서(郢西)와 무기보(武磯堡)[3]를 공격하였다.
1275년 2월, 백안이 정가주(丁家洲)[4]에서 남송의 승상 가사도(賈似道)와 큰 전투를 벌이게 되자 장홍범은 백안의 선봉장이 되어 선두에서 싸웠다. 결국 가사도가 격파당하자 백안의 정벌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였고, 2월 말에는 건강부(建康府)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동년 여름, 과주(瓜洲)[5]에 주둔하면서 양자교(揚子橋)를 건너 공격해온 남송군의 장수 강재(姜才)를 패배시켰고, 강재의 부하 장수와 단기접전을 벌여서 그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 후에는 초산(焦山)[6]에 주둔한 장세걸(張世傑), 손호신(孫虎臣)이 이끄는 남송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남송군의 측면을 습격하여 승리에 공헌하였다. 또한 장홍범은 장세걸 등이 패주하자 그들을 추격해서 남송군의 전투선 80여 척을 탈취하였으며, 남송군 수천 명을 참수하고 그들의 귀를 잘라내어 상부(上府)에 바쳤다.
그의 전공들이 조정에 보고되자 쿠빌라이 칸이 그에게 박주만호(亳州萬戶)의 관직과 바토르[7]라는 별칭을 하사하였다.
1276년 봄, 장홍범은 정벌군의 다른 장수 동문병(董文炳)을 따라 백안의 군대에 합류하여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에 이르렀고, 공제(恭帝)가 항복의 글을 보내오자 백안과 함께 임안 도성(都城)에 입성하여 아직까지 항복의사를 밝히지 않은 남송 조정의 대신들을 책망하고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1275년 2월, 백안이 정가주(丁家洲)[4]에서 남송의 승상 가사도(賈似道)와 큰 전투를 벌이게 되자 장홍범은 백안의 선봉장이 되어 선두에서 싸웠다. 결국 가사도가 격파당하자 백안의 정벌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였고, 2월 말에는 건강부(建康府)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동년 여름, 과주(瓜洲)[5]에 주둔하면서 양자교(揚子橋)를 건너 공격해온 남송군의 장수 강재(姜才)를 패배시켰고, 강재의 부하 장수와 단기접전을 벌여서 그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 후에는 초산(焦山)[6]에 주둔한 장세걸(張世傑), 손호신(孫虎臣)이 이끄는 남송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남송군의 측면을 습격하여 승리에 공헌하였다. 또한 장홍범은 장세걸 등이 패주하자 그들을 추격해서 남송군의 전투선 80여 척을 탈취하였으며, 남송군 수천 명을 참수하고 그들의 귀를 잘라내어 상부(上府)에 바쳤다.
그의 전공들이 조정에 보고되자 쿠빌라이 칸이 그에게 박주만호(亳州萬戶)의 관직과 바토르[7]라는 별칭을 하사하였다.
1276년 봄, 장홍범은 정벌군의 다른 장수 동문병(董文炳)을 따라 백안의 군대에 합류하여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에 이르렀고, 공제(恭帝)가 항복의 글을 보내오자 백안과 함께 임안 도성(都城)에 입성하여 아직까지 항복의사를 밝히지 않은 남송 조정의 대신들을 책망하고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백안의 정벌군이 임안을 완전히 점령하였음에도 장세걸, 육수부(陸秀夫) 등은 송단종을 황제로 옹립하고 남쪽으로 근거지를 옮겼으며, 원나라의 통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 무렵에 장홍범은 태주(台州)[8]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였고, 다음 해가 되자 귀환하였다. 쿠빌라이 칸은 장홍범을 진국상장군(鎮國上將軍), 강동도선위사(江東道宣慰使)로 승진시키는 한편 그를 다시 강남으로 파견하여 남송 세력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게 하였다.
1278년, 송단종이 죽었음에도 장세걸 등이 단종의 동생 송소제를 옹립하고 저항을 이어갔던데다 민(閩), 광(廣) 일대를 계속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쿠빌라이 칸은 그들을 완전히 격멸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장홍범이 몽고한군도원수(蒙古漢軍都元帥)에 임명되니 그는 양주(揚州)로 부임하여 군사 2만을 선발하였고, 이항(李恒)을 부원수(副元帥)로, 동생 장홍정(張弘正)을 선봉장으로 삼아서 군대를 편성한 후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는 삼강채(三江寨, 요새 이름), 장주(漳州) 등지의 전투들에서 모두 승리를 거듭하여 민, 광 일대를 석권하였고, 동년 12월에는 오파령(五坡嶺)[9]으로 군대를 보내서 문천상(文天祥)의 군대를 패배시키고 그를 사로잡았다. 처음에 장홍범은 문천상에게 좋은 말로 항복을 권했지만 문천상이 듣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시켜서 그를 대도(大都)로 보내었다.
또한 장홍범은 남송의 예부시랑 등광천(鄧光薦)도 붙잡았는데, 그가 물에 투신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자 그를 말리면서 예의를 다하여 대접하였고, 아들 장규(張珪)를 불러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이 무렵에 장홍범은 태주(台州)[8]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였고, 다음 해가 되자 귀환하였다. 쿠빌라이 칸은 장홍범을 진국상장군(鎮國上將軍), 강동도선위사(江東道宣慰使)로 승진시키는 한편 그를 다시 강남으로 파견하여 남송 세력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게 하였다.
1278년, 송단종이 죽었음에도 장세걸 등이 단종의 동생 송소제를 옹립하고 저항을 이어갔던데다 민(閩), 광(廣) 일대를 계속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쿠빌라이 칸은 그들을 완전히 격멸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장홍범이 몽고한군도원수(蒙古漢軍都元帥)에 임명되니 그는 양주(揚州)로 부임하여 군사 2만을 선발하였고, 이항(李恒)을 부원수(副元帥)로, 동생 장홍정(張弘正)을 선봉장으로 삼아서 군대를 편성한 후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는 삼강채(三江寨, 요새 이름), 장주(漳州) 등지의 전투들에서 모두 승리를 거듭하여 민, 광 일대를 석권하였고, 동년 12월에는 오파령(五坡嶺)[9]으로 군대를 보내서 문천상(文天祥)의 군대를 패배시키고 그를 사로잡았다. 처음에 장홍범은 문천상에게 좋은 말로 항복을 권했지만 문천상이 듣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시켜서 그를 대도(大都)로 보내었다.
또한 장홍범은 남송의 예부시랑 등광천(鄧光薦)도 붙잡았는데, 그가 물에 투신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자 그를 말리면서 예의를 다하여 대접하였고, 아들 장규(張珪)를 불러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 해당 전투에 대해 더욱 상세히 알고 싶다면 애산 전투 문서를 참조할 것
1279년 1월, 포로로 잡은 남송의 장수들을 통해서 송소제의 위치를 파악한 장홍범은 애산(崖山)[10]으로 향하였으며, 그곳의 지리와 남송군의 형세를 파악하자마자 재빨리 군대를 돌려서 애산의 남쪽 입구를 봉쇄하였다. 또한 애산의 육로에는 기병들을 두어서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버리니 남송군은 철저히 고립되어서 물자와 식수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장홍범의 부대 내에 장세걸의 생질이 있었으므로 장홍범이 세 번에 걸쳐 장세걸에게 글을 보내 항복을 권했지만 장세걸이 모두 듣지 않으니 마침내 결전을 치를 준비를 하였다.
1월 26일, 부원수 이항이 5천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자 장홍범이 그에게 애산의 북쪽을 막게 하니 남송군이 완전히 포위되었고, 2월 6일에 진열을 갖춘 장홍범이 일제히 부대들을 공격을 가하자 20여만에 달하던 남송군이 전멸되었다. 송소제는 육수부와 함께 바다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남송군의 수뇌부 대부분과 고관 및 귀족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르니 이로써 남송이 완전히 멸망하였다.
남송군의 중심이던 장세걸은 최후의 돌파를 감행하여 포위를 뚫고 애산의 남쪽으로 달아나는 데 성공하였지만 그는 태풍을 만나는 바람에 전함이 침몰하면서 익사하였고, 그를 따랐다가 살아남은 소수의 관리들은 모두 장홍범에게 투항하였다.
이렇게 남송을 평정한 장홍범은 애산에서 큰 바위를 찾은 후 그 바위의 표면에 [11] 그가 세운 업적을 새기고[12][13]귀환하였다.
1279년 1월, 포로로 잡은 남송의 장수들을 통해서 송소제의 위치를 파악한 장홍범은 애산(崖山)[10]으로 향하였으며, 그곳의 지리와 남송군의 형세를 파악하자마자 재빨리 군대를 돌려서 애산의 남쪽 입구를 봉쇄하였다. 또한 애산의 육로에는 기병들을 두어서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버리니 남송군은 철저히 고립되어서 물자와 식수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장홍범의 부대 내에 장세걸의 생질이 있었으므로 장홍범이 세 번에 걸쳐 장세걸에게 글을 보내 항복을 권했지만 장세걸이 모두 듣지 않으니 마침내 결전을 치를 준비를 하였다.
1월 26일, 부원수 이항이 5천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자 장홍범이 그에게 애산의 북쪽을 막게 하니 남송군이 완전히 포위되었고, 2월 6일에 진열을 갖춘 장홍범이 일제히 부대들을 공격을 가하자 20여만에 달하던 남송군이 전멸되었다. 송소제는 육수부와 함께 바다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남송군의 수뇌부 대부분과 고관 및 귀족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르니 이로써 남송이 완전히 멸망하였다.
남송군의 중심이던 장세걸은 최후의 돌파를 감행하여 포위를 뚫고 애산의 남쪽으로 달아나는 데 성공하였지만 그는 태풍을 만나는 바람에 전함이 침몰하면서 익사하였고, 그를 따랐다가 살아남은 소수의 관리들은 모두 장홍범에게 투항하였다.
이렇게 남송을 평정한 장홍범은 애산에서 큰 바위를 찾은 후 그 바위의 표면에 [11] 그가 세운 업적을 새기고[12][13]귀환하였다.
[1] 중국 화북지역의 고대 행정구역으로 수나라 때 설치되었으며, 청나라가 망한 후에 폐지되었다. 오늘날의 허베이성(河北省) 바오딩시(保定市) 딩싱현(定興縣), 라이수이현(淶水縣), 룽청현(容城縣), 이현(易縣), 쉬수이구(徐水區), 만청구(滿城區) 일대와 산시성(陝西省) 웨이난시(渭南市) 푸청현(蒲城縣) 지역에 해당된다.[2] 오늘날의 허베이성 바오딩시 딩싱현[3] 장강의 중류를 방어하는 주요 거점으로, 다른 명칭은 양라보(陽邏堡)이다. 성이 있던 위치는 오늘날 후베이성(湖北省) 우한시(武漢市) 신저우구(新洲區) 양루오가도(陽邏街道)이다.[4] 오늘날의 안후이성(安徽省) 퉁링시(銅陵市) 동북부 지역. 퉁링시의 중심지에서 20km 가량 떨어져 있다.[5] 오늘날의 장쑤성(江蘇省) 양저우시(揚州市) 한장구(邗江區) 과저우진(瓜洲鎭)[6] 장쑤성 전장시(鎭江市) 룬저우구(潤州區)에 있는 산이다.[7] 몽골어로 '영웅', '용사'의 의미이다. 한자 표기로는 '발도(拔都)', '발도로(拔都魯)'[8] 오늘날의 저장성(浙江省) 타이저우시(台州市)[9] 광둥성(廣東省) 산웨이시(汕尾市) 하이펑현(海豊縣) 북부에 위치한 산이다.[10] 오늘날의 광둥성 장먼시(江門市) 야먼진(崖門鎭)[11] 그가 새긴 글귀는 진국대장군장홍범멸송어차(鎮國大將軍張弘範滅宋於此, '진국대장군 장홍범이 이 곳에서 송나라를 멸망시켰다'라는 의미이다.)라고 전해지나 당시 장홍범의 관직은 진국상장군이었으므로 해당 글귀는 사소한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12] 진국대장군 장홍범이 이 곳에서 송나라를 멸망시켰다'라는 의미이다.[13] 또 다른 사람은 후대의 누군가가 장홍범의 학살을 비아냥거릴 목적으로 송나라를 의미하는 송(宋)자를 맨 앞에 덧붙여서 송진국대장군장홍범멸송어차'(宋鎮國大將軍張弘範滅宋於此, '송나라의 진국대장군 장홍범이 이 곳에서 송나라를 멸망시켰다'라는 의미이다.)가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에는 이를 확인할 수 없다.[14] 종1품[15] 종1품[16] 처음에는 일본 제국에 협력한 한족 인물들을 지칭하는 용어였지만 현대에는 반(反)한족적 행위를 한 한족 인물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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